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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온은 멍하니 던스탄의 가슴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머뭇머뭇 그를 올려다
보았다. 그의 눈은 뜨거운 열기를 내뿜고 있었고, 그의 입술은 사악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먹이를 감상하고 있는 늑대 바로 그 모습이었다.
그가 한 걸음 다가서자 마리온은 고개를 저으며 뒷걸음질치려 했지만 오두막의 벽이
그녀를 가로막고 있었다. "여기서는 옷을 벗을 순 없어요. 당신 앞에선."
"그렇다면 내가 벗겨 줘야겠군." 드 부르그 가의 다른 형제들에서도 흔히 볼 수 있
는 특유의 거만한 표정으로 그는 미소를 지었다. 그가 또다기 한 걸음 다가왔다.
"안 돼요!" 마리온은 옆으로 비켜섰다. 그녀는 미친 듯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도망
갈 곳이 없었다. 이 세상 어느 곳에도 늑대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갑자
기 자포자기한 심정이 되었다. 달아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고 말로 싸워 이길 수도
없었다. 그녀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의 손에 옷이 벗겨지는 것은 원
치 않았다. "내가 하겠어요."
"잘 생각했소." 그는 그녀에게 용기를 붇돋아 주려는 듯 몸을 돌려 불가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난로의 불빛이 그의 근육질 몸매를 금빛으로 감돌았다. 남자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게 어쩐지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를 감상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
지만, 시선이 그에게 머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머리 속에선 계속 그를 위한 생각
으로 가득했지만, 그녀의 몸은 그 명령을 거부했다.
그녀의 몸에 의지가 있는 양, 그를 향해 몸이 구부러졌다. 조금 전까지 무겁게 느껴
지던 옷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되었다. 갑자기 그의 등 윤곽을 쓰다듬으면 어떤 느
낌이 들지 궁금해졌다. 그녀의 입에선 수치심인지 고통인지 알 수 없는 작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가 얼른 그녀를 돌아보았다.
"자, 어서." 그의 목소리에 짜증이 배어 나왔다. 마리온은 그를 자극하고 싶지 않아
서 얼른 몸을 돌리고 떨리는 손가락으로 단추를 하나하나 풀었다. 그녀가 무거운 옷
을 머리위로 벗으려고 애쓰고 있는데 갑자기 옷의 무게가 가벼워지며 벗는 것이 수월
해졌다. 몸을 돌려보니 던스탄이 손이 닿을 듯한 거리에 서 있었다. 그의 녹색 눈에
선 불꽃이 춤추었고, 그의 입술엔 그 미소 아닌 미소가 떠올라 있었으며, 그의 가슴
은 손에 닿을 듯 가까운 곳에 있었다.
"던스탄, 제발..." 그녀는 그의 알몸을 의식하며 속삭였다. "더 도움이 필요한가?"
원래 허스키한 목소리가 평소보다 더 낮고 거칠었다. 마리온이 고개를 천천히 흔들었
지만 그는 그녀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그녀의 다리에 손을 대었다.
그의 손가락이 양말 끝의 맨살에 닿자 그녀는 움찔했다. 마리온은 그의 과감한 행동
에 자지러질 듯 놀랐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양말을 벗겨내는 일에 몰두했다.
그건 사실 대수롭지 않은 행동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친절을 베푸는 단순한 행동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자신에게 그렇게 타일러 보아도 그녀의 무릎은 점점 풀
려 가고 있었다. 던스탄은 조심스럽고 절제된 태도로 움직였지만, 그녀는 그의 안에
내재된 열기를 읽을 수 있었다. 마리온은 조금 전 보았던 그의 안에 살고 있는 맹렬
한 야수가 다시 튀어나올까 궁금해 했다. 그의 고삐가 풀린다면 나는 도망칠 것인가,
아니면 환영할 것인가.
던스탄의 손길에 몸을 맡기자 던스탄은 천천히 그녀의 속치마를 쓰다듬으며 몸을 펴
고 일어섰다. "안돼요! 그것도 안돼요!" 그녀가 외쳤다. 마리온은 두려워 어찌할 바
를 모르는 상태에서 정신을 차리려고 몸부림쳤다. 하지만 자신의 팔이 머리 위로 들
어올려졌다고 생각한 순가 이미 그녀의 마지막 보호 장벽은 벗겨져 버린 후였다. 그
녀는 알몸이 되었다. 던스탄은 그녀의 속옷을 손에 쥔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옷을 벗고 있다는 그 자체가 불편한 건 아니었다. 그녀는 알몸으로 자는 버릇이 있
었다. 하지만 옷을 벗고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가는 것과 맨살을 드러낸 채 남자 앞
에 서 있는 것을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하지만 그녀는 움츠리지 않았다. 숨을 곳도 없고, 자신의 몸을 가릴 만한 것도 없었
다. 던스탄이 그녀의 몸을 보길 원한다면 그녀는 그를 막을 도리가 없었다. 마리온은
자신의 단점들을 절절히 떠올리며, 늑대가 곧 시선을 돌리리라 생각했다.
