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보라시먼스-늑대와굴뚝새-17화 (18/21)

17

깨어난 것은 예리한 통증 때문이었다. 옛 하녀가 가슴의 상처를 닦고 있었다. 그는

웨섹스의 자기 침대에 누워 있었다. 잠깐 멍하니 무슨 일이 벌어졌었나 기억을 더

듬었다. 온몸의 근육이 아프고 얼굴도 욱신거렸다. 목구멍이 따가웠다. 내가 무슨

전쟁을 치렀지?

방안을 둘러보니 조프리와 사이먼이 보였다. 그들이 왜 웨섹스에 있는 걸까. 그는

정신을 가다듬으려 눈을 감았다. 기억이 몰려왔다. 피츠휴는 죽었고 성도 되찾았다.

이제 모든 걸 원 상태로 돌리는 일만 남았다. 모든 게 잘된 듯하다. 그런데... 뭔

가가 빠졌다.

마리온. 이런, 제길. 내 아내는 어딨지? 말을 하려는데 입안이 바짝 말라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는 억지로 힘겹게 말했다. "마리온?"

"뭐라구?" 조프리가 조심조심 물었다.

"마리온" 던스탄이 속삭였다.

"마리온? 아, 마리온. 그녀는 괜찮아. 그녀는 캠피온에 두고 왔지." 조프리가 말했

다.

온몸에 안도감이 퍼졌다. 굴뚝새는 무사하다. 하지만 왜 아버지의 성에 있는 거지?

던스탄은 얼굴을 찌푸렸다. "사람을 보내 그녀를 여기로 데려와 줘." 그녀를 자기

곁에 두고 싶었다. 그녀는 내 아내이다. 그녀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녀가 있을 곳

은 여기, 내 곁이다. 하녀가 여기저기 상처를 눌러 보자 그는 소리를 빽 지르며 그

녀를 노려보았다.

"이 갈비뼈가 부러졌나요, 나리?" 그녀가 약간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아니야." 던스탄이 한쪽 팔로 몸을 지탱하며 일어섰다. 아마 동생들이 그를 이층

으로 업고와 옷을 벗겼나 보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가 항의하듯 중얼거렸지만,

목소리는 늑대의 성난 울음소리라기보다는 고양이의 야옹거리는 소리 정도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여기저기 찌르는 건 그만두어라. 난 괜찮으니." 그가 화를 냈다.

"주인님께서는 심하게 얻어맞으셨어요." 그녀가 대꾸했다. "끔찍했어요, 전 다 본

걸요." 늙은 하녀는 자신이 본 모든 것을 동생들에게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경고하는 듯한 그의 얼굴을 보고는 다른 말로 얼버무렸다. "주인님께 가장 필요한

것은 물과 음식이죠. 여기 있습니다, 주인님. 마실 걸 좀 드세요."

물을 마시자 다시 힘이 솟는 듯했다. 니콜라스가 놀란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고,

조프리는 걱정스럽게 그를 보았으며, 사이먼은 초조한 듯 마루 위를 서성거렸다. 던

스탄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동생들과 이렇게 시간을 보낸 것이 얼마만이던가. 그

동안 중요한 뭔가를 잊고 살았던 것이다. 동생들이 얼마나 자랐는지, 어떤 사나이

가 되었는지 스스로 알아내는 것 말이다.

"너희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해야겠구나." 그가 말했다.

니콜라스는 그 말에 행복한 미소를 지었고, 조프리는 편안한 표정을 지었으며, 사

이먼은 돌아서서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들 소중한 동생들이다. 던스탄은

그 사실을 자신이 오랫동안 잊고있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동생들을 왜 멀리 했을까.

"형을 도울 수 있어서 기뻐." 조프리가 말했다. "이제 좀 쉬어. 형 때문에 흰머리

가 생겼다구. 형이 피츠휴와 그런 상태로 단둘이 맞붙었을  말이야."

던스탄은 코웃음을 쳤다. "너희들이 나에게 해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지.

뭐, 괜찮다면 내 성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 말해 줄 수 있겠니, 사이먼?"

사이먼이 씩 웃으며 벌어졌던 전투에 대한 것과, 사상자, 구출된 던스탄 부하의 수

, 또 항복해 온 피츠휴 부하들의 수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내 부하였던 월터 에이브리는 어떻게 되었지?" 그가 거친 목소리로 물었다. 배반

의 고통은 아직도 쓰라렸다. 역시 세상에 믿을 만한 사람은 동생들 밖에 없는 것 같

았다.

