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목욕을 한 다음에도 기분은 별로 좋아지지 않았다. 사이먼은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홀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전령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앤스퀴스에서 그날 밤을 보낼 모양이군. 그것은 두 지역간의 관계가 좋아진다는 의미로 볼 수 있는데도 사이먼의 기분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푸짐한 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지난 밤에 먹은 산토끼의 맛을 능가하지 못했다. 그런 생각이 들자 화가 나서 음식이 제대로 넘어가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이 아무리 맛있게 식사를 해도 아무 소용없었다.
[영주님.]
레오핀이 음식을 꿀꺽 삼키면서 말했다.
[오늘 사냥하신 오리는 정말 맛있군요.]
그는 고개만 끄덕이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사이먼을 향해 커다란 타원형 접시를 밀어놓았다. 사이먼은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주변에 앉은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음식이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플로리안은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많이 먹었네.]
사이먼은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든, 그것은 집사가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형제들과 아버지와 함께 식사를 하는 캠피온에서는 하인들이 너무 바쁘기 때문에 사이먼이 무엇을 하든, 음식을 먹든 말든 신경 쓸 시간이 없었다. 던스탄은 웨섹스에서 어떻게 할까? 사이먼은 많은 사람들의 시선과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을 싫어했다. 플로리안은 그를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영주님께서 성에서 나가 계시는 동안 병에 걸린 것이 아니길 바랍니다. 차가운 밤 공기는 몸에 해롭기 때문에...]
집사는 몸을 부르르 떨며 말꼬리를 흐렸다.
[뭐라고? 누가 병에 걸렸소?]
레오핀이 손가락을 빨다가 잠깐 멈추면서 물었다.
[아, 내 시종은 요즘 몸이 아픈 모양이던데...]
[그도 입맛을 잃었나요?]
플로리안이 물었다.
[그렇소!]
레오핀은 커다란 빵에서 조각을 떼어내며 대답했다.
[설사를 하느라고 이틀 동안 화장실에서 살았소. 지독한 냄새를 풍기면서 말이오!]
그는 커다랗게 한 입 베어 물더니 소리나게 씹으면서 사이먼을 바라보았다.
[영주님도 그렇게 되지 않길 바랍니다.]
그는 사이먼 앞에 놓인 쟁반을 바라보며 의심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말도 되지 않는 희극을 멈출 때가 되었어.
[난 아프지않아!]
사이먼이 소리쳤다. 레오핀은 곧 자신의 음식으로 주의를 돌렸으나 플로리안은 더 의심스런 표정을 지었다.
[이곳에 있는 사람 가운데 몇몇은 너무 많이 먹어서 탈이오.]
사이먼은 레오핀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몸집이 거대한 기사는 잠깐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요란하게 트림을 했다. 사이먼은 낮게 투덜대며 자신의 쟁반을 옆으로 밀어놓았다. 갑자기 예전에는 언제나 자신을 만족시키던 사람들이 뭔가 모자라는 바보처럼 아무 데나 끼여들고 세련되지 못한 사람들처럼 느껴졌다. 화려하고 커다란 식탁에 가득한 음식을 보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비록 캠피온보다는 작았지만 이곳은 너무 크고 복잡하고 시끄러웠다. 사이먼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의자를 뒤로 물리며 일어나 사람들에게 한 마디 말도 없이 홀에서 걸어나갔다. 바깥으로 나온 그는 여러 향기가 가득한 공기를 깊이 들이 마셨다. 나무 타는 냄새와 거름과 말과 요리 냄새를...모든 것이 친숙하게 느껴졌지만 사냥터의, 그리고 어떤 여자의 향기로움에 비할 수는 없었다. 사이먼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자신이 미처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깨닫기도 전에 그녀의 체취를 기억해 내려고 노력했다. 나는 상사병에 걸린 루트 연주자가 아냐. 나는 드 부르그 가문의 남자이며 실력 있는 기사이고 전사야! 벳시아가 계속 머리 속에 떠오르는 이유는 그녀가 제시한 문제 때문이야. 그것을 해결하면 곧 그녀를 잊어버릴 거야. 그렇게 마음을 먹어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자, 사이먼은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가면 이상한 감정도 곧 사라질 거라고 중얼거렸다. 형의 부하들이 보내오는 호기심 서린 눈길을 무시한 채 사이먼은 자신의 침실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갑자기 사람들을 대하기가 귀찮아지고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하지만...일찍 잠자리에 들기는 했지만 사이먼은 밤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새벽이 되자 그는 흐릿하고 따끔거리는 눈동자로 시종을 소리쳐 불렀다. 대체 무엇이 잘못된 걸까, 그는 의아했다. 어떤 종류의 잠자리에서도 항상 잘 잤는데...딱딱한 땅바닥이나 심지어 비가 오거나 진눈깨비가 내려도 잠을 자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을 받지 않았는데...사이먼은 옷을 갈아입다가 갑자기 손을 멈추었다. 플로리안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아마도 어떤 질병에 걸렸을지도 몰라. 그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마치 병의 징후를 조사하는 사람처럼 손으로 배를 문질렀다. 켄틴의 시종이 걸렸다는 병은 아닌 게 확실했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것은 다른 질병의 징후가 아닐까? 사이먼은 손으로 가슴을 만지면서 조프리가 옆에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조프리가 있다면 그의 전문가다운 의견을 들을 수 있을 텐데. 이른 새벽이라 화를 낼지 모르지만 박식한 동생은 그의 상태에 대해 적절한 진단을 내려줄 것이다. 사이먼은 지금까지 자신의 완벽한 건강에 대해 자부심을 가져왔다. 전쟁터에서 많은 죽음을 보아왔고 이상한 병에 걸려 사망하는 것도 보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 어떤 것도 드 부르그 가문의 사내에게 다가서지 못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야, 사이먼은 오만하게 중얼거렸다. 그는 팔과 다리를 재빨리 늘여 보고 자신의 힘을 확인했다. 그리고 전령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지 확인하기 위해 홀로 향했다.
