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월의 신부-14화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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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와 결혼하라구? 마리온은 뺨을 붉히며 그를 바라보았다. 미치기라도 한 것일까.

자신을 희생할 정도로 이 임무를 심각하게 여기는 것은 아니겠지? 아버지가 맡긴 일

게 몰두한 나머지 결혼을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그를 주먹으로 때려 주고

싶었다.

말도 안 된다. 정말 진심으로 그녀를 원하는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와

의 결혼을 생각만 해도 고통이 온몸에 생생하게 살아났다. 앞으로 평생 사랑하는 남

자의 얼굴을 보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남자와 살아야 한단 말인가. 차라리 그

에게서 떨어져 있다면 예전의 그 꽃병처럼 무사히 살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와

결혼한다면 산산조각이 나서 흩어져 버릴 것이다.

"안 돼요." 그녀는 부드럽게 말했다.

"뭐라구?" 던스탄은 제대로 못 알아들은 듯 되물었다.

"안 된다구요."

그가 오랫동안 침묵을 지켜서 마리온은 그가 잠이 든 줄 알았다. 그런데 갑자기 그

가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드 부르그 가 사람들은 원래 다 자존심이 센 족속

들이다. 던스탄은 그 중에서도 특별히 심했다. 누가 자신을 거절한다는 자체를 받아

들일 수 없을 것이다. 아마 그 이유를 알고자 할 것이다. 추궁하는 듯한 녹색 시선

앞에서 그녀는 진실을 말하고 싶었지만 그를 똑바로 쏘아보았다.

"그건 너무 위험해요. 더 이상 당신 생명을 위태롭게 만들고 싶지 않아요. 저 보석

들이 있으면 난 당신이 가는 길에 있는 마을 어디서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어

요. 던스탄, 아버님께 그간 사정을 말씀드리고 웨섹스로 돌아가세요."

그녀는 자신의 자제력이 자랑스러웠다. 심지어 미소 비슷한 것을 띠기까지 했다. 그

러나 던스탄은 짜증스런 표정을 지었다. 모든 것을 여자의 어리석음이라 생각하는 게

확실하다.

"그만 떠들어요, 굴뚝새 아가씨." 그는 다신 눈을 감아 버렸다.

"던스탄 드 부르그! 내 말 들어요." 그녀가 외쳤다. "난 당신과 결혼하지 않아요!"

던스탄은 눈을 감은채 빙그레 웃었다. "그런 말들은 나중에 신혼 첫날밤에 하자구."

마리온은 뭐라고 말하려다 참았다. 늑대와 말싸움 해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잊고 있

었다. 그는 옳든 그르든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할 것이다. 정말 잘난 인간이다! 어

떻게 감히 명예심과 동정심으로 그녀와 결혼하겠다는 걸까.

마리온은 손톱이 살에 박힐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그와는 결혼하지 않아! 분명

무슨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녀는 갑자기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천천히 고르게 호흡

하고 있었다. 졸고 있는 것일까. 마리온은 그가 틈이 날 때마다 조금씩 잠을 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잠에 깊이 빠지기만 한다면... 마리온은 이것저것 머리 속으로 계산하며 계획을 짜

기 시작했다. 자신이 던스탄에게서 도망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게다가 이젠

배더슬리를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므로 자신이 또다시 도망치리라 생각하진 않을 것

이다. 이젠 단둘밖에 없다. 그냥 일어서서 도망가면 된다. 동쪽 해안가에 있는 마을

로 가 자신을 병사의 미망인쯤으로 소개하면 된다. 하지만 혼자서 그곳까지 가는 것

은 쉽지 않을 것이다.

돈! 그녀는 보석들이 필요했고, 그것들은 지금 던스탄의 밸트에 묶여져 있었다. 다

시 돌려 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가 가지고 있는 게 더 안전했으니까. 마리온은

던스탄이 잘쓰는 욕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했다. 도망가기 전에

그것을 손에 넣어야 한다. 그의 허벅지 위에 놓여있는 보석 주머니를 만질 생각을 하

자 얼굴이 붉어졌지만, 해야 한다. 그것도 그를 깨우지 않고.

