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여전사 벳시아-6화 (6/16)
  • 6.

    한순간 사이먼은 벳시아가 자신의 제안을 듣고 기쁨에 넘쳐 자신을 끌어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기분이...좋았다. 아니, 좋은 것 이상이었다. 지금까지 존재한 그 누구보다도 위대한 기사가 된 기분이었다. 형 던스탄보다 더 대단해진 기분이었다. 사이먼은 불만스럽게 무슨 말인가를 중얼거리면서 그런 생각들을 밀어버렸다. 브리스를 배더슬리로 초대한다고 해서 그가 온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브리스라고 해도 자신의 영주의 초대를 무시할 수 없을 것이고, 그것은 양떼를 훔치고 도적질을 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일 것이다. 또한 무모한 계획을 포기하고 자신과 함께 돌아가도록 그녀를 설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배고프지 않아요?]

    그녀가 갑자기 물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사이먼은 깜짝 놀라 현실로 돌아와 그녀를 보았다. 벳시아는 빙그레 웃었다. 입 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간 커다란 입술을 보자 내부에서 무엇인가가 꿈틀대는 것 같았다. 그는 저도 모르게 손으로 가슴을 문질렀다.

    [시간이 늦었어요. 토끼나 작은 동물들을 잡으러 내려가야겠어요.]

    그녀가 말했다. 이젠 사이먼이 미소지을 차례였다. 앤스퀴스의 창고에서 훔친 열매나 우유에 싫증이 난 것일까? 만약 벳시아가 고기를 먹고 싶다면 나에게 부탁하면 돼, 그녀가 직접 할 필요가 없어.

    [내가 하겠소.]

    그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벳시아는 고마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팔짱을 끼고 차가운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칼 하나로 무엇을 하겠다는 거죠?]

    사이먼은 얼굴을 붉히며 자신을 바보로 만들어 버리는 여자의 능력에 저주를 퍼부었다. 물론 벳시아의 말이 옳았다. 평소와는 달리 그는 혼자였다. 사냥개도, 매도, 화살도 없기 때문에 사냥을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당신의 활을 빌려주시오.]

    그는 무뚝뚝하게 말하면서 아까 그녀가 만지던 무기를 가리켰다.

    [안 돼요.]

    벳시아는 한 발짝 물러나면서 대답했다.

    [내가 할 일은 스스로 해요, 고마워요. 지난 몇 달 동안 그렇게 살아 왔어요. 호의는 고맙지만 당신의 도움은 필요 없어요, 영주님.]

    사이먼은 무엇이 자신을 더 짜증나게 만드는지, 그녀의 날카로운 혓바닥인지 아니면 마음대로 불러대는 그의 호칭인지 정확한 판단이 서지 않았다. 벳시아가 남자의 일을 하는 동안 내가 빈둥빈둥 서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사이먼은 반항적인 자세로 선 여자를 가늘게 뜬 눈으로 노려보았다.

    [만약 당신에게 허가증이 없다면, 왕실 소유의 숲에서 밀렵을 하는 것은 불법이오. 그런데도 도적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거요?]

    벳시아는 어정쩡한 변명을 늘어놓는 대신 오만한 미소를 지었고, 그것을 본 사이먼은 약이 올라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우리가 있는 곳은 왕실 소유의 숲이 아니라 버넬 가의 사냥터예요. 따라서 이곳에 있는 사냥감들은 모두 내 아버지와...나의 소유죠.]

    벳시아는 성큼성큼 걸어가 가느다란 손으로 화살에 활을 얹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자 분노가 조금씩 가라앉았다.비록 무기를 쉽게 다루고 있기는 해도 어딘가 서툴렀다. 사이먼의 본능적인 오만함이 다시 돌아왔다. 그는 너도밤나무 근처에 있는 울퉁불퉁한 바위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저녁식사를 마련해 보시오.]

