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월의 신부-2화 (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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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피온은 자신에게 전달된 편지를 읽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춥고 기나긴 겨울이 가

고 이제 그가 몇 달 전에 보낸 전령에 대한 답이 드디어 온 것이다. 그는 차라리 전

령을 보내지 말 것을 후회가 들었다.

백작은 전령을 눈이 내리기도 전에 보낸 것을 후회했지만, 이제 와선 도리가 없었

다. 그는 사소하게 시작한 일이 걷잡을 수 없는 결과를 낳는 경우를 종종 보아왔다.

지난 가을, 기억을 잃은 아가씨에 대해 수소문해 보라고 사람을 보낸 일이 바로 그

런 경우다.

캠피온은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자신이 아들들을 훑어보았다. 아들 모두가 모인 것

을 보니 감개가 무량했다. 모두가 한자리에 모였던 것이 지난 여름이었던가, 아니면

지난 봄이었던가.

캠피온은 전령이 먼저 웨섹스(중세 잉글랜드 남부에 있었던 애슨 왕국)에 들러 던

스탄에게 메시지를 전달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큰아들은 오

지 않았을 테니까. 혹시 던스탄이 다른 이유 때문에 온 것은 아닐지 약간 걱정이 되

기도 했다. 캠피온 알 수가 없었다. 큰아들은 자신의 땅을 가진 뒤부터는 입도 무거

워지고 가족에게서 좀 멀어졌다.

아들도 이제 성인이니, 자기 일은 자기가 하리라 생각했지만 서운한 마음이 드는

건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두들 단점은 있지만 그래도 착하고, 점잖고, 교육도 잘 받

은 능력 있는 아이들이다. 다시 닥친 문제로 생각이 옮아 갔다. 그 중 한 아들에게

그가 옳다고 생각되는 일을 맡길 수 있길 바랐다.

"문제가 생긴 것 같다. 모두들 마리온 양이 도착한 후에 누군가 알아보는 사람이

있는지 사람을 시켜 그녀의 반지를 들려 보낸 것을 기억하리라 생각한다. 그 반지는

해럴드 피슬리란 사람이 자신의 조카 마리온 워렌의 것이라고 주장했다. 마리온은

남쪽에 막대한 토지를 소유한 여자로, 지난 가을 순례 여행을 떠난 이래로 실종되었

다고 한다. 피슬리는 그녀의 보호인으로서 그녀를 돌려보내 줄 것을 요구했다. 그것

도 당장."

캠피온은 아들들의 반응을 살폈다. 레이놀드의 얼굴은 딱딱했고, 다른 사람들은 분

노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다행이군. 아들들은 그녀가 떠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군. 자, 이제 그녀를 이곳에 잡아 둬야 한다고 설득하기만 하다면...

"하지만 마리온은 왜 그런 것을 기억 못하는 거죠? 길에서 그녀를 발견했을 때, 그

녀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어요. 아직까지도 자기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는

걸요."

캠피온은 턱을 쓰다듬었다. "그녀가 자신의 기억을 되찾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일지

도 모르지." 그가 천천히 말했다. "과거를 기억하려고 할 때마다 고통을 겪는 것 같

더구나. 난 그녀가 이곳에서 더 행복해 한다고 생각한다." 로빈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는 게 보였다. 다른 아들들은 한숨을 쉬거나 툴툴거리거나 웅성거렸다.

"그녀가 돌아가기 싫어하거든 돌려 보내지 마세요, 아버지." 스티븐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불행히도 우리는 좀 어정쩡한 상황에 처했단다." 캠피온이 말했다. "이 피슬리란

작자가 마리온을 당장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으면 군대를 데려오겠다고 협박을 했단

다."

로빈이 고개를 거세게 흔들었다.

"그 작자가 캠피온에 덤비는 걸 보고 싶군." 사이먼이 코웃음쳤다.

"도데체 그 인간은 누굽니까?" 레이놀득 물었다.

"그는 마리온 어머니의 남동생으로, 소지주란다. 하지만 전령에 따르면 그는 그녀

의 막대한 토지와 재산을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그 망나니, 와서 한번 당해 보라지. 누구에게 협박이야!" 사이먼이 주먹으로 손바

닥을 치며 외쳤다.

"그렇게 쉽지 않단다, 얘들아." 캠피온은 손을 들어 분노에 찬 아들을 저지하며 던

스탄을 바라보았다. 큰아들이 무슨 말을 해주지 않을까 기대해 봤지만, 던스탄은 그

저 벽에 기대어 무관심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아마도 그는 마리온의 운명이

어떻게 되든 관심 없을 것이다. 동생들의 걱정을 에너지 낭비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캠피온은 한숨을 내쉬었다.

