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여전사 벳시아-1화 (1/16)
  • 여전사 벳시아 Robber Bride

    데보라 시먼스Deborah Sieganthal(Deborah Simmons)1999

    이 영욱 옮김

    신영 장편 SR047 1999

    ♧드 부르그가 시리즈

    거칠고 강한 사이먼 드 부르크는 여자는 남자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떤 기사보다도 훌륭한 여전사 뱃시아가 그의 상식을 완전히 뒤엎어 버린다. 벳시아는 자신도 오만한 사이먼의 적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지만 그 적수 앞에서 심장이 마구 뛰는 이유는..?

    1.

    사이먼 드 부르그는 싸움을 하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렸다. 사이먼은 무모한 산적들이 자신의 일행을 공격해 주길 바라는 듯 일부러 산길을 택했다. 공격을 감행할 만큼 어리석은 패거리들을 만난다면 조금은 지루함에서 해방될 것 같았다. 형 던스탄에게 심부름을 명령받았을 때에는 아버지의 평화로운 집안에서 도망칠 좋은 핑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런 사건도 벌어지지 않은 채 며칠을 길에서 보내고 나자 슬슬 안달이 났다. 목적지인 배더슬리 성까지도 얼마 남지 않았고, 충실한 집사처럼 형의 영지를 감독하는 일도 그렇게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사이먼은 지금까지 여섯 명의 형제들과 늘 경쟁하면서 살아 왔다. 특히 웨일즈의 에드워드 왕을 섬기면서 영지를 하사받은 맏형 던스탄과의 경쟁은 대단했다. 비록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고 싶은 미친 듯한 욕구가 지난 2년 동안 많이 누그러들긴 했지만 아직은 자신의 인생에 부족한 명예를 얻기 위해 도전하고 싶었다. 물론 숲 속에서 약탈자들을 만났다고 해서 명예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말을 타고 거대한 느릅나무 아래를 지나갔다. 부하들은 입을 다문 채 뒤를 따라왔고, 한동안 가죽과 갑옷 부딪히는 소리와 땅바닥에 울리는 말굽소리만 들려 왔다. 만약 그의 형제들이라면 이런 산길은 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사이먼도 일행이 많지 않다는, 말을 탄 호위병 몇 명이 전부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조심스런 조프리의 충고를 따르려고 했다. 그들의 생명을 담보로 그렇게 무모한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사이먼은 양심에서 들려 오는 경고를 들으면서 빠르게 말을 몰았다. 하지만 너무 때늦은 후회였다. 그는 어둠 속에서 앞쪽 길을 가로질러 길게 누운 거대한 나무를 보았다. 이곳에서 아무런 사고도 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는 사이먼의 머리 속으로 곧 바라던 싸움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조용히 손을 올려 따라오는 부하들에게 경고를 하고 나서 칼을 잡았다.

    [꼼짝 말고 이곳에 온 목적을 밝혀라.]

    커다란 나무 줄기 뒤에서 맑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사이먼은 기사들 대신 솜씨 좋은 궁수 한 명을 데려왔다면 좋았을 텐데 하고 생각하며 가늘게 뜬 눈으로 쓰러진 나무 위에 선 사람을 노려보았다. 주위 환경과 비슷한 짙은 밤색 튜닉을 걸친 산적이었다. 무기를 휘두르지도 않고, 두 손을 허리에 올린 채 두 다리를 떡 벌리고 선 그를 보자 사이먼은 더욱 화가 치밀었다. 분명 그가 차고 있는 조그만 칼과 짧은 갑옷은 기사들에게서 훔친 것이 분명 했다.

    [악당 같으니, 네게는 대답해 줄 수 없다.]

    사이먼이 소리쳤다.

    [네 이름과 신분, 그리고 이 숲에 들어온 용무를 말해라.]

    그가 다시 명령했다. 사이먼은 그가 어리석은 애송이일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숲 속이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자신보다 더 좋은 무기를 지닌 전사들을 가로막다니...