    그가 놀려대었다. 벳시아는 조용함을 방해하는 그를 거센 눈길로 노려보았으나 아무 말 없이 활을 높이 들었다. 그녀의 어깨가 뒤로 젖혀지고 근육들이 긴장했다. 강인한 모습이었다. 사이먼은 온몸에 열기가 퍼지는 것을 느꼈다. 저도 모르게 그녀를 존경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벳시아가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사이먼은 그녀가 곧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하며 기다렸다. 사이먼은 자신이 그녀의 신임을 얻었다고 믿었다. 하지만 산적이 된 숙녀를 도저히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숲 속을 기웃거리면서 주위를 살폈다. 아마 벳시아는 자신의 사냥감이 보금자리로 사용하는 은신처가 어디 있는지 알 거야, 사이먼은 속으로 생각했다. 혹시 다른 산적들이 있는지 찾아보았지만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숲 속 생물체의 모습과 소리만이 보이고 들릴 뿐이었다. 그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면서 땅과 나뭇잎의 냄새를 즐겼다. 사냥터는 그에게 평화로움을 안겨 주었다. 그는 뒤로 기대어 집에서는 느낄 수 없는 편안함을 만끽했다. 하지만 조금 뒤 불안감이 되돌아왔다. 평화로운 시간을 즐기는 것도 잠깐, 그는 움직이고 싶었다. 오후는 저녁으로 기울어 갔다. 사이먼은 그녀를 찾아보았다. 벳시아는 아직도 덤불 속에서 활을 든 채 기다렸고, 사이먼은 그녀의 인내심과 힘에 찬사를 보냈다. 그가 막 헛된 노력을 그만 하고 돌아오라고 소리치려는 순간, 벳시아는 팔을 뒤로 힘껏 젖히고 자신 있게 화살을 날려보냈다. 사이먼은 날렵한 그녀의 동작에 너무 놀라 마치 누군가에게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동작은 지금까지 본 어떤 무용수보다도 우아했고, 집중력은 조프리를 능가할 만큼 강했다. 사이먼은 사냥감을 보지 못했지만, 그녀는 최고의 궁수와 견줄 만한 솜씨로 토끼를 잡았다. 이 여자는 나를 계속 놀라게 만들 셈인가? 사이먼은 거친 숨을 내쉬었다. 사냥용 매를 기르는 숙녀들이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활을 쏘고 검술에 능하며 사람들을 지도하는 여자는 처음이었다. 아니지, 조프리의 아내가 무기를 다룰 수 있지. 그러나 엘렌 피츠휴에 대한 생각을 떠올리자 혐오감이 고개를 들었다. 엘렌 피츠휴를 처음 보았을 때 그녀의 모습은 몹시 흉측했다. 머리카락은 헝클어지고 부대 자루 같은 칙칙한 황갈색 드레스를 걸친 채 단검을 휘두르는 중이었다. 비록 조프리가 그녀를 조금 깨끗하게 만들어 놓기는 했지만, 사이먼은 아직도 그녀를 괄괄하고 입성 사나운 여자라고 생각했다. 밤이 낮과 다른 것처럼, 벳시아는 엘렌 피츠휴와 완전히 달랐다. 남자의 옷을 입고 있지만 늘 단정하고 깨끗했으며, 머리카락도 꼼꼼하게 땋아 내렸다. 얼굴도 이지적이고 아름다웠다. 비록 가끔 혓바닥을 너무 날카롭게 휘두르기는 했지만, 벳시아는 부상당한 사람을 치료할 줄도 알았다. 그녀는 똑똑하고 강하며 그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유능했다. 정말로 남자와 거의 맞먹을 만한...그런 생각을 하자 사이먼은 기운이 빠지는 것 같았다. 그는 약하고 지루하지 않은 여자를 보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벳시아는 자신의 전리품을 들고 히죽 웃고 있었다. 마치 그에게 감탄의 말을 기대하는 것처럼.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벳시아는 고개를 들고 그가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일 때까지 똑바로 바라보았다.

    [잘 했소.]

    그가 퉁명스럽게 인정했다.

    [자, 이리 와요. 먹어야죠.]

