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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사 벳시아-7화 (7/16)
  • 7.

    사이먼은 안개가 자욱한 이른 아침 회색 햇살 속에서 깨어났다. 물기를 떨어내던 그는 모닥불이 꺼진 것을 보고 재빨리 일어나 한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다른 한 손은 칼자루 위에 얹은 채였다. 하지만 그런 조심성은 불필요했다. 내버려진 나무토막을 헤집어 놓은 흔적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만족스러웠다. 오늘은 논리적으로 이야기를 나눈 다음에 그녀와 함께 배더슬리로 돌아가서...순간 숲 속의 빈터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이먼은 즐거운 상상을 멈추었다. 그는 재빨리 몸을 굴리면서 일어나 주변을 살펴보았다. 피가 끓어올랐다. 벳시아가 사라졌어! 물론 볼일을 보기 위해, 잠깐 자리를 비웠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사이먼은 본능적으로 벳시아가 가까운 곳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아주 오래 전에 가버린 것이다. 사이먼은 하늘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그 여자가 자신에게서 도망쳤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겨드랑이 밑에서 날개가 솟아 날아가 버린 것일까? 사이먼은 하늘을 향해 주먹을 들어올리면서 낮은 목소리로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했다. 그녀를 곁에 꼭 붙들어 두었어야만 했어. 빌어먹을 여자 같으니! 벳시아는 단순한 도적이며 듣기 좋은 이야기를 꾸며댔을 뿐이야. 그녀의 거짓말에 휘둘리지 말았어야 했어. 반드시 잡고 말겠어. 벳시아는 내가 다스리는 법정에 서서 죄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사이먼은 스스로를 바보라고 생각했다. 여자에게 속은 나를 다른 형제들이 안다면 얼마나 비웃을까! 나머지 형제들과는 달리 그는 한 번도 예쁜 얼굴에 속은 적이 없었다. 심지어 그런 얼토당토않은 일은 이해 조차 못하던 내가 아니던가! 게다가 도움을 요청해 놓고서 그냥 사라져 버리다니...벳시아 버넬은 죽었고, 이 기회주의자인 매춘부가 그녀의 이름을 도용한 것이 분명했다. 물론 다른 가능성도 있었다. 그녀가 주장하는 대로 그 여자는 벳시아 버넬이 분명하지만 자신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도망쳐 버렸을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이 자신을 믿는데도 말이다. 그는 드 부르그 가문의 남자로서 이름 자체가 신용이었다. 아니, 그 여지는 장난을 치고 있는지도 몰라. 사이먼은 화가 치밀었다. 내가 분개하는 이유는 그녀가 사라졌기 때문이 아냐. 단지 마주칠 때마다 나를 능가하는 재주를 보여주는 것에 화가 날 뿐이야. 더욱 나쁜 것은 끓어오르는 열정과 좌절감을 동시에 느끼도록 만든다는 사실이었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사이먼은 예전에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삶의 고통을 절감했다. 마치 자신의 능력과 지혜, 그리고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할 수 있는 대단한 전투가 눈앞에 다가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최후의 승리는 바로 나의 몫이 될 거야. 사이먼은 그런 생각을 하며 엄격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사소한 충돌에서는 그 여자가 승리했을지 모르지만, 아직 전쟁을 치르기 전이야. 전리품들은 바로 나의 것이야. 기분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사이먼은 빈터를 돌아다니면서 자신이 남긴 흔적을 모두 지웠다. 