    [나는 사이먼 드 부르그다. 내 아버님은 캠피온 백작이시고 형님은 웨섹스의 남작이시다. 이곳에 들어온 목적은 네가 알 바 아니다. 이 정도 밝혔으면 나에게 도전하지 않는 게 신상에 이롭다는 건 잘 알 테지? 그럼 이제 썩 꺼져라, 아니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아니, 이곳에 들어오는 실수를 범한 것은 바로 너다, 드 부르그. 만약 그게 네 이름이 맞다면 말이지만. 무기를 내려놓아라. 넌 지금 포위되었다.]

    사이먼은 상대의 대담한 답변을 듣고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뒤에 남겨놓은 패거리에 의해서 말이냐?]

    그가 물었다. 비록 그 젊은이가 한 무리의 동료를 이끌고 왔다 해도 무장을 하고 말을 탄 기사들을 상대로 싸움을 거는 것은 무리였다. 이 경솔한 애송이는 곧 실수를 깨닫고 자신의 길을 계속 가게 될 것이다.

    [궁수들도 있지.]

    젊은이가 대답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낮은 웅성거림이 들려 왔다. 사이먼은 얼굴을 찌푸린 채 고개를 들고 마치 새처럼 나뭇가지 위에 앉아 활을 겨누고 있는 여러 명의 궁수들을 보았다. 궁수? 보잘 것 없는 패거리들조차 이렇게 잘 훈련되고 조직화되어 있단 말인가? 사이먼은 이를 갈았다. 부하들을 쓸데없이 위험에 몰아넣은 행위에 대한 조프리의 비난이 귀에 들려 오는 듯했다.

    [무기를 내려놔라.]

    젊은이의 대담한 명령을 듣자 사이먼은 분통이 터졌다. 누구에게서든 명령을 듣는데 익숙지 않은 내가 하찮은 산적에게 이런 꼴을 당하다니...벌어먹을 화살 같으니! 하지만 싸우지도 않고 항복할 수는 없었다. 사이먼은 칼을 쳐들고 고함을 지르며 산적의 머리를 몸뚱아리에서 떼내겠다는 일념으로 말을 앞으로 몰았다. 여기, 마침내, 내가 찾던 싸움의 기회가 생겼어. 그는 솟구치는 흥분을 느꼈다. 뒤쪽에서 나는 희미한 비명 소리를 들으면서, 사이먼은 피를 보기 위해 몸을 앞으로 수그렸다. 하지만 젊은이가 몸을 날려 피하면서 칼날은 허공을 갈랐다. 그리고 다시 덤벼들기도 전에 사이먼은 무엇인가가 자신의 등을 후려치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강한 공격을 받은 사이먼은 말에서 떨어져 땅바닥에 심하게 부딪혔다. 그 바람에 손에서 칼이 빠져 나왔고,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현기증과 어지러움을 느꼈지만 몸을 웅크려 굴리면서 땅바닥에 내려선 젊은이를 넘어뜨렸다. 화살들이 날아왔다. 사이먼은 젊은이가 쓰러진 나무 뒤에 있는 자신의 동료들에게 고함을 지르며 명령하는 모습을 보았다. 사이먼은 비겁한 산적을 보자 더욱 화가 치밀어서 젊은이의 몸에 걸터앉았다.

    [내려와!]

    젊은이의 목소리가 높게 올라가는 순간 사이먼은 미처 만족감을 즐기기도 전에 다른 칼날 하나가 자신의 목에 닿는 것을 느꼈다. 다른 남자 같으면 움찔했겠지만 사이먼은 달랐다. 사이먼은 벽력같은 분노의 고함소리와 함께 칼날이 살갗을 긋는 고통도 아랑곳하지 않고 단검을 옆으로 밀어버리고 상대의 목을 잡고 무섭게 조르기 시작했다. 젊은이는 물 밖에 나온 물고기처럼 몸부림치다가 무릎으로 사이먼의 음부를 올려쳤다. 사이먼은 엄청난 고통을 느끼면서도 상대에게 같은 고통을 주겠다고 욕설을 퍼부었다. 상대의 음부 쪽으로 손을 뻗자 젊은이는 째지는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사이먼의 손에는 아무 것도 잡히지 않았다. 사이먼은 한참 뒤에야 자신의 손에 닿은 부드러운 여자의 윤곽선을 느낄 수 있었다.

