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여전사 벳시아-4화 (4/16)
  • 4.

    사이먼은 동이 틀 무렵 하인이 깨우는 바람에 일어났다. 영주의 휴식을 방해한다고 생각한 탓인지 눈이 커다란 하인의 표정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성문 밖으로 나가신다기에, 영주님...]

    하인은 커다란 침실을 가로질러 얼른 도망갈 수 있도록 뒷걸음질을 쳤다. 사이먼은 투덜거리며 일어나 재빨리 옷을 갈아입었다. 그는 시종의 도움을 받지 않은 채 새로 구입한 갑옷을 입고 칼을 찬 다음 서둘러 방에서 나왔다. 커다란 홀 바깥으로 나오자 말 한 마리가 서 있었다. 사이먼은 이 시간에 성문을 통과한 사람이 누군지 궁금했다. 혹시 브리스라는 작자가 도착했다면? 아니면 내가 모르는 또 다른 적이 온 것일까? 사이먼은 적의 대군이 성의 외벽을 포위하고 공격을 해온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성문을 지나가던 사이먼은 깜짝 놀랐다. 길 한가운데에 낡은 손수레가 놓여 있고, 그 안에는 손발이 묶인 자신의 부하들이 실려 있었다. 놀라움이 가시자 분노가 밀려들었다. 건방진 여자 같으니, 감히 어떻게 이런 짓을...그가 부하들을 구하기 위해 돌아오리라는 것을 짐작한 철면피 같은 여자가 부하들을 모두 돌려준 것이다. 마치 선물이라도 주는 것처럼 말이다. 자신을 향해 한바탕 웃음을 터뜨리는 여자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사이먼은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 자신의 무능력을 증명하는 물증을 노려보고 있을 때 성의 보초들이 앞으로 달려왔다.

    [영주님, 성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이 손수레를 발견했습니다. 이 안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영주님과 함께 온 일행이라고 주장하더군요.]

    보초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보초가 믿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병사들이라면 당연히 무기와 무장을 하고 있어야 하는데 무기는커녕 하물며 꽁꽁 묶인 채 손수레에 처박혀 있으니...화난 눈길로 그들을 훑어보던 사이먼은 자신의 부하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잡힌 것은 나의 무모함 때문인데 누구를 탓하랴.

    [그들을 풀어 줘라.]

    사이먼은 보초에게 말했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발설하지 말아라. 만약 혓바닥을 함부로 놀렸다간 무사하지 못할 줄 알아라.]

    물론 그런 협박이 필요치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드 부르그 가문에 충성하고 있고, 어떤 남자도 여자에게 당했다는 사실을 발설하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사이먼은 기억을 되살리며 이를 갈았다. 수치심이 밀려들었다. 그는 풀려나는 자신의 부하들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다친 사람은 거의 없었고, 살짝 난 상처도 곧 아물 것 같았다. 사이먼은 그녀가 무슨 일을 하는지 점점 더 궁금해졌다. 몸값을 요구한 것도 아니고, 소지품을 노린 것도 아니었다. 대체 그 여자는 어떤 종류의 무법자일까? 벳시아는 나의 부하들을 가축에게 먹이는 사료처럼 꽁꽁 묶어서 나의 면전에 내던졌어. 그렇다면 내가 부하들을 직접 구해낼 능력이 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사이먼은 목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저주를 퍼부었다. 이렇게 하면 내가 자신을 추격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것일까? 만약 그랬다면 그 여자는 잘못 생각한 것이다. 완전히. 전쟁은 이제 시작되었다.

    [이 손수레를 어떻게 할까요?]

    보초는 얼굴을 찡그리고 낡은 나무 조각들을 살펴보며 물었다. 사이먼이 막 그것을 태워버리라고 명령하려고 했을 때 또 다른 문지기가 앞으로 나섰다.

    [대장장이의 물건 같은데요.]

    당연하겠지, 사이먼은 화가 났다. 그녀는 이 빌어먹을 것을 훔친 것이다. 사이먼이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불쑥 물었다.

    [말들은 어디에 있지?]

    [그녀가 말하길...]

    부상병 가운데 하나가 입을 열었다가 험상궂은 사이먼의 표정을 보고 말을 중단했다.

    [우린, 그러니까, 대장장이의 집에 가면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그녀?]

