소설리스트

여전사 벳시아-9화 (9/16)
  • 9.

    사이먼은 좌절감과 분노를 안고 배더슬리로 돌아왔다. 늦은 시각이라 성문은 닫혀 있었지만 보초가 문을 열어 주었다. 하지만 횃불을 들고 이상하다는 시선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병사들을 본 순간 사이먼은 밤에 혼자 말을 타고 나간 자신이 미친 사람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멋대로 생각하라지, 사이먼은 속으로 생각했다. 홀에 들어서자 플로리안이 마치 강보에 싸인 어린아이가 돌아온 것처럼 호들갑을 떨며 그를 맞이했다. 그 모습을 본 사이먼은 기분이 더욱 나빠졌다.

    [영주님! 맙소사, 흠뻑 젖으셨군요. 즉시 뜨거운 목욕물을 준비하겠습니다.]

    배더슬리로 돌아오는 길에 비가 내렸고, 사이먼은 벳시아가 걱정이 되어 몇 번이나 말머리를 돌릴 뻔했다. 그녀는 무사할까? 만약 적절한 피난처를 찾아내지 못했다면? 물론, 만약 그녀가 덤불 아래에서 죽었다고 해도 나의 잘못은 아냐. 고집쟁이 여자는 나와 함께 돌아오는 것은 물론이고 보호해 준다는 제안마저 거절했으니! 벳시아가 자신을 신임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떨쳐버리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집요하게 달라붙었다. 사이먼은 기사였고 드 부르그 가문의 남자였다. 그러나 벳시아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엷은 황갈색 눈동자는 차가웠고 늘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사이먼은 자꾸만 달라붙는 묘한 감정들을 떨어내며 손을 내저어 플로리안과 하인들을 물리쳤다.

    [하지만 영주님, 저녁식사를 거르셨습니다!]

    집사가 항의했다.

    [식사를 하셔야 합니다!]

    마치 식사라는 단어에 이끌린 것처럼, 레오핀이 모습을 드러내고 벽난로 가에서 에일 맥주를 마시던 다른 기사들이 뒤따라왔다.

    [배더슬리의 요리사들은 최고입니다, 영주님. 양고기를 꼭 맛보셔야만 해요! 아마 영주님 몫을 남겨 놓았을 겁니다.]

    사이먼은 풍채가 당당한 기사를 곁눈으로 흘끔 보았다. 그가 미처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플로리안이 허공으로 손을 내저었다.

    [영주님은 드시지 않을 겁니다. 어떤 질병으로 고통을 받는 것이 분명해요.]

    [유독한 체액을 배설하기 위해 설사약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켄틴이 말했다. 그러고는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사이먼을 찬찬히 살펴본 다음 손에 들고 있던 맥주를 들이켰다. 사이먼은 나이 든 기사를 노려보았다.

    [내 몸 속에 유해한 체액 따위는 없소!]

    [아하, 어쩌면 히솝 풀이나 쓴 쑥이 필요할지도 모르겠군요.]

    플로리안이 말했다.

    [나에게 기생충 따위는 없단 말이야!]

    사이먼이 으르렁거렸다.

    [내 몸은 아무렇지도 않다고.]

    플로리안은 크게 한숨을 쉬었다.

    [영주님, 저는 그런 것에 대해 조사를 했는데, 몸에 이상이 있는 경우에 생기는 증상은 여섯 가지로 나뉩니다.]

    그가 설명했다.

    [영주님께서는 적어도 두 가지 증상을 갖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잠자고 일어나는 것과 음식을 먹고 마시는 것 말입니다. 보통과는 다른 분비물이나 배설물로 인한 고통은 없다는 사실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체 무슨 일이죠?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나서 무엇이 문제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그가 제안했다. 사이먼은 숨을 깊이 빨아들였다. 하지만 이것은 자신의 분노를 조절하기 위해서였다. 음식 냄새와 벽난로 연기, 그리고 홀 안을 돌아다니는 개들의 냄새가 그를 맹렬하게 공격했다. 사이먼은 성가신 집사의 목을 졸라 버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 잡혔다.

