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여전사 벳시아-5화 (5/16)
  • 5.

    사이먼은 이렇게 몰래 가야 한다는 사실을 증오하면서도 소리 내지 않고 재빨리 사냥터를 헤쳐나갔다. 나무 사이로 살금살금 숨어 다니는 것보다 탁 트인 전쟁터에서 적과 대면하는 편이 더 나았다. 벳시아의 부하들은 어느 곳에도, 심지어 머리 위에 매달려 있을 수도 있어. 그는 악한 가운데 하나가 등 쪽으로 덮쳤을 때를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나아갔다. 그 기억은 언제나 자신을 천하 무적이라고 생각하던 사이먼에게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형제들이나 자신에게 도전해온 모든 이들을-물론 던스탄을 제외하고-확실하게 두들겨 패주었다. 사이먼은 몇 년에 걸친 드 부르그 가문의 장자와의 경쟁을 떠올리며 얼굴을 찡그렸다. 던스탄은 자신보다 몇 살 더 나이가 많았지만 사이먼은 아직도 자신이 그와 동등하다고, 혹은 더 낫다고 생각했다. 이곳에 온 이래로 헛되이 써버린 노력을 생각하자 얼굴이 더욱 찌푸려지고, 형제들의 비웃음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는 더욱 마음을 굳게 먹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비록 던스탄처럼 왕을 위해 싸우지는 않지만 이곳에서 일어나는 부정한 일들을 모두 바로잡을 것이다. 그 때 갑자기 숲 속에서 특이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사이먼은 냄새를 따라갔다가 오래된 소각로를 발견하고 이내 실망했다. 조그만 소각로에 목재와 타고 남은 찌꺼기가 쌓여 있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 사용한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왕실 소유의 숲 근처의 이런 장소에 있는 많은 것처럼 그것 역시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채 내버려진 것이었다. 아마도 나의 후각에 문제가 생긴 것 같군. 사이먼은 냄새의 정체를 찾기 위해 좀더 자세히 땅바닥을 살펴보았다. 풀의 일부가 최근에 밟힌 자국이 눈에 보였다. 그는 미세한 자국을 따라 한때 철을 생산하던 광산 부근까지 따라갔다. 사이먼은 천천히 몸을 바로 세우고 어두운 터널 입구를 눈여겨보았다. 폐쇄된 공간을 두려워하는 것은 절대 아냐. 질식할 것 같은 성안의 방이나 심지어 동굴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벽은 부셔져 내리고 퀴퀴한 냄새가 나는 좁은 통로는 또 다른 문제였다. 흙더미는 너무나 쉽게 사람의 몸으로 무너져내려 생명을 앗아갈 수도 있었다. 사이먼은 눈을 가늘게 뜨고 앞을 노려보았다. 나는 겁쟁이가 아냐. 그는 몇 발자국 가까이 다가간 뒤 안을 들여다보며 귀를 기울였다. 아무런 소리도 들려 오지 않았지만 앞으로 전진하기 전에 조금 더 기다리며 검은 내부를 응시했다. 만약 도적떼가 땅 속 깊은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 이렇게 조용한 것으로 보아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이곳이 그들의 은신처인 것만은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들은 곧 돌아올 것이다. 이제 그가 할 일은 관찰하기 좋은 위치를 찾는 것이다. 재빨리 터널에서 나온 사이먼은 신선한 공기를 깊이 들이마 신 뒤, 숲 속으로 들어가 숨을 만한 장소를 찾았다. 몇 발자국 가지 않아서 무엇인가가 눈에 들어왔다. 사이먼은 걸음을 멈추었다. 마침내 바로 앞에 나타난 사람을 알아본 순간 심장이 딱 멈추는 것 같았다. 나무 더미에 앉은 여자는 고개를 수그리고 활에 줄을 거는 중이었다. 커다란 참나무 가지 사이로 새어 들어온 햇살을 받은 그녀의 머리카락이 밝게 빛났다. 마치 천상에서 온 소녀 같았다. 사이먼은 한참 동안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감정이 솟구쳐 올랐다. 분명 찾던 것을 발견했다는, 도전 상대를 만나 곧 싸움이 벌어질 것 같은 흥분이었다. 하지만 세차게 흐르는 핏줄 속에 뭔가 다른 것이 있는 것 같았다. 완전히 생소하고 위험에 가까운 낯선 감정이...눈에 보이는 것은 단지 자신의 전리품일 뿐이라고 생각하며, 사이먼은 고개를 흔들면서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마치 오랫동안 물을 먹지 못한 사내가 물을 마시듯 그녀의 모습을 들이켰다. 그녀에 관한 모든 것이 기억보다 더 밝고 맹렬하게 다가왔다. 풍성하게 딸은 머리채에서부터 숱 많은 속눈썹, 그리고 뺨의 곡선까지. 일에 집중하느라고 꼭 다문 커다란 입술이 아니라면 더없이 아름다웠을 것이다. 그 입술...또한 그녀의 나머지 부분들도...전에도 여지들의 다리를 본 적이 있지만 남자의 바지를 입은 여자는 처음이었다. 꼭 달라붙어서 드러난 다리의 곡선을 보자 입술이 마르는 것 같았다. 그의 시선은 조금씩 위로 향했다. 갑자기 여자가 고개를 쳐들고 밝게 빛나는 눈동자로 그가 서 있는 곳을 응시했다. 비록 사이먼 자신은 완전하게 위장했다고 생각했지만, 벌떡 일어선 것으로 보아 자신을 발견한 것 같았다. 사이먼은 숲 속에서 나와 놀라운 속도로 여자를 붙잡고 전에 그랬던 것처럼 여자를 땅바닥에 쓰러뜨렸다. 이번에는 자신의 손아귀에서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 여자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그의 노력을 방해할 뿐이었다. 사이먼은 그녀를 다치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다. 물론 여자가 어딘가에 단도를 숨기고 있다는 사실도 잘 기억했다. 또 한 번 칼날에 목을 베이고 싶지 않은 사이먼은 자신의 다리로 발버둥치는 여자의 다리를 누르고 손으로 여자의 팔을 잡아 꼼짝 못하도록 눌렀다. 하지만 온몸을 들썩이며 머리로 그를 받으려고 하는 여자를 잡는 일은 그리 쉽지 않았다. 마침내 사이먼은 저항하는 여자의 온몸을 누르는 데 성공했다. 그의 얼굴은 여자의 머리 위쪽에 놓여 있었다. 몇 가닥 빠져 나온 머리카락이 그의 코를 간질였고, 사람을 취하게 하는 체취가 풍겨 나왔다. 만약 그녀가 몸부림을 쳤다면 사이먼은 여자를 놓쳐 버렸을 것이다. 벳시아가 항복한 척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친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사이먼은 그녀의 팔을 더듬었다. 사이먼은 깜짝 놀라 고개를 홱 쳐들고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근육이 많군.]

