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보라시먼스-늑대와굴뚝새-20화 (21/21)
  • 20

    새벽녘에 던스탄은 부하들과 함께 피슬리의 시체를 들고 캠프로 갔다. 조프리를 제

    외한 나머지 형제들은 성에 남아서 성을 수비하고 있었다. 조프리는 자신이 던스탄

    보다 협상에 능하다며 함께 가겠다고 우겼다.

    던스탄은 말렸지만 늘 조용하고 성실하기만 한 동생의 고집이 다른 드 부르그 가

    사람들 못지 않다는 것을 알고 마지못해 승낙했다. 어디에 묶어 두지 않는 한 조프

    리가 따라오는 것을 막을 방도가 없었다.

    던스탄은 상처의 고통을 참으며 말을 몰았다. 그저 침대에 누워서 사슴 같은 눈을

    가진 아내의 간호나 받고 싶었다. 그는 속으로 신음하며 자신이 늙어가는 증거라 생

    각했다.

    던스탄은 얼굴을 찌푸렸다. 피슬리의 부하들이 생각보다 강경하게 나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궁리했다. 아무도 그들을 맞으로 나오지 않았고, 캠프는 쥐죽은 듯 고용

    했다. 던스탄은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조프리와 시선을 잠시 교환하고 적

    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언덕 위에 멈춰 섰다.

    모두들 세상 모르고 자고 있었다.

    던스탄은 얼떨떨했다. 배더슬리에서 보았던 군사들이 얼마나 규율이 없었나 떠올렸

    다. 홀에서 주사위 노름을 하며 술을 마시던 그들. 피슬리와 굿선이 안 보이니 자기

    들 내키는 대로였다. 가지고 온 술을 모두 마시고 곤드레 자고 있었다. 심지어 보초

    조차 세우지 않았다. 던스탄은 큰소리로 웃었다.

    그들이 뭉기적 거리며 일어났다. 그 중 몇몇은 싸움을 했는지 부상을 당했고, 몇명

    은 살금살금 도망치는 중이었고, 나머지는 아직 술에서 덜 깬 듯 제대로 서지도 못

    했다. 그들의 새로운 주인이 소리쳐 명령을 내리자 그들은 대부분 뭉그적거리며 그

    말에 따랐다. 던스탄의 말에 거역하는 자는 포박당하거나 포위당했다. 나머지는 그

    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배더슬리로 향했다.

    한 방울의 피도 보지 않았다.

    니콜라스가 그녀에게 던스탄이 피슬리의 부하들과 대적하러 나갔다고 말하자, 마리

    온은 서글프게 울기 시작했다. 니콜라스는 전날 밤 자신의 삼촌을 맹렬하게 공격했

    던 바로 그 여자가 이 아침에 이토록 슬퍼하는 것을 보고 어쩔 줄을 몰라했다.

    처음에는 피슬리의 죽음에 슬퍼하는 거라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그녀는 삼촌

    의 죽음 따위엔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여러 번 그녀를 죽이려고 하지 않았던가. 더

    이상 그가 그녀와 그녀의 새로운 가족들에게 위험이 되지 못한다는 게 다행이었다.

    그녀의 눈물은 던스탄을 위한 것이었다. 그녀가 자고 있는 사이에 작별 인사조차

    하지 않고 떠난 던스탄 때문이었다. 마리온은 삼촌이 고용한 사람들이 어떤지 알고

    있었다. 그들 손에 남편을 잃는 일이 없기만을 빌 수밖에. 함께 그 어려움을 헤쳐왔

    는데, 드디어 늑대가 그녀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인정했는데, 그가 자신의 성 앞에서

    오늘 아침 살해당한다면?

    그녀가 더더욱 서글피 울자, 니콜라스는 놀라 홀로 뛰어나와 로빈을 찾았다. 그녀

    가 배더슬리에서 울지 않고 오랫동안 살아 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사랑하는 사람도,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 동안 참았던 눈물이 봇물처

    럼 터졌다. 이제 그녀에겐 걱정할 사람이 있는 것이다.

