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보라시먼스-늑대와굴뚝새-6화 (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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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스탄은 일찍 깨어났다. 그는 눈을 뜨자마자 워렌의 텐트를 살폈다. 그는 짧게 뭐라

중얼거리며 얼굴을 씻으러 시냇가로 갔다. 그는 옷을 벗고 온몸을 물에 담갔다.

목욕을 마치고 옷을 입자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마리온을 머리 속에서 지워냈기 때

문일 거라 생각하며 모두를 깨워 일찍 출발할 채비를 시켰다. 날씨가 좋을 때 최대한

많이 가야 한다.

길을 떠나고, 던스탄은 좋은 기분을 유지하고 싶었지만, 그 앞에 펼쳐진 하루는 정말

짜증스럽기 그지없었다. 이런 떠돌아다니는 유목민 생활은 이제 그만둘 때가 온 것이

다.

한때 새로운 여행이 그를 흥분시킬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훌륭한 식사와 편안

한 침대 이상의 것을 바랐다. 아마도 그것들을 함께할 아내를 바라고 있는지도... 얼

마 전만 해도 자신이 결혼하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이젠 너무 오랫동안 결혼을

미루어 온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 자신의 모든 것을 물려 줄 아들을 낳아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던스탄은 뒤를 돌아다보았다. 짙은색 머리를 한 여자가 보였다. 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세세한 사항들이 눈에 보였다.

그녀의 태도에는 움직일 때마다 우아함이 배어 나왔다.

망토와 그 아래 입은 모양 없는 가운 아래 언뜻언뜻 비치는 풍만한 곡선.

두건 아래에서 굽이치는 머리칼.

던스탄은 자신이 그 두건을 벗겨내 풍성하고 짙은 머리카락을 보고 싶은 욕구를 느끼

자, 자신이 미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낮게 욕설을 내뱉으며 그녀의 단점을 상기

했다. 정말 수도 없이 많았다. 그녀는 무모한 데다가 고집도 세고 꼬박꼬박 말대꾸를

하고, 생각도 없고, 말도 안 되는 상상만 하고 있으며, 결정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

자꾸 말썽을 부려 시간을 지체시켜서 그가 웨섹스로 돌아가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

던스탄은 최대한 간결한 것을 좋아한다. 그런데 그녀에겐 정말 수도 없이 많은 모습

이 감춰져 있다. 그에겐 그 모습을 모두 봐 줄 만큼의 인내심은 없다. 언젠가 신부를

맞아들여야 하겠지만, 저 굴뚝새만큼은 절대 고려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는 말에 박차

를 가해 행렬의 맨 앞으로 나섰다. 그녀에게서 제일 멀리 떨어진 곳으로.

그리고 그는 하루 종일 행렬의 가장 선두를 지켰다. 고작 몇몇의 여행자와 농부를 스

쳐 지나갔을 뿐이지만 그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수가 몇 명이든, 언제나 길에선 급

습당할 수 있다. 그의 임무는 부하와 여자를 보호하는 것이다.

그들은 마을에 이르렀다. 던스탄은 뒤로 가 마리온은 찾았다. 그녀가 또다시 도망칠

시도를 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으리라 생각하지만, 사람이 많은 곳에 가면 다시 도망

가려 할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그는 더 이상의 지체는 원치 않았다.

던스탄은 순간 그녀와 시종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긴장했다. 비록 그녀가 말을 탄 채

로 몸을 완벽하게 숨기며 달아날 수 없으리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마리온은 평

범한 다른 여자와는 다르므로 무슨 기막힌 술수를 쓸지도 모른다.

그는 이를 악물고 고삐를 쥐고 가만히 기다렸다. 병사들과 시종, 수레 사이에서 그녀

의 모습을 찾으려 노력했다. 계속 신경이 거슬렸다. 갑자기 그녀의 기척이 들렸다. 포

근하며 따스한 그녀의 웃음소리가 공기를 맴돌며 다가왔다. 그 웃음소리가 왜 그토록

마음에 와 닿는지 알 수 없었다. 요새 가정을 꾸미는 일에 너무 신경을 많이 써서 그

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굴뚝새가 즐거워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깨닫자 기분이 180˚달라져 버렸다. 월

터가 그녀 곁에서 농담을 하며 그녀에게서 놀라운 미소를 자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

가 보고 있는 가운데, 그녀는 또다시 속에서 우러나오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마음

속 어딘가가 요동을 쳤다. 그는 그녀의 웃음 소리에 끌려 다가갔다.