[아직 이른 시각입니다, 영주님.]
플로리안은 성급하게 투덜대는 사이먼에게 말했다. 집사는 달래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높은 테이블을 가리켰다.
[자 앉으세요. 그리고 에일 맥주 한 잔과 빵을 드십시오.]
음식을 먹이고자 하는 플로리안의 노력도 별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사이먼은 특히 먹는 것에 관해서는 유별난 대접을 받고 싶지 않았다. 그런 자신의 뜻을 밝히려고 마음먹고 있는데, 목소리도 채 내기 전에 레오핀이 다가와 호들갑을 떨었다.
[영주님.]
기사는 다급히 옆으로 다가왔다.
[제 시종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가 말하길 뱃속에 이상한 체액이 가득 차더니 냄새가 지독하고 소리가 요란한 방귀가 나오더랍니다.]
사이먼은 눈을 가늘게 뜨고 말을 주절주절 늘어놓는 기사를 노려보았다. 게다가 가까이 다가오는 플로리안을 보자 화가 치밀었다. 집사는 입술 위에 손가락을 댄 채 걱정스런 표정으로 사이먼을 살펴보았다.
[그런 냄새는 나지 않지만 안색이 창백해 보이는데요, 영주님. 잠은 잘 주무셨습니까?]
집사의 말을 들은 사이먼은 움찔했다. 하지만 쓸데없이 간섭하려 드는 그에게 한 마디 하려고 할 때 켄틴이 다가왔다.
[영주님! 제가 맞게 들은 겁니까? 잠을 제대로 주무시지 못하셨다면서요?]
기사는 사이먼에게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의미심장한 눈길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코빙턴에 전염병이 돌고 있다고 합니다. 지나가는 짐마차꾼에게서 들은 바에 따르면, 그 역시 끔찍한 불면증에 시달렸습니다. 물론, 그것은 시작에 지나지 않습니다. 결국 머리카락이 빠지고 혀에 백태가 낀다는데...자, 어디 봅시다.]
켄틴은 눈을 가늘게 뜨고 사이먼의 턱을 잡았다. 사이먼은 켄틴의 뻔뻔스러운 행동 앞에서 너무 기가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기사가 입을 벌리려고 할 때 고개를 흔들어 그를 밀어냈다.
[그만두시오, 멍청한 작자 같으니...]
사이먼은 소리를 지르며 주먹으로 켄틴의 손을 쳤다. 너무 화가 났다. 어떻게 감히 나에게 손을 댈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혓바닥에서 뭐가 자란다고?
[나는 멀쩡하오, 알아듣겠소? 아무 일도 없단 말이오!]
그는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집사의 불안한 시선을 무시한 채 홀에서 걸어나왔다. 전령은 저녁식사 시간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데도 사이먼은 정성 들여 만든 음식을 먹으려고 노력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입맛을 잃어 본 적이 없었다. 태웠거나 혹은 덜 익은 것도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지금은 에일 맥주와 거위, 그리고 청어도 아무런 맛이 나지 않았다. 그는 혓바닥에서 뭔가 자라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혀를 굴려 보았다. 빌어먹을! 배더슬리의 멍청이들은 나를 노파처럼 행동하도록 만들어 놓았어. 비록 입맛은 없지만 나는 건강해. 단지 기다리는 일에 지쳐서 안달이 났을 뿐이야. 사이먼은 소리나게 음식을 씹으면서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내가 사냥터로 직접 가서 벳시아가 잘 있는지 확인해 보아야 하나? 전령의 귀환이 늦는 것은 벳시아에게 불길한 조짐이 분명해. 만약 브리스가 그녀를 잡기 위해 자신의 부하를 숲 속으로 보냈다면? 사이먼은 초조함과 불안감 속에서 침을 꿀꺽 삼켰다. 마을로 가서 그녀와 연락이 닿을 만한 사람을 찾아봐야겠어, 사이먼은 생각했다. 나는 심부름을 하는 소년처럼 대장간에 메모를 남기지는 않을 거야! 사이먼은 쟁반을 옆으로 밀어놓으며 맹세했다. 모든 것이 잘될 것이고, 그녀 또한 무사할 거야. 벳시아를 다시 만날 거야. 그런 생각을 하자 맥박이 세차게 뛰었다. 사이먼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하지?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녀를 만날 생각을 하자 뜨거운 피가 목둘레로 몰려들었다. 그녀는 짧은 갈색 눈동자로 나를 바라볼 거야.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말이야. 그리고 나는 또다시 바보가 된 기분이 되어 버리겠지. 사이먼은 투덜대며 머리 속의 상상을 지워 버렸다. 여자가 자신을 보고 한 번 더 비웃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브리스에게서 사실을 알아보고 일을 처리할 거야. 그런데도 계속 되는 이 기다림은 그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혼자만의 생각 속에 빠져 있던 사이먼은 주변의 목소리들이 의미심장하게 낮아지기 전까지는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전사다운 본능이 작동했고, 그는 가만히 앉아 귀를 기울였다.
