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보라시먼스-늑대와굴뚝새-16화 (17/21)
  • 16

    어두운 하늘 아래 우뚝 솟은 금빛 탑을 보며 마리온은 희망이 솟아나는 것을 느꼈

    다. 아름다움과 힘이 동시에 느껴지는 곳이다.

    형제들이 마당으로 달려 나와 그녀의 주위를 애워쌌다. 일단 성 안으로 들어가자

    마리온은 몸을 떨었다. 마침내 안전해졌다. 하지만 그녀의 임무는 이제 시작일 뿐이

    다. 집에 돌아왔다는 안도감에도 불구하고 편하게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녀는 울면서 조프리에게 그간 사정을 얘기하려 했지만, 그는 너무 감정적이 되어

    그녀의 말을 듣지 못했다. "힘을 아껴요. 아버님께 얘기하세요."

    조프리는 형제들이 질문을 퍼붓는 것도 막으며, 보호하듯 그녀를 안고 있었다. 거

    의 걷지도 못하는 그녀를 안다시피 해서 그녀를 홀로 데려갔다.

    한때 마리온은 이 가족의 일원이 되는 것을 무엇보다도 바란 적이 있었다. 그들은

    그녀를 마치 가족처럼 맞아 주었다. 그녀가 이제 드 부르그 가 사람이 되었다는 것

    도 모르면서도. 다시 눈물이 솟았다. 그녀가 그들의 형인 늑대와 결혼했다는 것을

    알면 뭐라고 할 것인지.

    북받치는 눈물 속에 그녀는 캠피온의 백작, 바로 자신의 시아버지가 우아하게 층계

    를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달려가 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마리온, 마리온, 나의 아가." 그가 부드럽게 달래며 그녀를 의자에 앉혔다. "윌다

    ! 아가씨께 음식과 먹을 것과 마른 옷을 가져다 드려라."

    물에 빠진 생쥐처럼 그녀는 몸을 떨었다. 그녀가 입을 열려고 하자 백작이 아무 말

    도 하지 말라는 표정을 지었다. "뭔가를 먹고 난 뒤에 얘기하려무나. 그리고 우릴

    떠났을 때부터 차근차근 얘기해다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사랑하는 가족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모두들 그녀에게

    말을 걸어오며 친밀한 목소리와 다정한 얼굴로 환영 인사를 했다.

    백작이 얘기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표정을 짓자 마리온은 희미하게 미소를 띠었다.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남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백작의 힘을 잊고 있었다. 큰

    아들과는 얼마나 다른지! 던스탄 생각을 하자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그녀는 침착

    하려 애썼다. 당장이라도 캠피온의 아들들을 끌고 웨섹스로 가고 싶었지만 천천히

    자세하게 얘기를 해야 한다. 그녀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얘기를 시작했다.

    던스탄으로 하여금 그녀를 집으로 바래다 주게 한 백작의 명령이 못마땅했다는 것

    을 말하는 게 어렵긴 했지만, 마리온은 진실만을 말했다. "죄송합니다, 이런 식으로

    은혜를 저버리게 되어서. 하지만 저는 배더슬리로 가는 게 두려웠어요. 그래서 던

    스탄을 속이고 달아나려 했어요."

    일곱쌍의 눈이 그녀에게 꽂히는 게 느껴졌다. 조프리는 헛기침을 했다.

    "그러니까... 던스탄 형으로부터... 도망을 쳤다는 거예요?" 마리온이 고개를 끄덕

    이자 몇 명은 신음 소리를 내었고 스티븐은 웃음을 터뜨렸다. 니콜라스는 경악의 탄

    성을 질렀다.

    "그래요, 하지만 그 사람은 날 언제나 찾아냈죠. 하지만 불쾌해 했어요." 마리온의

    말에 일곱 쌍의 눈들이 더 말 안 해도 알 만하다는 듯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

    세번째엔..."

