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월의 신부-9화 (10/20)
  • 9

    마리온은 샛길을 따라가며, 자신이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시련을 겪나 하

    는 생각을 했다. 눈앞에서 성큼성큼 걷고 있는 저 골칫덩이 말이다. 몸집은 그녀보다

    두 배나 더 큰 던스탄이 그녀보다 훨씬 우아하게 움직였다.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또

    다른 증거다. 기억을 잃은 것도 끔찍한 일인데, 캠피온은 그녀를 쫓아냈고, 또 그녀

    는 기억할 수 있는 한 가장 어리석은 일을 저질렀다.

    일곱 명의 드 부르그 형제 중에서, 제일 정이 안 가고 미운 인간을 사랑하게 된 것

    이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를 사랑한다는 것은 확실했다. 아마도 함께 길을 가

    던 그 언젠가부터 커다랗고 뿌루퉁한 이 기사를 사랑하게 되었으리라. 어젯밤 그가

    그녀를 구하러 왔을 때, 마리온은 여태껏 알아온 그 어느 것과도 다른 따스한 감정의

    홍수를 느꼈다. 그녀를 채운 감정은 그녀 밖으로 흘러넘쳐 아마도 던스탄에게까지

    흘러갔을 것이다.

    어리석음. 마리온은 그를 훔쳐보다가 발을 헛디딜 뻔했다. 그가 그녀의 팔을 잡아

    부축했다. 팔이 아플 정도였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록 그녀의 서툰

    걸음걸이에 얼굴을 찌푸리긴 했지만, 그도 나름대로 그녀를 도우려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녀는 그의 찡그린 얼굴에 익숙해졌을 뿐아니라, 그 얼굴을 좋아하게 되었

    다.

    어리석어! 아무런 상관없잖아. 이제 며칠 후면 그와 영영 이별인걸. 그는 뒤도 돌아

    보지 않을 거야. 그리고 난... 난 다시는 늑대 생각을 할 시간이 없겠지. 내 목숨 부

    지하기도 힘겨울 판에. 배더슬리가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위험이 느껴진다. 도망쳐야

    한다. 하지만 용변을 볼 때조차도 그녀를 시야밖에 두지 않으려는 던스탄 에게서 어

    떻게 도망가야 할 것인지.

    계속 이렇게 감시할까. 오늘 밤은? 그녀의 조그만 텐트 곁에서 잘 생각일까. 그가

    가까운 곳에서 잘 거란 생각에 온몸이 뜨거워졌지만 애써 무시하려 했다. 그녀는 옆

    에 있는 그가, 그의 손길이 의식되어 눈을 감아 버렸다.

    "던스탄, 아파요." 그녀가 마침내 말했다. 그 말을 하고 나서야 얼마나 자신의 진심

    이 담겨 있는지 깨달았다. 그 늑대때문에 팔뿐 아니라 머리부터 심장까지 아팠다.

    "뭐요?" 그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녀를 보고는 손의 힘을 풀고 대신 그녀의 소매를

    잡았다. 마리온은 온몸이 따스해지는 걸 느꼈다. 그는 사과하지 않는다. 그는 절대

    사과하지 않으리라. 그는 던스탄이다, 내가 사랑하는. 그가 좀 거칠기는 하지만 그렇

    더라도 나는 그를 소중히 여기리라, 그럴수 있다면.

    하지만 그럴 수 없다. 곧 그와 헤어지게 될 테니까. 그러는 편이 최선이리라. 늑대

    는 절대 그녀의 시선에 답해 주지 않으리란 것을 그녀는 본능처럼 느꼈다. 비록 그녀

    의 몸을 <육감적> 이라 생각할지라도, 가끔 욕망에 빛나는 눈동자로 그녀를 보아 줄

    지라도, 그는 그녀가 바라는 것을 줄 수 없다. 사랑, 집, 그리고 가족 같은 것들을.

    그는 그녀에게 자유조차 주지 않는다.

    마리온이 그 생각에 걸음을 멈추자 던스탄은 그녀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재촉했다.

    숲의 끝에 거의 다다랐을 때, 그는 아플 정도로 세게 그녀의 팔을 쥐었다.