    손가락 아래로 단단한 형태의 근육들이 잡혔다. 벳시아는 경멸이 가득한 눈길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래요, 당신만큼 많을걸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만약 손아래 만져지는 그녀의 근육이 아니었다면 사이먼은 웃음을 터뜨렸을 것이다. 뭔가 강한 여자의 힘이 그를 흥분하게 만들었고, 그녀의 배 위에 닿은 자신의 몸이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벳시아 역시 눈치를 챈 듯 놀란 눈동자를 끔벅거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사이먼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소.]

    그가 대답했다.

    [하지만 당신에게는 나에게 없는 근육이 한 가지 있을 거요.]

    사이먼은 그것을 그녀와 나누고 싶었다. 현기증이 날 정도로. 그러나 벳시아는 그것을 원치 않았다. 그녀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밀어내었고, 사이먼은 그녀를 놓아주었다. 사이먼은 그녀에게 거절당했다는 사실과 자신의 육체가 보인 반응 앞에 실망하고 화도 났다. 그는 스티븐처럼 호색한이 아니었다. 그리고 늘 자신의 통제력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녀가 일어섰고, 사이먼도 불만스럽지만 따라서 일어났다.

    [이곳은 머무르기에 좋은 장소가 아니오.]

    그가 말했다.

    [광산이 무너질지도 모른단 말이오. 땅 표면의 물기가 안으로 스며들고 공기도 부족하오.]

    벳시아는 밝게 빛나는 연한 갈색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았다.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죠? 당신 미쳤어요? 누가 당신을 발견하기라도 하면 등에 화살이 박힐 거예요! 당신 부하들은 어디에 있죠?]

    [난 혼자 왔소.]

    사이먼이 말했다. 갑자기 화가 났는데도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짓고 싶었다. 자신과 당당하게 맞서면서 화를 내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거의 숨을 쉴 수 없을 지경이었다.

    [정말 미쳤군요!]

    그녀가 소리쳤다.

    [정신이 돌지 않고서야 적들의 근거지로 혼자 걸어 들어올 리가 없죠. 당신은 죽음을 당할 수도 있어요!]

    [적의 근거지?]

    사이먼은 눈썹을 불쑥 들어올렸다.

    [나는 당신의 무리가 그렇게 크다고 생각하지 않소. 그리고 내 걱정은 할 필요가 없소. 걱정해야 할 사람은 오히려 당신 부하들이오.]

    분노로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벳시아가 빠르게 지껄여대는 동안 사이먼은 느긋한 표정으로 한 발 물러났다.

    [난 당신을 걱정하는 게 아니에요! 당신 심장에 화살이 꽂혀 있는 걸 보면 속이 다 시원해질 것 같아요. 골칫덩이 하나가 해결되는 셈이니까요!]

    벳시아는 턱을 치켜들고서 두툼하게 딸아 내린 머리카락을 어깨 뒤로 던져 놓고 가슴 앞에서 팔짱을 꼈다. 가슴 쪽으로 향하는 그의 시선을 막기 위해서.

