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보라시먼스-늑대와굴뚝새-10화 (11/21)
  • 10

    마리온은 이불 속에 몸을 묻고 눈을 내리깐 채 던스탄을 바라보았다. 하루 종일 거

    의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혼자 분노를 삭였고, 그는 생각에 잠겼다. 그는 늑대처

    럼 초조하게 앞을 향해 걸어가며 숨결 사이로 낮게 으르렁댔다. 그는 몇 번 갑자기

    그녀를 잡은 것 외에는 줄곧 그녀와 간격을 유지했다. 그가 다가왔을 때 마리온은 그

    의 녹색 눈에서 어두운 욕망이 번득이는 것을 보았다고 확신했다.

    그녀는 자신이 괜한 상상을 하는 거라 자신에게 속였다. 그의 머리 속은 그녀가 아

    니라도 충분히 복잡할 것이다. 게다가 그는 날 좋아하지도 않고 날 믿지도 않는다.

    심장이 따끔거렸다. 마리온은 목에 뜨거운 것이 치미는 것을 느꼈다. 그의 불신은 캠

    피온의 성벽차럼 차갑고 건조했다.

    고통스러웠지만, 늑대의 그런 태도를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그녀의 이야

    기를 들어 중 것만도 기적이었다. 던스탄 드 부르그는 반만 믿거나 하는 사람이 아니

    다. 그는 단순 명료한 것을 좋아한다. 마리온은 자신의 삶이 절대 단순 명료할 수 없

    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슬픈 미소를 지었다.

    피로가 밀려와 그녀를 자꾸만 잠의 나락으로 끌고 가려 했지만 그녀는 잠들지 않으

    려고 애썼다. 그녀는 던스탄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의 검은 머리와 완고해 보이는 광

    대뼈, 그리고 근육질의 몸. 천천히 전에 피어올랐던 열기가 다시 그녀의 몸을 엄습했

    다.

    그는 암살자의 추적을 막기 위해 불을 피우지 않았다. 챙겨 온 음식들을 먹고 나무

    아래 잠자리를 폈다. 그는 나무 등걸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약간 벌려 앞으로 쭉 뻗

    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마리온은 그 모습에서 익숙함을 느꼈다. 그녀는 그를 떠날

    때를 대비해 그 모든 것을 기억 속에 갈무리하고 싶었다. 그의 짙은 눈썹과 피부, 커

    다랗지만 온화한 손의 생김새, 손등을 덮은 털...

    온몸의 감각이 생생히 깨어나는 바람에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저 그의 손을

    보았을 뿐인데 몸이 떨리는 이유는 무얼까. 그의 손은 한번의 접촉만으로도 그녀를

    아찔하게 만들 수 있는 힘이 있었다.

    그의 손가락에서 시선을 떼며, 마리온은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그의 가슴을 보면서

    그가 잠들려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지 생각해 보았다. 발도 아프고 몸도 피곤했지

    만, 그가 잠이 들었다고 확신할 수 있을 때까지 깨어 있어야만 한다. 바로 그때 도망

    칠 계획이었다.

    탈출의 기쁨 따윈 없었다. 오직 그 필요성 만을 느낄 뿐. 한 때는 그를 속이는 게

    흥미진진했지만, 지금은 말도 안 되는 갈망만을 느끼로 있었댜. 던스탄의 잃어야 한

    다는 것이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고통이었다. 기억이 돌아옴에 따라 슬픔도 생생

    하게 되살아났다. 돌아가신 부모님과 살해당한 일행들, 하지만 던스탄에 대한 사랑이

    너무도 컸기에, 그를 떠나야 하는 슬픔 또한 컸다.

    아무리 그를 사랑한다 할지라도, 그 때문에 헛되이 죽을 수는 없다.

    삼촌에 대한 기억이 돌아온 지금, 배더슬리에서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추측

    이 아닌 확신이었다. 해럴드 피슬리가 어젯밤의 암살을 지시했는지는 확신할 수 없지

    만, 영겁처럼 느껴지는 지난 가을날 아침에 살해당한 자신의 하인을 죽이라고 명령한

    것이 삼촌임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혼자만이 슬픔과 고통 속에 남겨졌던 지난날

    들을 떠올렸다. 그 뒤의 공허한 나날들. 날이 갈수록 사나워져 가는 삼촌이 두려워

    자신의 그림자 속에 숨어 지내던 나날들.