    [나쁜 자식!]

    상대방은 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드는 순간, 손아귀에 들어 있는 이상한 생물체를 제대로 보기도 전에 사이먼은 머리에 강한 충격을 받고 말았다. 눈앞에 있는 젊은이의 얼굴이 여자로 변해 가더니 세상은 까맣게 되었다. 사이먼은 차가운 물이 살갗에 닿는 것을 느끼며 의식을 회복했다. 불쾌감에 사로잡혀 으르렁거리면서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손이 뒤로 묶여 있는 것만을 발견했을 뿐이었다. 분노한 그는 소리를 지르며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어요, 이 바보 같으니!]

    날카로운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사이먼은 눈앞에 있는 얼굴을 보며 눈을 깜박거렸다. 젊은 얼굴, 태양 빛에 갈색으로 그을린 피부, 조각한 듯한 뺨의 윤곽, 오만한 콧날과 속눈썹이 짙게 난 짧은 갈색 눈동자...순간 사이먼은 눈앞의 얼굴을 영원히 기억하려는 듯 빤히 바라 보았다.

    [바보라니!]

    그는 마침내 자신과 싸우던 젊은이가 여자로 변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산적이 여자였다니...!

    [그럼 누구 다른 사람이 또 있어요?]

    그녀가 대꾸했다.

    [당신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기사님.]

    그녀는 경멸하듯 말했다.

    [하지만 당신이 공격을 해와서 어쩔 수 없었죠.]

    사이먼은 너무 화가 나서 목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감히...이 하룻강아지가 이런 식으로 내게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만약 당신이 남자처럼 취급받고 싶지 않았다면 그런 옷을 입지 말아야 했소.]

    그는 겨우 중얼대면서 경멸 어린 시선으로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미안합니다만, 기사들의 명예스런 행동 속에 남의 물건을 잡아당기는 것이 포함되어 있는 줄은 미처 깨닫지 못했군요.]

    그녀가 혐오스럽다는 듯이 대꾸했다.

    [당신이 그 부위를 공격하려고 했기 때문이오!]

    사이먼은 순간 상대가 자신의 형제들이 아닌 여자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소리쳤다가 곧 정신을 차리고 그녀가 준 모욕 앞에 치를 떨었다. 어떤 여자도 이런 뻔뻔스런 태도로 그에게 말을 하지 못했다. 사이먼은 그녀가 혹시 창녀는 아닌지 궁금했다. 아무리 철면피인 창녀라 해도 치마를 입는 법인데. 게다가 여자가 남자 옷을 입는다는 말은 한 번도 듣지 못했다. 대체 이 여자는 누구지?

    [나는 단지 자신을 보호하려고 했을 뿐이에요.]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내가 무기를 내려놓으라고 했을 때 내려놓았더라면 당신은 상처를 입지 않았을 거예요. 이제 당신은 부상자가 되었으니 내가 치료를 해줘야겠군요.]

    그녀는 억센 손길로 그의 목을 만졌다.

    [자신의 목을 스스로 베는 사람을 한번 보고 싶었는데, 오늘에야 드디어 만났군요.]

    사이먼은 저도 모르게 뜨거운 기운이 얼굴로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묶인 손을 비틀며 욕설을 퍼부었다.

    [지금 죽고 싶어요?]

    여자가 씩씩거렸다.

    [상처를 치료하고 싶다면 가만히 있어요. 그리고 만약 계속 그렇게 시끄럽게 떠들어대면 당신 입에다 재갈을 물리겠어요.]