    [왜 이곳에 왔죠? 당신이 원하는 게 뭐죠?]

    원하는 것? 그 말이 사이먼의 머리 속에 박히자 눈길이 자동으로 동그랗게 솟은 여자의 앞가슴 위쪽으로 향했다. 소년처럼 보이려고 가슴을 묶었을까? 사이먼은 또다시 궁금해졌고 갑자기 확인해 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재빨리 바보 같은 생각을 떨쳐버리고 자신의 의지를 배반하고 뜨겁게 달아오르는 육체에 저주를 퍼부었다.

    [알아볼 게 있어서 왔소.]

    그가 말했다. 벳시아의 표정이 더욱 험상궂게 변했다.

    [무슨...?]

    [간단히 대답할 수 있는 거요, 벳시아.]

    사이먼은 그녀의 이름을 강조하며 불렀다. 그러고는 두꺼운 참나무에 몸을 기댔다.

    [어째서 나의 부하들과 말들을 돌려보냈는지 알고 싶소.]

    벳시아는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죠? 당신은 순순히 받아 가면 그만이잖아요.]

    사이먼이 코웃음을 쳤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오?]

    벳시아는 여자의 입에서 나오기에는 조금 거친 욕설을 퍼부으면서 돌아섰다. 그는 얼굴을 찡그리며 기대어 선 나무에서 몸을 떼어 그녀 뒤를 따라갔다. 빌어먹을 여자 같으니, 꼭 알아내고 말 거야. 사이먼은 손을 내밀어 가늘지만 근육질인 그녀의 팔을 잡았다.

    [말해 주시오, 벳시아. 그냥 놓아 줄 거면서 우리를 왜 잡은 거요? 편안하게 살 수 있을 텐데 어째서 이런 숲 속에서 산적 노릇을 하고 있는 거요? 당신의 정체가 뭐요, 벳시아?]

    벳시아는 그를 바라보았다. 순간 그녀의 엷은 갈색 눈동자가 둥그렇게 변하고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사이먼은 그녀의 자제력에 찬사를 보냈다.

    [가요.]

    벳시아는 그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고, 사이먼은 기꺼이 손을 놓았다. 그는 지금까지 알던 어떤 여자에게서도 이런 위엄은 느껴본 적이 없었다. 이 여자는 울거나 화를 내면서 소리 지르지 않았다. 그녀는 불평이나 자비를 구하는 애원을 하지 않았다. 마치 사내처럼, 간단히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고 사이먼을 마주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사내가 아니야. 사이먼은 갑자기 현기증을 느꼈다. 입고 있는 갑옷이 너무 무겁고 단단하게 느껴지기라도 한 듯, 그는 한 손으로 가슴을 어루만졌다.

    [좋아요, 말해 주죠, 드 부르그 영주님.]

    [사이먼.]

    그는 가문과 상관없이 한 남자로서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내 이름은 사이먼이오.]

    벳시아는 경계하는 시선으로 그를 보았다.

    [사이먼.]

    그녀가 불렀다.

    [하지만 나의 대답이 당신의 마음에 들지 않아도 날 탓하지 말아요. 자, 따라와요.]

    벳시아는 빈터를 향해 몸을 돌렸고, 사이먼은 의심이 들면서도 그녀를 따라갔다. 또다시 나를 함정으로 유인하는 것일까? 비록 본능은 그녀를 믿으라고 말했지만, 사이먼은 무작정 믿을 만큼 느슨한 사내가 아니었다. 벳시아는 걸음을 멈추고 그를 다시 바라보았다.

    [누가 보기 전에 당신은 가야만 해요.]

    그녀가 강조했다. 사이먼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벳시아의 말 속에 들어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나를 염려하는 것일까? 그는 큰소리로 비웃을 뻔했다. 아냐, 그녀가 나를 떠나보내고 싶어할 이유가 있을 거야. 곧 알아내고 말리라. 그래, 벳시아의 비밀을 낱낱이 밝혀낼 때까지 멈추지 않을 거야.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맹세했다. 예상대로 그가 왔어. 그녀는 두려움을 분노 속에 감추었다. 다시 돌아오다니, 그는 바보가 틀림없어! 만약 펄민에게 발각되었다면 죽음을 면치 못했을 거야. 벳시아는 이 거대한 전사가 부상을 입거나 혹은 더 나쁜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상상은 하고 싶지 않았다. 이 사내가 죽는다면...벳시아는 두려움을 애써 억누르면서 자신들이 은신처로 사용하는 광산을 향해 발걸음을 바쁘게 놀렸다. 만약 그가 주장한 대로라면, 사이먼이 원하는 것은 단순한 정보야. 그렇다면 나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에는 그냥 가버릴 거야. 벳시아는 그가 도움을 줄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더 이상 매달리지 않았다. 사이먼의 도움에 대하여 자신이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도 클 것 같기 때문이었다. 벳시아는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일을 끝내고 싶은 사람처럼 급히 입구 안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사이먼은 따라가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무표정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조금도 알 수 없었지만 분노만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아니, 나는 숨을 쉴 수 있는 곳에 있겠소. 그리고 당신 역시 그 안에 들어가면 안 되오.]