"도망쳤어." 사이먼이 딱딱하게 말했다. 그 작자와 몇 명은 우리가 쫓아가기도 전

에 대문으로 달아났어. 부하들을 보내서 그들을 쫓게 할 형편이 아니어서 말이야.

아마 지금쯤은 피츠휴의 성에 거의 다다랐을 거야."

던스탄은 사이먼이 못내 그를 잡지 못한 것을 아쉬워한다는 걸 깨달았다. "잘했어,

사이먼. 너의 판단은 잘한 거야."

사이먼은 놀랐다는 듯 짧게 던스탄을 바라보고는 마침내 형의 칭찬을 머쓱하게 받

아들였다. 동생이 자신의 말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깨닫고 던스탄도 놀랐다.

"하지만 우린 지금 좀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 있어. 웨섹스를 지킬 병력이 얼마 되

지 않거든. 에이브리의 뒤를 쫓고 싶지만, 피츠휴의 영지에 뭐가 숨어 있을지 알 수

가 없어. 솔직히 말하면, 지금 우리에게 있는 병사로는 별로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사이먼이 침대 곁을 서성거렸다. "형이 허락해 준다면, 난 캠피온으

로 되돌아가 손수 부하들을 뽑아오고 싶어. 아버님께서도 형에게 부하들을 보내고

싶어하실거야."

던스탄은 그 말을 믿기 힘들었다. "확실해?"

사이먼은 돌아서서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이지! 캠피온엔 부하들이 남아

돈다구, 형도 기억하겠지만."

그건 사실이다. 던스탄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마도 마리온의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그가 자신의 자존심을 조금만 죽이고 아버지에게 부탁만 했더라도 벌써 예

전에 도움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알아서 해다오,

사이먼." 갑자기 피곤이 밀려와 던스탄은 눈을 감았다. 그 바람에 동생이 날아갈 듯

기쁜 표정을 짓는 것은 보지 못했다.

자신의 침대가 가져다 주는 편안함에 고마움을 느끼며 던스탄은 베개에 머리를 묻

었다. 문가로 다가가는 동생들의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 그는 매우 중요한 일을 잠

시나마 잊고 있었다는 데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아, 그리고 오는 길에 마리온도 데리고 오렴." 그는 딱딱하게 말했다.

며칠이 지나가 던스탄은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가슴의 상처도 나아가고

있고, 이젠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먹을 것도 배불리 먹었다. 다시 예전 그대로

였다. 한 가지 사소한 일만 제외한다면. 아직도 아내가 보이지 않았다.

던스탄은 그녀 없이는 완전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는 갈망이란 기묘

한 느낌과 그녀가 돌아오리란 기대 사이에서 당황했다. 우스운 말이긴 해도 그는 그

녀가 자기 옆에 있길 바랐다. 그것도 당장.

마지못해 함께 보내야 했던 오랜 시간 동안 던스탄은 그녀의 존재에 익숙해졌다.

그리고 다시 그녀를 되찾을 것이다. 아주 간단한 문제다. 그는 보조개가 움푹 패는

그녀의 미소가 그리웠다. 그녀의 우아한 움직임도, 어리석은 재잘거림도, 그리고 뜨

거운 열정 어린 순수한 분위기도, 그 모든 것이 그리웠다. 자신에게 대들던 그녀,

화가 잔뜩 났을 때면 자신의 커다란 가슴을 조그만 손가락으로 찌르던 모습도 그리

웠다.

또 그녀가 자신을 걱정하며 호들갑을 떠는 모습도 눈에 아른거렸다. 던스탄은 그

기억들을 음미했다. 그녀가 자신을 걱정해 주는 게 좋았다. 그녀가 그 커다란 눈을

자신에게 돌리고 마치 그녀가 자신을 숭배하는 것처럼 눈을 반짝이며 바라볼 때가

특히 그리웠다.

하지만 물론 그녀는 그를 숭배하지 않는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그 어리석은 착각.

하지만 본인이 그렇게 믿고 싶다는데. 누가 그녀를 말릴 수 있겠는가. 그는 그녀의

애정의 대상이 되는 것이 좋았다. 유일한 대상이 되는 것이.