    [네?]

    플로리안이 안달이 나서 다그쳤다.

    [그렇다면 어쩌면 배설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안장에 너무 오래 앉아 있는 경우에 그럴 수 있죠. 혼자서 하루종일 말을 타고 돌아다니셨으니까요! 편안한 곳에 앉아 휴식을 취하셔야 합니다, 영주님.]

    그는 가까이 있는 벤치로 사이먼을 끌어다 놓고는 앉으라고 권했다. 사이먼이 그냥 서서 잔뜩 찡그린 표정을 지으며 집사를 노려보자 플로리안은 손가락을 턱에 대고 시름에 잠긴 몸짓을 취했다.

    [물론 다른 것도 있습니다.]

    집사는 천천히 사이먼의 주위를 돌면서 살펴보았다. 그러자 호기심을 참지 못한 기사들이 몰려들었다. 비록 집사의 의학적인 지식을 완전히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사이먼은 저도 모르게 그의 마지막 판결을 기다렸다.

    [그래?]

    사이먼이 마침내 소리쳤다.

    [다른 것이 뭐지?]

    [무슨 말씀인지...?]

    플로리안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막 정신을 차린 사람처럼 물었다. 하지만 계속 찡그리며 노려 보자 곧 그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아하, 남은 증상 말씀이시군요? 그것은 말입니다...]

    그는 수줍게 미소를 지었다.

    [영혼의 열정과 관계가 있죠.]

