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던스탄은 기분이 나빴다. 그가 캠피온에 온 이유는... 글쎄, 그는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가 무엇인지 잘 알수 없었지만 적어도 이런 말도 안 되는 심부름을 떠맡기 위해서
는 아니었다. 특히 웨섹스에 할일이 태산같이 쌓여 있는 지금 같은 시기엔. 그는 옆의
여자는 쳐다보지도 않고 정원을 가로질러 갔다.
그녀가 짐을 싸는 동안, 그는 서둘러 몸을 씻고 먼지투성이의 옷을 갈아입은 뒤, 음
식을 허겁지겁 먹었다. 그는 자신이 데리고 온 부하들 외에 아버지가 딸려 보낸 부하
몇 명을 바라보았다. 해가 지기 전까지 그리 멀리 갈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목적지까
지의 거리는 조금씩 좁힐 수 있으리라. 목적지에 가까이 갈수록 그의 임무가 끝나는
시간도 앞당길 수 있다.
"던스탄!" 그가 돌아보았다. 에드워드 왕을 모시기 시작한 이래 죽 그와 함께 해온퉁
퉁한 금발의 기사 월터 에이브리가 정원을 가로질러 왔다. 휴식을 취하다가 헐레벌떡
뛰어나와야만 하는 것이 못마땅한 듯했다.
"여기서 기다리시오." 던스탄이 그녀에게 말하고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그에게 다
가갔다.
"무슨 일인가? 피츠휴가 무슨 일을 벌이기라도?"
"아냐. 아버지께서 날더러 손님 한 분을 집까지 모셔다 드리라는군." 그는 피츠휴라
는 이름에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월터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러겠다고 했단 말인가?"
던스탄은 등뒤의 성을 올려다보며 비로소 아버지의 부탁을 거절할 수도 있었다는 것
을 깨달았다. 한 번도 그런 생각은 하질 못했다. 장남으로서 그는 늘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불평없이 아버지의 말을 따랐다.
"오래 걸리진 않을걸세, 몇 주 정도면 끝날 거야." 월터가 그 말에 고개를 휘휘 저었
다. 그로서는 자신의 문제 때문에도 버거워하는 남작이 왜 캠피온의 부탁을 받아들였
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다섯 동생들도 그쯤은 할 수 있을 텐데.
던스탄 역시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여행을 하기 위해 인원이 충분한가 확인해 보게. 최대한 빨리 여행하고 싶어. 그리
고 이 여행이 안전하고 사고 없는 여행이 되길 바라네."
월터는 고개를 끄덕이고 사람들을 보기 위해 정원을 가로 질러 갔다. 던스탄은 그녀
에게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녀는 있으라고 한 장소에 없었다. 명령을 거역당하는
데 익숙지 않은 던스탄이 이를 악물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소년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그녀를 발견했지만, 화는 사그러 들지 않았다. 평생 동안
힘들게 일하며 싸움 기술을 익히고 책을 읽었더니, 이제 와서 여자 시중이나 들라구!
게다가 여자 하는 짓이라고는! 도대체 어떻게 가족들의 눈에 들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자신도 별로 여자를 좋아하지 않을뿐더러, 형제들도 생리적 욕구를만족
시킬 때 이외에는 여자를 찾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전쟁으로 단련된 드 부르그
가의 남자들이 이 조그만 여자 주위에 몰려들어, 비위를 맞추며 작별 인사를하는 꼴
을 보자 속이 다 뒤집힐 것 같았다.
그는 다가가 어린아이의 등을 두들리고 있는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심지어 예쁘
지도 않았다. 키도 작고 피부도 거무스름한 데다가 뚱뚱하기까지 했다. 갑자기 에드워
드 왕의 궁전에서 본 미망인 한 명이 떠올랐다. 그래, 멜리산드. 창백해 보일 정도로
흰 피부에 냉정한, 값비싼 보석으로 치장하고있는 그녀야말로 그의 취향이었다. 이런
발바리는 절대 아니었다. 그는 코웃음을 쳤다.