    깜짝 놀라 올려다보니 그는 잔뜩 긴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그녀를

    아프게 했다는 것도 모르고 앞을 보며 공기중에서 위험의 냄새를 맡고 있는 듯했다.

    그가 이를 악물고 눈을 가늘게 뜨자 마리온도 반사적으로 긴장했다.

    "왜 그러세요?"

    "쉿." 던스탄은 계속 정신을 딴 곳에 쏟은 채 말했다. "이상할 정도로 조용해. 여기

    가만히 있어요." 너무 조용하다고? 마리온은 나뭇가지 위에서 지저귀는 새의 노랫소

    리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나무 아래서 뛰노는 작은 동물들의 소리를 들었다. 모든게

    정상 같았지만 그녀는 가만히 서서 경외에 찬 시선으로 던스탄이 걸어가는 모습을 보

    았다.

    그의 긴 머리는 확실히 형제들보다 숱도 많고 색도 어두웠다. 어틉?훨씬 넓고, 장

    딴지도... 글쎄, 그러고 보니 동생들 다리를 눈여겨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던스탄의 다리는 근육도 잘 발달했고 매우 강해 보였다. 그런데도 그는 마치 늑대처

    럼 소리없이 움직였다.

    마리온은 그가 숲 바깥쪽의 환한 캠프로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멍청히 서서

    눈으로 그를 쫓으며, 던스탄 드 부르그에 대해 이것저것 생각하고 있었다. 한참이 지

    나서야, 그녀는 그가 무슨 일을 했는지 깨닫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다시는 그녀를 시야에서 벗어나게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던 그가 그녀를 혼자 둔 것

    이다.

    호흡니 빨라졌다. 도망칠 수 있다. 늑대에게서 떠날 수 있다. 그의 부하와 캠프장을

    떠나 자신의 계획대로 도망칠 수 있다. 어젯밤 공격으로 조금 두렵긴 했지만 지금은

    아침이 아닌가? 어젯밤처럼 덫에 걸리지 않고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머리 속에 메아리치는 던스탄의 경고를 무시하며,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고 결정을

    내리려 했다. 지금 나무 사이로 뛰러들어 샛길을 벗어나 캠피온 방향으로 되돌아간다

    면, 던스탄은 그녀를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영원히.

    가만히 서 있는데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심장 고동 소리가 새들의 지저귐보다 더 크

    게 울렸다. 회색빛 하늘을 가로질러 가는 새들의 날갯짓을 보며 그녀는 불현듯 매우

    불길한 예감을 받았다. 마치 배더슬리에 대한 알 수 없는 두려움과도 같은 것이었다.

    보이진 않았지만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느낄 수 있었다.

    갑자기 깨달았다. 던스탄이 긴장했던 이유를. 정말 너무나도 조용했다. 캠프가 바로

    저 앞에 있는데 어떻게 이렇제 조용할 수 있을까. 아그네스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남자들의 웅성대는 소리는, 말들의 소리는? 일행이 특별히 떠들썩한 편은 아니지만

    사람들과 동물들의 소리는 어디서든 나게 마련이다. 그런데 들리는 소리라고는 새소

    리밖에 없었다. 왠지 모를 두려움과 던스탄에 대한 염려가 피어올랐다.

    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두려움에 무릎이 꺾일 정도로 몸이 휘청거렸다.

    그녀는 당장 앞을 향해 걸어나갔다. 그가 무사하다는 것을 자신의 두 눈으로 확인하

    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녀는 제자리에 멈춰 섰다. 도망치려던 계획

    은?

    지금이야, 마리온! 지금 도망쳐야 해! 달아나려고 방향을 틀었지만 다리가 움직여

    주질 않았다. 그가 무사하다는 것도 확인하지 않은 채 어떻게 달아날 수 있겠는가?

    그녀는 두 가지 다른 선택의 기로에서 망설였다. 지금 당장 결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그 어떤 일보다 어려웠다. 마리온은 두 눈을 꼭 감았다. 고통스럽지만 어쩔

    수 없다. 그녀는 던스탄을 몹시 사랑하고 있다. 그에 대한 사랑이 그녀의 몸과 의지

    를 지배했다.

