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여전사 벳시아-2화 (2/16)

2.

비록 두 사람 사이에는 넓은 풀밭과 커튼처럼 드리워진 나뭇잎들이 있었지만, 벳시아는 기사의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검은 머리카락과 윤이 반지르르 나는 갑옷 색깔의 눈동자를 가진, 지금까지 보아온 남자 가운데 가장 괜찮아 보였다. 큰 키와 강한 힘, 궁지에 몰린 짐승의 광포함을 가진 그는 멋진 적수가 될 것 같았다. 벳시아는 난생 처음으로 등뼈 위로 타고 올라오는 두려움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는 냉정하게 마음을 가라앉혔다. 비록 자신에게 사로잡힌 사이먼이 쇠사슬에 묶인 채 우리에 갇힌 야생 짐승을 떠올리게 하긴 해도, 남자 때문에 겁쟁이가 되거나 그의 요구에 흔들릴 수는 없었다. 그만 해, 벳시아. 그녀는 자신을 타일렀다. 사이먼 드 부르그에게 어떠한 감정도 느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했다. 사이먼 드 부르그는 브리스나 그의 일당처럼 자신을 매수하려 들지 않았고, 가문의 힘을 끌어들이지도 않았다. 캠피온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강한 권력을 가진 백작이라는 소문은 익히 들었다. 저 기사는 자신의 강한 배경을 무기 삼아 협박을 가할 수도 있는데 그런 일을 하지 않았어. 벳시아의 본능은 그를 믿어도 좋다고 속삭였다. 만약 스스로 책임져야 할 사람이 자신 혼자라면 본능에 따라 행동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는 자신을 따르는 많은 사람이 있었다. 그것은 정신적으로 커다란 부담이었다. 성급한 궁수인 펄민은 벌써 포로들의 피를 요구했다. 하지만 벳시아는 죄 없는 사람을 이유 없이 죽일 수 없었고, 게다가 캠피온의 백작이 많은 병력을 이끌고 쫓아오도록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펄민의 반박에 귀를 기울이던 벳시아는 그의 주장 속에서 그냥 넘어갈 수 없는 한 가지가 들어 있음을 인정해야 했다. 포로들을 죽이거나, 혹은 그냥 풀어 주지 않는다면, 그들을 데리고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부상당한 상처가 모두 나으면...열두 명의 힘센 사내들을 감시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들을 짐마차에 태워서 먼 장소에 버릴 생각도 해보았지만, 사이먼 드 부르그는 자신이 사로잡혔다는 사실을 쉽게 잊거나 용서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는 그녀의 조그만 무리를 쳐부수기 위해 지원병을 데리고 올 것이다. 벳시아는 작은 목소리로 욕설을 중얼거리며 늙은 나무 그루 터기에 기대앉은 사내를 바라보았다. 비록 꼼짝없이 앉아 있기는 해도 사이먼 드 부르그는 한 번도 대한 적이 없는 강한 힘과 기운을 발산했다. 격렬한 표정 속에, 단단한 전사의 육체 속에, 차가운 눈빛 속에서 힘이 느껴졌다.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다고 그를 탓할 수 없었다. 사실, 기분이 좋을 때라고 해도 자주 미소를 지을 것 같은 사내는 아니었다. 벳시아는 사이먼을 처음 보았을 때 그가 차가운 사내일 거라고 짐작했다. 물론 그 차가움은 열정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벳시아는 온몸에 흐르는 전율을 느끼면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펄민이 언급하지 않은 다른 가능성도 있었다. 사이먼 드 부르그와 그의 부하들을 설득해서 힘을 합치는 방법 말이다. 물론 벳시아는 어느 정도 희망을 품고 있기는 했지만 그 완고한 궁수에게 그런 제안은 먹혀들지 않을 것이다. 펄민은 모든 귀족을 증오했다. 그렇기 때문에 사이먼과 손을 잡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들으면 코방귀를 뀔 게 분명했다. 그러나 배더슬리의 영주처럼, 사이먼 드 부르그는 불공평한 일을 당한 사람들을 기꺼이 도울 것이다. 분명히, 어쩌면...벳시아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애써 억눌렀다. 진실이 거짓을 이기지 못할 때가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부터 가진 버릇이었다. 그리고 옳다는 것도 아무런 증명이 되어 주지 못했다. 하지만 벳시아는 사이먼 드 부르그와 지금의 상황에 대해 의논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만약 그가 주장한 대로 자신과 동료들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면 설명을 들을 권리가 있었다. 만약 펄민의 주장대로 그가 자신들을 없애 버리기 위해 고용된 용병이라면 아마도 그녀의 말에 귀도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가 기사다운 명예심을 조금이나마 지니고 있다면 분명 손을 잡을 것이다. 불행히도, 아까의 경험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사이먼 드 부르그는 기사도 정신으로 무장한 사내가 아니었다. 벳시아는 그의 손이 자신의 몸에 닿았을 때 받은 느낌을, 자신의 몸을 꼼짝 못하게 누른 다음 어떤 남자도 감히 손대지 못한 부위를 만졌을 때의 기분을 잊지 못했다. 몸이 바르르 떨리고, 갑자기 후끈 달아올랐다. 그때 사이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칼을 빼어 들고 보초를 부르면서 나무 그늘 아래에서 걸어나갔다.