    한 보초가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동료들이 그의 입을 억지로 막았다. 모든 눈동자가 무서운 눈길로 그들을 노려보는 사이먼에게 쏠렸다. 그는 훔친 손수레에 부하들을 태워 배더슬리까지 배달한 장본인이 여자라는 사실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사이먼은 모여선 몇몇 기사들과 함께 마을로 향했다. 사이먼이 손으로 신호를 보내자 일행은 마구간 앞에서 멈추었다. 대장간은 부유한 버넬 소유의 사냥터 근처에 있었는데도 아주 작았다. 낮은 돌 건물과 담이 쳐진 마당에는 커다란 군마들과 짐말들로 가득 찼다. 그 꼴을 본 사이먼은 자신을 농락하고 놀려댄 여자에게 화가 치밀었다. 사이먼은 켄틴과 다른 기마병들에게 기다리라는 손짓을 보낸 뒤 말에서 내려 주인을 찾기 위해 안으로 들어갔다. 주인은 누가 온 것을 보면서도 일손을 놓지 않는, 크고 거칠게 생긴 사내였다. 사이먼은 산적들과 거래를 한 그를 지하 감옥으로 던져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먼저 산적들에 대한, 특히 그들의 두목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고 싶었다.

    [당신이 내 말들을 가지고 있군.]

    사이먼이 명령조로 말하며 허리에 찬 칼자루를 잡고 걸어나갔다. 그러나 대장장이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런 것 같군요.]

    그는 잠깐 손을 멈추고 땅바닥에 침을 뱉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데려가시오.]

    사이먼은 기가 막혔다. 이 사냥터에 발을 들여놓은 다음부터 세상이 삐딱하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이곳에는 질서도, 논리적인 이유도 없었다.

    [정확히 얼마를 요구할 셈이오?]

    그가 물었다.

    [나 말이오?]

    사내의 거친 표정 위에 놀라움이 서렸다.

    [아무 것도 원하지 않소. 그것들이 당신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소?]

    사이먼은 이를 악다물었다.

    [물론이오 하지만 저 짐승들이 어떻게 이곳으로 오게 된 거요?]

    사내는 끙하는 신음 소리를 냈다.

    [나보다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지 않소?]

    사이먼은 한 발자국 물러서서 가늘게 뜬 눈으로 그 사내를 살펴보았다. 단단한 몸과 근육, 헝클어진 붉고 굵은 머리카락과 무서운 표정을 가졌으나 머리는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럼 저 말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모른다는 말이오?]

    [저 말들은 당신 것이고, 따라서 나는 저것들이 당신과 함께 왔다고 생각했소. 오늘 아침 일어나 보니, 말들이 있었소.]

    [그럼 당신은 밤새 어떤 소리도 듣지 못한 거요?]

    사내는 고개를 가로저었고 사이먼은 화가 나서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아무래도 시간 낭비를 하는 것 같았고 이 대장장이는 바보보다 더 나을 게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왠지 일부러 아무 것도 모르는 척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놈은 그 여자를 알고 있어, 사이먼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넌 그녀를 알고 있잖아! 그는 비난을 퍼붓고 싶었다. 그 멍청이를 붙잡아 사실대로 말하라고 목을 조르고 싶었다. 하지만 무모한 충동을 억누른 채 아무렇지도 않은 척 질문을 계속했다.

    [그럼 아침에 여기에 있는 말들을 보고 놀라지 않았소?]

    사내는 어깨를 으쓱했다.

    [누군가 데리러 올 거라고 생각했소.]

    [그러면 당신은 저것들을 그냥 나에게 넘겨줄 생각이오? 아무런 대가도 없이?]

    사이먼이 물었다.

    [저 말들은 당신 거요, 그렇지 않소?]

    사이먼은 사내의 목을 찔러 버리고 싶은 충동을 애써 눌렀다. 아무런 성과도 없군. 만약 대장장이가 완전한 바보가 아니라면 대단한 연기 능력을 가진 게 틀림없었다. 사이먼은 의심스런 눈길로 그를 살펴보면서 사실 여부를 가려내려고 노력했다. 만약 이 남자가 더 많은 걸 알고 있다면? 그는 산적들의 보복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아니면 벳시아와 그녀의 무리들을 보호하려는 것일까? 조프리라면 이럴 때 어떻게 행동했을까? 사이먼은 기분을 가라앉히고 나서 무서운 시선으로 대장장이를 노려보았다.