    마리온은 그때의 자신을 위해 울고 싶었다. 과거의 그녀였더라면 절대 드 부르그 형

    제들 틈에서 몸을 가누지 못했을 것이다. 웨섹스의 늑대와 언쟁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을 것이다. 그때의 그녀였더라면, 그가 자신을 나무 위로 들어올렸을 때, 그의

    몸과 녹색 시선으로 그녀를 그 자리에 못박았을 때 곧장 기절했을 것이다.

    마리온은 씁쓸한 미소를 띠며, 기억을 잃었던 것이 차라리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

    덕에 그녀는 새로운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눈을 감자 던스탄의 얼굴이 떠올랐다.

    밤의 한기를 녹일 만큼 따스했다. 정말 용기가 있다면 자신을 늑대에게 바치고, 그

    의 손에 몸을 맡길 수 있을 텐데.

    마리온은 퍼뜩 눈을 뜨고는 어둠 속에 가려진 던스탄의 몸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졸

    았을까. 그녀는 어두운 주위를 훑어 보며 자신의 피곤한 몸을 저주했다. 이젠 달아나

    기에 너무 늦었을지도 모른다. 늑대의 낮고 고른 숨소리를 들으며 마리온은 숨을 죽

    인 채 기다렸다. 그가 잠이 들었다는 확신이 들자 자리에서 천천히 조심스럽게 일어

    서며 도망갈 준비를 했다.

    이번에는 그도 날 따라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는 웨섹스로 돌아가야 하는

    몸이 아닌가. 시시한 여자 하나보다는 웨섹스에서의 일이 훨씬 더 중요할 것이다. 나

    를 놓아 주고 자신의 일이나 돌보면 좋으련만. 마리온은 조용히 몸을 돌려 한 발짝

    내딛뎠다.

    "어디 가나, 굴뚝새?"

    마리온은 어둠 속에서 터져 나온 질문에 놀라 거의 펄쩍 뛰다시피 했다. "목이...

    말라서요. 물을 어디다 두었죠?"

    "바로 당신 곁에 있소." 마리온은 그의 차가운 말투 아래 깔린 분노를 읽을 수 있었

    다. 확실히 그는 그녀를 믿지 않는 듯했다. 잠도 자지 않고 그녀를 지키는 그 앞에서

    어떻게 도망칠 수 있을지. 그녀는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물통을 내려놓고 어둠 속의

    그를 노려보았다. 남자는 화를 내고 있었다.

    "잊지 마시오, 마리온. 그게 마지막으로 도망친 거였소." 던스탄이 불쑥 말했다.

    뭐라고 말대꾸를 하려고 했지만, 배더슬리까지 늑대의 어깨에 매달려 가고 싶진 않

    았다. 그가 특히 이런 분위기일 때는 가만히 있는 게 좋다. 그의 말을 잘 따르고 있

    다는 인상을 심어 줘야 한다. 그가 그녀를 믿게 되었을 때 원하는 일을 하리라.

    "네, 던스탄." 그녀는 수줍게 대답했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끙 소리를 내자 마리온은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참았다. 그

    는 그녀의 말을 받아들이기로 한 듯, 사뭇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삼촌

    이 어떤 인간인지는 내 눈으로 직접 판단하도록 하겠소. 걱정할 필요없소, 굴뚝새.

    아무도 당신을 죽이지 못하게 할테니."

    그 말에 마리온의 마음은 잔뜩 부풀었다. 그에 대한 넘치는 사랑을 그가 눈치채지

    못하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그가 날 믿어주기만 한다면. 상황이 달랐더라면.

    "자, 이리 와서 나와 같이 누워요." 던스탄이 손을 내밀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바람에 온몸이 짜릿할 정도의 반응을 보였다. 남

    녀 사이의 일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지만, 그런 제안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웨섹스의 늑대가 날 원하기라도 하는 걸까. 마리온은 앞으로 몸을 숙였다. 그에 대한

    사랑이 숙녀로서의 몸가짐이나 상식 따위를 잊게 했다.

    던스탄이 당황한 듯 새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옆에 잠자리를 만들라고, 굴뚝새.