    아마도 나는 내 자신의 자유보다 그를 더 사랑하고 있는 모양이다. 결정을 내린 그

    녀는 스커트 자락을 말아 쥐고 조용히 숲 끝으로 걸어가 심호흡을 하고 길을 내다보

    았다.

    캠프는 아주 평화로워 보였다. 그녀의 어리석은 결정을 조롱하기라도 하듯. 아마도

    던스탄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내가 너무 과민 반응을 보이는 건지도 몰라. 괜히

    아무것도 아닌 일을 두려워하는 것일지도 모르고.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왜

    이리 조용한지 궁금해 했다. 아마도 모두들 자고 있나? 생각보다 시간이 일러서 소리

    르 지르며 깨울 던스탄이 없는 틈을 타 푹 자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리온은 길 위로 올라서며 어젯밤 모닥불이 타오르던 곳을 지났다. 몇 명의 남자가

    담요 속에 누워 있었다. 던스탄은 머지 않은 곳에 그녀에게 등을 돌린채 서 있었다.

    적막이 흘렀다. 왜 그는 소리를 쳐서 모두를 깨우지 않는 걸까. 목 뒤의 잔털이 곤

    두서며 목이 꽉 죄어들었다.

    그녀가 무슨 소리를 내었는지 던스탄이 그녀를 돌아다보았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생생한 고통이 그녀를 두렵게 했다. 공포가 그녀를 감싸며 그녀의 영혼까지 잠식해

    들어갔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이번엔 정말 가까웠다. 그녀는 자신의 심연으로 끌고

    가려는 기억의 깊은 우물에 빠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쳤다. 과거의 공포와 현재의 공

    포가 그녀를 죄었다. 그녀는 눈을 뜨고 볼 수 밖에 없었다. 던스탄의 부하들을 보았

    을때, 그녀는 그들이 자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모두 죽어 있었다.

    불가에서 자고 있던 사람들은 자는 채로 살해당한 모양이었다. 그들의 몸을 덮은 담

    요는 피로 물들어 있었다. 몇 명은 깨어나 맞서 싸우려는 듯, 수레 곁에 눈을 뜨고

    죽어 널브러져 있었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텐트 자락이 바람에 나부끼는 소리뿐이었다. 신음하는 사람도 없

    었다. 살아 남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동물의 소리도 들리지 않아? 주위를 둘러

    보니 말도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그곳에 살아 있는 생명체라고는 던스탄과 그녀뿐이

    었다.

    오랫동안 마리온은 그 자리에 못 박힌 채 서 있었다. 아무 느낌없이 그저 보고만 있

    는데 마음속에서 무엇인가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한 장면 한 장면, 잔인한 살육의 현

    장을 볼 때마다 점점 더 무거워져 갔다. 무엇인가가 그녀의 심장을 터질듯 메우고 있

    었다.

    마침내 짓밟힌 세드릭의 시체를 보자 그녀를 초연하게 붙들어 매주던 끈이 끊어지고

    고통이 홍수처럼 밀려들었다. 그녀는 익사 직전의 사람처럼 숨을 쉴 수 없었다.

    과거의 끔찍한 장면이 현재와 겹쳐졌다. 마리온은 무릎을 꿇으며 털썩 주저앉아 두

    손으로 눈을 가렸지만, 끔찍한 기억은 사라지질 않았다. 조금 전에 일어난 일처럼 생

    생하게 다가왔다.

    그녀는 뛰쳐나온 무법자들이 한 마디 말도 없이 모두를 죽이는 광경을 무력하게 지

    켜볼 수밖에 없었다. 세드릭보다 몇살 위인 형 존이 칼에 베였다. 마리온은 그가 쓰

    러지는것을 보며 자신과 에니드의 고함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단도를 꺼내어

    자신의 하녀를 위협하는 남자를 찌르려 했지만 공포에 손이 제대로 나가질 않았다.