    "뭐라구요?" 드 부르그 형제들이 그녀가 세 번씩이나 자신들 가운데 가장 맹렬하고

    잘 훈련된 기사인 큰형에게서 도망치려 했다는 말에 입을 모아 소리쳤다.

    마리온은 그들이 조용해질 때를 기다렸다. "세 번째는 어쩔 수 없이 숲속에서 밤을

    보냈어요. 그 다음 날 아침 캠프로 돌아가 보니 모두들 살해당한 걸 발견했어요."

    "어디서?"

    "모두가?"

    "복수해야 해!"

    드 부르그 형제들이 제각각 외치자 아버지가 손을 들어 모두를 조용히 잠재웠다.

    캠피온은 계속 말하라는 눈짓을 보냈다. "그 시체들을 보자, 내 기억이 돌아왔어요.

    내가 겪었던 일과 별 다를 게 없었으니까요. 날 찾았을 를 기억하죠, 사이먼, 조

    프리?" 조프리의 얼굴에 연민 가득한 표정이 떠오르고, 사이먼의 얼굴에 분노가 피

    어올랐다.

    "기억이 되살아나자, 난 내가 누군지 기억났을 뿐 아니라 내 일행을 공격한 사람이

    삼촌이었다는 것도 떠올랐어요. 처음에는 던스탄의 일행을 죽인 것도 삼촌이 날 죽

    이기 위해 한짓이라 생각했어요." 던스탄의 목숨을 구하는 게 잠시라도 지체되길 원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얼른 말을 끝내려 했다.

    "던스탄의 화살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죠. 피츠휴의 부하들이 쓰는 화살이라는

    것을. 지금은 피츠휴에게 잡혀 있어요. 그는 성에 갇혀 있어요. 모두 가야 해요, 당

    장!"

    다시 모두들 웅성거렸다. 캠피온이 모두들 입을 다물라고 명령했다. "마리온." 그

    가 이마를 찌푸리며 물었다. "삼촌은 어떻게 되었지?"

    "삼촌은 날 죽이려 했어요! 날 탑에 가두었는데 던스탄이 구해 줬어요."

    "자, 잠시만." 캠피온이 초조한 표정으로 말을 멈추었다. "마리온을 집까지 바래다

    주러 갔다가, 던스탄이 다시 마리온을 구해서 되돌아왔다구?"

    "네, 삼촌은 그 사람도 죽이려 했어요! 우린 계속 추적당했어요."

    "던스탄과 단둘이?"

    마리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게로군."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며 이곳으로 돌아가자던 자신의 청을 던스탄이 거절한 걸 떠

    올렸다. 그리고 그는 지금 잡혀있다.

    "우린 웨섹스로 갔어요. 하지만 던스탄이 가장 신임하던 부하인 월터가 기다리고

    있었죠. 월터는 던스탄을 배신했어요. 월터와 그의 부하들이 그를 잡아갔답니다, 백

    작님! 던스탄을 말뒤에 묶어서 어디론가 끌고 갔어요!"

    마리온은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쥐죽은 듯 조용한 홀 안에 그녀의 울음소리가 메

    아리쳤다. "그들에게 발각당하진 않았나?" 백작이 부드럽게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손을 내려놓았다. "아뇨, 던스탄이 숨어 있으라고 해서 기다

    리고 있었어요. 그리고 여기로 온 거에요."

    모두들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다. 니콜라스가 숨죽인 목소리고 말했다. "혼자 웨섹

    스에서 여기까지 오신 거예요?"

    마리온은 그를 바라보았다. 미소라도 지어 보이고 싶었지만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여섯 쌍의 눈동자가 감탄하는 듯한 시선으로 그녀를 보았다. 예전 같

    으면 뿌듯해했겠지만, 그들의 존경을 받는 대가가 너무도 큰 것이 고통스러웠다.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그이는 사흘 전에 잡혔고, 월터는 그이를 피츠휴에게 넘겨

    준다고 했어요. 그들은 던스탄을 망치려 들 거에요. 난 알아요."

