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월의 신부-15화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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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아 마리온은 던스탄이 격렬한 사랑 행위가 끝나면 죽은 듯

    잠에 빠지리라 생각했다. 아니나다를까 그는 코까지 골았다. 쉽게 깰 것 같지는 않

    았다. 지금이 기회다. 그녀는 침대에서 기어나왔다.

    그가 누워 있는 족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고 얼른 옷을 입었다. 뒤돌아본다면 자신

    을 사랑하지도 않는, 심지어 사랑이라는 감정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부정하는 남자

    곁에 계속 남아있게 될 것 같아 두려웠다.

    던스탄은 가정과 집을 약속했지만, 그들의 결혼 생활은 캠피온에서의 행복한 나날

    들과는 전혀 거리가 먼 공허한 삶이 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도 욕망와

    진정한 사랑의 차이쯤은 구분할 수 있다. 남편에게서 받을 수 있는 것은 열정이 전

    부 일 것이다. 하지만 열정이 식으면? 그녀는 다시 한번 감금 아닌 감금 생활을 해

    야 할 것이다.

    뜨거운 것이 치미는 걸 삼키며, 마리온은 보석 주머니를 찾기 위해 그의 옷을 찾았

    다. 바로 침대 곁에 있었다. 결혼까지 한 마당에 그녀가 도망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은 듯했다. 그런 생각을 하니 가슴이 슬픔으로 미어졌다.

    서둘러야 하는데 팔다리가 제대로 움직여 주질 않았다. 마치 몸이 머리의 지시를

    거부하는 것처럼. 하지만 오늘은 탈출하기에 가장 좋은 날이다. 그는 조금의 의심도

    없이 자고 있었다. 잠이 깨고 나서 내가 사라졌다는 걸 안다면?

    그는 아마 배신감을 느끼리라.

    마리온은 반항하는 다리를 움직여 천천히 창가로 다가갔다.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

    보았다. 어둠에 눈이 익자 땅바닥이 보였다. 창문이 꽤 높긴 했지만 창틀에 매달렸

    다가 뛰어내리면 될 것 같았다.

    갑자기 아래쪽에서 사람 목소리가 나는 바람에 마리온은 행동을 멈추었다. 이런 시

    간에 무법자들 사이로 뛰어내리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한 남자가 낮지만 또렷한 목

    소리로 말하는 게 들렸다.

    "이 여관에 있습니다."

    "확실한가?"

    "네, 여관 주인니 검은 머리를 한 커다란 몸집의 기사와 작은 여자 하나가 방 하나

    를 잡았다고 했습니다. 웨섹스의 남작을 밀고하는 걸 두려워했지만, 돈을 보더니 생

    각을 바꾸더군요. 들어갈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겁니다."

    그들은 마리온이 얼어붙어 있는 바로 그 창문 아래를 지났다. 누군가가 우리 뒤를

    쫓아왔어! 삼촌일 거야! 마리온은 침대로 달려가 던스탄의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저 아래 우릴 쫓아온 사람들이 있어요!"

    다시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녀가 그들의 꾸러미를 챙기는 동안 늑대는 즉시 일어

    나 옷을 입었다. 곧 그는 날렵하게 창밖으로 뛰어내렸고, 그녀는 어느새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그들은 말이 묶여 있는 여관 뒤편의 마구간으로 달려갔다.

    말의 옆구리를 차며 여관을 빠져 나오는데 위쪽에서 추적자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

    렸다.

    그들은 길로 곧장 향하지 않고 그냥 어둠 속을 달렸다. 던스탄은 자신이 어디를 향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듯했다. 그녀는 아무 말 않고 그에게 기대어 잠들었다.

    아침이 오자, 그는 스틸에서 산 활과 화살을 이용해 토끼를 잡아 불에 구웠다. 여

    태껏 그렇게 맛있는 음식은 먹어 본 적이 없었다.

    어젯밤 일로 마리온은 두 사람이 함께 있는 편이 더 안전하다는 걸 깨달았다. 앞으

    로 평생 웨섹스의 늑대의 아내로 살아갈 마음은 없었지만, 적어도 삼촌의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을 때까진 그의 곁에 붙어 있어야겠다고 계획을 수정했다. 어디로 가

    서 뭘 할지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어젯밤엔 잘해 줬소, 마리온." 그의 말에 놀라서 그를 쳐다보니 그의 눈이 자랑스

    럽다는 듯 반짝이고 있었다. 마음이 부풀었다. 바보 바라보듯 하는 평소의 시선과는

    달리 그와 동등한 존재로 바라보고 있었다.