하지만 그녀를 밝게 피어나게 한 것은 월터였고, 그게 자신이 아니라는 생각에 괜스

레 오장육부가 꼬이는 듯했다. 그는 월터에게 어두운 시선을 보내다가 그 두사람 뒤를

유유히 따라오는 시종 세드릭을 보았다. 그는 무법자들의 표적이 되기에 딱 알맞았으

며, 마리온을 보호할 능력도 없었다.

던스탄은 월터를 노려보았다. 그런 힘도 없는 자를 행렬의 맨 뒤에 세워선 안 된다는

것 쯤은 월터도 잘 알고 있을 텐데,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했지? 월터가 왜 그런 행동

을 했는지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월터에겐 지금 그녀 외엔 아무것도 안중

에 없는 것이다.

"월터." 던스탄의 목소리에 그는 얼른 던스탄을 바라보았다. "선두를 맡아 주게." 던

스탄은 나중에 책임을 묻기로 하고 더 이상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일순 월터의 얼굴

에 분노가 떠오르는 듯했으나, 금세 조롱기 있는 미소로 바뀌자 던스탄은 자신이 잘못

본 것이라고 생각했다.

월터는 고개를 끄덕이며 질투하느냐고 묻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질투라고? 던스

탄은 그 말도 안되는 비난에 이를 악물었다. 월터는 던스탄이 마리온 워렌에게 조금의

관심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배달해야 하는 물건에 지나지 않는

다. 그것도 조금의 흠집도 가지 않은 상태로 곱게 배더슬리로 배달해야 하는 물건이다

던스탄은 눈을 가늘게 뜨고 행렬의 선두로 향하는 월터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

았다. 그가 이 여자에게 갑자기 관심을 갖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하며, 몇 마디

농답 삼아한 말을 제외한다면 월터는 그녀에게 조금의 관심도 나타내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에게 나긋나긋하게 대하며 함께 행렬 끝으로 쳐져서 노닥거리고 있

다니. 단순히 이상하다고 말할 수준 이상이었다.

"왜 그러시죠, 주인님?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것조차 금지되어 있나요?" 마리온의

목소리가 그를 현실로 이끌었다.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평소보다 더 예뻐 보이는

그녀 모습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 부하들에게 매력을 과시해서 내 명령을 듣지 않게 하려는 게 당신의 목적이라면

금지해야 겠소." 그가 내쏘았다.

그의 비난에 놀랐다는 듯 그녀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녀가 교활한 거짓말쟁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더라면 아마 그 표정에 속았을지도 모른다. 갑자기 그녀가 월터와

얘기한 것 뒤에 무슨 꿍꿍이가 숨어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설마 월터를

탈ㄹ출의 도구로 삼을 생각은 아닐 테지. 정말 또 혼자 숲속으로 뛰어들라고! 던스탄

은 갑자기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세드릭." 그가 경고하듯 시종을 불렀다. "아가씨의 위치는 행렬 끝이 아니다. 이곳

은 위험할 수도 있다."

세드릭은 안장 위에서 몸을 곧게 했다. "예, 주인님!"

"행렬의 중간까지 가도록 합시다." 던스탄은 마리온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녀는 혹시

무법자들이 쫓아오지나 않는지 뒤를 돌아다보고 있었다.

"그렇다오, 아가씨. 길은 위험한 곳이오." 던스탄이 어둡게 말했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것을 상상하자 불편함이 점점 더 커졌다. 이상한 공포가 그를 엄습했다.