    벳시아는 깜짝 놀란 얼굴로 그를 흘겨보았다. 이렇게 크고 용감한 기사가 광산에 들어가길 겁낸단 말이야? 하지만 그녀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숲 속을 가리켰다. 만약 누군가의 시선에서 몸을 숨길 수 없다면 은신처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편이 더 나았다. 펄민의 분노에서 보호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부하들의 의문 어린 눈길을 피하기도 쉬웠다. 난 단순히 지도자로서 결정을 내린 거야, 벳시아는 자신에게 말했다. 그러나 그와 단둘이 있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나와 동등한 지위에 있는 사람과 이야기를 한 이래로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렀을까? 벳시아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정찰병을 피해 숲 속으로 들어갔다. 소녀 시절, 나를 수제자로 여기던 아버지의 뒤를 따라다녔을 때를 제외하면...하지만 그녀는 백작의 아들인 사이먼 드 부르그가 자신을 그와 동등하게 생각할 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얼른 과거의 기억들을 떨쳐 버렸다. 자신 만만한 기사는 여자들을 하찮게 여길 거야. 벳시아는 피식 웃었다. 제정신이 아닌 친척들 사이에서 몇 년을 보낸 벳시아는 하인들과 자유민, 광부들을 지도하고 전사나 지도자의 생활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난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아마도 사이먼에게 이끌린 이유는 단지 그것뿐일 거야, 벳시아는 애처롭게 생각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서로에게 가진 관심이나 비슷한 성향이 위험스러운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불꽃은 따스하고 고통을 덜어 주긴 하지만 활활 탈 수도 있었다. 그가 나를 태워버릴 기회를 잡기 전에 얼른 도망치는 게 현명해. 벳시이는 그런 생각들을 머리 속에 꼭 담은 채 부러진 나무 토막 위에 앉아 사이먼에게도 앉으라고 손짓을 했다. 사이먼은 그녀의 호의에 미소를 보였지만 그냥 서 있었다. 벳시아는 그가 주변을 경계하느라고 앉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우린 매우 떨어진 곳에 있어요.]

    벳시아가 그를 안심시켰다.

    [그들이 당신 명령을 잘 따른다고 확신할 수 있소?]

    그가 차갑게 물었다. 벳시아는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물론 그는 펄민을 들먹이며 그녀의 무기력함을 꼬집어내려는 것일 테지만, 벳시아는 그런 계략에 말려들지 않았다. 그녀는 닿은 머리채를 어깨 뒤로 넘기고 한쪽 무릎을 끌어당기며 진지한 눈길로 그를 보았다.

    [그래요.]

    그녀가 대답했다. 사이먼의 표정이 굳어졌다.

    [도적들의 질서가 확실하다는 뜻이오?]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비아냥거렸다.

    [우린 도적이 아니에요!]

    그녀가 말했다.

    [나의 부하들은 불의에 항거하는 정직한 자유민과 농노들이에요.]

    [그렇다면 여행객들을 포로로 잡는 것도 항거의 일부요?]

    사이먼이 물었다. 그는 아직도 자신이 포로가 되었었다는 사실에 분개하고 있었다.

    [우리에겐 돈이 필요해요. 이제 아셨어요, 영주님?]

    [사이먼.]

    그가 엄한 목소리로 상기시켰다.

    [당신이 어째서 죽은 여자의 신분을 훔쳤는지에 대한 대답도 듣고 싶소.]

    [훔쳤다고요?]

    벳시아는 한동안 부글거리는 분노를 삭이느라 안간힘을 썼다.

    [나는 아무것도 훔치지 않았어요. 내 이름을 포함해서 말이에요. 나는 벳시아 버넬이에요. 당신이 믿든지 말든지 아무 상관없지만 말이에요.]

    사이먼은 덤덤하게 그녀의 눈길을 받았다. 벳시아는 그가 이미 자신이 누군지 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단지 확인을 하려는 것뿐이야. 의혹이 그녀를 괴롭혔다. 벳시아는 이 기사가 강하고 유능하기는 하지만 특별히 영리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와 대화를 할 때 좀더 조심해야겠군.

    [그럼 당신의 아버지는?]

    [코스틴 버넬 경이에요.]

    그녀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앤스퀴스를 다스리는 사람?]

    사이먼이 물었다.

    [과거에는 그랬죠.]

    그녀가 대답했다.

    [하지만 지금은 집에 갇혀 있어요. 만약 당신이 진짜 배더슬리의 영주라면 아버지를 자유롭게 해줄 책임이 있어요.]

    벳시아는 그의 도움을 더 이상 기대하지 않았으면서도 일부러 자존심을 건드려 보았다.

    [도와주길 바라는 사람에게 대하는 태도치곤 매우 거칠군.]