    재갈을 물린다고? 사이먼은 치미는 분노를 느끼며 남자들도 후들후들 떨릴 만큼 무서운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하지만 여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난 당신을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녀가 차가운 시선으로 쏘아보며 대꾸했다.

    [그리고 핑계 거리만 주어진다면 기꺼이 당신을 죽여버릴 거예요.]

    이 여자가 나를 죽인다고? 사이먼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고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비록 던스탄처럼 왕을 섬기지는 않는다 해도 그는 형의 성을 되찾는데 커다란 공헌을 세울 만큼 뛰어난 무술 실력이 있었다.

    [나와 맞대결을 할 남자도 없는데 하물며 남자 옷을 입은 여자가! 만약 당신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세상에 둘도 없는 바보일 거요.]

    여자는 비웃었다. 사이먼의 시선이 옆으로 벌어진 여자의 입술로 끌려가 한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하지만 난 이미 그렇게 했잖아요.]

    그녀는 간단히 대꾸한 다음 묶여 있는 그의 발을 날카롭게 쳐다보다가 돌아서서 가버렸다. 여자의 오만한 말을 듣자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 같았다.

    [이리 돌아와!]

    사이먼은 소리를 질렀다.

    [당신이 고함이 아닌 대화를 할 기분이 되었을 때 그렇게 하죠.]

    그녀는 어깨 너머로 고개만 돌리고 대꾸했다. 사이먼은 거위처럼 묶인 채 일어나 앉아 멀어져 가는 그녀의 걸음걸이를 바라보았다. 틀림없는 여자였다. 길게 땋은 금발이 허리까지 내려오고, 애써 남자처럼 성큼성큼 걸으려고 노력해도 사내의 옷에 감추어진 엉덩이는 조금씩 흔들렸다.

    [낭자!]

    사이먼은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그녀의 걸음걸이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고, 누군가 그를 뒤에서 발로 찼다.

    [조용히 해!]