    사이먼이 벌떡 일어섰다. "그럼 모두 가자구! 피츠휴란 작자에게 캠피온의 힘을 보

    여 주자구. 왜 꾸물대는 거야?"

    "잠깐 기다려 봐." 조프리가 나섰다. "이대로 웨섹스로 쳐들어 간다면 던스탄 형을

    죽일지도 몰라. 집요한 접전 끝에 형의 성을 파괴할 수도 있다구."

    "조프리 형 말이 맞아." 레이놀드가 말했다.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하는 것이 놀라

    웠다.

    "큰형을 인질로 잡고 돈을 요구할 수도 있다구." 로빈이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리온이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던스탄의 말에 따르면 그는 오랫동안 웨섹스를

    탐내 왔대요. 그 사람은 던스탄을 죽이고 싶어해요."

    "몇 명의 정예 부대만 이끌고 몰래 침투해 들어가야겠군." 조프리의 말에 모두들

    생각에 잠겼다.

    그때 막내가 입을 열었다. "내가 길을 알아. 형이 예전에 비밀 통로를 보여 준 적

    이 있어."

    "우리 모두 가자구." 로빈이 말했다.

    "그래!" 모두들 소리 높여 외쳤다. 마침내 드 부르그 가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가

    되었다.

    "사이먼, 네가 선두를 지휘하거라." 캠피온이 말했다. "하지만 조프리의 의견을 잘

    듣도록 해라. 주의를 끌지 않고 성을 수복할 수 있을 정도의 소수의 군사만 이끌고

    가거라. 불행히도 우린 그 안의 상황이 어떤지 모르고 있으니, 니콜라스는 따라가

    서 길을 정확하게 알려 주어야 한다. 나머지는 너희들이 의논해서 하거라."

    모두들 가겠다고 나서는 걸 들으며 마리온은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생각했던 대로

    모두들 던스탄을 도우러 간다. 모두를 끌어안고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은 마음을

    꾹 눌렀다. 하지만 나는? "나도 가겠어요." 그녀가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이!" 사이먼이 던스탄을 연상시키는 모습으로 으르렁대자 마리온은 미소를 지

    을 뻔했다.

    "당신은 안전한 이곳에 남아 있어요." 조프리가 말했다.

    "이건 여자가 끼여들 일이 아니라구." 로빈이 투덜댔다.

    "흠." 캠피온의 중얼거림에 모두들 조용해졌다. 캠피온은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긴 시선으로 마리온을 바라보았다. "아마 마리온이 우리에게 빠뜨리고 얘기하지

    않은 게 있는 듯하구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한 캠피온의 시선에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아무에게도 말

    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던스탄과 결혼했다는 사실을 모르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캠

    피온은 뭔가 낌새를 챈 모양이었다. 이제 속이려 해봐야 소용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심호흡을 한 뒤 진실을 털어놓았다.

    "던스탄은 내 남편이에요." 그녀가 속삭였다.

    그녀가 마침내 고개를 들자 모두들 입을 떡 벌리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캠피

    온이 말했다. "축하한다, 아가."

    수줍어하며 그녀는 무릎 위에 놓인 손을 바라보았다. "그와 결혼하고 싶진 않았지

    만, 그인 그게 날 삼촌에게서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목사님 앞에서 행해진 합법적인 결혼실이었겠지?" 캠피온이 물었다.

    마리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물론 결혼은 성립되었겠지?"

    마리온은 백작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얼굴을 발갛게 붉히며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식도 하기 전에 함께 잔 걸 알면 뭐라고 할지...

    캠피온이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그는 역시 나이에도 불구하고 매력적인 남자였다.

    그의 아들들의 거친 매력은 아버지를 닮은 것이다. 그는 은밀한 미소를 지으며 일

    어서서 그녀의 등을 두드렸다. "자, 그럼. 가족의 일원이 된 것을 환영한다!"