마리온은 심호흡을 하며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던스탄의 얼굴엔 어떤 움직임도

없었다. 그의 기다란 속눈썹조차도 움직이지 않는다. 남자의 아름다움이 뼈에 사무쳤

다. 그녀는 약간 비틀거리며 그의 몸 위에 몸을 굽히고 손가락을 뻗었다.

그가 너무도 빨리 손을 움직이는 바람에 마리온은 눈을 깜박였다. 그가 어느새 그녀

의 손목을 꽉 틀어쥐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가 날카롭게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뭘 원하오, 마리온?"

그는 화가 나 있었다. 마리온은 겁이 났지만 최대한 용기를 발휘했다. "내 보석을

되돌려 받으려던 것뿐이었어요."

그가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날 실망시키는 군, 굴뚝새. 난 당신이 내 보석을 노리

는 거라 생각했는데."

그녀가 그를 멍하게 바라보고 있자, 그는 욕을 내뱉으며 그녀의 손을 놓아 주었다.

마리온은 그저 손목을 문지르며 커다란 눈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다시는 내게서 달아날 생각하지 말라고 경고하지 않았소, 마리온?"

그녀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하지만 던스탄. 이젠 경우가 달라요. 당신은 날

삼촌으로부터 구해 주었고, 난 그걸 고맙게 여기고 있어요. 하지만 더 이상은 필요없

어요, 정말로요." 그녀는 험악한 그의 표정에 뒷걸음질쳤다.

"날 그렇게 노려보지 말아요. 난 당신의 짐으 덜어 주려고했던 것뿐이에요! 처음부

터 당신은 날 없애 버렸으면 좋겠다고 투덜거렸잖아요. 나 따위는 귀찮은 짐에 불과

하다고." 마리온은 자신의 입술이 떨리며 눈물이 핑 도는 것을 느꼈다. 안 돼. 지금

무너지면 안 돼. 마리온은 자신을 부추겼지만 차마 그의 눈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스스로를 내게 평생토록 묶어둘 생각은 설마 없겠죠?"

그녀는 커다란 손이 자신의 뺨을 감싸는 것을 느꼈다. 그의 얼굴에 무언가가 스치고

지나며 그의 표정이 바뀌었다. 자신이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늑대의

화를 푼 것이다.

"그렇게 찌푸리지 말아요, 굴뚝새 아가씨. 난 내 결정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으니."

그는 거친 목소리로 말하며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녀가 몸을 가

늘게 떨자 그는 미소지었다. 화가 날 정도로 얄미운 남자의 미소였다.

"갑시다. 당신이 또 내가 만족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게 만들기 전에." 그는 우아

한 몸짓으로 일어나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그녀는 그를 따를 수 밖에 없었다.

던스탄은 강가를 따라 길게 난 풀 사이를 걸으며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자기 옆에

있는 여자 때문에 자꾸 주의가 산만해졌다. 왜 날 거절하는 건지 알 수가 없군. 벌써

여러 번 목숨도 구해 주었고, 쾌락도 나누었다. 그녀는 내게 처녀성을 바쳤으면서,

왜 결혼은 하지 못하겠다는 걸까.

그는 끙하고 신음했다. 왜 굴뚝새와 관련된 것은 모든 게 이리도 복잡하고 어지러운

걸까. 괜히 싫었다. 여태껏 본 여자 중 가장 괴팍한 여자다! 왜 진실을 말하지 않는

걸까. 그녀가 한 말은 거짓인 게 분명하다.

물론 그녀의 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어쨌든 결혼할 것이라고 던스탄은 다짐했

다. 그녀의 삼촌을 막아 내기 위한 유일한 해결책이다. 법적으로는 피슬리가 아직 그

녀의 후견인이므로, 그자리에서 그를 밀어내는 유일한 방법은 그녀에게 남편을 찾아

주는 것이다. 적당한 사람도 없고, 그녀에게 딸린 구혼자 무리도 없으니, 그야말로

합리적인 선택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그녀는 내게 정조를 주었으니, 나야말로 유일

한 후보일 수밖에.