    [그럼 저 말들이 내 것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안 거요?]

    그가 물었다.

    [배더슬리에 사는 누군가의 소유일 수도 있고, 예를 들면...브리스 스컬베인 이라든지...]

    [흥! 그 촌뜨기!]

    사내가 외쳤다. 사이먼은 얼굴을 찌푸렸고, 사내는 또 한 번 땅바닥에 침을 뱉었다.

    [나는 그와 아무런 볼일이 없는 사람이오!]

    [어째서?]

    사이먼은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그는 사기꾼에다가 거짓말쟁이요. 이 근방에서 그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소.]

    사내가 대답했다.

    [왜 그렇게 된 거요?]

    하지만 그 남자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더 이상 대답하길 거부했다.

    [내가 괜히 쓸데없는 말을 했소.]

    그는 다시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말들을 모으는 일을 도와주겠소.]

    사이먼은 그를 추궁할 뻔했다. 그 사내는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는 산적들과 한패거리일까? 만약 그렇다면 이곳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벳시아와 그녀의 무리들을 지지하는 것일까? 사이먼은 상인들과 자유민들과 광부들이 각자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마을을 둘러보았다. 그들은 과연 어디에 충성을 바치고 있는 걸까? 그는 마치 어떤 의지에 이끌린 사람처럼 사냥터로 시선을 돌렸다. 그 여자는 어디에 있을까? 숲 속에 숨어서 나를 보며 웃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자 얼굴이 확 붉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피가 끓어올라 주먹을 불끈 쥐고 그녀를 찾아 뛰어가고 싶었다. 만약 벳시아가 말들을 돌려주는 것으로 나를 달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슬프게도 그녀는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그녀와의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하지만 아무런 계획 없이 무작정 숲 속으로 달려가는 것은 현명하지 못했다. 벳시아에 대한 정보가 많으면 많을수록 유리해. 이 마을에는 수상쩍은 데가 너무 많았다. 아마도 그 정체 모를 브리스라는 사내에 대해 알아볼 시기가 된 것 같군. 벳시아는 녹색으로 물든 언덕을 쳐다보았다. 잎이 무성한 커다란 참나무와 너도밤나무 뒤로 흩어진 양떼들이 마치 하얀 점처럼 보였다. 진실로 아름답고 기름진 땅이야. 그러나 우리가 얼마나 더 이곳에 남아 있을 수 있을까? 매일매일 숲은 파괴되어 가고 브리스는 사람들을 버넬 영지와 사냥터에서 일을 하도록 쥐어짰다. 사이먼 드 부르그, 그는 무엇을 할까? 거대한 몸집의 기사에 대해 생각이 미치자 몸이 바르르 떨렸고, 손가락은 옆에 선 나무의 껍질 속으로 파고들었다. 예상대로라면 지금쯤 대장간에 가서 말들을 되찾았을 것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나에게 저주를 퍼부으면서 말이다. 화가 난 그의 모습을 상상하자 미소가 절로 나왔다. 그는 너무 오만한 사내야.

    [그가 대장간에 있소.]

    벳시아는 자신의 생각이 메아리가 되어 나온 줄 알고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목소리의 주인공은 얼굴을 잔뜩 찡그린 펄민이었다.

    [그의 말들을 그곳에 남겨놓은 것은 정말 어리석은 행동이었소! 만약 그가 대장장이를 감옥에 가두거나 온 마을에 벌을 내리면 어떻게 할 거요? 그는 모든 집을 태워 버릴 수도 있단 말이오!]

    벳시아 역사 그런 가능성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지만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는 마을에서 소란을 피우지 않을 거예요.]

    [브리스도 마찬가지요. 하지만 그는 지독하게 굴고 있잖소.]

    벳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은 오랫동안 펄민과의 논쟁거리였다.

    [사람들이 모두 브리스 같지는 않아요.]

    [아니! 이 남자는 더 지독하오. 힘이 강한 영주일 뿐만 아니라 배더슬리의 군대가 그의 뒤에 있소! 우리는 그를 죽였어야만 했소!]