그러고 나선 그녀의 어리석음에 다시 화가 치솟았다. 그녀의 머리 속에 상식이란 걸

억지로라도 쑤셔 넣어 주고 싶었다! 그녀는 도처에 깔린 위험들에 대해 도무지 겁을

내지 않는다.

"비록 훈련이 잘되어 있는 내 부하들과 여행을 한다 할지라도, 언제나 경계하지 않으

면 안 되오. 온갖 부류의 도적 떼들이 우리들의 지갑을 노리고 돈을 받아내기 위해 당

신을 납치하려 들 거요. 차라리 납치라면 다행이지, 당신처럼 아름다운 여자가 법도

모르는 도적 떼의 손에 잡히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모르고 있는 거요?"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그 커다란 눈을 놀라움에 크게 뜬 채 순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던스탄은 억지로라도 그녀가 자신의 말을 듣게 하고 싶은 마

음을 애써 억눌렀다.

"살인을 취미 삼아 하는 자들도 있소. 하지만 그건 순간적인 일이니 차라리 나은 편

이지. 죽는 것보다 더 끔찍한 것도 있소 특히 숙녀들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나쁜 일에 이용될 수가 있지."

도대체 그녀는 내 말을 듣고 있는 건가? 그녀는 고개를 조금 기울인채 고삐를 틀어쥐

고 있었다. 그녀의 그 침착함이 그를 더 화나게 했다. 그녀의 어깨를 세게 틀어 쥐고

다시는 그녀 자신을 위험에 빠지게 할 행동을 하지 方渼募?맹세를 받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거친 인간이 아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자제력을 배웠다. 아버

지는 공평한 리더쉽과 정확한 상벌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던스탄은 아버지의

발걸음을 따를려고 열심히 노력한다.

그는 옆에 있는 여자를 노려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 걸까? 무모한 행동

아래 현명한 계산이 있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왜 이토록 무모할까.

여태껏 한번도 누군가에게 당한 적이 없어서일까. "마리온, 이 세계는 위험으로 가득

차 있소. 당신도 잘 알고 있을 거요. 결국 당신이 내 동생들과 만난 것도 그런 일을

통해서 아니었소?"

던스탄은 자신의 말이 정곡을 찔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리온의 얼굴이 갑자기 창백

해지며 공포로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전... 잘 모르겠어요."

"아, 그래. 그 유명한 기억 상실증." 던스탄이 중얼거렸다.

마리온은 다시 평정을 되찾았다. 순간적으로 그녀에게 나타난 고통은 곧 차갑고 가까

이 할 수 없는 그녀만의 특이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던스탄은 즉시 그 말을 후회했다.

그는 입을 꾹 다물며 그녀 자신을 위해서였다고 애써 자위해 보았지만, 그래도 마음

이 개운치 않았다.

"전 정말 기억하지 못해요." 그녀가 갑자기 변명했다. 그녀는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

다. 그의 눈을 똑바로 쏘아볼 때보다 훨씬 진실이 느껴졌다.

던스탄의 마음속 어딘가가 혼란스러웠다. 그녀를 자신의 품에 안고 이 무모한 여인을

세상의 악으로부터 지켜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 괴이한 자신의 마음에 당황

하면서도 그는 한 마디 위로의 말을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나도 그런 얘

기를 들은 적이 있소. 내가 젊은 기사였을 때, 머리에 상처입은 남자가 며칠 동안 의

식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것을 보았소."

그녀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 아름다운 커다란 눈동자가 그를 깊은 심연으로 영원히

집어삼키는 듯했다. "고마워요, 던스탄." 그 몇 마디가 가슴에 와 닿았다. 이상해, 너

무 이상한 느낌이야. 그는 얼굴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당신은 얼굴을 너무 많이 찡그려요, 던스탄."

그녀는 놀랍게도 그에게 미소짓고 있었다. 온 세상이 그녀의 미소 앞에서 빛을 잃는

것 같았다.

던스탄은 말없이 그 미소를 바라보았다. 생기 가득한 미소, 깊게 팬 보조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듯한 미소였다. 그녀의 따스함이 그의 심장을 녹이는 것 같았다. 왜 자

꾸 그 미소를 자기만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까. 그녀를 보고 있자니, 자

신도 입술을 움직여 그녀에게 미소짓고 싶어졌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그 무엇인가

에 다가가고 싶다.