    던스탄은 어둠 속을 노려보며 들려 오는 소리의 의미를 깨닫고 신음했다. 물이 똑

    똑 떨어졌다. 비다. 비가 심하게 오면 지하 감방은 물에 잠긴다. 그는 고개를 젖히

    고 해가 뜨길 빌었다. 비록 자신이 갇힌 이곳에서 해는 볼 수 없겠지만.

    빗방울 소리가 점점 커지자 던스탄은 눈을 감고 마리온을 떠올렸다. 나의 아내. 그

    녀에게 키스하며 그녀를 어루만지며 그녀가 자신의 것이라 주장하던 때를. 마지막

    며칠간 웨섹스로 돌아오려는 자신의 열정에 휩싸인 나머지 그녀와의 잠자리를 소홀

    히 한 자신을 나무라며.

    이제 던스탄은 상상으로밖에 할 수 없었다. 던스탄은 그녀를 무아경으로 몰아가는

    상상을 했다. 여태껏 안아 봤던 그 어떤 여자와도 다르게 그를 기진맥진하게 만들었

    던 그녀. 그러고는 그녀를 끌어안는 끝없는 상상에 빠져들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그녀. 야생화 같은 그녀의 향기가 자신 주위를 맴도는 것 같았다. 그녀의 미소, 그

    녀의 보조개...

    그는 잠이 들었다.

    던스탄은 시간 감각을 잃었다. 월터는 그를 감방에 던져 넣고는 이틀 동안 먹을 것

    은 고사하고 마실 것도 주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그러고는 그를 사슬에 묶어 피츠

    휴의 앞으로 끌고 갔다. 그는 자신이 짐승이 된 느낌이었지만 자신의 가문과 아버지

    를 떠올리며 꼿꼿이 서 있었다.

    나이를 알 수 없는 작고 마른 피츠휴는 값비싼 옷으로 몸을 휘감고 공작처럼 뽐내

    고 있었다. 그는 던스탄이 위엄을 지키는 걸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월터에게 그

    를 몹시 후려쳐 그 <건방진 드 부르그 가의 태도>를 없애 버리라고 명령했다. 그래

    서 던스탄은 곤봉으로 얻어맞았다. 바로 자신의 홀 안에서. 한때 그의 하인이었던

    자들은 그림자 뒤에 숨어 공포에 가득 찬 시선으로 그를 지켜 보았다.

    월터는 보호 장갑을 낀 손으로 그를 후려쳤다. 입 안에 피 맛이 느껴졌다. 맞서 싸

    우고 싶었다. 그는 팔다리를 얻어맞으면서도 움찔거리지 않았지만 팔을 얻어맞고는

    그대로 고꾸라졌다. 숨이 막혀 일어설 수도 없었다.

    마침내 만족한 피츠휴는 뼈만 남은 손으로 박수를 치며 웃어댔다. 그러고는 다시

    어두운 굴 속으로 던져 넣었다. 그게 어제인지 그저께인지 알 수 없었다. 온몸이 비

    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는 다시 끌려나갈 일을 기다리며, 위에서 물이 떨어지는 소

    리를 들으며 시간을 보냈다.

    지금 위쪽에서 뭔가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온 모양이다. 던스

    탄은 눈을 떴다. 비록 몸은 사슬에 묶여 힘을 박탈당했으나 그의 머리는 살아 있었

    다.

    "던스탄?"

    머리 쪽에서 짧은 속삭임이 들렸다. 누굴까, 부하 중 하나 일까. 모두들 죽거나 잡

    히거나 피츠휴에게 충성을 맹세한 줄 알았는데...  어둠속에 불빛이 보였다. 던스탄

    은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여기요."

    "던스탄! 하나님!" 그 낯익은 목소리에 던스탄은 사슬에 묶인 채 몸을 비틀었다.

    설마, 그럴 수가. 하지만 머리 위에 얼굴을 드러낸 것은 동생 조프리였다. 정말 조

    프리인가? 자신이 고통과 굶주림 때문에, 아니면 피츠휴의 속임수 때문에 환상을 보

    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지만 이게 피츠휴의 속임수라면 왜 하필 조프리가?