    힘, 위엄, 정열, 부드러움, 그리고 불타는 보호 의지. 늑대는 그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다. 그의 고약한 성비 대신 이런 면을 계속 보여 준다면, 아마 평생 그의 곁에

    서 살고 싶어할 지도 모른다.

    "당신의 빠른 행동과 판단력 덕에 우린 목숨을 구했소." 그는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신이 침대에서 잠만 자고 있었던 것에 대한 변명을 하거나 그녀의 행동을

    평가 절하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가 칭찬의 말을 쉽게 하는 사람이 아니란 걸 아는 만큼 더욱 소중하게 생각돠었

    다. 그녀는 늑대에게 사랑으로 충만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도 확실히 그녀가 알던

    사납기만 한 맹수는 아니었다.  "고마워요."

    "내가 오히려 고맙소, 부인." 드디어 그의 존경심을 산 것일까. 탈출하려다 그에게

    인정받게 되다니. 얼마나 모순인가. 던스탄이 그 사실을 모르는게 다행이었다. 그

    가 잔기침을 하며 그녀의 주위를 끌었다. 순간 그의 얼굴을 스치는 표정에 그녀는

    숨이 막힐 듯했다. "난 우리 결혼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소."

    그러고는 얼른 일어서서 뭐라 말해야 좋을지 몰라 입만 벌리고 있는 마리온에게서

    등을 돌렸다. 빈정대는 것일까, 아니면 진심일까.

    마리온은 일어서서 근처 개울에 손을 씻었다.

    그녀가 돌아왔을 때 던스탄은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아 화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화살은 바로 일행을 죽인 화살이었다. 그 화살을 그는 아직 간직하고 있었던 것

    이다. 그녀가 작게 소리를 내자 그는 그녀를 돌아다보았다. "어젯밤의 그 작자들이

    누군지 알 수가 없소."

    "네." 마리온은 머뭇거리며 말했다. 삼촌이 보낸 부하들일거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들의 대화에서 그들의 신분을 밝힐 만한 단서는 없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우릴 죽이려는 것 같아요."

    "그런 것 같지, 굴뚝새?" 그는 화살을 내려다보며 세심하게 관찰하다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오른 듯 그는 고개를 숙여 냄새를 맡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는 얼굴을 찌

    푸렸다. 그 행동이 무슨 뜻인지 그녀가 묻기도 전에 그는 화살 촉에 혀끝을 살짝 대

    보았다.

    "왜 그러세요?"

    그는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보고는 화살의 무게를 가늠해보았다. "이 화살은

    생선에서 나온 아교로 만든 거요. 더 비싸기 때문에 잘 쓰이지 않지. 하지만 이것

    만을 고집하는 사람을 알고 있소."

    "누구죠?"

    "나의 이웃, 피츠휴요." 마리온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던스탄이 그가 웨섹스의 적

    이란 말을 여러 번 했지만, 왜 그의 일행들을 살해했을까. 던스탄은 캠피온의 명을

    받아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 주는 것뿐이었다. 피츠휴는 무슨 이유로?

    "하지만 우린 그 사람의 영지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잖아요. 왜 피츠휴가 거기

    까지 우릴 쫓아왔죠?" 그녀는 어두운 증오가 던스탄의 얼굴을 가로지르는 것을 보았

    다.

    "왜냐구?" 그는 화살촉을 보았다. "대답은 간단하오, 마리온. 날 죽이기 위해서."

    마리온은 그 대답에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피츠휴가 그의 영토와 농노들을 괴롭힌

    다는 말은 들었지만, 살인까지 할 인물이었던가. "왜요?" 그녀는 다시 물었다.

    던스탄은 허탈하게 웃었다. "그는 웨섹스를 탐내기 때문이오. 내 영토가 그의 땅과

    닿아 있기 때문에, 그자는 웨섹스를 오랫동안 자신의 땅이라고 생각해 왔소. 에드

    워드 왕이 그 땅을 내게 하사했을 때 굉장히 분개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소. 하지만

    정당한 방법으론 그 땅을 손에 넣을 수 없지."