    귀에 거슬리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사이먼은 난생 처음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다 는 무기력함에 빠져들었다. 내가 던스탄 형처럼 감옥에 갇힐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는데...지금까지 아무도 나를 사로잡지 못했는데, 하물며 여자가! 갑자기 여자에게 잡혀서 꼼짝 달싹 못하는 자신을 보고 놀려댈 형제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런 생각을 하자 이가 부득부득 갈렸다. 하지만 형제들은 웃음을 터뜨리기 전에 나를 도우려고 달려올 거야. 갑자기 기운이 나면서 순간적으로 덮쳐 오던 절망감도 사라졌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스스로 자유를 찾을 거야. 그런 다음 복수를 하고 말 거야. 사이먼은 분노를 억누르고 주변을 살피면서 도망칠 궁리를 했다. 그들이 있는 빈터는 커다란 나무들에 둘러싸여 자연스레 형성된 은신처였다. 아까 그 여자가 입은 것과 비슷한 밤색 옷을 입은 여러 사내들이 야영지 주변에서 망을 보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사이먼과 부하들을 감시했다. 저 사람들은 적어도 남자가 분명하군. 사이먼은 가늘게 뜬 눈으로 두꺼운 종아리와 억센 어깨들을 살펴보면서 그들의 성별을 확인했다. 하지만 왜 그들이 한낱 여자의 명령을 들을까? 사이먼은 알 길이 없었다. 지금 깨달은 것이지만, 모든 것이 이상했다. 대부분 화살이 꽉 찬 화살통을 등 뒤에 메고 있었다. 어떻게 단순한 도적떼들이 저렇게 장비를 잘 갖추고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 그렇게 훈련을 잘 받았을까? 산적들은 우리를 모두 죽인 다음 말과 무기를 빼앗아 숲 속으로 달아날지도 몰라.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은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와 부하들을 담보로 몸값을 요구할 작정인가? 전쟁에서 사로잡은 기사들을 위해 몸값을 지불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지만 여행 중에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사이먼은 아버지 캠피온 백작이 자신 때문에 산적떼에게 많은 돈을 지불하는 모습을 떠올리며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모두 나의 객기 때문이야...더욱 화가 치밀었다. 사이먼은 한참 동안 묶인 팔다리에 힘을 주며 몸부림을 친 다음에야 기분을 가라앉히고 냉정을 되찾았다. 그러고는 숨을 깊게 쉬면서 조프리처럼 생각을 집중 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학자처럼 구는 조프리의 사고 방식과 때때로 너무 조심스럽게 여겨지는 계획들에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지금은 맑은 정신으로 생각을 해야만 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악당들의 정체와 목적을 알아내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자신의 부하들을 못살게 굴지 않을 뿐 아니라 상처 입은 자들을 치료해 주었다. 수수께끼를 푸는데 익숙지 않은 사이먼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이먼은 어깨에 화살을 맞은 앨델름을 치료하기 위해 몸을 수그린 여자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앞으로 흘러내린 땋은 머리채를 어깨 너머로 홱 넘겼다. 사이먼의 시선은 그것을 따라 갔다. 달라붙은 바지와 부드러운 장화 속에 들어 있는 다리 아랫부분이 그대로 드러났다. 비록 그것을 비난하기는 했어도 늘씬한 곡선에서 눈길을 뗄 수가 없었다. 마침내 눈길을 위로 올렸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앨델름의 소매를 뒤로 잡아당기면서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녀가 손가락에 약을 묻혀 병사의 피부에 문지르는 순간, 사이먼은 무엇인가가 자신의 갈비뼈를 치는 기분을 느꼈다. 사이먼은 눈살을 찌푸리며 몸을 뒤틀어 뒤를 보았다.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마 자신도 모르는 상처가 있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하지만 통증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그는 자신이 마치 기사라도 되는 것처럼 짧은 갑옷을 입고 거들먹거리며 신과 남자들이 만들어 놓은 모든 법률에 공공연히 대항하는 여자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하! 사이먼은 여자를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친어머니는 자신이 어렸을 때 세상을 떴고, 새어머니에게 사랑을 받기는 했어도, 새어머니 역시 일찍 세상을 뜨는 바람에 그는 늘 여자란 약한 생물체라는 선입견을 가졌다. 그는 늘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몸집도 작고 머리도 나쁘며 능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비록 그녀들의 육체가 어떤 쾌감을 만들어 주기는 했지만 사이먼은 그것에 빠져드는 일이 드물었다. 어쩌다 여자를 원할 때면 다른 물건을 사듯이 돈을 내고 그녀들의 육체를 샀다. 그 문제에 대해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든지 간에, 사이먼은 언제나 여자는 본래부터 남자보다 열등하다고 믿었다. 아무리 남자의 옷을 입은 여자라고 해도 그런 사실을 뒤바꿀 수는 없어. 사이먼은 천천히 미소를 지으면서 타고난 자신의 오만함을 회복했다. 무엇보다도 나는 드 부르그 가의 둘째 아들이고, 기사다. 어느 누구도 나를 오랫동안 붙잡아둘 수 없어. 저 뻔뻔스러운 여자에게 벌을 내릴 거야. 내 손으로 그녀를 묶어 나의 노예로 만들어 버릴 거야! 그 건방진 계집이 굽실거리는 상상을 하자 기분이 좋아졌지만 아직 그런 승리감에 도취될 상황은 아니었다. 사이먼은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고 부하들의 상태를 살피는데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그녀가 무엇을 하는지도 살펴보았다. 사이먼은 늘 장화에 조그만 칼을 숨겨놓고 있었다. 그것은 형제들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여러 번 숨겨 놓은 칼의 도움을 받았다. 만약 그것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묶인 팔을 풀고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둠이 깔리기를 기다렸다가 도망치면 된다. 부하들 가운데 심각한 부상을 입었거나 심한 감시를 당하는 사람은 없는 듯했다. 그는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부하들을 데리고 갈 작정이었다. 하지만 무기를 좀더 손에 넣지 않는다면 탈출은 쉽지 않을 것이다. 눈을 가늘게 뜨고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자신의 칼과 갑옷을 어디에 두었는지 알아내기 힘들었다. 그것들이 없이는 벌거벗은 기분이었다. 그는 다시 한 번 계획을 정리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아 훈련이 잘된 사내들이라고 해도 밤에는 긴장을 늦출 테고, 이런 산적떼라면 에일 맥주를 잔뜩 마시고 곯아떨어질 가능성이 많았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부하들과 무기를 가지고, 혹은 혼자라도 숲 속으로 들어가 배더슬리를 향해 갈 것이다. 아까 공격당한 장소 가까이에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늘을 쳐다본 사이먼은 저주를 퍼부었다. 구름이 잔뜩 끼여 있었다. 만약 하늘이 맑게 갠다면, 별을 보고 방향을 알아낼 수 있을 댄데. 빌어먹을! 길에다 코를 대고 콩콩거리며 찾아가야 할 판국이군, 그는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던스탄 형은 성에 많은 병력이 없다 해도 병사들을 이끌고 이 여자와 불쌍한 무리들을 추격할 것이다. 통쾌한 생각을 하며 슬며시 미소짓던 사이먼은 여자가 다가 오는 것을 보고 애써 냉정한 표정을 지었다. 사이먼은 언제나 유리한 위치를 찾아내는 훌륭한 전사였다. 던스탄 형조차 그의 기술을 왕과 비교할 정도로! 어떤 건방진 계집도 나를 막을 수 없어.