    순간 사이먼은 눈을 가늘게 뜨고 플로리안을 노려보았다. 집사 녀석이 나를 놀리고 있는 것일까? 그의 순진한 표정은 사이먼의 강렬한 응시와 팽팽하게 맞섰다. 열정이라고? 나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성안에 가득 찬 바보들 뿐이야. 그들은 쑥덕거리는 것밖에 몰라! 사이먼은 재빨리 침실로 걸어가면서 짜증스런 집사를 향해 저주를 퍼부었다. 열정? 자신의 형제들이 비웃을 걸 생각하자 목까지 열기가 치솟는 것 같았다. 전투에 대한 헌신 이외에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 만약 집사가 나를 괴롭히는 것이 열정이라고 생각한다면, 플로리안이야말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야. 벳시아는 키가 큰 참나무 위에 앉아서 사이먼 드 부르그가 나타날지 안 나타날지 정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 한쪽에서는 사이먼의 제안이 아버지를 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는 해도 모두 장난이거나 혹은 올가미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망상들은 이성에서 벗어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그가 사실대로 말했다고 해도, 사이먼 드 부르그는 위험한 존재였다. 벳시아는 논리를 넘어서는 강한 느낌을 받았다. 어젯밤 그를 껴안은 이후로 본능의 경고가 울려 퍼졌다. 희망이 낳은 바보스런 행동이었다. 포옹이라니, 그것은 위험한 실수였다. 그런 행동은 그의 남성다움과 힘을 더욱 가까이 느끼도록 해줄 뿐이었다. 지금까지 어떤 남자도 나를 유혹하지 못했는데...그녀는 숨을 훅 들이마셨다. 만약 그의 내부에 똬리를 틀고 있는 격렬함이 무서운 속도로 풀려 나온다면? 벳시아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사이먼은 몰래 행동했다. 만약 그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왔다면 그녀는 알아챘을 것이다. 부하들이 경고 신호롤 보냈을 테니까 말이다. 그는 혼자였고, 벳시아는 그를 관찰할 기회를 가졌다. 정말 멋진 사내였다! 훤칠한 키와 넓은 어깨, 그리고 바위처럼 단단한 근육은 어떤 남자보다도 뛰어났다. 그는 투구도 쓰지 않았다. 흑단처럼 매끄러워 보이는 머리카락을 어깨까지 내려뜨렸다. 얼굴은 홀쭉하고 험상궂었지만 잔인한 구석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가 왜 그러는지 알아내기만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혹시 그가 우리 모두를 올가미 속에 집어넣으려는 것은 아닐까? 그런 가능성을 무시하기에는 그녀의 인생은 지독한 사기극의 연속이었다. 게다가 펄민은 사이먼을 받아들이는 데 반대할 것이다. 벳시아는 부하들에게 사이먼을 동맹으로 받아들이는 문제에 대해 넌지시 떠보았지만 그녀 자신도 왠지 망설여졌다. 떨리는 숨을 들이마시던 벳시아는 무시해 버려야 하는 강한 기사에게 자신이 매혹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이먼 드 부르그는 나를 위한 남자가 아냐. 아니, 나를 위한 남자란 이 세상에 없어. 벳시아는 이미 오래 전에 그런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그녀의 현재 상황은 단지 그것을 좀더 중요한 결심으로 만들 뿐이었다. 벳시아는 만약 필요하다면, 사이먼 드 부르그의 강한 팔과 전투에 필요한 조언, 그리고 그와 함께 싸우는 것을 받아들이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정도가 전부였다. 사이먼은 아무도 없는 빈터를 바라보며 벳시아가 자신을 골탕먹이기 위해 이곳에 혼자 남겨두려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뭔가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전사다운 감각인지, 아니면 미풍에 실려온 그녀의 체취인지 모르지만, 사이먼은 벳시아가 가까운 곳에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녀가 밤새 아무런 해도 입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자 긴장이 조금 풀어졌다. 사이먼은 기뻐해야 할지, 억울하게 생각해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비록 벳시아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사이먼은 자신이 그녀를 보호하고 싶었다. 어쩌면 오늘은 나와 함께 가자고 설득할 수 있을지도 몰라, 사이먼은 얼굴을 찡그리며 생각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내가 이곳에 머물러야지. 성벽 아래에 굴을 파자는 것은 나의 생각이고, 그것을 궁수들이나 멍청이들의 무리에게 맡겨놓을 수 없어. 사이먼은 플로리안과 배더슬리에 있는 수다쟁이들의 의문에 찬 시선을 한아름 받고 있던 터라, 오늘은 주제넘게 참견하기 좋아하는 집사를 피하려고 동이 트기 전에 성에서 빠져 나왔다. 성을 돌보겠다는 약속은 그가 당연히 받아야 할 상이 아닌 성가시고 귀찮은 올가미처럼 죄여들었다. 하지만 무엇을 찾아야 하지? 사이먼은 앤스퀴스가 아닌 벳시아 버넬의 모습이 먼저 떠오르자 당황했다. 이런, 나에게 여자란 필요 없어! 그는 잠깐 멈추어 서서 즐거운 주변 경관을 살펴보았다. 사냥터는 나무와 철이 풍부한 멋진 장소였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버넬 경의 소유지를 구하기 위해서야. 그리고 아무리 벳시아가 나를 즐겁게 해준다고 해도, 나는 한 장소에 머무는 일에 쉽게 싫증을 내게 될 거야. 사이먼은 낮게 툴툴거렸다. 그렇게 조용한 생활은 나를 위한 것이 아냐. 비록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그 사실을 인정했다. 사이먼은 가슴을 덮고 있는 갑옷으로 손을 들어올리다가 얼른 떨어뜨렸다. 오랫동안 머무를 생각은 조금도 없지만, 2주일 정도는 숲 속에서 머물 각오가 되어 있었다. 나는 형제들을 괴롭히거나 배더슬리에 있는 사람들의 분노 섞인 주의를 끌지 않고서 평화로운 막간극을 즐긴 다음에 브리스 스컬베언을 패주시킬 거야. 사이먼은 단호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분명 이곳에 있는 누구도 나의 일에 간섭할 수 없어. 이 숲 속에 익숙한 궁수들이나 광부들도 나의 의지를 꺾을 수 없어. 사이먼은 가벼운 마음으로 빈터로 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는 너무 일찍 모든 것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사이먼은 적의 서린 눈으로 자신을 골똘히 바라보는 시선을 무시한 채 통로의 입구로 적당한 장소를 찾아 사냥터의 가장 자리로 나아갔다. 그는 광부 한 명과 논의를 한 뒤, 앤스퀴스 바로 뒤로 경사진 숲 속의 한 지점을 찾아냈다. 브리스의 부하들은 될 수 있는 대로 사냥터와 이들 산적들을 피해 다녔고, 그들이 선택한 지점은 길에서도 한참 떨어져 있었다. 장원으로 들어가는 경사진 풀밭 아래로 긴 터널을 파면 된다. 광부들은 아무런 불평 없이 즉시 일에 착수했다. 하지만 평탄한 시작에 대한 그의 만족감은 그리 오래 가지않았다. 벳시아가 의문 섞인 시선으로 그를 보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죠?]