[오늘 아침에 보니 얼굴이 창백하시더라고요. 잠도 제대로 못 주무시고...틀림없어요. 비록 영주님은 부인하지만 말예요.]
사이먼은 플로리안의 목소리를 듣고 이를 갈았다. 말 많은 집사가 누구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짐작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창백하다고? 하지만 지금은 얼굴이 붉어지셨는걸. 혹시 열이 있는 게 아니오?]
켄틴이 제안했다.
[충분히 드시지도 못했어요.]
레오핀이 중얼거렸다.
[맞아, 그것도 증세 가운데 하나일 겁니다. 입맛을 잃은 것 말입니다.]
플로리안이 말했다.
[당신이 아는 그 짐마차꾼처럼 말입니다...]
[내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사이먼은 자신의 기사 가운데 한 명의 목소리를 들었다.
[영주님은 이상하게 화를 잘 내고 있소, 이곳에 도착한 이래로 말이오!]
[아, 그것은 아마도 체액의 불균형 때문일 겁니다.]
플로리안이 생각에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우리 몸에 있는 네 가지 체액 가운데 한 가지가 과잉으로 분비되는 병에 대해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불안정하면 신경질을 많이 낸답니다. 그것도 질병의 결과로 나타나는 증세죠.]
사이먼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고개를 들었다. 가까이에 있던 모든 눈동자가 은밀하게 자신에게 쏠리는 것을 느낀 사이먼은 화가 나서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사이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분노에 찬 시선으로 테이블을 둘러보았다.
[무슨 병의 증세라는 말이오?]
그가 고함을 질렀다.
[난 얼굴이 붉어진 것도 아니고, 창백한 것도 아니오. 속이 메슥거리는 증세도 없고, 불면증에 시달리는 것도 아니오. 혹은 내 혓바닥에 이상한 털이 자라는 것도 아니오. 내 건강은 완벽하단 말이오!]
사이먼이 소리쳤다.
[앞으로 또 이상한 말을 지껄인다면 나의 분노가 무엇인지 알게 해주겠소!]
그는 움켜쥐고 있던 리넨 냅킨을 옆으로 던져 버리고 문가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바로 그때 지칠 대로 지친 전령이 나타났다. 혼자였다. 사이먼은 화가 치밀어서 소리쳤다.
[브리스는 어디에 있나?]
[그는 오지 않습니다, 영주님.]
전령은 애원하듯 한쪽 무릎을 털썩 꿇으면서 대답했다.
[일어나라!]
사이먼이 소리쳤다. 플로리안과 기사들은 입을 다물고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전령과 단둘이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다른 곳으로 갈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처음에 그들은 저를 문 안으로 들여보내 주지도 않았습니다.]
전령이 바들바들 떨면서 말했다.
[그들은 브리스 스컬베인이 시간이 날 때까지 저를 땅바닥에서 자게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야 성벽 안으로 조금 들여보내 주더군요. 제가 지닌 칼과 단도를 빼앗아갔다가 제가 문 밖으로 다시 나올 때 돌려주었습니다.]
사이먼은 모욕적인 대접을 받은 전령을 가늘게 뜬 눈으로 노려보면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지로 참았다.
[계속 말해 봐라.]
[성벽 안으로 들어간 다음에는 다시 브리스 스컬베인이 기사들을 데리고 나올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그는 기사의 갑옷을 입었더냐?]
[아뇨.]
전령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아주 고급스런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사이먼은 역겨움을 이기지 못하고 얼굴을 찌푸렸다.
[계속 말해 봐라.]
전령은 더 이상 말하기를 겁내는 것처럼 시선을 떨어뜨려 발을 응시했다.
[저는 영주님의 전갈을 전했습니다.]
그가 손바닥을 튜닉에 문지르면서 말했다.
[그리고?]
사이먼은 다급히 물었다.
[그는 저에게...사과의 말을 전했습니다, 영주님.]
전령은 걱정스런 시선으로 사이먼을 보며 얼른 대꾸했다.
[사과?]
사이먼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전령은 사이먼의 강한 시선을 받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는 영주님의 친절한 초대를 거절해야만 한다고 말했습니다.]
[친절한 초대라고?]
[이곳은 산 속도 아닌데 메아리가 치는 걸까?]
플로리안의 중얼거림을 들은 몇몇 사람들이 킥킥거리다가 사이먼의 눈길을 받고 입을 다물었다. 전령을 향해 다시 몸을 돌린 그는 솟구치는 분노를 억지로 눌렀다.
[그가 정확히 뭐라고 했는지 말해 보아라.]
사이먼은 이를 악다물면서 물었다. 전령은 한참 생각하다가 울상을 지었다.
[그러니까...<드 부르그 영주님의 친절한 초대에 감사하다고 전해라. 하지만 이번에는 초대에 응할 수 없으니, 대신 사과의 말을 전해다오>라고 했습니다.]
전령은 잠깐 말을 멈추었다.
[스컬베인은 정말로 교활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는 덧붙였다.
[그리고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버넬 경이 몸져 누웠기 때문에 나는 그와 함께 있어야 한다. 드 부르그 영주도 곁에 아무도 없는 동안 늙은이의 병세가 더 악화되는 것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사이먼은 기가 막힌 표정으로 전령을 바라보았다. 이 건방진 브리스가 정말로 버넬 경을 위협하는 것일까?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놀라서 숨을 헐떡거리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떻게 감히 이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전령은 원통한 표정으로 사이먼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저는 스컬베인에게 영주님의 강력한 뜻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말꼬리를 흐렸다.