    벳시아는 웃음을 감추려는 듯 고개를 푹 수그리며 말했다. 하지만 그는 속지 않았다. 그녀는 승리감을 맛보고 있을 것이다. 사이먼은 그녀를 시샘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능력과 인내심으로 전리품을 획득했다. 벳시아를 향한 사이먼의 존경심은 그녀가 자극해 오는 이상한 흥분이라는 또 다른 감정과 함께 점점 고조되었다. 사이먼은 그것을 애써 억누르고 벳시아가 저녁거리를 다른 사람에게 주어 버리지 않길 기대하며 뒤를 따라갔다. 사이먼은 저녁거리를, 아니, 그녀를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지 않았다. 벳시아 때문에 강철 같은 통제력을 잃을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단둘이 음식을 먹는다고 생각하자 피가 부글부글 끓는 것 같았다. 사이먼은 일부러 얼굴을 찡그리면서 이 여자와 싸워 이길 기회를 잡아야 한다고 자신에게 타일렀다. 하지만 내가 정말로 그녀를 이기고 싶어하는 것일까? 게임은 점점 혼란스럽게 변했다. 벳시아의 말을 듣고 나자 더욱 복잡해졌다. 만약 그녀의 주장대로 브리스가 그녀의 아버지를 가둔 것이라면, 그는 잘못된 것을 바로잡을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이 아직은 남아 있었다. 벳시아의 이야기에서 의심스러운 점은 찾아내지 못했지만, 사이먼은 맹목적으로 믿을 만큼 바보가 아니었다. 그녀가 거짓말로 자신을 속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얼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그는 안달이 난 듯 으르렁거렸다.

    [어디로 가는 거요?]

    [안전한 장소로요.]

    단둘이서? 사이먼은 의심스러웠다. 내부에서 여러 가지 감정들이 충돌했다. 이상한 경계심이 고개를 들었다. 이 여자가 자신에게 다시 술수를 쓸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직도 그녀가 위험스러운 존재로 여겨졌다. 이런, 하찮은 여자 하나도 다루지 못한다면 기사로서의 생명을 포기하는 게 더 나을 거야! 화가 치밀어 오른 사이먼은 발을 쿵쾅거리면서 앞으로 걸어갔다. 만약 조프리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여기라면 불을 피울 수 있어요.]

    그녀가 낯익은 바위를 밀어내며 말했다. 그가 도망친 뒤 내버려진 숲 속의 빈터였다. 그녀는 자신만의 공간으로 데려갈 수 없을 만큼 나를 신임하지 않는 것일까? 사이먼은 이상하게도 신경이 쓰였다. 자신도 물론 그녀를 확실하게 믿지 못하지만, 그래도 기분이 언짢았다. 벳시아는 내가 기사라는 것과 명예를 소중히 하는 남자라는 사실을 알아야 해. 그는 땔감을 모으는 그녀를 험상궂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마치 그는 아무짝에도 쓸 수 없다는 듯, 심지어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 듯 혼자 부지런히 일을 했다.

    [만약 누군가 보면 어떻게 하오?]

    그가 물었다. 벳시아는 빈정대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고, 사이먼은 마치 자신이 바보가 된 기분을 느꼈다.

    [만약 누군가가 사냥터로 들어오면 난 금방 알아요.]

    사이먼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투덜거렸다. 내가 그렇게 잘 속는 바보처럼 보였나? 그녀가 이 넓은 숲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알고 있다고 믿을 만큼? 사이먼은 그녀의 허풍스런 말을 듣고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벳시아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땔감을 쌓아 올리고 허리춤에 찬 돌을 부딪혀 불을 피웠다. 작은 불꽃이 생기 있는 불길로 자라났을 때 사이먼은 어정쩡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다른 먹을거리를 찾아보겠소.]

    사이먼은 중얼거리면서 덤불 아래 통통하게 자라는 버섯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는 재빨리 버섯들을 따고 야생 부추도 찾아냈다. 야영지로 돌아온 그는 그녀의 발 밑에 전리품을 쏟아 놓았다. 깜짝 놀란 벳시아는 고개를 들고 남자를 안절부절못하게 만들 만큼 강렬한 시선으로 그를 살펴보았다.

    [음식을 만들 줄 알아요?]

    그녀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사이먼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마주 쳐다보았다. 그녀가 자신을 조롱하는 것인지 아닌지 확실히 알기가 힘들었다.