던스탄은 툴툴거렸다. 마리온이 여기 웨섹스에서 동생들에게 둘러싸여 있어야 한다

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가 동생들에게도 그렇게 달콤한 시선을 보냈을까.

던스탄은 눈앞에 놓인 테이블을 주먹으로 후려치고 싶었다. 마리온은 내 것이다. 밥

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그 모든 면에서. 던스탄은 그녀가 웨섹스에서 돌아온 영웅인

사이먼을 환영하는 모습을 떠올리지 않으려 애썼다. 그녀가 자신의 동생들에게 미

소를 지으며 시선을 주고받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 생각은 하

고 싶지 않았다.

그는 큰소리로 욕을 내뱉었다.

"왜 그래, 형?" 조프리가 눈 앞에 펼쳐진 종이 서류들을 보다가 고개를 들고 물었

다. 그들은 중앙 홀에 있는 테이블에 함께 앉아 있었다.  조프리가 던스탄의 회계를

봐주고 있었다.

"아무거도 아냐." 던스탄이 중얼거렸다. "사이먼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것뿐이다."

조프리는 미소지었다. 던스탄이 아무런 이유 없이 욕을 내뱉는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뭔가가, 아니 누군가가 던스탄의 마음을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조프리는

의자에 기대며 혹시나 던스탄이 마리온 얘기를 꺼내지 않을까 기다렸다.

몇 번쯤 얘기하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는 듯 마리온의 얘기를 입에 담은 적은 있었

지만, 던스탄은 그에게 상의하려고 한 적은 없었다. 조프리는 호기심이 생겼다. 형

제들 중 가장 터프하고 고독을 즐기던 큰형이 큐피드의 화살을 맞으리라고는 한 번

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늑대는 조그맣고 사랑스런 마리온에게 함락당한

것 같았다.

마리온은 결혼이 자신의 생각이 아니었다고 했다. 조프리는 이제 이 부부들이 문제

를 어떻게 풀어 나갈지 궁금했다. 그녀는 가족들에게 던스탄을 구해야 한다며 정말

눈물겨운 태도로 얘기했다. 그렇다고 마리온이 그를 사랑한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

만 던스탄은 마리온을 몹시도 사랑하는 듯했다. 흥미 진진한 퍼즐이었다. 몇 년 동

안 큰형의 고집 센 거만함을 충분히 보아온지라, 형이 전전 긍긍하는 모습을 보며

즐길 작정이었다.

"결혼하니 어때?" 조프리는 웃음을 꾹 참으며 물었다.

"심하게 고통스럽지!" 던스탄이 목덜미를 문지르며 대답했다.

조프리는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심해?"

던스탄은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았다. "그저 그녀를 여기에 데려와야겠다는

생각뿐이야. 그녀가 속한 곳은 여기라고. 마리온은 내꺼니까."

"형, 내게 그렇게 무서운 얼굴로 얘기할 필요는 없다구. 우린 모두 마리온을 여동

생처럼 좋아하는 것뿐이지, 아무도 그녀와 결혼하길 원치않아. 기억 안 나?"

던스탄의 눈이 가늘어졌다. 조프리는 던스탄에게 형제들이 그의 아내와 결혼하는

것을 모두 거절했다는 사실을 그에게 상기시켜준 게 실수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래, 기억나." 던스탄이 낮게 수긍했다. "왜지? 왜 아무도 그녀와 결혼하지 않겠다는

거였지?"

이런. 늑대가 모욕당했다고 생각하나 보군. 형제들에게는 너그러운 편이긴 하지만,

그는 놀림감으로 삼을 만한 인간이 아니다. 조프리는 조심스럽게 단어를 골랐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진실을 말했다. "뭐, 우리 중 누구도 그녀를 사랑하진 않으니

까."

던스탄이 코웃음쳤다. "사랑이라구! 너도 마리온처럼 어리석은 말을 하는구나."

이런. 조프리는 심호흡을 했다. 늑대는 사랑에 빠져 있을 뿐 아니라, 그 사실을 인

정하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마리온과 이미 그 주제를 놓고 대화를 나눈 적도 있는

모양이다. 조프리는 툭 터놓고 형에게 물었다. "형은 왜 마리온과 결혼했지?"