[계속 해라.]
사이먼은 이를 악물며 다그쳤다. 피가 끓어오르고 브리스 스컬베인이라는 작자를 두들겨 패주고 싶어서 손가락이 근질거렸다.
[그런 다음...그가 저에게 물었습니다...]
전령은 다시 한 번 손바닥을 튜닉에 문질렀다.
[<웨섹스의 남작이 배더슬리의 영주이기 때문에 오직 그만이 가신을 부를 자격이 있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순간 분노가 치밀어 사이먼은 한동안 말을 할 수 없었다. 그 건방진 놈이 감히 나의 자격에 의문을 제기했단 말이야? 감히 나의 명령을 거부해? 드 부르그 가문의 사람들은 함께한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이 알고, 아무도 그 이름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데. 마치 끓어오르는 그의 분노를 알아챈 듯 전령은 한 발 뒤로 물러났고, 흥미롭게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도 겁먹은 표정을 지으며 각자 자신의 할 일을 하러 돌아갔다. 사이먼은 이 사람들과 충돌한 적이 없었다. 그들은 모두 사이먼에게 전권을 부여한 던스탄의 문서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런 소문은 마을 전체에 퍼져 있고, 분명 앤스퀴스에서도 알고 있을 것이다. 심지어 드 부르그라는 이름을 잘 들어 보지 못한 사람들도 부름을 거부하지 않았다. 따라서 브리스가 모를 리가 없었다. 아니, 그의 모욕은 체스 게임처럼 계산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사이먼은 게임을 벌이기에 좋은 상대가 아니었다. 마침내 사이먼은 체스 판을 뒤집어엎었다. 플로리안의 헛기침 소리가 긴장된 침묵을 깨뜨렸다.
[앤스퀴스에서 뭔가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군요.]
[그래. 뭔가 잘못된 것이 분명해. 단지 버넬 경이 몸져 누운 것은 아닌 것 같군.]
사이먼이 집사를 보면서 말했다. 벳시아...브리스의 악행은 그녀의 말이 진실이라는 증거였다. 다행스런 마음이 그의 분노를 어루만졌다. 벳시아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자 사이먼은 기운이 나는 것 같았다. 만약 그녀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반드시 그녀를 도울 것이다. 벳시아...사이먼이 주먹을 옆으로 내려뜨리면서 갑자기 빙그레 웃자 옆에 있던 집사와 기사들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난 가야만 해.]
그가 다급히 말했다.
[설마 앤스퀴스에 혼자 가시겠다는 뜻은 아니겠죠!]
켄틴이 말했다.
[우리도 함께 갈까요, 영주님?]
톨킬이 물었다. 사이먼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모든 사람들을 남겨 두고 밖으로 나왔다. 플로리안은 손을 입에 댄 채 뭔가 생각하는 눈길로 사이먼을 바라볼 뿐, 이상하게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사이먼은 급히 마을로, 벳시아에게로 향했다. 대장간에 다가간 사이먼은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지금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만약 그 여자가 나를 다시 사냥터로 유인한다면...? 사이먼은 자신이 그녀와 연락을 취하기 위해 오두막집과 헛간을 돌아다니는 동안, 그런 자신을 보며 비웃을 벳시아의 모습을 떠올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지 않으면 직접 사냥터를 뒤지면서 찾아다니는 방법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는 벳시아가 만들어 놓은 또 다른 덫에 걸리고 싶지 않았다. 사이먼은 가늘게 뜬 눈으로 대장장이를 바라보았다. 그는 말에서 내려 고삐를 쥐고 가만히 서 있었다. 갑자기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지 몰라 불편해졌기 때문이다. 뭔가 기다리는 듯한 대장장이의 시선을 마주한 사이먼은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바보스러운지를 깨달았다.
[찾는 사람이 있소.]
사이먼이 중얼거렸다. 대장장이는 쳐다보는 대신 커다란 고개를 천천히 끄덕거렸다.
[선술집으로 가십시오, 영주님.]
이제는 사이먼이 멍청하게 쳐다볼 차례였다.
[선술집?]