"우린 그녀에 대해서는 법적인 권리가 없단다. 설령 그녀가 우리와 함께 있기를 원

한다 할지라도, 우린 그녀를 이곳에 잡아 둘 수가 없단 말이다." 아들들이 다시 화

난 목소리로 웅성거렸다. "피슬리는 마리온의 후견인이다. 우리는 그 사실을 바꿀

수 없다. 우리가 완벽하게 법적인 방버으로 그 권리를 얻지 않는 한."

캠피온은 혹시 누군가가 마리온을 돕겠다고 나서지 않을까 기대하며 방 안에 있는

아들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던스탄을 빼고는 모두들 아버지의 다음 말을 기대하고

있었다. 낮게 코웃음치는 큰아들은 무시하기로 했다. 그는 그녀에 대해 알지도 못하

고 있으니까. 아마 그의 동생들 중 하나가 던스탄이 그토록 혐오하는 결정을 내려야

할 것 같았다.

"어떻게요?" 니콜라스가 재촉했다.

"결혼이다." 캠피온은 심각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너희 중 누가 그녀를

아내로 맞겠느냐?"

그의 물음에 쥐죽은 듯한 고요가 흘렀다.

캠피온은 아들들을 다시 하나하나 훑어 보았다. 아무도 그와 시선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천생 용사인 사이먼은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고, 레이놀드는 툴툴거리며 당

혹감을 표시했다. 스티븐은 자신의 잔에 포도주를 따르는 데 정신이 없었다. 캠피온

은 얼굴을 구겼다.

로빈은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의 부츠 앞머리를 들여다 보고 있었고, 니콜라스는 허

리에 꽂은 단검을 만지작거렸다. 조프리는 언제나처럼 연민과 상식 사이에서 번민하

는 듯 했다.

"아무도 그녀를 원하지 않느냐?" 그의 목소리는 실망의 기색이 완연했다. 그 역시

그녀를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계획이 그녀를 이곳에 머무르게 할 수 있

길 바랐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내 아들들이 원래 다 이렇게 비 정상적이었

나? 아무도 결혼해서 아들을 낳지 않겠다는 거냐?"

그들은 하나같이 누을 내리깔고 대답을 하지 않았다. 오직 사이먼만이 은회색 눈으

로 쏘아볼 뿐. "그녀는 왜 여태 결혼도 하지 않았답니까? 나이도 꽉 찬 것 같은데."

"그녀의 삼촌이 그녀의 땅을 탐내리란 건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겠지. 그렇다면

그는 그녀가 결혼하기를 결코 원하지 않을 것이다. 전령도 그 비슷한 얘기를 하더구

나. 우리의 마리온이 자신의 성에 갇힌 죄수와 다를 바가 없었다더라." 캠피온은 의

무감과 애정이 먹혀들지 않는다면 혹시 죄책감에 아들들의 마음이 변할까 기대해 보

았다.

"그 사람은 그녀를 심하게 다루었군요." 니콜라스가 고개를 푹 숙인 채 말했다.

"항상 이곳이 얼마나 좋은지, 자신이 가족의 일원인 것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는데.

그녀는 제게 멋진 미소를 지어 보이며 우리가 자신을 받아 준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고 말했지요."

부끄러움에 시선이 교환되었지만 그래도 마리온과 결혼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

었다. 캠피온은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진작에 재혼을 했어야

했는데. 여자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아들들이 너무도 모르는 탓이라고

생각했다. 두 번째 아내가 니콜라스를 낳고 죽자, 그는 다시는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 결과 불행히도 아들들은 여자의 부드러운 손길을 느껴보지도 못하고 어른이 되

어 버렸다. 결국 그는 돈 주고 여자를 살 줄만 알았지, 손자를 안겨 줄 줄 모르는

아들을 줄줄이 거느린 아버지가 되어 버렸다.

마리온의 존재로 캠피온이 얼마나 바뀌었는지 느끼지도 못하는 걸까? 짧은 몇 달

동안 그녀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어 홀과 방을 환하게 했고, 음식을 맛있게 준

비했다. 캠피온은 그녀의 따스한 미소를 떠올리며 상실감을 느꼈다.

그럼 나라도 그녀와 결혼해야지. 캠피온은 곧 자신의 어리석음에 한숨을 내쉬었다.