    그리고 좀 자두도록 하시오." 그가 차갑게 명령했다. 자신이 착가했다는 것을 깨닫자

    실망감이 퍼졌다. 그는 그녀와 한 이불 속에서 자자는 뜻이 아니었다. 자기 옆에서

    자라는 것일 뿐이었다. 아마도 그녀가 다시 도망가려는 계획을 사전에 봉쇄하기 위해

    서였을 것이다. 그걸 깨닫자 갑자기 눈이 따끔거렸다.

    정말 바보 같기는! 오늘 하루 동안 평생에 걸쳐서 볼 시체들을 다 보았는데, 겨우

    던스탄 드 부르그가 자신에게 키스해 주지 않는다고 눈물을 흘리다니! 마리온은 씁쓸

    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표정을 그가 볼 수 없는 게 다행이었다. 어둡긴 했지만 자

    신을 향해 내민 그의 손은 볼 수 있었다.

    그녀는 고분고분 담요를 주워들고 머뭇거리며 다가갔다. 그는 아직도 손을 내밀고

    기다리고 있었다. 마리온은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자신의 장갑을 벗어 맨손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멋졌다. 그의 손은 따뜻하면서도 강했다. 이미 그러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자

    신의 맨살에 느껴지는 그의 촉감이 이정도로 멋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녀의 피부

    와는 달리 거칠고 단단했지만 온화했다. 그녀는 그의 손에 자신의 손바닥을 비비고

    싶었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초조하게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당황한 마리온은 고개를

    들고 어둠 속에서 그의 얼굴을 바라보려 노력했다.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지만,

    그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녀의 심장 고동 만큼이나 빠른 그의 숨소리를. 길

    고 긴 시간이 흘렀다.

    "잠이나 자요." 마침내 던스탄이 그녀의 손을 놓고 거칠게 명령했다. 그녀는 잠깐

    후회했지만 어쨌든 기분은 좋았다. 자신의 맨손으로 그를 마침내 만져 본 것이다. 이

    제 떠날 때 그 기억도 가지고 갈 수 있으리라. 나무에 기대는 그의 곁에 누우며, 마

    리온은 담요를 머리끝까지 뒤집어 쓰고 눈을 감았다.

    던스탄의 체온이 느껴졌다. 다시 한 번 그의 든든한 몸에 안겨 잠들고 싶었지만 그

    녀는 탈출해야 한다. 이 남자도 인간인 만큼 잘 때가 있을 것이다. 그가 잠이 들었을

    때, 자신은 준비되었기를 바랐다. 하품을 참으며 그녀는 깨어 있어야 한다고 다짐했

    다. 하지만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그녀의 생각이 둥둥 떠다니며 눈앞에는 던스탄의

    손의 영상이 춤을 추었다.

    마리온은 웃으며, 그의 헝클어진 검은 머리에 키스하는 꿈을 꾸었다. 자신의 맨손으

    로 느껴 본 그의 기다란 손가락과 거친 손바닥에 키스하는 꿈을 꾸었다.

    비에 잠이 깼다. 새벽녘에 나뭇잎 사이로 빗방울이 하나둘씩 떨어지며 그녀가 눈을

    뜰 때까지 그녀의 얼굴을 때렸다. 멍하게 잠이 덜 깬 상태라 마리온은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깨닫는 데 몇 분이 걸렸다. 주위를 둘러보자 던스탄은 벌써 일어나 짐을 챙

    기고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마리온은 그에게 무언가 던지고 싶을 정도로 얄미운

    생각이 들었다.

    오늘도 또 하루종일 걸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지긋지긋했다. 온몸이 쑤시고 발에

    는 물집이 잡혀 있었다. 푹신한 침대에 누우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꿈일 뿐, 현실에선 평소보다 더 어두운 분위기의 그와 숲속에 있을 뿐이었다.

    계속해서 내리는 빗줄기로 길의 윤곽이 흐릿해져 있었다. 던스탄은 낮게 욕설을 지

    껄이며 곧 위스버러에 닿을 거라 말했다. 하지만 계속 언덕과 내리막길만 계속되자

    마리온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마을에 곧 도착할 것이란 말은 더 이상 위안이 되지

    못했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배더슬리에 가까워지고 있으니.

