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동이 틀 무렵 잠에서 깨어난 사이먼은 즉시 정신을 차리고 차갑고 그림자진 오래된 로마 성당을 재빨리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허리띠에 달려 있는 칼자루를 손에 쥐었다. 내 것보다 가볍기는 하지만 어떻게 여자가 그렇게도 쉽게 휘두를 수 있을까? 자는 동안 그녀가 칼을 슬쩍 빼앗을지도 모른다고 생각 했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자 어쩐지 조금 실망스러웠다. 사이먼은 피 속에서 들끓는 흥분을 느꼈다. 오늘 그녀와 다시 맞부딪칠 생각을 하자 마치 전투를 앞둔 기분이 들었다. 여자를 바라보고 싶다는 깊고 거부할 수 없는 충동이 몰아쳤지만 자제력을 발휘하여 간신히 억눌렀다. 지금 그녀는 휴식을 취하고 있을까, 아니면 나를 노려보는 중일까?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날 다툼을 예상하고 미소를 짓던 사이먼은 마침내 여자가 있는 쪽을 흘끗 쳐다보았다. 고개를 돌린 사이먼은 저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고 벌떡 일어나 자신의 허리에 헛되이 매달린 밧줄을 잡고 입을 딱 벌렸다. 마치 어두운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여자를 찾아내려는 듯 조그만 오두막 내부를 재빨리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여자는 가버렸다. 허공에 들어올린 주먹을 불끈 쥔 사이먼은 터져 나오는 고함소리를 애써 참았다. 하늘을 향해 분노를 터뜨리고 싶었지 만 적들의 귀에 들릴 염려가 있었다. 어떤 방법을 사용했는지 모르지만 자신에게서 도망친 여자에 대한 격렬한 증오와 도망가는 것도 모르고 잠만 잔 자신의 태만함에 대한 불쾌감과 끝없는 분노가 치솟았다. 그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면서 여자가 어떻게 자신의 코앞에서 도망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유추하기 시작했다. 밧줄들을 홱 잡아당겨 살펴보니 끝이 잘려 있었다. 하지만 여자는 그의 칼을 사용하지 않았다. 밧줄 끝이 울퉁불퉁하게 잘린 것을 본 사이먼은 벳시아 역시 단도를 숨겨 놓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여자를 과소 평가한 탓이야. 사이먼은 자신의 느슨함에, 여자가 도망치는 것도 모르고 잠에 빠져든 자신에게 마구 욕설을 퍼부었다. 나는 전사야. 한밤중에 모기 한 마리가 몸에 앉아도 알아차려야 하는...바로 그런 감각에 생명이 달려 있기 때문에! 그러나 이 여자는 소리도 없이 밧줄을 끊고 도망가 버렸어. 사이먼은 목으로 손을 올려 아직도 고약으로 덮인 상처를 문질렀다. 순간 그녀가 목을 찌를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살려 둔 데에는 뭔가 이유가 있을 거야. 사이먼은 어젯밤 기회가 있을 때 그녀에게 묻지 않은 자신을 탓하며 주먹 쥔 손으로 다른 손바닥을 쳤다. 사내들의 무리를 이끄는 이 여자의 정체를 어떻게 알아내지? 왜 그들은 보통의 산적 무리처럼 행동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 빌어먹을 브리스는 누구이며, 어째서 나더러 용병이라고 비난한 것일까?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으나 대답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사이먼은 자신의 실수를 절감하고는 다시 한 번 주먹으로 손바닥을 내려치며 욕설을 중얼거렸다. 더욱 나쁜 것은 분노와 좌절, 그리고 혐오 아래에 이상한 허전함이 깔려 있다는 점이었다. 사이먼은 낮은 목소리로 또 다시 욕설을 중얼거리다가 그들의 야영지를 찾아 일행을 구하고 산적 무리를 격파시킬 작정으로 왔던 숲 속으로 향했다. 그러나 불과 몇 발자국 떼기도 전에 자신의 무모함을 꾸짖는 조프리의 목소리가 들려 오는 것 같았다. 어떻게 무기도 없이 궁수들을 상대할 수 있단 말인가? 사이먼은 치미는 화를 가라앉혔다. 그러고는 숲 속으로 달려가는 것보다 배더슬리로 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본 다음 무기와 부하들을 데리고 급습 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돌아가서 그 여자에게 당한 만큼 갚아 주겠어, 사이먼은 험상궂은 미소를 지었다. 물론 영리한 적수이긴 하지만 내 상대가 되지는 못해, 사이먼은 드 부르그 가문 특유의 자부심을 내세우며 생각했다. 