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월의 신부-7화 (8/20)

7

던스탄은 나무들을 바라보며 월터의 보고를 건성으로 들었다. 오늘은 매우 많은 거

리를 왔으며 식사에 먹을 고기도 사냥할 수 있었다. 날씨도 내일까진 좋을 것 같고,

그의 임무도 거의 끝나간다. 그런데 왜 기분이 좋지 않은 걸까.

그는 불가를 둘러보며 딱딱하게 근육이 뭉친 목을 문질렀다. 부하들도 모두 활기에

넘치는 듯하고, 나이 먹은 베네딕트조차 마리온의 시중을 드는 노파와 수작을 부리고

있었다. 마리온. 그의 눈에 의지라도 있는 듯 그의 시선은 자연스레 그녀의 텐트로

가 꽂혔다.

그녀가 보이지 않아 그는 실눈을 떴다. 주위에 하인도 보이지 않자 그는 이를 악물

었다. 세드릭이 불가에서 고깃점을 뜯고 있는 것을 본 순간 그의 몸에 한기가 흘렀다

"세드릭!" 주인의 커다란 목소리에 놀란 세드릭이 바닥에 고기를 떨어뜨리고 자리에

서 벌떡 일어섰다. 던스탄은 성큼성큼 그에게 다가갔다. "왜 워렌 아가씨 곁에 있지

않는 거지?"

"아가씨께서는 잠자리에 드셨습니다." 그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누가 널더러 자리를 떠도 좋다고 허락했지?"

"어... 아무도요, 주인님. 그저 아가씨가 주무시니까...."

던스탄은 초조함과 분노, 그리고 엉망으로 뒤엉킨 낯선 감정을 억누르려 했다. "베

네딕트가 그녀를 감시하고 있나?" 그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아뇨, 주인님." 세드릭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어리석은 세드릭은

자신이 얼마나 중대한 실수를 범했는지 깨닫지 못하는 듯했다. 던스탄은 세드릭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직접 그녀의 텐트로 향했다. 세드릭이 뒤를 쫓아왔다.

"하지만 주인님, 아가씨께서 피곤하시다고..."

던스탄은 자신의 육감이 틀렸기를, 굴뚝새가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지 않았기를 빌었

다. 제발, 그녀가 그렇게 무모하지 않기를. 그는 아무 말없이 텐트 자락을 홱 열어젖

혔다. 세드릭이 그 기세에 놀라 헉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어두운 천막안에 사람의 형

체가 그 소동에도 꼼짝않고 누워 있었다. 던스탄은 피가 차갑게 식는 걸 느꼈다.

세드릭은 불룩하게 솟은 시트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던스탄은 미숙한

소년이 아니다. 그는 곧장 부츠 끝으로 이불을 걷어냈다. 그 아래에는 옷가지와 베개

가 들어있었다.

"아가씨가 사라졌어요!" 세드릭이 끽끽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이럴 줄은

상상도..."

"그래, 그녀는 사라졌어. 이 말 명심해라." 던스탄이 으르렁거렸다. "내가 명령을

내리거든 딴 생각하지 말고 그대로 따라라. 네겐 생각할 권리가 없다!"

"주인님, 용서해 주십시오!" 세드릭이 무릎을 꿇었다.

"일어나! 그녀가 죽기라도 한다면 네 자신을 용서하도록 노력해 보려무나."

세드릭은 당황한 표정으로 숲속을 보았다. 해는 언덕 너머로 넘어가 어슴푸레 땅거

미가 지고 있었다. 곧 어둠이 내려 앉을 것이다. 그땐 오직 별과 달빛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사태의 심각성에 던스탄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는 어디에든 있을 수 있다.

나무 위에 숨었을 수도, 동굴 안으로 기어들어갔을 수도,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졌을

수도 있다. 너무 어두워서 그녀를 제대로 찾을 수도 없을 것이다. 부하들을 흩어서

그녀를 찾게 하는 것도 무모한 짓이다. 그런 일은 시킬 수 없다.

월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또 달아난 겐가?" 놀라지도 않고 물었다.

"그래."

"서둘러야 겠군." 월터의 말에 던스탄은 캐묻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월터의 눈은

어둠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았다. 던스탄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갑자기 월터의 눈이

이상스레 빛났다. "부하들을 흩어서 그녀를 찾아야 겠군."