    사이먼이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

    [난 도움을 요청한 게 아니에요.]

    벳시아가 대들었다.

    [다만 당신의 의무를 상기시켰을 뿐이죠.]

    그리고 당신은 의무를 이행할 것 같지 않군요, 벳시아는 가늘게 뜨고 자신을 노려보는 사이먼의 눈동자를 보며 깨달았다. 내가 건방지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아니면 좀더 교활한 핑계를 꾸며대려는 것일까? 그는 브리스를 돕고 있는지도 몰라. 어쩌면 나의 은신처와, 계획, 그리고 힘과 약점을 정탐하기 위해서 온 것일지도 몰라. 벳시아는 사이먼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이 사내가 자신을 배신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브리스보다 더 나빠. 아마도 훨씬 더 나쁠 거야.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플까? 그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그녀는 생각했다. 그는 강하고 잘생긴, 명예를 소중히 하는 기사였다. 하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렇다면 브리스라는 작자가 어떻게 당신 아버지를 가두었는지 설명해 보시오.]

    사이먼이 제안했다. 벳시아는 잠깐 망설였다. 대답을 거부할 수도 있지만, 그래 봤자 그가 더 오래 머무를 핑계만 주는 셈이다. 그녀는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전율을 느꼈다. 게다가 만약 그가 사실을 모른다면 무슨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조심스럽게 대답을 해야겠다고 결정을 내렸다. 벳시아는 헤진 장화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외동딸이에요. 아버지는 나를 마치 아들처럼 길렀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말이죠. 그런데 우리를 방문한 친척이 사내아이 같은 나의 행동을 보고 기겁을 한 거예요.]

    벳시아는 오래 전 일을 말하면서도 심한 고통을 느꼈다. 하지만 애써 무덤덤하게 말했다.

    [만약 아버지가 당신을 그렇게 키운 것이라면 어째서 당신을 위해 변명해 주지 않은 거요?]

    사이먼이 거칠게 물었다. 벳시아는 그를 흘끔 보았다. 부드러움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짜증스런 표정이었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자신보다는 고모가 어린 소녀에 대해 더 많이 안다고 믿었으니까요.]

    아버지와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고 싶어한 때를 생각하자 목이 메었다. 게다가 고모 귈다는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지 설득할 수 있는 여자였고, 아버지는 동생이 딸을 데려가도록 내버려두었다.

    [아버지는 나를 손색없는 숙녀로 만들겠다는 희망을 품고 고모에게 보내셨어요.]

    벳시아는 귈다의 하녀보다 나을 것 없던 시절을 떠올렸다. 여자의 옷은 입었지만 고모처럼 아름다운 옷이 아닌 넝마였다. 오, 그래, 그녀는 세상에서 여자의 위치가 어딘지 정확하게 배웠다. 하지만 그들도 그녀의 맹렬한 영혼을 부서뜨리지는 못했다. 벳시아는 강하고 자유롭게 자라던 것과 정반대의 환경에서 노예처럼 사는 자신을 구해 주리라는 희망으로 아버지에게 계속 편지를 써보냈다. 하지만 아무런 답변도, 데려가겠다고 나서는 사람도 없었다.

    [몇 달 전에 나는 집으로 불려갔어요. 결혼을 하라고 하시더군요.]

    그녀는 집에 갈 수 있다는 기쁨이 분노로 변한 때를 기억했다. 아마 신도 사랑이 아닌 교환물처럼 취급되었을 때 느낀 감정을 용서해 주시리라. 귈다의 집에서 여자의 역할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게 된 벳시아는 또 다른 남자의 지배를 받아들일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환대를 기대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벳시아를 맞이한 것은 브리스 스컬베인이었다.

    [집에 돌아가고 나서야 아버지의 나이가 너무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나이가 들었을 뿐 아니라 몸도 마음도 병에 걸렸어요. 한때는 세상에서 가장 강하시던 분이 그렇게 되다니...병 때문에 판단력도 흐려지신 것 같더군요.]

    그녀가 말했다.

    [나는 구혼자 브리스 스컬베인이 정말로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곧 알아냈어요.]

    [당신이 바란 만큼 젊고 잘생기지 않았기 때문이오?]

    사이먼이 엄격한 목소리로 물었다. 벳시아는 찡그린 그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마도 남자에 대한 비난이 마음에 걸렸나 보군. 한 남자로서, 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성(性)에 대한 방어를 늦추지 않을 것이다. 벳시아는 결의에 찬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오, 그는 젊고 잘생겼어요. 미소짓는 얼굴로 화려한 미사 여구를 늘어 놓더군요. 하지만 그는 거짓말쟁이에다 사기꾼이에요.]

    사이먼의 눈동자에서 무엇인가가 번쩍였다. 하지만 벳시아는 그가 자신의 말을 모두 이해했다고 믿지 않았다.