    [또 무슨 일이오?]

    그는 여자를 노려보며 물었다.

    [그건 당신에게 달려 있어요, 용병 기사님.]

    여자는 조심스럽게 나무 그루터기에 앉더니 놀랍게도 한 다리를 접어 올려 팔로 감쌌다. 사이먼은 그녀가 늘 그런 식으로 자신의 몸매를 과시하는지, 혹은 자신을 놀리기 위해 일부러 그러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만약 그렇다면, 무슨 목적으로? 그는 얼굴을 찌푸린 채 그녀 가슴의 갈라진 부분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가 당신에게 얼마를 지불했죠?]

    [누구?]

    사이먼은 얼른 시선을 그녀의 얼굴로 돌리면서 물었다. 여자는 낮게 웃었다.

    [지금 나하고 농담하자는 건가요, 드 부르그? 이름이 제대로 맞는지 모르지만 말이에요.]

    만약 이름이 틀렸다면 어떻게 나를 담보로 몸값을 요구할 수 있단 말인가? 사이먼은 궁금했으나 그런 모욕적인 말을 하도록 내버려둘 수 없었다.

    [어느 누구도 내 이름이나 명예를 의심할 수 없소. 만약 그게 사실인지 확인하고 싶다면 나와 함께 캠피온이나 배더슬리로 가면 될 것 아니오.]

    여자는 흠칫 놀라는 것 같았다. 사이먼은 그녀가 짙은 속눈썹을 내리깔기 직전, 연한 갈색 눈동자에서 빛이 번쩍 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긴장감으로 턱 선이 굳어졌다.

    [그렇다면 당신은 배더슬리에서 무엇을 하죠?]

    [내 형님의 심부름을 가는 거요. 그곳을 다스리니까.]

    사이먼이 대답했다. 그리고 그의 땅에서 어슬렁거리는 산적떼를 박살내려는 의지로 가득한 사람이오. 사이먼은 소리 없이 덧붙였다. 던스탄은 산적들을 절대 봐주지 않는다. 이 여자도 마찬가지로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자 마음이 불편해진 사이먼은 성급하게 쏘아붙였다.

    [만약 당신이 지금 우릴 놓아준다면, 그는 아마 당신에게 자비를 베풀 거요.]