    그가 소리를 질렀다. 벳시아는 사이먼 드 부르그의 죽음에 대한, 그의 고귀한 피가 자신의 손에 묻는다고 생각하자 마음이 아팠지만 애써 무시했다. 그녀는 언덕을 바라보며 마음의 평화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군대와 맞서 싸워야 해요. 배더슬리뿐 아니라 웨섹스와 캠피온의 군대와도 맞서야 하죠. 드 부르그 가문의 힘은 브리스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해요.]

    펄민은 낮고 거친 말투로 욕설을 중얼거렸으나 벳시아는 언제나처럼 그냥 내버려두었다.

    [당신은 말들을 그냥 가지고 있어야 했소. 그는 부유한 귀족이기 때문에 그것들이 꼭 필요하지 않소. 하지만 우리는 말들을 요긴하게 사용할 수도 있고, 많은 돈을 받고 팔 수도 있잖소!]

    펄민이 대들었다. 그러나 벳시아는 열띤 논쟁 속으로 이끌려 들어가길 거부했다.

    [그는 말들을 되찾기 전까지 계속 우리를 추격할 거예요.]

    그녀가 부드럽게 말했다. 비록 아주 짧은 시간 동안밖에 그를 보지 못했지만 사이먼 드 부르그를 잘 알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사이먼은 자신의 부하들보다도 말들을 더 가치 있게 여길 것만 같았다. 그래서 말들을 돌려주지 않으면 그는 크게 분노할 것이고, 절대로 자신을 용서하지 않을 것 같았다. 제멋대로 뻗어 가는 생각에 깜짝 놀란 벳시아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면서 동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게다가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의 물건을 훔칠 수는 없어요.]

    [아무 죄도 없다고요?]

    펄민은 쓰디쓴 표정으로 되뇌었다.

    [사이먼 드 부르그가 그들 일당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고 해도, 그를 놓아준 일을 후회하게 될 날이 곧 올 거요.]

    벳시아는 웃음이 나오는 걸 애써 참으며 펄민의 예언을 무시했다. 비록 궁수가 생각하는 그런 이유는 아니지만 그녀는 이미 그 거대한 기사를 놓아준 사실에 대해 후회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사이먼은 병사들의 절반을 말들과 함께 배더슬리로 돌려보내고 나머지 부하들과 함께 곧장 앤스퀴스로 향했다. 일부러 사냥터의 가장자리로 돌아갔는데도 얼마 되지 않아서 요새화 된 장원에 도착했다. 그는 튼튼한 돌 벽에 둘러싸인 커다란 건물을 바라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멈추어 서서 이곳에 온 용무를 말하시오.]

    한 병사가 다가오는 그들에게 거칠게 소리쳤다.

    [성문은 언제나 이렇게 닫혀 있소?]

    사이먼은 깜짝 놀라 옆에 있는 켄틴에게 고개를 돌렸다.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시기의 대낮에 문을 닫아 놓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특히 양떼들의 교역이 활발한 곳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이상한 일이군요.]

    켄틴은 얼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아마 산적들 때문인 것 같습니다.]

    사이먼은 눈을 가늘게 뜨며 투덜거렸다. 만약 브리스가 궁수 몇 명을 두려워한다면 그는 겁쟁이가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침입자를 내쫓고 안에 있는 사람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겠지.

    [당신, 난 당신에게 질문을 했소!]

    성문에 서 있던 병사가 소리를 질렀다. 사이먼은 조금도 놀라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나는 사이 먼 드 부르그이고 배더슬리의 영주다.]

    사이먼이 차갑게 쏘아 붙였다.

    [즉시 문을 열어라. 나의 가신 버넬 경과 할 이야기가 있다.]

    사이먼의 대답을 들은 병사가 벽에 난 작은 틈으로 하얗게 질린 얼굴을 내밀었다.

    [저는 누구에게도 문을 열어 주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영주님.]

    [그렇다면 가서 네 주인에게 말해라.]

    사이먼이 말했다. 그 병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 자리를 떠날 수 없습니다.]

    켄틴이 낮고 거친 웃음을 터뜨렸다.

    [만약 아무에게도 문을 열어 주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면, 이 성문은 왜 지키고 있는 거냐?]

    인내심이 점점 바닥나고 있던 사이먼은 늙은 기사의 농담을 즐길 여유가 없었다.

    [그렇다면 네 부하를 불러라!]

    그가 명령했다.