"아냐, 너무 위험해. 건초더미에서 바늘을 찾아오라고 부하들을 숲속으로 밀어 넣을

수는 없네."

월터가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다시 닫았다. "길도 조용하지 않나. 여자

하나 빼고는 아무도 없네. 지금 찾기 시작한다면..."

던스탄은 고개를 저어 월터의 말머리를 잘랐다. "자넨 그말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잘

알고 있잖나. 그래, 이 언덕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것 같지는 않네. 하지만 내

가 여태껏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을 바라며 요행을 노린 것 때문이 아니네."

월터의 턱 근육이 꿈틀했으나 던스탄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숲을 보며 무얼 해

야 할지 생각했다. 어리석은 그녀가 될 대로 내버려 두는 편이 옳다. 하지만 저기 어

딘가에 굴뚝새가 혼자 있을 걸 생각하자 가슴이 죄어드는 통증이 느껴졌다.

"그렇다면 어쩔 셈인가? 달아나게 내버려 둘 수도 없지 않은가. 자네 아버님이 뭐라

고 하시겠나?"

월터의 목소리엔 무언가가 있었다. 고개를 들고 그를 쳐다보았다. 내가 방금 들은

게 경멸이었나? 멸시? 사라져가는 빛에는 월터의 경직된 얼굴 윤곽만이 보일 뿐이다.

던스탄은 목덜미를 문질렀다. 지금 난 계속 이상한 상상을 하는 거야. 기분이 나쁘

기 때문에 괜히 월터가 조롱하는 거라고 착각하는 거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내

가 혼자 가겠네."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녀를 찾겠네." 정확하게 말하면, 그

녀의 잔해라도 찾겠다는 뜻이겠지.

아버지가 맡긴 일을 실패한다거나 가족들이 사랑하는 여자가 그의 책임 하에 실종되

거나 죽을 경우, 아버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생각해 보지 않았다. 갑자기 캠피온의

실망이나 사이먼의 조롱이 예전만큼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지금 던스탄은 그녀

를 산 채로 찾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러고 나서 내손으로 그녀를 죽일테다.

던스탄은 무기를 챙겨 들고 숲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세드릭이 따라가게 해달라고

하정했지만, 세드릭을 데려간다면 오히려 성가시기만 할 것이다. 던스탄은 소년에게

남아 있으라고 명령했다. 어둠 속에서 그녀를 찾으려면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그는

잠시 그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제 정신의 인간이 그녀의 의중을 읽기

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대신 그는 캠프장에서 가장 쉽게 떨어질 수 있는 길

을 택했다.

던스탄은 조용히 걸어나갔다. 그녀가 꾀를 써서 이리저리 방향을 틀지 않았기만을

빌 수밖에. 내일 아침까지 아무에게도 발견되지 않기를 바랐다면, 캠프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려 할 것이다. 하지만 확신할 수는 없다. 아무리 그가 걸음을 빨리 한다

하더라도, 이런 어둠 속에서 그녀를 찾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나무 아래는 암흑이었다. 나뭇가지 사이로 희미하게 달빛이 비쳐들 뿐. 던스탄은 그

녀가 따라갔을 만한 작은 샛길 하나를 발견하고 조심스럽게 그 길을 따라 걸었다. 길

은 꼬불꼬불했고, 여기저기에 쓰러진 나무들이 굴러다녔고, 미끄러운 구덩이가 널려

있었다. 혹시 그녀가 목이라도 부러뜨린 게 아닌지 걱정되었다.

차라리 그건 나은 경우일 것이다. 밤의 숲속을 혼자 떠도는 여자에게 닥칠수 있는

위험은 그것말고도 훨씬 많았다. 던스탄은 차마 생각하기조차 싫었다. 그는 그녀를

쫓는 데만 신경을 집중했다. 희끄무레한 달빛 아래 드러나는 진흙 위의 발자국이나

헝클어진 덤불 등 그녀의 흔적을 살폈다. 몇 년 만에 처음으로 무력감을 느꼈다.

던스탄은 자신이 그녀의 뒤를 쫓고 있다는 믿음 하나만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그 믿

음 외에는 아무런 단서가 없었기에, 던스탄은 별다른 생각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점

점 더 앞으로 나아갈수록 다급해져 갔다.

