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월의 신부-5화 (6/20)

5

던스탄이 다가가자 세드릭은 얼굴을 붉히며 말을 더듬었다. "아가씨가... 잠시... 일

을... 보셔야 한다고. 하지만 시간이 꽤 지났습니다, 주인님. 제가..."

소년을 동정할 분위기가 아니라는 걸 파악한 던스탄은 그를 노려보며 잘라 말했다.

"그럼 나와 함께 아가씨 찾는 것을 도와라!"

이번만큼은 별로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다. 오후 내내 그녀를 찾느라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분노가 치밀었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전쟁중에 부하들

을 꾸짖은 적은 거의 없었는데, 마리온이 달아났다는 말에는 속이 뒤집혀 버린 것이다

던스탄은 나무 위를 올려다보며 그녀의 흔적을 찾으려 노력했지만, 똑같은 속임수를

쓸 것 같진 않았다. 그는 그녀의 입장에서 주위를 살폈다.

이번에도 저번처럼, 숲속으로 뛰어 들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뒤돌아와서 수레를 빙

돌아 도망갔을까. 지금쯤 이미 길 반대편에 가 있는 게 아닐까. 아니다. 그의 부하들

이 그녀의 기척을 느끼지 못했을 리는 만무했다. 캠프 주위에 병사를 배치해 두었는데

그녀가 그 사이를 뚫고 나갈 수 있다면 정말 마녀이리라.

전쟁에서 갈고 닦은 빠른 판단력으로 그는 숲 안쪽으로 들어갔다. 앞의 어딘가에 그

녀가 있으 테지만 잔꾀를 부려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중간에 다른 방향으로 꺾지만 않았다면 그가 보폭이 크니 압도적으로 유리하

다. 잔나무 가지들이 부러져 있는 모양을 보며 그는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의 뒤를 바

짝 쫓고 있는 것이다. 곧 따라잡을 수 있으리라.

그는 묘한 승리감이 끓어오르는 데 놀랐다. 마치 책략을 써서 전쟁에서 이긴 기분이

라고나 할까. 하지만 그것과는 조금 다른 기분이었다.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승리감에

아찔할 정도의 기쁨을 더해 주었다. 심장 박동이 기이하게 뛰는 것을 무시하고, 던스

탄은 땅바닥을 보며 계속해서 뛰어갔다. 갑자기 바위산이 나타나 길을 가로막았다. 오

른쪽이냐 왼쪽이냐 선택을 해야 했다.

세드릭이 뒤에서 헉헉거리며 그를 쫓아왔다. 던스탄은 두 방향을 살피다가 어느쪽으

로도 가지 않고 오히려 오히려 앞으로 천천히 걸어나갔다. 바위에 가까이 다가갔다.

던스탄은 거의 확신하며 교활하게 웃고는 산등성이를 올려다보았다.

"동굴이야. 여기 어딘가에 분명히 동굴이 있을 거야." 그가 중얼거렸다.

"동굴이라구요?"

"그래, 동굴이 많을 거야." 그리고 그녀는 동굴에 숨어 있겠지. 자신이 따라온 속도

로 보아 그녀가 다른 술책을 부릴 시간은 없었을 것이다. 위를 쭉 올려다보니 덤불 한

곳이 이리저리 상해 있는 게 보였다. 그 덤불 뒤에는 끝없이 깊은 구멍이 나 있었다.

"저기로군." 그는 멍청하게 서 있는 세드릭에게 말했다. "분명히 저기 있을 거야."

그는 그곳으로 다가가 어둠 속을 들여다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멍청한 여

자. 불도 없이 저런 어둠 속으로 기어 들어가다니. 동굴은 위험한 곳이다. 아무런 경

고없이 낭떠러지가 앞에서 기다릴 수도 있고, 독사나 맹수가 숨어 있을 수도 있다. 던

스탄은 조그만 굴뚝새가 부러진 다리를 안고 차가운 돌바닥에 쓰러져 있는 모습을 머

리 속에서 지웠다.

"내게 횃불을 만들어 다오." 던스탄의 명령에 세드릭은 급히 잡목 한 묶음을 만들었

고, 던스탄이 동굴 안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허리에 차고 있던 부싯돌을 꺼내어 불을

붙여 주었다.