던스탄은 대답이 뻔하지 않냐는 듯, 잘난 척하며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그녀를

그녀 삼촌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는 최선의 방법이었거든."

"그렇군." 조프리는 부드럽게 말하며 조심스런 시선으로 던스탄을 바라보았다. "그

러니까 그녀에게 느끼는 건 책임감이 전부란 말이지?"

던스탄은 지지 않고 맞섰다. "물론 그녀에게 다른 감정도 느끼긴 하지. 그녀는 내

아내라구. 그녀는 날 잘 섬기고 내 아들도 낳아 줄 거야."

갑자기 던스탄이 조용해지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조프리는 웃음을 참으려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니까 늑대가 자기 아내에게 푹 빠진 게로군.

"그 얘기는 그만! 난 할 일이 있어." 던스탄이 이상스레 허둥거렸다.

조프리는 헛기침을 하며 다시 앞에 놓인 서류로 눈을 돌렸다. 너무 재미있었다. 마

리온이 돌아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기다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마리온은 자신의 심장이 너무도 큰소리로 두근거려 진정할 수가 없었다. 사이먼은

그녀를 데리고 웨섹스로 오는 동안 내내 딱딱하고 엄하게 굴었지만, 그녀는 이미 드

부르그 가 남자들의 그런 태도에 익숙해져 있었다. 던스탄에 대한 걱정 때문에 사

이먼의 그런 태도쯤은 문제도 아니었다.

사이먼이 집으로 돌아와 던스탄은 <물론> 무사하다고 뻐기듯 말했을 때, 마리온은

안도감에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아직도 마음 한구석에서 걱정이 남아 있어서인지

직접 던스탄을 눈으로 보고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사이먼의 말에 따르

면 던스탄은 감옥에 갇혔고 상처도 입었다. 그가 무사한지 꼭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앞날에 대해서는 아직 확신이 서지 않는다. 던스탄이 그런 상태만 아니었어도, 웨

섹스로 갈 마음을 먹지 못했을 것이다. 불확실한 미래밖엔 없는 남자에게 가느니,

캠피온에서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잇는 편이 오히려 낫다. 던스탄을 보고

싶긴 하지만 그들의 결혼에 대한 모든 불안이 다시 몰려왔다.

성문 앞에 당도하자, 마리온은 걱정으로 조용해졌다. 사이먼은 그녀에 대한 일은

까맣게 잊은 듯, 새로 뽑은 병사들의 숙소를 마련해 주러 가버렸다. 마리온은 문 앞

에 혼자 서 있었다. 마리온은 성을 올려다보며 썩 괜찮은 성이라고 생각했다. 공허

하게 크기만 한 배더슬리와 감탄이 절로 나오는 캠피온에 비하면, 웨섹스는 아늑한

편이었다. 마리온은 미소를 지었다. 이 작은 성을 아이들로 채우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안으로 들어가자 늑대가 화난 목소리로 으르렁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어딨지

?" 던스탄이 고함을 치며 그 우아한 몸짓으로 빠르게 걸어나왔다. 마리온은 그에 대

한 사랑이 뜨겁게 피어나는 것을 느끼며 눈을 깜박였다.

"마리온."

그가 그녀를 발견했다. 그는 달려나오려다가 곧 자제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잠

깐 망설이더니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 앞에 섰다. 참나무처럼 크고 늠름한 그의 모습

을 보며 그가 건강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살폈지만, 읽기가

어려웠다. 그가 다시 만난 걸 기뻐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마리온?" 그 한마디 말에 몇백만 개의 질문이 담겨 있는 듯했다. 마리온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마침내 그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해 그의 뺨에 손바닥을 대보

았다. 따뜻하고 단단한 그의 피부가 느껴졌다. "당신이 괜찮아서 정말 다행이에요."

던스탄은 그녀가 숨도 쉴 수 없을 정도로 세게 그녀를 끌어 안았다. 그는 갑옷을

입고 있지 않았으므로, 마리온은 옷을 통해 그의 단단한 근육과 체온을 느낄 수 있

었다. 그녀가 숨을 쉬려고 발버둥치자, 그는 낮은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불렀다. 온몸이 사랑으로 깨어났다.

그들사이에 마법의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하자 분주하고 웅성거리는 홀은 잊혀졌다.