    [나는 너무 놀라서 조사하기 시작했어요. 그 결과 브라스가 앤스퀴스에서 지낸 것은 겨우 한 달 정도라는 사실을 알아 냈죠. 불쑥 나타나서는 산적에게 모든 것을 털렸다고 말했다는군요.]

    [이곳에서는 흔한 일일 텐데...]

    사이먼은 놀리듯이 그녀를 바라보며 한 마디 내던졌다. 벳시아는 그런 그를 발로 차버리고 싶었다.

    [내가 들은 바에 따르면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에요.]

    벳시아가 쏘아붙였다.

    [그렇다면 당신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은 거요?]

    사이먼은 벌떡 일어나려고 하는 그녀를 막았다.

    [앉아서 계속 말하시오.]

    벳시아는 다시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많은 재산을 가진 부자라고 말했지만 앤스퀴스에서 그것을 직접 본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아니, 그를 아는 사람도 없었죠. 나는 그가 말한 것이 모두 거짓말이라는 결론을 내렸어요. 아마 그의 이름도 가짜일 거예요.]

    벳시아는 경멸 섞인 목소리로 말한 뒤 사이먼의 반응을 보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뜨거운 그의 시선이 자신의 은밀한 부분에 닿아 있었다. 순간 그녀는 너무 놀라 움직이지도 말을 할 수도 없었다.

    [당신의 아버지는 어떻게 했소?]

    그는 시선을 얼른 위로 올리고 말했다. 벳시아는 얼굴을 찌푸렸다. 정말 알 수 없는 남자야. 벳시아는 방금 본 그의 표정을 잊어버리려고 노력하면서 이야기를 끝내는 데 주의를 기울였다.

    [집에 돌아온 뒤부터 브리스를 살펴보았어요. 곧 그의 말에 모순이 많다는 사실을 알아냈죠. 아버지에게 그 이야기를 하려고 했지만 말을 할 기회조차 없었어요.]

    벳시아는 분개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아버지와 내가 단둘이 있을 때마다 끼여들었고, 아버지의 침실 앞에는 보초들을 세워 놓고 내가 들어가지 못하게 막았어요!]

    그녀는 오래된 분노가 다시 솟구치는 것을 느끼며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

    [브리스는 아버지의 환심을 산 거예요. 아버지는 결혼도 늦게 하신 데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부터 줄곧 혼자 사셨어요. 내가 고모댁으로 가버린 뒤에는 무척 외로우셨을 거예요. 그런 상태에서 브리스가 갑자기 나타나 온갖 아양을 떨었을 테니, 마음을 빼앗기신 것도 당연하죠. 그가 늘어놓는 여행 이야기나 영웅담은 꽤 흥미로웠어요. 오랫동안 즐거움을 느껴 보지 못한 노인에게는 더욱 재미있게 들렸을 거예요.]

    벳시아는 사이먼을 흘끔 보았다.

    [브리스는 미소와 능란한 말솜씨를 가졌기 때문에 신중하고 방심하지 않는 사람들은 속아넘어가기 십상이에요.]

    [그렇다면 당신은 신중하고 방심하지 않는 사람이란 말이오?]

    벳시아는 사이먼의 날카로운 시선 앞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다른 사람보다 호기심이 많았죠.]

    그녀가 대답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그의 재산과 수행원들이 나타나지 않자 나는 그의 이야기가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어요. 불행히도 그 때쯤에는 그가 아버지와 다른 사람들의 신임을 단단히 받았기 때문에 어쩔 도리가 없었지만요.]

    [당신도?]

    벳시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특히 나에게는 더욱 그랬죠. 하지만 나이 든 몇몇 하인들은 나를 잘 기억했고, 그 가운데는 충성심을 잃지 않은 사람들도 더러 있었어요.]

    그러나 그녀는 자신을 구해 준 사람들의 이름을 사이먼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가 적군인지 아군인지 아직은 확실하게 구별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벳시아는 침을 꿀꺽 삼켰다. 너무 많은 이야기를 했어. 대체 이 과묵한 사내가 어떻게 했기에 내 위치도 잊어버리고 쉽게 말을 했을까.

    [그리고 결혼은?]

    사이먼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거기까지 가지 않았어요.]

    벳시아는 자신이 얼마나 커다란 재난을 당할 뻔했는지 떠올리자 몸이 오싹했다.

    [결혼을 거부하자 그는 나를 지하 감옥에 가두었고...나는 도망쳤어요.]

    그녀는 가장 믿을 만한 하인 두 명이 도와주었다는 말은 하지않았다.

    [숲 속으로 도망쳤죠.]

    벳시아가 덧붙여 말했다. 하지만 누가 그녀를 받아들였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나중에 들은 바에 따르면, 그녀를 잡기 위해 수색하던 이들이 빈손으로 돌아가자 브리스는 어린애처럼 소리를 질렀다고 했다. 벳시아는 그의 모습을 상상하고 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죽었다는 소문을 낸 거요?]

    벳시아는 고개를 들고 어깨를 으쓱했다.

    [아마도 브리스는 내가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말이에요.]