벳시아 역시 같은 일을 했다. 그들이 함께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을 상기시킬 만한 옷 한 조각이나 머리카락 한 올도 남기지 않았다. 사이먼은 실망감이 분노로 변하는 것을 애써 무시하면서 옳은 결정을 내리기 위해 머리 속을 정리했다. 다시 그녀를 찾아나설 수도 있었다. 그러나 본능은 더 이상 숲 속에서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고 타일렀다. 의심할 여지없이 벳시아는 부하들을 시켜 나를 감시하고 있을 거야. 그래, 그 여자와 다시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브리스라는 작자를 만나 앤스퀴스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진위를 알아내야 해. 만약 벳시아의 주장이 거짓말이었다면, 병사들을 사냥터로 보내 산적들을 소탕할 거야. 사이먼은 어디에서 그녀를 찾아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숲 속으로 도망칠 게 뻔했다. 버려진 광산으로 걸어가던 벳시아는 부하들이 자신을 맞이하며 건네는 인사말을 거의 듣지 못했다. 벳시아의 기분을 알아차린 존은 재빨리 옆으로 물러섰다. 하지만 펄민은 꿈쩍도 하지 않은 채 그녀의 옷이 젖었다고 큰소리로 떠들어댔다. 고집 센 궁수를 슬쩍 피해 나가기엔 너무 화가 난 벳시아는 손을 내저으며 그를 물리쳤다. 비록 해가 뜨기 전에 사이먼 드 부르그를 남겨놓고 떠나오긴 했지만 머리 속에는 아직도 그 오만한 기사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가 어떻게 감히? 벳시아는 야영지로 돌아오면서 같은 질문을 수없이 되뇌었지만 만족스런 대답을 찾아내지 못했다. 어떻게 자신의 목숨을 걸고 사냥터로 들어올 수 있단 말인가? 전형적인 남자! 잘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나에게 무엇을 하고, 어디로 가고, 어떻게 행동하라고 지시하려 들다니...빌어먹을 오만함 같으니! 나와 동료들은 고압적인 그의 간섭 없이도 잘 헤쳐 나왔고, 앞으로도 잘 해나갈 거야. 물론 그가 정말로 브리스를 내쫓아주길 원하지만 그의 도움에 대한 대가가 너무 컸다. 벳시아는 한 남자, 아니 다른 사람의 횡포 아래서 몇 년을 지냈다. 과거 몇 년 동안 그녀는 다른 사람의 명령대로 일했다. 명령이 아니면 대화를 하지 못하는 성질 급한 기사에게 절대로 나 자신을 맡기지 않을 거야. 벳시아는 사이먼의 오만함을 떠올리자 화가 치민 나머지 빠른 말로 마구 지껄여대는 펄민 곁을 쿵쾅거리며 지나쳤다. 사이먼 드 부르그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듣길 원했다. 아니, 그는 복종을 원해! 하! 그러나 나 벳시아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여자가 아니야. 그녀는 스스로 결정을 내렸다. 그 남자가 나의 소망이나 의견을 물어 보기라도 했던가? 아냐, 사이먼은 자신의 말을 하기에 너무 바빴고, 그녀가 유순하게 따라오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상황이 그토록 심각하지 않았다면 벳시아는 웃음을 터뜨렸을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의 의견 충돌은 그저 문제의 일부분일 뿐이었다. 게다가 사이먼 드 부르그가 무릎을 꿇고 그녀에게 함께 가달라고 애걸을 했더라도 벳시아는 그와 동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리 그의 이름이 명예롭다고 해도 낯선 이의 말을 쉽게 믿을 수는 없지...오, 유혹적인 것은 사실이야, 벳시아는 인정했다. 사이먼 드 부르그는 강한 인상을 받지 않고서는 못 배길 만큼의 위엄을 지닌 사내였다. 그녀는 늘 칼을 든 전사들은 명예와 선량함을 소중히 여긴다고 믿었다. 그러나 희망과 소원은 참담한 현실과는 달랐다. 벳시아는 누군가 자신을 구해 줄지 모른다는 희망과 함께 그런 꿈들을 포기했고, 혼자 살아남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벳시아가 무겁게 가라앉은 기분으로 광산 입구로 다가갔을 때, 궁수 한 명이 앞으로 나오며 그녀의 주의를 끌었다.