그는 그녀를 가뿐하게 안아들고 새로운 여주인에게 인사하려고 일렬로 늘어서 있는

하인들 곁을 지나쳐, 놀란 얼굴의 조프리를 지나 계단을 향했다.

"던스탄!" 그녀가 꾸짖었지만 그는 그녀의 말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뒤에서 누군가

쫓아오는 것처럼 자신의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는 방문을 걸어 잠그자 마자 그녀에게 달려들어 그녀의 입술을 탐닉했다. 그의

키스는 뜨겁고 거칠었다.

마리온은 키스로 부풀어오른 자신의 입술을 핥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커다

란 가슴이 바쁘게 오르락내리락했다. 그의 호흡은 가빴다. 늑대의 손이 떨리고 있었

다. 그 사실에 마리온은 현기증이 일었다.

"마리온, 당신을 지금 안지 않으면 안 되겠소." 그가 낮게 신음했다. 마리온이 희

미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늑대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옷을 벗었다.

긴장으로 굳어진 그의 얼굴에 잠깐 짓궂은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이곳의 벽을 두

꺼워, 마리온. 소리를 지르고 싶으면 지르라구."

던스탄은 음울한 표정으로 테이블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자신의 동생들을 마치 독

사를 보는 듯한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이 모든 게 그녀 탓이다.

그는 하루 종일 그녀와 함께 침실에 머물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내려와서 그

의 부하들과 그의 동생들에게 인사를 하겠다고 우겼다. 전에 생각했던 대로 그녀는

사슬에 묶어서 침대에 평생 잡아둬야 한다.

지금 그녀는 테이블 사이를 옮겨 다니며 모두와 함께 달콤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

고 있었다. 모두에게 관심을 표하며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있었다. 가슴속에서 질투가

부글부글 끓었다. 여태껏 한 여자에게 이토록 소유욕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여자

란 그저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던스탄은 기분이 나빴다.

자기 동생들과는 잔 적이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동생들 모두 그녀와  결혼하

길 거부했으며, 그녀를 그저 여동생이나 누나쯤으로 여긴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

지만 누구든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관심을 표시하는 자는 죽여 버릴 것이다.

그녀가 손을 뻗어 조프리의 소매를 잡는 걸 보며 던스탄은 피가 끓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성질 나쁜 어린애처럼 군다는 건 알고 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의 것이다. 누구와도, 형제들조차 그녀를 공유할 수는 없다.

음식과 술을 잔뜩 먹고, 승리감에 도취된 형제들은 던스탄의 어두운 분위기를 감지

하지 못한 듯했다. 마치 그녀에게 칭찬받으려고 혈안이 된 강아지 떼처럼 그들은 서

로 자신이 웨섹스를 다시 되찾는 데 한 역할을 뽐냈다. 던스탄은 말없이 조용히 지

켜보았다. 드 부르그 가의 남자들을 다루는 마리온의 솜씨에 놀란 나머지 기분이 나

쁜 것도 잊어버렸다.

외교에 능한 조프리조차도 그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싸움이 벌어지면 그

녀는 딱 들어맞는 말과 재치로 긴장을 해소했다. 누가 너무 이야기를 부풀리면 그녀

는 장난스런 농담으로 그를 진정시켰다. 스티븐이 신랄한 말을 하면 그녀는 가볍게

그를 나무랐다. 그러자 집안에서 내놓은 망나니가 그녀의 말에 따르는 게 아닌가!

던스탄은 놀라다 못해 당황할 정도였다.

가장 놀라운 것은 조용한 레이놀드에게서 얘기를 끌어냈다는 것이다. 모두들 한 마

디씩 그녀의 칭찬을 들었다. 니콜라스에게조차 웨섹스의 비밀 통로를 알고 있었던

공을 치하했다. 니콜라스가 아니었더라면 던스탄을 구출하는 게 불가능했을 거라며.

니콜라스는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마리온이 없었더라면 이 모든 게 불가능했을 거

란 말을 해 던스탄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다. 그러자 여섯 쌍의 눈이 그녀를 향했다.

애정과 존경이 가득한 그 시선에 던스탄은 마음속의 응어리가 가시는 걸 느꼈다.

그들의 얼굴에서도 읽을 수 있듯, 모두들 그녀를 좋아한다. 하지만 조프리의 말이

맞았다. 그녀에게 욕망을 품은 자는 없었다.