곧 그녀도 그런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정체가 무엇이든지 간에, 벳시아는 대적할 상대를 만난 것이다. 벳시아는 오래된 참나무 가지 위에 앉아 제 갈 길을 가는 사이먼을 바라보며 안도감과 후회를 동시에 느꼈다. 바보스럽게도, 그녀는 두 사람의 관계가 달라지길 바랐다. 저 기사가 자신을 구해 주기 위해 돌아와 적들을 정복하고...벳시아의 꿈은 희미하고 불안정하게 사그라졌다. 그녀는 지금까지 참고 있던 숨을 내쉬었다. 허전함 대신에 그가 자신이 숨어 있는 곳을 찾아내지 못한 것에 대해 고마워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무리 마음을 굳게 먹어도 드 부르그의 분노와 정면으로 대결하는 것은 상상만 해도 몸이 바르르 떨렸다. 목에 칼끝이 닿자마자 깨어난 벳시아는 자신이 적의 포로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쓸데없이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벳시아는 어둠 속에서 자신의 몸을 묶던, 숨가쁘게 내팽개쳐진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에 대한 기억에서 도망치려고 노력했다. 그 순간, 자신은 여자이고 그는 남자라는 사실을 포함한 다른 여러 가지 감정들을 떨쳐 버리기 위해 그녀는 공포만을 생각했다. 그녀는 사이먼 드 부르그처럼 오만하고 힘이 세고 능란한 사내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벳시아는 떨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상한 감정은 금세 사라졌고, 다행스럽게도 그가 밧줄 끝을 잡은 채 앞서 걸었다. 그의 강렬한 시선을 받는 것보다는 억지로 끌려가는 편이 더 나았다. 사이먼 드 부르그는 강한 힘과 활기로 창백하고 애송이 같은 남자들의 세상 안에서 돋보이는 존재였다. 사이먼이 그녀를 옆으로 끌어당긴 다음 잠을 자기 위해 누웠을 때, 벳시아는 자신의 감정을 조절했다. 그가 옆에 있다는 사실이 놀랍게도 신경이 쓰였다. 단도를 사용하여 밧줄을 끊는 동안에도 거대한 몸에서 나오는 숨소리를 듣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고, 그것은 그가 잠든 후까지 깨어 있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몸이 자유롭게 되었을 때, 벳시아는 승리감을 느끼지 못했다. 아직은 그가 자신을 발견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비록 숲 속에서 소리 없이 움직이는 데 익숙해져 있기는 했지만, 벳시아는 그가 따라오는 인기척이 들려 올 것 같아 두려웠다. 그래서 가까이에 있는 참나무로 올라가 몸을 숨긴 뒤 해가 뜰 때까지 기다렸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숲 사이로 걸어가는 사이먼을 바라보던 벳시아는 가까스로 탈출했다는 사실 앞에 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운이 아주 좋았다. 만약 그가 나의 계략을 눈치채고 찾아 나섰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흥분과 두려움이 동시에 몰려들었다. 물론 사이먼은 나라는 여자가 그렇게 영리한지, 아니, 바로 그 자리에 숨을 정도로 용감한지 짐작도 못했을 것이다. 바보!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사이먼 드 부르그는 어떤 면에서는 멍청이였다. 벳시아는 갑자기 그에게 한 수 가르쳐 주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여자들이 예쁘게 치장하는 것 이외의 다른 것에는 관심도 없으며, 고귀한 그들의 지위 아래에서 집안 일이나 하도록 태어났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여자들에게 지능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길 거부하고 제멋대로 판단을 내린다. 지난 밤, 벳시아는 오만한 기사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그를 다시 포로로 만들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 사이먼이 자는 동안 조그만 단도로 목을 겨누어 다시 한 번 위치를 뒤바꿀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엇인가가 그녀를 막았다. 왠지 그의 이름다운 육체나 과장된 자부심에 상처를 입히고 싶지 않았다. 펄민의 말이 맞았어. 