그 미소에 영향 받지 않으려면 돌처럼 차가운 남자가 아니면 안 된다. 하지만 난 돌

로 만들어진 인간이 아냐. 가당치 않게 온몸이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그는

안장 위에서 몸을 곧게 폈다. "이번 여행은 그리 즐거운 게 아니어서 그런 거요."

그녀가 일으킨 말썽에 대해 슬쩍 내비쳤는데도 그녀의 미소는 더욱 깊어갔다. 던스탄

은 그녀의 눈동자 안에서 불꽃이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사람의

진을 빼놓는 이 말썽꾸러기 여자에 대해 잘 알고 있는데도 그녀에게 끌렸다. 그녀는

던스탄 자신이 가지지 못한 그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따스함과 편안함, 그리

고 배려. 배려라고? 던스탄은 자신의 어리석은 생가가에 얼굴을 찌푸렸다. 정말로 내

머리가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나 보다!

"아가씨, 난 당신과 적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소. 다른 상황에것 만났더라면, 난 아

마 당신에게 호감을 가졌을 것이오. 또한 당신도 내가 훨씬 더 마음에 들었을 게 분명

하오. 하지만 지금 내가 하는 일은 나의 주의가 필요한 일이고, 날 지치게 만들고 있

소."

"무엇에 그렇게 신경을 쓰시는 거죠?" 마리온의 눈동자가 마치 그를 애무하는 듯했다

당신이야. 던스탄은 커다랗게 말하고 싶었다. 당신과 당신의 어리석은 탈출, 나무를

기어 올라가고 동굴을 기어 들어가는 당신의 일거수 일투족이 말이오. 그리고 사람을

홀리는 당신의 웃음 말이야. 당신의 시선, 행동, 목소리가 내 생각을 온통 채우고 있

어. 여태껏 이런 경험은 처음이야. 그는 먼 곳을 바라보았다. "난 웨섹스에서 해야 할

일이 있소."

"왜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커다란 그녀의 눈에 가득한 근심을 보자 던스탄은 속을 털어놓고 싶었다. 하지만 캠

피온의 장자로 태어난 그는 언제나 막중한 책임감을 견디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오래

전에 그는 아버지를 만족시키려면 스스로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

다. 여태껏 자신의 짐을 다른 누구와도 나눠 본적이 없었다.

"그렇소, 문제점들이 있소." 그가 불쑥 말했다.

"아주 심각한 건 아니겠죠?" 그녀가 중얼거렸다. 그녀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는 왠

지 믿음을 가지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던스탄은 다시 한 번 그녀에게 글리는 자신을

느꼈다. 마치 마리온이 그의 짐을 덜어 준 듯한, 걱정의 무게에서 그를 구해 준 듯한

느낌으로.

"내 영지와 맞닿은 곳에 사는 피츠휴가 날 괴롭게 하오. 끊임없이 백성들을 괴롭히고

도둑처럼 위장해서 내 소유지를 공격한다오. 내가 내 영지로 돌아갔을 때는 벌써 대

부분이 달아난 후라 농사 지을 농노들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오. 올해는 모두 힘을

합해 풍작을 거두어 모두들 굶지 않게 되었으면 좋겠소. 농사일을 빼고도 둑을 새로

쌓아야 하고." 그녀의 매력이 대단하긴 대단한것 같았다. 월터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것들을 그녀에게 얘기하고 있는 걸 보면.

"당신 아버님은 뭐라고 하시던가요?"

"뭐에 대해서?" 던스탄은 그녀의 질문에 놀랐다.

"당신의 무거운 짐에 관해서요. 당신 영지에 당신이 꼭 있어야 할 그런 때에 당신을

멀리 보내셨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네요." 그녀가 하트 모양의 얼굴을 그에게 기울이

는 바람에 두건이 벗겨져 햇살 아래 머리카락이 빛났다.