뭔가가 잘못된 것 같은 느낌 때문에 그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전쟁터에서 위험이 다

가오는 것을 느끼듯이 확실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숲은 너무도 조용했다. 야행성 동

물들이 움직이는 소리도 들리지 않고 위험을 알리듯 쥐죽은 듯 고요만이 흘렀다. 던

스탄은 잠시 멈춰 서서 귀를 기울였다.

갑자기 고요를 가르고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피를 싸늘하게 만드는 그녀의 비명

소리. 공포와 고통에 가득찬 여인의 비명 소리. 마리온의 비명 소리. 그의 몸이 반사

적으로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피가 머리로 몰려 눈앞이 흐릿했다. 오랜 동안 쌓은 수련과 조심성 따위는 까맣게

잊고 그는 그녀에게 미친 듯이 달려갔다.

다시 또 다른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는 칼을 뽑아들고 비명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뛰들었다. 작은 불 아래 그녀의 모습이 생생히 드러났다. 마리온은 두 남자 사이에

길게 누워 있었다. 한 명은 그녀의 팔을 잡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그녀에게 몸을

구부리고 그녀의 스커트를 걷어올리고 있었다. 던스탄은 평생 느껴 보지 못한 분노와

피끓는 증오심을 느꼈다.

그녀의 다리 사이에 있던 남자가 그를 올려다 보았다. 그긔 얼굴에 놀란 표정이 채

가시기도 전에 던스탄은 그 사내의 목을 떨어뜨렸다. 피가 공기중에 솟구쳤다. 다른

한 남자는 움찔하며 뒤로 물러서서 무기를 찾았다. 하지만 던스탄이 더 빨랐다. 그는

마리온의 몸을 뛰어넘어 칼을 집으려는 남자의 팔을 잘라 버린 뒤 그의 심장에 칼을

꽂았다.

오랫동안 던스탄은 가만히 서 있었다. 숨이 가쁘고 심장은 미친 듯이 두근거렸으며,

몸은 아직도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그의 시선이 주위를 훑으며 또 다른 적이 있는

지 찾았다. 하지만 그곳은 텅 비어 있었다. 너울대는 불꽃 외에는 아무 것도 움직이

지 않았다. 들리는 것이라곤 죽은 자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가 부글거리는 소리

뿐이었다.

던스탄은 진정하려 애쓰며 심호흡을 했다. 쉽지가 않았다. 그의 온몸에 난 상처가

증명하듯, 이보다 훨씬 더 격한 싸움을 많이 치렀고 셀 수 없이 많은 위험에 처해 봤

지만, 이토록 강렬한 살의를 느껴 본 적은 없었다. 시체를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싶

은 마음이 치미는 바람에 던스탄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여기저기 피를 묻힌 마리온이 더러운 바닥 위에서 엉덩이께까지 치마가 말려 올라간

모습을 하고 머리 없는 시체위에 창백한 다리를 얹은 채 누워 있었다. 그녀의 아름

다운 머리카락이 시체처럼 창백하고 움직임 없는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던스탄은 그녀 곁에 무릎을 꿇고 침착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거친 속삭임일 뿐. "굴뚝새! 굴뚝새. 당신 다쳤소?" 위험이

사라지고 나자 그는 어쩔 줄을 몰랐다. 그녀가 다쳤으면 어떻게 하지? 그는 상처를

치료하는 법은 커녕, 부상자를 운반하는 법조차 모른다.

"마리온, 나요. 던스탄이오." 그가 좀더 크게 말했다.

그녀가 대답하지 않자 그는 장갑을 벗고 조심스럽게 그녀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 그

녀가 긴 속눈썹을 깜빡이며 눈을 떴다. "던스탄." 그녀가 애무하듯 그의 이름을 속삭

였다.

가슴의 통증이 좀 누그러지는 듯했다. 그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자 그녀는 그 손을

잡고 일어나 앉았다. 그는 그녀의 치마를 내려 불빛 아래 드러난 그녀의 보기 좋은

다리를 감춰주었다. 그녀는 평생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 커다란 갈색 눈이 무엇인가를 묻듯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갑옷 위에 드러난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울음을 터뜨렸다.