[그렇습니다. 그곳에 가면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는 그 말만을 남긴 채 어두운 실내로 말을 끌고 들어갔다. 사이먼은 문 밖으로 나와 작은 건물로 이어진 길을 바라보았다. 바퀴 자국이 많이 나 있었다. 비록 그런 장소에서는 냄새가 심하게 나는 법이지만, 사이먼은 지난번의 방문에서 이 선술집은 다른 곳보다 훨씬 깨끗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만약 벳시아가 그를 위협하기 위해 궁수를 보낸다면, 그녀는 아마 실망할 것이다. 몸을 숨길 만한 곳이 없기 때문이다. 사이먼은 자신 만만한 걸음으로 선술집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당연히,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벳시아는 헛걸음한 나를 보며 또다시 웃음을 터뜨리겠지. 사이먼은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열린 문으로 들어갔다. 오두막보다는 나았지만 어둡고 강한 냄새가 배어 나왔고, 지친 여행객들이 앉아 갈증을 달래며 쉴 수 있는 의자들이 몇 개 보였다. 이미 그곳에는 두 남자가 와 있었다. 사이먼은 그들을 조심스럽게 살피면서 문으로 누가 들어오는지 잘 볼 수 있는 자리를 골라 앉았다. 날은 점점 어두워지고, 두 사람은 마실 것과 빵을 주문했다. 사이먼은 이런 조그만 선술집에서 먹을 만한 것을 찾기는 힘들 것이라고 생각하며 에일 맥주만 마시면서 계속 기다렸다. 두 사람은 바깥에 놓아 둔 짐수레를 걱정스런 눈으로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행상인이 분명한 것 같았다. 그들이 친근한 척 인사를 하면서 말을 걸어왔지만, 사이먼은 아무 말 없이 그들을 노려보았다. 이런 식으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벳시아를 원했고, 그녀에게서 아무런 소식도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화가 치밀었다. 혹시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게 아닐까? 그런 망상을 억누르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는데도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대로 벌떡 일어나 그녀를 찾아 나서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냐.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그들에게 시간을 줄 거야. 그런 다음에...누군가가 열린 문으로 다가왔을 때 사이먼은 조금 긴장했다. 그러나 새로 온 손님은 지저분한 옷에 진흙이 잔뜩 묻은 장화를 신고 이마 깊숙이 모자를 눌러쓴 거지 같은 사내였다. 덥수룩한 사내의 수염을 본 사이먼은 실망했다. 비록 벳시아가 공공장소에 태연히 나타날 것이라고 기대한 것은 아니었는데도 초조함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녀는 이런 선술집에 어울리지 않아, 그는 혼자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녀가 정확히 어느 장소에 있어야 하는지는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사이먼은 자신에게 전해 줄 메모를 가져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새로 온 손님을 주목했다. 하지만 그 사내는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을 뿐이었다. 거의 포기할 무렵 그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에일 맥주를 달라고 하는 쉰 듯한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 사이먼은 태평한 자세로 벽에 기댄 채 낯선 사람을 좀더 유심히 살펴보고 사내의 엉덩이 쪽으로 눈길을 떨어뜨렸다. 그 부분이 약간 흔들린다고 느낀 것은 나의 망상 때문일까? 낯선 사람이 몸을 돌려 가까이 다가오자 먼저 앉아 있던 두 명의 여행객들은 쭈뼛거리며 물러났다. 이런, 그 사내에게서 나는 지저분한 냄새라니! 게다가 덥수룩하고 불결해 보이는 수염에서는 음식 냄새가 배어 나왔고, 사이먼의 컵에 닿을 만큼 앞으로 불룩 튀어나왔다. 사이먼은 툴툴거리면서 긴 의자 끝 쪽으로 옮겨 앉으며 옆에 앉는 사내를 피했다.
[좋은 저녁이군요, 기사님.]
그가 말하는 순간 사이먼은 숨을 딱 멈추었다. 높은 음색의 목소리는 강한 펀치처럼 그를 강타했다. 낯선 사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 사이먼은 어떤 산적을 연상시키는 짧은 갈색 눈동자를 보았다. 그리고 그의 의심을 확인시켜 주듯 낯선 이는 눈을 찡긋했다. 사이먼의 목구멍에서 끄응 하는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여기서 뭘 하는 거요?]
그는 튀어나오는 욕설을 애써 삼키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날 찾지 않았어요?]
그녀가 속삭였다. 지저분한 수염을 통해서 들려온 침착한 목소리를 듣자, 사이먼은 그녀의 목을 조르고 싶어졌다.
[대체 여기서 뭘 하는 거요, 그렇게 차려입고 말이오?]
사이먼은 이를 악다문 채 물었다. 그녀가 몸을 기울이자 지독한 냄새가 더 많이 풍겨 왔고, 뻔뻔스럽게 히죽 웃는 입 속에서 그 가운데 하나를 까맣게 칠해 마치 빠진 것처럼 보이는 치아가 드러났다. 그녀는 이런 일을 즐기는 것일까? 이 바보 같은 여자는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는 일을 삶의 보람으로 여기는 것일까? 사이먼은 그녀를 잡아 제정신이 들 때까지 마구 흔들어주고 싶었다. 만약 이 여자에게 제정신이라는 것이 남아 있다면 말이지만.
[본래 모습으로 돌아다닐 수는 없잖아요, 안 그래요?]
벳시아는 논리적인 이유라도 되는 것처럼 진지하게 말했다. 그녀의 본래 모습은 어떤 것일까? 그런 생각은 사이먼의 분노를 자극했다. 늘 놀랍고, 흥미로우며, 어안이 벙벙해지는 여자가 여기에 있어...그리고 변장이나 속임수에도 능숙해. 하지만 마지막 부분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이먼은 속임수나 거짓말에 능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과 장난을 치지도 않았다. 그는 솔직하고 정확한 것을 좋아했다. 사이먼은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갑자기 조그만 선술집이 너무 갑갑하고, 어둡고, 숨막히게 느껴졌다. 신선한 공기가 필요했다. 좀더 맑은 정신으로 생각하기 위해서, 옆에 있는 여자의 진실이 무엇인지 결론을 내리기 위해서...
[좋아요, 원하는 게 뭐죠?]
