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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보라시먼스-늑대와굴뚝새-4화 (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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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리온은 불편했다. 말이 움직일 때마다 그녀의 등에 그의 딱딱한 가슴에 부딪혔다.

    그녀는 혼란스러웠다. 과거를 기억할 순 없지만 이런 식으로 남자의 몸에 닿아 본 적

    이 없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몹시 즐거웠다.

    그녀는 몸을 앞으로 굽혔다.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일뿐! 거만한 던

    스탄, 언제나 협박만 하는 던스탄. 그에게 잡힌 것도 화가 나는데, 날 놀리고 고함을

    질러 날 놀래키다니. 그건 정말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의 몸이 닿으면 왜 이

    렇게 야릇한 감정이 드는 걸까.

    아마 그의 체온 때문이리라. 그는 열이 펄펄 끓는 듯했다. 추위에 약해서 늘 불 앞에

    앉아 있길 즐기는 마리온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온몸이 녹는 듯한 따스함을 맛보았다.

    그의 단단한 몸은 정말 놀라웠다. 단단한 다리와 팔, 온몸에서 힘이 느껴졌다. 그리

    고 그는 두려울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스릴이 있었다. 마치 다이빙하기 직전처럼.

    그녀는 두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한 뒤, 그의 단단한 가슴에 몸을 기대었다. 잠시 그녀

    는 드 부르그 가의 장남과 하나가 되는 듯한 느낌에 젖어들었다. 그러나 곧 달콤한 꿈

    은 깨어져 버렸다.

    던스탄의 말은 너무도 빨리 그들을 다른 일행에게 데려갔다. 모두들 마리온을 바라보

    았다. 아무도 어디 갔었느냐고 묻지는 않았지만, 몇몇 사람이 시선을 교환하며 곱지

    않은 눈길을 보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못 본 척하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비록 드 부르그 가의 장남이 친구보다는 적

    에 더 가깝다 할지라도 그와 함께 있으면 든든한 기분이 들었다. 던스탄은 절대 그녀

    가 다치게 두지 않을 것이다. 던스탄의 시중을 드는 소년이 쪼르르 달려 나와 그녀가

    말에서 내리는 것을 도왔다.

    "그녀를 말에 태우고 감시해라." 그가 소년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녀에게 한 마디 말

    도 없이 그는 부하들에게 큰소리로 호령했다.

    아직도 그녀의 살결엔 그의 손길이 남아 있는데 그가 자신을 너무 빨리 잊은 모습에

    화가 난 그녀는 하염없이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소년이 그녀의 팔을 두드리며

    말했다. "아가씨, 제발 서둘러 주십시오."

    그래, 서둘러야지. 던스탄의 장단에 맞춰 춤을 춰야지. 그녀는 소년의 도움을 받아

    말에 오르며 던스탄에 대한 증오를 환기시키려 노력했다. 캠피온 성주의 아들 중 가장

    크고 용맹한 던스탄은 예의도 모르는 냉정한 인간이다. 하지만...

    "우릴 골탕먹였군요, 아가씨." 캠피온이 딸려 보낸 늙은 시녀의 말에 그녀는 들은 척

    도 하지 않았다. 아그네스는 별 도움이 되질 않았다. 대부분의 시간을 말을 탄 채 졸

    기만 하는 그녀는 말을 너무 직선적으로 하는 경향이 있었다.

    "꼴이 끔찍하구랴, 아가씨. 그이가 때리기라도 했나요?"

    마리온은 홱 그녀를 돌아보았다. "때려?"

    "그래요! 커다랗고 시커멓고 용감한 백작의 큰아들 말이에요. 그러고도 남을 인간 같

    던데. 그 사람이 때리던가요?"

    "웨섹스의 영주는 날 때리거나 힉대할 권리가 없어."

    아그네스는 코웃음을 쳤다. "그럼 생긴 것처럼 무섭지는 않은가 보구랴. 그렇게 골탕

    을 먹고도 아가씨에게 손을 안 댄걸 보니."