    [우린 당신이 피운 불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신호를 보내지 않으시기에 그냥 멀리 떨어져 있었죠.]

    그가 보고했다.

    [고마워요.]

    벳시아는 수치심과 감사의 혼합이라는 기묘한 기분을 애써 무시하며 대답했다. 비록 사이먼 드 부르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자신의 의무를 다하기는 했어도 그와 같이 지낸 저녁시간을 즐겼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전쟁과 영광에 관한 그의 이야기나 자신의 사냥 기술을 본 그의 놀라움, 그가 곁에 있다는 것...

    [뭐요?]

    펄민이 물었다. 그는 다른 궁수를 밀어내고 벳시아 앞에 서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젯밤 어디에 있었소? 이 바보는 나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단 말이오.]

    그는 경멸 섞인 시선으로 옆에 선 궁수를 노려보았다. 벳시아는 붉게 달아오른 펄민의 얼굴과 도전적인 자세를 흘끗 보며 화를 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자신의 행방은 그가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말해 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지난 몇 달 동안 사람들을 이끌면서 인내심이 많이 늘어난 탓인지 그녀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면서 무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리의 일을 도와줄 사람과 만났어요.]

    펄민의 눈썹이 아래로 내려갔다.

    [우린 이미 많은 지원을 받고 있소.]

    그가 경멸하듯 말했다.

    [밤에 당신을 우리 야영지에서 데려간 사람이 누구요?]

    그가 의심스럽다는 듯 물었다. 벳시아는 거짓말을 하기가 힘들었다. 사실을 아는 사람이 근처에 서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사이먼 드 부르그와 함께 있었어요.]

    그녀가 솔직하게 인정했다.

    [사이먼 드 부르그라고! 존, 그것을 보고서도 가만히 있었던 거야?]

    펄민이 소리쳤다. 벳시아는 자신의 분노가 위험 수위에 도달했음을 느꼈다.

    [존은 날 감시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또한 우리들의 지도자도 아니고요. 어째서 나의 행방에 대해 그가 모두 알고 있어야 하죠?]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사태를 눈치챈 사람들은 화가 난 두 사람을 남겨놓고 뒤로 물러섰다.

    [그는 나에게 말을 해주었어야 했소! 당신이 안전한지 확인을 해야 한단 말이오.]

    펄민이 떠들어댔다.

    [내 몸 하나쯤은 나 혼자 지킬 수 있어요.]

    벳시아가 대답했다.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으니까요.]

    펄민은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 역시 벳시아가 자신의 몸은 지킬 능력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비난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당신은 사이먼 드 부르그를 잘 돌봐주었소? 그래서 그와 단둘이 밤을 보낸 거요?]

    벳시아는 붉어진 그의 얼굴을 한 대 후려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억지로 참았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거죠? 그와 함께 있었지만 아무 일도 없었어요. 어째서 당신은 아무 것도 아닌 일을 크게 만드는 거죠?]

    [그는 우리의 적이기 때문이오!]

    펄민이 외쳤다.

    [그것은 아직 증명되지 않았어요.]

    벳시아는 무뚝뚝하게 말하면서 펄민에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

    [어쨌든 나는 사이먼 드 부르그와 그의 계획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고 싶어요. 그리고 그렇게 할 거예요.]