그녀는 다른 여자에 뒤지지 않고 아내 노릇을 잘 해낼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가족

을 만들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아들을 낳을 때가 되었고, 마리온은 아직 아이를 낳

기에 나이가 많은 건 아니었다. 게다가 침대에서는 그 어떤 여자보다도 마리온이 월

등했다. 그들 사이에 흐르는 열정을 맛본 뒤라, 이제 다른 그 누구에게서도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웨섹스에 그녀를 데려다 놓으면 괜찮을 것이다. 거기에 그녀를 뒤면 더 이상 밤낮으

로 그녀에게 얽매이지 않을 테니. 그녀의 짜증스런 참견없이 그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집으로, 그녀가 기다리는 곳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종종 저지르곤

하는 어리석은 일만 참아낼 수 있다면 미래도 즐거울 것이다.

던스탄은 이를 악물었다. 그녀가 자신과 결혼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 그의 마음을

이상스레 아프게 했다. 전쟁으로 단련된 용사에겐 어울리지 않는 감정이었다. 그것

만으로도 마음이 찜찜한데 그녀가 또 달아나려 하다니. 배신처럼 느껴져 분노가 일었

다. 어젯밤 일을 벌써 잊은 걸까.

평생 그녀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경외에 가까운 눈으로 날 지켜보다가 어느 순

간에는 다친 새처럼 보이기도 하고, 마치 내가 때리기라도 한 것같이 입술을 떨기도

한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던스탄을 툴툴대며 목덜미를 문질렀다.

그녀가 뒤쳐저 있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그녀에게 냉정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행

여나 또다시 도망칠 생각을 한다면, 그녀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한 머저리다.

만약 또 그런다면 목에 줄을 묶어서 끌고 다닐 테다. 웨섹스로 돌아가기만 한다면

침대에 사슬로 묶어 놓을 것이다!

그 생각도 괜찮을 것 같긴 하지만, 왠지 처량한 기분이 들었다. 도대체 그녀는 왜

그러는 걸까. 가끔 어리석은 짓을 벌이긴 하지만, 그녀의 예쁜 머리 속엔 분명 똑똑

한 두뇌가 들어 있다. 그런데 그 머리로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던스탄은 낮게 욕을 하며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곧 스틸에 도착할 것이고, 거기에

도착하면 모든 일은 끝난다. 마리온 워렌이 무슨 말을 하든 그녀는 그의 아내가 될

것이다. 그 생각을 하니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또다시 그는 그 분위기다. 그녀에게 툴툴대고 으르렁댔다. 하지만 마리온은 너무도

지친 나머지 그의 그런 모습을 재미있다거나 귀엽다고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의

곁에서 발걸음을 서두르고 있긴 하지만, 그녀는 던스탄을 떠날 생각만 하고 있었다.

스틸은 조그만 마을이 아니라 꽤 커다란 도시였다. 마리옹능 복잡한 시장거리를 보

며 골목길 안으로 몸을 숨길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던스탄은 그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복잡한 거리로 나서자마자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멍이 들지 않게

노력하는 듯했지만, 그의 손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웨섹스의 늑대와 힘으로 싸워

서는 이길 수가 없다.

그는 먼저 마시장에 들러 여러 말들을 훑어보다가 그 중 가장 큰 말 앞에 멈춰 서서

찬찬히 훑어보았다. 전에 그가 타던 말보다는 좀 작지만, 그는 충분히 만족해 했다.

그는 말을 살펴보면서도 그녀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는 마침내 결정을 내리고 주인

과 흥정을 했다. 마리온은 탈출 계획을 짜며 그들의 대화를 건성으로 들었다. 오늘밤

그가 잠들었을 때... 아무리 웨섹스의 늑대라도 영원히 잠을 자지 않고 버틸 순 없

다. 어둠 속에서 이 수많은 건물 사이로 사라지기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던스탄이 목소리를 낮추자 그녀는 그에게 주의를 돌렸다. 던스탄은 험상궂은 표정으

로 주인에게 이 말들이 어디서 났는지 물으며 요 며칠 사이에 이러저러한 말이 시장

에 나온 것을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던스탄은 자신들 일행이 타고 있던 말을 설

명하고 있었다. 이런 데서 찾아봐야 시간 낭비지, 그 말들은 이미 삼촌의 마구간에

있을 테니.

던스탄이 마음에 들어하진 않았지만 안장도 하나 살 수 있었다. 던스탄은 말에 올라

타 그녀를 자신의 앞에 앉히고 거리로 말을 몰았다.

"그런데 내 말은 어딨죠?"