    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악마와 같은 살인마의 더러운 얼굴이 보였다. 눈동자가 악의로 번뜩였고, 그의 귓볼

    에 매달린 은색 귀고리가 차갑게 빛났다. 그는 그녀를 후려쳐 말에서 떨어뜨렸다. 고

    통이 머리를 채우기 전에 마리온은 무언가를 깨달았다. 그 귀고리를 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그 귀고리를 한 남자는 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도적떼처럼 위장하고 있었지만, 그

    녀는 그가 삼촌의 부하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마리온은 조용히 눈물을 흘리며 가쁜 숨을 내쉬었다. 커다란 손이 그녀의 목덜미에

    와 닿았다. 그 손은 그녀의 머리를 낮추어 그녀가 기절하지 않도록 했다. 현기증이

    사라졌다. 그녀는 말없이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 앞에 누워 있는 남자들은

    벌써 몇 달 전에 죽은 그녀의 사람들이었으며, 이제 되돌아온 기억은 머리속에서 떠

    나지 않고 그녀를 괴롭혔다.

    "여기 있을 수 없소." 던스탄이 말했다. 마리온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슬픔

    보다 기억을 되찾은 고통이 더 컸다. 그저 텅비어 있기만 했던 과거가 돌아왔다. 그

    녀의 삼촌, 야비한 삼촌이 부하들을 보내 모두를 죽여 버리려 했던 것이다.

    그녀는 던스탄이 낮게 욕설을 내뱉는 것을 들었지만 움직이지 않고 자꾸만 자신의

    마음 안쪽으로 도피하려 했다. "마리온, 마리온!" 그가 그녀 곁에 몸을 구부리고 앉

    아 그녀의 팔을 세게 움켜쥐었다. 그의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마리온! 우린 여기 있

    을 수 없소. 이건 보통의 공격이 아니오. 도둑들은 아무것도 훔쳐가지 않았소. 모두

    를 살해하기 위해 밤에 조용히 숨어들었던 거요. 그리고 그들은 아직 목표를 달성하

    지 못했소."

    "삼촌이예요."

    "당신 삼촌 일은 잊어버려!" 던스탄이 그녀를 흔들며 말했다. "내 부하들을 살상한

    게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어젯밤 그 두 명도 그들의 일행이었을 것이요. 이 짓을 한

    게 단순한 도적떼가 아니라는 것밖에는 모르오. 그들이 누구든 아직 이 주위에 있소.

    얼른 달아나야 하오!"

    그는 손의 힘을 풀고 목소리를 부드럽게 했다. "챙길 수 있는 것을 빨리 챙겨요. 갈

    아입을 옷과 돈, 귀중품, 남은 음식이 있다면 그것도. 하지만 서둘러요."

    그는 그녀가 일어서는 것을 도왔다. 마치 꿈속을 걷는 듯 마리온은 수레로 가 마비

    된 손가락으로 담요와 옷가지를 챙겼다. 계속 손을 움직이고 있어도 기억의 파편들이

    그녀 앞을 춤추며 지나갔다. 그녀는 다시 소녀로 돌아가 있었다. 아버지의 무릎에

    앉아 어머니에게 천진한 미소를 보내는. 오, 하느님. 한때는 내게도 사랑하는 가족들

    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아무도 없다. 그녀를 죽이라고 사람을 보낸 어머니의 교

    활한 오빠밖에는.

    수레에서 뛰어내리다가 중심을 잃는 바람에 거의 넘어질뻔한 그녀는 던스탄이 보이

    지 않자 순간적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이젠 절대 그에게서 도망칠 생각 따윈 하지 않

    는다. 탈출을 계획하기엔 너무도 기진맥진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서 남은 건 던스탄

    밖에 없다.

    공포와 슬픔에 휩싸인 그녀에겐 그 어느 때보다도 의지할 수 있는 그의 힘과 따스함

    이 필요했다. 죽은 시체에서 화살을 잡아 빼는 그의 모습이 저쪽에 보이자 안도감이

    들었다. 동시에 그에 대한 사랑이 피어오르며 날카로운 고통의 날이 무뎌졌다.

    그녀는 여기저기 널브러진 시체와 시체를 뜯어먹는 새들을 넘어 그에게 뛰어들었다.