"워렌 양?" 던스탄이 소리를 쳤다. 침묵만 흘렀다. 그는 얼굴을 찌푸리며 시종에게서

횃불을 받아들고 덤불을 헤치며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기다려라." 그는 어깨 너머로 세드릭에게 말했다.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월

터를 불러라. 날 따라올 생각은 하지 말고." 횃불로 바닥을 비춰 보니 바닥은 튼튼한

것 같았다.

"워렌 양, 내가 지금 찾으러 가오." 안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그는 초조하게 걸

어가며 그녀를 찾으면 흠씬 때려 주리라 결심했다.

"던스탄! 거기..." 그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씩 웃었다. 앞으로 나아가려는데 위

에서 튀어나온 돌기둥에 이마를 부딪히고 말았다. "머리를 조심하시라구요."

던스탄은 잠시 비틀거렸다. 통증과 함께 분노가 일었다. 그녀를 죽여 버리고 말 테다

. 그래, 그녀를 죽여 버릴 테다. 그는 팔로 동굴 벽을 짚으며 화를 삭이려고 애썼다.

평생 여자에게 손을 들어 본 적도 없고,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든 적도 없었다. 하지만

워렌은 정말 다른 종류의 여자 였다. "이리로 나와요." 그가 이를 갈며 말했다.

"미안해요, 던스탄. 난 그럴 수 없어요." 그녀의 음악 같은 목소리가 동굴 안에 울려

퍼졌다.

그는 속으로 열까지 세었다. 집에서 말썽꾸러기 동생들과 살던 어린 시절 이후론 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왜 못 나오지?" 그가 으르렁거렸다.

"발목을 접질려서 걸을 수가 없어요. 기어가야 할 것 같아요." 그녀는 정말 괴롭기라

도 한 듯 말꼬리를 흐렸다. 그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화를 꾹 눌러 참았다.

그는 툴툴대며 앞으로 앞으로 한 걸음 내뱉고 몸을 굽혔다. 동굴 바닥이 약간 기울어

져 돌아간 곳에 그녀가 앉아 있었다. 입구에서 몇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지만

구석에 있어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벽에 기대앉아 창백하고 걱정스런 얼굴

을 하고 있었다. 던스탄은 일순간 노여움이 사라졌다.

잠시 그녀에게 횃불을 건네 줄까도 생각했지만, 그랬다간 그의 머리를 홀랑 태워 버

릴 것이다. 물론 실수겠지만. 던스탄은 마지막으로 횃불을 마지막으로 한 번 바라본

후, 벽에 기대 세워 놓고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그녀는 상처 입은 새처럼 가볍고 따

뜻했다.

그녀의 심장은 세차게 고동치고 있었다. 태도와는 달리 그녀 자신도 놀라고 당황한

게 틀림없었다. 갑자기 던스탄은 마음속에 무언가가 피어오르기 시작했지만 무시해 버

렸다. 그는 몸을 낮게 구부려 그녀를 안고 입구로 향했다.

마침내 던스탄은 덤불을 헤치고 밖으로 나왔다.

시중 드는 소년에겐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그는 안고 있던 여자를 더욱 세게 끌

어안으며 빨려들 것 같은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매우 침착해 보였다.

약간 먼지가 묻긴 했지만 아직 그의 시선을 맞받아 칠 여유는 있어 보였다.

그가 무모하게 달아난 것에 대해 꾸중하기도 전에 그녀의 시선이 그의 이마에 가 닿

았다. "당신 다쳤잖아요!" 이마를 어루만지는 그녀의 손가락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부

드러웠다. 던스탄은 아무 생각 없이 그녀의 손길에 머리를 맡겼다. 그녀의 얼굴이 바

로 눈앞에 있었다. 그녀의 눈은 그의 이마에 고정되어 있었고, 그녀의 입술은 살짝 벌

어져 있었다. 던스탄은 상처와는 상관없는 고통을 느꼈다.

그는 그녀 뺨의 곡선과 그녀의 창백한 피부가 연한 장미빛으로 물드는 것을 지켜보았

다. 그녀가 자신의 망토 자락으로 그의 이마에 흐르는 피를 찍어내기 시작했을 때야

비로소 자신이 넋을 놓고 그녀를 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긁힌 것뿐이오."

