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월의 신부-12화 (13/20)
  • 12

    무언가가 그의 잠을 깨웠다. 그는 눈을 번쩍 뜨고 주위를 살폈지만 위험은 보이지

    않았다. 식어가는 장작불과 희미한 여인의 향기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마리온! 벌

    떡 일어나며 바닥에 내려서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그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런, 말괄량이가 또 도망갔군! 던스탄은 배신의 쓴맛을 맛보며 옷을 집어들었다.

    그녀가 달아났다는 사실에 마음의 상처를 입을 지경이었다. 기묘한 고통은 마음 저

    구석으로 밀어두고 화가 치밀었다. 이번엔 정말 목을 졸라 죽여 줄 테다. 실컷 때려

    줘야지. 아냐, 역시 맨손으로 목을 조르는 편이 낫겠다!

    던스탄은 옷을 걸치다가 마리온의 망토가 아직 난로가에 널려 있는 걸 보았다. 뒤돌

    아보니 그녀의 꾸러미가 바닥에 놓여 있었다. 꾸러미를 열자 젖은 담요와 그녀의 개

    인 소지품 몇가지, 그리고 작은 주머니 하나가 나왔다. 주머니 안에는 보석이 담겨

    있었다. 설마 이런 것도 없이 달아나진 않았을 텐데...

    다시 방 안을 둘러보다 두레박이 없어졌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녀가 물을 길러 간 모

    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밖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뭔가가 잘못되었다

    는 느낌은 떨칠 수가 없었다.

    그는 갑옷을 갖춰 입고 무기로 무장하고서 눈부신 바깥으로 나섰다. 밖엔 아무도 없

    었다. 우물가에도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공포가 밀려왔다. 던스탄은 그 마음을 꾹

    눌러 참으며 마리온의 행방을 알리는 작은 단서라도 찾기 위해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

    았다.

    거의 우물가에 다다랐을 때, 그는 바닥에 어지럽게 찍힌 말발굽 자국을 보았다. 졸

    지에 기습 당한 느낌이었다.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발굽 자국을 살펴보니 여러 마리

    의 말의 흔적이 있었다.

    누가, 그리고 왜 마리온을 데려갔을까. 불현듯 그녀가 두 명의 야수 같은 남자들에

    게 잡혀 길게 누워 있던 광경이 떠올랐다. "안돼!" 그가 부르짖었다. 그녀에 대한 걱

    정과 더불어 조금은 다른 감정이, 좀더 깊고 약한 감정이 순간적으로 생겨났다. 그는

    자신을 타일렀다. 그에겐 임무가, 아버지로부터 맡겨진 임무가, 실패해선 안 될 임

    무가 있었다.

    서둘러 마리온의 꾸러미와 자신의 짐을 챙긴 뒤, 그는 그 발자국을 쫓기 시작했다.

    비가 온 뒤라 땅이 부드러웠기에 다행히도 발자국은 선명했다.

    그는 계속 길을 따라가며 스스로를 저주하며 욕을 내뱉었다. 대낮에 잠이 들지만 않

    았어도 마리온은 무사했을 텐데. 도대체가 어디가 잘못된 것일까. 만족스런 관계 한

    두 번에 군인으로서 받은 훈련을 모두 잊기라도 했단 말인가.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

    니, 오두막에서 일어난 일은 그저 만족스럽다는 말로 설명하기엔 모자랐다. 던스탄은

    얼굴을 찌푸리며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집중하려 했지만, 그녀의 풍만한 몸과 자신이

    보였던 반응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좋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왜냐고 묻는다면 할말은 없다. 어쩌면 그들이

    처해 있던 절박한 상황이 정열을 부추겼을지도 모른다. 혹은 그 동안 밤낮으로 그녀

    의 매력에 저항하려 애썼기 때문일 수도 있다. 원래 금단의 과일이 더 달콤한 법 아

    닌가. 물론 그렇긴 해도 그녀의 처녀성을 빼앗을 의도까지는 없었다.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지만 그건 곧 자랑스런 소유욕으로 바뀌었다. 그녀과 자신의

    동생들과의 관계가 어떠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어도 굴뚝새는 그와만 잤다. 그 사

    실이 그를 몹시 기쁘게 했다. 그녀에 대한 욕망을 그녀와 밤을 보내는 것으로 해결하

    려 했지만, 그녀를 두 번이나 안고 난 지금에 와서는 그녀를 그 어느 때보다 더 원하

    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다.