사이먼 드 부르그는 골칫덩어리이고, 나는 그를 영원히 포로로 붙잡아 둘 수 없어. 지금 그는 자유의 몸이야. 만약 그의 부하들을 풀어준다면, 사이먼은 우리를 그냥 내버려둘 거야. 배더슬리의 영주처럼 그 역시 나의 작은 무리들보다는 좀더 중요한 일에 신경을 쓸 거야. 아직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는 없지만, 벳시아는 그런 위험스런 사내를 붙잡는 것보다는 놓아주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좁고 어두운 성당에서 사이먼 드 부르그와 싸움을 벌여 이길 수 있다고 확신할 수도 없었다. 사나운 전사와 몸 싸움을 벌인다고 생각하자 처음 맞부딪쳤을 때 자신의 음부를 더듬던 사이먼의 손길이 떠올랐다. 만약 다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었다. 상관없어. 이제 거대한 기사의 모습은 시야에서 사라졌으니 더 이상 그런 일에 신경 쓸 필요가 없어. 벳시아는 입을 꽉 다물었다. 사이먼은 얼굴을 찌푸린 채 손수레에서 펄쩍 뛰어내렸다. 걷는 것보다는 빨리 도착할 수 있었지만 그런 꼴사나운 것을 타야 하는 자신에게 화가 치밀었다. 물론 그 냄새 나는 운반 수단을 소유한 사람도 낯선 사람을 태우길 꺼려했으나 사이먼은 애써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를 설득했다. 자신의 자존심을 짓밟았을 뿐 아니라 부하들과 소유물, 그리고 군마까지 강탈한 여자를 떠올린 사이먼은 자신의 말을 최상의 상태에서 반드시 되찾고야 말겠다고 맹세했다. 만약 그 여자 산적이 말을 팔아 버렸다면,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될 것이다. 사이먼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배더슬리의 성문 앞을 지키던 보초가 다가와 질문을 할 때에도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멈춰 서시오! 이곳에 무엇을 하러 왔소?]
보초는 칼자루에 손을 얹은 채 물었다. 갑옷이나 신분을 나타내는 부속품을 모두 잃어버려서 기사처럼 보이지는 않겠지만, 사이먼에게는 보초의 건방진 질문을 참아 줄 인내심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이 바보야, 나는 사이먼 드 부르그다!]
그가 소리치자 상대방의 태도가 확 달라졌다.
[맙...맙소사, 사이먼 영주님! 정말 죄송합니다! 오실 것이라는 전갈은 받았습니다만...일행은 어디에 있죠? 말은?]
보초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오는 길에 문제가 생겼다.]
사이먼은 냉랭한 시선으로 젊은이의 입을 막았다.
[빨리 들어가야 해.]
[물론입니다, 영주님.]
보초는 자신의 신분을 다시 떠올린 듯 깊숙이 절을 했다. 사이먼은 무뚝뚝하게 고개를 까딱한 다음 보초를 홱 지나쳐서 성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거대한 홀로 들어가는 동안 말을 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가 이렇게 불쑥 도착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테지, 사이먼은 결론을 내렸다. 그는 무적의 드 부르그 일행이 산적떼에게 당했다는, 그것도 한낱 여자에게 포로로 잡혀 있었다는 말을 시시콜콜 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만약 그런 말이 새어 나간다면 자신의 명성은 여지없이 짓밟힐 것이고 형제들은 난리를 칠 것이다. 사이먼은 피가 부글부글 끓는 것을 느끼며 홀로 들어가는 넓은 문으로 들어섰다. 사이먼은 태피스트리와 값비싼 접시가 놓여 있는 장식장, 무거운 의자와 등받이가 높은 긴 소파로 화려하게 꾸며진 내부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 아름다운 성보다 길가에서 지내는 게 더 편했기 때문에 이런 물건들은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배더슬리에는 마음에 드는 게 딱 하나 있었다. 바로 맛있고 푸짐한 음식이다. 사이먼은 음식을 내오라고 고함을 질렀고, 하인들은 명령에 따라 분주하게 달려나갔다. 벽난로 근처에 모여선 몇몇 기사들을 제외하곤, 근처에 있는 모든 사람이 입을 딱 벌린 채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서로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이먼은 그들에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한 뒤 일광욕실로 향했다. 