"아니에요. 내가 닦게 내버려 두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그가 어릴 때 키우던 새끼

고양이의 간지러운 소리와 닮아 있었다. 던스탄은 그 목소리에 끌렸다. 그녀의 망토의

후드가 벗겨지며 완벽한 하트 형 얼굴을 감싸고 있는 풍성한 검은 머리가 드러났다.

그녀는 아름답지 않아, 그는 자신에게 속삭였다.

아냐, 아름답지 않아? 그녀는 독한 와인처럼 사람을 취하게 했다. 달콤함과 쌉쌀함과

아찔함이 한데 섞여 있는 그녀. 그는 그녀를 끌어당겨 굴곡 있는 작은 몸의 감촉을

즐겼다. 그녀가 짧게 숨을 들이마시는 게 보였다. 그녀의 시선이 그의 눈동자를 향했

다. 걱정스러움은 놀라움으로 바뀌었으며, 뭔가 표정이 어둡고 유혹적으로 변해 갔다.

그가 그녀의 엉덩이를 끌어당기자 그녀의 시선이 그의 입술을 향했다. 이런, 하나님!

세드릭이 무슨 소리를 내는 바람에 던스탄은 백일몽에서 깨어났다. 그는 그녀가 마치

가시나무라도 되듯 얼른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녀가 정말 무슨 주문 같은 것을 내게

건 모양이다!

"먼저 가거라, 세드릭." 그가 소년에게 명령했다. 소년은 날카로운 던스탄의 목소리

에 겁먹은 듯 부지런히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제 세계에서 가장 말썽쟁이 여자와 결판

을 내릴 시간이다.

수많은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워렌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커다란 눈으로, 자신 역시 어리벙벙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던스탄은 신음했다.

"말하지 말아요, 내가 알아맞혀 볼테니." 그가 엉덩이에 손을 얹고 말했다. "당신을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가게 했던 지난번 그 멧돼지가 쫓아와 이 동굴로 숨은 것이겠지요

."

그녀는 얼굴을 찌푸렸다. "어리석은 소리하지 마세요, 던스탄. 날 내 의지에 어긋나

게 이리로 끌고 와 동굴 속으로 던져 넣은 건 인간이었어요." 그를 똑바로 쏘아보는

그녀의 눈동자엔 양심의 가책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날 이 동굴 안에 던져 넣고는

소리를 지르면 죽여 버리겠다고 위협했어요."

던스탄은 오랫동안 그녀를 노려보다가 결국 고개를 젖히고 목청껏 웃어젖혔다. "내게

농담하지 마시오." 그가 이마께에 손을 가져다 대며 얼굴을 찌푸렸다.

"당신 다쳤군요." 그녀가 일어서며 말했다.

"괜찮소. 자, 그 남자의 인상 착의를 말해 보시오."

"누구요?" 그녀가 순진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던스탄은 입술을 비틀었다. "당신을 납치했다는 그 남자 말이오. 설명해 보시오."

"그 남자는 키가 작고 까맸어요." 그녀는 주저없이 말했다. "아마도 삼촌의 부하 중

한 명일지도 몰라요. 무슨 수작을 꾸미는 게 분명해요."

"농담 집어치워요! 당신 후견인이 당신을 위협하고 있다고 믿게 하려면 증거를 대야

하오,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는 집어치우고."

"그게 말이 안 된다구요! 내가 기억해 보려고 노력을 하지 않은 줄 아세요, 던스탄?"

그녀가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을 찌르며 물었다. " 나도 노력했다구요! 너무 열심히

노력한 나머지 공포에 휩싸일 정도라구요. 하지만 그게 전부에요, 공포뿐이라구요. 배

더슬리에서 날 기다리는 게 무엇인지 말할 수는 없지만, 당신네 드 부르그 가족이 대

해 준 것처럼 편안한 상속녀의 생활은 아니라구요!"

그녀는 가슴이 타오르고 있었다. 던스탄은 조그만 굴뚝새보다 생기에 넘치는 이 괴물

이 더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여전히 앞뒤가 맞지 않았다. 기껏해야 변덕

이거나 거짓말이리라. 하지만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던스탄은 그것까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말이 진실이라면, 그의 임무는 필요없기 때문이다.

"친애하는 워렌 양. 당신 얘기와 속임수는 이제 진력이 나오. 집까지 가는 내내 사슬

에 묶여서 가고 싶지 않으면 더 이상 어리석은 짓은 그만두고 내 시선 밖으로 나가지

말길 바라오."