    [혼자 할 수 있소.]

    사이먼은 그녀 옆에 쭈그리고 앉으면서 음식을 굽기 위한 꼬챙이를 준비했다.

    [놀랐어요, 영주님. 당신이 요리를 할 줄 안다고는 생각도 못했거든요.]

    벳시아는 그루터기에 앉아서 말했다. 사이먼은 화가 나 소리쳤다.

    [날 놀리는 거요?]

    [아니에요.]

    벳시아가 미소를 짓자, 사이먼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그저 당신의 기술을 보고 놀랐을 뿐이에요, 사이먼. 음식을 할 수 있는 남자는 거의 없잖아요.]

    사이먼은 그녀가 자신을 유혹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 보았다.

    [내 아버지는 우리 형제들 모두에게 뭐든 스스로 하도록 시키셨소.]

    [음...위대한 드 부르그 가문에 그런 일을 하는 하인들이 없다는 건가요?]

    벳시아는 그를 계속 바라보며 물었다.

    [나는 길가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오.]

    [전사라는 말이죠.]

    [그렇소.]

    고기가 구워지는 동안 사이먼은 그녀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참나무에 등을 기댔다. 그러고는 느긋한 자세로 앉아 있는 그녀를 살펴보았다.

    [부하들이 당신을 찾지 않겠소?]

    그가 물었다.

    [그들은 연기를 보고 내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 거예요.]

    벳시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지만 사이먼은 그럴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도 이 연기를 볼 것이고, 그녀 이외에 이 근방을 배회하는 다른 산적들도 있을 것이다. 또한 어떤 바보라도 그녀가 여자라는 사실을 쉽게 알아차릴 것이다.

    [혼자 돌아다니는 버릇이 있는 거요?]

    그는 조심성 없는 그녀에게 화를 내며 물었다. 벳시아는 어깨만 으쓱했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런 무심한 태도를 보자 사이먼은 더욱 화가 났다. 그녀는 혼자 이런 곳에 오지 말아야 해...아니, 이런 숲 속에 있으면 안 돼! 그녀의 무리들은 도적과 무법자로 구성된 오합지졸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사이먼은 그들이 얼마나 무질서한 무리인지 이미 보았다. 만약 그들 가운데 하나가 그녀를 차지하려 한다면...누가 그를 말릴 수 있겠는가? 그렇다, 그녀가 강인하다는 것과 무기를 능숙하게 다룬다는 사실은 잘 알지만 아무리 능력이 많은 여자라고 해도 완강한 남자 앞에서는...

    [길가에서 무엇을 하고 지내는지 말해 줘요.]

    벳시아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사이먼은 불미스런 상상을 얼른 떨쳐내고는 그녀의 조심성 없는 행동에 대해 한 마디 하려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저도 모르게 남쪽으로 여행할 때, 일행은 모두 학살당하고 기억 상실증에 걸린 배더슬리의 상속녀, 지금은 던스탄의 아내가 된 마리온을 발견했을 때의 일을 말하고 말았다. 그리고 형제들과 함께 자신의 성인 웨섹스에 갇힌 던스탄을 구해 준 얘기며 피츠휴를 패주시킨 이야기가 이어졌다. 사이먼은 마치 형제들과 하듯 조금도 거리낌없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벳시아는 대부분의 여자들처럼 말을 가로막거나 감탄사를 연발하지 않았다. 벳시아의 질문은 그의 남자 형제들이 물어보던 그런 종류였다. 어떻게 병력을 판단할 수 있었는가, 기병대나 보병 중 누가 더 중요한가, 어떤 종류의 활을 사용했나...사이먼은 즐거운 마음으로 대답했다. 형제들 가운데서 가장 사교적인 로빈과는 달리 사이먼은 쉽게 친구를 사귀지 못했다. 특히 외부에서 생활할 때에는 부하들과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게다가 형 던스탄이 가장 오래된 친구에게 배신을 당한 이래로 사이먼은 사람들을 더욱 조심했다. 그러나 벳시아는 달랐다. 명령을 들어야 하는 부하가 아니라 그런지 마치 형제들처럼 편했다. 그리고 둘 사이에 존재했던 조그만 경계심마저도 저녁이 되면서부터 점점 누그러들었다. 그는 앞으로 몸을 기울여 그녀 가까이 다가갔고, 그녀 역시 석궁의 사용에 대해 설명하는 사이먼의 말에 집중하느라고 몸을 앞으로 숙였다. 벳시아는 아무리 어려운 이야기를 해도 모두 알아들었다. 그녀는 영리했다. 마치 조프리를 연상시켰다. 그는 얼굴을 바라보고서야 비로소 그녀가 형제들 중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했다. 그리고 그녀는 남자가 아니었다. 음식을 보자 집이 생각났다. 그녀가 구운 산토끼 고기에 손을 내밀자 입고 있는 튜닉의 가슴 부위가 도드라졌다. 가슴을 천으로 잡아매지 않았군, 사이먼은 생각했다. 갑자기 목이 마르는 것 같았다. 사이먼은 그녀에게 정신을 팔며 고기 한 점을 집어들다가 손가락을 데고 말았다. 혼자 욕설을 중얼거리고 있는데 그녀의 부드러운 웃음소리를 듣자 더욱 화가 났다.