영주와 가족들이 사적인 시간을 갖기 위해 마련한 방은 비어 있었다. 사이먼은 긴 테이블 머리 부분에 놓인 커다란 의자에 앉아 세 명의 기사에게 손짓을 보냈다. 등을 기대고 앉자 기분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사이먼은 다가온 사람들을 차근차근 살펴보았다. 첫 번째 사내는 젊은 톨킬이었다. 그는 2년 전 형으로부터 독립해서 캠피온으로 왔다. 나이 든 켄틴 역시 던스탄과 함께 웨섹스에 있다가 그와 함께 도착했다. 비만한 몸집을 가진 레오핀은 한동안 배더슬리에서 지냈다. 비록 그는 웨섹스로 진군한 적이 있지만 한때 배더슬리를 지배한 폭군이 죽은 뒤, 여러 명의 기사가 던스탄에게 충성을 바치기로 맹세했기 때문에 사이먼은 그와 싸움을 벌이지 않았다. 그들 세 기사는 믿을 만한 사람들이었지만 사이먼은 어느 정도까지 이야기를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방금 겪은 불명예스러운 일을 말하기가 꺼림칙할 뿐 아니라 왠지 벳시아와 그녀의 부하들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그들에 대해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 것일까? 그들은 단순한 무법자일까? 아니면 도적질 이외에 다른 것을 하는 자들일까? 사이먼은 모순에 빠진 자신의 모습을 스티븐이 본다면 틀림 없이 놀려댈 거라고 생각했다. 스티븐은 형제 가운데서 가장 결단력이 강했다. 그러나 스티븐은 이곳에서 지내지 않았다. 2년 전에 잠깐 머물렀을 뿐이다. 사이먼은 평소와는 달리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곁에 없는 조프리를 향해 마음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조언을 명심할 필요가 있었다. 전쟁으로 잘 단련된 옆의 기사들을 바라보던 사이먼은 뭔가 다른 것을 느꼈다. 이상한 보호 본능 같은 것을 말이다. 그리고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 기사들이 그 도적떼를 죽이는 걸 바라지 않았다. 적어도 해답을 얻을 때까지는 말이다. 그들의 지도자 벳시아는 자신이 직접 상대하겠다고 맹세했다. 앞에 선 기사들은 사이먼의 기분을 눈치챈 듯 아무 말 없이 기다렸다. 마침내 톨킬이 입을 열었다.
[잘못된 일이라도 있습니까, 영주님?]
사이먼은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우리는 숲에서 공격을 당했고, 일행들이 모두 붙잡혔소.]
그가 솔직하게 말했다.
[아마도 몸값을 받으려는 것 같소.]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배어 나왔다. 그러나 사이먼 혼자 도망쳤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굽니까?]
톨킬이 분개한 듯 물었다.
[캠피온의 적입니까?]
[아니면 던스탄 남작님의 적입니까?]
켄틴이 물었다.
[혹시 배더슬리의? 이곳의 부유함에 탐을 내는 작자들이 많이 있죠.]
레오핀은 거친 한숨과 함께 덧붙여 말했다. 사이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비록 벳시아가 거짓말을 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자신들을 알고 공격한 것 같지는 않았다. 게다가 나를 용병이라고 비난하지 않았던가, 사이먼은 얼굴을 찡그렸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브리스라는 작자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단순한 무법자들 같소, 내 생각에는.]
[못된 놈들!]
톨킬이 고함을 질렀다.
[우리는 숲 속에서 날뛰는 도적떼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특히 버넬 가의 사냥터에서 활동하는 놈들이 극성스럽답니다. 하지만 그들이 단순한 여행자들을 약탈할 줄은 몰랐습니다.]
젊은 기사의 말은 사이먼의 주목을 끌었다. 벳시아는 단순한 밀렵꾼이 아니었고, 그 숲 속에 있는 철광에서 일하는 광부들에게는 훔칠 만한 것이 별로 없었다.
[그렇다면 주로 누가 약탈을 당한단 말이오?]
사이먼은 톨킬과 레오핀 사이에 오가는 눈짓을 놓치지 않았다.
[글쎄요, 확실히는 모르지만 소문에 따르면 앤스퀴스의 양떼들과 양식을 도둑맞았습니다.]
레오핀이 대답했다. 그는 사이먼의 날카로운 시선을 받자 몹시 불편해 했다.
[그들이 누군가를 사로잡거나 해쳤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만...]
그가 재빨리 덧붙였다.
[앤스퀴스라면...]
사이먼이 중얼거렸다.