    벳시아는 무모하게 대드는 펄민을 한참 동안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가 사이먼 드 부르그와 함께 잠을 잔 창녀라고 생각하는 걸까? 전형적인 남자들의 생각이군! 그들은 세상 전체가 자신들의 하체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어. 벳시아는 속이 뒤틀렸다. 그녀는 여자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고 남자 부하들을 이끌기 위해 오랫동안 힘들게 일해 왔다. 자신이 획득한 존경을 무너뜨릴지도 모르는 질문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내가 설령 사이먼과 잠자리를 함께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간섭할 일이 아니잖아? 갑자기 벳시아는 온몸이 후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드 부르그는 너무나도 자신 만만했다. 자신이 찬사를 보내 그의 오만함을 더 부추기고 싶은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하지만 이들 사내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벳시아는 그들에게 꼴사나운 욕망에 의해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은 강한 여자로 남아야 했다. 그녀는 조금도 움츠리지 않고 펄민의 시선을 마주 보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고집 센 궁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몇 마디 거친 욕설을 중얼거리던 그는 마침내 발뒤꿈치를 빙글 돌리고 저만큼 걸어가 버렸다. 그를 달래주기에는 머리 속이 너무나 복잡했다. 그녀는 허리춤에 두 손을 올린 채 급히 만든 야영지를 살펴보았다. 또다시 이동해야만 했다. 사이먼 드 부르그 때문에. 드 부르그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과는 상관없이 벳시아는 자신에 대한 그의 갑작스런 관심이 걱정스러웠다. 사이먼 때문에 야영지를 이미 한 번 옮기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사이먼은 조금도 어렵지 않게 새 은신처를 발견했다. 마치 잘 훈련된 동물처럼 그녀가 심어 놓은 파수병들의 눈길을 피하면서 사냥터를 돌아다녔다. 맞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사이먼 드 부르그는 얕잡아 볼 수 없는 기사다. 사이먼을 믿을 수 있는지 없는지와는 상관없이 그가 자신들의 은신처를 찾아 배회한다는 생각을 하자 불안해졌다. 벳시아는 그가 자신들을 다시 찾아내도록 기다릴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존, 사람들을 모아요.]

    그녀가 부드럽게 명령했다. 이젠 과감한 행동을 할 시간이다. 사이먼이 배더슬리로 돌아왔을 때 사람들은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흘끔흘끔 보다가 잔뜩 찌푸린 그의 얼굴을 보고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가 혼자서 숲으로 들어갔다는 소문이 온 성안에 퍼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데 익숙지 않았다. 집에서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언제나 스티븐이었다. 그의 탈출극은 거의 전설에 가깝다는 것이 로빈의 익살이다. 만약 그들이 사이먼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면 전투 능력에 대한 찬사가 전부였다. 지금까지는 그가 오가는 것에 대해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고, 사이먼 역시 그것을 좋아했다. 언제나 자신의 형이 성취한 것을-기사로서의 성공뿐 아니라 자신의 소유지-가지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웨섹스나 배더슬리만한 성은 너무 크게 느껴졌다. 그리고 자신을 방해 하는 사람들이나 마구 떠들어대는 혓바닥이 너무 많은 것 같았다. 비록 한때 조프리의 장원을 경멸한 적은 있지만, 지금은 재산은 둘째치고 자신에게 관심이 적은 곳으로 가고 싶었다. 소문! 난 그것을 철저하게 금지해야 해. 또한 소문들을 무시해야 하고. 내가 낮이나 밤을 어디서 보냈는지는 다른 사람이 상관할 바가 아니야. 갑자기 간단한 음식을 먹고 편안한 대화를 나누던 숲 속에서의 저녁이 크고 사치스런 성보다 더 좋다는 기분이 들었다. 사이먼은 입 속으로 욕설을 중얼거리면서 이런 종류의 삶은 비현실적인 것이라고 자신에게 타일렀다. 하지만 뒤이어 떠오른 황당한 생각 앞에서 멈칫했다. 날씨가 추워지면 벳시아는 어디로 갈까? 계속 나의 호의를 거절할까? 사이먼은 바싹 마른 궁수의 품안에 안긴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불쾌감과 분노를 못 이기고 으르렁거렸다. 생각과 이미지들이 가련한 여자를 향해 마구 뒤섞여 몰려들었다. 사이먼은 배더슬리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그런 문제들에 대해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맞서겠다고 결정을 내렸다. 벳시아를 자신의 마음속에서 지우는 데 가장 쉬운 방법은 그녀의 정체에 대한 진실 여부를 알아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급히 커다란 홀을 지나 일광욕실로 향하면서 집사를 소리쳐 불렀다. 사이먼은 마지막 방문 기간 동안 플로리안을 계속 고용했다. 캠피온에 있는 한 친구가 그를 추천했기 때문이었다. 플로리안 역시 자신이 충성심이 강하고 유능한 집사라는 사실을 여지없이 증명해 보였다. 그러나 그가 쓸데없이 말이 많다는 사실을 좋아하지 않는 사이먼은 이곳에 돌아온 이후로 될 수 있는 한 그와 말을 나누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집사의 기술이 필요했다.