"아버님은 아마 모르실 거요. 위협당하고 있는 건 아버님 영토가 아니라 내 영토니까

."

"하지만 당신은 아버님의 아들이잖아요. 아버님은 당신을 사랑하세요. 아버님이 당신

을 도울 수 있을 거예요. 당신 동생들은 어떻고요? 왜 당신 동생들은 당신을 돕지 않

는 거죠?"

던스탄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애들에겐 자기 나름대로 할 일이 많으니까."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여섯 명의 건장한 성인 남자들이 캠피온에서 할 일도 없

이 지내고 있다고요. 오히려 변화를 반길걸요."

"별로 날 도와 주는 일에 흥미를 나타내지 않을 거요." 던스탄이 말했다.

"한 번이라도 물어 본 적이 있어요?"

"물론 아니지! 난 애원하지 않소." 그가 실눈을 뜨고 대답했다.

"세상에! 당신은 고집 센 바보로군요!" 그녀가 얼굴에 붙은 기다란 머리카락을 떼어

내며 말했다. 던스탄은 순간 그 머리카락의 감촉을 자신의 손으로 느껴 보고 싶었다.

저런 머리카락을 속으로 느낄 수 있다면.

"부탁하지 않으면 절대로 나서서 당신을 도와 주지 않을걸요? 당신 동생들은 당신이

완벽한 인간이라서 자기들을 필요로 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있어요. 당신을 도와 줄

수 있게 된다면 사이먼이 얼마나 좋아할지 짐작이라도 해 봤어요?"

던스탄은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진지한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작은 굴뚝새가 그토록

진지한 말을 하고 있다는 게 놀라웠다.

"사이먼은 언제나 당신을 본받으려고 애써요. 하지만 캠피온 성에서는 그다지 영광스

런 업적을 세울 수 없잖아요. 사이먼은 에드워드 왕의 군대에 들어가고 싶어하는데 아

버님이 보내고 싶어하지 않으셔요. 아버님이 비록 말씀은 안하시지만 아들들을 주위에

두고 싶어하세요. 사이먼은 자신의 능력을 증명할 시회가 필요해요. 당신 o에서 당

신을 돕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어디 있겠어요? 그러고 나면 사이먼도 그와 마찬가

지로 당신도 하나의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깨닫겠죠."

던스탄은 그 말들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렇게 차갑고 유능한 사이먼이 날 신이라고

생각한단 말이야? 그 말뿐 아니라 아버지가 자식들을 주위에 묶어 두고 싶어한다는

것도 믿기지 않았다.

"스티븐과 레이놀드도 마찬가지예요." 마리온이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그들도 도

전이 필요해요. 능력을 너무 썩히고 있는 거라구요. 스티븐은 언제나 못된 장난만 치

고 레이놀드는 언제나 무게만 잡고 있죠. 하지만 둘 다 좋은 사람들임은 물론 용감한

기사기도 해요. 역시 당신과 함께 싸울 수 있게 된다면 아주 자랑스러워 할 거예요.

그런 동생들을 둔 당신을 누가 건드리겠어요?"

던스탄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놀라운 이야기긴 하지만 맞는 말 같았다. 그는 냉

철하게 어떤 위협도 막아 낼 수 있는 사이먼이 자신의 성 정문을 지키는 모습을 상상

했다. 조프리. 마리온은 조프리에 대해 말하지 않았지만, 조프리는 그 누구보다 똑똑

하다. 조프리는 경작지의 수확량을 두 배로 늘려 줄 것이다.

아마도 그녀의 말이 맞을 것이다. 혼자 초연한 척하며 살 필요가 뭐 있겠는가? 가족

에게 도움을 구하느니 웨섹스를 잃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건 절대 아니다. 벌써 아

버지와 형제들에겐 자신의 가치를 충분히 증명해 보였다. 이젠 형제들이 그에게 자신

들의 가치를 증명할 때가 왔는지도 모른다.

"돌아가시면 아버님과 꼭 상의해 보세요. 형제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건 약하다는 표

시가 아니에요. 당신 동생들도 당신 못지 않게 형을 필요로 하고 있어요, 던스탄."