갑자기 그 상황에서 마리온은 자신의 헝클어진 머리가 떠올랐다. 그녀는 머리를 매
만지려 손을 들었다가 늑대가 짧게 숨을 들이마시는 바람에 얼른 손을 떨구었다.
그는 두려울 정도의 뜨거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이 그늘진 것
은 단순한 욕망 때문만은 아니 것 같았다. 그는 굶주린 것처럼 보였다. 불편함과 더
불어 흥분이 스멀스멀 그녀의 등을 타고 흘렀다. 그녀는 조심스레 팔을 문질렀다.
"세상에, 마리온. 당신 정말 아름답군." 그의 입술에서 새어 나온 한숨 같은 말에
그녀는 어안이 벙벙했다. 던스탄은 말을 많이 하는 편이 아니다. 거짓말도 절대 하지
않는다. "춥소?"
그의 찬사에 넋이 나간 마리온은 그를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녀가 대답하지 않
자 그는 그녀의 속옷을 내려놓고 챙겨 온 짐을 넣은 자루를 향해 걸어갔다. 그는 그
안에서 담요를 꺼내 그녀의 어깨위로 던져 주었다.
그제야 그녀의 말문이 열렸다. "던스탄 드 부르그! 마른 담용가 있었으면서 날 아무
것도 입지 않은 채로 세워 두었단 말이에요!"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고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그의 가슴은 돌처럼 단단했다.
던스탄은 사악하게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사실, 그건 잠깐 빌려 주는 것뿐이
오. 침대에서 우리 둘이 사용해야 할 테니까." 그가 밀짚 침대를 고갯짓으로 가리키
며 말했다. "우리 보금자리가 청결한지 보장할 수 없소."
마리온은 이불을 빼앗아 가겠다는 던스탄의 말과 <우리 보금자리>란 단어에 할말을
잃었다. 한 침대에서 자겠다는 뜻일까. 설마 지금 자고 싶다는 뜻은 아니겠지. 폭풍
우 때문에 오둑막 안은 어두웠지만 아직 점심 시간도 채 되지 않은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아직 대낮인걸요!"
던스탄은 대답하지 않고 입술 구석만 치켜올릴 뿐이었다. 그의 눈은 울창한 숲처럼
빛났다. 마리온은 좁은 침대를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뒷걸음쳤다. 그가 그녀의
손목을 잡으며 다가왔다. 그녀가 벽에 부딪히면서, 이불이 흘러내리며 어깨가 드러났
다.
"난 시간 따윈 상관없소." 그가 거칠게 말했다. 더 이상 마리온이 뒤로 도망칠 곳이
없자 그가 다가왔다. 그는 그녀 머리 옆 벽에 손을 짚으며 그녀에게 몸을 구부리고
고개를 숙였다. 그 짙고 풍부한 검은 머리카락이 앞으로 흘러내렸다.
"청산할 시간이오, 마리온." 그가 속삭였다. 크고 아름다운 그의 몸이 그녀를 뒤덮
는 듯했다. 그녀는 놀란 표정으로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당
신이 나무 위에서 내 품안으로 떨어진 그 순간부터 당신을 원했소. 난 당신의 마법에
사로잡혔소, 굴뚝새. 내 동생들처럼. 더 이상 저항할 수가 없소, 마녀."
"난 마녀가 아니에요, 던스탄!" 그녀가 항의했다. "난 그저 키작고 평범한 보통 여
자일 뿐이라고요."
"그런 말은 내 동생들에게나 하시오." 던스탄이 갑자기 으르렁 대며 눈이 이글거렸
다.
"당신 동생들은 날 여동생쯤으로 생각한다구요!" 마리온이 부르짖었다.
그는 평소처럼 그녀의 말 따위는 믿지 않는다는 미소를 띄었다. 던스탄은 그녀의 팔
목을 놓고 대신 그녀의 어깨위에 손을 얹었다.