게다가 구부정하게 서 있어서 더욱 작아 보였다. 그는 그녀가 자신의 존재를 알아차
리길 기다리지도 않고 다짜고짜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 "가만히 서 있으라고 했잖소
!"
순간 그녀가 놀란 듯 커다란 밤색 눈이 더욱 커졌다. 정말 놀랄 만큼 커다란 눈이다.
사람의 눈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녀는 그를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그거 잘됐군,
던스탄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다음엔 고분고분 말을 듣겠지. "내가 명령하면 그 말을
따라 주길 바라오."
그녀는 마치 고개를 끄덕이려는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전 당신이 좀더 예의 바르게
행동하시길 바라요, 던스탄 드 부르그!" 작고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또렷하게 들렸다.
그는 그 말에 깜짝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누군가의 꾸중을 들은 것이 언제인지 기
억조차 나지 않았다. 아무도 감히 그에게 말대꾸 하지 않는다. 이 조그만 여자가, 이
조그만 굴뚝새가 나에게 훈계를 하려 들다니. 그는 어이없게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그는 그녀의 팔을 놓아 주었다.
"난 이 여행이 무사히 빨리 끝나길 바라오. 내 말을 명시하면 아무런 문제도 일어나
지 않을 거요. 자, 이제 나와 함께 가주십시오, 아가씨." 그는 이를 악물고 최대한 정
중하게 말했다. 그녀는 잠시 화난 표정으로 그를 쏘아보더니 곧 그의 곁에 서서 그를
따랐다.
던스탄은 화가 난 듯한 그녀의 표정을 본 것이 자신의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이 조그
만 굴뚝새는 형제들 대하듯 내게 대들 수 있을 거라 생각했겠지만, 결국 고분고분해졌
지 않는가. 유모 노릇을 할 마음도, 커다란 눈을 가진 하찮은 여자에게 다른 가족들처
럼 빠져들 마음도 없었다.
말에 올라탄 마리온은 고삐를 움켜지고 일행이 움직이길 기다렸다. 던스탄은 그녀를
말이 있는 곳까지 바래다 주고 곧 자신의 일을 하러 가버렸다. 다행이었다. 그와는 더
이상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처음에 품었던 호감은 무자비한 태도덕에 사라져 버렸다
. 그는 너무도 빨리 본성을 드러내고 만 것이다.
분노로 손이 떨렸다. 그녀는 자신의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캠피온 성에서는 한
번도 이런 피끓는 감정을 느껴 보지 못했다. 그런데 왠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녀
는 계속 던스탄 드 부르그에 대한 증오로 손이 떨리도록 내버려 두었다.
마음 한구석에선 던스탄 역시 그의 형제들과 별 다를 게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때 그들 역시 무례하고 예의를 몰랐다. 성하지 못한 다리 때문인지
아직까지도 레이놀드는 좀 어렵게 느껴지지만. 그래도 그녀는 그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던스탄은 아니다. 그녀의 팔을 그런 식으로 잡은 건 결코 용서할 수 없다. 무
지막지한 힘으로 그녀를 굴복시키려 하다니. 마리온은 고개를 들었다. 더 이상 그가
그런 태도를 보이도록 내버려 둘 수 없다. 그가 이 모든 불행을 끌고 왔다. 그녀가 사
랑하는 사람들을 그녀에게서 빼앗고, 알지도 못하는 집이란 곳으로 그녀를 데려가려
한다. 가고 싶지 않은 곳으로 그녀를 데려가려 한다.
배더슬리를 생각하기만 해도 몸이 굳었다. 캠피온에서 행복했기 때문에 그녀는 과거
를 되찾고 싶지 않았다. 기억하려고 할 때마다 머리가 심하게 아프고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두려운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던스탄의 날카로운 말이 다시 떠오르며 의지가 흔들렸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행렬 중간에서 묵묵히 말을 타고 가며 던스탄과의 충돌을 피하고, 여행을 방해하거나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도 않아야 한다. 그저 그가 어두운 미스터리에 싸여 있는 배더슬
리 성에 사는 삼촌이라는 그 후견인에게 자신을 넘겨 줄 때까지 조용히 따라가기만 하
면 된다.