"생각해 보겠소." 던스탄은 마리온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름다운

미소로 그에게 답했다. 던스탄은 성적인 것과는 관계없는 어지러운 갈망을 느끼고 이

를 악물었다.

"잠깐 실례하겠소, 아가씨." 그는 불쑥 말하고는 말머리를 돌려 앞으로 향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유일한 능력을 가진 여자에게서 달아나고 싶

었다.

마리온은 그날 하루 종일 조용하게 보냈다. 월터 에이브리와의 짧은 대화를 즐기긴

했지만, 그의 갑작스런 관심이 당혹스러웠다. 더 이상 복잡한 관계는 원치 않는다. 그

녀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적으면 적을수록 좋다. 게다가 더 이상 무시무시한 던스

탄의 경고들을 듣고 싶지도 않았다.

그가 다시 그녀를 찾지 않았지만 그녀는 가끔 늑대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들 때마다 그가 얼른 시선을 돌리는 게 느껴졌다. 그의 잘생긴 얼굴이 흐려지

는 걸 볼 수 있었다. 아마도 날 보호해야 하는 것이 부담스러운지도 모른다.

그와 나란히 가고 있을 때, 마리온은 그의 초록 눈동자에서 갈망을 보았다고 생각했

지만 그건 아마도 증오에 가까운 불만이었을지도 모른다. 던스탄이 날 좋아할 리가 없

지. 벌써 두 번이나 애를 먹이며 지체시켰는데 그럴 리가 없지.

그가 불만이 가득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가 왜 이 일을 떠맡았는지는 모르지만 그

가 왜 그토록 서두르는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던스탄은 그의 땅과 사람들을 걱정하고

있다. 그것을 비난할 수는 없다.

마리온은 그의 모습을 보며, 한때 경멸해 마지않던 남자에 대해 숭배에 가까운 감정

을 느꼈다. 그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까? 던스탄은 언제나 그녀를 하찮은 존재처럼

취급했다. 하지만 오늘 마리온은 그에게서 변화를 감지할 수 있었다. 나의 상상일까,

아니면 드디어 웨섹스의 늑대가 날 조금이라도 존중해 주게 된 걸까. 적어도 그는 그

녀가 정말로 기억 상실증에 걸렸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작지만 중요한 변화다. 결국

드 부르그 가의 장남도 가망 없는 인간은 아닌 게다.

마리온은 그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었다. 거친 그의 겉모습 속에 무엇이 있는

지, 무엇이 그의 조소를 미소로 바꿀수 있는지 알고 싶었다. 자신의 어리석은 생각에

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아마도 실패할 것이 뻔하다. 결코 늑대의 본성은 바뀌지 않을

것이 틀림없기에.

상관없다. 점점 더해 가는 던스탄의 매력을 무시해야 한다. 그가 그녀의 말을 좀더

믿어 주게 될지 몰라도, 그는 어쨌거나 그녀를 배더슬리고 데려갈 것이다. 늑대가 새

로운 인생을 하는 동안 어둡고 무서운 곳에 혼자 남겨질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탈출이 결코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었다. 하루 종일 그녀는 무리에서 이탈할 기회만을

찾았다. 하지만 기회는 오지 않았다. 부하들이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그녀 곁에 붙어

있었고, 던스탄에게서 꾸중을 들은 세드릭은 감시의 눈초리를 한시도 늦추지 않았다.

마리온의 작은 말은 늑대와 그의 부하들이 타고 있는 커다란 군마들과 대적할 수 없었

다.

그래도 마리온은 시간을 벌어야 한다. 모든 추적을 피할수 있는 시간을. 그녀는 오른

쪽 언덕을 따라 펼쳐진 울창한 숲을 바라보았다. 사람들 시선을 피해 그리로 갈 수 있

다면 아마 숲속에 몸을 숨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기회만 노릴 수 있다면.

기회는 저녁 시간에 찾아왔다.

