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월의 신부-8화 (9/20)

8

마리온은 나무 그림자 아래 가려 보이지 않는 커다란 남자를 바라보았다. 뭐라고 해

야 좋을지 모르겠다. 그를 보았을 때, 그가 손을 내밀었을 때, 자신을 위험에서 구출

해 주었을 때, 그녀는 안도의 눈물을 흘리 정도로 기뻤다.

어색하게 자신을 안아 위로할 때, 그녀는 던스탄 드 부르그에게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무언가를 느꼈다. 너무도 강렬한 느낌이었다. 그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을

때, 그의 잘생긴 얼굴에 묘한 표정이 떠올랐을 때, 그녀는 갈망으로 숨이 막힐 지경

이었다.

마리온은 얼굴을 붉혔다. 짧은 순간 동안 세상에 그와 단둘이 있는 듯한 느낌을 받

았다. 그녀의 몸을 더듬던 더러운 손길도, 죽음의 비명도, 피도, 싸움도 없었던 일

같았다. 무시무시한 거미처럼 그녀를 거미줄에 얽어매려는 배더슬리도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오직 던스탄과 짜릿한 느낌과 미친 듯이 두근대는 심장만이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곧 그 짧은 순간은 끝이 났고, 던스탄은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가 투덜거리며

원치 않는 짐인 양 그녀를 이끌었다. 그는 그녀를 나무 위에 올려놓고 그녀에게 웃

어 보였다. 이 남자는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다. 마리온은 초조한 듯 몸을 꿈지럭거

렸다. 등이 배겼다. 이런 데서 도대체 어떻게 잘수 있단 말인가.

그녀의 치마가 기어 올라가는 바람에 마리온은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낮에는 따뜻

했지만 해가 지고 나자 곧 한기가 엄습했다. 그녀는 팔로 다리를 안으며 무릎 위에

고개를 얹고 반대편에 앉아 있는 남자를 응시했다.

그를 보고 있자니, 다시 달콤한 감정의 홍수가 밀려들었다. 이 감정은 그가 날 구해

주었기 때문일까? 나를 구해 준 사람이 누구였든 이렇게 가슴속에 벅차오르는 감정

을 느꼈을까? 마리온은 그를 바라보았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녀가 느기는 이 감정은

오직 던스탄 드 부르그, 완고하고 투덜거리기 잘하는 잘생긴 악마를 위한 것이다.

그녀는 눈을 감고 그의 얼굴을 머리 속에 그리며 미소지었다. 그녀가 그릴 수 있는

얼굴은 그의 찌푸린 얼굴뿐이다.

하지만 그는 야단치지 않았다. 그가 어리석음에 대한 훈계를 늘어놓았다 하더라도

놀라지 않았을 텐데. 내키진 않지만 그의 말이 맞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했던 경고는 허풍이 아니었다. 숲은 야비한 남자들로 가득 차 있다. 던스탄의

얼굴이 그녀의 몸을 누르던 손과 끔찍한 얼굴로 바뀌자 그녀는 혐오감에 몸을 떨었다

무언가가 기억의 끄트머리에서,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녀를 삼키려 들었다. 마리온

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거기에 있어요. 아주 가까이... 느낄 수 있어요." 그녀가 속삭였다.

"뭐가?" 던스탄이 곧 되물었다. 그는 잠을 자지 않고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던 것이

다.

"내 과거요."

그가 짜증나는 듯 끙하고 소리를 내었다. 이제 더 이상 날 쫓아다니는 데 신물이 났

나? 하긴 누가 뭐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에겐 그를 기다리는 집과 일이 있다. 그녀

를 기다리는 것은 차가운 공허함뿐이지만. "난 두려워요, 던스탄. 기억하고 싶지 않

아요."

"그럼 기억하지 마시오." 투덜거리는 목소리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마리온은

자신의 몸을 감싸는 그의 팔을 느꼈다. 그는 그녀를 자신에게 끌어당겼다.

"자요." 그가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따스한 체온을 잊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옆으로 파고들었다. 그의 체온이 그

녀를 감싸자 한기가 사라져 버렸다. 밤의 공포와 기억의 두려움도 사라졌다. 한밤에

남자의 품에 파고들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너무 포근했다. 그녀는 그에게 자

신의 다리를 포개며 부드럽게 한숨지었다.

혼자만의 생각 속을 떠도느라, 마리온은 던스탄의 포옹이 미묘하게 바뀌었다는 것을

곧장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의 머리 아래 닿은 그의 팔 근육이 딱딱하게 긴장되었

으며, 그녀의 몸에 닿은 그의 몸이 경직되었다. 그녀는 더 깊이 파고들려고 몸을 꼼

지락대다가 그의 거친 숨소리에 놀라 동작을 멈추었다.