    아직 탈출의 꿈을 버리진 않았지만 진흙으로 돌변해 버린 이곳을 어떻게 탈출할지도

    막막하기만 했다. 여기저기 움푹팬 진흙 구덩이를 피하는 것만으로도 힘겨웠다. 곧

    그녀는 옷속까지 흠뻑 젖게 되었다. 게다가 지쳤고, 처량한 기분마저 들었다.

    던스탄은 기사답게 그녀를 고문하는 도로 상황에도 아랑곳없이 의연하게 뚜벅뚜벅

    잘만 걸었다. 그의 침묵이 그녀를 분통터지게 했다. 그녀가 미끄러져 넘어지려고 할

    때야 겨우 그녀의 존재가 기억났다는 듯 팔을 내밀어 그녀를 부축했다. 그러나 점점

    그의 손길은 기사도 정신의 발로에서 짜증스런 잡아당김으로 변했다.

    그녀는 그에게 지기 싫어서 늑대처럼 크고 우아하게 발을 옮겨 놓으려고 애썼지만

    어색하게 휘청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그녀는 또다시 미끄러졌고, 그가 팔목을 꽉 움

    켜쥐지 않았더라면 진흙탕에 얼굴을 쳐박을 뻔했다. 그녀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제자

    리에 서서 비를 맞으며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서 앞에

    서 걸어가는 던스탄을 노려보고 있었다. 던스탄은 그녀가 쫓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

    달은 듯, 돌아서서 그림자진 눈동자로 질문을 던지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머

    리속을 스친 생각은 비에 젖은 그의 머리카락이 이마에 들러붙고 광대뼈에서 입가로

    빗물이 줄줄 흘러내려도 그는 변함없이 잘생겼다는 것이었다.

    그녀 안에 그에 대한 희망없는 사랑이 고이자 마리온은 화가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의 찡그리는 얼굴을 흉내내며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놀랍군요, 던스탄

    드 부르그. 아예 내 몸에 밧줄이라도 묶어서 끌고 가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군요."

    얼떨떨한 그의 표정으로 보아 그는 자신이 그녀를 거칠게 다루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듯 했다. 또다시 의지와는 상관없이 마리온의 심장이 녹아 내렸다. 하지만 그

    녀는 애써 입가에 조소를 띄고 말했다. "던스탄, 당신이 날 거칠게 다루는 통에 온몸

    이 멍투성이라고요! 당신은 날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난 여자에요. 난 돌과 가죽으

    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고요."

    그는 그녀를 태워 버릴 듯 오랫동안 조용히 그녀를 응시했다. "내 말 들어요, 굴뚝

    새 아가씨." 그는 낮고 거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난 당신이 여자란 걸 아주 똑똑

    히 알고 있소."

    그의 목소리엔 마리온의 숨을 멎게 하는 뭔가가 있었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짐작하

    지 않으려고 애썼다. 도대체 여태껏 몇 번이나 던스탄 드 부르그가 자신을 의식하고

    있다고 착각했던가?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았지만 여태 아무 일도 없었다. 그의 눈

    길이 어두워지자 그녀는 긴장했다. "그럼 날 움켜 잡는 걸 그만두세요!"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가 여자라는 걸, 그것도 하찮은 여자라는 걸 잘 알고 있

    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가 당신이 구덩이에 머리를 쳐박도록 내버려 두란 말이

    오?"

    "아뇨."

    "그럼, 마리온. 대체 원하는 게 뭐요?" 그의 거만한 목소리에서 자신을 멍청한 여자

    라 업신여긴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다시금 성질이 발동했다.

    "내가 뭘 원하냐구요? 내가 뭘 원하는지 가르쳐 드리지요, 던스탄 드 부르그, 웨섹

    스의 남작 나리. 난 이걸 그만두면 좋겠어요." 그녀는 주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

    것도 지금 당장. 왜 이 빗속을 뚫고 사형 집행장까지 끌려가야 하는 거죠? 당신이 날

    살인자의 손에 데려가고 있다는 것만 해도 불쾌한데, 꼭 날 고문까지 해야겠어요?"

    그가 입술을 꼭 다무는 것을 보니 그가 화가 났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마리온

    은 끝까지 말했다. "돌아가요, 던스탄. 제발! 날 캠피온이든 웨섹스든, 가장 가까운

    마을이든, 아무 곳에나 데려다 줘요. 아니면 날 그냥 여기에 내버려 두고 가서 당신

    일이나 처리하시라고요!" 그녀는 그를 쫓는 시늉을 해 보였다.