그게 가장 현명한 짓이다. 마리온 워렌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수는 없지만, 아마도
운명을 순종하며 따라가는 여자였으리라.
하지만 이제 그녀는 다른 사람이다. 마음속에서 작은 불꽃이 일었다. 그녀는 그 작은
불꽃으로 늑대처럼 거친 드 부르그 가의 여섯 형제들을 길들였다.
그 작은 불꽃은 절대 던스탄의 협박에 굴복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었다. 또한 그의 손
에 이끌려 알 수 없는 과거로 되돌아가기를 거부하면서.
스스로에 대해 아는 것은 별로 없지만, 자신이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 아니라느 것
쯤은 느낄 수 있었다. 배더슬리에 대해 느끼는 것과 같은 두려움은 짧은 기억에서나마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온몸이 무시할 수 없는 경고를 하고 있었다.
거기엔 갈 수 없다.
그녀는 결정을 내렸다. 이제 문제는 어떻게 그의 눈을 피해 달아나느냐 하는 것이다.
결코 쉽지는 않을 것이다.
던스탄은 결코 기뻐하지 않을 것이다.
던스탄은 기뻤다. 첫날이 사고 없이 지나갔고, 길 옆에 안전하게 텐트도 쳤다. 그녀
를 거의 못 보았지만 갈색 머리가 서둘러 텐트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그녀
가 자신의 말을 고분고분 듣는다고 확신했다.
오늘 아침은 날씨도 쾌청했다. 커다란 참나무 아래 잠시 머물러 늦은 아침식사를 하
기로 결정했다. 이 여행은 전쟁을 위한 행군이 아니라 숙녀를 동반한 여행이다. 아무
리 숙녀가 숙녀답지 않더라도.
그는 빵과 치즈를 후다닥 먹어 치운 다음 물을 마시며 일행을 둘러보았다. 일행들도
그와 여행하는 데 익숙해져 있는 지라 곧 식사를 마쳤다. 꾸물거릴 틈이 없었다. 비록
여름이 다가오고 있긴 하지만 날씨가 계속 좋을 거라는 장담은 할 수 없었다. 오늘은
따뜻하지만 내일은 추울 수 있다. 안 그래도 나쁜 길이 비에 엉망이 될지도 모른다.
"짐을 싣게나." 그는 월터에게 말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부하들
이 짐을 싣고 말에 탔다. 모든 게 완벽한 듯했다. 그런데 계속 무언가 찜찜한 구석이
가시질 않았다.
"워렌 양은 어디 있지?" 그가 갑자기 물었다. 몇 명이 고개를 저었다. 던스탄은 일행
곁에서 그녀의 말을 찾을 수 있었다. 나이 든 시종의 말 곁에 그녀의 말은 주인 없이
서 있었다. "당신의 아가씨는 어디로 갔지?" 그가 물었다.
쪼글쪼글한 시녀가 이가 다 빠진 잇몸을 드러내며 웃었다. "모릅니다, 주인님. 아가
씨를 잃어버리셨나요?" 노파의 웃음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던스탄의 날카로운 시선에
그녀는 웃음을 멈추었다.
"월터, 수레를 점검해 보게나." 여자들이란! 워렌은 아마도 수레에서 무얼 찾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무지함 때문에 일행이 늦어지는 건 생각도 못하고. 그는 입을 꾹 다물
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지막으로 그녀를 보았을 때, 그 굴뚝새는 나무아래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뭔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기사 수업을 통해 그는 자신의 육감을 무시
해선 안 된다는 것을 배웠다.
"수레에는 없습니다." 월터가 대답했다.