    "조프?"

    "던스탄! 오, 하나님!" 조프리의 얼굴이 횃불 아래 하얗게 빛났다. 던스탄은 바닥

    에 묶여 여기저기 멍들고 피로 범벅이 된 더러운 옷을 입고 누워 있는 자신이 마치

    죽은 것처럼 보이리라 생각했다. 조프리의 낮은 비명이 돌벽에 메아리쳤다. 조프리

    가 열쇠를 짤랑거렸다. "참아, 형. 내가 열쇠를 가졌어."

    "조프?"

    "응. 나야, 던스탄 형." 족쇄를 푸는 조프리의 얼굴이 긴장되어 있었다. 안도의 숨

    을 내쉬며 던스탄은 동생의 넓은 어깨에 팔을 두르고 몸을 의지했다. 언제부터 학자

    같던 조프리가 날 부축할 정도로 넓은 어깨를 가지게 되었는지. 던스탄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도 이게 꿈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어둡고 습기찬 통로에 형제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들 숙덕거리며 의논을 했다.

    제대로 다 듣지는 않았지만 조프리의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형을 데리고 비밀

    통로를 빠져 나가. 형은 싸울 만한 상태가..."

    "잠깐만, 조프." 던스탄이 끼어들었다. 제대로 설 수 없다고 해서 공부 벌레 동생

    에게 아이 취급을 받을 수는 없다. "이건 내 성이야."

    "형에게 칼을 건네 줘." 스티븐이 딱딱하게 말했다. 스티븐? 이건 분명 환상이다.

    건달 같은 동생이 웨섹스의 지하에 기어들어 오다니! 피츠휴가 음식에 무슨 약초를

    섞은 게 분명하다. 그래서 아직도 감방에 묶여 누운 채로 생생한 환상을 보고 있는

    거다. 동생들과 서서 논쟁을 벌이는 환상을.

    누군가가 그의 손에 무기를 쥐어주고는 비척거리는 그를 끌고 환한 밖으로 나갔다.

    어둠 속에서 며칠을 보낸 뒤라 환한 빛에 움찔하며 그는 벽에 기대어 서서 눈을 깜

    빡이며 앞이 보일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자 조프리가 그를 끌고 홀로 뛰어들어갔다.

    "피츠휴가 보이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방 저쪽에서 외치자 몇 명이 나누어져 그를

    찾기 위해 이층으로 달려 올라갔다. 홀은 텅 비어 있었다. 뒤집어진 테이블 몇 개

    만이 이곳에서 싸움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열린 문 틈으로 그는 성 안

    에서 전투가 벌어졌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있었다. 누가? 왜? 조프리의 부축을 거절

    하며 그는 앞으로 나섰다. 피츠휴의 부하들은 아무것도 아니었군!

    "니콜라스, 여기서 던스탄 형과 있어라. 난 그들을 도와 피츠휴를 찾겠다." 조프리

    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주방 쪽으로 사라졌다.

    니콜라스? 니콜라스라구? 내 몸을 부축하고 있는 게 내 꼬마 동생이라구? 던스탄은

    뒤로 물러서며 혼미한 머리를 감쌌다. "니콜라스?"

    "응. 나야, 형. 형이 내게 보여 준 비밀 통로를 기억해 내서 우리가 형의 성을 되

    찾을 수 있었어." 소년은 의기 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미소지었다.

    "잘했다, 니콜라스." 목소리가 이상하게 갈라졌다. "난 아직도 제대로 머리가 돌아

    가지 않는구나."

    "사이먼 형이 저항하는 세력들을 진압했어." 니콜라스가 열려진 문을 가?A?갭?말

    했다. "그런데 피츠[A휴가 보이질 않네. 여기 어디 숨었을 만한 곳 없어?"

    피츠휴가 성 안 어딘가에 있단 말이지. 던스탄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무도회장으로

    쓰이는 방에 비밀스런 연인들이 몰래 만나는 데 사용하지 위해 만든 것 같은 숨겨

    진 방이 있었다. 자신이 갇혀있던 감옥만큼이나 조그만 그곳이 떠올랐다.