    "가서 내가 당신 부하들과 함께 살해당했다고 모두에게 말하세요. 조그만 거짓말 하

    나 한다고 크게 나쁠 건 없잖아요. 그럼 나도 살 수 있다고요!"

    "내 아버님은... " 던스탄이 얼굴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지만 마리온은 그에게 기회

    를 주지 않았다.

    "당신 아버님은 내가 어찌되든 상관치 않으세요. 내 삼촌은 내가 죽었단 소식을 들

    으면 좋아서 춤이라도 추실걸요? 날 죽이는 수고를 덜고 내 땅도 차지할 수 있을 테

    니 좋아하실만하죠." 그녀는 지친 눈으로 던스탄을 살폈다.

    "얘기 끝났소?" 그가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

    "아뇨, 아직이에요." 마리온은 곁에 있는 바위에 주저 앉았다. "난 여기 있을래요.

    그러니 이제 가세요." 그녀는 손으로 가라는 시늉을 해 보였다. "날 좀 내버려 두세

    요."

    그는 웃지 않았다. "당신이 고집을 피운다면 난 당신을 어깨에 둘러매고 갈 수밖에

    없소. 지금 스스로를 처량하게 여기나 본대, 내 어깨 위에서 이리저리로 부딪히면 또

    다른 생각이 들 거요."

    그녀는 던스탄이 곧잘 쓰던 욕을 내뱉으며 뭉그적거리고 일어서서 최대한 우아하게

    그의 곁을 지나치려 했다. 하지만 신발에 진흙이 잔뜩 들러붙어 있어서 우아하게 경

    멸을 표시하기 조차 어려웠다. 그녀는 쉽사리 자신을 따라잡는 그를 무시한 채 계속

    걸었다.

    조그만 언덕 위에 올랐을 때, 던스탄은 손을 들어 빗줄기를 막으며 아래를 내려다보

    았다. 마리온도 그를 흉내내 아래를 살폈다. 놀랍게도 저 아래 뭔가가 보였다.

    "저길 봐요!" 그녀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외쳤다. "저게 뭐죠?"

    "양치기의 오두막인 것 같소. 별로 좋아 보이진 않지만 비를 피할 수 있을 게요!"

    지붕! 마리온은 열심히 뛰어갔지만 신발이 진창에 빠지는 바람에 질척질척한 땅바닥

    에 얼굴부터 박으며 넘어졌다.늑대가 자지러지게 웃었다. 그의 깊은 웃음 소리가 메

    아리쳤다. 평소라면 그 소리에 가슴이 뭉클했을 테지만, 진흙을 뒤집어 쓴 채 일어서

    는 마리온에겐 그의 웃음 소리를 감상할 여유 따윈 없었다.

    "이... 이 짐승!" 화가 폭발하자 그녀는 갑옷에 싸인 그의 가슴을 있는 힘을 다해

    밀었다. 물론 그녀의 약한 힘에 그는 끄덕도 하지 않았고, 그녀는 그의 옷에 진흙 손

    자국만 남긴채 뒤로 휘청거릴 뿐이었다.

    이번엔 그도 손을 뻗어 넘어지려는 그녀를 잡았다. 갑자기 발 아래가 미끄러지는 듯

    하더니 던스탄의 눈이 놀라움에 커졌다고 생각한 순간, 그들은 함께 진창을 데굴데굴

    굴러 내려가고 있었다.

    다친 곳 하나 없이 마리온은 언덕 아래 진흙탕에 떨어졌다. 숨도 돌리기 전에 던스

    탄이 쿵하고 그녀 위에 요란하게 떨어졌다. 온몸이 짜부라든 듯했고 숨도 쉴 수없었

    다. 눈을 뜨자 그의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그의 검은 머리에선 물이 뚝뚝 떨어졌고,

    그의 녹색 눈은 그녀에게 못박혀 있었다.

    마리온은 자신이 압사당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웬만한 장정 두 사람 분의 무게로 그

    녀를 누르고 있었으니까. 비키라는 말을 하려고 입을 열려는데, 그가 어느새 무게 중

    심을 살짝 이동해 그녀의 몸이 편해졌다. 그는 팔꿈치로 몸을 지탱한 채 그녀 위에

    누워 있었다. 그의 몸이 더없이 편하게 느껴져 그녀는 입을 닫아 버렸다.