처음에는 위험이 닥친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위험 따위로 그의 심장이 이토록 세

차게 뛸 리가 없다. 그녀는 순간 문제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조금 전까지도 그저 그

녀를 달래기 위해 쓰다듬는 것에 지나지 않던 그의 손길이 전혀 다른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비록 그의 눈동자는 보이지 않았지만, 마리온은 그의 눈동자가 욕망으로 검은 색에

가까운 녹색으로 짙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비록 눈은 크게 떴지만 움직

이지는 않았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자신의 몸을 이토록 뜨겁게 만드는 이 느낌이

곧 사라질 것 같기 때문이었다.

그의 몸과 맞닿은 부분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의 허벅지에 닿아 있는 무릎이, 갑

옷 아래 숨은 탄탄한 가슴에 닿은 팔꿈치가, 그의 팔에 닿아 있는 관자놀이가 짜릿짜

릿한 게 달콤했다.

놀라움에 몸이 굳었다. 과거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지만, 그녀는 자신이 순

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이런 음탕한 갈망이 생기는 걸까? 그것도 하필

이면 던스탄에게만? 그녀가 아는 한, 그녀는 한 번도 남자의 팔을 베고 누워본 적이

없다. 드 부르그 가의 다른 형제들과도 수없이 부대끼며 접촉했지만, 그들에게선 이

런 뜨거운 열기를 느끼지 못했다.

목이 칼칼했다. 꼼짝도 하지 않으려는 몸이 아팠다.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자 그

녀는 살짝 몸의 무게를 움직이며 그에게서 몸을 뗐다. 그녀의 다리가 그의 다리를 쓸

자 던스탄은 억눌린 것 같은 작은 소리를 내었다. 그녀는 얼른 그를 올려다보았지만,

어둠에 가려진 그의 얼굴에서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잠을 자요." 그가 거친 목소리로 명령했다.

자라구? 온몸의 신경이 그를 간절히 희구하는 이 마당에? 기묘한, 조금 두려우면서

도 놀라운 경험이었다. 그가 내게 키스할까? 마리온은 그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키스

해 달라고 말하고 싶은 욕구와 싸웠다. 그를 볼 수만 있다면! 그는 얼굴을 찌푸리고

있을까? 그녀를 삼킬 것같은 늑대 같은 표정을 지으며 녹색 눈동자를 빛내고 있을까.

그녀는 갈망으로 꼼짝도 않고 기다렸지만 던스탄은 움직이지도 소리내지도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어리석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티븐의 음란한 농담을 수없이 들었던

터라, 자신이 여기 던스탄에게 안겨서 누워 있어선 안 된다는 것을, 더 많은 것을 바

라선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에게서 떨어지려고 몸을 움직이자, 그가 불에

덴 것처럼 몸을 움찔했다.

그들은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 있었다. 호흡은 빠르고 가빴다. 마리온은 캄캄한 숲

을 바라보았다. 다시 한기가 느껴졌다. 그녀의 몸은 그의 따스함을 갈구했다.

지금이라도 그에게 몸을 돌리고 그를 끌어당겨 그의 열기속에 녹아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그렇게 마음대로 몸을 내맡기는 여자들을 지칭하는 단어가 있

다. 절대 듣기 좋은 말이 아니다. 늑대로부터 짧은 하룻밤의 위안을 바라는 것일까.

아니야, 마리온은 가슴속으로 외쳤다. 난 더 많은 것을 바라고 있어.

그건 말도 안 된다. 그에게 어떤 이상한 바람을 품든, 그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든,

던스탄은 그녀를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배더슬리로 데려가 배더슬리에 버릴 것이

다. 갑자기 고통이 느껴져 마리온은 눈을 감았다. 다른 생각을 하려 했다. "웨섹스에

대해 말해 주세요." 그녀가 부드럽게 말했다.

"웨섹스?" 그가 의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기억을 잃은 쪽은 마리온이 아니라 던스

탄인 것처럼. 그러고는 천천히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마리온은 그의 땅을 머리

속에 그려 볼 수 있었다. 푸른 계곡, 가파른 언덕, 그 가운데에 위치한 높다란 성.

그의 부드럽고 규칙적인 목소리에 그들 사이에 타오르던 불꽃이 잦아들고 피곤함이

느껴졌다. 자장가 같은 그의 따스한 목소리 아래, 자신이 나무 위에 있다는 것도, 공

기가 쌀쌀하다는 것도 모두 잊고 잠이 들었다.