    그의 말이 서서히 이해가 되었다. "그럼 당신을 죽여서 얻을 생각이었단 말인가요?

    "

    "탐욕은 인간을 여러 모습으로 바꿔 놓소, 굴뚝새. 당신 삼촌도 한 예지."

    "그래요. 똑같은 상황이네요. 삼촌은 내 재산 때문에 날 죽이려 하고, 피츠휴는 같

    은 이유로 당신을 노리고."

    "그렇소." 던스탄은 어둡게 미소지었다. "우린 둘 다 적은 많은데 친구는 없는 것

    같소, 부인."

    마리온은 고개를 치켜들었다. "아뇨, 그건 틀려요. 우리에겐 당신 아버님과 여섯

    명의 당신 동생들이 있잖아요. 모두 우릴 도울 거에요. 그들이 친구보다 훨씬 소중

    하다고 생각해요."

    던스탄의 입매가 누그러졌다. "굴뚝새, 하지만 먼저 그곳으로 가야하오."

    "그럼 캠피온으로 가는 건가요?" 백작과 그의 아들들을 만난다는 생각에 마리온의

    얼굴이 활짝 피어나자 던스탄은 소유욕이 가득한 표정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아니오. 우린 웨섹스로 가오." 그는 마치 그녀가 반박하기를 기다리는 듯했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더 이상 던스탄을 화나게 하고 싶지 않아 가만히 있

    었다.

    "그럼 웨섹스로 가요."

    "그렇소. 우린 웨섹스로 가는 거요. 하지만 조심해야 하오, 굴뚝새. 조심해야 해."

    조심하자는 말 그대로 그들은 큰길을 피해서 숲이나 샛길을 따라갔다. 마리온은 자

    신들의 위치가 어딘지 도무지 가늠을 할 수 없었다. 여행은 피곤했고, 그들은 밤마

    다 서로를 안을 기운도 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뜨거운 열정을 갈망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또다른 한편으

    론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던스탄의 손길 앞에선 제대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욕망 때문에 정신이 혼란스러워지고 싶진 않았다. 그녀는 일단 얌전히 굴었고, 그

    의 성질도 많이 누그러진 듯했다. 하지만 그들의 결혼 생활은 여전히 삐걱거렸다.

    마리온은 안전해진 뒤에 걱정은 하기로 마음먹었다. 캠피온이든, 웨섹스든, 아니면

    삼촌을 몰아낸 후의 배더슬리든. 그때가 되면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힐 것이다.

    비록 던스탄과 함께하는 시간이 달콤하면서도 씁쓸하긴 했지만, 그녀는 그 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와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남편을 떠나야겠다는 의지가

    점점 흔들렸다. 하지만 늑대와의 삶에는 미래가 없다. 그의 존경을 받을 수 있을지

    는 모르지만 그의 사랑을 받지는 못할 것이다. 그는 여전히 그녀가 여태껏 보아 온

    남자 중 가장 고집세고 지배적인 고약한 남자였다.

    마리온은 심호흡을 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캠피온을 연상시키는 광경이었다. 갑

    자기 가슴이 벅차올랐다. "여기, 당신 아버님 계신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죠?"

    "그렇소. 캠피온은 여기서 서쪽으로 사흘 정도만 가면 되오." 마리온은 던스탄의

    몸이 굳어지는 걸 느꼈다. "하지만 보시오. 여기는 나의 영토요."

    "벌써요? 아름다워요, 던스탄. 푸르고 풍요로워 보여요." 마리온은 진지하게 말했

    다.

    던스탄은 긴장을 풀지 않고 계속 그렇게 뻣뻣하게 있었다. "이곳은 캠피온처럼 넓

    진 않지만 나의 땅이오. 내 손으로 일궈낸 나의 땅이오. 내 성을 보고 당신이 실망

    하지 않았으면 좋겠소. 여기저기 수리를 해야 하거든. 경고하는데, 마리온. 내 아버

    지의 집이나 당신의 배더슬리처럼 좋은 곳은 아니오."