[사냥터를 소유하고 있는 장원 말이오?]
[그렇습니다.]
레오핀은 고개를 끄덕였다.
[요새화된 장원과 왕실 소유의 숲이 있습니다.]
[그리고 배더슬리와는 형제지간이나 다름없습니다.]
톨킬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켄틴을 흘끗 보며 덧붙였다. 사이먼은 세 기사 사이에 흐르는 감정들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그들이 서로 힘을 겨루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나에게 뭔가 숨기고 있는 것일까? 그때 하인들이 에일 맥주와 빵, 치즈 등을 가지고 들어왔다. 사이먼은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다가 하인들이 떠나자 다시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동안 침묵이 흘렀고, 마침내 켄틴이 목청을 가다듬었다.
[오, 앤스퀴스의 멍청이들이 우리의 도움을 바라고 있지만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들은 척도 안 하고 있습니다.]
[우린 그들이 지나가는 여행자들까지 괴롭힐 줄은 몰랐단 말이오!]
레오핀이 변명했다. 그러나 반대자가 분명한 톨킬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이먼은 눈을 가늘게 떴다. 기사들은 의무를 게을리한 데 대한 문책을 두려워하고 있군. 만약 그들이 무법자들에게 일찍 손을 썼더라면 내가 당한 불운한 일은 예방할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여행 중에 당한 모욕에도 불구하고 사이먼은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아니 난생 처음 피가 들끓는 것을 느꼈고, 그런 일을 당한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앤스퀴스를 다스리는 바보는 대체 누구요?]
사이먼이 물었다.
[늙은이가 꽤 오랫동안 평화롭게 다스리고 있는 것으로 기억하는데...]
[버넬 경입니다.]
켄틴은 자리에 앉은 채 몸에서 긴장을 풀며 대답했다. 사이먼은 거의 백발에 가까운 그의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켄틴이라면 이곳에서 일어난 많은 일에 대해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주 오랫동안 버넬 가문이 그 기름진 땅을 다스려 왔고, 지금까지 잘 해왔죠.]
[하지만 당신은 그를 도와주길 거부했잖소?]
사이먼이 물었다. 켄틴은 코웃음을 쳤다.
[버넬 경이 아닙니다! 들은 바에 따르면 그는 몸져누워 있습니다. 그를 대신하여 도와달라고 불평하는 놈은 진짜 멍청이입니다. 그의 이름이 무엇이었소, 톨킬?]
[브리스, 브리스 스컬베인입니다.]
젊은 기사가 대답했다. 사이먼은 얼른 음식을 집는 척 몸을 앞으로 수그리면서 놀란 표정을 감추었다. 마침내 정체 불명의 브리스라는 이름이...그는 미소를 지을 뻔했다.
[대체 그 브리스라는 작자가 누구요?]
켄틴은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도 모릅니다. 아마 버넬의 친척이겠죠, 아니면 친구이거나.]
[그는 버넬의 딸과 약혼을 했다고 주장하더군요.]
톨킬은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습니다.]
레오핀이 말했다.
[하지만 그녀가 죽은 지금 그의 주장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나는 버넬 경에게 딸이 있다는 말도 듣지 못했소.]
사이먼이 빵을 자르며 말했다.
[그녀는 마치 사내아이처럼 자라났는데, 사라진 지 오래되었습니다.]
켄틴이 설명했다.
[나는 그녀를 기억합니다. 아버지와 경호병들 뒤를 터벅터벅 따라오던 모습을 말이죠. 버넬 경에게는 아들이 없고, 아내가 죽은 뒤 딸을 빨리 결혼시키지 않았다는 사실을 후회하는 것 같았습니다.]
사이먼은 얼굴을 찌푸렸다. 추억에 잠긴 늙은 기사의 말에서 무엇이 요점인지 알아내기가 힘들었다. 어쨌든 그녀와 브리스라는 남자와의 관계가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핵심인 것 같았다.
[오, 그녀는 정말 아름다웠죠. 벳시아, 금발에다가...]
레오핀은 사이먼을 응시했다.
[영주님?]
음식을 입으로 나르던 사이먼의 손이 허공에서 잠깐 멈추었지만 충격을 감추려는 듯 재빨리 빵을 입 속에 집어넣었다. 그러나 그의 내부 깊숙한 곳에서는 마치 무기들이 부딪히는 것 같은 요란한 진동이 일어났다.