    마을의 한 늙은 여자와 얘기한 끝에, 그녀는 요즘 들어 자신이 어쩌다가 이렇게 울

    보가 되었는지 알게 되었다.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늑대의 아이를

    가진 것 같았다. 오늘 밤에 그 아이는 아버지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물

    이 더더욱 흘렀다.

    로빈과 니콜라스가 돌아와 던스탄과 조프리가 되돌아오는 모습이 보인다고 전하자

    마리온은 또다시 울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안도의 눈물이었다. 하지만 로빈과 니콜

    라스가 걱정스런 시선을 주고 받는 것을 보고는 눈물을 닦고 웃어 보이려고 노력했

    다. 그녀는 던스탄 일행을 맞으러 그들을 따라갔다. 남편이 말에서 내리기도 전에

    그녀는 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던스탄과 조프리는 자신들이 해낸 일에 만족했다. 마리온은 늑대의 팔 옆에 붙어서

    있었고, 나머지 형제들이 그들을 에워싸고 갖가지 질문을 던지며 축하의 말을 전했

    다. 마리온은 행복감에 다시 눈물이 흐르려는 것을 애써 참았다.

    모두들 떠들썩하게 아침을 먹었다. 이제 더 이상 피슬리와 그의 부하들은 위험이

    되지 못했다. 식사를 마치고, 형제들은 남아서 다음엔 무슨 일을 할까 의논했다. 마

    리온의 재산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겠지만, 일단 왕에게 피슬리의 죽음에 대해 보고

    를 해야 한다. 또한 배더슬리의 일도 상의해야 한다. 마리온의 재산에 관해 모두들

    토의하고 있는데 경비병 하나가 달려와 사이먼의 모습이 보인다고 전했다.

    드 부르그 가 사람들의 목소리는 사이먼이 자리에 앉아 던스탄에게 보고할 때까지

    끊이지 않았다. 마리온은 그를 관찰했다. 그는 건강한 것 같았다. 전보다 훨씬 강하

    고 자신감이 넘쳤으며, 더 성숙해 보였다. 마리온은 그에게 누나의 자부심같은 것을

    느꼈다.

    모두들 조용해지자, 사이먼은 피츠휴의 성에서 만난 그의 부하 얘기를 꺼냈다. 그

    는 더 이상 문제는 없을 거라고 말했다. 그는 월터 에이브리가 웨섹스의 전투 후 성

    으로 도망가 서둘러 피츠휴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고 전했다.

    던스탄이 낮게 툴툴대는 걸로 보아선 그가 그 소식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

    을 눈치챘다. "월터가 널 성문 앞에서 베어 버리지 않은 게 이상하구나. 그 작자 또

    무슨 비열한 수를 생각해 낼지..."

    "아무것도." 사이먼이 씩 웃으며 말했다. "그 작자는 이미 죽었거든."

    마리온은 놀라서 얼른 남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던스탄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었으나 사이먼이 고개를 끄덕엿다. "사실이야. 피츠휴의 딸은 남편을 별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나 봐. 첫날밤에 그녀는 월터를 찔러 죽였어. 신혼 침대에서."

    마리온이 비명을 질렀고, 드 부르그 형제들은 자기네들끼리 웅성거렸다. "신혼 침

    대를 피로 물들였군, 그래." 스티븐이 빈정댔다.

    던스탄은 코웃음을 쳤다. "난 믿지 않아.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어?"

    "난 확신해. 내게 시체를 보내 줬거든." 사이먼이 말했다. "그녀. 시체를 짐승들이

    뜯어먹게 내다 버리라고 했지만, 경비 대장은 시체를 우리에게 전달했지. 우린 그

    의 시체를 묻었어."

    그 얘기도 놀라웠지만, 커다랗고 용감한 드 부르그 가의 기사들이 피츠휴의 딸이

    한짓에 모두 몸서리를 치는 게 더 놀라웠다. 그녀는 누굴까. 도대체 어떤 여자일까.