    [영주님, 돌아오셨군요!]

    플로리안이 허풍스럽게 주인을 맞이했다. 그러나 사이먼은 그가 호들갑을 떨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초대장을 보내야겠네. 아니지, 이건 명령이야.]

    그는 방안을 가로지르면서 말했다. 그리고 질문을 하듯 눈썹을 불쑥 들어올리는 플로리안을 보고 얼굴을 찡그렸다.

    [적절한 문장을 사용하게. 초대를 받는 사람이 군주의 명을 받들어 이곳으로 오도록 해야만 해.]

    [누구를 부르시려는 건가요, 영주님?]

    플로리안이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름은 브리스 스컬베인이고 앤스퀴스에 살고 있네.]

    플로리안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망설이는 동안 사이먼은 평소와는 달리 먼저 입을 열었다.

    [왜 그러지?]

    [영주님의 명령에 이의가 있거나 건방지게 굴려는 뜻은 아닙니다만...영주님, 제가 아는 한 그 남자는 배더슬리에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을 텐데요.]

    플로리안이 말했다.

    [그래, 하지만 그는 앤스퀴스의 주인인 버넬 경을 대신하여 그곳을 다스리고 있어. 그는 영지의 주인 행세를 하고 있단 말이야. 따라서 그는 버넬의 충성심 역시 이어받아야만 하지.]

    아니면 전쟁을 치러야겠지, 사이먼은 소리 없이 맹세했다.

    [하지만 그는 단지 그곳의 방문객이 아닙니까?]

    플로리안이 물었다.

    [만약 그렇다면, 그곳으로 들어가는 사람을 막을 권리가 없어. 버넬 경은 나의 보호 아래 있기 때문에 만약 그가 브리스에게 위협을 당하는 중이라면 나에겐 간섭할 의무가 있지.]

    사이먼이 말하고는 잠깐 입을 다물고 창문을 응시했다.

    [그리고 버넬 경의 딸에 관해서도 논의할 이야기가 있네. 그녀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증거가 있어.]

    플로리안은 깜짝 놀랐다.

    [전 브리스에 관해 별로 듣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정말로 버넬 경을 집에 감금하고 그의 딸이 죽었다고 선언한 겁니까?]

    사이먼은 집사를 노려보았다.

    [내가 직접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었네.]

    그가 날카롭게 말했다. 플로리안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수그렸으나 그의 눈동자에 들어 있는 의심은 사이먼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물론 그 여자가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도 있지.]

    사이먼이 인정했다.

    [내가 알아내려는 것도 바로 그 거야, 진실.]

    사이먼은 눈을 가늘게 뜬 채 플로리안의 반발을 기다렸다. 하지만 집사는 남몰래 자신을 흘끔거릴 뿐이었다. 사이먼은 낮게 욕설을 중얼거리면서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만약 영주님의 믿음이 사실이 아니라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플로리안이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인가?]

    사이먼이 몸을 돌리면서 물었다. 드 부르그 사람들은 거짓말을 듣고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그러니까...]

    플로리안은 잠깐 말을 멈추었다. 단어를 신중하게 고르는 것 같았다.

    [만약 그녀의 아버지가 위험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니라면요? 제가 들은 바에 따르면 그녀는 브리스와 결혼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만약 버넬 경이 그녀에게 결혼을 명령했는데 그녀가 복종하지 않은 것이라면요? 아버지가 정해준 남자와 결혼하기 싫어서 도망간 여자는 그녀가 처음은 아닐 겁니다.]

    사이먼은 기가 막힌 표정으로 집사를 바라보았다. 그가 벳시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단순히 결혼이 싫어서 도망간 딸은 절대 아니었다.