    마리온은 그의 말 속에 감춰진 약한 구석에 사라이 샘솟았다. "던스탄, 난 돈에 관

    심 없어요. 벌써 느끼셨을 텐데요. 당신 집도 마음에 들 게 틀림없어요." 뭔가가 치

    밀었다. 아직도 그에게서 달아날 생각을 하면서 어떻게 그의 집을 소중히 여기겠다

    는 약속 따위를 왜 하고있는 건지. 그와 함께 머문 시간은 그녀에게 긴 시간이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녀는 점점 더 늑대에게 얽매여 갔다.

    그가 믿지 않는다는 듯 툴툴대기 했지만 그가 안심한 것은 분명했다. "길에서 자던

    것과 비교하면 웨섹스는 궁전과도 같을 거요."

    "그래요. 더 이상 여행하고 싶은 마음도 없어요. 그저 뜨거운 음식과 부드러운 침

    대만 있으면 족한걸요." 너무 늦었다. 그녀는 단어를 잘못 골랐다. 침대란 단어

    문에 그들은 서로의 몸을 강하게 의식하게 되었다. 마리온은 그의 몸이 반응하는 것

    을 느끼며 얼굴을 붉혔다.

    던스탄이 다시 툴툴거리자 마리온은 주제를 바꾸려 노력했다. "웨섹스가 곧 보일까

    요?"

    "성으로 곧장 가지 않고 먼저 시어즈의 언덕으로 향할 거요."

    "거긴 어디죠? 무슨 마법의 장소 같은 건가요?" 그녀는 그를 돌아다보며 미소지었

    다.

    "아니오. 거긴 내 땅 대부분과 성을 굽어볼 수 있는 곳이오. 거기서 먼저 내 영지

    가 어떤 모습인지 알아보고 싶소."

    "피츠휴가 말썽 피울 걸 걱정하시나요?" 마리온은 걱정이 들었다.

    "아니오. 하지만 그가 내가 없는 동안 무슨 짓을 했난 알아봐야겠지. 자리를 비운

    동안 내 영지를 지킬 부하들을 남겨두고 갔소. 그들이 얼마나 잘 대처했는지 보고

    싶소. 불행히도 우린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야 하오. 난 덫에 걸려 들고 싶지 않소."

    "하지만 정말 당신 일행들을 살해하라는 지시를 내린 게 피츠휴였다면 당신도 죽었

    다고 생각할거 아니에요. 당신이 설마 집으로 돌아오리라론 생각하지 못할 거에요."

    "그럴지도 모르지." 그가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입을 꽈 다물었다. 그는

    마리온에게 못다한 얘기가 있는 것이다. 그녀를 아내로 맞았는데도 그의 모든 생각

    을 세세하게 다 털어놓지 않은 것이다. 마리온은 모든 것을 다 듣고 싶었다.

    마리온이 반박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그의 시선앞에서 그냥 입을 다무는 수 밖에 없

    었다. 하지만 도대체 무엇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몸을 돌려 앞을 향했다.

    던스탄이 그녀에게 조용히하라고 말한 후 소리없이 말에서 내리자 그녀의 불안은

    더욱 깊어갔다. 그는 그녀를 안아 자신의 곁에 내려놓은 뒤 혼자서 시어즈 언덕에

    올라가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던스탄..."

    "내게 아무 말 마시오, 굴뚝새. 말과 함께 여기에 있으면서 날 기다려요. 난 그저

    둘러보길 원하는 것뿐이오." 그러고는 생각났다는 듯 돌아서서 손으로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곧 돌아올 거요."

    마리온은 여전히 불안했지만, 그가 이런 상태에 있을 때는 그저 아무 말 안 하는

    게 상책일 듯 싶었다. 그의 품에 몸을 던져 그에게 키스하고 싶었지만, 그는 다른

    일로 정신이 없는 듯했다. 마리온은 부드럽게 한숨을 쉬며 그가 덤불을 헤치고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곧 던스탄이 그녀를 불러 그의 영지를 보여 줄 거라 스스로를 위로했다. 하지만 몇

    분이 지나도 그에게서 아무런 말이 없었고, 그녀는 더 이상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일어서서 늑대처럼 작은 공터를 맴돌았다. 몸을 굽혀 얼굴에 물을

    끼얹었다. 말이 던스탄을 찾아갔는지 사라지고 없었다.