던스탄이 그녀를 깨운 것은 희끄무레하게 동이 트기 전이었다. 그는 나무 아래에서

얼굴을 찌푸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리온은 자신의 집에 대한 희망을 그녀에게 터

놓던 남자는 이제 어둠과 함께 사라졌음을 직감했다. 던스탄은 평소의 모습으로 되돌

아와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 미소지었다. 점점 더 그에게 익숙해져 가고 있다.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캠프로 돌아가야 하오. 여기서 계속 머뭇거리는 것은 현명하

지 않소."

마리온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그녀를 안아 내렸다. 잠시 동안 그의 손이 그녀의

허리에 닿고, 녹색 눈동자가 그녀의 눈동자와 얽혔지만 그는 얼른 뒤로 물러섰다. 그

들 사이에 기묘한 기류가 흐른다고 느끼는 건 그녀 혼자만의 생각일까.

옷의 구김을 펴려고 몸을 굽힌 마리온은 자신의 의심이 적중했음을 깨달았다. 자신

의 몰골을 보니 전혀 웨섹스의 늑대의 관심을 끌 만하지 않았다. 망토와 옷은 더러웠

고 여기저기 피가 튀어 있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머리를 매만져 보니 머리 또한 심하

게 헝클어져 있고 나뭇잎과 나뭇가지가 붙어 있었다. 그녀는 던스탄이 자신을 바라보

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얼굴을 찌푸렸다.

"도망치는 게 그리 즐거운 일은 아니란 걸 깨달았소, 마리온?"

오, 그래. 이제 시작이군. 어젯밤 하리라 생각했던 설교가 이제 시작된 것이다. 기

분도 굉장히 안 좋아 보였다. 앞으로는 그를 절대 아침 일찍 깨우면 안 되겠군. 마리

온은 왜 자신이 그런 얼토당토 않은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이 늑대를 깨

울 일이 언제 있겠는가?

그녀 역시 아침엔 기분이 별로였기 때문에, 그녀는 용무를 보려고 아무 말없이 돌아

섰다. 그러자 그가 커다란 손으로 팔을 꽉 쥐었다. 처음에는 몸이 반사적으로 움츠러

들며 방어하려 했다. 하지만 던스탄의 형제들과 겨울을 보낸 덕에 그녀는 많이 강해

졌다. 게다가 세 번씩이나 탈출에 실패하다 보니, 그녀 안의 작은 불똥은 점점 커져

불꽃이 되었다.

그녀도 그에 지지 않고 성질을 부렸다. 어젯밤의 일로 피범벅이 된 데다가, 나무 위

헤서 잔 덕에 여기저기 멍이 들고 결리는 데도 많았다. 목도 마르고 배도 고프고 용

변도 보고 싶었다. 지금 던스탄 드 부르그가 그녀에게 소리지르는 것은 들어 줄 수가

없었다.

화가 치밀자 힘이 솟았다. 그녀는 홱 돌아서며 그의 손에서 팔을 빼냈다. "날 놔요,

던스탄 드 부르그! 당신 협박은 이제 지긋지긋해!"

그가 우스꽝스런 표정을 지으며 놀랍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협박? 협박이라니

! 제기랄, 난 당신 목숨을 구해줬어. 이 배은망덕한 여자야!" 주변의 나무만큼이나

크고 당당한 그가 위협적인 포즈로 폭팔할 것 같은 얼굴을 하고 그녀에게 말했다.

마리온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제, 실례 좀 하겠어요." 그녀가 몸을 돌리려 하자

그는 다시 손을 뻗어 그녀를 저지했다.

"그럴 순 없지!" 던스탄이 입을 꾹 다물었다. "당신이 다시 달아나지 않을 거라는

걸 어떻게 믿을 수 있겠소! 아가씨, 당신 바보요? 어젯밤에 그 남자들이 당신에게 무

슨 짓을 하려고 했는지 모르겠소? 당신을 이용하고 당신을 죽도록 버렸을지도 모르오

!"

그녀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거칠게 그녀를 흔들었다. 마리온은 이 무시

무시한 기사에게 겁을 먹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대로 얼어붙어 찍소리 없이

그가 하는 데로 내버려 두면서 그만두길 바라는 게 당연하다. 어쩌면 무릎을 꿇고 그

에게 용서를 빌어야 할지도.

마리온은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는 대신

그에게 욕을 해주고 그의 발을 힘껏 밟았다. 그의 발은 돌처럼 딱딱해서 오히려 그녀

의 발만 아플 뿐이었다. 그녀는 한 다리를 들고 펄쩍펄쩍 뛰었다.