또다시 늑대가 그녀를 피하는 듯했다. 그 덕에 그에게서 멀어질 수 있었다.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난 후, 그녀는 세드릭을 따돌릴 수 있었다. "하지만 아가씨. 아

직 어둡지도 않은걸요." 세드릭이 뉘엿뉘엿 넘어가는 해를 보며 말했다.

"알아, 좀 피곤하거든." 마리온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세드릭은 내가 속여야 하는

걸 용서해 줄까. 또다시 세드릭을 말썽에 끌어들여야 하는 게 미안하지만, 그녀 자신

을 생각해야 한다. 던스탄이 훌륭한 주인이란 것은 알고 있다. 소년을 때리지는 않을

것이다.

"잘자." 그녀가 속삭였다.

"안녕히 주무세요, 아가씨." 착한 세드릭은 그녀가 피곤하다고 생각할 뿐 전혀 의심

하지 않았다.

사실 마리온은 피곤했다. 그러나 텐트에 들어간 것은 쉬기 위함이 아니었다. 일단 자

신이 텐트에 들어온 이상, 세드릭은 감시를 늦출 게 분명하다. 그때 탈출해야 한다.

그녀는 아그네스가 불가에 머물기만을 바라며 침착하게 기다렸다. 던스탄은 잘은 모르

지만 아마도 그녀를 얌전히 내버려 둘 것이다. 도망가는 것의 어리석음에 대한 길고

긴 설교를 그녀가 가슴속에 깊이 새겨 두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또다시

어리석은 탈출을 감행할 것이다.

텐트 틈새로 밖을 염탐하며, 세드릭이 사람들이 모여 있는 따뜻한 불가로 가는 것을

확인했다. 아그네스와 던스탄도 그곳에 있을 것이다. 그녀의 텐트 곁에는 아무도 없었

다. 그녀는 아그네스의 남루한 망토를 뒤집어쓰고 텐트의 다른 쪽으로 기어 나와 조용

히 숲으로 향했다.

거의 어두운 나무 그늘 아래 도착했을 때 한 남자의 목소리를 들었다. "거기 늙은이,

너무 깊이 들어가진 마슈."

마리온은 뒤돌아보지 않은 채 아그네스의 카랑카랑한 웃음소리를 흉내내 보이며 낡은

망토 자락을 꼭 움켜쥐고 숲으로 비척비척 걸어갔다. 보초가 그녀를 아그네스가 씻으

러 가는 거라 착각해 주길 바라며 마리온은 숲속으로 걸어갔다. 일단 숲으로 들어간

그녀는 우물쭈물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최대한 늑대와의 간격을 벌려 두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앞을 향해 전속력으로 뛰었다. 참나무 아래로 벌써 밤의 어둠이 퍼져 들고 있

었다. 어둠이 그녀를 도울 것이다. 그녀는 나무와 풀을 이리저리 헤치다가, 길 비슷한

것을 발견하고 빙빙 원을 그리며 헤매지 않기 위해 그 길을 따라가기로 결심했다. 몇

번씩 길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점점 어두워져서 길을 따라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칠흑같은 어둠이 찾아들었고, 나뭇잎이 별과 달을 가릴 때면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길을 걸어야 했다. 마리온은 점점 용기가 사라졌다. 작은 짐승들이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리거나 머리위로 퍼덕이는 날개짓 소리가 들릴 때면 그녀는 그 자리에 얼어붙어 숨

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처음에 그녀가 두려워한 것은 던스탄의 추적이지만, 이젠 위

험을 동반하는 이상한 소리들이 두려웠다.

던스탄이 한 경고는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며 마리온은 조그만 단도를 꼭 움켜쥐고

조심조심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녀는 침착하게 숨을 내쉬며 두려운 과거의 위협 없는

삶과 자유에만 정신을 집중했다. 눈앞에 안전이 기다리고 있는데 어둠의 소리 때문에

포기할 순 없었다.

이 시간에 이토록 깊은 숲속에 누가 있을 리 없다고 위로하며 마리온은 괜찮다고 중

얼거렸다. 그때, 앞쪽에서 사람의 인기척이 틀림없는 소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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