    [그래도 소용없습니다. 아무도 안에 들어갈 수 없으니까요.]

    병사는 조심스럽게 어깨 너머를 살피면서 고백했다.

    [만약 제게 전갈을 건네주시면 그것을 스컬베인님에게 전해 드릴 수는 있습니다.]

    [스컬베인! 이곳의 주인인 버넬 경은 대체 뭘 하는 게냐?]

    사이먼이 소리를 질렀다. 보초는 다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지으며 손으로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을 닦았다.

    [버넬 경은 병이 들었기 때문에, 지금 이곳은 스컬베인님이 다스리고 있습니다.]

    사이먼은 터져 나오는 분노를 애써 억눌렀다. 만약 브리스라는 작자가 앤스퀴스의 세습 영주의 보호를 받고 싶어한다면, 영주의 출입을 막아서는 안 된다. 그의 행동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사이먼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브리스를 불러와라. 산적떼와 싸우는 걸 도와달라고 한 사람은 바로 그 작자니까.]

    [아, 영주님, 매우 성가선 놈들입니다. 보급품을 끊고, 양떼를 훔치고, 자유민과 농노들을 자극하고...]

    병사는 불안한 표정으로 말꼬리를 흐렸다.

    [아마도 스컬베인님은 영주님의 도움을 반갑게 받아들이실 겁니다.]

    [나는 그를 돕겠다고 제안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 문제에 관해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다른 문제들도 있고...]

    사이먼은 그 병사를 밀쳐내고 성문 안으로 돌진하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참았다. 더 이상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었다.

    [영주님의 전갈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병사가 말했다.

    [이런 바보 같으니! 지금 자넨 누구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나?]

    켄틴이 소리질렀다.

    [이 성문을 즉시 열어!]

    [그럴 수 없습니다.]

    병사는 할 이야기를 모두 했다는 듯 고개를 다시 집어넣었다. 사이먼은 기가 막힌 표정으로 병사를 바라보았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기에 모든 사람이 나를 하찮게 여기는 걸까? 드 부르그 가문의 아들로서, 기사로서, 지금까지 늘 존경을 받으며 살아왔는데...하찮은 병사마저 나를 내쫓다니! 사이먼은 애써 분노를 억눌렀다. 평화로운 시기에 방문객을 받아들이지 않는 성이나 장원이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낯선 사람들-여행자나 순례자들조차-에게도 얼마간의 음식과 쉴 곳을 마련해 주는 게 인지상정인데. 자신들을 다스리는 영주를 거부하는 것은 반역에 해당되는 중죄였다. 사이먼은 그 오만 불손함에 대한 죄를 물어야 했다. 사이먼은 공격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이곳은 성도 아니고, 단지 요새화된 장원일 뿐이야. 이 정도는 배더슬리에 있는 병사만으로도 충분히 무너뜨릴 수 있어. 그는 마치 전쟁의 냄새를 맡은 것처럼 씩씩거렸다. 싸움을 벌일 생각을 하자 피가 들끓는 것 같았다. 그러나 전쟁에 대한 예견은 또 다른 적을, 지금까지 자신을 능가한 단 하나의 적을 떠올리게 했다. 자신의 앞에서 당당히 서서 비웃던 강하고 유연한 여자에 대한 기억이 떠오르자, 사이먼은 화가 치밀었다.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여자는 계속 그를 괴롭혔다. 하지만 그녀의 정체를 확실하게 밝히기 전까지는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었다. 만약 그녀가 정말로 버넬 경의 딸이고, 앤스퀴스를 다스리는 늙은이가 몸이 아파서 대화조차 불가능하다면? 좀더 정확한 정보를 알아내기 전까지는 절대로 공격하지 말라는 조프리의 경고가 귀에 들려 오는 듯했다.

    [이곳에 머물 건가요, 영주님?]

    켄틴이 물었다.

    [아니,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소.]

    사이먼이 대답했다. 계획이 장애물에 가로막힌 지금, 그는 다른 계획을 세워야 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들자 하루종일 자극한 강한 충동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그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만약 브리스와 대화할 수 없다면, 이제는 벳시아와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 벳시아와 대화하는 모습을 상상하자 사이먼은 피가 들끓는 것 같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버넬 사냥터 뒤로 솟아오른 언덕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어디에 있을까? 여행자들을 약탈하는 중일까? 누군가의 지갑을 훔치고 있을까? 아니면 칼을 겨눈 채 나무 사이에 숨어 있을까? 곧 다가올 여두목과의 충돌과 뒤이어 올 것이 분명한 승리감을 생각하자 몸의 근육들이 팽팽하게 긴장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배더슬리로 돌아가는 겁니까?]