    "그럼. 이제 모든 일은 끝난 것 같구나..."

    그때 캠피온 백작의 도착을 알리는 전령이 뛰어들었다. 형제들은 모두 일어섰다.

    마리온 역시 시아버지를 맞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평소처럼 우아하고 위엄 있는 태도로 홀로 걸어 들어왔다. 지난 몇 주간의 파

    란에도 불구하고 백작은 여전히 품위가 있었다. 나의 늑대로 저렇게 될지...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아마 그렇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던스탄에겐 아버지의 온화한 성

    품이 없으니까.

    슬쩍 남편을 훔쳐보며 마리온은 이제 익숙한 그의 모습을 감상했다. 그에겐 부하들

    이 그를 우러러보게 하는 그 나름대로의 힘과 위엄이 있었다. 그 또한 백작의 자리

    에 걸맞는 사람이다.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그의 표정에 다양한 감정들이 오가는 것

    을 보며 던스탄에 대한 사랑이, 자신이 가진 그의 아이에 대한 사라이 새삼 샘솟았

    다.

    아마도 그는 평생 캠피온의 조용한 지혜를 얻지 못할 테지만, 마리온은 늑대 그 자

    체를 사랑했다. 크고 잘생기고, 툴툴거리며 부드럽고, 화를 잘 내는, 열정에 금방

    휩싸이는 그를. 그가 자신의 감정에 답해 주었다는 것을 상기하며, 그녀는 남몰래

    미소지었다.

    갑자기 모두들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마리온은 아버지의 주의를 끌려고 제각각 떠

    들어대는 그들을 보며 미소지었다.

    캠피온은 아들들의 얘기를 들으며 모두를 칭찬했다. 특히 마리온이 삼촌에게 덤빈

    것에 가장 놀란 듯했다.

    "이제." 모두의 얘기가 끝나자 던스탄이 말했다. 저는 배더슬리로 가서 마리온의

    재산을 돌보고 하인들도 새로..."

    마리온이 비명을 지르며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안 돼요! 내 과거의 삶에 대한 것

    은 아무것도 필요없어요!"

    던스탄은 코웃음을 쳤다. 그의 형제들도 소리내어 조소했다. 모두들 드 부르그 가

    의 방식대로 여자의 어리석음을 탓했다. "그럼 좋아요." 마리온이 똑똑하게 말했다.

    "다른 사람을 보내요. 사이먼도 가고 싶어할 거라 확신해요."

    사이먼의 얼굴에 흥분이 서리자 던스탄은 화난 듯 툴툴대며 말했다. "내 동생은 이

    미 날 위해 많은 일을 했소, 마리온." 이제 내 일은 내가 처리할 때요..."

    "그럼 여기 남아 있어요." 마리온이 말했다.

    던스탄이 명령했다. "내 말에 끼어들지 말아요, 굴뚝새!"

    "날 야단치지 말아요, 던스탄!"

    "당신이 날 방해하게 두지 않겠소, 부인!"

    "난 당신이 배더슬리로 가게 두지 않겠어요!"

    드 부르그 가 사람들이 흥미 진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마리온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늑대가 종종 취하던 자세처럼 다리를 벌리고 조그만 손가락으로

    넓은 던스탄의 가슴을 찔렀다. "당신, 여행이 지겹잖아요. 그렇다고 했잖아요!"

    던스탄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얼굴은 분노로 어두워져 있었다.

    "자, 마리온." 조프리가 말다툼을 진정시키려고 끼여들었다.

    그녀는 조프리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그녀의 온몸을 집

    어삼킬 듯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사이먼더러 가라고 해요, 던스탄. 당신은

    웨섹스를 돌봐야해요."

    "웨섹스가 뭐가 문제라는 거지?" 던스탄이 물었다. "내가 왜 여기 있어야 하오?"