    그에게 다가간 그녀는 그의 품에 몸을 던지며 두 팔로 그를 안았다. 처음으로 그는

    그녀에게 날카로운 말을 하거나 몸을 빼지 않고 그녀를 자신에게 끌어당겼다.

    "아, 마리온." 그가 끊어지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에서 그가 마음속에

    숨기고 있던 고통과 슬픔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부하들이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그 중 몇 명은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사람이며

    , 몇 명은 그의 친구다. 하지만 웨섹스의 늑대는 여자처럼 바닥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릴 수가 없다. 그는 기사다. 그리고 그녀의 목숨도 책임져야 한다. 그는 그 커다

    란 몸에 모든 분노와 상처를 감추고 있었다. 마리온은 또다시 눈물을 흘리고 싶었다.

    그를 위해서.

    그는 천천히 그녀를 안은 손을 풀었다. "말이 없으니 힘든 여행이 될 거요. 하지만

    하루 정도 걸어가면 마을이 나올 것 같소. 거기서 새 말을 구할 수 있을 거요."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실눈을 떴다. 마리온도 그의 시선을 쫓았다. 며칠 동안 계속 화

    창하던 날아 끝나고 비가 오려고 하고 있었다. 머리 위에 시커멓게 몰려 있는 구름으

    로 보아 곧 비가 쏟아질 것 같았다. 그는 낮게 욕을 하며 그녀를 숲으로 이끌었다.

    그들은 길에서 살짝 떨어진 곳의 숲 속을 걸었다. 조용히, 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

    지 생각하며, 죽은 자들에 대한 슬픔을 속으로 삭이며 걷고 있었다.

    2㎞쯤 갔을까? 드디어 멍함이 가셨다. 던스탄의 커다란 보폭을 종종걸음으로 쫓아가

    던 그녀는 갑자기 헛구역질을 하며 바닥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텅 빈 뱃속에서 나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녀는 그렇게 주저앉아 구슬피 울

    고 있었다. 던스탄이 그녀 곁에 몸을 구부리고 앉아 어색한 손짓으로 그녀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그녀는 더더욱 서럽게 울었다. 없었더라면 그가 이런 고통을 겪지 않아

    도 되었을 것이기에.

    "내 잘못이에요. 모두 다 내 잘못이에요."

    "아니오."

    "맞아요! 모두 나 때문에 죽은 거라구요."

    "아니오." 하지만 마리온의 마음은 편해지지 않았다.

    "당신은 이해하지 못해요. 내 삼촌이 한 짓이에요. 삼촌이 모두를 죽인 거예요."

    "그만 하시오!" 던스탄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마리온은 고개를 들어 잔

    뜩 찌푸리고 있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더 이상 얼토당토 않은 당신 삼촌 얘

    긴 하지 마시오. 누가 내 부하들을 죽였는지 모르지만, 당신 삼촌이 이런 짓을 할 이

    유가 없잖소. 내가 아는 한 당신 삼촌은 아무에게도, 당신에게도 아무런 짓을 하지

    않았소. 당신이 증명할 수 없다면 더 이상 막연한 공포에 대한 하소연은 하지 마시오

    !"

    "당신은 몰라요." 마리온은 부드럽게 말했다. 그녀는 두 손에 잔뜩 부은 눈을 묻으

    며 침착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입을 꼭 다문 채 녹색 눈으로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

    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그녀는 그가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

    다. 보이진 않지만 던스탄 드 부르그의 가슴속에서 무언가 타오르고 있다는 것을, 슬

    픔과 분노와 좌절감이 아닌 뭔가를 느낄 수 있었다. 희망. 오랫동안 잊고 있던 노랫

    가락처럼 희망이 그녀의 마음속을 파고들었다. 만일 그에게 털어놓는다면.

    "이제 모든 기억이 나요." 그녀가 힘겹게 말했다. "모든 게 생각났어요."

    그녀를 믿을 수 있을까.