[꼼짝 말아요.]

벳시아가 명령했다. 묶여 있는데도 크고 호전적인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180센티가 넘는 전사의 몸뚱아리 전체에서 힘과 자부심이 솟아 나왔다. 벳시아는 감탄하느라고 본래의 목적을 거의 잊을 뻔했다. 하지만 그와 함께 지내게 될 때의 위험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의 영향력은 점점 더 그녀를 혼란스럽게 했지만 그런 내색을 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무뚝뚝한 몸짓으로 자리에 앉으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그는 복종하는 대신 냉정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급한 일이 있소. 기다릴 수 없단 말이오.]

그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순간 벳시아는 움찔했다. 설마 나에게 자신의...욕망을 만족시켜 달라는 제안은 아니겠지? 순간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설마 이런 곳에 화장실이 있을 리는 없을 것 아니오?]

그는 조롱하듯 말하면서 주변을 살폈다. 벳시아는 재빨리 안도의 표정을 감추었다. 이 남자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 줄 수 없어. 만약 조금이라도 흐트러진 기미를 보인다면, 그는 재빨리 그 기회를 잡아 공격을 시도할 거야. 벳시아는 칼을 빼든 채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미안하군요. 하지만 당신은 간단히 해결할 수 있을 거예요.]

경멸이 뒤섞인 그의 시선을 받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차가운 표정으로 그의 응시를 받아넘겼다.

[당신이 직접 날 도와줄 거요?]

그는 묶여서 움직일 수 없는 바지를 흘끗 내려다보며 물었다. 벳시아는 냉정한 그의 태도에 뭔가 꿍꿍이속이 있다고 생각했다. 조금 전까지 그는 분노와 좌절감을 나타내고 있었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소변을 보아야 한다는 것은 참기 힘든 모욕일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그는 너무나 태평했다. 벳시아는 몇 발자국 다가가서 칼끝으로 그의 바지 부분을 가리켰다.

[당신도 잘 알겠지만, 뒤에 선 궁수는 언제라도 화살을 날릴 준비가 되어 있어요.]

은빛 눈동자에 분노의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벳시아는 다시 한 번 감탄했다. 브리스와는 완전히 다른, 진짜 적수를 만난 듯한 야릇한 흥분이 느껴졌다. 벳시아는 마치 그의 옷을 베어내려는 것처럼 히죽 웃으면서 칼을 쳐들었다. 사이먼의 은빛 눈동자 깊숙한 곳에서 일렁이는 불꽃이 보였다. 하지만 남자와 그런 식으로 오래도록 장난을 치는 것은 그다지 좋을 게 없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펄민을 불렀다.

[이 기사가 볼일을 볼 수 있도록 도와줘요.]

궁수는 포로의 급한 상태에 조금도 동정심을 보이지 않고 껄껄 웃어댔다.