형제들이 일어서서 자신의 아내에게 축배를 드는 것을 보자 질투의 격렬한 고통이

사그라들었다. 던스탄은 그들을 지켜 보며 수많은 전쟁을 함께한 전우라 할지라도

느낄 수 없을 동질감을 느꼈다. 그 감정은 한 여자에 대한 애정에 뿌리를 두고 있었

다. 비록 애정의 느낌은 다를지라도.

던스탄도 잔을 들고 일어났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마리온만 바라

보았다. 그녀에 대한 사랑이 그의 안에서 피어올랐다. 그녀가 자신의 자리에 앉아

귀엽게 웃는 것을 보면, 그녀가 며칠 동안이나 무기도 없이 익숙하지도 않은 길을

혼자서 그의 목숨을 구하려는 일념으로 말을 몰았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정말 놀랍다. 그토록 그에게서 달아나려고 애쓰던 마리온이 마침내 해내고

야 만 것이다. 혼자서 그 먼 길을 간 것이다. 갑자기 그녀에게 자신이 더 이상 필요

치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두려웠다. 마리온에게 그의 보호가 필요없다면 그와 함께 지낼 이유가 없기 때문이

다. 던스탄은 형제들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 마리온이 수줍게 겸손한 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그의 정신을 다른 곳에 팔려 있었다.

그녀를 어떻게 붙들어 둔다지? 사랑의 행위도 한 가지 방법일 순 있다. 그 생각에

맞물려 떠오른 게 아이 생각이었다. 그래! 그녀를 빨리 임신시키는 거야. 그럼 우리

가 더욱 단단하게 묶여질 테니.

던스탄은 공포를 느꼈다. 온몸이 떨릴 정도였다.

"우리들의 누이, 마리온!" 동생들이 소리 높여 외치고 있었다. 입안이 말라왔다.

하지만 술은 이제 더 이상 마시고 싶지 않았다. 그저 아내를 침대로 데려가 그녀의

소유권을 주장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것도 지금. 그는 그녀에게 다가가며 그녀의 시

선을 끌려고 노력했다.

그녀와 시선이 부딪히자 그녀는 그에게 몸을 기울이며 고갯짓으로 동생들 쪽을 가

리켰다. "사이먼이 손바닥으로 컵을 돌리는 걸 보세요."

던스탄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동생의 버릇 따위에는 관심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

다. 마리온은 꾸중하듯 얼굴을 찌푸렸다. "저건 사이먼이 뭔가 할말이 있다는 뜻이

에요." 그녀가 설명했다. 던스탄이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짓자, 마리온은 얼굴을

찡그리며 아름다운 입술 끝을 아래로 떨어뜨리며 그의 험상궂은 표정을 흉내내었다.

"물어 보라니까요." 그녀가 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찔렀다.

그녀의 말대로 하지 않는 이상 그녀가 끝까지 괴롭힐 것 같아서 던스탄은 의자에

몸을 기대고 컵을 가지고 장난치고 있는 동생을 바라보았다. "그래, 사이먼.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뭐라구?" 사이먼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 난 그러니까... 형이 허락해 준다면..." 그는 자세를 바로하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군사들을 이끌고 피츠휴의 영지로 가서 거기 상황이 어떤가 보고 싶어."

던스탄은 아내의 통찰력에 감탄했다. 자기보다 동생들을 훨씬 더 잘 알고 있었던

것일까. 그녀는 그의 놀란 표정을 보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멋진 생각이네요.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던스탄?"

던스탄은 얼굴을 찡그렸다. 피츠휴가 죽었으므로 더 이상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 거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월터가 말썽을 일으킬 수도 있었다. 오랫동안 모습을

감추고 있거나 어딘가에 처박혀 있다가 과거의 피츠휴처럼 던스탄의 영지를 약탈할

여지도 충분히 있었다.

"그렇게 하면 성에 병사들이 얼마 남지 않을텐데? 아버님이 새로 보내 주신 병사들

을 고려한다고 해도 말야." 조프리가 지적했다.

사이먼은 조프리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이 월터란 작자가 자신의 부하들을 키우기

라도 하면 어떻게 하고? 그리고 피츠휴의 딸은 또 어떻고? 그 여자의 고약한 성질에

대해서는 이미 평판이 자자하잖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우리와 전쟁을 벌일 것인지

,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야 해." 사이먼이 주먹을 쥐어 보였다.