심호흡을 하며 던스탄은 머리를 맑게 하려 노력했다. 산적이 그녀를 납치했을 가능성
도 없다. 맹수의 습격을 받았을 리도 더더욱.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그것은
그녀의 의지였을 것이다. 그는 신음하며 마지막으로 그녀를 보았던 참나무 아래로 갔
다.
"어쩌면 용변을 보러 숲속으로 들어갔다 길을 잃었을지도 모르지." 월터가 숲속을 둘
러보며 말했다. 그것도 가능하다. 그 조그만 굴뚝새는 멍청하게 생겨서 충분히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을 풀어서 그녀를 찾아야 한다. 전혀 바라던 바가
아니다.
그는 월터의 시선을 쫓아 숲 안쪽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사람이 걸어간 흔적은 없
었다. 그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땅을 살폈다. 풀이 누운 모양을 보건대, 나무 주위로
걸어간 것 같지도 않았다. 몸이 가벼워서 흔적이 남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워렌 양!" 던스탄이 외쳤지만 대답이 없었다. "워렌 양! 내 말 들리오? 다쳤소?" 역
시 침묵. 던스탄은 욕을 내뱉으며 부하들에게 주변을 찾아보라고 지시했다. 그녀는 이
여행을 하는 유일한 이유다. 그녀를 삼촌에게 데려다 줄 때까진 웨섹스로 돌아갈 수
없다.
던스탄은 말에 올라타 숲속으로 들어가면서, 그녀 때문에 시간이 지체된다는 사실은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멍청이 굴뚝새를 찾아 그녀의 작은 몸을 세게 흔들어 주고
싶은 생각도 잊으려 애썼다. 그는 화를 내지 않으려 무던히 노력했다.
한 시간 뒤, 던스탄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숲을 샅샅이 뒤졌는데도 워렌은 보
이지 않았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그는 이를 갈며 원래 수색을 시작한 곳까지
말을 몰았다.
처음부터 어리석은 여자를 집까지 바래다 준다는 게 내키지 않았는데. 그녀에게 속았
다는 생각을 하니 더더욱 기분이 상했다. 그녀가 자기 의지로 도망을 간 게 분명했다.
던스탄은 이 일을 너무 가볍게 생각한 자신을 나무랐다. 그녀가 삼촌에게 되돌아가기
를 원치 않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누가 그렇게 조그만 굴뚝새가 배더슬리로
돌아가느니 용감하게 거친 숲속으로 도망갈 것을 택하리라 생각했겠는가.
어쩌면 누가 도움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아냐, 그 말괄량이 혼자서 벌인 일이다. 평
소라면 그런 속임수를 쓴 것을 대단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오늘은 아니다. 소중한
시간이 일초일초 흘러가고 있다.
그는 아까 시작한 곳으로 되돌아왔다. 그는 몇가지 증거를 짜 맞춰 해답을 찾으려 노
력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길을 한 번 쏘아본 뒤 월터에게 소리쳤다. "어서 오게! 얼른
사람들을 모아 캠피온으로 돌아가야겠네! 아마 그리로 가는 중일지도 몰라." 부하들이
얼굴을 찌푸리며 방향을 돌렸다.
던스탄은 월터가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자네가 그녀 없이 되돌아가
면 자네 아버지께서 무슨 말을 하실 것 같나?> 라고 말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차마
그런 말은 하지 못했다. 던스탄은 무시하기로 했다. 그는 한 번도 자신이 맡은 임무에
실패한 적이 없었고, 이제 와서 실패할 마음도 없었다.
1㎞쯤 지나서, 던스탄은 부하들에게 다시 흩어져 그녀를 찾으라 명령하고 자신은 노
숙했던 장소로 되돌아갔다. 그곳에 가까워지자 던스탄은 말에서 내려 조심스레 걸어갔
다. 그는 레이디 워렌을 마지막으로 보았던 나무가 보이는 곳까지 다가갔다. 그러고는
한 참나무 뒤에 숨었다.