    그녀는 가슴에 팔짱을 낀 채 호전적인 자세로 서서 물었다. 남자의 옷을 입었지만 고약한 냄새는 나지 않았다. 전에 사이먼이 즐거움을 가지고 그녀를 보았을 때 입었던 바로 그 옷이었다. 나뭇가지 사이를 뚫고 들어온 한줄기 햇살은 길게 땋아 내린 갈색 머리카락을 더욱 엷은 색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그 모습을 본 사이먼은 그녀가 하는 말에 주의를 기울이기 힘들었다.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난 통로 파는 것을 감독하고 있소.]

    그의 눈길은 옆으로 빠져 나온 연한 금색 머리카락으로 향했다. 벳시아는 사이먼의 소매 끝을 잡고 커다란 참나무 그늘을 향해 끌고 갔다.

    [대체 무엇 때문에 당신이 이곳에 와서 감독을 하는 거죠?]

    그녀는 팔짱을 끼며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런 몸짓은 튜닉 아래 감추어진 볼록한 가슴을 더욱 도드라져 보이게 했다. 사이먼의 눈길은 거기서 떨어질 줄 몰랐다.

    [이것은 내가 생각해낸 방법이기 때문이오. 그리고 포위공격에 경험이 있는 사람은 나뿐이니까.]

    사이먼은 시선을 들어 찡그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벳시아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그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맞아요. 하지만 저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은 바로 나예요. 당신이 나의 권위를 무시해 버리면, 나는 내 자리를 유지하기 힘들어요.]

    벳시아의 권위? 사이먼은 피식 웃을 뻔했다.

    [나는 이런 일에 익숙한 사람이오.]

    그는 애써 무덤덤한 표정을 유지하며 대답했다.

    [다른 곳에서는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바로 이곳에서 당신은 내 명령에 의해 손과 발이 묶인 적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고 싶군요.]

    그녀가 차갑게 말했다. 사이먼은 목구멍 안에서 뜨끈한 것이 불쑥 치미는 것을 느끼고 속으로 욕설을 중얼거렸다.

    [이것은 내가 해야 할 일이오. 그럼 내 부하들을 직접 데려와서 일을 시키는 게 낫겠소?]

    벳시아는 코웃음을 쳤다.

    [감히 그런 짓을!]

    그녀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그와 맞섰다.

    [이것은 내가 판단해야 할 문제요.]

    그가 대답했다.

    [내 집에 관한 문제인데 어떻게 당신이 결정을 하죠?]

    그녀가 쏘아붙였다.

    [배더슬리의 영주로서 해결해야 할 문제니까.]

    [그곳에 붙잡혀 있는 사람은 바로 내 아버지예요, 이 바보 멍청이!]

    그녀는 화를 벌컥 내며 장원이 있는 방향을 손가락질했다.

    [나는 그를 구해낼 거요.]

    사이먼은 완강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어떤 여자의 비위도 맞추어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아무리 존경할 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그녀가 협조를 하든 말든, 그는 브리스를 끌어내고 앤스퀴스를 원래의 주인에게 되돌려 줄 것이다. 화가 난 벳시아는 씩씩거리며 고개를 숙이고 두 손으로 다리를 눌렀다. 사이먼의 시선은 의지를 거부하고 그쪽으로 쏠렸다. 자신에게는 없는 것, 매끄러운 피부에 싸인 탄력 있는 다리를 떠올리자 뜨끈한 기운이 얼굴로 치솟는 것 같았다. 사이먼은 얼른 고개를 돌렸다.

