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월의 신부-18화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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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프리?" 마리온의 목소리에 조프리는 서류를 들여다보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그

    녀는 커다란 빈 바구니를 든 니콜라스와 함께 문가에 서 있었다. 그녀의 어두운 머

    리색과 잘 어울리는 장밋빛 가운을 입은 그녀는 평소보다 더 예뻐 보였다. 조프리는

    늑대와 결혼한 후 그녀가 한층 더 피어났다고 생각했다.

    "우리와 함께 산책 나갈래요? 치료를 위한 약초를 좀 따야 하거든요. 니콜라스가

    고맙게도 함께 가 준다고 했어요." 그녀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던스탄 형은요?" 늑대는 마리온 곁에서 떨어지는 일이 드물었다.

    "레이놀드와 스티븐과 함께 마당에거 훈련을 하고 있어요." 니콜라스는 자기도 거

    기 끼고 싶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조프리는 속으로 흐뭇했다. "그렇군요. 그럼 나도 따라갈까. 여기 도착한 이후로

    웨섹스의 성벽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는 것 같으니."

    마리온이 꽃을 따는 모습을 보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두 사람을 따라가는 게 현명

    할 것 같았다. 좋게 말하면, 늑대는 자신의 신부에 대해 질투가 심하다. 비록 가장

    어리긴 해도 동생 한 명과 함께 그녀가 나갔다는 것을 알면 한 번의 소동은 각오해

    야 한다.

    던스탄의 변화에 조프리는 미소를 지었다. 예전에 조프리는 형이 가끔 육체적 욕구

    를 해소할 때 빼고는 여자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

    의 아내에게서 잠시도 떨어지지 않는다. 설령 그녀가 곁에 없을 때라도 마음은 그녀

    에게 가 있는 듯 전혀 집중하지 못했다.

    드 부르그 가의 형제들은 그 사실을 재미있어했지만, 감히 큰형 앞에서는 말을 할

    수 없어서 뒤에서 수군거렸다.

    <그들의 결혼이 성립되었느냐>던 아버지의 물음은 물을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던

    스탄의 결혼이 완전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조프리는 마리온이 도착하자마

    자 자신의 신부를 곧장 방으로 안고 들어가던 던스탄에게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몇 시간 후, 달아오른 얼굴에 만족스런 표정을 떠올리며 되돌아왔다. 그러

    더니 또 저녁 식사가 끝나자마자 곧장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내가 오랜 여행을

    했으니 푹 쉬어야한다는 던스탄의 말은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핑계였지만, 마리온

    은 순순히 그 말을 따랐다. 그녀도  내색하지 않아, 남편의 열성에 그녀가 부끄러움

    을 느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 이후로 그 둘은 틈만 나면 방으로 사라졌다. 저러다가 늑대가 자기 아내를 말려

    죽이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아마도 그 방법이 던스탄이 알고 있는 유

    일한 애정 표현일지도 모른다. 그 생각만 하면 근심스러웠다. 마리온이 행복하길 바

    랐다. 아직까지 그녀가 웨섹스에서 편안해 하지 못하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그녀가 던스탄을 사랑하는 것은 확실했다. 그녀의 커다란 눈은 언제나 애정으로 빛

    났다. 하지만 뭔가가 잘못된 것 같았다. 두 사람 사이엔 종종 긴장감이 감돌고, 캠

    피온에선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슬픔이 마리온의 얼굴에 떠올라 있을 때가 있었다.

    게다가 던스탄은 침대에서 그렇게 많은 시간을 보내는 남자치고는 너무 욕구 불만의

    증상이 심했다.

    수수께끼였다. 조프리는 서로 사랑하는 커플 사이에 그러한 어려움이 따를 수도 있

    다는 게 놀라웠다. 마리온이 던스탄을 바라보는 것을 보면 조프리는 자신도 그런 감

    정을 경험하고 싶다는 갈망을 느꼈다. 겉으로 완벽해 보이는 결혼에도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인간의 복잡 미묘한 심성에 한숨을 쉬며, 조프리는 마리온과 니콜라스를 따라 웨섹

    스의 성벽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언덕을 향했다.

    오후는 금방 지나갔다. 셋은 서로 즐겁게 얘기를 나누었다. 대부분의 영지가 경작

    을 위해 깨끗하게 정리된 캠피온과는 사뭇 달랐지만, 조프리는 그 영지가 마음에 들

    었다. 벌이 웅웅거리는 소리와 나무 사이를 지나가는 바람 소리... 모든 것이 평화

    스러웠다.