[아기처럼 그냥 싸게 두시오!]

펄민은 놀려대며 숲 속으로 걸어가 버렸다. 벳시아는 사이먼의 안색이 홱 변하는 것을 눈치챘다.

[저런 오만한 행동은 반드시 벌을 받게 될 거요.]

그가 말했다. 벳시아는 사이먼 드 부르그와 같은 방법을 사용할 수 없었다. 그가 어떻게 불복종을 다스리는지 상상할 수 있었지만, 그녀의 부하들은 자신들이 원할 때만 지시에 따랐다. 그렇다 하더라도 벳시아는 기사들이나 영주들처럼 엄격하게 벌을 집행할 수가 없었다.

[자 당신이 도와줄 거요?]

사이먼이 물었다. 벳시아는 얼른 서 있는 자세를 바꾸면서 당황스러움을 얼버무렸다. 펄민에게 다시 돌아와서 임무를 수행하라고 강요할 수도, 자신이 직접 사이먼 드 부르그의 바지에 손을 댈 생각도 없었다. 그녀는 숲으로 들어왔을 때, 그때까지 지닌 수줍음을 모두 떨쳐버렸다. 하지만 저 거대한 기사의 몸에 손을 댈 생각을 하자 몸이 바르르 떨렸다. 앞쪽 혹은 뒤쪽에서 무릎을 꿇는 것과는 상관없이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야 했다. 비록 묶여 있다고 해도 사이먼 드 부르그 곁에 다가가고 싶지 않았다. 또한 뒤에서 활을 겨누고 있는 궁수에게 자리를 이탈하라고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는 망을 보고 있는 젊은이를 불렀다. 조금 뒤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가 땅바닥 위로 내려섰다.

[제레미, 저 기사를 도와줘요.]

그녀가 말했다.

[겁쟁이.]

사이먼은 그녀를 향해 중얼거렸다. 벳시아는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은빛 눈동자 속에서 뭔가가 반짝였다. 분노일까, 아니면 나에 대한 조롱일까? 그는 여자들과 시시덕대는 종류의 사내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어쩌면 나를 혼란에 빠뜨리려는 계략일지도 모르지.

[아니, 단지 조심할 뿐이죠, 기사님.]

그녀가 대답했다.

[어서 해요, 제레미.]

그녀가 다그치자 젊은이는 사이먼에게 다가 갔다.

[조심이오, 아니면 갈망이오?]

그녀의 포로는 검은 눈썹을 불쑥 들어올렸다.

[지금 지켜볼 작정이오? 남자들 물건을 보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있지만 말이오.]

벳시아는 수치스러운 농담을 듣자 충격을 받아 얼른 몸을 돌릴 뻔했다. 제레미가 조심스럽게 바지를 벗기는 동안 그녀는 가만히 서 있었다. 저 사내는 위험해. 젊은이는 잠깐 망설이다가 될 수 있는 대로 뒤로 물러서서 기사의 튜닉을 들어올렸다. 조그만 물줄기가 땅바닥으로 떨어지고, 그녀가 서 있는 곳으로 흘러왔다. 그녀는 얼른 뒤로 물러섰다. 화가 나긴 했지만 그녀는 칼을 적의 상체에 고정시킨 채 자신이 바보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려는 듯 그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사이먼이 볼일을 마쳤을 때, 벳시아의 시선은 의지와는 달리 아래로 내려가 기사의 단단한 다리 근육과 불쑥 튀어나온 남성을 흘끗 보고야 말았다.

[됐소!]