    던스탄은 굴뚝새가 고개를 숙인 채, 무릎 위에 놓인 자기 손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잃어버린 기억이 되돌아왔다는 얘기를 듣고 있었다. 하지만 믿을 수 없었다. 그녀는

    그에게 수없이 거짓말을 했다. 이 믿어지지 않는 얘기가 진실이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침착한 그녀의 태도를 보니, 자꾸만 그녀를 믿고 싶어졌다. 이

    번만은 진실인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헛소리는 믿을 수 없다! 던스탄은 목덜미를 문질렀지만, 머리까지 욱신

    거리는 통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의 목숨이 달려 있는 만큼 신중히 판단

    해야 한다. 그는 몇만 번도 넘게 이 임무와 집까지 데려다 주어야 하는 여자를 마음

    속으로 저주했다. 부하들이 살해당했는데도 살인자를 추적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다.

    바로 이 제정신이 아닌 여자 때문에!

    어딘지도 모르는 이곳에 단둘뿐이다. 무슨 일이 생긴다 해도 타고 달아날 말조차 없

    다. 일행을 공격한 것은 평범한 도적떼가 아니다. 지금쯤 자신들까지 처치하기 위해

    뒤를 쫓고 있을지도 모른다. 던스탄은 자꾸만 등뒤를 돌아보곤 했다. 지금도 그들이

    뒤를 쫓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자신들이 대강 어디쯤 있는지는 알고 있었지만, 마

    을에 닿으려면 얼마나 더 걸어야 하는지는 확실치 않았다. 굴뚝새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속도가 너무 느리다. 이러다가 비라도 내린다면.

    던스탄은 머리가 욱신거려 눈을 질끈 감았다.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그녀를 무사히

    배더슬리에 데려다 주고 자신은 한시바삐 웨섹스로 돌아가 부하들의 복수를 해야 한

    다. 어느 때보다 더 자신이 웨섹스가 아닌 다른 곳에 있다는 게 염려되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이 말썽꾸러기 짐이 떠들어 대는 허무 맹랑한 소리에 귀 기울이는 대신

    일어서서 발걸음을 옮기고 싶었다.

    "내 말을 믿지 않는군요." 그녀의 비난하는 목소리에 그가 끙 하고 신음 소리를 냈

    다.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당신 삼촌과 직접 아야기를 나누겠소." 그녀의 말에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말했다.

    그녀는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나부끼며 화난 듯 일어섰다. 그녀의 불꽃이 다시 이글

    거리며 타오르는 것을 보자 기뻤다. 그녀가 땅에 무릎을 꿇고 앉아 욕지기하는 것은

    정말 싫었다. 그 이유따위는 알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보다 더

    아프게 느끼는 것말고도 할 일은 많으니까.

    "당신은 이해하지 못해요, 던스탄." 그녀가 감히 그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말했다.

    "삼촌은 내 일행도 죽이고, 당신 부하들마저 죽인 거라구요! 날 그곳으로 데려가면

    나도 죽일 거라구요!"

    "내게 증거를 보여 주시오!" 던스탄이 으르렁거렸다. "캠프의 일이 삼촌 짓이란 증

    거가 있소? 삼촌의 부하들이 쓰는 화살이 어떻게 생겼는지 말해 보시오. 내 짐 속에

    내 부하를 죽인 화살 하나가 들어있소. 어디 맞는지 봅시다."

    마리온은 얼굴을 찡그렸다. 던스탄은 그녀와 싸우는 것보다 그녀의 미소를 보는 게

    더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완수해야 하는 임무와 조사해야 할 살인 사건

    이 있다. 아무리 매혹적이라 하더라도 어리석은 여자의 말을 덮어놓고 믿을 수는 없

    었다.

    그녀는 갑옷에 싸인 그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찔렀다. "당신 이웃 얘길 하면 당신은

    고집 센 바보가 되어 버려요. 적이 다양하게 위장한다는 것쯤은 당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잖아요."

    던스탄은 자신을 괴롭히는 악당의 이름에 얼굴을 찌푸렸다. 뭔가가 그의 마음속에서

    걷잡을 수 없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더 이상 논쟁을 벌일 시간이 없었다.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팔을 꽉 잡은 뒤 더 이상 말도 안되는 소리는 그만두라는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닿는 순간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은

    분노로 달아올라 뺨이 장밋빛으로 물들고 눈은 커다랗게 뜬 채 입술을 살짝 벌리고

    있었다. 갑자기 그는 그녀를 뜨겁게 원했다.