던스탄은 욕을 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제발, 내 말 좀 들어요. 마리온! 난 당신을

보호하려는 것뿐이오. 비록 당신이 어리석어서 어젯밤 일을 무시한다 하더라도, 난

그럴 수 없소! 당신이 그 두 명에게 잡혀 있는 걸 보고 어떤 기분이었는지 아시오?"

그가 소리를 지르자 그녀는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분노 뒤에서 무언

가가 꿈틀댔다. 혼란스러운 그의 눈을 보면서 그녀는 자신의 화가 가라앉는 것을 느

꼈다.

"아뇨, 난 잘 몰라요." 그녀가 부드럽게 말했다. "어떤 기분이었어요, 던스탄?"

그가 그녀를 내팽개치듯 놓아 주는 바람에 그녀는 약간 휘청거렸다. 그는 그녀에게

서 몸을 돌리고 초조한 듯 이리저리 걷다가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그녀뿐 아

니라 스스로에게 대답을 감추려는 듯. "난 당신이 혼자 숲속을 쏘다니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깨닫길 바라오."

아니면 또다시 예의 그 상상력 때문이리라. 마리온은 멍든 팔을 비비며 늑대처럼 서

성대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는 몸짓

으로 이리저리 서성댔다. 그녀는 그가 왜 이러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난 당신이 어리석은 짓은 그만두고 순순히 집으로 돌아가 주면 좋겠소."

"왜요? 내가 죽는 것과 배더슬리로 돌아가는게 무슨 차이가 있죠 ? "

그는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기세에 놀란 그녀는 뒷걸음질을 쳤다.

"좀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시오. 당신이 이곳에서 잔인하게 살해당할 거라는게 그 차

이요. 게다가 집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게 죽음인지 당신도 모르고 있잖소?"

"그건 사실이예요. 난 알고 있어요, 던스탄." 마리온은 작게 대답했다. 그녀는 먼

곳을 바라보며 배더슬리를 그려 보려 했지만 잘 되질 않았다. 천천히 그녀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내 머리나 내 기억은 모르지만, 내 마음은 알고 있어요. 난 느낄 수

있어요."

던스탄이 크게 코방귀를 꿨다.

"날 믿지 못한다면, 나도 어쩔 도리가 없어요." 던스탄은 뭘 받아들일 만한 분위기

가 아니었다. 그녀만큼이나 꾀죄죄한 모습의 그는 아마 밤새 보초를 서서 매우 피곤

할 것이다. 게다가 그녀 때문에 시간이 지체되어 회도 날 것이다.

그가 입술을 비죽거렸다. "당신은 내 자제력을 시험하고 있소, 마리온. 당신은 캠피

온을 믿지 못하나? 아버님이 당신에게 해가 가지 않도록 알아서 해주실거요."

"과연 그럴까요?" 마리온이 코웃음쳤다. "나의 영웅은 날 안전한 그의 지붕에서 알

지도 못하는 곳으로 쫓아 버렸어요. 난 기억도 나지 않는 남자에게 내 자신을 맡겨야

한다구요!"

그의 회의적인 표정이 다시 그녀의 성질을 건드렸고, 그녀는 그의 단단한 가슴을 손

가락으로 찔렀다.

"당신은 내가 어떤 감정인지 몰라요, 던스탄. 당신은 언제나 형제들에게 둘러싸여

자랐죠. 당신에겐 사랑스런 가족과 믿을 수 있는 친구들과 당신을 위해 목숨까지 바

칠 부하들이 있다구요. 배더슬리에선 아무것도 날 기다리지 않아요. 그곳에 대해선

공포밖에 아는 게 없다구요!"

"당신은 돌았어. 그게 아니면 정말 바보거나."

"좋아요.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언제나 그러시겠지만. 어쨌든 난 이제 잠깐 용무를

봐야겠어요." 그녀가 걸음을 내딛자 그가 순식간에 앞으로 다가와 그녀를 막았다. 그

토록 커다란 몸집을 한 남자가 어쩜 그렇게 소리도 없이 날렵하게 움직일 수 있을까.

"안 돼요." 그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뭐라구요?"