그녀 안의 불꽃은 다 타버린 듯 그녀는 뒷걸음질쳤다. 던스탄은 그녀를 위아래로 훑

어보다가, 갑자기 무언가가 떠올랐다. 그녀의 날렵한 걸음걸이에 다시 화가 치밀었다.

"당신 발목은 멀쩡하잖소!" 그가 얼떨결에 손을 쳐들자 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버렸

다.

주눅든 그녀의 모습이 그의 가슴을 저미는 것 같았다. 더이상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

는 듯 굳어 버린 그녀의 모습. 그녀는 그가 치켜든 팔로 자신을 때리려 한다고 생각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는 욕설을 내뱉으며 손을 내렸다. 여자는 절때 때리지 않는다!

"난 여태껏 한 번도 여자를 때려 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마음은 없소. 당신이

아무리 내 신경을 긁어 놓는다 해도."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커다란 갈색 눈은 공허했다. 던스탄은 다시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말도 안되는 상실의 고통이 느껴졌다. "이리로 오시오! 서둘러

야 하오. 당신 때문에 몹시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있소."

그제야 그녀는 우아한 움직임으로 앞장을 서기 시작했다. 던스탄은 그녀를 바라보았

다. 숲속에서 그를 헤매이게 만든 거짓말쟁이 마녀는 신나게 얻어맞아 마땅하다. 하지

만 도리어 내가 얻어맞은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일까.

그는 투덜거렸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눈앞에서 살랑이는 그녀의 엉덩이를 보자 입에

침이 고였다. 여자를 가까이한 지가 너무 오래 되어서 이런 거야. 이 임무만 끝내면

곧 해결할 수 있어. 던스탄은 엉덩이를 보지 않으려고 그녀의 옆으로 가서 나란히 걷

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가 그를 보고 다리를 헛딛는 바람에, 그는 그녀의 허리에 팔

을 감아 그녀를 부축했다. 그녀가 당황한 듯 커다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자 그는 다시

뒤로 물러서 그녀 뒤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캠프장은 몇십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굴뚝새는 과연 새처럼 종종

걸음을 걷고 있었다. 그런 휘청거리는 다리로는 빨리 걸을 수 없으리라. 그녀의 걸음

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모양새 좋은 발목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그 순간 그녀가 걸어

가며 밀친 나뭇가지가 그의 얼굴을 정통으로 후려쳤다.

던스탄이 천둥 같은 고함 소리를 내자 마리온은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던스탄!"

그녀는 목에 손을 대고 그에게서 주춤주춤 물러섰다. "왜 그래요? 오! 내가 그랬나요?

죄송해요."

그녀가 웃음이라도 터뜨렸다면 아마 그녀의 목을 졸라 죽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웃지 않았다. 그녀는 걱정 가득찬 눈으로 그에게 달려왔다. 던스탄은 일순 그 자리에

고정되어 버렸다. 전에 누군가가 한 번이라도 그런 눈으로 날 바라봐 준 적이 있었던

가.

캠프 쪽의 소란스런 움직임에 그는 그녀의 마법에서 깨어 났다. 그는 투덜거리며 그

녀의 팔을 잡고 소리나는 쪽으로 다가갔다. 걱정스런 얼굴의 세드릭과 실실 웃는 월터

가 나타났다.

"주인님, 비명 소리를 들었습니다. 혹시나 주인님이 누군가에게 당하신 게 아닌가 해

서요." 세드릭이 초조하게 말했다.

"당하긴 당했지." 던스탄은 굴뚝새를 잡은 손을 잡아채며 캠프 쪽으로 다가갔다.

"그녀를 동굴에서 찾았다구?" 월터가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던스탄은 한 마디만 더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표정으로 월터를 바라보았으나, 명령

을 밥먹듯 어기는 월터는 계속 킥킥거렸다. "얼굴은 왜 그런가? 그녀가 자네를 공격하

기라도 했나?"

던스탄은 짜증 섞인 소리를 냈고, 마리온은 숨을 들이마셨다. "당신 얼굴, 던스탄!

내가 돌보게 해주세요!" 그녀는 그의 발걸음에 맞추느라 거의 뜀박질을 하며 중얼거렸

다.