    이런! 그녀는 벌떡 일어섰다. 던스탄이 말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면 기뻐하지 않으

    리라. 그녀는 덤불을 헤치고 걸어가다 언덕 정상에 조금 못 미친 곳에서 서성이는

    말을 발견했다. 그녀는 얼른 말을 나무에 잘 붙들어 매고 조용히 서서 진정하려 애

    썼다.

    그녀는 언덕쪽으로 고개를 기울이고 소리를 들었다.

    나무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언덕까지 조금만 더 올라가면 멋진 광경이

    보이리란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그

    녀는 깊이 생각할것 없이 몸을 낮추고 정상까지 기어가서 귀를 기울였다.

    사람들의 목소리. 마리온은 그대로 멈춰섰다. 던스탄이 나 모르게 누군가를 만나고

    있는 걸까. 머리 속에선 그가 여자와 밀회를 나누는 광경이 떠올랐다. 갑자기 자신

    이 늑대의 사생활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도 그

    에게 애인 하나쯤은 있을지도 모른다.

    마리온은 숨도 쉴 수가 없었다. 지금 도망쳐야 할지도 몰라. 언덕을 내려가서 말을

    타고 던스탄을 떠나는 거다. 가자, 그에 대한 사랑이 그녀를 더 이상 파괴하기 전

    에!

    과거의 마리온이라면 현실이 두려워 도망쳤을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마리온은 그

    렇지 않다. 비록 늑대에게 결점이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숲속에서 아내에게 버림받

    을 정도의 죄는 짓지 않았다. 자신에게 그 모든 것을 베푼 그에게서 말까지 빼앗아

    달아날 순 없었다. 아직도 위험의 냄새가 느껴졌다. 그가 위험에 빠졌을지도 모르

    는 상황에서 그를 떠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온 힘을 모아 위쪽으로 기어갔다. 그때 커다란 웃음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그녀는 자리에서 멈칫했다. 다행히 그것은 여자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월터의 목소

    리였다. 단지 뭔가가 달랐다. 확실히 달랐다.

    "자네가 여기로 기어올 줄 알았지. 자네를 죽이는 건 정말 어렵군, 던스탄. 뭐, 오

    래 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긴 하지만. 내가 자네 옆에 그렇게 오래 붙어 있었던 것

    도 그 때문이지. 자네 옆에 있으면 나도 살 수 있을 거 같았으니까. 하지만 이제 자

    네 목숨은 내게 달렸어. 자네의 시대는 이제 끝났네. 옛친구여."

    평소에는 조용한 월터의 목소리가 몹시도 크고 조롱기가 섞여 있었다. "그 멍청한

    계집만 아니었으면, 자네도 나머지 사람들과 함께 이미 죽었을 텐데. 하지만 그땐

    계획을 바꾸기엔 너무 늦었지. 자네는 타고난 운과 그 작은 여자 덕에 목숨을 건진

    게야. 아버지를 절대 실망시킬 수 없는 충성스런 던스탄은 언제나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지." 월터가 침을 퉤 뱉었다.

    "언제나 조심하며 주위를 살피고, 그 재수없는 드 부르그 가의 행운을 타고났어!

    자네가 그 계집과 내가 행렬 뒤쪽으로 처지는 걸 그냥 두었더라면 내가 그녀를 구했

    을 거라구. 내 평소 취향과는 거리가 좀 멀긴 하지만, 난 그 계집을 즐겁게 안았을

    거라구. 자네가 그 계집을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마리온은 던스탄의 분개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몸을 벌벌 떨었다. 적어도 아직 살아

    있긴 하지만 다치지는 않았는지. 월터가 그를 상처입힌 것은 아닌지. 보고 싶은 마

    음은 간절했지만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월터의 말을 듣고 난 뒤라, 발각되어 잡히고

    싶지 않았다.

    "아, 내가 아픈 구석을 건드렸나, 던스탄?" 월터가 빈정댔다. "그 계집을 만져 보

    지도 못했나? 그럼 자네가 유일한 인간이군. 내가 듣기로 네 형제들부터 네 아버지

    까지 계집이 닳아빠질 때까지 그 계집을 침대로 끌어들였다더군!"