"안 된다고 했소." 그가 잔뜩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당신이 날 한 번 이상 속였다

는 걸 인정하겠소. 하지만 다시 속는다면 그야말로 바보겠지. 당신의 육감적인 몸매

에는 관심이 없지만 난 꼭 따라가야겠소. 아버지는 나에게 당신을 산 채로 배더슬리

에 데려다 주라는 임무를 맡기셨소. 산 채로, 건강하게 데려다 줘야 하는 거요. 그러

니까 앞으로는 당신을 삼촌 손에 넘겨 주기 전까지는 내 시야가 닿는 곳에 둘 작정이

오. 용무를 봐야한다면 치마를 올리고 볼일을 보시오. 오늘 벌써 시간을 많이 낭비했

소."

마리온은 당황했다. 지금 날 보고 있겠다는 뜻은 아니겠지? "하지만... 하지만..."

그녀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말을 더듬었다. "하지만 설마 내가... 그러리라 기대

하진 않으..." 그의 입술에 악의 섞인 미소 비슷한 것이 서려 있는 것을 보며 그녀는

말꼬리를 흘렸다.

"그러길 바라오."

마리온의 얼굴은 점점 더 붉어졌다. "어떻게 감히 그럴 수가 있죠? 난 숙녀라구요!"

던스탄은 뻔뻔스럽게 고개를 젖히고 껄껄 웃었다. "그 말을 믿게 날 잘 설득해 보시

오."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구를 때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마리온은 치마에 손바닥을

문지르며 침착을 되찾으려 했다. 웨섹스의 늑대를 공격할 수는 없다. "말도 안 돼요.

내가 간다 해도 어딜 가겠어요? 게다가 번번히 날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잖아

요." 그녀가 내뱉듯 말했다.

"그 말이 맞소. 하지만 더 이상 꾸물거리고 싶지 않소. 자, 서두르시오. 빨리 하고

싶은 걸 하고 떠납시다." 그는 막 떠오르는 태양을 가리켰다.

마리온은 무슨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그의 표정을 보아하니 통할 것 같지도

않았다. 던스탄 드 부르그와 언쟁을 하는 것은 쓸데없는 힘의 낭비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악의는 없겠지만, 확실히 그녀가 당황해 하는 모습을 즐기는 것 같았

다. 더 이상의 논쟁할 가치를 못 느낀 마리온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럼 최소한 돌

아서기라도 하세요."

"그럴 수 없소."

"던스탄!" 그녀는 그를 노려보았다.

"고개를 돌리겠소. 당신을 자세히 보려는 건 아니오, 굴뚝새. 하지만 당신이 또 근

처 나무에 기어 올라가서 날 귀찮게 만들게 하기는 싫으니까 당신 치맛자락이라도 보

고 있어야겠소. 내 말 똑똑히 들어요, 마리온. 어제 그게 마지막 탈출이었소."

마리온은 그를 노려보았지만 생리적 현상은 막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돌아서서 치마를 치켜들고 일을 보기 시작했다. 그가 고개를 돌리고 있는 것은 알지

만 그래도 불편했다.

"이 근처에 좀 씻을 수 있는 시내는 없겠죠?" 그녀가 그를 돌아다보며 물었다.

"없을 것 같소, 마리온. 이게 다 야생의 숲속으로 뛰어들면 일어나는 일이지."

그가 마리온에게 옆으로 오라고 손짓했다. 마리온은 망토를 두르고 조용히 그의 뒤

를 쫓았다. 그녀는 그에게 기죽지 않으려고 턱을 치켜들고 어깨를 쫙 폈다. "당신을

평생 용서하지 않겠어요, 던스탄 드 부르그."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무성한 풀을 헤치고 나아가는 데 정신을

쏟았다. 정말 이 남자는 못말린다. 캠피온이 오냐오냐하며 그를 받아 줘 성질을 버렸

고, 모두들 그가 거칠게 굴어도 찍소리 못했겠지만 난 그럴 수 없다!

아무리 잘생기고 힘이 세고 생기에 넘친다 하더라도 그의 행동은 용서할 수가 없다.

비록 그 중 일부는 그녀가 계속 그에게 속임수를 썼기 때문이다. 또 일부는 그녀 자

신도 좀 믿기 어렵지만, 그녀에 대한 늑대의 걱정 때문이리라. 하지만 대부분은 무례

함 때문이다. 이 남자는 정말 누가 좀 길들여랴 할 것 같아.

겉으로는 멀쩡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별별 생각을 다 하고 있었다. 마

리온은 그들이 나누던 대화를 한마디 한마디 곱씹으며, 그때 이런 말을 해줄 걸 하고

생각했다. 막 샛길에 닿은 순간, 그녀는 놀란 표정으로 앞에서 걷고 있는 남자를 바

라보느라 발을 헛디뎌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웨섹스의 늑대가 정말로 그녀의 몸을 <육감적이다>라고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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