    [그럼 그들이 그녀를 죽였다면...?]

    그가 비아냥거렸다.

    [그렇지 않을 겁니다!]

    플로리안이 말했다.

    [하지만 이런저런 연유로 자결한 여자들이 많이 있죠. 영주님은 그녀를 찾아 가족에게 되돌려주고 결혼을 시킬 생각입니까?]

    결혼? 벳시아? 사이먼은 그렇게 당황하지 않았다면 아마 웃음을 터뜨렸을 것이다. 그는 손을 들어올려 집사의 말을 부정하며 가슴을 문질렀다. 사실이 무엇이든지, 벳시아는 어느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그런 종류의 여자가 아니었다. 벳시아만큼 아내의 자리에 적합하지 않은 여자도 없을 것이다. 벳시아는 너무나도 남자 같다. 바보 같은 웃음을 짓는 겁쟁이 꽃이 아니라, 강하고 오만하고 용감하여 바느질과 집안 일을 배우는 곳에는 적응할 수 없는 여자였다. 벳시아는 자신을 그런 자리에 앉히려는 사람을 향해 화살을 겨눌 것이다. 그녀의 모습을 상상하던 사이먼은 저절로 나오는 미소를 애써 참았다. 사이먼은 벳시아의 결혼에 대한 생각을 떨쳐내며 날카로운 시선으로 집사를 보았다. 집사의 말투에서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내가 모르는 게 있는 건가?]

    그가 다그쳤다.

    [아닙니다, 영주님. 그저 모든 기능성에 대해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플로리안은 정말 아무 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사이먼은 눈살을 찌푸린 채 가늘게 뜬 눈으로 집사를 살펴보았다.

    [자, 좀더 알아낼 때까지 공연한 추측을 할 필요는 없겠지. 내가 직접 브리스와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생각해 보겠다.]

    사이먼의 목소리에서 짜증이 배어 나오는 것을 눈치챈 집사는 즉시 일어났다.

    [영주님, 분부대로 즉시 거행하겠습니다.]

    [좋아.]

    사이먼은 집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치 배더슬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앤스퀴스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눈을 감아 버리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하지만 사이먼은 그런 태만함을 탓할 핑계거리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집사의 말은 썩은 고기에서 나는 냄새처럼 허공에 남아 사이먼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만약 벳시아가 단순히 아버지의 명령을 거부한 것이라면? 사이먼은 그런 행동에 찬성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전혀 모르는 남자와 벳시아와의 결혼을 생각하자 기분이 몹시 나빠졌다. 그녀는 어떤 남자에게도 속하지 않을 거야. 그녀 아버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말이야, 사이먼은 확신할 수 있었다. 드 부르그 가문의 전사인 내가 허락하지 않을 거야. 사이먼의 입술에 미소가 천천히 떠올랐다. 만약 누구든 벳시아와 결혼하려고 들면 내가 가만 있지 않을 거야...던스탄의 대리인으로서 모든 사람이 사이먼의 의견을 매우 중요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어떤 결혼이든 허락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하지만 왜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며, 왜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가 하는 질문은 그냥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다. 사이먼은 전령이 앤스퀴스로 즉시 파견되었음을 알면서도 안절부절못했다. 도통 가만히 앉아 기다리는 일에는 익숙지 않았다. 그는 행동하는 사내였고, 시간이 지나자 점점 초조해졌다. 마침내 그는 산적 여자와 그녀의 이상한 행동들을 머리 속에서 몰아내겠다고 굳게 결심하고는 성벽을 지나 매 사육장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눈이 어두운 내부에 익숙해지자 사이먼은 횃대에 앉아 있는 다양한 사냥매들을 살펴보았다. 참매, 새매, 큰매와 쇠황조롱이(매의 일종)들이 기다란 방안에 질서 정연하게 앉아 있었다. 그리고 새를 길들이는 조련사의 낮은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 왔다.