    그 말에 던스탄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월터는 신경질이 나는 듯 이번엔 좀 초

    조하게 말했다. "하지만 착한 아들 던스탄은 자신의 임무에 손 대는 짓은 절대 하지

    않았을 테지. 자기 부하들이 모두 살해당했더라도 그 계집은 무사히 데려다 주었겠

    지."

    "현장에서 네 시체를 찾았지만 찾을 수 없었지." 던스탄이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무사한 것에 대하여 마리온은 안심했다. 던스탄의 그 말에, 그녀는 왜 그가 비밀스

    럽게 웨섹스를 살피려 했는지 깨달았다. 자신의 오른팔이던 부하가 죽었는지 살았는

    지, 도망쳤는지 숨었는지, 적과 손을 잡았는지 알 수 없었던 그로서는 조심할 수 밖

    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부족했던 것이다.

    "왜지, 월터? 그 오랜 시간을 함께했던 날 왜 배반한 거지?" 담담한 목소리였지만

    그 저변에는 믿었던 부하에 대한 배신의 고통이 짙게 깔려 있는 것을 읽을 수 있었

    다.

    "왜라니? 당연히 돈 때문이지. 돈과 땅과 권력, 모든 남자가 원하는 거라네, 던스

    탄. 자네는 잘 모르겠지만 모든 인간이 드 부르그 가문 사람들처럼 태어날 때부터

    부유한 건 아니라네. 원하는 걸 얻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발버둥쳐야 하지. 하지만

    기사 노릇은 이제 집어치우겠어. 명령받는 건 지겹다구."

    "그렴 누가 자네에게 막대한 부를 준거지, 월터?"

    "피츠휴, 잘 알잖아! 난 그의 딸과 결혼해서 오랫동안 바라던것을 손에 넣을걸세 .

    "

    "그 말괄량이와 결혼하겠다구?"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던스탄이 말했다.

    "침대에 그 계집을 묶어놓고 누가 주인인지 똑똑히 인식할 때까지 계집을 타줄 거

    라네. 하지만 그녀 성격이 어떤지 내가 알게 뭐람? 이 모든 게 내 것이 될 텐데!"

    "웨섹스를?" 마리온은 고통이 역력히 배어 나오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는 눈물이 흐

    를 것 같았다.

    "그래, 웨섹스. 자네가 신임하던 콜린스들도 쉽게 흩어졌네. 내가 이제 다스리는

    거야. 피츠휴가 죽으면 내가 이 모든 것을 갖겠지. 모든 것을 말이네, 던스탄! 피츠

    휴의 딸에게서 상속자를 낳아서 나도 내 가문을 만들겠어. 망해 가는 캠피온가를 능

    가하는!"

    던스탄이 코웃음쳤다. "꿈도 크군! 피츠휴를 믿는 건 어리석은 짓이야. 자네도 알

    겠지만 그는 아무것도 주지 않을걸? 그의 딸과 첫날밤을 보내자마자 자네 목에 칼을

    박을걸세.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자신이 갖겠지, 월터. 그 모든 것을 독식할 거야."

    "입 닥쳐!"

    "생각해 보게, 월터. 피츠휴가 어떤 식으로 일을 처리하는지 생각해봐. 이 땅에 대

    한 그의 욕심을 생각해 보라구. 자신이 원하는 걸 얻기 위해 자네를 이용하고는..."

    "닥쳐!" 마리온은 때리는 소리에 몸을 움찔했다. 하나님, 늑대는 무사한가요? 마리

    온은 터져나오는 울음 소리를 막기위해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입 닥치고 일어서, 던스탄. 그간의 우정을 생각해서 여기서 단칼에 죽여 줄 생각

    이었지만, 네 말을 듣고 난 뒤엔 마음을 바꾸었어. 널 피츠휴에게 데려가 그 인간

    마음대로 하라고 던져 주겠어! 지하 감방에 며칠만 갇혀 있다 보면, 그 허세도 좀

    사라질 테지."

    월터가 다시 웃었다. 피를 차갑제 만드는 그런 웃음. 그녀는 월터와 다른 두 남자

    가 말을 타는 것을 지켜 보았다. 처음에는 던스타늘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누군

    가가 그를 죽인거라 생각하며 공포에 떨었다.