    행운이 따랐는지 그는 한시간 후에 위스버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언덕빼기에 있는

    작은 마을이었지만, 그곳엔 영주의 저택도 있고 영주의 말을 치는 하인도 있었다. 그

    는 값비싼 돈을 치르고 늙은 말 한 마리와 음식 조금, 그리고 얼마간의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오늘 이 길로 말을 타 남자 몇 명과 짙은 밤색 머리의 여자가 지나갔을 텐데, 그들

    을 보았소?"

    "예, 나리." 그는 무장한 기사에 겁을 먹은 듯 천천히 대답하였다. 하지만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자, 던스탄은 동전 몇 닢을 던져 주었다. 그의 눈동자가 탐욕으로 번뜩

    였다. "이리로 지나 갔습죠. 배더슬리에서 온 병사들이었습죠."

    배더슬리라고? 마리온의 집이 그렇게 가까웠던가. 던스탄은 캠프를 공격받은 이후

    시간과 거리 감각을 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앗다. 의혹이 피어올랐다. 마리온이 고

    의로 그를 떠나다니. 그것도 소지품을 남겨 둔 채. 그녀는 절대 순순히 집으로 돌아

    가려 하지 않았을 텐데. "배더슬리라고? 그곳이 얼마나 떨어져 있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지?"

    그는 배더슬리에 대해 얘기하면 나쁜 일이 생길 거라는 듯 얼굴을 찌푸렸지만 눈동

    자는 던스탄의 손바닥에 놓인 동전에 가 박혔다. "가장 빠른 길은 저 언덕을 따라가

    는 거죠."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 뒤에 오래된 길이 있는데 그걸 따

    라가시면 곧 나타날 겁니다. 동쪽으로 하루 정도 말을 달리시면 나올 겁니다."

    던스탄이 동전을 던져 주자 남자는 얼른 손을 뻗어 동전을 잡았다. 남자는 눈썹을

    찌푸리며 그에게 물었다. "혼자 그곳까지 가십니까, 나리?"

    던스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 등에 올랐다. 그 남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등을

    돌렸다. 말을 움직이기 시작하며 던스탄은 그 남자가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

    했다. "등을 조심하시구랴." 하지만 던스탄은 이미 마을에서 멀어져 가고 잇엇다.

    오래지 않아 던스탄은 자신이 과연 왜 배더슬리를 향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마

    리온은 집으로 가고 있다. 원래 그녀가 속한 곳으로. 그것도 삼촌 군사들의 호위를

    받아 가며. 그런데 왜 그녀를 따라가고 있는 걸까. 그의 땅과 백성들이 그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고, 시간을 지체하기 어려운 형편인데.

    하지만 던스탄은 그녀의 안전을 자신의 두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쉽게 돌아설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녀와 함계 갔다는 남자들의 신원에 대해서는 그 남자의 말밖

    에 없지 않은가. 마리온에 대해 알 만큼 아는 터라, 던스탄은 그녀가 일행들을 순순

    히 따라갔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만약 그녀가 그들에게서 탈출을 시도한다면? 아

    마도 지금쯤 저 언덕 너머 어딘가에서 몸을 따스하게 할 망토조차 없이 혼자 길을 잃

    고 헤매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을 하자 던스탄은 가슴이 저미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다른 생각이 꼬리를 물

    었다. 만약 그들이 그녀의 탈출에 지쳐서 그녀를 묶기라도 한다면... 행여 때리기라

    도 한다면? 그녀를 목졸라 죽이겠다는 과거의 맹세는 잊은 채, 던스탄은 그녀에게 손

    을 댈지도 모르는 자들에 대해 분노가 역류해 왔다.