    [영주님, 이곳까지 오시다니 정말 영광입니다. 제가 도와드릴 일이라도 있습니까?]

    조련사가 물었다. 사이먼은 자그만한 사내를 향해 몸을 돌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네 새들을 시험해 보고 싶군.]

    그가 말했다.

    [사냥을 가지.]

    하지만 배더슬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생물체도 사이먼의 주의를 그리 오래 끌지 못했다. 매는 우아하게 날아올라 먹이를 향해 몸을 던졌지만 사이먼의 머리 속에는 활에 화살을 얹고 목표물을 향해 발사하던 고독한 여인과 그녀의 강하고 유연한 몸매가 떠오를 뿐이었다. 욕설을 중얼거리던 그는 마침내 사냥 중지를 선언하고 성을 향해 급히 말을 몰았다. 아직도 전령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안 사이먼은 안절부절못하면서 성벽을 지나 우유 짜는 곳과 양조장 등을 돌아 다녔다. 그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집사가 급히 다가온 것은 사이먼이 부엌으로 가는 도중이었다. 사이먼은 그와 마주치기보다는 차라리 옷장 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플로리안은 이미 그의 옆에 서서 기쁜 표정을 지으며 절을 했다.

    [성안을 살피러 돌아다니시는 줄 몰랐습니다.]

    집사가 말했다.

    [양조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난해에 에일 맥주의 생산량이 얼마나 늘었는지 말씀해 드릴까요?]

    플로리안은 사이먼의 허락도 떨어지기 전에 시시콜콜한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조프리나 아버지라면 그런 이야기를 즐겨 들을 테지만 사이먼은 화가 치밀었다.

    [충분해.]

    그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보고서를 준비하도록, 던스탄 형님에게 보내기 전에 내가 한 번 훑어보겠다.]

    그러고는 다급하게 걸어 가버렸다. 형은 하루를 이렇게 보내는 것일까? 사이먼은 궁금했다. 에일 맥주의 수확량을 파악하고 우유 짜는 것을 감독하면서? 던스탄의 전사로서의 나날은 이제 끝났다. 비록 드 부르그 가문의 장남은 자신의 의무에 대해 별로 말하지 않았지만, 넌지시 들판의 곡식이 잘 자라고 수확이 잘 된다는 말을 비치곤 했다. 그때 사이먼은 단지 고개만 끄덕이며 자신의 할 일을 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것을 알 것 같았다. 아버지 역시 캠피온에서 같은 일을 하고 계셨다. 지난 번 배더슬리에 왔을 때 사이먼은 못된 주인을 섬기던 타락한 기사들을 내쫓고, 군대를 조직하고, 새로운 집사를 임명하고, 형수의 당연한 권리를 찾아 주었다. 그러나 지금은 잘 운영되는 성을 감독만 할 뿐 할 일이 하나도 없었다. 싸울 전쟁도, 훈련시킬 병사도 없었다. 도전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산적 무리와의 일을 제외하고는...사이먼은 불만스럽게 욕설을 중얼대며 머리 속에 떠오른 생각을 떨쳐버렸다. 전령이 돌아올 때까지는 벳시아에 관해 아무런 생각도 하지 말자. 성문을 흘끔 바라보았지만 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고 태양은 점점 서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숲 속에서 야영하던 생각이 떠올랐다. 사이먼은 저녁식사를 하기 전에 목욕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버지 캠피온 백작은 청결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자신의 아들들에게도 그것을 강조했다. 사이먼은 홀을 성큼성큼 가로지르면서 목욕물을 준비하라고 큰소리로 명령한 다음 침실로 향했다. 시종이 갑옷을 벗겨 주기 위해 급히 달려왔다.

    [윤을 낼까요?]

    소년이 물었다.

    [아니.]

    사이먼은 놀라는 소년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곧 다시 입을 거야.]