    여자는 기가 막힌다는 듯한 웃음을 터뜨렸고, 사이먼은 자신이 묶여 있는 것과 상관없이 그녀에게 덤벼들고 싶다는 충동을 억지로 참았다. 그는 가만히 앉아 침묵을 지키면서 붉게 달아오른 뺨과 자신만만한 여자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자신 혼자만 여자처럼 얼굴을 붉히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위치가 뒤바뀌었다고 생각하자 또다시 분노가 치밀었다. 비록 여자는 자신의 불편한 심기를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지만.

    [그럼 중요한 심부름이라는 것이 대체 뭐죠, 드 부르그?]

    그녀는 대답을 듣고야 말겠다는 듯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나는 그의 영지를 감독하고 있소.]

    사이먼은 이를 앙다문 채 대답했다. 오만 방자한 여자의 말을 듣자 화가 치밀어 견딜 수가 없었다.

    [할 일은 아주 많소. 그의 영지 안에 들어온 부랑자들을 제거하는 일도 포함해서 말이오.]

    그는 악의에 찬 말투로 덧붙였다.

    [그렇다면 당신은 우리를 파멸시키기 위해 이곳에 왔군요.]

    그녀가 비꼬았다. 물론 그런 목적으로 온 것은 아니지만 그녀의 말을 듣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이보시오, 당신이 누구인지, 또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여기서 나가라고 충고하고 싶소. 던스탄은 자신의 영지에 산적들이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거요.]

    그는 인내심이 점점 바닥나는 것을 느끼면서 쏘아붙였다. 여자가 고개를 한쪽으로 갸우뚱하며 그를 살펴보았다. 그러자 땅은 머리가 미끄러져 가슴팍으로 굴러 떨어졌고, 사이먼의 시선은 한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튜닉 아래로 봉긋 솟은 부드러운 가슴 윤곽이 보이자 갑자기 그녀의 몸을 덮어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러면 브리스 스컬베인은 누구죠? 당신은 그에게 고용된 용병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건가요?]

    사이먼은 얼른 그녀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점점 짜증이 나는군. 나는 스컬베인이 누구인지 모르오. 드 부르그는 절대 남의 용병이 되지 않소. 우린 오직 캠피온과 에드워드를 섬길 뿐이오!]

    [만약 용병이 아니라면, 그를 돕기 위해 배더슬리로 가는 병사겠군요.]

    그녀가 신랄하게 말했다.

    [뭐라고? 스컬베인이 대체 누구요? 그는 어느 곳을 다스리는 사람이오?]

    사이먼이 물었다. 이제는 호기심이 일었다. 이를 악문 여자의 짧은 갈색 눈동자는 분노로 타오르고 있었다.

    [그가 다스리는 곳은 없어요!]

    그녀가 소리치며 벌떡 일어섰다.

    [그는 도둑이에요!]

    이글거리는 그녀의 눈동자를 보자 싸우고 싶은 충동이 치밀었다.

    [벳시아?]

    그녀는 뒤쪽에서 들려 오는 부드러운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사이먼은 갑자기 뜨거운 것이 피 속에서 솟구치는 것을 느끼며 숨을 훅 들이마셨다. 한순간 이 여자가 강한 의지로 가득찬 전사처럼 느껴졌다. 사이먼은 얼굴을 찌푸리며 그런 생각을 애써 떨쳐 버렸다. 아무리 갑옷을 입고 강한 기질을 내보인다고 해도 그녀는 기사가 아닌 여자였다. 사이먼은 다시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위험스러운 번득거림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지만 조금 침착하게 보였다.

    [만약 당신 말이 맞다면, 알아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거예요.]

    여자의 입술이 오만하게 움직였다.

    [저 사람의 소지품을 가져와요!]