그녀가 물었다. 낮은 목소리는 갈증난 그의 감각을 자극했다. 원하는 것이라니...단순한 단어가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고, 사이먼은 그녀를 향해 다시 한 번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그런 옷을 입고 있어도 소용없어. 사이먼은 어벙벙한 옷 아래 숨은 늘씬한 몸매를, 불쾌한 악취 아래 깔린 미묘한 체취를 잘 알고 있었다. 벳시아는 변장을 하고 있어도 지금까지 알던 어떤 여자보다 그를 흥분시켰다. 사이먼은 뜨거운 것이 목 위쪽으로 기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녀만이 자극할 수 있는 열기였다. 그는 짙은 속눈썹에 둘러싸여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았다. 조그만 방안 건너에서 들려오는 소음이 그의 주의를 끌었다. 두 행상인은 흥미롭게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이먼은 그들이 다시 고개를 돌릴 때까지 눈살을 찌푸렸으나, 이내 냄새 나는 늙은 거지와 바싹 붙어 앉은 자신의 모습이 이상하게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조금 떨어져 앉으면서, 그녀가 자극하는 감정 때문은 아니라고 애써 부인했다. 마치 사이먼의 불편한 심기를 알아차린 듯, 철면피 같은 여자는 몸을 더 바싹 기울이고는 더러운 손을 그의 팔에 올려놓으면서 친근한 척했다. 이상한 옷차림을 하고 있는데도 그녀의 손길이 닿자 사이먼의 내부는 더워졌다가 차가워지길 반복 했다. 그는 경고의 표시로 그녀를 향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벳시아는 뻔뻔스럽게도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자, 아무 것도 필요 없으면 신사 양반...]
선술집을 경영 하는 몸집이 억센 사내가 컵으로 벽을 쳤다.
[만약 먹지 않으려면 나가 보시오.]
사이먼은 벌떡 일어났다. 그 사내는 마치 자신과 벳시아가 뭔가 불법적인 일에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모욕적인 발언을 듣는 순간, 사이먼은 주먹을 불끈 쥐었지만 벳시아의 정체 때문에 참을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서 좋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그가 망설이며 서 있는 동안 그녀는 이미 문을 향해 나가고 있었다. 사이먼은 무서운 시선으로 방안을 둘러본 다음, 그녀 뒤를 따라나갔다. 갑갑한 실내에서 나가 해질녘의 부드러운 햇살을 맞자 몸의 긴장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어두컴컴한 선술집 같은 좁은 공간에 갇혀 있는 것은 정말 질색이었다. 그는 몸을 똑바로 펴고 허파를 씻어낼 수 있도록 신선한 공기를 여러 번 깊이 들이마셨다. 하지만 신선한 공기도 분노를 삭이는 데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사이먼은 분노의 원인 제공자가 커다란 걸음걸이로 길 아래를 향해 걸어가는 것을 깨닫고 불만스런 목소리로 툴툴거렸다. 계속되는 거짓말로 자신을 얽어매는 그녀를 제정신이 들만큼 세차게 흔들어 주고 싶었다. 그러나 벳시아는 빨랐다. 그의 손을 쉽게 피하면서 몸을 구부리고 나뭇가지를 집어들었다.
[아하! 여기에 있었군. 자...]
그녀가 말했다.
[길을 따라 내려가는 것을 도와주렴.]
벳시아는 마치 늙은이처럼 나뭇가지를 지팡이 삼아 짚고 발을 절룩거리면서 걸어갔고, 사이먼은 말문이 막힌 채 그녀의 모습만을 바라보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나서 제정신을 차리고 나자 그녀는 벌써 저만큼 가고 있었다. 하지만 사이먼은 화를 억누르고 금세 따라잡았다. 물론 이곳에서 누굴 만날지 모르는 상황이므로 벳시아가 그런 위장을 하는 것은 당연했다. 사이먼은 이를 악다물고 침묵을 지켰다. 벳시아는 또다시 나를 바보로 만들고 성취감을 한껏 즐기고 있겠지. 아까 선술집에서도 그녀는 나와 달리 너무나 당당하게 고개를 쳐들고 있었어. 어떤 남자가 그토록 뻔뻔스런 여자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면서 고개를 빳빳이 들 수 있단 말인가? 아무도 없을 거야. 이제는 그녀를 도와주는 척하지 않을 거야. 그는 드문드문 흩어져 있는 오두막집을 지나 마을 끝까지 가는 동안 절룩거리며 걷는 그녀를 철저하게 무시했다. 어둑어둑한 시골 저녁, 엿보는 눈과 귀가 없는 곳에서 마침내 그녀와 마주 볼 것이다. 하지만 그녀와 무엇을 할지는 정확히 결정하지 못했다. 사실 고요 속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깊고 분명하게 울려 나올 때에도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무슨 일이죠?]
그녀가 묻자 사이먼은 고개를 돌렸다. 벳시아와 만나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간단 명료했다. 그는 던스탄처럼 전사로서 성장했다. 누군가 영토나 가족을 위협하면 그들을 위해 싸웠고, 불의가 있으면 그것을 깨뜨리기 위해 싸웠다. 모든 것이 단순했다. 조프리와는 달리 그는 보지 않고는 믿지 않았다. 물론 드 부르그 가문의 모든 남자들처럼 글을 읽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종이에 쓰여 있는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는 이유로 읽는 일에 취미를 붙일 수 없었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지 않으면 저자가 고백한 사실에 의심이 남았다. 형제들 가운데 몇몇이 그러는 것처럼 감정에 흔들리지도 않았다. 사이먼은 가족에 대한 존경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감정도 소유하지 않았다. 그렇게 살아온 그가 그야말로 더러운 거렁뱅이 같은 차림을 한 여자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단 말인가? 사이먼은 너무나 혼란스러워져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브리스를 만나지 못했소. 따라서 지금까지 알아낸 것은 하나도 없소.]
그가 중얼거렸다.
[하! 그럴 줄 알았어요. 개자식 같으니!]
지저분한 여자가 거칠게 중얼거렸다.
[당신은 이제 그가 나쁜 자식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았을 거예요.]