    [조심성이 없군요, 그렇죠?]

    그녀가 말했다. 사이먼은 음식을 들고 미소짓는 그녀의 모습이 얼마나 유혹적인지를 그녀 자신이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처음에는 남자라고 착각할지 모르지만 지금은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땋아서 뒤로 넘긴 머리채는 어둠에 잠겨 보이지 않았지만 모닥불 빛을 받은 얼굴과 커다란 입술에서는 어떤 남자에게서도 볼 수 없는 우아함이 배어 나왔다. 사이먼은 벳시아가 긴 손가락을 입술로 가져가는 모습을 숨을 멈춘 채 바라보았다. 그녀는 고기를 한 입 베어 문 다음 손가락 하나를 입에 넣고 조심스럽게 빨았다. 사이먼은 몸이 뻣뻣해지고 마비되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심장이 남성을 제외한 어느 부위에도 피를 보내지 않는 기분이었다. 사이먼은 욕설을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리고 주인의 명령을 배신하는 육체를 조절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나는 여자와 단둘이 있는 것에 익숙하지 않을 뿐이야, 사이먼은 고기를 씹으면서 중얼거렸다. 그의 육체는 창녀와 무법자, 숙녀 사이의 다른 점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사이먼은 그런 충동에 지배당할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아무리 유혹적이라 해도, 모닥불 빛을 받은 그녀의 황갈색 피부가 아무리 매끈하다 해도, 이 여자 산적 때문에 애써 키워 온 자제력을 잃지 않을 거야. 사이먼은 그런 유혹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벳시아를 비난의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하지만 벳시아는 만약 내가 무모한 행동을 벌인다고 해도 그것을 반기지 않을 거야. 그녀는 지난번 땅바닥에서 뒹굴며 격투를 벌일 때 그 점을 분명히 했어...사이먼은 다시 욕설을 중얼거리면서 생각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려고 노력했다. 침묵이 그들 주위를 감쌌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누군가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지나 않은지 주변을 둘러보았다. 비록 아무런 징후도 발견하지 못했지만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이곳은 그녀의 영역이고 내가 지배하는 곳이 아니니까. 물론 나는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지만 또다시 궁수들에게 둘러싸일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그는 무엇보다도 자존심을 강탈당하는 것을 가장 혐오했다. 물론 이 여자는 이미 나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지...바지를 내리고 여자의 몸 위에 엎드려 있는 동안 등에 화살을 맞는 모습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사이먼은 혼자 툴툴거리면서 엄격한 자제력을 발휘하여 남자의 근본적인 충동을 억눌렀다. 놀랍게도 기분이 가라앉았다. 토끼와 버섯들은 잘 구워졌고, 사이먼은 그 간단한 식사를 즐겼다. 조용히 음식을 먹는 동안 야릇한 만족감이 생겼다. 나뭇잎과 이끼와 땅의 체취가 공기 중에 가득한 숲 속의 평화를 느낀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물론 그는 칼들이 부딪히며 내는 쨍그랑 소리나 분주한 캠피온의 소음에 익숙했다. 그러나 이곳에는 모닥불이 타들어 가면서 내는 타닥거림과 작은 동물들이 지나가는 소리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집 근처의 숲 속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적이 없었다. 버넬의 사냥터는 뭔가 다른 것 같았다. 마치 눈앞에 있는 여자처럼 특별했다.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무엇인가에 빨려 들어가듯 그녀를 바라본 사이먼은 또다시 손가락을 빠는 벳시아를 보고 자신의 행동에 저주를 퍼부었다. 그녀의 입 속에 자신의 손가락이 들어가는 모습을 상상하자 무엇인가가 속에서 부풀어오르고 단단해졌다. 만약 지금의 나의 모습을 스티븐이 보았다면 얼마나 비웃을까? 형제들은 모두 그가 여자를 어떻게 다루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지금 사이먼은 정체 모를,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무엇인가가 자신을 끌어당기는 것을 느꼈다. 마치 물리적으로 잡아당기듯, 익숙하지 않은 열정 속으로 그를 몰아넣었다. 그는 갑자기 일어서서 숲 속을 향해 걸어가 어둠 속을 응시했다. 숲이 위험스럽게 느껴졌다. 검은 유혹과 통제할 수 없는 열정의 장소로 다가왔다.