"조금 긁힌 것뿐이오." 마침내 캠프에 도착했다. 이제 말다툼도 끝이다.

"그래도." 그들이 멈춰 서자 그녀는 그의 피맺힌 이마를 걱정스런 표정으로 바라보았

다. "하지만 긁힌 상처도 곪을 때가 있는걸요. 생각해 보세요, 던스탄. 상처가 썩어

들어가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요? 뇌가 부을지도 몰라요. 그렇게 되면 당신의 불쌍한

동생들이 바보가 된 당신을 돌봐야 할 거라구요. 그런 일이 일어나길 바라진 않으시겠

죠?"

굴뚝새가 겁도 없이 날 가지고 놀아? 던스탄이 그녀를 노려보았지만 그녀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커다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하트 모양 얼굴에선 순진함이 뚝

뚝 묻어 나왔다. 마음 한구석의 무언가가 걷잡을 수 없이 달음박질치고 있었다. 머리

에 작은 상처 하나 입은 것으로 내가 미치게 될 줄은 몰랐는걸. 하지만 마리온 워렌이

라면 남자를 미치기 일보 직전으로 몰고 갈 수 있겠지.

"말에 오르시오." 그는 이를 악물고 말하고는 최대한 빨리 그녀에게거 떨어졌다.

월터가 곧 그의 곁에 다가왔다. "조금 무례하지 않은가. 자네답지 않네, 던스탄!"

"저 여자는 악마야." 던스탄이 쑤시는 머리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월터가 껄껄 웃었다. "왜, 그녀가 자네 상처를 봐주겠다고 해서? 나라면 그런 악마는

환영일세."

던스탄은 코웃음을 치며 경고의 시선을 보냈다. "그럼 자네가 그녀를 감시하지 그러

나."

월터가 미소지으며 어깻짓을 했다. "나는 상관없네."

던스탄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부하가 마리온에게 아양을 떠는 꼴은 상상도 하기

싫었다. 월터는 오랜 세월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낸 그의 오른팔이었다. 그는 훌륭한 군

인이었고, 좋은 친구였다. 하지만 굴뚝새의 재산은 웬만한 사람의 머리를 돌게 만들

정도로 어마어마하다. 특히 땅을 소유하지 못한 기사 하나쯤은. 던스탄은 머리 속으로

월터가 그녀를 유혹하고, 그녀의 삼촌에게 자신이 그녀의 아이 아버지라고 주장하는

모습을 그렸다.

"안돼." 던스탄이 마침내 말했다. "우리 모두가 아버지의 심부름꾼 노릇을 할 순 없

지. 내 가장 훌륭한 부하에게 그녀의 유모 노릇을 시킬 순 없네. 세드릭이 알아서 하

라고 하지."

소년이 그의 옆에서 더듬거리며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만 해." 던스탄이 그

의 말을 잘랐다. "한 번 더 기회를 주겠다, 세드릭. 이번엔 날 실망시키지 말아라. 항

상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말아라. 저번처럼 용변을 보겠다고 하면 적어도 그녀의 한

부분응 보이는 곳에서 감시해라. 행여나 나무 작대기에 씌워 놓은 그녀의 망토만 지키

는 일은 하지 말고. 그녀의 머리 끝과 머리카락을 항상 보고 있어라. 그녀는 매우 영

리하니까."

세드릭은 경외로 가득 찬 표정을 지으며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확실히 소년은 여자

에게 영리하다는 단어를 쓰는 것을 들은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던스탄 자신도 여자에

게 똑똑하다는 말을 써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굴뚝새는 매우 특이한 여자였

다. "신의 가호가 있길 빈다."

"예, 주인님." 세드릭은 얼른 그녀 곁으로 뛰어갔다.

던스탄은 자신의 말이 서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녀에게 속아넘어간 것은 세드릭의

잘못이 아니다. 그녀는 그들 모두를 속였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더 이상 바보가

될 순 없다. 던스탄은 자신도 그녀를 감시하기로 결심했다. 또다시 그녀가 달아나거나

꾀를 써서 자신의 부하들을 다치게 하진 못하게 하리라 결심했다.

그녀의 말대로 그녀의 삼촌이 행여라도 공격해 올 때를 대비해 밤에는 경비를 배로

늘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녀의 말은 말도 안 되는 헛소리지만, 조심해서 손해

볼 것은 없으니까.