사이먼은 무슨 생각을 해야 할지 몰랐다. 벳시아가 앤스퀴스의 정식 후계자라는 증거가 조금도 없었다. 그리고 어떻게 상상력이 풍부한 이 여자를 믿을 수 있겠는가? 그것도 천한 거렁뱅이 차림에 썩은 냄새가 나는 여자를 말이다. 사이먼은 벳시아를 향해 돌아섰다.
[이런 악취는 대체 어디서 나는 거요?]
그가 윽박질렀다. 벳시아는 검게 칠한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그가 노려보자 그녀는 헝클어진 수염을 아래로 쓸어 내렸다.
[양의 분뇨와 상한 우유를 섞은 거예요.]
그녀는 마치 대단한 비밀을 말하는 것처럼 속삭였다. 사이먼은 그 불결한 수염을 어떤 짐승의 털로 만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수염을 잡아당기고 매끈하고 단단한 턱 선을 드러내는 것을 보자, 마치 똑바로 조준된 화살을 맞은 사람처럼 움찔했다. 사이먼은 마치 가슴이 아픈 사람처럼 손을 들어 가슴을 문지르면서 자신을 바라보는 얼굴을 응시했다. 순간 증거가 충분치 않은데도 그녀가 자신이 주장한 바로 그 여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이먼은 벳시아를 믿었다. 나는 그녀를 믿어. 그런 사실은 어떤 주먹보다도 더 세게 사이먼을 강타했다. 사고 체계 내에서의 거대한 도약과 함께 그는 그녀의 이야기를, 정체를, 벳시아 버넬에 관한 모든 것, 잃어버린 귀족의 딸, 도적, 사기꾼, 전사, 그리고 여자라는 사실을 믿었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죠?]
그녀가 물었다. 사이먼은 새로 발견한 믿음의 힘을 빌려서 자신의 존재를 자꾸 잊어버리는 그녀를 마구 흔들어 주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그녀를 팔에 안고 의심에서 해방된 자신을 축하하기 위해 빙빙 돌고 싶었다. 그는 끔찍한 수염을 찢어 버리고 불쾌한 악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직은 뭔가가 그를 막았다. 사이먼은 그냥 서서 얼굴을 찌푸린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그를 끌어내기 위해 다른 방법을 써야 하오.]
사이먼이 마침내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에게서 몸을 돌린 그는 길에서 벗어나 풀이 커다랗게 자란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 갔다.
[방법이 있을 거요.]
그가 중얼거렸다. 일년 전, 아니 심지어 일주일 전만 해도, 그는 두 번 생각 하지 않고 앤스퀴스로 진군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망설 였다. 전사로서 살아온 이래 처음으로, 사이먼은 강한 힘으로 이길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특히 벳시아의 경우가 그랬다. 하지만 거기에 뭔가 다른 것이 있는 걸까? 벳시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뒤를 흘끔 보던 사이먼은 패배감으로 어깨가 푹 수그러든 그녀를 보았다. 벳시아의 슬픔이 그대로 전달되는 기분이었다. 오랜 침묵 끝에 그는 그녀의 어깨를 향해 두 손을 올렸다가 그냥 떨어뜨리고는 바보처럼 그녀의 등만 응시했다.
[안 돼요.]
벳시아가 말했다.
[나는 그것이 대답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만약 충분한 인원이 확보된다면, 그래서 이길 수 있다면 말이죠. 하지만 지금은...잘 모르겠어요. 당신은 내게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의 목적을 오히려 망칠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죠, 포위 공격 같은 것 말이에요.]
[그렇소.]
사이먼이 대답했다.
[오랫동안 포위 공격을 하면 들판은 엉망이 되고,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이 굶어 죽소. 브리스의 손 아래서 이미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더욱 잔인한 고통이 될 거요.]
사이먼은 공격을 위한 다른 방법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는 전사였다. 시작도 하기 전에 실패한다는 것은 인정할 수 없었다. 이럴 때 조프리가 있다면 유혈 사태 없이 분쟁을 해결할 수 있으련만...하지만 사이먼은 이내 그런 생각을 지워 버렸다. 브리스 스컬베인의 피를 한시바삐 보고 싶었다. 아니, 도박의 시간은 지나갔다. 이제는 조프리 대신 던스탄 형이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사이먼은 한때 형의 도움을 구하느니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적이 있지만, 지금은 형의 도움이라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버넬은 그의 가신이니까. 하지만 던스탄이 올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사이먼은 요새화된 건물로 들어가기 위해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수단을 떠올렸다. 그러나 대부분은 너무 느리고 방어하는 사람의 눈에 띄기 쉬웠다. 던스탄이 잡혔을 때 그들은 성을 탈환하기 위해 비밀 통로를 통해 웨섹스로 들어갔다.
[앤스퀴스로 들어가는 비밀 통로는 없소?]
사이먼이 물었다.
[아뇨. 난 모든 통로에 대해 알고 있지만 그런 것은 없어요.]
벳시아가 대답했다. 지팡이를 짚은 채 어깨를 푹 수그린 그녀의 모습을 보던 사이먼은 재빨리 길바닥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누군가가 마을에서 걸어나와 숲 속으로 들어갔다.
[광부예요.]
벳시아가 몸을 펴면서 말했다. 사이먼은 빙그레 웃으며 되물었다.
[광부?]
[그래요.]
벳시아가 대답하며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당신을 도와주는 광부들이 많이 있는 거요?]
[그래요. 사냥터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브리스를 증오해요. 그가...]
그녀는 말꼬리를 흐리면서 사이먼을 바라보았다.
[지금 웃고 있군요.]