    던스탄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오, 이런." 니콜라스의 걱정스런 목소리에 조프리는 풀밭에서 몸을 일으켰다.

    던스탄이 주먹을 불끈 쥐고 언덕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분노로 그늘졌

    고 턱에는 힘줄이 서 있었다. 조프리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치 짓궂은 장난

    을 하다 큰형에게 들킨 소년 같은 심정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지?"  던스탄은 그들이 마치 크나큰 죄를 저지른 것처럼 몰아세웠

    다. 조프리는 뭐라 대답할 수 없었지만, 자신들이 던스탄을 이 정도로까지 화나게

    할 만한 짓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조프리와 니콜라스는 뻣뻣

    하게 서서 던스탄을 바라볼 뿐이었다.

    "던스탄, 어머 놀래라! 우릴 도와 주러 오셨나요?" 마리온의 말에 조프리는 얼른

    그녀를 돌아다보았다. 그녀는 웨섹스의 늑대가 살인이라도 할 듯한 분을 뿜으며 자

    신들을 노려보고 있는 것도 모르는 채 아직도 약초들을 모으고 있었다.

    "아니오." 던스탄은 노여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다리를 약간 벌리고

    엉덩이에 손을 얹은 채 살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금 무슨 짓을 한다고 생각하

    는 거요?"

    그제야 그녀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뭐가 문제죠?"

    "뭐가 문제냐니! 안전한 성 안에 있지 않고 달랑 이 두사람만 데리고 밖에서 얼쩡

    거리고 있잖소." 던스탄의 말에 조프리는 화가 났지만 가만히 있었다. 과거의 경험

    으로 보아 늑대에게 말대답을 하는 것은 아무런 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

    기에.

    던스탄이 다가가 마리온의 팔을 꽉 움켜쥐었다. "정신이 있는 게요? 이러다가 죽을

    수도 있단 말이오, 바보! 월터, 피슬리, 또 그 누구에게든! 여태껏 끔찍한 장면들

    을 그렇게 보고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 게요?"

    던스탄이 마리온의 팔을 너무 세게 잡은 것 같아서 조프리는 기분이 나빴다. 마치

    그녀를 세게 흔들기라도 할 태세였다. 걱정은 되었지만 조프리는 한 걸음 앞으로 나

    섰다. 절대로 마리온을 다치게 할 수는 없다. 비록 그녀의 남편에게서라도.

    그런데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마리온은 그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내었다. 그렇

    게 눈에 보이는 것만큼 세게 잡은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러고는 늑대의 커다란

    가슴을 조그만 손가락으로 찔렀다. "그런 식으로 내게 말하지 말아요, 던스탄 드 부

    르그! 난 참지 않을 거에요!" 그녀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쏘아붙였다.

    "음식과 약에 쓸 약초가 필요했어요. 당신 동생들이 친절하게도 날 따라와 준 거라

    구요." 그녀는 좀더 세게 손가락을 그의 가슴에 눌렀다. "날 배더슬리에서처럼 여기

    서도 죄인 취급을 할 거라면 그렇게 말하세요. 적어도 내 삼촌은 규칙들은 잘 설명

    해 주었으니까." 그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러고는 조프리가 보기에도 우아한 걸

    음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늑대를 스쳐 지나갔다.

    "니콜라스, 나와 함께 가요." 그녀가 어깨 너머로 말했다. 순간 드 부르그 가의 세

    형제들은 입을 딱 벌리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니콜라스가 재빨리 그녀를 쫓아

    갔다.

    조프리는 마리온이 니콜라스를 데려간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혼자만 남은 것

    이 못내 불편했다. 그것도 화가 머리끝까지 난 늑대와 함께. 조프리는 늑대의 반응

    을 살폈다. 별로 아름다운 광경은 아니었다. 늑대가 끔찍한 표정으로 얼굴을 일그러

    뜨리더니 보기에도 딱한 가슴 아픈 표정을 지었다.