    [좋아요.]

    벳시아가 말했다.

    [당신이 감독하는 것에는 동의 하죠. 하지만 절대로 당신 부하들을 이곳에 데려와서는 안 돼요!]

    사이먼은 얼굴을 찌푸렸다.

    [이곳에서 전투가 일어난다면 어떻게 할 거요?]

    그가 침착하게 물었다.

    [만약 브리스가 자신의 부하를 시켜 반대쪽에서 통로를 파게 만든다면? 이 사람들은 광부지 병사가 아니란 말이오. 저들이 땅속에서 죽어가게 놔둘 수 없소.]

    [왜 그들이 그런 짓을 하겠어요? 당신이 부하들을 이곳으로 데려오지 않는다면 브리스가 우리 계획을 눈치챌 리가 없어요.]

    벳시아가 반박했다.

    [그가 아는 것은 당신이 자신을 배더슬리로 불러내려고 했다는 것뿐이죠. 그는 내가 살아 있는 것을 몰라요, 그렇죠?]

    벳시아는 의심스런 시선으로 사이먼을 노려보았다.

    [내가 어떻게 알겠소? 그 남자에 대해선 당신이 더 잘 알 것 아니오, 당신의 전 약혼자였으니까.]

    그의 입에서 불쑥 나온 말은 두 사람 모두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한참 동안 이상한 침묵이 흘렀고, 사이먼은 그녀의 말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다. 앤스퀴스를 포위 공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브리스는 어떤 종류의 공격도 예상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 그러한 전술에 정통한 사람만이 진동을 느끼고 장원 밑으로 통로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것이다. 나중에, 그들이 공격할 준비를 모두 갖추었을 때 사이먼은 병사들을 뽑아서 데려올 수 있을 것이다. 벳시아의 말이 맞을 것이다. 통로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비밀 유지에는 도움이 된다.

    [좋소.]

    사이먼은 퉁명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지금은 광부들의 힘을 빌리겠소. 하지만 때가 되면 광부가 아닌 숙련된 내 부하들을 데리고 성으로 쳐들어갈 거요.]

    벳시아는 불만스럽게 고개를 쳐들었다.

    [그리고 나는 내 궁수들을 이끌고 갈 거예요.]

    그녀는 어깨를 펴면서 말했다. 사이먼은 눈살을 찌푸렸다. 벳시아가 전투에 참가하는 것이 싫었다. 하지만 고집 불통 여자를 설득할 시간은 앞으로도 충분해. 그는 미소를 지었다.

    [먼저 당신의 광부들이 우리를 위해 통로를 만들어야 하오.]

    벳시아는 조심스럽게 그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합의가 된 건가요?]

    [그런 것 같소.]

    사이먼은 평소와는 달리 대충 얼버무렸다. 벳시아는 짧게 고개를 끄덕인 다음 발길을 돌렸고, 사이먼은 자신들의 열띤 논쟁이 너무 싱겁게 끝난 것 같은 아쉬움을 느꼈다.

    [잠깐 실례하겠어요. 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벳시아가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 순간 사이먼은 그녀의 차분한 행동 뒤에 숨어 있는 열정을 흘끗 본 것 같았다. 사이먼은 그녀를 향해 소리를 지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녀가 정말 할 일이 있어서 가는 것일까? 혹시 나를 피하기 위한 변명은 아닐까? 아냐, 그럴 리가 없어. 벳시아가 나를 피해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어. 사이먼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엉덩이를 조금씩 흔들면서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서 숲 속으로 사라지는 그녀의 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마침내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렸을 때, 키가 자그마하고 회색 수염이 난 사내가 그를 가로막고 서 있었다. 그 사내는 나이가 꽤 들었는데도 매우 무거운 삽을 어깨에 메고 있었다.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영주님.]

    그가 말했다. 사이먼은 삽을 내리는 그를 도와주었다.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영주님.]

    그 남자가 말했다.

    [하지만 한 가지 경고해 드릴 말씀이 있군요.]