"이것 뿐이오, 굴뚝새. 이런 상황에선 말을 같이 타는 게 제일 좋을 것라고 생각했

소." 그가 딱딱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의 표정은 충분히 험상궂었다. 마리온은 얼른

고개를 돌려 앞을 보았다. 그녀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그녀가 도망칠 계

획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것 때문에 화가 나 있는 것이다.

그들은 묵묵히 길을 갔다. 던스탄이 돌로 만든 건물 앞에 말을 세우고 고삐를 묶었

다. 그는 날렵하게 말에서 내려서 그녀가 내리는 것을 도왔다. 상상이었을까, 아니면

정말 그의 손이 내 허리에서 잠시 머물며 그의 숨결이 내 머리카락을 애무했을까.

그를 올려다보니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눈은 어둡게 빛을 발하고 있었

다. 고약한 성미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녀를 원하는 것이다.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심장 고동이 빨라지자 그녀는 그의 팔을 꼭 움켜쥐었다. 그런데 그녀의 뱃속에서 커

다랗게 꼬르륵 소리가 났다.

그는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저 안에서 얌전히 있으면 먹을 걸 사주겠소,

굴뚝새."

"이제 어디로 가는 거죠?"

"한 가지 더 끝낼 일이 있소. 그 후에 여관을 잡고 당신 배를 채워 주리다." 던스탄

은 자기가 한 말이 우스운지 혼자 웃으며 그녀를 안으로 인도했다.

마리온의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곧 그녀는 그곳이 어딘지 깨

달았다. 교회! 분노가 일순간 몸 속으로 번져 갔다. 그녀 자신도 놀라웠다. 이렇게

격한 분노는 삼촌에게조차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싫어요." 그의 손아귀에서 손을 비틀어 빼내며 마리온은 돌아서서 팔짱을 끼고 다

리를 벌리고 서서 늑대가 종종 취하던 행동을 흉내내었다. "당신과 억지로 결혼할 순

없어요, 던스탄."

그녀를 노려보며 던스탄을 낮게 욕설을 지껄였다. 그러고는 휙 돌아서 버렸다.

"말 조심 하세요! 성스러운 곳에서 그개 무슨 말이에요?"

그녀의 비난에 던스탄은 불만의 소리를 높였다. 그는 우아한 자세롤 돌아서며 엉덩

이에 손을 대고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곁눈질해 보니 저쪽에서 신부가 걸어오다가

던스탄을 보고는 꽁지 빠져라 다시 돌아가 버리는 게 보였다.

하지만 마리온은 후퇴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을 집어삼킬 듯 노려보는 남자를 째

려보았다. 갑자기 자신의 꼴이 굉장히 우스울 거란 생각이 들었다. 조그만 여자가 커

다랗고 위험한 기사 앞에 서 있는 꼴이라니. 하지만 정작 그들은 별로 그 모습이 낯

설지 않았다.

늑대는 그녀가 사사건건 반대하는 데 익숙해져 있는 듯했다. 그는 한 번도 자신의

완력으로 그녀의 뜻을 꺾지 않았고, 그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는 화가 끝까지 치

밀었지만 그녀가 굴복하길 기다렸다.

"왜지, 마리온?" 그가 이상하게 억눌린 목소리로 마침내 물었다. "날 거절하는 이유

를 한 가지만 대 보시오. 타당하다고 생각되면 나도 마음을 바꾸겠소."

마리온은 그토록 진지한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화가 사그라들었다. 그녀의 거절에

그의 자존심이 상한 것이다. 그의 초록색 눈을 보면 알 수 있엇다. 그녀의 거절 때

문에 그는 진정으로 당혹했으며, 심지어 상처까지 입은 듯 했다.

갑자기 그를 안심시켜 주고 싶었다. 그의 상처입은 자존심을 달래주고 그의 입술에

입맞추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저 그의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당신은 날 사랑

하지 않잖아요." 그녀가 속삭였다.

던스탄은 코웃음쳤다. 그는 웃음을 터뜨리려는 듯 고개를 뒤로 젖혔다가 그녀의 표

정을 보며 웃음을 참았다. 대신 그녀를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많고 많은 이유 중에

그게 이유요!"