    저게 절망인가, 후회인가. 조프리는 놀란 눈으로 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마리온

    은 던스탄을 정말로 바꿔 놓았다. 던스탄이 누군가에게 저토록 영향 받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자신이 직접 보지 못했다면, 늑대가 말싸움에서 졌다는 것을 믿지 못

    했을 것이다. 게다가 여자에게. 그것도 저렇게 패배감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갑자기 동생의 존재를 깨달은 듯, 던스탄은 표정을 감추며 돌아섰다. 그는 땅만 바

    라보며 목덜미를 문질렀다. "난 그녀가 걱정되었을 뿐이야. 그녀가 안 보이는데 그

    녀가 성 밖으로 나갔다는 말을 누군가가 하자 난 그냥... 제기랄, 조프. 넌 그녀가

    얼마나 많은 위험에 처했는지 모르겠지. 내가 몇 번이나 그녀를 잃었다고 생각했는

    지."

    던스탄의 비장한 목소리에 조프리는 이 커다랗고 겁없는 형에게 동정을 느꼈다. 누

    구에게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던 형이 아내에 대한 사랑으로 전전 긍긍하는 모습

    이라니. 늑대는 마리온을 사랑한다. 그건 확실하다. 단지 애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모를 뿐.

    "별로 좋은 모습이 아니었어." 조프리가 말했다.

    "그래, 난... 어려워. 난 그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찼어, 조프리." 그는 자신의

    고백을 얼버무리려는 듯 작게 웃어 보였다. "이상한 감정이야. 날 약하게 만들어.

    이런 내 상태가 마음에 드는 건지도 잘 모르겠어."

    조프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결혼 생활에 대한 회의가 마구 일었다.

    "그녀가 행복했으면 좋겠지만, 그녀는..." 던스탄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내가

    자신을 사랑해 주길 바라. 조프, 난 그런 감정이 내안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그녀를 사랑할 수가 없어."

    "어리석은 말이야." 조프리가 말했다. "형이 그녀를 사랑하는 게 확실해."

    던스탄은 코웃음을 치며 돌아섰다. "그런 게 있다고는 평생 믿어 본 적이 없어."

    "알아. 하지만 형이 원하든 원치 않든, 형은 사랑에 빠졌어. 그녀에게 꼭 말해야

    해. 내가 만약 형이라면, 당장 달려가 동생들 앞에서 그녀에게 호령한 것에 대해 사

    과할 거야. 극진하게. 어쩌면 고개를 숙여야 할지도 몰라." 조프리는 말을 하며 빙

    그레 웃었다.

    던스탄은 그 말에 입꼬리를 말았다. 둘은 용맹한 기사가 조그마한 몸집의 아내 앞

    에 고개를 조아리는 광경을 떠올리며 키득거렸다. 조프리는 던스탄의 은밀한 미소를

    보며 그가 사랑 행위로 사과하리란 것을 짐작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곧 늑

    대는 자신의 감정을 말하게 될 것이다. 그것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그들은 조용히 성을 향해 걸었다. 그때 보초를 서던 남자가 소리르 질렀다. 조프리

    는 손으로 태양을 가리며 저 먼곳에서 떼지은 사람들이 말을 타고 다가오는 것을 보

    았다. 전에는 본 적이 없는 가문의 깃발을 휘날리고 있었다.

    "누구야?" 그가 형을 곁눈질하며 물었다. 던스탄의 얼굴은 다시 분노로 가득 찼다.

    던스탄이 꽉 깨문 잇새로 대답을 뱉어냈지만, 들어 본 적이 없는 이름이었다.

    "피슬리야. 자기 조카딸을 데리러 왔군." 늑대는 그렇게 말하고 그들의 도착을 대

    비하기 위해 성 안으로 들어갔다.

    조프리에게 마리온을 잘 보호하라고 말한 던스탄은 스티븐을 찾아 나섰다. 스티븐

    은 주방에서 예쁘장한 주방 하녀의 뒤꽁무니를 쫓고 있었다.

    "스티븐!" 던스탄의 천둥 같은 목소리에 하녀는 겁을 먹고 주방에서 달려나갔다.

    방해받은 게 못마땅한지, 스티븐은 팔짱을 기고 반항기 어린 표정을 지었다.

    "스티븐." 이번에는 조용한 목소리로 불렀다. "네가 필요해." 그 말에 둘은 조용해

    졌다. 아마도 던스탄이 그런 말을 입에 올리는 것을 스티븐은 본 적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스티븐은 창백한 얼굴로 물었다. "나 말이야?"