그의 손가락이 천천히 그녀의 팔에서 어깨에 이르는 곡선을 훑었다. 담요가 살짝 흘
러내렸고, 마리온은 숨을 멈추고 몸을 떨고 있었다.
"그래, 날 위해 몸을 떨라구, 굴뚝새." 그의 얼굴은 열기로 어두워져 있었다. 그의
눈이 번뜩였다. 그가 원하는게 무엇이든 그녀는 그를 막을 수 없었다.
그녀를 기다리는 것이 수녀원이든, 죽음이든, 추방이든 처녀의 정조를 지킨다고 달
라질 게 있을까? 그녀는 던스탄을 사랑했다. 그게 죄든 아니든, 그녀는 여자로서 그
를 알 기회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지금이라도 눈을뜨면 이 모든 것이 꿈일 수 있다.
비를 맞으며 하루종일 걸었기 때문에 열이 올라 그에 대한 환상을 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환상에 동참하는 것도 그다지 나쁠 것은 없지 않은가.
마리온은 이 환상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용기를 그러모아 그의 가슴위
에 손을 얹었다.
늑대가 낮은 소리를 내며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끌어당겼다. 그의 혀가 그녀의
입 안으로 들어왔다. 담요가 굳어버린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고, 그들의 알
몸이 부딪혔다.
아까 던스탄이 빗속에서 불러일으켰던 것과 똑같은 격한 감각의 물결이 흘러들었다.
그는 마리온을 들어올려 그녀를 삼킬 듯 깊은 키스를 했다. 그녀는 그에게 매달려
열정의 폭풍우 사이에서 모든 현실감을 잊어버렸다. 그는 그녀를 안은 채로 담요를
집어들었다.
던스탄은 담요를 밀짚 침대 위로 던지고는 그 위로 그녀를 안은 채 누웠다. 마리온
은 흐느끼듯 신음하며 몸을 떨었다.
"그래, 마리온. 바로 그거야." 마리온은 난로에서 새어 나온 희미한 불빛 속에서 그
의 얼굴이 긴장하는 것을 보았다. 길들여지지 않은 아름다운 맹수 같은 그의 모습에
피가 머리로 몰리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녀는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에 몸을 맡
겼다.
마리온은 수많은 나비떼 속에 있는 꿈을 꾸었다. 나비의 날개를 피부 위로 느끼며
태양 아래 알몸으로 누워 있는 꿈이었다. 몸은 따뜻했고, 맨살 위에 내려앉은 나비
날개의 느낌은 환상적이었다. 맨살이라구? 마리온은 꿈에서 일어나라고 자신에게 명
령했다. 눈을 떠보니 던스탄이 그녀의 온몸에 부드러운 키스를 퍼붓고 있는 것이 아
닌가.
던스탄 드 부르그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좀 전의 기억이 되살아나 그녀의
온 몸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의 몸이 장작불 아래 금빛으로 빛났다. 그가 실눈
을 뜨고 이를 악물고 있는 걸 보고 마리온은 적잖이 당황했다.
"내가 그랬군."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어안이 벙벙한 채 그의 시선을 따라가보니,
그는 멍이 든 그녀의 팔을 보고 있었다.
"아까 그런 건 아니에요." 그녀의 얼굴이 진홍빛으로 물들었다.
그가 고통스런 소리를 내자 마리온은 자신이 쉽게 멍이 드는 체질이라고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그녀가 보고 있는 가운데 늑대는 고개를 숙여 파랗게 멍이 든 피부위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그의 키스는 부드럽고 따스하고 촉촉했다.
그는 그 팔에 키스를 퍼붓고, 다른 팔에도 옮겨가, 은밀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
여 그녀의 가슴에 입맞추었다.
온 몸이 불 붙은 듯 뜨거웠지만 그녀는 몸을 떨었다. 던스탄은 승리의 소리를 내었
다. 피부 속까지 애무당하는 느낌이었다. 마리온은 그의 머리카락 안에 손을 찔러 넣
으며 그의 입술을 향해 등을 활처럼 휘었다.
마리온은 이미 경험해 본 굶주림에 몸부림쳤다. 이 모든 것이 그를 원하게 만들려는
의도라면, 효과만큼은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를 원했고, 그를 필요로 했으
며, 그를 소유해야만 했다.