    자신의 무의식적인 행동으로 시퍼렇게 멍이 든 그녀의 팔을 떠올리며 그는 이를 악

    물었다. 그녀를 무사히 찾을 수만 있다면 다시는 그런 상처를 입히지 않으리라. 하지

    만 그녀의 삼촌과 그의 부하들은 어떨는지. 해럴드 피슬리에 대한 그녀의 말에 진실

    이 담겨 있었던가. 조금 전 그 남자의 표정으로 보건대, 사람들이 피슬리를 별로 좋

    아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원래 무리의 지도자는 의도와는 다르게 악평을 받

    곤 한다. 던스탄은 그녀의 삼촌이 어떤 부류인지 자신의 눈으로 판단하기로 했다. 마

    음의 불안을 씻을 수 있을 때까지 배더슬리에 며칠 동안 머물기로 결심했다.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여태껏 여자의 말을 들은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것도 말썽

    만 피우는 거짓말쟁이에다 말괄량이인 마리온 워렌의 말을 듣다니! 던스탄은 굴뚝새

    에게서 받은 많은 영향들을 생각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육체적인 영향뿐이 아니다.

    배더슬리에 머물기는 하겠지만, 그녀가 안전하다는 판단을 내릴 수 있을 때까지다.

    아버지는 그녀의 안전을 확인하라고 했고, 그는 그 명령을 따를 것이다. 이것은 그의

    의무였다. 마리온이 상처 없이 집에 당도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때까지는 마음

    이 편할 것 같지 않았다.

    그 후에는? 웨섹스에서 수많은 문제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데 배더슬리에서 어슬렁

    대고 있을 수는 없다. 그녀가 그의 생각을 사로잡고 그의 피를 끓게 만들었다. 만일

    한 번만 더 그녀와 잘 수 있다면, 그녀에 대한 갈증을 해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굴뚝새를 머리 속에서 지우고는 눈앞에 펼쳐진 길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는 어두워서 길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속해서 나아갔다. 그러다가 아까 산 음식

    을 먹고 나무에 기대어 잠시 휴식을 취했다. 어제 그가 잤던 곳과는 달리 너무 허전

    하고 추웠다. 새벽녘이 되자 그는 다시 길을 떠났다. 속도를 내지 못하는 늙은 말을

    탓하며, 누군가가 훔쳐 간 자신의 빠르고 날렵한 말을 그리워했다.

    몇 년 동안 여행을 한 덕에 그의 인내심은 거의 완벽에 가까운 수준이었지만, 오늘

    만큼은 도무지 시간이 지나는 것 같지 않았다. 마리온에 대한 근심이 마치 형편없는

    무기글 가지고 있는 싸움을 할 때처럼 계속 그의 신경을 긁어 댔다. 그녀를 찾고 싶

    었다. 늙은 말을 죽을때까지 달리게 하고 싶은 자신의 마음과 끊임없이 싸워야 했다.

    불쌍한 말이 콧김을 내쉬며 헉헉대기 시작했을 때, 던스탄은 작은 개울에 말을 멈추

    고 물을 먹였다. 그러고는 손으로 물을 떠 자신도 목을 축이고 나서 일어섰다. 그는

    개울의 끝을 바라보며 빵을 꺼내어 별 생각없이 씹었다. 아무 맛도 없었다. 이 익숙

    지 못한 고통을 달래 줄 것은 아무것도 없단 말인가. 그는 둑에 앉아서 가슴의 공허

    함을 달랬다.

    그녀가 그리웠다.