그녀가 속삭였다. 사이먼은 다급히 시선을 돌렸다.
[그렇소, 웃고 있소.]
그가 말했다.
[방금 좋은 생각이 났소. 장원 아래로 땅굴을 파는 거요.]
[땅굴이요?]
[그렇소.]
그가 대답했다.
[브리스가 무슨 짓을 하기 전에 집을 도로 찾을 수 있을 만한 곳을 향해 땅굴을 파들어가는 거요. 비록 당신네 광부들처럼 솜씨가 좋은 것은 아니지만, 성을 포위 공격할 때에 흔히 쓰는 방법이오.]
[아마 효과가 있을 거예요.]
벳시아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래요, 바로 그거예요!]
그녀는 기쁨에 겨운 나머지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사이먼은 처음에는 불쾌한 악취만을 느꼈지만 이내 자신의 몸을 짓눌러오는 그녀의 단단하고 늘씬한 몸매를 느낄 수 있었다. 사이먼은 얼떨결에 그녀의 몸을 끌어안았고, 그 순간 전에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이상한 교감을 느꼈다. 벳시아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자신에게서 몸을 떼어내자 사이먼은 희망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마치 뭔가를 강탈당한 기분이었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던 그는 자신의 옷에 묻은 냄새를 맡고 목이 꽉 메이는 것을 느꼈다.
[만약 당신이 광부 몇 사람만 모아 준다면 우리는 앤스퀴스에서 가장 가까운 사냥터 가장자리에서부터 파들어갈 수 있소, 내일 당장 말이오.]
그가 중얼거렸다.
[당신은 브리스가 절대로 성문 바깥으로 나오지 않았다고 말했는데, 그럼 그가 당신의 무리를 찾으러 병사들을 내보낸 적이 있소?]
사이먼은 이미 거리가 가까우면서도 잘 보이지 않는 최적의 장소를 결정해 놓았다. 벳시아가 대답하지 않자 그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해야 할 일이 많을 거예요.]
벳시아가 그의 시선을 피하면서 말했다. 그래, 배더슬리에는 해야 할 일이 많아. 하지만 지금 이것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도 없어. 전투를 앞에 두고 있는 마당에 지루한 회계 장부와 씨름을 벌이고 농노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일을 선택할 이유가 없어.
[반드시 해야 할 일들이 있소, 그렇소. 하지만 이것 먼저 해결해야 하오.]
사이먼이 대답했다.
[하지만 당신은 광산을 좋아하지 않잖아요.]
벳시아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지만 그녀의 말투에 들어 있는 의심의 그림자는 사이먼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그렇지 않소. 나는 일이 완벽하게 될 때까지 지휘할 거요. 그렇지 않으면 당신이 위험하오.]
그가 완고하게 대답했다. 비록 벳시아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사실은 인정했지만, 그 밑에 있는 오합지졸은 믿기 힘들었다.
[당신은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소? 지금 당신과 함께 가겠소.]
언제나 침착함을 유지하던 산적 여자도 강력한 그의 의지 앞에서 조금 흔들리는 것 같았다. 사이먼은 그녀가 아직도 자신을 완전히 믿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이먼은 화가 치밀었다. 어째서 나는 그녀의 믿음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것일까? 그녀가 계속 거리를 유지하자 그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는 주변에 숲이 무성하고 어둠이 깊어가자 그녀의 부하들이 갑자기 들이닥칠 것을 대비하여 칼자루에 손을 올려놓았다.
[내 스스로 해나갈 수 있소. 당신의 광부들이 아니더라도 말이오. 나의 부하들 가운데서 고를 수 있을 거요.]
그는 이를 악다물고 말했다. 철면피 같은 여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형을 위해 앤스퀴스를 탈환할 거야! 사이먼의 위협은 그녀에게 경종을 울린 것이 분명했다. 물론 그녀는 숨기려고 애써 노력했지만 소용없었다.
[내일.]
그녀가 숲을 향해 돌아서며 말했다.
[숲 속 빈터에서 만나요.]
계속 물러서고 숨으려고 하는 그녀를 보자 그는 화가 났다. 사이먼은 손을 내밀어 그녀를 잡으려고 했지만 그녀는 마치 아침이 되어 깨어 버린 꿈처럼 어두운 숲 속으로 재빠르게 사라져 버렸다. 갑자기 떠나버린 그녀의 행동에 깜짝 놀란 사이먼은 실망감에 신음 소리를 냈다. 오늘밤에는 그녀와 함께 토끼를 잡아먹고 시간을 보낼 수 없을 거야.
[빌어먹을! 당신은 지금 자살을 하려는 거라고!]
그는 소리쳤다. 사냥터에는 남자 옷을 입은 한 사람의 여자쯤은 간단히 해치울 수 있는 위험들로 가득했다. 순간 사이먼은 그녀의 뒤를 쫓아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자존심이 막아섰다. 쳇! 그런 여자에게 무슨 일이 생긴들 내가 알 게 뭐야? 성가시고 무능한 여자 같으니! 난 벳시아에 대해, 그녀가 잃어버린 권리, 또는 밤의 숲 속을 돌아다니면서 맞부딪칠지도 모르는 위험에 대해 염려하지 않을 거야. 사이먼은 단호한 태도로 성큼성큼 걸어가면서 가슴에 느껴지는 고통을 애써 무시했다. 이 아픔은 벳시아와 아무 상관없는 거야. 이것은 분명 플로리안이 말한 대로 나의 나쁜 식습관 때문일 거야. 벳시아 때문에 생긴 게 절대로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