비록 결혼 적령기는 지났지만 마리온은 자신의 상대로는 너무 어렸다. 그는 새로운

가정을 꾸미기엔 너무 나이들었다. 겨울이 되면 무릎이 쑤셨다. 아직 아들들에게 말

한 적은 없지만, 점점 예전처럼 칼을 휘두르는 것이 힘겨워졌다. 마리온을 좋아했으

므로, 그녀가 건장한 남자와 결혼하여 아들을 많이 낳을 수 있길 바랐다.

그는 지금 그녀와 결혼하길 거부하는 건장한 일곱 명의 남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캠피온은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했다. "그럼 좋다. 너희들 중 아무도 그녀를 아내

로 삼고 싶어하지 않으니, 그녀는 집에 가야겠구나. 누가 그녀를 배더슬리까지 바래

다 주겠느냐?"

또다시 쥐죽은 듯한 고요. 로빈은 계속 부츠 앞코에 흥미를 나타내고 있으며, 니콜

라스는 계속 단도를 만지작거렸고 스티븐은 빈 컵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레이놀드는

기분이 안 좋을 때면 언제나 그러듯 불편한 다리를 문질렀으며, 사이먼은 창 밖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그래서?" 캠피온의 목소리에는 분노의 기색이 역력했다. 레이놀드가 고개를 들었

다. "그녀는 조프리를 제일 좋아해요." 그가 형을 가리켰다.

조프리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아냐! 난 그럴 수 없어. 사이먼 형을 보내요."

"그래, 맞아. 형이 그녀를 가장 잘 보호할 수 있을 거야." 사이먼이 말했다.

"그만하거라." 캠피온이 화를 내는데도 그들은 게속 서로에게 무서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중얼거렸다. 아무도 그 일을 맡고 싶어하지 않았다. 캠피온은 자신의 자부심

이 사그러지는 걸 느꼈다. 이런 겁쟁이들 같으니라구! 막 아들들을 꾸짖으려는데 갑

자기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그들은 서로서로를 바라보며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갑자기 여섯 명의 머리가 아버지의 어깨 너머로 미묘한 눈길을 보내며 한 목소리로

합창했다.

"던스탄 형을 보내요!" 그들이 동시에 외쳤다.

"맞아! 던스탄 형은 나보다 더 강해!" 사이먼이 외쳤다. 그 말에 캠피온은 멈칫했

다. 평소의 사이먼이라면 그 사실을 인정하느니 죽음을 택할 것이기 때문이다.

"맞아. 형은 그녀를 모르기 때문에 그 일을 맡는다 해도 아무런 느낌이 없을 거야.

" 스티븐이 빈정댔다.

캠피온은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던스탄을 바라보았다. 큰아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언제부터 저애는 저렇게 초연한 표정을 짓게 되었을까. 그는 한숨을

쉬며 다시 손안에 놓인 문제를 떠올렸다. "던스탄 형은 여행에 능숙하지."

"맞아, 형은 우리 나라에 있는 길을 모두 다 알아." 니콜라스가 외쳤다.

캠피온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의 생각에도 던스탄이 이일에 가장 적격인 것 같

았다. 그는 뛰어난 기사이기 때문에 피슬리가 어떻게 나와도 잘 대처할 수 있을 것

이다. 또한 사이먼과는 달리 남작의 작위가 있으므로 누구도 그에게 함부로 대할 수

없다. 게다가 그녀를 잘 알지 못하므로 그녀를 삼촌에게 데려다 주는 것을 꺼릴 이

유도 없지 않은가.

캠피온은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던스탄이 승낙한다면 그렇게 해도 좋겠지."

"옳습니다, 아버지."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마침내 아들들의 의견이 통일된

것이다. 모두들 두려워하던 책임에서 벗어나 안심하는 듯했다. 캠피온은 그들이 일

어서서 방을 나가려는 것을 보고 실망스런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던스탄의 목소리

가 그들을 제지했다.

"남아 있어." 그의 목소리는 반대를 허락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듯했다. 평소에는

남의 말을 잘 안 듣는 그들도, 오늘만큼은 형에게 빚을 진 터라 그 자리에 멈춰섰다

"가서 그녀를 데려오고 작별 인사를 해라. 한 시간 내로 떠날 테니까."

캠피온은 던스탄을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제 막 도착했잖니. 또 다

른 여행을 시작하기 전에 좀 쉬는 게 좋지 않겠니?" 아들이 곧 떠난다는 말에 가슴

이 아팠다. 큰아들이 집에 돌아온게 1년 만인데 벌써 떠나려 하다니...