    켄틴이 물었다.

    [당신은 나머지 병사들과 함께 돌아가시오.]

    사이먼은 고개짓으로 모여선 병사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난 혼자 해야 할 일이 있소.]

    그는 교묘하게 숨은 무법자들을 혼자 찾아내기로 결심했다. 이번에는 아무도 모르게 그 여자를 잡고 말 거야.

    [하지만...하지만, 영주님. 호위병도 없이 혼자 가신다는 뜻은 아니겠죠?]

    톨킬이 물었다. 사이먼은 엄한 눈길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럼 나 혼자서 돌아다닐 능력이 없다는 의미요?]

    [아닙니다, 영주님.]

    젊은 기사가 얼른 대답했다.

    [하지만 저는 영주님을 섬기는 기사입니다. 만약 개인적인 시간을 가지고 싶으시다면 멀리 떨어져서 따라가겠습니다. 하지만 절대 혼자 가실 수 없습니다!]

    개인적인 시간. 두 단어를 듣는 순간, 사이먼의 몸에 전율이 흘렀다. 그는 고개를 돌리면서 그런 것은 필요 없다고 애써 중얼거렸다. 단지 여자에 대한 정보가 필요할 뿐이다. 그리고 자신의 소지품을 돌려 받고 우월한 기술을 증명하여 자신이 승자라는 사실을 보여 주고 싶었다. 사이먼은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톨킬을 노려보았다.

    [지금 나에게 대들겠다는 거요?]

    [아닙니다, 영주님. 하지만 무슨 일이라도...]

    톨킬은 살인이라도 저지를 것 같은 사이먼의 눈길을 보며 어색하게 말꼬리를 흐렸다. 그들은 내가 또다시 계집에게 당할까 봐 호위병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일까?

    [어서 가시오!]

    사이먼이 소리쳤다.

    [그리고 만약 내가 내일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수색을 시작하시오!]

    사이먼은 사내들의 놀란 시선을 뒤로 한 채 배더슬리의 반대 방향으로 말을 몰았다. 벳시아를 찾아 그녀에게서 진실을 알아내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기사들이 돌아오지 않는 자신을 찾기 위해 온 들판을 헤매는 것은 원치 않았다. 그게 전부야, 사이먼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 여자와 함께 잠자리에 들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은 절대 아니야. 비록 마지막으로 마주쳤을 때 강한 자극을 느끼기는 했어도, 나는 남자 옷을 입은 여자 따위에는 관심 없어. 이번에야말로...그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 여자가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더라도 절대 동요하지 않을 거야. 사냥터에 도달할 때까지도 그의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앞으로 이어진 좁은 길이 말을 타고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사이먼은 자신의 말을 돌보아 줄 양치기 소년이 있을 만한 인근 계곡으로 향했다.

    [만약 영주님이 돌아오시지 않으면 어떻게 하죠?]

    소년이 물었다. 사이먼은 깜짝 놀라 숨을 훅 들이마셨다. 지주에서부터 가장 남루한 젊은이에 이르기까지, 이 지역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고 있었다.

    [난 반드시 돌아온다.]

    그는 엄격한 눈길로 양치기 소년을 노려보며 다짐했다. 소년은 눈을 깜박거리더니 숲 속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에는 산적들이 있어요, 영주님. 정말로 그냥 걸어가실 겁니까?]

    사이먼은 칼자루를 잡으면서 욕설을 중얼거렸다. 하지만 소년의 말투에 들어 있는 무엇인가가 그를 막아섰고, 사이먼은 양치기 소년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넌 그 산적들에 대해 아는 게 있니?]

    소년은 고개를 수그리고 자신의 발끝만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몰라요, 영주님. 그저 산 속에서는 조심하라는 말만 들었을 뿐입니다.]