    [그럼 그가 당신이 죽었다는 소문을 낸 거요?]

    갑자기 거칠어진 사이먼의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기사는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위협적인 분위기를 방출했다.

    [당연하죠.]

    벳시아가 대답했다.

    [그가 왜 용병을 고용했겠어요? 내 아버지의 돈이 그의 외동딸을 죽이는데 사용되었으니까요.]

    그녀의 말은 차갑고 황량하게 허공에 걸렸다.

    [그렇다면...어째서 당신은 그가 그런 짓을 하도록 내버려 두었소? 어째서 당신을 양육해준 곳으로 돌아가거나, 왕이나 이웃인 배더슬리에 도움을 청하지 않은 거요?]

    그는 화를 내었다.

    [나를 양육하던 사람들은 날 도와주지 않을 게 뻔했어요.]

    벳시아가 대답했다. 물론 받아 주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집에 갇혀 지내는 것보다는 숲 속이 더 나았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돈을 주지 않고도 부릴 수 있는 좋은 하녀거든요. 그리고 왕은 세상 한구석에서 벌어진, 별로 중요하지 않는 일에 신경 쓰지 않을 테고요.]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 벳시아는 아무런 소득도 없는 쓰라린 감정을 옆으로 밀어놓았다.

    [죽은 사람으로 되어 있는 나를 누가 받아 주겠어요? 집에 돌아온 이래로 나를 만난 사람도 거의 없고, 어린 시절의 나를 기억하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았어요. 그런데 내 정체를 상대방에게 어떻게 확인시킬 수 있겠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분노로 갈라졌다.

    [브리스는 내가 죽었다고 주장한 뒤에 재산을 모두 차지했어요.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내 아버지가 병이 들었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아버지를 수도원에 가두었어요. 나는 아버지가 죽었거나 아니면 죽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죠.]

    사이먼의 흥분이 그녀에게 전달되었는지, 벳시아는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내가 배더슬리에 대해서 무엇을 알겠어요? 단지 해럴드 피슬리로부터 우리를 잘 지켜주었다는 사실만 빼면 말이죠.]

    [피슬리는 죽었소.]

    그는 거칠게 말했다.

    [배더슬리는 이제 내 형님이 다스리고 있소.]

    [그리고 내가 드 부르그 가문에 대해 무엇을 알죠?]

    벳시아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런 남자에게 넘어가면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단지 본능이 말해 주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모르는 그를 어떻게 믿는단 말인가?

    [드 부르그 가문의 사람들은 절대 용병으로 고용되는 법이 없고, 그런 나쁜 일에도 가담하지 않소. 사실, 내 형님은 원래 배더슬리의 상속녀인 자신의 아내를 위해 싸웠소. 만약 당신이 내 형님을 찾아왔다면 이렇게 숲 속에서 산적 노릇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거요!]

    그는 손으로 주변을 가리키며 고함을 질렀다. 그의 비난이 날카롭게 그녀를 찔렀다.

    [나더러 드 부르그 가문의 명예와 함께 당신 말을 믿으라는 건가요?]

    마치 성난 고양이들처럼,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았다. 벳시아는 그를 더 잘 보기 위해 고개를 조금 뒤로 젖혔다. 그의 주먹 쥔 손을 본 순간 그녀는 그가 자신을 때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둘 거야, 그리고 그가 후회하도록 만들어 줄 테야, 벳시아는 생각했다. 나는 이 거대한 기사한테 두 번이나 이겼어.

    [우리의 명예는 이 근방에 널리 알려져 있소, 이 바보 같은 여자...의문의 여지가 없단 말이오!]

    [그렇다면 증명해 봐요! 당신 자신을 증명해 보라고요.]

    그녀가 대들었다.

    [브리스를 내쫓아 보라고요!]

    그녀의 말이 허공에 걸렸다. 진정한 전사라면 거부할 수 없는 도전, 명예로운 기사라면 저버릴 수 없는 이유였다. 벳시아는 또 한 번의 기대를 걸고 숨도 멈춘 채 사이먼의 대답을 기다리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하지만 거부나 다름없는 그의 고함 소리를 듣고 그녀는 또 다시 실망했다.

    [성문을 통과하지도 못하는데 나더러 뭘 하라는 말이오? 당신이 원하는 것이 전쟁이오, 벳시아?]

    사이먼은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만약 그렇다면 나는 군사를 일으키겠소. 하지만 이 들판은 다시 보지 못하게 될 거요.]

    벳시아는 그의 약속을 듣자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드 부르그의 강한 힘 앞에 무너지는 자신의 적이 보이는 듯했다. 언덕에 깔린 기사들과 궁수, 그리고 보병대의 모습이 보였다. 마구 날아가는 해머와 드릴, 사다리와 도끼, 긴 활, 불길...오, 맙소사, 의기 양양함은 사라지고 얼굴을 마주하고 선 사내에게서 뿜어져 나온 분노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리고 만약 브리스가 쉽게 항복하지 않는다면, 당신 아버지의 영지와 장원도 폐허로 변할 거요. 그래도 좋소?]