    던스탄은 집안의 탕아인 동생을 잠깐 훑어보았다. 이미 스티븐은 유사시에 자신의

    몫을 충분히 해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바 있다. 아마도 여태 자신의 가치를 증명

    할 기회를 얻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래, 너. 내가 피슬리를 만나러 나간 동안 네

    가 부하들을 지휘해 성의 수비를 맡아 주면 좋겠다."

    "내가?" 스티븐은 어안이 벙벙한 눈치였다. "조프리 형은 어쩌구?"

    "조프리는 마리온을 보호하고 있어." 스티븐은 형이 그 임무를 자신에게 맡기지 않

    은 것이 못내 불만스러운 듯했다. "레이놀드에게도 도와 달라고 해." 던스탄은 동생

    이 불평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하지만 지휘는 네가 하도록 해라."

    몸을 돌려 그곳을 빠져 나가는데 스티븐이 따라붙었다. 못마땅한 눈치였다. "하지

    만 형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하지?"

    던스탄은 멈춰서 동생을 바라보았다. "내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때 넌 내 재산

    과 내 아내를 보호해다오." 그러고는 할말을 잃은 동생을 내버려 두고 그곳을 떠났

    다.

    소수의 정예 부하들과 함께, 던스탄은 그들과 함께 피슬리 일행을 맞으러 나갔다.

    자신의 등뒤에서 성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그는 약간 안심했다. 배더슬리에서

    온 작자들을 자신의 성 안으로 들이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피슬리가 공격을

    해올 경우 부족한 인원으로는 성을 제대로 지킬 수가 없을 것이다.

    한 병사가 앞으로 나왔다. 피슬리 경비대의 대장인 굿선이었다. 그를 살인하라는

    지시를 내렸던 바로 그자였다. 그자의 뒤에 버티고 있는 병력을 떠올리며 그 자리에

    서 그 놈을 죽여 버리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았다.

    사실 이 일은 조프리에게 더 맞는 일이다. 조프리의 외교적인 수완이라면 피슬리의

    일행들이 웨섹스를 판치고 돌아다니지 않게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던스탄은 침

    착하려고 애썼다. 까딱 잘못해서 실수라도 하는 날엔 모든 게 끝장이다.

    "웨섹스의 남작을 찾고 있소." 거만한 굿선의 목소리엔 이가 갈릴 지경이었다.

    "바로 나요." 너도 잘 알고 있으면서 왜 묻는 거지.

    "당신이?"

    "그렇소, 바로 나요. 하지만 또다시 날 믿지 못하겠다면 돌아가시오."

    그 말에 굿선이 발끈했다. 더 이상 말은 하지 않았지만 얼굴엔 증오의 표정이 역력

    했다. 그는 말을 돌려 일행에게 돌아갔다. 아마도 피슬리에게 보고를 하기 위해서인

    듯했다. 피슬리는 말을 탈 수 있을 정도로 정신이 멀쩡할까, 아니면 수레에 실려

    왔을까.

    피슬리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에게 다가왔다. 그래, 네가 웨섹스의 늑대

    를 모욕하고 배더슬리에서 쫓아낸 적이 없다는 것처럼 나오는구나. 던스탄은 칼자루

    를 쥐며 이를 악물었다. 피슬리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는 소중한 마리

    온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았고, 심지어 그녀를 죽이려고까지 했다.

    "당신이 웨섹스인가?" 피슬리는 자신의 성에 있을 때만큼 거만하지 않았다. 내가

    만일 혼자고 무기도 없었더라면 이렇게 정중하게 굴진 않았겠지. 내 영토 안에, 내

    성이 뒤에 버티고 있으니가 어쩔 수 없겠지. 피슬리로서는 성에 병력이 얼마나 되는

    지 알 수 없을 테니까.

    "전에도 말했지만, 내가 웨섹스요. 날 알아보지 못하는 듯 하군요. 하지만 당신 부

    하에게도 말했듯이 이번에도 내 말을 믿을 수 없다면 내 땅에서 사라지시오."

    피슬리는 당황한 시늉을 해보였다. "당신을 알아보다니? 우리가 만난 적이 있소?"

    던스탄은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거짓말에 코웃음쳤다. "그렇소, 만난 적이 있소.

    얼마 전에 날 당신 홀에서 내던진 뒤 부하들에게 길에서 죽이라고 명령했지."