던스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를 끌어당겨 그녀의 등을 자신의 가슴에
붙이게 하고 팔로 그녀를 감싸 안았다. 평소 나무에 기대어 자는 그의 모습에 익숙
한지라, 이렇게 그녀를 감싸 안고 자는 그의 자세가 낯설게 느껴졌다.
아마도 여자와 잘 때만 이렇게 자는 가보다라고 생각하다가 곧 후회했다. 그의 명성
으로 짐작컨대, 수많은 여자들이 그를 스쳐 지나갔지만 오늘만큼은 달랐을지도 모른
다. 하지만 그녀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그녀는 늑대가 사심없이 그녀를 기쁘게 해주
려고 노력하던 것을 떠올리면서 살짝 얼굴을 붉혔다. 왠지 평소와는 달랐다. 조금 전
의 그는 더없이 부드럽고 자상했다.
목에 뜨거운 것이 왈칵 치미는 것을 삼키며 마리온은 그의 고른 숨소리를 들었다.
결국 그도 잠을 자긴 하는구나. 무방비 상태의 그를 보니 눈물이 핑 돌았다. 어리석
은 일이지만 그를 사랑한다. 그와의 열정 때문에.
그에 대한 사랑은 더욱 깊어졌고 그 때문에 더욱 고통스러웠다. 이런 애틋한 감정과
상관없이 그들은 곧 헤어져야 할 운명이니까.
이제 그가 잠에 푹 빠져 들었다. 탈출하기에 가장 좋은 시간이란 걸 알고는 있었지
만 팔다리가 물에 젖은 솜처럼 축 처져서 움직여 주질 않았다. 따뜻한 그의 체온을
느끼며 영원히 그대로 있고 싶었다.
커다랗게 한숨을 쉬며 마침내 마리온은 그의 품에서 기어나왔다. 그녀는 밀짚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아직도 깊이 잠들어 있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가슴이 고통스
런 갈망으로 부풀어올랐다. 잠든 그의 모습은 찡그리지 않아서인지 훨씬 부드러워 보
였다. 그의 입술은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고, 머리카락만큼이나 검은 그의 속눈썹은
길고 숱이 많았다.
남아 있을 수만 있다면...
그녀는 뭔가로 요기를 할 때까지만 남아 있기로 결심했다. 배고픈 채 숲속으로 뛰어
든다면 그야말로 굶어죽기 십상이다. 목도 말랐다. 열정의 의미를 일깨운 그 침대에
서 내려와 그녀는 방 안을 살폈다.
목욕도 해야 한다. 마리온은 그제야 자신의 몸이 얼마나 끈적거리는지 깨달았다. 목
욕할 때까지만 있어야겠다고 생각하다가 밖에서 보았던 작은 우물을 떠올리며 천천히
미소지었다. 다 마른 옷을 입고 그녀는 난로가 옆에 놓인 두레박을 들고 문을 열었
다.
바깥 날씨는 쾌청했고 해가 쨍쨍 내리쬐고 있었다. 젖은 풀이 반짝반짝 빛났고 공기
도 상쾌했다.
두레박으로 우물물을 길으려고 하는 순간 갑자기 저쪽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 바
람에 그녀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녀는 끈을 잡은 손의 움직임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숨을 곳이 없었다. 오두막은 원래부터 공터에 세워진 듯,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나무조차 달려가 몸을 숨기기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녀는 우물 안에 두레박을 그대로 떨어드리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비명을 지를까?
던스탄이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그녀는 여섯 명의 장정들이 말을 탄 채 모습
을 나타내는 걸 보고는 얼른 입을 닫아 버렸다. 아무리 늑대라 할지라도 이렇게 많은
수와 대적할 수는 없다. 그녀는 던스탄이 걱정되었다. 이제는 그가 잠에 깊이 빠져
있기만을 바랄 수 밖에. 그녀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경우는 던스탄이 그녀의
눈앞에서 칼을 맞고 쓰러지는 것이다.
말 탄 사내들이 단순히 길을 잃은 여행자일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마리온은 예
전에 이미 항상 최악의 경우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생각을 확
인시켜 주기라도 하듯, 최악의 사태인 듯했다. 무리의 선두가 입고 있는 검정과 금색
의 옷은 삼촌 부하들이 입는 옷이었다.