    욕망보다 더한 무엇이 있었다. 지난 몇 주간 그는 마리온의 존재에 익숙해졌고, 요

    며칠간은 그녀를 접촉하는 데 익숙해졌다. 보통은 그녀가 넘어지지 않게 잡아 주는

    것 뿐이지만. 그녀의 조용한 힘, 그녀가 종종 벌이는 어리석은 행동, 그녀가 보인 현

    명한 지혜, 그녀의 자존심. 이 모든 것이 마리온이란 여자를 이루고 있었다. ㅡㄱ리

    고 던스탄은 그 모든 것이 그리웠다.

    그녀가 귀여운 보조개를 보이며 웃음 지을 때나, 그 커다랗고 짙은 눈을 그에게 향

    할 때면 세상이 올바르게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묘한 느낌이다. 그는 배가

    고파서 그런 것뿐이라 위로하며 남은 빵을 모조리 먹어 치웠다.

    그는 커다란 딜레마에 빠졌다. 느낄 수 있었다.

    던스탄은 밤에 배더슬리에 이르렀다. 몸뿐 아니라 영혼도 피곤했다. 여행에 지치고,

    길에서 자는 것에 싫증나고, 배고픔에 짜증난 적은 수없이 많았지만, 오늘밤은 단순

    히 그런 것보다 더 많은 무언가가 있었다. 걱정이 그의 혈관을 타고 돌며 그의 모든

    생각을 지배했다.

    자신이 굴뚝새 걱정을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스스로를 타일렀다. 어쨌거나

    그녀는 아버지가 맡긴 그의 임무가 아니던가. 그녀가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는 것을

    확인하면 이 짜증스럽기까지 한 걱정도 사그러들 것이다. 이 감정은 그녀를 떠나야

    한다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녀를 영영 보지 못하게 되리란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던스탄은 자신의 이름을 대고 정문을 통과한 뒤 커다란 홀로 나아갔다. 하지만 이

    성에서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목의 잔털을 곤두서게 하는 위험이 느껴졌다. 성 안으

    로 발을 들여놓은 순간부터 던스탄은 위험을 감지했다. 마치 무기도 없이 적진으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는 얼굴을 찌푸리며 마리온의 어리석은 말들 때문에 괜한 상상을 하는 거라 자신

    에게 말했다. 해럴드 피슬리가 나에게 악의를 가질 리가 없지 않은가. 던스탄에게 오

    히려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마리온의 삼촌이 그녀가 숲속을 혼자 떠돌고 있었다는

    건 마음에 들어하지 않겠지만 그녀는 무사히 살아 있었고, 아무런 해도 입지 않았지

    않은가. 물론 그녀가 처녀성을 잃은 것만 빼고.

    던스탄은 멈춰 서서 그녀가 행여라도 삼촌에게 그 사실을 털어놓았다면 자신에게 어

    떤 선택의 여지가 있을지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정조를 빼앗은 것이 사형에

    처해질 정도로 큰 죄가 아님은 분명하다. 최악의 경우, 그는 언제라도 말괄량이와 결

    혼할 수 있다. 생각지도 않던 것이긴 했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마음에 드는 계획

    이 아닐 수 없었다. 상속자를 만들 때가 된 것이다. 마리온은 그에게 아들을 안겨 줄

    수 있을 것이다.

    던스탄은 씩 웃었다. 먼저 그녀의 삼촌이 하는 말을 듣고 필요하다면 그녀에게 구혼

    하리라. 그녀만큼 부자는 아닐 지라도 피슬리가 그의 구혼을 거절할 리는 없었다. 그

    는 작위도 있고, 땅도 있는 기사다. 게다가 또 언젠가는 캠피온의 막대한 재산도 물

    려받게 될 것이다.

    자기 자신의 가치와, 가족과 에드워드 왕의 지지를 뒤에 업고 던스탄은 해럴드 피슬

    리로부터 별다를 거부 반응이 없을 것이라 결론 지었다. 하지만 아직도 이상한 위험

    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육감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손

    을 칼집에 가져다 대었다.