    피슬리는 눈을 깜박였다. "혹시 배더슬리에서 자신이 웨섹스라고 주장하던 자가 당

    신은 아니겠지요? 그렇다면 사과해야겠소. 그때와는 전혀 모습이 다르시군. 그리고

    당신을 죽이라고 명령했다니, 나는 전혀 아는 바가 없소! 착각하신 걸 게요."

    던스탄은 고갯짓으로 굿선을 가리켜 보였다. "착각이 아니오. 당신 부하가 누군가

    에게 날 죽이라고 말하는 것을 엿들었소."

    피슬리는 다시 눈을 깜박이고는 소리쳤다. "굿선! 이 비난에 대해 아는 바가 있나?

    당장 말하지 않으면 네 혀를 베어 버릴 테다!"

    굿선이 교활한 변명을 했다. "저는 이분이 부랑자인 줄 알았습니다. 주인님을 암살

    하려던 자로 알았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남작님." 굿선은 사과의 표시로 고개를

    숙였지만 눈만큼은 본심을 말하듯 증오로 번득이고 있었다.

    그자의 증오는 상과없었다. 중요한 건 피슬리가 무슨 꿍꿍인가 하는 것이다. 왜 굿

    선을 핑계 대는 건지. 마리온의 삼촌이 왜 갑자기 호의적인 척하는지...

    "거기 너!" 피슬리가 부하 하나를 불렀다. "굿선에게서 당장 칼을 빼앗아라. 그리

    고 굿선이 죄값을 치를 때까지 그를 감시해!" 정말 그렇게 된다면 내 손에 장을 지

    진다.

    "남작님." 피슬리가 입가에 미소를 띄며 말했다. "이제 마음에 걸리던 일을 해결했

    으니 우리를 성 안으로 맞아 주시기 바랍니다. 얘기를 해야 합니다."

    "여기서도 얘기는 할 수 있소."

    피슬리의 미소가 자워졌다. "그럼 좋소." 그는 자세를 바로하며 위엄을 갖추려 애

    썼지만 전혀 위엄이 느껴지지 않았다. "당장 내 조카를 돌려주시오. 당신에겐 권리

    가..."

    "내겐 모든 권리가 있소." 던스탄이 끼어들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난 그녀와

    결혼했소. 마리온은 내 아내이며, 이제 당신이 관여할 바가 아니오." 던스탄은 무

    기에 손을 얹고 피슬리의 반응을 기다렸다.

    피슬리의 눈이 마치 튀어나올것 같았다. 그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했다. "거짓말!"

    "합법적인 것이오. 항의는 교회나 왕에게 가서 하시오."

    순간 던스탄은 피슬리가 자신의 조카를 청상 과부로 만들어 버리는 게 아닌가 생각

    했다. 피슬리의 눈동자는 전의로 번뜩였지만, 성벽 뒤에 기다리고 있을 병사들과 늑

    대의 죽음에 복수하러 나설 자들이 두려운 듯 물러섰다.

    이 겁쟁이가 성에 남아 있는 병력이 얼마 안 된다는 것을 모르는 게 천만 다행이었

    다. 그는 피슬리를 겁주기로 결심했다.

    "나의 아버지이신 캠피온의 백작께서는 내 결혼에 기쁨을 표시하셨소. 아버님은 손

    자를 원하고 계시오." 그 말에 피슬리는 유명한 드 부르그 가 형제들이 마리온과 그

    녀의 자식을 보호하리란 것을 떠올린 듯했다. 그들 사이의 자식은 캠피온뿐 아니라

    웨섹도 상속받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배더슬리까지.

    그 말이 먹혀들어가는 것을 보며, 던스탄은 피슬리가 발작을 일으켜 죽일 수고를

    덜어 주지나 않을지 생각했지만 몇 번 심호흡을 하더니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

    "그녀를 만나보고 싶소." 그가 좀더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녀는 당신을 보고 싶어하지 않소."

    "말도 안되는 소리요." 피슬리는 다시 호의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난 그녀가 살아

    있는 걸 확인하고 자기 입으로 당신의 아내란 걸 인정하는 걸 듣고 싶소. 설마 날

    성 안으로 불러들이는 걸 거절할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피슬리가 아내 곁에 가는 것을 원치는 않지만 제대로 싸울 병사도 없는데 전쟁을

    벌일 수도 없었다. 피슬리의 청을 거절한다면, 그는 아마 발악할지도 모른다. 만일

    성이 함락된다면 마리온은 어떻게 될까. 마리온이 삼촌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것을

    상상하자 가슴이 죄어들었다.