    여섯 쌍의 드 부르그 가 사람들의 눈동자가 쏟아졌다. 형제들은 마리온이 그녀 눈

    앞에 있는 커다란 기사를 공격할지, 아니면 늑대가 분노로 폭발할지 궁금해 하고 있

    었다. 니콜라스와 로빈은 큰형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에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고, 조

    프리와 사이먼은 형수가 된 여인을 보호하기로 마음먹은 듯 한 발짝 다가섰다.

    "당신은 여기 있어야 해요. 왜냐하면 내가 여기 있으니까." 마리온이 대담하게 말

    했다. "그리고 당신 상속자도 여기 있으니까." 마리온은 배 위에 손을 얹으며 까딱

    도 하지 않고 불을 뿜는 남편을 바라보았다.

    던스탄은 갑자기 으르렁대며 아내의 어깨를 잡았다. 홀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그러자 마리온은 그의 목에 팔을 감았고, 모든 드 부르그 가 사람들 앞에서 그들은

    불이 붙을 정도로 뜨거운 키스를 나누었다.

    캠피온의 부드러운 축하의 말에 놀란 형제들이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갑자기 방이

    떠들썩해지면서 서로 고개를 끄덕이며 축하의 말을 소리 높여 외쳤다.

    커다랗고 우락부락한 남자들 사이에 둘러싸인 마리온의 눈이 캠피온과 마주쳤다.

    그녀는 캠피온이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턱을 쓰다듬는 것을 보았다. "내가 틀린 것

    같구나." 그가 말했다.

    "틀리시다뇨? 뭐가요?" 그녀가 궁금한 목소리로 물었다.

    "난 네가 늑대를 길들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제 보니 오히려 반대였구나."

    모두들 백작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니콜라스는 큰형과 형수를 바라보며 혼

    란스런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요?"

    "던스탄이 우리의 부드럽고 작은 마리온에게 자신의 이름에 걸맞는 격렬하고 고삐

    풀린 기운을 불어넣은 게 확실한 것 같구나." 캠피온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녀가 늑대에게 어울리는 아내가 된 게야."

    낯익은 탑이 하얀 겨울 위로 뻗어 있는 것을 보자 마리온의 마음은 행복으로 터질

    것 같았다. 웨섹스도 사랑하게 되었지만, 캠피온은 언제나 그녀의 집처럼 여겨졌다.

    캠피온의 성이야말로 그녀가 처음 가족의 사랑과 유대감을 느낀 곳이다.

    언제나 그곳에서 가족들에 둘러싸여 살아온 남편은 그녀의 그런 감정을 쉽게 이해

    하지 못했다. 늑대는 의외로 질투심이 많았다. 그녀가 자기 동생들이나 아버지의 성

    에 애정을 느끼는 게 못마땅한 듯했다. 백작의 아들들이 크리스마스에 맞춰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마리온도 그곳에서 모두를 만나고 싶었다.

    남편을 설득하는 데 거의 일주일이 걸렸다.

    늑대는 자신이 여행에 진력이 났고, 올 한해 동안 이미 지난 3년간 가족들 만난 회

    수보다 많이 가족들을 만난 데다, 뱃속의 아이가 걱정된다고 했다.

    거기에 대해 마리온은 캠피온까지는 겨우 이틀 정도밖에 안 걸리며, 아이를 가진

    지 몇개월도 되지 않았고, 가족의 초청을 거절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 행동이라며

    반박했다. 남편의 마음이 좀 약해지는 낌새가 보이자, 마리온은 선물 겸 여행을 가

    자고 그에게 애원했고, 던스탄은 투덜거리며 으르렁대다가 마침내 그녀의 소원을 들

    어 주기로 했다.

    2층의 따뜻한 난로가 앞에 앉아서 마리온은 그가 양보해준 것을 못내 기뻐했다. 그

    녀는 배 위에 손을 얹고 친형제처럼 사랑하게 된 남자들을 둘러보았다.