    월터는 던스탄을 언덕 아래로 끌고 사라졌다.

    마리온은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입에선 흐느낌이 새어나왔다. 하나님, 저 어떻

    게 해야 하나요. 해답은 곧 떠올랐다. 넌 캠피온에 가야 해, 마리온.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백작의 영지로 가는 방향은 대강 알고 있지만, 길을 잃을지

    도 모른다. 며칠정도 말을 타야 한다. 여자 혼자 여행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고 있다. 월터의 부하들에게 발각될 수도 있다. 음식도 거의 없고 무기도 없다.

    가진 것이라곤 조그만 단도뿐이다. 어떻게 캠피온까지 갈 수 있단 말인가.

    마리온은 자신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혼자 숲속으로 혼자 도망치려던 일을 떠올렸

    다. 그때 역시 겁이 났고, 아무것도 없었다. 이 여행도 다를 바 없다. 하지만 다르

    다. 늑대의 목숨이 위태롭다.

    그 얼마나 모순인가. 던스탄의 작고 어리석은 여자가 이제 세상에서 그를 도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니. 겁많은 이 마리온 워렌에게 던스탄의 목숨이 달려 있다니.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우아한 자세로 일어섰다. 늑대의 아내에게 닥친 시련을

    극복해야 한다.

    첫날밤이 제일 끔찍했다. 야수들의 습격도 무서웠지만, 차마 불을 피울 엄두를 낼

    수 없어서 마리온은 나무 위로 기어올라가 몸을 웅크리고 잠을 잤다. 던스탄과 함께

    나무 위헤서 자던 때가 떠올랐다. 잠들 수 있을지 의심했지만 워낙 피곤했던지라

    곧 잠에 빠져들었다.

    그 다음 날은 하루 종일 말을 달렸다. 다행히 해가 떠 있어서 방향을 가늠할 수 있

    었다. 음식도 다 떨어졌다. 그녀는 길가에 난 과일과 산딸기 등을 따먹으며 몸이 버

    텨 주기만을 기도했다. 기운이 빠지려고 하면, 그녀는 어둡고 축축한 지하 감방에서

    먹을 것과 마실 것도 없이 갇혀 있을 남편을 떠올리면 자신을 재촉했다.

    사흘째는 구름이 잔뜩 끼여 방향을 제대로 잡을 수가 없었다. 길을 잃을까 봐 가만

    히 있을 수가 없어서 계속 나아갔다. 그녀는 꺼져 가는 희망을 잃지 않으려고 애썼

    다. 한 번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을 찾았지만 누군가 그녀를 해칠 것 같아서 결

    국 우회하는 길을 선택했다.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비가 내릴 기미가 보였다. 마리온은 절망했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곧 비바람이 몰아칠 거란 생각에 마지막 남은 힘도 빠질 것 같았

    다. 높은 곳에 올라가 주변을 살피니, 저 아래쪽에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이번엔 그녀도 사람들을 피하지 않았다. 배도 고프고, 피곤하기도 해고, 겁도 나서

    그녀는 그 사람들 중 제일 큰 사람에게 다가가 길을 묻고 음식과 잠자리를 부탁하기

    로 결심했다.

    아직도 보석들을 지니고 있었다. 이들이 무법자가 아니라면 후하게 값을 치루리라.

    만약 이들이 산적떼라면... 어쩔 수 없다. 시간은 촉박하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몰려드는 구름떼를 바라보며 그녀는 손에 단도를 꽉 움켜쥐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키 큰 남자가 그녀를 보고 일손을 멈추었다. 그가 무기를 꺼내들지 않는 것을 보고

    는 안심했다. 구름 사이로 한줄기 빛이 새어 나와 남자의 얼굴을 비추었다. 그의 짙

    고 풍부한 머리카락. 그녀는 안도감에 몸을 떨며 외쳤다.

    "조프리!"

    자신의 이름을 들은 그는 자세히 그녀를 뜯어보다가 놀라며 입을 벌렸다.

    "조프리!" 마지막 힘을 쥐어짜며 마리온은 말을 몰았다.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

    러내렸다. 그녀는 팔을 벌린 시동생의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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