그가 소리쳤다. 벳시아는 포로의 드러난 살갗을 응시하고 있는 자신에게 놀라 움찔했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린 그녀는 사이먼이 말한 상대가 제레미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젊은이는 재빨리 잡고 있던 튜닉 자락을 내려놓고 서투른 솜씨로 기사의 바지 끈을 묶었다. 마침내 일이 모두 끝나자 젊은이는 풀려나서 다행이라는 듯 재빨리 물러섰다. 벳시아는 젊은이를 탓할 수 없었다. 아무리 대담한 사람이라고 해도 묶여 있는 기사를 보면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테니까. 사이먼은 뭐라고 중얼거리며 다시 앉았다. 벳시아는 그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서 화가 난 것일까,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보는 데서 볼일을 보았다는 사실에 모욕을 느끼는 것일까? 뱃시아는 그의 분노가 자신에게 향한 것이 아니라면 좋겠다고 생각하다가, 이내 상관없는 일이라고 자신을 타일렀다. 하지만 왠지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손님 맞을 준비를 좀더 잘 해두어야 했는데...하지만 우린 그런데 익숙지 않거든요.]

벳시아가 달래듯이 말했다.

[오, 그만 하면 충분하오.]

사이먼이 대답하며 오만스럽게 그녀를 훑어보았다. 그의 눈길은 벳시아의 존재에 신경이 쓰인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냉정한 전사답게, 그녀가 포로를 신임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만 했다.

[이제 만족한 거요? 혹은 즐기고 싶어서 젊은이에게 내 옷을 벗기라고 시킨 거요?]

그의 은빛 눈동자가 위험스럽게 번뜩거렸다. 그의 말에 너무 화가 난 나머지 그녀는 그의 목을 향해 칼을 내지를 뻔했다. 그가 원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란 말인가? 나를 비웃는 것? 만약 그렇다면 실망하게 될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약해지거나 혹은 그에게 자신을 모욕하도록 내버려두어 만족감을 안겨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벳시아는 차분한 시선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나는 당신을 선택하지 않을 거예요, 오만한 기사님. 좀더 크고 강한 사람을 고르겠죠.]