오래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곧 나뭇가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던스탄은 소리없이
그 나무로 다가갔다. 그는 나무 아래서 초록색 슬리퍼가 내려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짙은 색 타이즈를 신은 모양새 좋은 발목이 보이더니, 에메랄드 빛 스커트가 드러났다
. 던스탄은 보호 장갑을 벗고 손을 뻗어 그녀의 발목을 꽉 움켜쥐었다.
"으악!" 워렌은 잡힌 매처럼 소리를 지르고는 발을 헛디뎌 그의 품안으로 떨어졌다.
던스탄은 이토록 작은 사람이 그렇게 격렬하게 싸울 수 있으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 굴뚝새는 마치 독수리처럼 발버둥쳤다. 그는 자신의 몸으로 그녀
를 나무줄기에 간신히 세울 수 있었다. "멈추시오, 워렌 양." 그가 명령했다.
그녀의 커다란 눈동자가 그를 알아보고는 마침내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 순간 뭔가
어색한 기운이 흘렀다. 믿을 수 없이 커다란 그녀의 눈동자는 그가 처음 생각한 것과
같은 탁한 갈색이 아니었다. 마치 사슴의 눈처럼 따스하고 부드러운 눈동자가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길고 풍성한 속눈썹에 싸여 있었다. 그는 그녀의 눈동자에 사로잡혔고,
동시에 그녀의 몸을 의식하게 되었다.
그녀의 몸은 부드러웠고, 멋진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녀가 늘 쓰고 있던 두건이
벗겨져 풍성한 마호가니빛 머리카락이 그녀의 어깨 위에 물결치고 있었다. 그녀의 뺨
은 장밋빛으로 물들었고, 그녀의 도톰한 입술은 살포시 벌어졌다.
그는 덫에 걸린 야생 동물 같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뭔가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 들
었다.
던스탄은 부정하고 싶은 감정에 눈을 감았지만, 지울 수가 없었다. 그는 그녀를 원했
다. 그녀에 대한 욕구가 너무도 강렬했기에 그 자신조차 놀랄 정도였다. 머리에 피가
몰리는 것 같았다. 그는 천천히 그녀의 손목을 놓아 주고, 그녀의 엉덩이에서 부터 허
리까지 풍만한 곡선을 쓰다듬었다.
이럴 수가, 그녀를 만지고 싶어하다니! 그는 그녀의 감춰진 풍만한 가슴을 움켜쥐고
싶었다. 던스탄은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허리를 쓰다듬었다. 손이 바로 그녀의 가슴
아래까지 미끄러져 들어갔고 그는 몸을 떨었다.
그녀가 알 수 없는 소리를 냈다. 눈을 떠보니 그녀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그
녀는 의외로 그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놀래키지 않도록 왼손을 천천히 들
어올렸다. 그는 그 손으로 그녀의 목을 감싸고 그녀의 벌어진 입술에 자신의 입을 포
개고 싶었다.
그는 투덜거리며 그녀를 놓고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그녀는 미끄러지듯 그의 발 아
래 힘없이 주저앉았다. 그는 그녀를 쳐다보지 않고 휘파람을 불어 자신의 말을 불렀다
. 한 번도 상대의 의지를 거스르면서 여자를 안은 적이 없었다. 심지어 편안한 침대
밖에서 여자를 안은 적도 없었다. 도대체 무엇에 씌였길래 아버지가 부탁한 여자를 강
제로 안으려 했던 것일까.
던스탄은 혐오감에 얼굴을 찌푸렸다. 아마도 너무 오랫동안 여자를 멀리한 탓에 그토
록 뜨거운 반응을 보인 것이리라. 그것도 많고 많은 여자 중에 하필이면 굴뚝새에게!
그토록 날 고생시킨, 두들겨 패야 마땅한 그녀를 !