    던스탄은 고개를 들고 턱으로 위층을 가리켜 보였다. "저 위야." 그는 니콜라스에

    게 말하고는 어디에 힘이 남아 있었는지,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의 속도로 성큼 뛰어

    올라갔다. 막내 동생이 그를 쫓아오려 애썼다.

    흐릿한 머리가 깨끗해진 것은 복수심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거의 의식이 깨어난 것

    은 복수심, 혹은 승리의 확신 때문이었다. 던스탄은 힘차게 무도회장으로 연결된 계

    단을 올라갔다.

    홀에 서 있는 로빈을 지나쳤다. 이젠 동생들이 도처에서 나타나는 데 익숙해졌다.

    로빈은 한 마디 말없이 그를 따랐다. 세 명이 조용하고 텅 빈 무도회장으로 뛰어들

    었다.

    던스탄은 망설이지 않고 벽 한 면을 가리고 있는 커다란 태피스트리로 다가가 그것

    을 확 잡아당겼다. 니콜라스는 그 뒤에 감춰져 있던 나무 문을 보며 짧게 숨을 들이

    마셨다.

    "나와, 이 자식!" 던스탄이 외쳤다.

    안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던스탄이 문고리를 돌려 보았지만 꽉 잠겨

    있었다. 누가 그 안에 있는 것이다.

    "불을 질러서 기어나오게 하자." 던스탄의 말에 로빈이 밖으로 뛰어나가 횃불을 건

    네달라고 외쳤다. 그 소리가 들렸는지, 로빈이 나가자마자 문이 열리며 피츠휴가 걸

    어나왔다. 화려한 옷차림에 긁힌 자국 하나 없었다.

    "이런, 이런, 웨섹스." 고개를 높이 쳐들고 있었지만 피츠휴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인식한 듯 구석에 몰린 생쥐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그래, 아직도 멀쩡히 서 있

    구만. 그래, 놀라워. 하지만 얼마나 그렇게 더 서 있을 수 있겠나?" 그의 시선이 니

    콜라스에게 닿았다. "너, 거기 소년. 날 여기서 나가게 해주면 후하게 상을 내리겠

    다."

    니콜라스가 황당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는 동안 피츠휴는 천천히 구석에서 걸어나

    왔다. "서둘러라, 소년아. 이 험상궂은 남자를 해치우고 날 여기서 나가게 해다오."

    그가 명령했다. 니콜라스가 대답하지 않자 피츠휴는 교활하게 미소지었다. "그래,

    넌 누굴 공격할 힘도 없겠구나. 그리고 웨섹스, 자네는 말이야, 바닥에 발을 붙이고

    있다는 게 놀랍군..."

    피츠휴는 재빨리 문가로 움직였지만 로빈이 문을 가로막았다.

    "너! 내 앞에서 비켜!" 그가 절망적인 목소리고 외쳤다.

    "내가 누군지 알아?"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아마 피츠휴일 테지." 로빈이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 난 피츠휴야. 난 내려가겠어. 날 호위해라. 후한 상을 내리마."

    "당신이 내리는 상 따위엔 관심 없다." 전쟁보단 유쾌한 농담을 즐기던 로빈이 다

    리를 벌리고 칼집에 손을 갖다 대며 싸울 태세를 취했다.

    피츠휴가 버럭 소리질렀다. "내 말 들어, 바보야! 난 네가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부자라구. 날 잘 받들면 네가 원하는 모든 걸 주겠다. 금, 보석, 집, 땅,

    네가 원하는 것 모두를!" 피츠휴가 모두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 딸까지도 말야."

    로빈이 코웃음쳤다. "그런 말괄량이는 줘도 안받아. 그 성깔에 대해 익히 들었지."

    피츠휴는 모욕에도 까딱하지 않고 초조하게 입술을 축였다. "웨섹스에게 아무것도

    없다는 건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서둘러라. 날 가게 해다오."