    위험의 향기가 더욱 진해졌다. 던스탄은 방 안을 훑어보았다. 피슬리의 부하들이 구

    석에서 술을 마시며 주사위 놀이를 하고 있었다. 천박한 말투에 커다란 목소리. 아버

    지의 홀에서 느낄 수 있는 따스함과 평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던스탄은 자신이 얼마

    나 가족과 집을 그리워하는지 실감했다. 그에 비하면 자신의 성은 차갑고 생명이 없

    는 것처럼 느껴졌다.

    던스탄은 생각을 접고 주위에 집중했다. 지금은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

    다. 웨섹스까지 멀고도 험한 길을 혼자 가야만 한다. 피슬리에게 자신을 호위할 병사

    몇 명을 부탁할 작정이었지만, 이들을 보건대 훈련도 제대로 받지 않은 거친 깡패들

    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이들에게 호위를 맡길 수는 없다. 그들은 군인이라기 보다

    무법자에 가까웠다. 마리온이 얘기했던 살인 얘기가 떠올라 목의 잔털이 곤두섰다.

    "이쪽입니다." 그 말에 던스탄이 고개를 돌려보니 귓불에 금귀고리를 매단 사악한

    얼굴의 남자가 서 있었다. 던스탄은 칼자루를 쥔 손에 힘을 주며 그 남자를 따라 배

    더슬리의 주인 앞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해럴드 피슬리 밖에 보이지 않았다.

    마리온의 삼촌이 홀 끝의 단 위에 놓인 정교하게 조각된 의자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푸석푸석한 데다가 상기되어 있었다. 매일같이 술을 퍼마시는

    사람인 듯했다. 던스탄은 얼굴을 찌푸렸다. 술을 많이 마시면 사람의 머리가 둔해지

    는 법이다. 피슬리가 입을 열기도 전에 던스탄은 그에게서 불길함을 감지했다.

    던스탄은 사악한 시선으로 훑어보며 피슬리가 툴툴대듯 말했다. "넌 대체 누구야?"

    던스탄은 무례한 말투에 이를 악물었다. 피슬리에겐 이렇게 무례하게 말할 권리가

    없었다. 그는 조심조심 말을 골라 대답했다. "던스탄 드 부르그, 웨섹스의 남작이오.

    캠피온 백작의 아들이오."

    놀랍게도 피슬리는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술에 찌든 나머지 던스탄이 왜 이곳에 왔

    는지도 잊었단 말인가. "기억하시겠지만, 저는 저희 아버님으로부터 워렌 아가씨를

    캠피온에서부터 배더슬리까지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던스탄은 화를 꾹 누르

    며 말했다.

    "그게 자네 임무였다면, 자넨 실패했어!" 피슬리가 소리쳤다.

    던스탄은 터져 나오려는 신랄한 말을 애써 참으며, 수완 좋은 조프리라면 이런 경우

    어떻게 대처할까 생각했다. 그는 화가 마구 끓어올랐지만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

    었다. "저의 일행은 암살자에게 공격당했습니다. 오직 저와 아가씨만이 탈출할 수 있

    었지요. 걸어서 여행하다가..."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피슬리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쓰레기 같

    은 말 모두 들었나?" 그는 곁에 서 있는 거칠게 생긴 남자들에게 외쳤다. 그들이 뭐

    라 중얼거리자, 던스탄은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 그제서야 깨달았

    다. 그는 언제라도 그에게 달려들 거친 무법자들이 가득한 방에 혼자 있는 것이다.

    던스탄의 생각을 입증이라도 하듯, 피슬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외쳤다. "이건 말도

    안돼! 이 거만한 잡종이 자신을 드 부르그라 주장하는군!" 그가 소리내어 웃자 그의

    부하들이 그를 따라 웃었다. 던스탄은 늙은 여자 하나와 젊은 여자 하나가 단 저쪽에

    서서 잔뜩 주눅든 표정으로 싸움이 벌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을 보았다.

    "나는 던스탄 드 부르그요." 그가 다시 말했다.