    남편까지 포함해 형제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던스탄의 부탁으로 마리온의 재

    산을 관리하러 갔던 사이먼도 배더슬리에서 돌아와 있었다. 성에서 피슬리의 썩어

    빠진 부하들을 말끔히 소탕하고 새로운 병사들을 뽑았다. 마리온은 사이먼에게 형수

    로서의 자부심을 느끼긴 했지만, 남편을 따라잡으려는 그의 지나친 의욕 때문에 저

    러다가 위험한 일을 당하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되기도 했다.

    물론 그렇게 따지자면 조프리 빼고는 모두 문제가 있긴 하다. 드 부르그 가 형제들

    가운데 가장 학구적인 조프리가 싸움에 푹 빠지는 것은 상상도 안 된다. 하지만 조

    프리가 걱정이 되긴 했다. 가끔 그의 눈에 책이나 무기나 캠피온에 있는 그 무엇으

    로도 채울 수 없는 갈망 같은 것이 스치고 지날 때가 있었다. 그에게도 좋은 아내가

    생기기를 바랐다.

    드 부르그 가 형제 중 가장 어리고 가장 활발한 막내는 마리온을 만나기 전의 늑대

    와 똑같은 포즈로 방 안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모두들 그녀에게 의자를 끌어다 주랴

    , 방석을 가져다 주랴 일대 소동이 벌어졌다. 마리온은 남몰래 미소를 지었다. 거칠

    고 불평 불만 많은 드 부르그 가 남자들이 미래의 새로운 상속자를 잉태한 그녀를

    마치 약한 꽃처럼 다루고 있었다. 마리온은 아무 소리 않고 그들의 친절을 받아들였

    다.

    가끔 음식을 엄청나게 먹어대는 것과 사소한 일에도 눈물을 흘리게 된 것을 빼면

    임신은 순조로웠다. 던스탄은 그녀가 뭔가를 해달라고 하면 투덜투덜하면서도 동생

    들이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그녀의 응석을 받아 주었다. 마리온은 혼자 웃으

    며 난로가로 조금 더 다가갔다. 그가 그녀 곁에 다가와 앉았다. 그녀는 그의 품에

    파고들며 자신의 어깨를 두른 그의 팔에 고개를 묻었다. 그들은 왕의 전갈을 받은

    뒤 모두를 이층에 불러모은 캠피온이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 상황이 작년 초

    여름 그녀가 성에서 쫓겨나다시피 할 때와 너무도 똑같아서 불안하긴 했지만, 마리

    온은 왕으로부터 온 소식이 나쁜 소식은 아닐 거라 자신을 타일렀다. 그녀를 배더슬

    리로 돌려보내 달라던 요청도 결국은 나쁘지 않게 끝나지 않았던가. 그 일이 없었더

    가면 어떻게 늑대와 결혼했겠는가!

    던스탄은 그녀의 생각을 읽은 듯 아들인지 딸인지 아직 모르는 그들의 아이가 있는

    그녀의 배 위에 손바닥을 올려놓았다. 그녀가 그를 보며 미소짓자, 그의 입술이 곡

    선을 그렸다. 미소라고 부르기 힘든 미소였지만, 그래도 세상 그 누구의 커다란 웃

    음보다 그녀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미소였다.

    캠피온이 나타나자 모두들 웅성대기 시작했다. 캠피온은 그들 중앙에 우아한 태도

    로 섰고, 마리온은 그의 표정을 읽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시아버

    지의 표정에서 무언가를 읽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들들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백작은 말을 시작했다. "국왕 폐하께서 너희들 중 한

    명에게 임무를 내리셨다." 드 부르그 가의 형제들이 몸을 똑바로하며 앉는 것이 보

    였다.

    "이것은 대단한 희생을 요구하는 일이다만, 이번만큼은 너희 중 하나가 나서 주길

    바란다." 캠피온이 말했다. 이번만큼이라니? 마리온은 국왕이 내린 임무라는 것에

    호기심을 느끼며 백작의 말을 들었다.