[그 늙은이의 딸, 벳시아...]
그는 침을 꿀쩍 삼킨 다음 말을 이었다.
[그녀가 죽었다고 했소?]
[그렇습니다.]
톨킬이 대답했다.
[브리스와 결혼하기 위해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죠. 지금으로부터 여러 달 전의 일입니다. 우리는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의 애도 기간도 끝났습니다.]
켄틴이 툴툴거렸다.
[그는 멍청이입니다. 브리스라는 남자 말입니다. 그녀 자신이나 그 재산에 어울리지 않는 못된 허풍 선이죠.]
[하지만 다른 사람들보다 더 못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레오핀이 중얼거리면서 사이먼을 흘끔 보았다.
[드 부르그 가문처럼 괜찮은 사람들은 거의 없으니까요.]
사이먼은 칭찬을 듣고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더 이상 브리스라는 남자에게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컵을 들고 에일 맥주를 마시면서 자신을 사로잡았던 여자를 생각했다. 키가 크고 가느다란 몸매에, 꼭꼭 땋아 내린 엷은 색깔의 머리카락, 소년처럼 거친 몸 동작은 바로 켄틴이 언급한 소녀의 모습이었다. 만약 벳시아가 두 명이 아니라면, 산적 두목은 바로 버넬 경의 딸이고 그녀는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다른 여자일리가 없었다. 그런 독특한 훈련을 받을 수 있는 여자가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글을 읽을 뿐 아니라 칼과 밧줄을 휘둘렀다. 상처를 치료하는 약초에 대한 지식도 있고, 전투 기술의 기본 뿐 아니라 지도자다운 면모도 지녔다. 눈앞에 꼿꼿이 선 그녀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강렬한 표정을 지닌 아름다운 얼굴로 무기를 겨눈 벳시아...사이먼의 피가 반응을 보였다. 싸움이 시작되면...뜨거운 기운이 몸통을 관통하는 것을 느낀 사이먼은 더 많은 정보를 얻어내기 위해 애써 냉정을 유지했다. 하지만 기사들에게 그녀에 대해 더 많은 질문을 한다고 해도 자세한 대답을 들을 수 없을 것이 다. 심지어 켄틴조차도 아무 쓸데 없는 옛날 일들만 늘어놓을 것이다. 마침내 툴킬이 금발을 푹 수그리며 마지못한 듯 입을 열었다.
[한 번 그녀를 본 적이 있는데, 여자용 말을 타고 있었습니다. 천사처럼 아름답더군요.]
그는 찬탄의 표정을 지으면서 중얼거렸다. 사이먼은 젊은이의 환상을 비웃을 수가 없었다. 사실 보통 때라면 그런 관대한 단어에 가장 먼저 야유를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벳시아에 대한 젊은 기사의 평가를 듣고 쓴웃음만 지었다. 흥! 톨킬은 그 여자의 상대가 못 되지, 사이먼은 속으로 생각했다. 만약 젊은 기사가 자신의 천사 앞에서 절을 하려 한다면 그는 창으로 기사의 목을 찔러 버릴 것이다. 아마도 그녀가 죽었다고 믿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벳시아는 그리 달콤한 여자도 불쾌한 여자도 아니었다. 그녀는 칼날 같은 혓바닥을 가진, 세상 여자와는 완전히 다른 무엇인가를 가졌다. 사이먼은 그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밝혀 내고 싶었다. 불행히도 자신의 기사들은 정보 수집에 커다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앤스퀴스와 배더슬리는 잔인하게 배더슬리를 지배하던 후계자인 마리온의 삼촌 해럴드 피슬리가 권력을 잡은 이래로 팽팽하게 맞섰다. 그리고 던스탄이 피슬리를 죽였지만 그는 자신의 영토를 다스리기에도 바빠서 이곳에는 신경을 별로 쓰지 못했다. 그리고 사이먼이 지난번 이곳에 머무를 때에는 별로 성밖을 돌아다니지 않았다. 그때 그는 성의 군대를 재편성하고 던스탄이 없는 동안 성안 살림을 보살필 능력 있는 집사를 고르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결연 관계를 맺을 시간이 없었고, 버넬은 새 영주가 어떤 사람인지 몰라서 걱정스러웠을 것이다. 켄틴의 말에 따르면, 브리스라는 남자가 도착하기 전까지는 앤스퀴스와 이 성 사이에 어느 정도 교류가 있었다. 그 뒤에 농노들이 너무 일을 많이 하고, 자유민들 역시 울 생산에 심한 간섭을 받는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러나 켄틴은 그러한 소문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고, 배더슬리에 있는 사람들도 조금 걱정을 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버넬이 던스탄에게 병역 면제세를 꼬박꼬박 바치는 한, 그의 영토가 공격을 당할 때 보호해 줄 의무만 지고 있을 뿐이었다. 켄틴이나 배더슬리의 집사 플로리안 모두 앤스퀴스에 속한 영토에 시시한 도적떼가 나타났다고 해도 숲 속으로 기사들을 보낼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엄밀히 따지면 그게 옳은 일이었다. 세 사람의 전사들이 자신의 질책을 예견하면서 서로 눈치를 보고 있지만 사이먼은 그들에게서 아무런 잘못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마치 자신들의 게으름을 만회라도 하려는 듯, 영주를 공격한 자들에게 복수를 해야 한다고 떠들어 대고 있었다. 전투를 하고 싶어 몸이 근질거리던 사이먼이 오히려 그들의 열의를 가라앉혀야만 했다.