그녀는 거짓말을 했다. 사이먼의 얼굴이 붉어지자 벳시아는 승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녀는 사이먼 드 부르그가 그런 처지에 놓여 본 적이 없다는 것을 눈치챘다. 하지만 위험스럽게 번득이는 그의 눈동자를 흘끗 본 벳시아는 이런 방법으로 그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뭐가 문제란 말인가? 펄민은 나에게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앤스퀴스에서 살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의 저항에 신경 쓰려 하지 않았다. 드 부르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설명이나 설득을 해보았자 아무런 소용도 없을 것이다. 벳시아는 돌처럼 냉정한 얼굴을 흘끗 본 다음 발길을 돌렸다. 그녀는 오래 전에 기사들의 도움 없이 스스로 싸우는 법을 배웠다. 설령 누군가가 도움을 주기 위해 온다고 해도 혼자 싸워 나갈 것이다. 사이먼은 숲 너머로 지는 태양을 바라보며 때를 기다렸다. 곧 기회가 올 것이고, 그 여자는 실수에 대한 보상을 해야 할 것이다. 자신에게 향하던 그녀의 눈길이 떠오르자 사이먼은 얼굴을 붉히며 욕설을 중얼거렸다. 사이먼은 화장실에 가고 싶다는 말을 하면 그 여자가 묶인 것을 풀어 주거나 적어도 혼자 있을 시간은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만 된다면 계획한 것보다 좀더 쉽게 도망칠 기회를 붙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가 순순히 기회를 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는 그녀가 화를 못 이기고 무기를 잡도록 만들기 위해 놀려댔다. 하지만 그녀는 미끼를 덥석 물지 않았다. 사이먼은 벳시아가 그대로 돌아서서 걸어가 버릴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냉정하게 서서 자신을 향해 칼을 겨누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빈틈없는 전사처럼, 혹은 천한 창녀처럼! 사이먼은 벳시아라는 여자와 그녀가 자신에게 미치는 이상야릇한 효과에 대해 만족할 만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얼굴만 찌푸렸다. 간단히 설명할 방법이 없어! 여섯 형제들과 자라면서 싸우기도 하고, 야영지에서 함께 지내기도 하고, 오랫동안 여행하기도 했다. 그리고 전투에 지친 자신들에게 다가온 여자들을 향해 눈길을 돌리기도 했다. 필요하다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강물에 뛰어들어 목욕을 하기도 했다.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고 계속 서 있는 벳시아를 보자 사이먼은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조금씩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고, 그것은 점점 더 자라났다. 지금까지 여자가 이렇게 신경 쓰인 적이 없었다. 평생 처음으로 그의 몸은 엄격한 규칙과 이성에 반기를 들었다. 벳시아가 옷을 입지 않은 자신의 몸을 보았다는 사실이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겨우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곳에 그녀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사이먼은 가장 이해할 수 없고 수치스런 방법으로 반응을 보였다. 빌어먹을 여자 같으니...만약 조금 전까지 그녀를 미워했다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은 채 그런 반응을 이끌어 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벳시아를 경멸했을 것이다. 다행히 바보 같은 젊은이에게 가려 달라고 말했기 때문에 그녀는 아무런 이유 없이 팽창한 그의 남성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그녀가 자신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만약 그녀가 보았다면? 아냐, 보지 못했어. 하지만 <강한 사람>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사이먼은 얼굴을 찌푸렸다. 동생 스티븐은 드 부르그 가의 남자들은 모두 강한 남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지만, 사이먼은 그런 문제에 대해 한 번도 심각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다. 아마도 이 여자는 남자에 대해...그만 생각해, 갑자기 그는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싫어졌다. 마치 의지가 아닌 다른 무엇인가에 지시를 받은 것처럼, 사이먼은 빈터를 살피며 그녀를 찾았다. 숨어 있는 데 익숙한 산적의 무리들은 자신들이 먹을 음식을 준비할 때에도 불을 피우지 않고, 단지 빵과 치즈, 산딸기나 견과류를 먹었다. 하! 삼림의 풀은 새들에게나 적당한 먹이였다. 사이먼의 위장은 사슴 고기를 달라고 으르렁거렸지만 오늘밤에 그것을 맛볼 수 없을 것 같았다. 마침내 커다란 참나무로 걸어가 동료들과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는 그녀가 보였다. 여자와 무리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겠다는 희망으로 몇 시간 동안 귀를 기울였지만 헛수고였다. 그들의 말소리는 워낙 작았고, 그나마 나뭇잎들의 바스락거림에 가려 거의 들리지 않았다. 교활한 악마들 같으니! 그러나 지금까지 벌어진 모든 수치스런 일 때문에 마음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데도, 사이먼의 시선은 무리의 지도자에게 끌렸다. 그는 두툼한 나무 뿌리 위에 걸터앉는 그녀를 보고 날카롭게 숨을 들이마시며 욕설을 중얼거렸다. 눈길을 돌렸지만 마치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리듯 시선이 다시 그녀에게 돌아갔다. 근처에 있는 다른 남자들처럼, 그녀는 한 덩어리의 빵을 먹고 있었다. 단지 사내들과 달리 게걸스럽지 않게, 빵을 조그맣게 떼어 그가 한 번도 보지 못한 방법으로 입안에 집어넣었다. 사이먼은 저도 모르게 음식을 꿀꺽 삼키는 여자의 목멀미와 빵을 뜯는 손놀림, 노란 치즈덩이를 잘라내는 조그만 단도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통통한 산딸기가 그녀의 입 속으로 들어갈 때, 그는 자신의 내부에서 맹렬하게 자라나는 허기를 누르지 못하고 욕설을 중얼거리며 시선을 돌렸다. 어쩌면 생각했던 것보다 머리의 상처가 더 깊어서 사고 능력에 문제가 생겼을지도 몰라. 벳시아가 여성스러운 자태가 아닌 능력과 힘과 지도력이 느껴지는 민첩한 동작으로 일어났다. 사이먼은 계속 관찰했다. 여자는 물병을 들고 부상병들이 있는 곳으로 가더니 나무 컵에 액체를 부었다. 물? 에일 맥주? 수면제? 사이먼은 그 여자의 손에서 아무 것도 받아먹지 않겠다고 맹세했기 때문에 그녀가 다가올 때 고개를 홱 쳐들었다.

[우유? 이곳에 젖소가 있소?]

벳시아는 엄격한 표정이었다.