    벳시아는 놀라움과 분노가 뒤섞인 목소리를 애써 억눌렀다. 그는 한 발자국 다가서며 마치 그녀를 만지려는 듯이 손을 들었다가 다시 주먹을 쥔 채 옆으로 내렸다.

    [당신은 오랜 포위 공격의 결과에 대해 잘 모를 테지만,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소. 근처 농지에서 나오는 모든 것을 수확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안에 사는 주민들이 굶어죽게 될지도 모르오.]

    벳시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한 일이 가져오게 될 결과에 대해 생각하지 못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리고 당신 아버지는 어떻게 할 거요?]

    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벳시아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면서 침입자로부터 자신의 집을 되찾는 꿈을 포기했다. 결과가 너무 참혹하기 때문이었다.

    [브리스는 분명히 아버지를 죽일 거예요. 그렇게 되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되는 거죠.]

    그녀가 중얼거렸다.

    [그렇소.]

    사이먼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바로 그거요. 빌어먹을! 분명 다른 방법이...]

    그는 말을 멈추고 몸을 홱 돌렸다. 벳시아의 심장이 비틀거렸다. 사이먼이 자신을 도와줄지 모른다는 희망이 생기면서 그녀의 경계심은 순간의 열기에 녹아 사라져 버렸다. 벳시아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성을 포위 공격할 군대는 필요없어요. 비록 얼마 안 되긴 해도 우리는 그를 괴롭혀 왔고, 우리를 지원하는 사람들도 점점 늘어나는 중이에요. 자유민들이 자신의 집에서 내쫓기고, 힘든 일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는 더 많은 광석을 캐기 위해 광부들을 몰아붙여요. 사람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시키고 새로 땅을 개간하기 위해 농노들을 제멋대로 부려먹죠.]

    사이먼은 자신의 굵은 팔뚝에 놓인 그녀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벳시아는 갑자기 뜨거운 것에 덴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며 손을 떨어뜨렸다.

    [그런데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소? 성가신 파리처럼 그의 주변을 앵앵거리면서 돌고 있다니...그건 저항이 아니오.]

    사이먼은 저만큼 걸어가서 숲 속을 응시했다. 이 사내는 자신이 믿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뼈아프게 깨달으면서 벳시아가 한 마디 했다.

    [우리는 양떼나 세금, 공급물자들을 숨어서 기다리죠.]

    그들은 브리스가 밖으로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마치 거미줄 속의 거미처럼, 스컬베인은 화려한 집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우리는 변화를 가져올 거예요.]

    그녀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가 용병을 데려오도록 내버려두시오. 그때 그들을 쳐부술 거요!]

    사이먼은 으르렁대었다.

    [하지만 나는 무법 상태를 그냥 내버려둘 수 없소.]

    분노가 가득한 그의 목소리를 듣자 벳시아는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바로 사이먼처럼 강하고 맹렬하며 호전적인 감정이 일었다. 계속 이렇게 마음이 흔들린다면 그를 보내 버려야 하는데...그러나 그녀는 그럴 수 없었다. 사이먼은 거짓말을 하는지도 몰라. 장난을 치면서 나의 비밀이 드러나길 기다렸다가 모두 파괴시킬지도 몰라. 그는 그렇게 할 수 있어. 군대의 힘이 아니더라도 그 자체가 위협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동안 두 사람 사이에 공기가 정지하는 것 같았다. 마치 손가락 아래 놓였던 단단한 사이먼의 팔이 느껴지기라도 하듯 벳시아는 천천히 손을 구부렸다. 그의 몸에 손을 댈 생각은 조금도 없었는데...벳시아는 등을 돌린 채 선 사이먼의 넓은 어깨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상체에서 근육질의 다리로 내려왔다. 어떤 여자라도 그의 힘과 의지, 그리고 강인한 육체를 찬미할 것이다. 하지만 벳시아는 남자에 대해, 특히 자신의 권리를 위해 싸워 주지 않을 그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당신의 아버지를 위험에 빠뜨리지 않고 그를 제거할 방법이 있을 거요.]

    사이먼의 중얼거림을 들은 벳시아는 깜짝 놀라 그의 앞으로 빙 돌아가서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는 장원의 벽 속에 숨어 있는 겁쟁이요.]

    사이먼이 경멸하듯 말했다.

    [그가 세습 군주의 초대에 어떻게 응할지 궁금하오.]

    벳시아는 숨을 멈추었다. 또 한 번의 희망을 걸기가 두려웠다. 그러나 사이먼의 눈동자 속에 들어 있는 불꽃은 그녀의 감정을 자극했고, 사이먼은 오만한 미소를 지으면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낮고 자신 만만한 그의 목소리를 듣자 벳시아는 숨을 제대로 쉬기가 힘들었다.

    [우리는 그를 밖으로 끌어낼 수 있을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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