    사이먼은 눈을 가늘게 뜨고 갑작스런 습격에 대비하여 긴장했다. 하지만 참나무 아래에서는 아무도 튀어나오지 않았다.

    [아닙니다. 싸우려는 것이 아닙니다, 영주님.]

    그가 주저하며 덧붙였다.

    [벳시아와의 일을 조심하라고 충고하고 싶군요. 그녀 아버지는 이곳에 없지만 그녀에게는 많은 친구들이 있습니다.]

    사이먼은 벳시아가 불결한 수염과 이상한 옷을 입고 마을에 나타난 동안 그녀의 친구들은 어디에 있었는지 묻고 싶었지만 애써 참았다.

    [나를 위협하는 거요?]

    사이먼이 물었다. 남자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영주님. 그저 그녀를 보는 영주님의 눈길을 보았을 뿐입니다. 해야 할 일에만 주의를 기울이시고, 벳시아의 일은 간섭하지 마십시오.]

    사이먼은 화가 나서 주먹을 쥐었으나 그 사내는 이미 몸을 돌려 걸어가 버린 뒤였다. 그는 주제넘게 참견하는 뻔뻔스런 사내를 치는 대신 주먹 쥔 손으로 죄 없는 자신의 손바닥만 한 대 후려쳤다. 아, 쓸데없이 간섭하려 드는 사람들에게서 벗어나고 싶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에게 고통받는 것이 바로 자신의 운명인 것 같았다.

    [계속하시오, 늙은이.]

    그가 중얼거렸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모두 벳시아를 위하기 때문이오. 그녀는 바로 나의 일이오.]

    사이언은 일하는 사람들이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모여들 때까지 같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는 하루종일 일을 하면서 보냈다. 그래서 그런지, 아니면 자신을 조심스럽게 살펴보는 벳시아 때문인지는 몰라도 사이먼은 식욕이 완벽하게 돌아와 있음을 깨달았다. 냄비 위로 허리를 구부린 나이 든 여자가 빵을 나눠주고 부서진 그릇에 스튜를 떠주었다. 음식을 만드는 주방과 식사를 하는 커다란 홀이 떨어져 있는 배더슬리와는 달리, 읍식들이 매우 뜨끈뜨끈했다. 사이먼은 톡 쏘는 양고기 냄새를 잘 맡을 수 있었다. 그는 세 조각이나 먹고 이어서 나온 달콤한 배도 먹었다. 벳시아는 될 수 있는 대로 그와 멀리 떨어져 있었다.

    [좀더 먹어야 하오. 요리사가 솜씨가 아주 좋군.]

    그가 말했다. 벳시아는 마치 깜짝 놀란 사람처럼 고개를 홱 쳐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난 배고프지 않아요.]

    벳시아는 남은 음식을 곁에 앉아 있던 한 궁수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사이먼은 어쩌면 그녀 역시 자신과 비슷한 질병 때문에 식욕을 잃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가 정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사이, 벳시아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가버렸다. 사이먼은 그녀의 부하들 중 몇 명이 보내오는 못마땅한 눈길을 느끼면서 그 뒤를 따라갔다.

    [당신이 저녁식사를 우리와 함께할 줄은 몰랐어요.]

    벳시아는 도도한 표정을 지으며 가슴 앞으로 팔짱을 꼈다. 사이먼은 그런 그녀의 자세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자 입속이 말랐다.

    [시간이 늦었어요.]

    그녀가 말했다.

    [길가까지 안내원이 필요한가요?]

    사이먼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가 가야 할 길 정도는 알고 있소. 하지만 오늘밤에는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요.]

    벳시아는 놀라서 눈을 둥그렇게 떴고, 사이먼은 그녀의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어째서 그녀는 나를 신뢰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는 그녀를 잡고 마구 흔들고, 그리고...

    [하지만 당신은 배더슬리로 돌아가야 하지 않나요? 이렇게 자리를 비우면 의심을 살 거예요.]

    [무엇에 관한 의심 말이오?]