던스탄은 어색하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니콜라스가 갓난아이였을때 이후에는 누군가

를 이렇게 가까이 안아 본 적이 없었다. 위로를 해야 하는데 너무 어색했다. 위로하

는 방법 따윈 전혀 모른다. 몇 년간의 기사 수업을 받는 동안, 그는 그런 것을 경멸

하도록 훈련받았다. 그를 침대로 이끌었던 여자들은 많은 것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굴뚝새는 그를 필요로 한다.

그는 주춤거리며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에 손바닥을 얹었다. 손바닥 아래로 그녀의

맥박이 느껴지는 것이 반가웠다. 그녀는 무사하다. 신의 보살핌으로 그녀는 무사하다

던스탄은 자신이 조금 떨고 있다는 것을 느끼며, 마리온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피 조금 보았다고 어린아이처럼 떨리는 이 몸이 내 몸일 수가

없다. 마리온이 떨고 있는게 틀림없다. 그녀의 피가 아니란 게 얼마나 다행인지.

던스탄은 매끄러운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어루만졌다. 그 풍성함이라니. 남자라면

누구나 이런 머리에 손을 찔러 넣어 보고 싶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는 자신의 생각에

화들짝 놀라 그녀의 머리에서 손을 떼 어깨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는 거의 강간당할 뻔했다. 너무도 무서웠던 나머지 내게 안겨 위로를 찾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여기서 이런 꼴을 당한 것은 다 그녀의 무모함 때문이며, 난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의 어떻게 타이르든, 던스탄은 팔에 안긴 여자를 자꾸 의식하게 되었다.

그의 목에 그녀가 흘린 눈물이 서늘하게 느껴졌다. 목에 와 닿는 그녀의 숨결은 부

드럽고 따스했다. 그녀에게선 꽃향기가 났다. 그녀의 풍만한 가슴이 그의 가슴에 닿

아 있었다. 아무리 억누르려고 해도 몸이 반응하는 데는 어쩔수 없었다.

그의 반응을 느끼기라도 한 듯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갸름한 얼굴에

선 비난의 기색은 읽을 수 없었다. 아무도 그녀처럼 그를 바라본 적이 없었다. 커다

란 갈색 눈에는 경탄과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담겨 있었다. 이것은 욕망일까? 그들

사이에 불꽃이 튀며 불이 붙어 공기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가 두 손을

그녀의 어깨 위에 얹자, 그녀가 입술을 살며시 벌렸다. 그는 몸을 부르르 떨며 그녀

에게 몸을 숙이다가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었다.

던스탄은 그녀에게 키스하고 싶은 욕망을 누르고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래서야

주위에 널려 있는 시체들과 다를바가 없지 않는가. 죽음과 직면하고 나면, 남자는

가끔 자신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하지만 그건 변명이 될 수 없

다. 굴뚝새는 창녀가 아니다. 게다가 아직 안전하지도 않은 상태이고...  던스탄은

다시 낮게 욕을 하며 혹시 복병이 있는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야영 장소를 보아 하니, 이 두 사람말고도 일행이 더 있는듯 했다. 일행이 언제 돌

아올지도 모른다. "가야 하오." 던스탄이 날카롭게 말했다. 그의 두뇌가 다시 회전하

고 있었다. 그는 앞뒤 가리지 않고 뛰어든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했다. 한 명쯤은 살

려서 그들의 정체와 여기 온 목적을 캐낸 후 죽였어야 하는 건데...

던스탄은 목덜미를 문질렀다. 아버지의 무릎에서 전쟁의 가장 기본을 배우던 시절에

도 이토록 성급하게 행동하진 않았다. 그는 말없는 시체들을 바라보았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던스탄은  그곳을 떠나려 하다가 갑자기 뭔가가 떠오르는 바람에 몸을 돌

려 발 아래 나뒹구는 시체를 유심히 관찰했다.

남자들의 옷차림은 남루한데도 칼을 지니고 있었다. 이건 매우 드문 경우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몸을 굽혀 시체를 뒤졌으나 동전 몇 개가 든 지갑을 제외하고

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이 사내가 도둑이라면, 아직 누군가를 털기 직전임에 틀

림없다. 던스탄은 실눈을 떴다.

"도... 도대체 뭘 하시는 거예요?" 굴뚝새의 떨리는 목소리에 그는 고개를 돌렸다.

"아무것도 아니오. 걸을 순 있소?"