    그녀는 누군가가 건네준 무거운 가죽 부대를 가볍게 들더니 입구를 열어 샅샅이 뒤졌다. 그 모습을 본 사이먼은 화가 나서 씩씩거렸다. 거기에는 흥미를 끌만한 것들이 거의 없었다. 집사에게 줄 편지와 다음 회의에서 읽혀질 선언, 그리고 던스탄의 이름으로 자신에게 주는 명령서 정도가 있을 뿐이었다. 여자가 문서들을 살펴보는 동안 사이먼은 가만히 있었다. 사실 여자가 글을 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대체 어떤 종류의 산적이기에 그런 드문 능력을 갖추고 있는 걸까? 그리고 그녀가 무엇 때문에 용병에 신경을 쓰는 거지? 물론 불법이 판을 치는 곳이 남아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들 산적떼는 정규 병사들만을 상대할 만큼 강력하단 말인가? 아냐, 그렇게 강력한 무리라면 여자의 명령을 들을 리가 없어. 고개를 든 여자의 표정은 조금 부드러워져 있었다. 이렇게 반듯한 뺨과 턱 선을 가진 아름다운 용모의 여자를 내가 왜 남자로 착각했을까?

    [당신의 말이 맞는 것 같군요, 드 부르그.]

    그녀가 물건들을 있던 자리에 돌려놓으면서 말했다.

    [아니면 브리스처럼, 당신 역시 교묘한 말과 연막으로 자신의 본 모습을 숨기고 있는지도 모르죠.]

    [또 그 사람! 대체 그가 누군데 그러는 거요?]

    사이먼은 화가 나서 소리쳤다. 잠깐 여자에게 감탄의 마음이 들었으나 끊임없이 자신을 의심하는 데는 짜증이 났다.

    [당신은 대체 누구요? 자신에 대해 밝히시오!]

    화가 치민 사이먼은 밤이 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벌떡 일어날 뻔했다. 하지만 그는 무모하게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뒤쪽에 깔린 궁수들이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사이먼은 산적의 무리 가운데 한 명이 좀더 심각하게 의논을 하기 위해 여자를 뒤로 잡아끄는 것을 보면서 치솟는 욕구를 억지로 가라앉혔다. 땅딸막한 그 사내가 뱃시아라는 여자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을까. 그는 그녀의 애인일까? 사이먼은 곧 코웃음과 함께 그런 생각을 떨쳐 버렸다. 전사처럼 당당한 여자의 자세에서 복종의 기미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 태도를 지닌 여자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주지 않아. 여자와 땅딸막한 남자는 숲 속으로 걸어 들어가 짙은 신록 속으로 사라졌다. 그들이 사라지자 사이먼은 묶인 것을 풀기 위한 시도를 계속했다. 하지만 곧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말았다. 그런 기술에 자부심을 가질 만큼 월등하다고 생각해 왔는데...조프리처럼 많이 배운 것은 아니지만 그는 싸움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지난 2년 동안 던스탄을 위해 배더슬리에서 일했지만 브리스 스컬베인이라는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여자와 산적들은 내가 지난번에 다녀간 다음에 나타난 게 분명해. 악명 높은 스컬베인-그가 누군지는 모르지만-역시 마찬가지고. 사이먼은 얼굴을 찌푸렸다. 상황이나 대처 방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현실이 그의 신경을 갉아먹었다. 빌어먹을 여자 같으니! 하지만 가만히 앉아 그녀의 조롱이나 모욕을 참고 있을 수 만은 없었다. 사이먼은 낮게 욕설을 중얼거리면서 한 번 더 몸을 뒤틀었다. 그러자 바로 뒤에 서 있던 산적이 그의 등을 걷어찼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보초가 있다는 것을 안 그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사이먼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면서 인내심을 발휘하려고 노력했다. 적의 주의를 끌어당길 짓을 하면 안 되겠군. 마치 포기한 사람처럼 조용히 있어야 해. 지금의 상태가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나는 이 싸움에서 끝내 승자가 될 거야. 공격당한 게 늦은 오후였으니까 금방 밤이 다가올 거야. 조프리처럼 관찰하며 기다릴 거야. 남자 옷을 입은 여자를 무기력하게 만들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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