    [내일 함께 배더슬리로 갑시다.]

    그가 중얼거렸다. 익숙한 곳으로 가면 자신을 괴롭히는 이상한 초조함은 사라질 것 같았다. 일단 브리스를 끌어내어 벳시아의 말이 사실인지 알아낼 것이다. 그런 다음...

    [아뇨.]

    벳시아는 아주 작고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는 놀라서 홱 돌아섰다.

    [지금 무슨 말을 한 거요?]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벳시아는 다시 몸을 뒤로 기댔다. 다른 여자들이 부드러운 침대를 선호하는 것만큼이나 풀밭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입술이 조금 비틀리면서 그의 주의를 끌어당겼다.

    [당신은 싫다는 대답에 익숙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나는 당신과 함께 가지 않아요. 내가 있을 장소는 바로 이곳이에요.]

    그녀는 나와 함께 있어야 해. 심지어 자신에게도 불합리하게 들리는 그 말을, 사이먼은 거의 목소리로 표현할 뻔했다.

    [만약 당신의 말이 사실이라면 당신은 상속녀의 자격으로 앤스퀴스에 돌아가길 원할 거요.]

    [그래요. 하지만 브리스가 사라질 때까지는 아니에요.]

    사이먼은 반박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가 다음 순간 갑자기 다물었다. 자신이 조프리처럼 머리가 좋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이미 오래 전이었다. 그는 한참이 지나서야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사이먼은 기가 막힌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녀는 나를 믿지 않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에게 의심을 품는 사람은 만난 적이 없는데...그는 드 부르그 가문의 사람으로 명예는 절대로 의심받지 않았다. 한 번도 없었다. 갑자기 좌절감이 밀려들었다. 어떻게 해야 그녀가 나를 믿을까? 어느 누구도 나를 거부한 적이 없는데...캠피온에서 나의 말은 곧 법이었는데. 사이먼은 자신을 믿지 않고 부정하는 그녀에게 화가 치밀었다.

    [당신은 나와 함께 가게 될 거요. 당신의 군주로서 명령하는 거요!]

    그가 소리쳤다.

    [당신은 나의 군주가 아니에요.]

    그녀가 조롱하듯 대꾸했다.

    [당신 형님에게 충성을 바친 사람은 내 아버지이지 내가 아니니까요.]

    무엇보다도 그의 성격을 자극한 것은 그녀의 냉정한 태도였다. 사이먼은 주먹 쥔 손으로 손바닥을 쳤다.

    [당신은 내게 복종하게 될 거요. 그렇지 않으면 나는 당신을 내 어깨 위에 올려놓고 강제로 데려가겠소.]

    그는 비아냥거리는 벳시아를 향해 위협적인 태도로 한 발 다가가려다가 꾹 참고 차분하게 이유를 말했다.