    사이먼은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의심이 가득 들어 있는 곳은 다름 아닌 그녀의 눈동자 였다. 그는 성안 사람들이 뭐라고 쑥덕거리든지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자신의 일은 그들과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매일매일 배더슬리에서 이곳을 오가면서 길바닥에 시간을 낭비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사이먼은 눈을 가늘게 뜨고 벳시아를 살펴보았다. 갑자기 사이먼이 거칠게 뭔가를 중얼거리면서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어 어깨를 와락 움켜잡았다. 벳시아는 깜짝 놀랐다. 하고 싶은 말이 갑자기 목구멍에 달라붙은 것처럼, 사이먼은 그녀를 그저 내려다보기만 했다. 손가락 아래 닿은 두꺼운 튜닉 밑으로 그녀의 열기가 전달되자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당신은 나를 믿어야만 하오.]

    그가 중얼거렸다.

    [그건 너무 어려워요.]

    벳시아가 조그만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입술 곡선이 이상하게도 유혹적으로 다가왔다. 침묵 속에서 서로를 바라보던 그들은 두 사람 사이에 무엇인가가 자라는 것을 느꼈다.

    [벳시아!]

    누군가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면서 침묵을 깨뜨렸고, 벳시아는 얼른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사이먼은 저도 모르게 나오는 욕설을 꾹 눌러 참으면서 목소리의 주인공을 향해 몸을 돌렸다. 명령에 자주 반기를 드는 궁수 펄민이었다. 적의를 숨기지도 않고 드러낸 사내의 눈동자와 마주친 사이먼의 손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칼자루로 향했다.

    [오늘밤을 지낼 야영지를 만들고 있소.]

    펄민은 일부러 사이먼을 외연한 채 말했다.

    [고마워요.]

    벳시아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이먼을 위한 잠자리도 마련해 주겠어요?]

    [남는 담요가 없소.]

    펄민은 증오가 가득한 검은 눈동자로 사이먼을 바라보았다. 사이먼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땅딸막한 사내가 먼저 시선을 돌릴 때까지 마주 보았다.

    [나는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소.]