그녀의 아름다운 눈에는 혼란이 가득했다. 그는 다시 스스로에게 욕을 하고 싶었다.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진 않았지만, 그녀를 달래느라 이미 많은 시간을 소모

했다. 공기중에 떠도는 위험의 향기는 점점 더 진해져 갔다.

"걸을 수 있소?" 그가 채차 묻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손을 내밀어 그녀가

일어서는 것을 도왔다. "그럼 갑시다. 빨리 떠나야 하오."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작

은 모닥불은 그냥 타게 내버려 두기로 했다. 공연히 불을 꺼 무법자들의 주의를 끌고

싶진 않았다.

"저들은... 어쩌죠?" 그녀는 자신의 몸을 두 팔로 안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대로 내버려 두라지." 던스탄은 나무 아래로 가 그 아래 난 두사람 이상의 발자

국을 보았다. 그는 욕을 흘렸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아까 그 샛길로 돌아갈

수는 없다. 어딘가 밤을 지샐 곳을 찾아야 한다. 다른 일행들은 어딘가에 간 모양이

다. 야밤에 숲속을 돌아다니는 자들 치고 착한 이는 없다.

"던스탄." 그녀가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그가 돌아다보자, 그녀는 그에게서 위안

을 구하듯 그의 손을 잡았다. 그는 어색하게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그러고는 한 손

으론 그녀를 이끌며, 다른 손으로는 칼을 쥐고 그 자리를 떠났다.

일단 나무 사이로 들어가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그는 앞을 향해 걸어나갔다. 마

침내 커다란 참나무 몇 그루 아래 도착한 그는 조용히 나무들을 올려다 보았다. 가지

가 두 개로 갈라진 참나무 아래로 걸아간 뒤 말했다. "오늘 밤 여기서 자야할 것 같

소."

마리온의 손이 그의 손 안에서 꿈틀했다. "캠프로 돌아갈순 없나요?"

"안 되오. 다른 이들이 어딘가에 있소. 그들이 무엇을 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아까

그 두 남자를 보건대 여자를 습격하는 자들이오."

그녀는 그의 손을 꽉 쥐었다. 이젠 대답하듯 그녀의 손을 다시 쥐는 게 어색하지 않

았다. "나무 위에서 잘 자는 것 같으니까, 이곳 정도면 괜찮을 거요." 그가 씁쓸하게

말했다.

"하지만... 하지만." 마리온이 더듬거리자 던스탄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그녀

의 허리를 잡고 그녀를 들어올려 나무 위로 올라갈 수 있게 도왔다. 그가 나무 위로

기어올라가 그녀 곁에 앉았을 때도 그녀는 나뭇가지에 몸을 기댄 채 가쁜 숨을 쉬고

있었다.

"하지만 어쨌다는 거요?" 비록 그녀가 처음 도망치려 했을 때 나무 위에 숨어 있었

다고는 하지만, 나뭇가지 위에서 자야한다는 사실을 좋아할 리는 없다.

"하지만... 내가 설마 이 위에서 잘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으시겠죠?"

"못할 이유는 없잖소?" 비록 한쪽 귀로는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나 감시하고 있지만

그는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굴뚝새는 이제 아까의 충격에서 헤어난 듯했다. 저

번에 나무위에서 잠들었다는 말이 거짓말이라고 그녀가 순순히 털어놓는 순간이 기다

려졌다. 그러고 나면 다른 진실도 들을 수 있을테지. 그는 그녀의 고백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가 막상 입을 열었을 때는 그것은 나무에 대한 변명이 아니었다.

"글쎄요, 이 위에 당신과 단둘이 있어야 한다는 건 옳지 않은 것 같아서요."

던스탄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 껄껄 웃었다. "날 웃기지 말아요. 우린 조용히 있어야

하오. 이제 그만 쉬려고 노력해 봐요."

야밤에 숲으로 도망치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여자가 나와 함께 밤을 보내

야 하는 걸 겁내다니. 달빛이 나뭇잎 사이로 흘러들어 마리온의 얼굴을 비추었다. 짧

은 순간 동안 던스탄은 그녀가 자신의 입술을 핥는 것을 보았다.

그 순간 그의 미소가 사그라들었다. 마리온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녀는

지금 굉장한 위험에 빠져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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