    그가 중얼거렸다. 캠피온에서는 갑옷을 입고 저녁식사를 하지 않았지만 배더슬리에서는 달랐다. 성은 몇 년 동안 평화로웠지만 그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그의 부주의를 기다리는 적이 늘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브리스처럼 말이다. 배더슬리에 대드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하지만 멍청이들이 세상에 많이 널려 있다는 사실을 사이먼은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본 브리스의 행동도 별로 똑똑한 사내의 행동은 아니었다. 사이먼은 칼을 옆에 두고 시종을 내보냈다. 또한 둥근 나무 욕조에 따스한 물을 채워서 가져온 하인들도 내보냈다. 그들은 길고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젊은 여자 하나만 남겨놓고는 모두 물러갔다. 사이먼은 혼자 남아 있는 그녀를 향해 질문을 던지듯 눈썹을 불쑥 들어올렸다.

    [저는 아이다라고 합니다, 영주님. 집사 플로리안이 영주님의 목욕을 도와드리라고 저를 보냈습니다.]

    그녀는 두 손을 가슴에 다소곳이 모으고 눈을 내리깔았다. 여자가 나를 목욕시켜 준다고? 사이먼은 불만스럽게 으르렁거렸다. 아버지도 그런 관습에는 찬성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일곱 자식들이 정식 후계자를 낳길 원했다. 아내를 맹렬하게 보호하는 던스탄도 웨섹스에서 그런 일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사이먼은 여행을 하는 동안 그런 제안을 여러 번 받았지만 모두 거절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하면 자신의 관심이 현실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망설였다. 다른 하인들처럼 그녀도 내쫓아 버리려고 했지만 무엇인가가 그를 막았다. 소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그는 나머지 옷을 모두 벗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물 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한동안 눈을 감고 뜨거운 물기가 근육 속으로 스며드는 즐거움에 몸을 내맡겼다. 그러나 곧 하녀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다시 긴장했다. 그는 그녀가 꼼짝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눈을 뜨고 보니 하녀는 깜짝 놀란 듯 입을 크게 벌리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이먼은 불쾌해져서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상처받아 갈가리 찢어진 자존심을 회복하려고 했지만, 소녀의 눈동자에서는 자신에 대한 찬탄은 찾아볼 수 없었다. 사이먼은 자신의 육체에 대해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혹시 뭔가 모자라는 것은 아닌지 궁금해졌다. 혹시 벳시아가 나를 멀리하려 할지도 모르는 무엇이...

    [왜 그러는 게냐?]

    그가 다그쳤다.

    [죄송합니다만, 영주님.]

    하녀가 말했다.

    [너무...커서요, 영주님. 모든 것이요. 게다가 상처투성이고요.]

    소녀는 빨개진 얼굴로 대답했다.

    [전쟁을 많이 치르신 게 분명해요.]

    상처들. 사이먼은 기사로서의 활기찬 생활을 증명하는 증거물을 그냥 내버려두었다. 여섯 살 때 도끼에 팔을 벤 것을 시작으로 형제들과 벌인 한판 승부나 싸움터에서 얻은 부상으로 많은 흉터를 몸에 지니게 되었다. 나의 육체가 그토록 불쾌하게 보이는 것일까? 사이먼은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비록 외모가 다른 형제들에 비해 뛰어난 것은 아니지만 드 부르그 가문의 형제들은 모두 잘생긴 남자라는 평판을 받았다. 그리고 여자들의 불평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사이먼은 귀족 숙녀들의 아첨을 무시했고, 돈을 주고 산 매춘부들의 봉사로 만족했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벌거벗은 그의 몸을 보지 못했다. 그런 생각이 갑자기 사이먼의 기분을 거슬렸다.

    [나가거라.]

    그가 말했다.

    [하지만 영주님, 저는...]

    사이먼은 무서운 시선으로 소녀의 말을 막았고, 그녀는 옷을 떨어뜨린 채 달아났다. 문이 닫히자 사이먼은 물 속에 몸을 담그고 자신의 무릎을 바라보았다. 태어나서 두 번째로 왠지 약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더욱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이것이 모두 벳시아 버넬 때문이라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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