    "그럼 네 아빠에게 돌아가 내가 이 일로 그의 목을 베겠다고 전해라! 당장 내 조카

    딸을 돌려보내지 않는다면 쳐들어가겠다고!" 피슬리는 허공에 주먹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던스탄의 가슴이 꽉 죄어들었다. 마리온이 여기 없단 말인가? 이젠 익숙해진 그 공

    포에 가까운 감정이 그를 일깨웠다. "지금 마리온 아가씨가 여기에 없다는 말씀입니

    까?"

    "여기 있을 이유가 없잖나." 피슬리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던스탄은 점점 더 강

    해지는 불길한 느낌에 방 안을 둘러보았다. 술에 취한 병사들이 벽에 기대어 서서 그

    에게 무례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던스탄은 만일에 대비해 머리 속에 탈출로를 입

    력했다.

    그림자 속에서 무언가가 움직여 그의 시선을 끌었다. 살펴보니 아까 보았던 나이 먹

    은 여자였다. 그녀는 그를 바라보며 소리없이 입술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 순간 던스

    탄은 피슬리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여기에 있소. 그녀와

    직접 얘길 하겠소."

    "그녀는 여기 없다니까! 저 무례한 놈을 당장 여기서 쫓아내라!" 피슬리가 소리질렀

    다. "네 꼴을 보니 남작은 고사하고 최하류 기사도 안 될 것 같구나. 내 생각엔 넌

    그저 말썽을 부리려는 놈 같은데, 썩 꺼져!"

    던스탄은 분노를 참을 수 없었지만, 그를 향해 다가오는 한 무리의 병사들을 보며

    참을 수 밖에 없었다. 피슬리의 목을 졸라서 진실을 캐낼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녀

    를 다치게 한다면 당신을 죽여 버리겠어."

    "꺼져!" 피슬리가 비명을 질렀다.

    던스탄은 뒤돌아 서서 그곳을 나섰다. 그의 뒤를 피슬리의 부하들이 쫓아오며 정말

    참기 힘들게 빈정댔지만 던스탄은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문 앞에서 던스탄은 칼

    자루에 손을 대고 돌아서서 노려보았다. 그들은 움찔거리며 욕설과 침을 내뱉으며 뒤

    로 물러섰다. 아무도 감히 그에게 덤비지 않았다.

    밖으로 나서자 어둠이 짙어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이젠 도대체 무얼 해야 할지.

    "쉿, 나리. 나리, 여깁니다."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는 쪽을 바라보니 그림자 아래서 하얀 손이 그를 부르고 있었

    다. 아까 홀에서 보았던 늙은 여자였다. 던스탄은 재빨리 그녀에게 다가가 그림자 속

    에 자신의 모습을 숨겼다.

    "그녀는 어딨지?" 그는 앞뒤 가릴 것 없이 잘라 물었다.

    "조용하세요, 기사 나리." 여인의 목소리에는 공포가 섞여 있었다. "아가씨는 남쪽

    탑에 있는 아씨 방에 갇혀 계세요. 이층 창문입니다." 던스탄은 어둠 속에 서 있는

    탑을 바라보았다. 저길 어떻게 올라가야 할지 물어 보려고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그녀

    는 이미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던스탄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외벽을 관찰했다. 갑자기 홀의 문이 열리며 그 틈새로

    빛이 새어 나왔다. 던스탄은 벽에 몸을 납작하게 붙였다.

    두 명의 남자가 걸어나왔다. 하나는 키가 크고 말랐고, 다른 하나는 키가 작고 험상

    궂었다. 둘 다 아까 본 피슬리의 부하였다. "그 사람 어디 갔지?" 키큰 쪽이 목소리

    를 낮추고 화가 난 듯 물었다.

    "똑똑하다면 지금쯤 캠피온을 향해 돌아가는 중이겠지." 키작은 남자가 느린 말투로

    말했다. 그들이 자신의 얘길 하고 있다는 걸 깨닫자 본능적으로 위험이 느껴졌다.