    [당신은 이곳에서 사는 게 얼마나 무모하고 위험스러운지 깨달아야만 하오. 나와 함께 갑시다. 단신을 안전하게 보호해 주겠소.]

    [그럼 나더러 당신의 말을 완전히 믿으라는 건가요, 영주님?]

    그녀는 우아한 동작으로 벌떡 일어났다.

    [당신은 나의 초대도 없이 이곳에 왔어요. 그리고 다른 모든 남자들처럼 나와 내 동료와 나의 숲을 지배하려 하고 있어요.]

    그녀는 낮고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 당신의 오만한 태도를 그만 거두고 이만 돌아가시죠!]

    사이먼은 어이가 없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요? 나는 당신을 도와주려는 거요, 바보 같으니...]

    [난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아요!]

    그녀는 분노를 자극하는 도전적인 자세로 그를 마주 보았다.

    [아까 당신은 나에게 도와달라고 애걸했소. 당신의 약혼자를 내쫓아 달라고 한 말을 잊었단 말이오?]

    [그는 나의 약혼자가 아니에요.]

    그녀가 씩씩거리면서 대답했다.

    [게다가 난 당신에게 애걸하지 않았어요, 이 오만하고 멍청한 남자!]

    사이먼은 하늘을 향해 주먹을 들어올리면서 낮고 길게 욕설을 중얼거렸다. 정녕 이 여자를 다른 여자들과 다르다고 생각 했단 말인가? 그녀는 다른 여자들처럼 멍청하고 성가신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아니, 그 이상이야! 사이먼은 그녀가 더욱 폭력적으로 자신을 자극하기 전에 돌아서서 분노를 가라앉히려고 안간힘을 썼다. 지금 바깥은 완전히 어두워졌기 때문에 돌아다니는 것은 무리였다. 요란한 소리를 내어 그녀의 부하들이나 다른 산적들의 주의를 끌기보다는 가만히 있는 편이 더 나았다. 적어도 지금은 말이다. 이야기는 내일 계속해도 충분해. 만약 계속 저항을 한다면 그녀의 머리카락을 끌고서라도 가야지. 일단 배더슬리에 가면, 그녀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차릴 테고, 나를 신임하게 될 거야.

    [만약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않는다면 어떻게 당신과 연락할 수 있단 말이오?]

    그는 논리적으로 반박하려고 노력했다.

    [당신에게 전할 말이 있을 때마다 매번 숲 속을 뒤질 시간이 없단 말이오.]

    벳시아는 대답하기 힘든 사람처럼 주저했고, 사이먼의 분노는 다시 한 번 솟구쳤다. 그는 좌절감과 실망을 동시에 느꼈다. 그녀를 잡아 마구 흔들어 주고 싶었다.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그녀를 붙잡고 싶었다. 하지만 사이먼은 돌아섰다.

    [전할 말이 있으면 마을에 남기세요, 그럼 내가 받을 수 있어요.]

    그녀가 부드럽게 말했다. 사이먼은 가늘게 뜬 눈으로 그녀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바라 보았다. 그녀는 대체 내가 어떤 대답을 하길 바라는 것일까? 마을 사람들과 자유민들이 모두 그녀의 편이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일까? 빌어먹을! 남자의 옷을 입은 도적이자 거짓말쟁이 여자에게서 진실이 나오길 바라다니...나는 바보야. 만약 그녀가 거짓말을 한 것이라면,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없지. 사이먼은 모닥불 건너로 가서 자리를 잡고 누웠다. 따뜻한 밤이었다. 옷 이외에 다른 덮개는 필요 없었다. 그는 멀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는 그녀의 인기척을 들었지만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너무 화가 난 상태였다. 아침이 오면 이 산적과의 협상을 끝낼 거야. 그런 다음 그녀의 권리를 되찾아 주겠어, 그는 맹세했다. 휴식 상태에 들어간 사이먼은 이제 자신의 육체가 다시 이성의 통제를 받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더 이상 반갑지 않은 욕망 때문에 고통스럽지 않았다. 사이먼은 어둠 속에서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전쟁은 이제 시작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