    "폐하의 뜻은 너희 중 하나가 국왕의 토지와 국왕의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결혼을

    하라는 것이다." 마리온은 그 말에 모두의 열기가 싹 사그러드는 것을 보며 웃음을

    감추었다. 정말 못 말리는 총각들이라니까! 그들이 내켜하지 않는 것은 이해가 가지

    만, 마리온은 또 다른 여자가 가족의 일원이 되고 자신의 아이와 함께 클 아이가 생

    기기를 내심 바랐다.

    "미안하다, 아들들아. 하지만 폐하의 명령을 거부할 방법은 없단다." 마리온은 캠

    피온이 쓸쓸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며 약간 놀랐다. 캠피온의 눈에는 슬픔이

    담겨 있었다. 마치 아들들에게 결혼하란 명령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사형 선고를 내

    리고 있는 것처럼. "그녀의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그녀에겐 감당 못할 커다란 토지

    가 남겨졌단다.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거친 무법자들이 그녀를 괴롭히며 억지로 그

    녀와 결혼하려 하고 있단다."

    갑자기 마리온은 캠피온의 말에 감돌기 시작한 긴장감을 느꼈다. 남편의 팔에 갑자

    기 힘이 들어갔다.

    도대체 시아버지는 누구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일까. 이 상속녀란 여자가 어린아이

    일까? 아니면 노파? 그것도 아니면 엄청난 추녀? 그녀가 누구든 아무도 그녀는 원치

    않는다는데 그녀에게 연민을 느꼈다.

    "국왕께선 너희 중 한 명이 피츠휴의 딸과 결혼하길 원하신다."

    "피츠휴의 딸이라구요!" 일곱 명의 남자 목소리가 항의 하듯 터져 나왔다.

    "그 여잔 유명한 말괄량이라구!" 로빈이 끔찍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마녀야!" 레이놀드가 외쳤다.

    "살인자라구. 전남편을 신혼 침대에서 죽였다고 했잖아?"

    캠피온은 모두에게 연민의 시선을 보냈다. "확실히 폐하께선 그 일을 매우 관대하

    게 모아 주시는 듯하구나. 신랑이라는 작자가 사실은 그녀에게 결혼을 강요하고 반

    란을 일으킨 기사였으니까."

    "그래도 그건 끔찍한 일이었다구요." 사이먼이 중얼거렸다. 조프리는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은 파악할 수 있었지만, 마리온은 괜스레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웨섹스로 숨어들어가 알 수 없는 위험에 붙잡힌 큰형을 구출

    하는 데는 전혀 망설이지 않던 여섯 명의 용감한 전사들이 여자 하나 때문에 얼굴이

    새파랗게 되다니.

    그녀가 숨죽여 키득거리는 것을 느낀 듯, 던스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우리

    부부가 축하의 말을 언제 해야 할지 알려 주십시오, 아버님." 그러고는 부드러운

    몸짓으로 마리온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도운 뒤 그녀와 함께 그곳에서 나왔다.

    놀랍게도 던스탄의 얼굴 역시 형제들 못지 않게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문을 닫고

    나오자마자 그녀는 킥킥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이건 웃을 일이 아니오, 마리온." 던스탄이 마리온을 끌고 침실로 향하며 으르렁

    거렸다. 그의 험상궂은 표정에 마리온은 그가 마지막 촛불을 꺼 어둠 속에 자신의

    얼굴이 가려질 때까지 웃음을 억지로 참고 있었다.

    "굴뚝새?" 던스탄이 그녀에게 손을 뻗으며 말했다.

    "네?"

    "당신이 날 피츠휴의 마녀에게서 구해 준 걸 감사하다고 말해야 겠군!" 그도 껄껄

    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마리온도 그를 따라 함께 웃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침실

    밖으로 새어 나갈까 봐 그들은 서로의 입을 막으며 계속 웃어댔다. 숨죽인 웃음소리

    는 이윽고 키스가 되었고, 점점 깊어져 갔다.

    "별로 어렵지도 않았는걸요, 뭐." 마리온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 순간 그

    녀는 그의 손길에 익숙한 열기가 타올랐다. "내 생각에 늑대는 처음부터 길들여지길

    바랐던 것 같아요."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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