던스탄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가 맡긴 임무는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해져

간다.

"또다시 돌아왔구랴." 마리온이 말에 오르는데 아그네스가 킥킥댔다. "이번엔 그 늑

대가 무슨 짓을 하던가요?"

던스탄과 있었던 일은 30분이나 지났는데도, 아그네스의 짓궂은 말을 듣자 다시 기억

이 몰려와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던스탄이 그의 팔에 그녀를 안았던 순간이며 그

녀가 느낀 그의 힘과 따스함. 그의 눈이 어둡게 변하는 게 보일 정도로 가까웠던 그의

얼굴. 그때 그는 그 뜨거운 시선으로 그녀를 먹어 치우려는 듯 보였다. 그는 그녀의

입술을 굶주린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와 가까이 있는 게 참을 수 없

다는 둣 얼른 그녀를 땅에 떨어뜨리다시피 했다.

마리온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했다. 그가 키스하려는 듯 보였던 것은 그녀의 착각

이리라. 웨섹스의 늑대라 그녀에게 관심을 나타낼 리가 없지 않은가? 커다랗고 잘생긴

맹수는 아마 여자를 보는 눈도 까다로울 것이다.

아그네스는 그녀의 생각을 읽은 듯 그녀 뒤에서 킬킬댔다. "아가씬 그분의 주의를 끌

기 시작했다도. 그건 확실하지." 그녀가 이빠진 잇몸을 헤벌쭉 드러내며 웃었다. "아

가씬 그분께 퍼즐과도 같겠지. 아가씨 같은 사람은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을 테니까

. 그 때문에 그분은 다른 누구보다 아가씨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을 거요. 내 확신하리

다."

아그네스는 자신의 말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오. 아가씬 그의 마음속

을 자꾸 파고들고 있다오. 문제는 그분이 어떤 반응을 보이실 건가 하는 것이지." 아

그네스는 고개를 젖히고 크게 웃었다.

마리온은 아그네스의 말을 무시하려 했다. 노파의 말을 반쯤 흘려듣고 있었지만, 자

신이 늑대의 마음속을 파고들었을때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지는 생각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아직 그녀를 상처 입힌 적은 없지만, 그의 인내심이 바닥이나고 있다는 석은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이성을 잃고 화내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는 무법자처럼 그녀에게 겁을 주었다. 언제나 야수처럼 그녀에게 소리를 지르고 으

르렁댔다. 한 번은 그가 자신을 릴 거라 생각한 적까지 있었다. 하지만 던스탄이 아

무리 결점 많은 인간이라 할지라도 그런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캠피온이 아들을 그

런 폭력적인 사내로 길렀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마리온은 걱정이 되었다. 그가 그의 주먹을 치켜들었을 때, 그녀는 무슨 짓을

해서라도 자신을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리온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알고

싶지도 않았지만, 베일에 싸인 과거에 대답이 들어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언뜻 스쳤

을 뿐이다.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화가 치솟는 건 참을 수 없었다. 던스탄은 삼촌에 대한 그녀의

말을 끝까지 들어 주지도 않았다. 배더슬리에 관한 그녀의 말은 한 마디도 믿지 않겠

다고 했다. 그의 반응도 새삼 놀라울 것은 없다. 그는 그녀를 마치 의지나 희망, 꿈,

생각, 삶이라곤 없는 어린아이처럼 다루었으니까.

그렇지만 그에게 보여 주고 말 테다! 그녀 안의 자그마한 불꽃은 던스탄의 조롱을 받

으며 날로 그 크기를 더해 갔다. 두번이다 웨섹스의 늑대를 거의 속여넘겼다. 오늘 그

는 마치 짐승처럼 그녀의 냄새를 쫓아왔다. 하지만 다음 번엔 달아난 길을 좀더 잘 은

폐할 것이다. 세 번째는 원래 행운이 좋다고들 하니까 이번엔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그녀를 구해 줄 수 없다면 그녀 스스로 자신을 구할 수 밖에 없다. 거만한 던스

탄 드 부르그가 어떻게 생각하든 마리온은 자신의 인생이 위험에 빠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처럼 죽음의 길로 끌려가고 싶지 않았다.

탈출 계획을 다시 새롭게 짜고 늑대를 남겨 두고 가야 한다.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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