    그를 이곳으로 부른 늙은 여자가 아니었더라면 누군가가 자신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

    다는 것도 모른 채 지금쯤 대문을 향하고 있었을 것이다. 저 둘이 어떤 식으로 그의

    뒤를 노릴 작정일까.

    "기다려 봐!" 키큰 남자가 명령했다. "에일머는 어딨지?"

    "자고 있어. 나중에 교대해야 해."

    "잘됐군. 그래도 술은 마시지 않았을 거 아냐. 그를 깨워서 데리고 가. 우리 손님을

    찾으라구. 자기 아버지에게 영원히 돌아갈 수 없도록 확실히 손 봐줘."

    "굿선, 하지만 어떻게?"

    얼굴은 똑똑히 보이지 않았지만 키큰 남자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여 있는 게 들렸

    다. "길이란 게 밤에는 위험할 수도 있는 거 아냐. 그것도 혼자 여행하는 자니 공격

    당할 것은 뻔하잖아. 확실히 공격당하게 손을 쓰라구."

    문이 닫히며 다시 어두워졌다. 던스탄은 화를 내며 낮게 숨을 쉬었다. 그러니까 날

    죽이겠다 이거군. 그렇게 호락호락한 표적이 되어 주진 않겠다. 숨어서 기다리다가

    그들의 목을 비틀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일

    을 해야 한다. 전쟁터에서 단련된 용사답게 던스탄은 소리도 없이 빠르게 그림자를

    따라 남쪽 끝의 사각탑 아래까지 갔다.

    여기가 마리온이 갇혀 있는 곳인가. 그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저 위까지 올라갈 수

    만 있다면... 작긴 하지만 그럭저럭 창을 통해 방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

    는 이를 악물려 주위를 살폈다. 대부분 피슬리의 부하들은 홀에 모여서 그의 일은 까

    맣게 잊은 채 술과 노름에 빠져 있었다. 얼마나 기강이 해이한지, 스스로 확인하기로

    결심하고 던스탄은 건물로 움직였다.

    마리온은 어둠 속에서 자신을 끌어안고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될지 생각해

    보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그녀는 탈출할 기회를 엿보았지만 굿선과 그의 부하

    들은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배더슬리로 돌아오는 걸 얼마나 두려워했던가.

    집으로 오는 길에도, 집에 온 이후에도 기회는 전혀 없었다. 그녀가 집에 오자 삼촌

    은 그녀를 한 번 쓱 보고는 즉시 이곳에 가둬 버렸다. 얼마나 오랫동안 여기에 가둬

    둘 생각인지. 삼촌이 그녀를 굶겨 죽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마리온은 몸을 떨었다.

    하지만 그렇게 죽진 않으리라. 그 전에 다른 수를 찾을 것이다. 전에도 도망간 적이

    있다. 또다시 도망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너무너무 피곤했다. 제대로 생각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로 피곤했다. 과거,

    그녀의 삶의 일부였던 공포가 배더슬리로 돌아오자마자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던스탄

    을 잃은 상실의 슬픔이 날카롭게 그녀를 괴롭혔다.

    고통으로 가슴이 찢어지려고 했다. 페넬라가 그녀에게 씻을 물과 약간의 음식을 가

    져다 주었다. 몸을 씻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자 몸이 다시 깨어나는 듯했다. 배고픔

    에 음식을 먹긴 했지만, 혹시 독이 든 것은 아닌지 하는 의심을 떨칠 수가 없었다.

    삼촌이 그녀를 부르려는 기색이 없자, 마리온은 옷을 다 입고 침대에 누워 탈출 계

    획을 짜기 시작했다. 하지만 생각은 예전에 돌아가신 부모님과 드 부르그 형제들과

    던스탄으로 이어졌다. 적어도 그는 무사하고 이곳에서 멀리떨어진 안전한 곳에 있다.

    그녀는 그것만을 유일한 희망으로 삼으며 죽음 같은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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