    그녀의 입술을 맛보고 싶었다. 그녀의 입에 입술을 포개고 손을 그녀의 머리카락 속

    에 찔러 넣고 싶었다. 그녀를 끌어당겨 이 고통스런 갈증을 해소하고 싶었다. 그녀가

    욕망으로 눈을 흐린 채 그의 손길 아래서 떠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는 그녀를 원했다.

    던스탄은 캠프의 참상을, 죽음을 목격한 후라 자신이 살아있음을 깨닫고 싶어하는

    거라 자신을 타일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이 욕구는 다른 여자로는 절대 해소되지

    않으리란 걸 느낄 수 있었다. 오직 그녀만을 원했다. 그것도 지금 당장.

    그녀는 덫에 걸린 사슴처럼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빠르고 얕은 숨소리

    를 들을 수 있었다. 자신의 숨소리도 거칠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팔을 쥔 손에

    힘을 주며 던스탄은 자신을 억제하려 애썼다. 그녀가 고통에 얼굴을 찌푸렸을 때야

    비로소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뜨겁고 열정적인 순간은 지나가고 마법은 풀렸다.

    그녀는 어두운 곳에 있다가 밝은 곳으로 나온 사람처럼 눈을 깜박였다. "던스탄 드

    부르그! 날 항상 멍들게 해야겠어요?"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불평했다.

    그는 그녀를 놓아 주었다. "갑시다, 떠나야 하오." 그가 거칠게 말했다. 그는 뒤돌

    아 서서 그녀가 쫓아오는지 확인도 하지 않고 걸어갔다. 도대체 이 땅에 널리고 깔린

    게 여자인데, 왜 하필 그녀만이 날 미치게 하는가.

    그는 이를 악물고 앞으로 걸어나갔다. 하찮은 여자에게 기묘한 감정을 쏟을 시간의

    여유가 없었다. 그는 머리속으로 얼마나 더 그녀와 있어야 할지 계산해 보았다. 오늘

    위스버러에 도착할 수 있다면 말도 구할 수 있고 밤을 보낼 숙소도 찾을 수 있을 것

    이다. 따뜻하고 푹신한 침대에 지친 몸을 뉘고 싶었다. 갑자기 마리온이 느슨한 옷을

    입고 베개 위에 머리카락을 풀어헤치고 깃털 이불 위에 길게 누워 있는 광경이 떠올

    랐다. 던스탄은 입 밖으로 욕을 내뱉으며 고개를 돌려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잔뜩 풀이 죽은 표정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던스탄은 누군가

    가 기억에도 없는 마음의 해묵은 상처를 다시 헤집어 놓은 것처럼 예리한 고통을 느

    꼈다. 그는 몸서리를 치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고는 못마땅한 소리를 내며 팔

    을 뻗었다. 그녀에게 닿지 않고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가 그녀의 손을 잡자 그녀가 짧게 놀란 표정을 짓는 것이 보였다. 고운 벨벳처럼

    따스한 그녀의 눈. 그녀를 달래기 위함이었지만 그의 맨손이 그녀의 매끄러운 피부에

    닿자 폭풍 전야처럼 그들 사이의 공기가 들끓었다. 그녀의 갈색 눈이 다시 그를 향

    했다. 눈에 떠오른 놀라움이 곧 달착지근한 나른함으로 바뀌자 그는 그녀를 풀밭 위

    에 누이고 그녀에게 달려들고 싶었다.

    그녀도 그를 원하고 있었다.

    그의 머리 속에서 온갖 생각들이 교차했지만 말은 한 마디도 나와 주지 않았다. 혼

    란 복잡함. 던스탄은 죽어간 자신의 부하들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꾸짖었다. 그가 그

    녀를 여기서 안는다면 쾌락 뒤에 남는 것은 등에 박힌 화살밖에 없으리라. 그리고 굴

    뚝새는...  그녀를 원하는 만큼 그녀가 자신의 부주의로 목숨을 잃기를 바라지 않는

    다.

    던스탄은 그녀의 손을 놓고, 이번에는 속으로 욕하며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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