    당황한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보자 던스탄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녹색 눈

    동자는 촉촉하게 젖어 더욱 매력적이었다. 오랫동안 그들은 호흡을 멈춘 채 그대로

    있었고, 그들 사이에 일던 예의 그 기묘한 불꽃이 다시 너울너울 타오르기 시작했다.

    마리온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몸이 자신의 몸을 덮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자 온몸

    의 감각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던스탄의 눈동자가 어둡게 물들었다.

    "화해의 시간이오, 마리온." 그가 낮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던스탄의 입술이 다가왔다. 미친 듯이 뜨겁게. 기억이 되돌아온 그녀는 자신이 여태

    껏 한 번도 키스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가 생각하던 것과는 사뭇 달랐

    다. 자신의 본성에 충실한 던스탄은 부드럽다기보다는 요구하는 듯했다. 그녀는 늑대

    에게 삼켜질까 두려웠다.

    그녀가 항의하려 입술을 연 순간 그의 혀가 입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그녀는 소

    스라치게 놀랐다. 그녀는 늑대의 행동뿐 아니라 자신의 반응에도 놀랐다.

    빗방울이 거세게 떨어졌지만 그들 사이에 불고 있는 폭풍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

    었다. 마리온은 열정의 폭풍을 모르던 여태까지의 자신의 삶이 꿈처럼 느껴졌다. 온

    몸이 젖은 피부 구석구석이 피어올랐다.

    온몸에서 뜨거운 열기가 피어올랐다. 그녀는 그의 옷자락을 생명줄이나 되는 양 꽉

    움켜쥐었다. 그녀의 입에선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대답하듯 그녀에게 몸을

    밀어붙였고 그의 손길은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를 파고들어 그녀의 머리를 뒤로 젖혔

    다.

    마리온은 조심스럽게 혀로 그의 입술을 따라 핥았다. 던스탄이 쾌락의 소리르 내자

    그녀는 숨이 막힐 듯 기뻣다. 감각의 물결에 휩싸여 그녀는 번개가 번쩍 하는 것도,

    귀가 멀 것같이 커다란 천둥소리가 울리는 것도 듣지 못했다. 그러나 던스탄은 갑자

    기 입술을 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아쉬움에 몸을 떨었고, 던스탄은 그녀를 보며 말했다. "갑시다. 저 안으로

    들어가야 하오." 그가 격한 목소리고 명령했다. 마리온은 그대로 멍청하게 누워 있을

    뿐이었다. 그가 일어나는데도 움직일 수가 없엇다. 그는 너무도 가뿐히 그녀를 안아

    들고 양치기의 휴식처로 향했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 그녀는 자신이 기절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기절은 과거의 마리온이나 하는 것이다.

    현재의 마리온은 던스탄의 목에 팔을 두르고 수치심도 모른 채 그에게 매달렸다. 하

    루 종일 짜증스럽던 비가 갑자기 아찔할 정도로 기분 좋게 느껴졌다. 마리온은 차가

    운 빗방울이 떨어지는 하늘을 향해 얼굴을 쳐들었다. 그러는 동안 던스탄은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나갔다.

    번개가 검은 하늘을 가르자 주변이 번쩍 환해병? 모든 것에 현실감이 느껴지질 않

    았다. 이 모든 것이 생생한 꿈이 아닐까. 아니면 정말 늑대가 그녀를 안고 장대비 속

    을 걸어가고 잇는 걸까. 정말로 바람에 날린 빗방울들이 그들의 피부를 적시며 젖은

    몸을 타고 흐르는 걸까.

    천둥 소리에 온 천지가 흔들렸다. 마리온은 늑대의 잘생긴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

    의 얼굴엔 한 번도 본 적 없는 긴장감이 떠올라 있었다. 온몸이 기대감에 떨렸다.

    오두막 주변에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있는 것으로 보아 오두막은 오래 전에 버려진

    것 같았다. 마리온은 오래된 우물도 보았다. 오두막 안에는 벽난로 근처 구석에 썩어

    가는 나무장작이 쌓여 있었다. 그곳의 반을 밀짚으로 만든 침대가 차지하고 있었다.