삼촌 경비대의 대장인 브라이언 굿선이 선두에 있는 걸 보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
다. 농가의 여자 흉내나 나며 위기를 모면해 보려는 계획은 소용없어졌다. 그녀가 아
무리 꾀죄죄하고 더러운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굿선 정도라면 그녀를 알아볼 것이다.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마 이 편이 제일 나을지도 몰라. 던스탄에게 슬픔을 참으며 작별 인사를 할 필요
도 없을테니. 지난 몇 시간 동안의 행복했던 기억만을 안고 가리라. 그녀는 굳게 마
음을 먹고 그들에게 얼굴을 보였다.
"워렌 아가씨!" 굿선의 놀란 목소리를 들으며 그의 얼굴에 희미하게 떠오른 경멸의
빛을 읽을 수 있었다. 모두가 삼촌의 편이다. "어찌된 일입니까, 어떻게 여기 계시는
거죠?"
"날 안내하던 사람들이 모두 죽었어." 마리온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너도 그
건 이미 알고 잇겠지, 굿선? 네가 모두를 죽였지? 그녀는 속으로 물었다.
마리온은 혹시나 그가 이 자리에서 칼을 빼어 들고 단칼에 그녀를 베어 버리고, 임
무를 완수하려는 것이나 아닌지 가만히 서서 기다렸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모든 일이
빨리 끝나버리기를 바랐지만, 캠피온에서 타오르기 시작한 불꽃은 꺼질줄을 몰랐다.
그들을 속여서 자유를 쟁취하라고 그녀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여기서 뭘하는 게지?
배더슬리로 돌아가던 참인가?"
"아가씨 일행을 영접하기 위해 나왔다가 저쪽에서 살해 현장을 보았습니다. 혹시라
도 아가씨께서... 다치셨을까 봐 걱정을 하며 되돌아가던 참이었습니다. 어떻게 용케
그 참사를 피하셨습니까? 혼자십니까? "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주위를 훑다가 오두
막에 고정되었다.
마리온은 심장이 덜컹하고 내려앉는 듯했다. 던스탄! 삼촌의 부하들에게 던스탄의
목숨을 맡길 수는 없었다. 그녀의 사랑이 칼을 맞고 쓰러져서 서서히 생명력을 잃어
가는 광경이 떠올랐다. 그녀의 목숨은 거기에 비하면 아깝지 않았다.
"그래, 나 혼자야." 그녀는 굿선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거짓말을 했다. "공격받았
을 때, 난 숲속에서 혼자 볼일을 보고 있었어. 모두들 떠날 때까지 몸을 숨기고 있었
지. 우리 일행은 다 죽었다구. 말까지 모두 빼앗겼어. 그래서 난 걷기 시작했지. 그
외에 또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그녀느 허공에 손을 저어 보였다. "여기서 폭풍우를
피했지."
굿선의 얼굴에서 양심의 가책은 읽을 수 없었다. 그는 조금 전까지 그녀의 시체를
찾아다닌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던스탄의 일행을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린
사람이 삼촌이 아니라면 누가 또 있겠는가. 그리고 왜?
마리온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이제라도 던스탄이 잠에서 깨어나 집
밖으로 나왔다간 이들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다. 어쩌면 던스탄에게 공격을 가
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모험은 할 수 없었다. 굿선이나 그의 부류에 대해서는 잘 알
고 있었다. 그들은 명예도 규칙도 모른다. 그들 손에 죄없는 사람이 여럿 죽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마리온은 늑대를 위태롭게 만드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칭찬을 받겠군 굿선. 당신이 내 목숨을 구했어. 난 아마 오래 버티지 못했을 거야.
맹수나 도적떼에게 곧 습격당했을테지." 그녀는 손을 뻗으며 말했다. "삼촌께서 후
한 상을 내리실 거야."
속눈썹 사이로 그가 추한 미소를 짓는 게 보였다. 그녀의 말이 효과가 있었던 듯,
그는 곧 다른 건 잊고 가슴을 내밀며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어쩌면 자신을 죽이
기 위해 나온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녀를 데
리고 돌아가는 걸 즐거워하진 않을 테니.
더 이상 생각을 계속할 시간이 없었다. 그녀는 삼촌 부하들이 즐겨 마시는 술 냄새
를 풀풀 풍기는 뾰로퉁한 남자의 뒤에 올라 탔다. 던스탄의 매력적인 체취와는 너무
도 다른 악위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지만, 삼촌과 살면서 몸에 익힌 자제력 덕에 참
아 넘길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앞에 탄 남자의 뒤통수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배더슬리를 향해 나아갔다. 삼촌과 죽음이 저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지만 그녀는
움츠러들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했던 그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작은 오두막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