[가까운 곳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말할 수 있죠.]

사이먼은 애매한 그녀의 대답을 듣자 짜증이 나서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그녀가 마실 것을 따르자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만약 그녀가 조금 더 가까이 있다면...벳시아는 갑자기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행동했고, 사이먼은 이를 갈았다. 그는 고개를 들이밀려고 했지만 벳시아는 너무 조심스러웠다.

[제레미, 나를 한 번 더 도와주겠어요?]

그녀가 말하자 아까 용변을 볼 때 도와준 젊은이가 와서 컵을 그의 입술에 대 주었다. 사이먼은 입에 든 것을 그녀를 향해 뿜어내고 싶었지만 도망칠 기회가 다가오고 있는데, 그런 쓸데없는 일에 힘을 낭비할 필요는 없었다. 기다려야 해. 나는 지도자인 ·이 여자를 포로로 잡을 거야. 두 컵의 우유와 빵 한 덩어리가 허기를 어느 정도 달래 주었다. 젊은이는 그의 몸을 나무그늘 아래로 조금 옮겨 주었다. 이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이기에 나뭇가지 위에서 다람쥐처럼 이동할 수 있을까? 사이먼은 한참 동안 머리 위에서 살랑거리는 나뭇잎들을 바라보며 이상한 갈망을 느꼈다. 이곳은 너무 조용했다. 캠피온에서 들을 수 있는 끊임없는 소음도, 형제들의 놀림도, 늘 자신을 증명하고 싶다는 욕구도 생기지 않았다. 그가 마침내 시선을 아래로 내렸을 때, 여자는 가까이 서 있는 참나무에 몸을 기댄 채 자신을 살펴보는 중이었다. 사이먼은 잠깐 한눈을 판 자신에게 화가 났다. 모름지기 전사란 적에게서 눈을 떼면 안 되는 법인데...그는 얼굴을 찡그리며 여자를 노려보았다.

[볼만한 광경을 기다리고 있는 거요?]

[당신 몸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난 관심 없어요.]

그녀가 차갑게 대꾸했다. 그런 다음 지나가는 젊은이에게서 담요를 받아 그의 발치를 향해 던졌다.

[잠을 좀 자두라고 충고하고 싶군요. 달아날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말아요.]

그러고는 그의 묶인 다리를 흘끗 보았다.

[경고해 두지만, 숲 속에는 눈과 귀가 있어요. 물론 언제든 쏠 준비가 되어 있는 활도 있고요.]