"이 일을 제게 맡기시려면, 전 좀 서둘러야겠습니다. 웨섹스로 돌아가 봐야 하거든

요." 던스탄은 썩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캠피온은 아들을 바라보며

아들의 생각을 읽으려 했지만, 차갑게 반짝이는 던스탄의 검은 눈동자에서는 아무것

도 읽을 수가 없었다. 캠피온은 아들이 자기의 성과 자기의 집을 더 좋아한다는 사

실에 서운함을 느꼈다.

"윌다를 시켜 마리온을 데려오너라." 캠피온은 방을 둘러보았다. 아들들은 이제 어

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아무도 마리온과 마주치고 싶어하지 않는 듯했다. 겁쟁이

들. 하지만 캠피온 자신조차 마리온과의 대면이 걱정되었기 때문에 아들들을 꾸짖을

수 만도 없었다.

도대체 그녀에게 떠나야 한다는 말을 어떻게 전하지.

캠피온의 부름에 마리온은 긴장했다. 기억이 없어진 이후로 처음 느껴 본 공포였다

.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그녀는 백작이 자신의 큰아들을 위한 파티를 준비하라는

말을 하려는 것이거나, 그를 자신에게 소개하기 위해 부르는 것일 거라고 자신을 타

일렀다. 기억을 잃은 이래 그녀는 자신의 육감에 모든 것을 의지했다. 그녀의 육감

은 지금 무엇인가가 크게 잘못 되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윌다를 따라가며 마리온은 진정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드 부르그 가족이 모두 모

여 있는데도 쥐죽은 듯한 고요가 방 안을 감돌자 도저히 진정할 수가 없었다. 캠피

온의 일곱 아들들은 평소처럼 떠들썩하지 않았다. 자신의 형제처럼 사랑하게 된 여

섯 형제들은 아버지 주위에 몰려 있었다. 누구도 그녀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 오직 던스탄만이 벽에 기대어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리온 양, 앉아요." 백작이 말했다. 캠피온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 얼굴

엔 후회인지 슬픔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이 담겨 있어 그녀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

"마리온. 당신과 함께 우리 모두가 즐거워했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요. 당신은 캠피

온 성을 웃음으로 채워 주었소. 될 수 있으면 우리도 당신이 이곳에 영원히 남아 주

길 바라오."

마리온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가장 두려워하던 것이 현실로 닥친 것이다. 나를 보

내려 한다! 하지만 어디로 가야 하지? 무엇을 해야 하지? 맞아 줄 친구나 가족도 없

고 과거의 기억조차 없는 내가?

"하지만 마리온 당신을 걱정하는 사람이 우리뿐인게 아닌듯 하오. 마리온은 기억하

지 못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당신을 잊지 않은 친척이 한 명 있군요. 당신의 삼촌이

오."

캠피온은 그녀의 반응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 반응도 보일 수 없었다. 삼

촌이라고? 무슨 삼촌? "제겐 삼촌이 없어요." 마리온이 마침내 말했다.

"이 모든게 낯설게 느껴질 것이오. 하지만 집에 돌아가면 곧 기억이 되돌아 올 것

이오."

새삼스럽게 공포가 밀려들었다. 쫓겨나는 것과 그녀의 과거와 연관된 알지도 못하

는 사람의 손에 맡겨지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당신의 이름은 마리온 워렌이오. 그리고 엄청난 재산을 상속받을 사람이기도 하지

." 그는 그녀가 그 말에 좀 기분이 나아지지나 않을까 기대하며 살짝 미소지었지만,

그녀는 조금도 기쁜 기색이 없었다. 이름도, 돈도 그녀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제가 원하는 이상 언제까지 머물러도 좋다고 하셨잖아요?"

백작의 얼굴이 연민으로 가득 찼다.  그 바람에 마리온은 더욱 두려워졌다. "나도

알고 있소, 아가씨. 정말 미안하오. 당신의 신분이 밝혀지지 않고 가족도 없다면 나

역시 언제까지라도 당신을 이곳에 잡아두고 싶소. 하지만 마리온에겐 집과 돌아오길

기다리는 삼촌이 있소."

마리온은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눈을 휘둥

그레 뜨고 백작을 바라보는 게 전부였다. 왠지 두려움을 감춰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마도 잊혀진 흐릿한 과거에 그래야 한다고 배운 것 같았다.

그녀의 고통을 느낀 듯 캠피온이 그녀에게 몸을 굽혔다. "걱정하지 마시오, 마리온

. 당신이 상처입지 않도록 돌봐 줄 거요." 그는 그녀를 바라보며 벽에 기대어선 아

들에게 말했다. "나의 큰아들인 웨섹스의 남작 던스탄이 당신을 집까지 데려다 줄

것이오. 그가 안전하게 모든 것을 보살펴 줄 거요."