[우리가 병사들을 이끌고 그들을 쫓아가겠습니다.]
켄틴이 거만하게 말했다.
[아니. 능력 있는 궁수들을 상대로 말 탄 병사들을 보내는 것은 현명하지 않소.]
사이먼이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우리도 궁수들을 데려가겠습니다!]
톨킬이 말했다.
[배더슬리의 궁수들과 대적할 만한 자들은 없습니다!]
[그들은 추격전에 경험이 많소?]
사이먼이 쏘아붙였다.
[다람쥐처럼 나무를 타면서 목표물을 겨냥할 수 있소?]
세 기사는 각각 다른 종류의 놀라움이 담긴 표정을 지으며 사이먼을 바라보았고, 그는·불편한 듯 몸을 뒤척였다. 그는 공격을 하고 싶지 않았다. 만약 궁수들을 숲으로 보냈다가 그들 가운데 하나가 벳시아를 죽인다면? 사이먼은 마치 날카로운 통증을 느끼는 사람처럼 손으로 가슴 부위를 문질렀다. 뜻하지 않게 드러난 감정에 화가 치민 사이먼은 자신의 결정에 반박하는 세 기사를 노려보았다.
[그 브리스라는 작자는 우리 병사들이 숲 속을 수색하길 원하는 거요? 만약 그가 우리를 함정으로 몰아넣고, 병사들이 없는 동안 배더슬리를 공격하면 어떻게 할 거요?]
사이먼 자신은 그럴 가능성이 별로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한 말이었지만 세 사람은 깜짝 놀랐다.
[그런 것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영주님.]
톨킬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대답했다.
[설마 그럴 리가...]
레오핀이 입을 열었지만 사이먼은 그에게 남은 빵 조각을 밀어주면서 그의 입을 막아 버렸다. 뚱뚱한 기사는 행복하게 웃으면서 빵을 듬뿍 뜯어냈다.
[나는 아주 능력 있는 병사들 몇몇만 데리고 가겠소. 내가 직접 나설 거요.]
사이먼이 말했다. 벳시아에게 아무런 해를 입히지 않기 위해서는 그 방법밖에 없었다. 그는 적에게서 이런 흥미를 느껴 본 적도, 이렇게 수치를 당해 본 적도 없었다. 사이먼은 다시 만나 싸움을 한다면, 승리는 자신의 것이 되리라고 맹세했다. 하지만 사이먼은 먼저 앤스퀴스에 가서 그 브리스라는 작자와 죽은 약혼녀에 대해 좀더 알아보고 싶었다. 될 수 있는 대로 적에 대해 많은 정보를 알아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는 그녀를 다시 찾아내고, 그녀를 보고, 그녀를 이기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또한 그 여자가 아직도 사내들을 거느리고 있는지도 확인하고 싶었다. 가능한 한 빨리 전리품을 손에 넣고 싶었다. 문제는 여자를 위험에 빠뜨리지 않고 어떻게 그 임무를 수행하느냐 하는 거였다. 의자에 기대앉아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보았지만 달아나는 적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한 번도 대면해 보지 못한 도전이지만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사이먼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빙그레 웃었다. 싸움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