    시간이 필요하다. 사이먼이 곧 돌아올 것이다. 전령을 보내 아버지께 도움을 청하

    자.

    피슬리는 부은 얼굴에 교활한 미소를 띄며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 이 병력을 데리

    고 성 안으로 들어가면 승산이 있으리라 계산한 것 같았다. 하지만 던스탄은 바보가

    아니다. 내키진 않지만 피슬리를 성 안으로 들이자. 하지만 다른 사람은 안된다.

    던스탄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부하들은 이곳에서 노숙을 할 수 있을 거요.

    혼자 성으로 들어와 내 아내를 만나도록 하시오."

    피슬리의 눈이 다시 번뜩였다. 피슬리는 자신의 계획이 무산되자 어떻게 해야 할지

    당황했다. 다행이다. 피슬리를 부하들에게서 격리시켜 놓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성

    안에서 자신의 부하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면 그도 공격 명령을 내리지 못할 테지.

    피슬리는 입술을 적셨다. "설마 시중들 부하 몇 명도 안된다고 하진 않겠지요?"

    "당신 혼자만이오. 날 죽이려 했던 당신 부하는 당신이 떠날 때까지 내 지하 감방

    의 아늑함을 즐겨야 할 것이오."

    피슬리는 분노를 감추려 했지만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

    그렇게는..."

    던스탄은 그의 말을 잘랐다. "그게 내 제의요." 피슬리에게 남은 선택을 공격밖에

    없다. 마리온의 삼촌에게 용기가 없기를 빌 수 밖에. 원래 피슬리는 정당하게 전투

    를 걸어 올 용기가 없어서 자기 부하들을 도적떼로 위장시키던 인물이 아니던가.

    피슬리의 잡아먹을 듯한 시선에도 던스탄이 꿈쩍하지 않자, 그는 마침내 고개를 끄

    덕거렸다. "좋소." 피슬리는 말을 돌려 부하들에게 다가갔다. 굿선은 던스탄의 부하

    들에게 인계되고, 다른 부하들은 언덕 위로 물러가 피슬리만이 남았다.

    "남작님의 뜻에 날 맡기겠소. 내 신뢰를 저버리지 않으시리라 믿소." 피슬리가 말

    했다.

    던스탄은 처삼촌에게 경멸 섞인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손님을 살해할 정도로 냉혈

    한은 아니다. 국왕도 그런 것은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만일 그가 마리온에

    게 상처를 입히려 든다면 기꺼이 그를 죽일 것이다. "이 말은 꼭 해둬야겠소. 내 아

    내에게 손을 대지 마시오. 만일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당신은 시체로 실려 나갈 것

    이오."

    피슬리는 그 말에 겁을 먹기는커녕 코웃음쳤다. 던스탄은 다시 한 번 똑똑히 말할

    까 하다가 참았다.

    "이미 경고했으니 반드시 기억하도록 하시오." 그러고는 성문을 열라고 명령했다.

    마리온은 공포에 휩싸였다. 차분히 생각해 보면, 남편이 삼촌의 청을 거절할 명분

    이 없다는 것은 안다. 그래도 삼촌이 여기 왔다는 말을 듣자 방 안으로 도망쳐 문을

    걸어 잠그고 싶었다. 안전한 이 웨섹스의 성벽 안에 삼촌이 있다니. 그녀는 차라리

    캠피온에 있는 게 나았을 거라 생각했다.

    조프리는 그녀를 아래층으로 데려갔다. 그녀는 그의 든든한 팔에 팔짱을 꼈다. 그

    러지 않고서는 버틸 수가 없었다. 조프리가 그녀를 안심시키려 말을 했지만, 그 역

    시 그녀의 그런 태도에 약간 놀란 듯했다. 그녀는 삼촌 이외의 일은 생각할 수가 없

    었다.

    삼촌을 보자 온몸이 자제할 수 없이 떨려 왔다. 그저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마리온." 그가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달콤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지내냐

    ?"