마리온은 아픈 가슴을 달래려는 듯, 천천히 치마만 매만졌다. 그에게 진실을 말해봐

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는 비웃기만 할 것이다. 결국 늑대도 많이 변하지는 않

은 것 같다. 그녀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두 손을 곱게 포갰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마리온은 그가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그녀의 고통을 느끼기라도 한 듯, 좀 더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그

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배어 있었다. "지금 우린 사느냐 죽느나 하는 문제를 놓고 있

는 거요, 마리온. 당신을 당신 삼촌으로부터 보호하자는 거요. 그런데 당신을 고작

사랑 타령이요?"

그를 올려다보자, 그는 마리온을 바보스럽다고 여길 때 짓곤 하던 그 신물난다는 표

정을 짓고 있었다. 그가 한 걸음 다가왔다. "마리온, 사랑이란 건 시인들이 지어낸

것에 지나지 않소. 성인 남녀나, 아내와 남편 사이에 오가는 건 사랑이 아니오."

마리온은 그의 말에 예리한 고통과 함께 그에 대한 연민을 느꼈다. 그리고 자기 자

신에게도. 그에게 어떻게 납득시킬 수 있을까. 그와 언쟁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란

걸 잘 알고 있지만, 그녀는 그래도 꼭 말해야 했다. 그녀는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진

정한 뒤 말을 이었다. "아니에요, 던스탄. 우리 부모님들은 서로를 사랑하셨어요."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당신 아버님이 부인들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말하지

마세요."

던스탄은 그녀의 말에 허를 찔린 듯 머뭇거렸다. 마리온은 그의 시선을 뿌리치며 용

기가 생기는 것 같았다. 그녀는 마침내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냈다. "사랑이 존재한다

는 걸 알아요, 던스탄. 왜냐하면 나 역시 느끼고 있으니까요, 당신에게."

던스탄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는 걸 들었다. 그가 침묵을 지키는 바람에 그녀는 자신

의 고백을 주워담고 싶었다. 용기를 내어 간신히 그를 흘낏 보니 그의 얼굴에 뭔가가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곧 철통같이 냉정한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는 아무것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그럼 더더욱 나와 결혼해야겠군." 그가 안

쓰러울 정도로 미소 비슷한 것을 흉내내려 했다.

마리온은 한 발 물러서기로 했다. 늑대가 그녀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다는 건 확실하

다. 그녀의 힘겨운 고백은 그에게 조롱거리밖에 되지 않았다.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마음 아프기는 마찬가지였다.

"마리온."

"싫어요." 그녀는 부드럽게 말했다.

"굴뚝새." 그가 고개를 돌리자 그 순간 마리온의 약하디약한 결심이 흔들렸다. 그가

계속 강요했더라면 그녀도 굽히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욕을 하며 으르렁댔다면, 그

녀는 까딱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느낀 게 무엇이든 그녀가 그것

을 보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아마도 자기 자신조차 보고 싶어하지 않았을 것이

다.

던스탄은 벤치에 손을 짚으며 기댔다. 그의 늠름한 어깨가 축 처지며 그의 검은 머

리가 패배를 시인하듯 축 늘어병? 늑대의 그런 모습은 한번도 상상해 보지 못했다.

마리온이 진 것이다.

마리온은 흘러내리려는 눈물을 깜박이며, 자신이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비로소 깨

달았다. 그를 위해서라면 힘겹게 얻은 자유를 저버릴 수 있다. 영원히.

"좋아요, 던스탄."

던스탄은 먹을 걸 사주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음식점에 들러 빵과 뜨거운 스튜를 샀

다. 기사 한 명과 아름다운 여자 하나. 그들은 눈에 띄엇다. 게다가 부하도 없는 마

당에 그곳에서 서성거리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피슬리가 아직도 쫓고 있을지도 모른

다.

항상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내던 던스탄에게 모습을 감추는 것은 익숙치 않았다. 부

하들이 없으니 마치 벌거벗은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는 마리온을 보호해야 했고

, 결혼 첫날 밤을 길에서 보내고 싶지 않앗다. 그는 얼른 도망갈 수 있도록 도시 변

두리에 있는 조용한 여관에 방을 잡았다. 피슬리가 여기까지 쫓아올 리는 없다고 생

각했지만, 자신의 목숨과 아내의 목숨을 건 도박은 할 수 없었다.

내 아내. 자신이 굴뚝새을 소유했다는 데 기묘한 만족감이 들었다. 그녀는 이제 나

의 것이다, 영원히. 매일 밤마다 내 침대를 따뜻하게 데워주고 어머니 같은 태도로

나를 돌봐 주고, 보조개가 살포시 보이는 그 빛 같은 미소를 내게 보여 주고...