오랫동안 참았던 분노가 몰려와 마지막 남은 욕망을 삼켰다. 그녀는 왜 처음부터 달
아날 생각을 했을까. 이 모든 게 말도 안 된다. 그녀가 성공할 뻔했다는 것은 인정하
고 싶지 않았다. 그는 갑자기 그녀에게 퍼붓기 시작했다.
"도대체 나무 위에서 뭘 하고 있었던 거요?"
그녀는 먼지를 터는 것을 멈추고 그를 똑바로 보았다. 던스탄은 새삼 그녀가 이상하
리 만큼 품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에게 그런 꼴을 당하고 난 후에도 그녀는 신
경질도 내지 않고 침착하게 행동했다. 아직도 얼굴은 붉게 물들었지만 조금 전에 일어
난 기묘한 일에 대해서는 어떤 내색도 하지 않았다. "아까... 멧돼지를 보았거든요.
그래서 몸을 피하려고 나무 위로 기어올라갔어요."
던스탄은 입을 딱 벌리고 그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뒤로 젖히
고 껄껄 웃기 시작했다. 그녀는 조용히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마치 자신의 말이 진실
이라는 듯이.
"그럼 왜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그 짐승을 보지 못했는지 내게 설명해 줄 수 있겠소?
또 당신 같은 숙녀가 비명을 지르고 달아나기는 커녕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갔는지? 그
건 아주 숙녀답지 못한 일인데."
그녀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말해봐요." 그가 재촉했다.
"너무 무서워서 비명도 지르지 못했어요." 그녀가 주저없이 말했다. 너무 당당하게
말하는 통에 그녀의 말을 믿고 싶을정도였다.
"그럼 우리가 바로 이 나무 아래서 당신을 찾느라 시간을 허비하는 동안, 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소?"
"아마 공포 때문에 기절했었나 봐요." 그녀가 그의 눈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그렇군." 정말 두려움이라고는 모르는 여자였다. "그 위에서 계속 기절한 채로 있었
단 말이지, 우리 고함 소리에도 깨지 않고?"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한 거짓말쟁이군. 게다가 정말 순진한 표정을 짓고 있
었다. 동생들이 그토록 쉽게 넘어간 것도 무리는 아니지. 아마도 자기 이름조차 기억
나지 않는다는 거짓말을 믿게 했을 것이다. 도대체 그녀가 무슨 장난을 벌이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장난에 맞장구를 쳐주고 싶었지만 그녀에게 낭비할 시간도, 정
력도 없었다. "항상 겁을 먹으면 그렇게 기절하는 거요?"
"오, 그럼요. 던스탄. 던스탄이라고 불러도 되겠죠?"
그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머리 모양을 가
다듬는 데만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자신을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
고는 씩 웃으며 고함을 질러 부하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녀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던스탄이 말에 오른 후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목소리는 이제 확실하게 돌아온 것 같군요, 아가씨."
"그건 공평치 못해요, 던스탄." 그녀가 투덜거렸다.
그의 미소가 얼굴에 번졌다. "내게 거짓말하지 말아요, 아가씨. 그리고 다신 내게서
달아나지 마시오. 또 한 번 그런다면 후회하게 해주겠소."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아 자
신의 앞에 태웠다.
그녀가 몸을 꿈틀대자 다시 욕망이 불붙었다. 그는 투덜거리며 말을 몰았다.
아마도 그녀는 마녀일 거야. 내 동생들처럼 나도 홀리려는 거야. 그는 그녀가 동생들
앞에서 엉덩이를 흔들며 걸어다니는 모습을 상상했다.
갑자기 던스탄은 그녀가 아직 처녀일지 궁금해졌다. 이미 결혼할 나이도 지난 데다가
, 지난 겨울 내내 여섯 명의 건장한 남자들과 함께 있었다. 던스탄은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동생 모두와 잠을 잤든 말든 상관할 바가 아니다. 그녀를 그냥
배더슬리에 데려다 주기만 하면 끝이다.
이제 사고 없는 여행에 대한 그의 바람은 깨어져 버렸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리 평온
한 여행이 될 것 같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