    그녀는 잠시 동안 말을 할 수도 없었다. 그러고는 복종하듯 고개를 숙이고 중얼거

    렸다. "잘 지내고 있어요, 삼촌." 던스탄이 그녀 곁으로 다가와 뭐라 말을 했지만

    너무 긴장한 나머지 이해하지 못했다. 자신이 바보 처럼 굴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

    지만 몸이 따라 주질 않았다. 그저 뻣뻣하게 입 다물고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늑

    대가 자신을 보호해 줄 거라고 스스로를 타일렀지만, 늑대는 어쨌든 삼촌을 이 안으

    로 불러들였다.

    저녁 식사는 기묘했다. 삼촌과 같이 식사한 것은 처음이었다. 배더슬리에선 언제나

    자신의 방에서 식사를 했다. 여자는 그렇게 해야한다는 것이 피슬리의 주장이었다.

    모든 기억들이 섬뜩할 정도로 뚜렷하게 몰려왔다. 자신에게서 어떻게 모든 것을 빼

    았았는지, 어떻게 자신을 감금했는지, 어떻게 자신을 멸시했는지, 남편과 남편 동생

    들이 있었지만 마리온은 삼촌의 시선 앞에서 자꾸만 움츠러들었다.

    여지껏 들어 본 적 없는 다정한 삼촌의 목소리였다. 그는 희미하게 던스탄과의 결

    혼에 대해 물으며 혹시 속임수를 쓴 것은 아니냐고 했다. 희미하게 드 부르그 형제

    들이 큰 형을 옹호하며 화를 내는 것이 들렸다. 던스탄은 그녀 곁에서 조용히 있었

    다. 가끔 자신의 얼굴에 쏟아지는 삼촌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녀는 계속 고개를 숙

    인 채, 음식을 먹으며 방으로 얼른 올라가고 싶다고 중얼댔다.

    던스탄이 팔로 그녀를 감싸며 함께 홀을 나와 줘서 고마웠다. 자신들의 침실로 갈

    때까지 던스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보호에 마음이 놓였다. 던스탄이

    침실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평소와 같이 열정에 찬 시선이 아니었다.

    그녀는 조용히 옷을 벗었고, 그도 자신의 갑옷을 벗어 요란하게 바닥으로 떨어뜨렸

    다.

    "그를 쫓아 버리겠어." 늑대가 으르렁댔다.

    마리온은 이불 아래로 기어들어갔다. "아니에요. 할 일을 하세요. 난 괜찮아요."

    던스탄은 휙 돌아서 그녀를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말도 안 되는 소리는 하

    지 마시오! 당신은 전혀 괜찮지 않아. 당신은 예전의 당신이 아니라구. 활기찬 굴뚝

    새가 아니라구. 당신은 과거의 당신의 망령 같아. 난 싫소. 피슬리를 보낼 거야."

    그가 외쳤다.

    웨섹스에 도착한 후 처음으로 던스탄은 그녀와 사랑을 나누지 않았다. 그는 욕망을

    느꼈지만 그냥 그녀를 눈물이 날 정도로 부드럽게 안고만 있었다.

    그는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 거요

    , 마리온." 그 말에 마리온은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얼마나 그를 사랑하고 있는

    지!

    그녀는 늑대가 나름대로 거칠게 나마 둘 사이의 일을 바로 잡으려고 얼마나 노력했

    는지를 떠올렸다. 그는 그녀를 배달해야 할 물건 취급하던 맹렬한 야수에서 엄청나

    게 바뀌었다. 그는 그녀를 존중했고, 그녀의 말에 귀기울였으며, 그녀를 걱정했다.

    이제 그는 누구보다도 그녀의 행복을 바라는 사람이었다.

    지하 감방에서 풀려 난 이래, 던스탄은 더욱 자상해병? 마치 그녀를 소중히여기

    는 것처럼. 밤이면 그는 자신의 열정으로 그녀를 탐닉했으며, 낮에는 별 이유가 없

    어도 종종 그녀의 곁에 있으려고 했다.

    이 남자가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베풀었는지 생각하자 눈물이 그녀의 속눈썹

    을 적셨다. 그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가질 수 없는

    것은 포기하고 바랄 수 있는 것만 받기로 하자. 던스탄이 자신을 사랑한다 하더라도

    , 그 사랑이 영원히 지속된다는 보장은 없다. 지금도 충분히 사랑에 가까웠다.

    아마도 어쩌면 늑대는 자신이 줄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을 그녀에게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걸로 만족할 수 없다면 바보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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