    사이먼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 근방 몇 킬로미터 내에 있는 사람이 모두 벳시아와 한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남자, 여자, 그리고 아이들까지 그녀를 보호해 주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빌어먹을! 지금 이런 동화 같은 상상이나 양치기 소년에게 낭비할 시간이 없어! 사이먼은 동전 한 닢을 소년에게 던져 주고 돌아갈 때 한 닢을 더 주겠다고 말했다.

    [내일 돌아오마.]

    그러고는 경고하는 눈길로 덧붙여 말했다.

    [내일 내 말을 데리고 이곳으로 나오지 않으면 너와 네 가족들은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게다.]

    [네, 영주님.]

    소년은 마치 웃음을 숨기려는 듯 고개를 푹 수그리며 대답했다. 사이먼에게는 자신에게 벌어진 모든 문제들의 근원을 찾아 숲으로 들어갈 이유가 충분히 있었다. 자신이 포로로 잡혔다는 소문이 온통 퍼져서 모든 오두막집과 성안에서 웃음거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주먹 쥔 손으로 손바닥을 세게 내려치면서 그 여자에게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해주겠노라고 맹세했다. 피의 흐름은 빨라졌지만 이성은 조심하라고 충고했고, 그는 몇 발자국 가기도 전에 양치기 소년이 어디에 있는지 보기 위해 돌아섰다. 만약 그 소년이 내가 나타난 것을 알리기 위해 달려갔다면...그러나 소년은 원래 있던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고, 숨어 있는 동료에게 손짓을 보내는 것 같지도 않았다. 마침내 사이먼은 의심 많은 자신을 탓하며 돌아섰다. 자신이 찾는 것은 보잘것없는 소규모의 산적떼일 뿐, 거대한 조직망과 정찰병을 갖춘 무리가 아니었다. 비록 마을 사람들 일부는 브리스를 싫어하는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그에게 대항하기 위해 뭉칠 만큼 똑똑한 것 같지는 않았다. 심지어 조프리라 해도 그런 계획을 세우기는 힘들 거야, 사이먼은 오만하게 생각했다. 사이먼은 조심스러우면서도 자신만만하게 숲 속을 가로질렀다. 울창한 나무 때문에 주위가 어두웠지만 사이먼은 태양의 위치와 자신이 지닌 본능적인 방향 감각을 동원하여 길을 찾아냈다. 하지만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 바람에 자신이 한때 잡혀 있던 빈터에 도달했을 때는 인내심이 바닥난 뒤였다. 그러나 그는 무모하게 앞으로 나서지 않을 만큼 신중한 사내였다. 그는 주변과 나무 위쪽에 적들이 숨어 있는지 꼼꼼하게 점검하고는 아무도 없다고 판단한 뒤에야 비로소 빈터로 들어갔다. 하지만 이미 한 발 늦고 말았다. 사람이 있었다는 흔적은 사라진 뒤였다. 제대로 찾아왔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자신의 기억력에 의문을 제기했을 테지만, 사이먼은 자신을 믿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사람의 발에 눌린 풀과 상처에서 나온 핏자국을 덮은 나뭇잎들이 있었다. 하! 이곳에 있었군, 사이먼은 깨달았다. 그러나 의기양양함도 잠깐, 야영지가 들어섰던 곳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그들이 사라진 방향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거칠게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고는 벳시아와 그녀의 동료들이 다람쥐처럼 잎이 많은 나뭇가지 사이를 뛰어다니기라도 하는 듯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 무거운 갑옷과 무기로 무장한 사이먼은 만약 나무를 타는 기술이 있다 하더라도 그들의 뒤를 쫓기는 힘들 것이다. 게다가 어린 시절 이후로 한 번도 나무 위에 올라가지 않았다. 빌어먹을! 이제 어떻게 그들을 찾는단 말인가? 이 사냥터와 그 뒤에 있는 왕실 소유의 숲에 대해 좀더 알고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가 찾는 것은 어떤 특별한 장소가 아닌, 이들 환경과 친숙하게 어울려 숨어 다니는 산적들이었다. 이미 늦은 오후가 되었지만 사이먼은 몇 년 만에 처음으로 맞부딪친 힘든 문제로부터 도망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는 더 굳은 결의를 가지고 이를 악물면서 빈터를 떠났다. 아무리 오래 걸려도 상관없어, 무법자들을 찾아내어 그들의 지도자를 잡을 거야. 그들이 먼저 나를 찾아내지 않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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