"하지만 형이 자리를 비우면 웨섹스는 공격당하기 쉬워져. 피츠휴의 하수인이나 월

터, 또 해럴드 피슬리는 어쩌구?" 조프리가 거들었다.

"피슬리?" 던스탄은 코웃음을 쳤다. "이제 그는 마리온에게 아무런 권리도 없어."

"그래, 하지만 그녀의 재산에 너무 오랫동안 맛을 들여서 쉽게 포기할 수는 없을

걸. 형을 죽이려고 한 적도 있다면서? 그 인간도 빼놓을 순 없다구." 조프리가 우겼

다.

던스탄은 조심스럽게 동생의 말을 고려해 보았다. 형제들 가운데 조프리가 가장 아

버지와 닮아 있었다. 강하지만 부드럽고 현명하다. 조프리는 형제들 중 가장 현명하

다. 그가 충고하면 듣는 게 좋다. 피슬리가 정말로 공격해 오리라고는 생각지 않지

만, 피츠휴의 계략에도 말려들지 않았던가. 성을 지킬 사람들은 충분히 남겨 두고

몇 명만 보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상황을 정탐할 수 있을 정도로 몇 명만 데리고 가는 게 좋겠다. 부하들 전부를 합

해도 피츠휴의 집을 빼앗을 수는 없을 것 같으니, 거기에 몇 명이나 데리고 갈지는

중요하지 않아. 조용히 가자꾸나. 딸에게 아버지의 죽음을 알리러 간다는 핑계를 대

고."

용감하기로 이름난 남자들이 피츠휴의 말괄량이 딸에 대한 언급에 움찔거렸다. 던

스탄은 혼자 남몰래 웃었다. "나도 내일 함께 떠나겠다."

"하지만 난..." 사이먼이 당혹감과 분노 섞인 표정으로 외쳤다. 던스탄이 놀란 표

정으로 그를 노려보자 마리온이 부드럽게 그의 팔을 손으로 감았다.

"사이먼은 여기에 있는 게 지겨울 거에요, 던스탄. 벌써 자신이 훌륭한 리더라는

걸 증명했잖아요. 당신, 여행이 지긋지긋하다고 하지 않으셨던가요?"

던스탄은 얼굴을 찌푸렸다. 확실히 그런 말을 했다. 하지만 이건 그의 관할 하에

있는 문제다. 만일 뭔가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누군가에게 자신의 일을 맡기는 것

은 그의 스타일이 아니다.

그가 말을 하려고 하자, 그녀는 그의 팔을 감은 자신의 손가락에 힘을 실었다. 하

지만 아내는 어쩌구? 그녀를 여기에, 동생들 틈에 두고 간다구? 다시 가슴을 상처가

아픈 것 같았다. 그녀 없이 보내야 할 밤과, 땅바닥을 침대 삼아 자야 할 생각을

하지 의지가 약해졌다.

"사이먼 형을 보내는 게 가장 합리적인 것 같아, 던스탄 형. 형의 자리는 이곳 웨

섹스야."

아마 조프리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는 동생 편을 드는 듯한 마리온의 사슴 같

은 커다란 눈을 바라보며 툴툴댔다.

"그래, 좋다, 사이먼. 다른 사람에게 내 일을 맡기는 걸 좋아하진 않지만 네가 나

보다 이 일에 훨씬 더 열의를 가지고 있는 것 같으니 네게 임무를 맡기겠다."

사이먼은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그의 눈이 반짝였다. 사이먼은 미소를 지어 보

였다. 평소에는 보기 어려운 그 미소에 던스탄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되돌렸다.

마리온은 바라보자 던스탄은 두 배로 보상받는 기분을 느꼈다. 이곳에 온 후 처음

으로 그녀의 부드러운 눈동자가 숭배의 빛을 가득 담고 있었다. 그 시선에 던스탄은

뼛속까지 따스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녀가 미소짓자 행복한 듯 그녀의 보조개가 살

포시 패었다. 던스탄은 만족감을 느끼며 의자에 편하게 몸을 기댔다.

불쌍한 사이먼더러 갑옷을 입고 무장을 한 채 길을 헤집고 다니라지! 난 여기, 이

곳의 아늑한 내 방에서 내 아내에게 아이나 만들어 주련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