사이먼은 대충 만든 잠자리에 몸을 누이면서 승리의 미소를 애써 억눌렀다. 눈과 귀와 화살이 있는데도 야영지에 밤이 찾아들자마자 그는 묶인 손이 있는 곳으로 발을 끌어올려 단도를 꺼냈다. 사이먼은 자신을 포로라고 생각하는 불쌍한 계집을 향해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았다. 곧 상황은 완전히 바뀔 것이다. 그는 점점 짙어 가는 어둠 속에서 그녀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벳시아는 밖에서 자는 것에 익숙한 것 같았다. 사이먼은 감탄의 시선으로 그녀를 보았다. 아무 불평 없이 나무 아래에서 자는 여자는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그들의 행동은 자연스러웠다. 사이먼은 칼집을 허리에서 푸는 벳시아를 보자 목에서 무엇인가 탁 걸리는 느낌을 받았다. 갑자기 입 속이 말랐다. 분명 그녀는 아무 짓도 하지 않을 거야...비록 저 여자가 창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지만 벳시아는 그 동안 알던 여자들과 달랐다. 너무 우아하고, 자신만만하고, 그리고 너무...순수하게 보였다. 마치 노르웨이 전쟁의 여신 같았다. 그녀는 두툼하게 땋은 머리채가 어깨 위로 미끄러지자 고개를 홱 젖혀 다시 뒤로 넘겼다. 그 모습을 보자 사이먼은 무엇인가가 가슴을 차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몰래 주변을 둘러보았다. 혹시 궁수가 나를 놀리기 위해 돌을 던진 것은 아닐까? 하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고, 그는 다시 칼을 옆에 두고 담요 위에 눕는 여자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는 곧 다가올 탈출 앞에서 갑자기 솟구치는 피의 흐름을 가라앉히기 위해 숨을 크게 쉬는 데 정신을 집중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누워 있는 여자와 자신을 바라보던 그녀에 대한 기억과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조금도 자만심을 가져본 일이 없는-허세 부리기 좋아하는 스티븐과는 달리-사이먼은 자신의 몸을 <훌륭>하다고 표현한 여자와는 조금도 상관없는 일이라고 확신했다. 사이먼은 인기척이 완전히 잦아들기를 기다렸다가 숨겨놓은 단도가 손가락에 닿을 때까지 등뒤로 다리를 조금씩 끌어 올렸다. 비록 묶여 있기는 했지만 손가락을 움직이는 데는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았다. 그는 곧 날이 잘 선 단도로 밧줄을 끊기 시작했다. 자유롭게 된 사이먼은 쥐가 난 근육을 풀기 위해 몸을 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아무 소리도 내지 않은 채 가만히 누워 있었다. 그리고 벳시아가 나무 위에 배치해 두었다고 경고한 보초들의 인기척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한두 사람이 지금까지 깨어 있다고 해도 그들은 많은 것을 보지 못할 것이다. 아직 숲 속 너머에 걸려 있는 달과 별들을 제외하면, 보이는 것은 하나도 없으니까. 사이먼은 침묵이 세상을 지배하고 야생 동물조차 움직이지 않을 때 움직이기 시작했다. 옆으로 몸을 굴려 자신의 적이 있는 곳으로 조금씩 다가갔다. 그녀가 있는 곳을 잘 보아 두었기 때문에 눈을 감고도 찾아낼 수 있었다. 사이먼은 소리 없이 여자의 칼을 칼집에서 빼내고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칼끝을 목에 겨누었다. 예상대로 벳시아는 벌떡 일어나다가 목에 닿은 칼끝을 느끼고 멈추었다. 당황하는 그녀를 보며 사이먼은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사이먼은 그녀의 입을 틀어막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숲 속으로 이동했다. 벳시아는 고분고분한 여자가 아니었지만, 그는 힘들이지 않고 무거운 짐을 옮길 수 있었다. 정말 너무 쉽군,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날카로운 이빨이 손바닥을 물었다. 하지만 그는 통증을 무시하고 계속 걸었다. 물론 벳시아의 입술이 자신의 살갗에 닿았을 때 고통과는 관계없는 무엇인가가 그를 혼란스럽게 만든 것은 사실이었다. 사이먼은 고개를 수그려 그녀의 갈색 목이나 귓불에 입술을 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빌어먹을, 사이먼은 화가 치밀었다. 무절제한 충동에 빠져들 시간이 없어! 만약 산적 무리 가운데 누구라도 여자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발견한다면 곧 찾아 나설 것이다. 사이먼은 여자를 꽉 움켜잡으면서 몸에 닿은 엉덩이의 감촉을 무시하라고 자신에게 말했다. 바로 앞에 있는 여자의 육체 때문에 혼란스럽지 않다고 해도 그의 발걸음은 너무 느렸다. 나뭇가지들이 희미한 밤하늘의 빛을 가려 버린 데다가 사이먼은 이런 산 속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그는 배더슬리 방향으로 계속 나아갔다. 이제 그녀의 궁수들에게 날개가 생겨서 날아오지 않는 한 추격은 힘들 것이다. 사이먼은 그녀의 손을 밧줄로 묶기 위해 잠깐 멈추어 섰다. 벳시아는 발버둥을 쳤지만 곧 비틀거렸고, 사이먼은 이끼가 낀 땅바닥 위로 그녀를 쓰러뜨리고 손을 묶었다. 놀랍게도 그녀는 소리를 지르거나 울지 않았다. 다른 여자들처럼 울부짖거나 애원하지 않았다. 사이먼은 어떤 여자와도 다른 벳시아를 보면서 자신이 즐거움을 느끼는지 확신하기 힘들었다.