    약간 축축하고 곰팡내가 나긴 했지만, 그럭저럭 깨끗한 편이엇다. 젖어 있지 않다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평소라면 작고 먼지 쌓인 그곳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았을 테

    지만, 지금은 이곳이 천국처럼 느껴졌다.

    "버려진 곳이군." 던스탄이 중얼거려? 그러고는 자신이 그에게 아직 안겨 잇다는

    사실을 고맙게 생각할 만한 그런 미소를 그녀에게 지어 보였다. 조금으 사악해 보이

    는 깨끗하고 고른 치아를 보이며 짓궂게 떠올리는 그 미소에 온몸의 뼈가 흐물흐물

    녹아 버리는 것 같았다. 그가 천천히 그녀를 내려놓았다. 그의 몸이 그녀의 몸을 스

    칠 때, 그녀는 과연 자신이 서 있을 수 있을까 의심이 들 정도로 다리가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 다리고 서 있을 수 있다는 게 신기해?

    그녀를 이글이글 태울 듯 바라보던 던스탄은 무릎을 꿇고 앉아 불을 지피기 시작했

    다.

    "젖은 옷을 벗는 게 좋을 거요." 그가 어깨 너머로 말했다. "난롯가에 옷을 널어놓

    고 말리도록 합시다." 물론 그의 말이 맞다. 젖은 옷이 차갑게 느껴졌다. 하지만 던

    스탄 드 부르그 앞에서 옷을 벗어야 한다는 게 당혹스러웠다. 그것도 좁은 오두막 안

    에 그가 이토록 가깝게 서 있는데. 새로운 현제의 마리온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젖어서 몸에 휘감기는 망토를 벗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한결 가

    볍게 느껴졌지만 드레스는 아직도 물을 머금어 천금처럼 무거웠다.

    장작이 타닥타닥 타 들어가는 소리에 마리온은 난로를 향해 몸을 돌렸다.

    던스탄은 그녀보다 빨리 옷을 벗은 듯, 자신의 옷과 그녀의 망토를 불가에 널고 잇

    었다. 그의 칼과 갑옷은 한쪽으로 치워져 잇었다. 마리온은 멍하니 서서 그를 지켜볼

    뿐이었다.

    그의 넓은 등이 물기로 반짝였다. 그 아래 날씬하고 단단해 보이는 엉덩이에 그녀는

    발이 휘청거렸다. 그가 자신을 돌아다보자 마리온은 발갛게 달아오른 뺨에 두 손을

    가져다 대벼 당혹감 섞인 비명을 질렀다. 웨섹스의 늑대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

    은 채 자신 앞에 서 잇는 것을 보자 그 비명도 얼른 신음으로 변했다.

    한참 동안 마리온은 남자답게 떡 벌어진 그의 몸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평생 그렇게

    피부를 많이 드러낸 남자를 본 적이 없었다. 울퉁불퉁 튀어나온 근육을 덮고 있눈

    그의 피부는 폭우 탓에 번들거렸고 여기저기 상처가 있었다. 어깨와 가슴은 단단해

    보였으며 가슴은 검은 털로 뒤덮여 있었다. 그녀는 가슴 아래로 이어진 체모를 시선

    으로 쫓다가 황급히 시선을 그의 얼굴로 옮겼다. 던스탄은 미소라 부르기 어려운 희

    미한 미소를 지으며 입술 끝을 살짝 치켜올렸다. 그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어두워?

    다.

    그의 눈동자에 떠오른 빛과, 그 눈빛의 주인공의 벗은 몸에 두려움을 느끼며 그녀는

    주춤주춤 등이 벽에 닿을 때까지 뒤로 물러섰다. 그녀는 어렵게 목소리를 냈다.

    "던스탄! 무슨 짓을 하려는 거예요?" 그녀가 찍찍대는 목소리로 물었다.

    "내 몸을 따뜻하게 해서 말리려던 참이었소." 그가 낮고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런데 당신이 내 주위를 산란하게 한거요, 굴뚝새 아가씨." 벗은 몸을 조금도 부끄러

    워하지 않으며, 던스탄은 날씬한 엉덩이에 손을 얹고 그녀를 집어삼킬듯 찬찬히 훑어

    보았다. "당신도 나와 똑같이 하지 않겠다면 내가 내 손으로 직접 해야 할 것 같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