    "네 말은 틀렸어, 피츠휴. 던스탄에게는 네가 평생 가질 수 없는 게 있어. 그에겐

    우리가 있거든." 로빈이 손짓으로 니콜라스와 자신을 가리켰다.

    "우리라니? 웨섹스에게 충성심을 느낄 필요는 없다. 이 친구야. 그의 오른팔이었던

    월터 에이브리조차 내 편이 되었어. 너도 내 편이 되어다오." 이제 피츠휴의 목소

    리엔 절망이 가득했다.

    "하하! 에이브리 따위는 죽여 마땅해. 그 자식은 돈 주고 산 창녀나 다름없어." 던

    스탄은 어린 소년이 그토록 신랄한 말을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노력을 아끼라구, 피츠휴. 날 살 수는 없을걸. 난 로빈 드 부르그야. 웨섹스는 내

    형이라구."

    놀라움과 자부심이 던스탄의 가슴을 뿌듯하게 했다. 자신이 이토록 감동받을 수 있

    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피츠휴가 창백해졌다. 로빈에게 뻗었던 손이 덜덜 떨렸

    다. 그는 니콜라스에게 예리한 시선을 보냈다. 마침내 모두에게서 닮은 구석을 발견

    했다.

    "우리 형이기도 해. 난 니콜라스 드 부르그야." 소년이 외쳤다.

    끔찍한 욕을 해대며 피츠휴는 칼을 빼어들고 로빈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로빈은

    가볍게 옆으로 물러서며 자신의 칼을 크게 휘둘렀다.

    "안 돼, 로빈! 그자는 내꺼야!" 던스탄이 외치자 로빈은 손을 멈칫했다. 늑대는 달

    아나는 피츠휴의 뒤를 쫓았다.

    피츠휴가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 중간에서 돌아서서 싸울 태세를 취했다. "네 머리

    는 어떤가, 웨섹스? 중심을 잡을 수 있나? 여긴 가파르고 미끄러워."

    예전 같았으면 그런 늙은이 따위는 한방에 보낼 수 있었겠지만, 멍투성이에 약해진

    그는 조심스레 층계를 내려가 그에게 다가갔다. 호화스런 옷을 입고 있는 피츠휴와

    찢어지고 피로 얼룩진 옷을 입고 있는 던스탄의 결투 장면에 모두들 숨죽였다.

    피츠휴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이리저리 교활하게 뛰어다닐 때 던스탄은 자리에 가

    만히 서서 천천히, 그러나 조심스럽게 움직여 다가갔다. 피츠휴는 마침내 계단 끝에

    서 뛰어내리며 홀을 가로질러 달아나려 했지만, 역시 드 부르그 가 사람으로 의심되

    는 세 명의 커다란 몸집을 한 검은 머리의 남자가 그를 막았다. 피츠휴는 욕을 지껄

    이며 죽음 앞에서 마지막 힘을 짜내어 던스탄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광폭한 칼날은 던스탄의 가슴에 핏빛 선을 남겼다. 그러나 피츠휴의 기쁨도

    잠시, 던스탄은 그 상처에 비틀거리지 않고 자신의 칼을 해머처럼 휘둘렀다. 던스탄

    의 칼날이 피츠휴의 몸에 깊숙히 박히자 피츠휴는 눈을 크게 드고 바닥으로 쓰러졌

    다.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나 복수의 달콤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정의가 실

    현되었다는 냉철한 생각뿐. 이제 웨섹스는 완전한 그의 것이다.

    피츠휴의 시체에서 칼을 거두며 그는 희미하게 니콜라스의 환성과 다른 형제들의

    감탄의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한 것도 잠깐 그 소리는 점점 희미하게 작아졌다. 던스

    탄은 피범벅이 된 가슴에 손을 얹으며 자신의 칼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갑자기 발이 비틀거렸다. 더 이상 서 있을 힘이 없었다. 그러고는 바닥으로 쓰러졌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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