그녀는 자신이 일단 드 부르그 성을 떠나게 되면 앞으로 영원히 그들을 만나지 못

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영웅들이 그녀를 버린 것이다.

마리온은 마지막 수단을 쓰기로 했다. "제가 제 의견을 말할 수 없어서 고통스러워

요. 제 과거가 비록 저에게서 잊혀지긴 했지만, 이것만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어요.

그곳의 무엇인가가 잘못되어 있어요. 그곳을 기억하려 하면 할수록 공포심만 생겨나

요. 애원합니다, 백작님. 절 보내지 말아 주세요."

캠피온은 사려 깊은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공포가 그녀를 집어삼키려 해도

그녀는 꼼짝 하지 않고 자리에 꼿꼿하게 앉아 있었다.

마침내 백작이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하오, 마리온. 하지만 벌써 당신이 이곳에

있다는 소식이 삼촌 귀에 들어가 버렸소. 당신을 배더슬리로 당장 돌려보내지 않으

면 전쟁을 일으키겠다고 선포해 왔소."

전쟁! 마리온의 가슴이 마지막 희망과 더불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런 결정을 내린

캠피온을 탓할 수만도 없었다. 자신이 고통을 당하는 한이 있어도 자신을 받아들이

고 따뜻하게 대해 준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으니까. 기억도 못하는 성보다

이곳이 더 편안하게, 마치 집처럼 느껴진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들을 피흘리게 할

수는 없었다.

"그의 협박을 겁내는 건 아니오. 하지만 우린 당신에게 법적인 영향력이 없소."

마리온은 조용히 그 말을 들었다. "그렇군요." 대답을 하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기

운이 하나도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지도, 미소를 짓지도 않고 그저 멍하게 백작을

바라보았다. "언제 떠나야 하죠?"

백작이 이처럼 당황하는 모습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짐을 챙기는 대로 떠나야 하

오. 던스탄은 빨리 떠나고 싶어하오. 그는 여행에 익숙한 데다가 작위를 받기 이전

에 몇 년 동안 에드워드 왕을 모신 적이 있소. 그가 당신을 보호해 줄 거요."

그 말에 대답하기라도 하듯, 던스탄이 한 걸음 걸어나오더니 창 앞으로 갔다. 빛

때문에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그 순간 그를 증오하게 되었다.

"오시오, 워렌 양." 그가 말했다. "빨리 떠나야 하오."

일어서는 마리온 주위에 드 부르그 형제들이 다가왔다. 로빈과 조프리가 불편하고

죄책감 섞인 시선을 교환했다.

"던스탄 형이 당신을 잘 보살펴 줄 거요." 조프리가 말했다.

"그래요. 형이 최고 에요." 로빈이 말하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몸조심해요." 조프리가 말했다.

마리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들고 작별 인사를 하는 스티븐을 바라보았다. "안

녕, 스티븐." 목이 꽉 잠겨 왔다.

"마리온." 사이먼의 얼굴은 잔뜩 긴장되어 있었다.

레이놀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돌리고 아픈 다리를 문지르고 있었다.

"레이놀드." 그녀가 말했다.

니콜라스가 그녀 앞으로 다가와 고통스런 표정을 지었다. "미안해요, 마리온. 던스

탄 형이 당신을 잘 보호해 줄 거예요!"

"그 동안 친절하게 대해 줘서 정말 고마워요, 모두들."

캠피온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제 작별이오, 마리온. 다시 만나길 빌겠소."

꾹 참았던 눈물이 핑 도는 것을 느꼈다. 던스탄이 다가와 그녀를 밖으로 안내했다.

그의 딱딱한 얼굴을 한 번 쳐다보고는, 그녀는 다른 이들을 뒤로 하고 밖으로 나섰

다.

마리온이 뒤를 돌아보지 않았기에 드 부르그 가족들이 혐오감 섞인 표정으로 자리

에 주저앉는 것을 보지 못했다. 오랫동안 침묵이 흘렀다. 마침내 스티븐이 입을 열

었다. "그렇게 꿋꿋이 받아들이는 것보다 차라릴 그녀가 소리 지르며 울부짖는 편이

더 마음 편했을 거야."

"그래." 캠피온이 말했다. "차라리 너희들을 모두 겁쟁이라고 욕했더라면 훨씬 마

음이 편했을 거다."

"그래요." 조프리가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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