    사이먼이 말했다. 그러나 곁에서 멀어져 가는 벳시아를 보자 자신의 말이 진실인지 자신할 수 없었다. 몇 주일 동안 광부들이 땅을 파는 사이, 사이먼은 숲 속에서 망을 보는 벳시아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물론 가끔 배더슬리에 들르기는 했지만 그곳에 머물지는 않았다. 뱃시아에게서 멀리 떨어지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벳시아는 지금까지 알던 어느 여자와도 달리 영혼과 육체의 힘이 매우 강했다. 물론, 자신에게 적당한 여자는 아니었다. 보통 여자처럼 겁이 많은 것도 아니고, 어려움에 부딪혔을 때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다. 그녀는 마치 남자처럼 차가운 이성으로 계획하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전략을 짰다. 때때로 사이먼이 눈살을 찌푸릴 만큼 무모함을 보이기도 했다. 벳시아는 시시덕거리거나 자신을 과시하는 듯한 여자들의 수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사이먼을 안심시키면서도 다시 낙담시키는 두 가지 방법으로 그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그녀의 명령들은 분명하고 솔직했고, 말이 별로 없었다. 벳시아는 마치 여자의 육체를 지닌 남자 같았다. 그녀가 여자라는 사실이 점점 더 강하게 인식되었다. 그의 눈길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녀를 따라가고, 강철 같은 자제력도 어느 순간 그를 배신했다. 그녀의 근육을 떠올리면 입안이 비싹 마르고 몸이 굳어졌다. 만약 다른 때였다면 그는 자신의 욕구를 진정시켜 줄 여자를 찾아 돈을 지불하는 해결 방법을 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그런 방법을 원치 않았다. 그런 상상은 독특한 벳시아의 존재를 오염시키고 모욕을 안겨 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심지어 과거에 가졌던 여자들과의 일도 돌이킬 수 없는 오점으로 여겨졌고, 이름 모를 여자와의 기억도 그를 괴롭혔다. 그가 원하는 것은 벳시아였다. 하지만 사이먼은 그것을 부인해야만 했다. 무법자 산적으로 지냈지만, 그녀는 자신을 위해 돈을 갈취하지 않았다. 모든 상황을 종합해 볼 때, 그녀는 배더슬리와 그곳을 다스리는 영주의 보호를 받을 자격이 있는 숙녀였다. 게다가 벳시아는 사이먼이 찬사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단 한명의 여성이었다. 따라서 그의 욕망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사이먼은 사냥터를 가로지르는 시냇물을 찾아 차가운 물로 고집스럽게 달라붙는 갈망을 씻어내려야 했다. 그것 이외에 고통스런 육체들 달랠 방법이 무엇이겠는가? 불행히도 엄청난 노력을 했는데도 벳시아를 향한 사이먼의 관심은 두 사람이 앤스퀴스로 향하는 물품들을 중간에서 가로 챌 때 더욱 커져만 갔다. 그들은 재빨리 귀중한 향료와 런던에서 오는 옷감들을 빼앗고 브리스의 부하들을 길가에 내버렸다. 두 사람에게는 대담한 기습이었으나 저항은 그리 많지 않았고, 짜릿한 기분마저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무거운 전리품을 사냥터로 끌고 들어올 때 숨이 차서 얼굴이 붉어진 벳시아의 모습은 더욱 강한 자극으로 다가왔다. 숲 속 깊숙이 안전한 곳으로 들어와 숨을 돌리기 위해 멈추어 섰을 때, 그들은 그녀의 땋은 머리채가 사이먼의 가슴에 닿을 정도로 가까이 서 있었다. 긴 머리카락을 응시하던 사이먼은 그것을 손에 움켜잡고 싶다는 강한 욕망에 사로잡혔다. 사이먼은 손을 내밀고 벳시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은 둥그래지고, 뺨은 붉어져 있었다. 그는 그녀를 끌어당겼다. 벳시아는 그를 멈추게 할 만한 힘을 가졌고, 사이먼 역시 그녀의 저항을 예상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그녀는 순순히 따라왔다. 반쯤 벌어진 입술에서 싫다는 한 마디조차 새어나오지 않았다. 사이먼의 입술이 그녀를 덮었다. 그는 키스를 좋아하지 않았다. 여자와의 키스는 결합을 위한 기본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해 왔는데...지만 벳시아는 달랐다. 그녀의 입술은 무척이나 싱싱하고 유연했다. 사이먼은 귓가의 맥박이 세차게 뛰는 것을 느꼈다. 너무나 격렬하게 흐르는 나머지 자신의 발이 그대로 땅에 붙어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사이먼은 기분 좋은 듯 중얼거리면서 입술을 벌려 그녀를 맛보았다. 벳시아 역시 용감하게 그를 맞아들였다. 그는 두 사람 모두 숨이 가빠올 때까지, 심장이 터지고 육체가 비명을 지를 때까지 키스를 계속했다. 마치 전쟁을 앞두었을 때 느끼는 흥분 같았다. 아니, 그것보다 훨씬 더 좋았다. 이것은 오직 두 사람이 벌이는 전쟁이며, 늘 의견이 다른 두 사람이 처음으로 합의에 이른 순간이었다. 그러나 사이먼이 엉덩이를 바싹 끌어안자 벳시아는 그의 목에서 팔을 풀고 그를 밀어냈다. 예전에는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열정에 사로잡힌 사이먼은 그녀의 몸이 빠져 나가는 것을 서서히 느꼈다. 벳시아가 앞에 서 있었다. 가슴은 오르락내리락 하고, 젖은 입술은 팽팽하고, 아직 소모되지 않은 욕망으로 가득한 눈을 커다랗게 뜬 채. 왜, 우린 왜 서로 떨어진 것일까? 사이먼은 다시 벳시아를 끌어당기기 위해 손을 들어올렸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가슴을 밀어내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안 돼요.]

    그녀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우리 사이에 있어선 안 되는 일이에요.]

    사이먼이 무슨 말을 하기도 진에 벳시아는 식지 않은 열기를 참느라고 이를 악다문 그를 혼자 남겨놓은 채, 자신만이 알고 있는 비밀의 길을 향해 도망쳐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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