던스탄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는 요즘 들어 별로 웃지 않았다. 비록 항복하긴 했

어도, 그녀는 빛을 발하는 신부와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범접할 수 없는 슬픈 분

위기를 풍겨 더욱 작고 연약해 보였다. 그녀는 슬픔의 껍질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가

한 것이라고는 명예롭게 그녀를 아내로 맞은 것뿐인데.

그녀의 태도에 자존심이 상하고 기분이 상했다. 얼굴을 찌푸리고 으르렁거릴 때마다

그녀가 점점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젠장. 강둑에서 그를 일어나지 못하게 누르며 그

에게 기쁘게 속삭이던 마리온은 어디로 간 것일까. 이 사슴 눈을 한 여자는 그때 그

여자의 그림자일 뿐이다. 이런 게 사랑이라면 그는 사랑 없이 살고 싶었다.

던스탄은 코웃음을 쳤다. 그 어리석음이라니! 어리석은 사랑을 찬양하는 연가와 시

나부랭이나 바라고 있다니. 칼도 제대로 못 쥐는 주제에 달콤한 말이나 지껼여 대는

남자나 꿈꾸고 있겠지. 달콤한 말이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인가. 편안한 집에, 걱정이

나 부족할 게 없는 삶에, 그것들을 보호해 줄 강한 남자가 있으면 되지.

바로 그런 것들을 마리온에게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왜 그녀는 저토록 불행해 하는

지. 왜 여자들은 그토록 괴팍한 것인지.

그는 툴툴대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무 말없이 음식을 먹고 잘 준비를 하는 그녀는

마치 사형 선고를 기다리는 여자 같았다. 마리온은 커다란 침대에 누워 이불을 턱끝

까지 덮은 채 끔찍한 일을 두려워하는 처녀같았다.

하지만 그녀가 그렇제 않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던스탄은 갑옷을 바닥에 요란하

게 떨어뜨렸다.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고 그대로 누워 있었다. 그게 더 화가 났다.

그는 그녀가 자신에게 웃어 주길 바랐다. 보조개를 보이는 그런 미소를. 순수하지만

요염한 그녀만의 태도로 그를 부르며 결혼의 행복함을 표현해 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던스탄은 촛불을 불어 끄면서 얼른 옷을 벗고 침대로

들어갔다. "남편에게 환영의 말도 하지 않는 거요?" 그녀의 태도에 기분이 상하긴

했지만 그의 몸은 침대 아래 누워 있는 그녀의 알몸에 벌써 반응하고 있었다. 내 아

내.

"네, 환영해요, 던스탄." 그녀의 목소리는 서글펐다. 더더욱 신경에 거슬렸다. 그는

그녀의 위로 올라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당신에게 줄 달콤한 말 따위는 없소, 부인." 그가 거칠게 말했다.

"알고 있어요, 던스탄." 그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녀가 울 거라 생각했다. 제기

랄. 멋진 신혼 첫날밤이군! 꽃향기 같은 그녀의 머리 냄새가 진동했다. 그녀를 원했

다. 아마 영원히 그녀를 원할 것이다.

"당신에게 내 보호와 집과 아이들을 주겠소."

"알아요."

"그런데 왜 그러오?" 그가 초조하게 물었다.

"당신은 내개 사랑이나 존경이나 자유로운 의지는 주지 않을 거니까요."

던스탄은 코웃음을 쳤다. 계속 어리석은 소리만 하는군. 그는 그녀의 팔목을 침대

위에 눌러 붙였다. "하지만 당신에게 쾌락을 줄 거요, 굴뚝새. " 그는 그녀의 입술을

자신의 입술로 봉하기 전에 속삭였다.

그는 그녀에게 굶주려 있었다. 아침의 일은 벌써 까맣게 먼 옛날 같았다. 그녀를 가

져야만 했다. 그녀가 이젠 처녀가 아니라는 게 다행이었다. 양치기의 오두막에서 처

럼 자제심을 발휘할 필요가 없으니까. 그녀를 소유해야만 했다.

아내. 그는 그녀의 뺨에서 목으로 입술을 움직여 가며 생각했다. 나의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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