[포로가 된 기분이 어떻소?]

그는 그녀를 똑바로 내려다보며 물었다. 하지만 위치가 바뀌었을 때 느낄 거라고 예상했던 승리감도 잠깐, 그의 시선은 이제 튜닉 위로 확실하게 드러나 숨결을 따라 오르락내리락하는 여자의 가슴으로 향했다. 사이먼은 그녀가 변장을 하기 위해 가슴을 묶어 둔 것은 아니었는지 의심해 보았다. 갑자기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지금 나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어. 그런 생각이 마치 창살처럼 그의 머리 속을 뚫고 지나갔다. 그녀는 나의 일행을 공격하고 부하들을 사로잡고 나에게 수치심을 안겨주었어. 적절한 복수를 한다고 해도 나를 비난할 사람은 없을 거야. 갑자기 심장이 마구 뛰었다. 이 숲 속에서 그녀를 범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뜨거운 피가 온몸으로 세차게 흘러들었다. 몸이 바르르 떨리고 욕설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그녀는 고문을 가하거나 불명예스런 수치심을 준 것은 아니지만 몸값을 받기 위해 자신들을 잡아둔 적이었다. 물론 무법자들에게 그런 규칙이 적용되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포로를, 심지어 여자를 학대할 수 없었다. 여자!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사이먼은 한 번도 이런 부류의 적과 대면한 적이 없었다. 지금 자신을 휩쓰는 야릇한 감정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는 창녀 이외의 여자와 접한 일이 없었고,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몸과 마음의 규율을 엄격하게 지키는 생활을 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 옷을 입은 눈앞의 여자 때문에 자제력을 잃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이 여자는 자신의 몸을 이용하여 나를 혼란에 빠뜨리려고 하는지도 몰라. 사이먼은 자신의 발아래 널브러진 여자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다시 고개를 돌린 사이먼은 무섭게 노려보는 여자의 시선과 마주쳤다.

[일어나시오.]

그는 밧줄 한쪽을 잡으면서 말했다.

[이젠 걸어야 하오.]

그는 그녀가 일어서는 걸 도와주거나 따라오길 기다리지도 않고 밧줄 끝을 잡은 채 걷기 시작했다. 사이먼은 밤하늘을 살피고 귀를 기울일 때만 멈추어 섰을 뿐, 쉬지 않고 걸었다. 마침내 나무들이 적어지기 시작했다. 사이먼은 발을 멈추고 희미한 달빛에 드러난 목초지를 바라보았다. 탁 트인 곳으로 가고 싶지 않았지만 여자의 영토에 머무르기는 더욱 싫었다. 사이먼은 밧줄 끝에 매달린 포로를 끌어당기면서 숲 속 가장자리로 나아가 밤을 지샐 만한 곳을 찾기 시작했다.

[안으로 들어가시오.]

사이먼은 낡은 로마식 성당을 찾아 내고는 그녀를 떠밀었다. 곰팡내가 물씬 풍겼다. 구석마다 오래된 나뭇잎들이 쌓여 있고, 갈라진 벽 틈으로 잡초가 자라났다. 하지만 외진 곳에 있어 남의 눈에 잘 띄지도 않았다. 해가 뜨면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곳을 돌아다니는 양치기들에게 물어보면 될 것이다. 낮에는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없는 산적들은 자신들의 그늘진 은신처로 돌아갈 것이다. 만약 무법자들이 두 사람을 찾아다닌다 하더라도 그들의 지도자를 인질로 잡고 있으니 그다지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는 험상궂은 미소를 지으며 차가운 돌 바닥에 앉아서 그녀를 거칠게 끌어당겼다. 예상과는 달리, 그녀는 한 마디 불평도 하지 않고 줄곧 침묵만을 지켰다. 차라리 거친 독설로 대들면 심심하지는 않을 텐데...하지만 지금은 소음을 내지 않는 편이 발각될 염려가 적은데다 내일 길을 떠나기 위해선 휴식이 필요했다. 사이먼은 만족스럽게 눈을 감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