    손을 대다. 그 말에 마리온은 고개를 돌렸다. 던스탄은 그녀의 몸에 손을 대었다. 그

    기억에 갑자기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느 그녀의 손목을 잡아 그녀를 붙들고서 온

    몸으로 그녀를 나무에 밀어붙였다. 그러곤...

    자신의 몸을 쓸던 그의 손길이 떠올라 숨이 가빠졌다.

    영원처럼 길게 느껴지던 그 순간 그녀는 그가 자신에게 키스하리라 착각했다. 남자의

    눈 안에서 이글이글 타오르던 욕망의 불꽃을 본 적이 있었던가. 한 번도 본 적은 없

    지만 던스탄의 녹색 눈이 어두워진 이유가 그것 때문이라는 것은 확신할 수 있었다.

    말을 할 수도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 순간이 끝나지 않길 바랐다. 영원히. 이상한 갈

    망의 물결이 밀려와 그녀는 눈을 감았다.

    "아, 그분이 뭔가 하긴 하셨구랴!" 아그네스의 카랑카랑한 웃음소리에 마리온은 상념

    에서 깨어났다.

    "그만 해!" 그녀는 더더욱 얼굴을 붉혔다. "자기 일이나 하고 날 좀 내버려 둬."

    "많은 아가씨들이 그분에게 반했지. 궁중에선 그를 웨섹스의 늑대라고 부른답니다.

    가문의 상징이 늑대여서 그렇게 부르는 것만은 아니라구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이상도 하지, 그렇게 큰 남자가..."

    "그만 하랬잖아. 웨섹스 경의 명성이나 그에 관한 얘긴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 그

    는 예의도 모르는 무뢰한 이고, 난 절대 그의 뜻에 굴하지 않을 거야!"

    그 말이 맞다. 기억을 잃었다고 바보가 된 것은 아니다. 탈출에 거의 성공할 뻔하지

    않았던가. 이번에 실패했다고 해서 순순히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법은 없다.

    다시 시도할 것이다. 마침내 성공하는 그때까지 계속해서. 새로운 계획에 다시 온몸

    이 활활 타올랐다. 그녀는 아그네스를 보았다. 그녀의 반항에 아그네스는 입을 다물고

    졸 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마리온인 안심하고 있는데 아그네스가 다시 말했다.

    " 지금 아가씨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하지 마시구랴. 알고 싶지 않으니까." 노파는

    실눈을 뜨고 마리온을  쓱 훑어본 다음 미소를 흘리며 다시 눈을 감아 버렸다.

    아그네스가 뭔가 눈치를 챈 것 같지만, 하인 하나 때문에 계획을 포기할 수는 없다.

    아그네스가 종종 예리한 말을 하긴 하지만 아는 거도 없고, 누군가에게 마리온의 계획

    을 고자질할 수도 없을 것이다.

    허를 찌르는 탈출이 한 번 실패했으니, 이젠 좀더 예리하게 감시의 눈을 번뜩이는 감

    시자의 눈을 피해야 할 것이다. 늑대의 초록 눈이 자신을 쫓는 걸 생각하자 몸이 떨리

    는 것 같았다. 소년에만 신경 쓰면 된다. 소년의 감시 따윈 어떻게든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단 도망을 가면 가장 가까운 수녀원을 찾을 것이다. 갑자기 <슬픔 속의 마리아> 수

    녀원의 이름이 떠올랐다. 그곳이 배더슬리에서 가깝지 않았던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감고 기억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과거는 암흑에 싸여 있을뿐이었다. 계

    속 생각을 하려 하자 가슴이 울렁거렸다.

    손바닥에 땀이 배여 왔다. 식은땀이 이마 위를 흘렀다. 배더슬리. 그 불길한 이름은

    마치 장례식 종소리 같았다. 온몸이 공포에 감겨 들었다.

    마리온은 눈을 뜨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매번 생각을 하려 할

    때마다 두통이 찾아왔고, 그 두통은 회를 더할수록 심해져 갔다. 결국 생각하는 것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확실한 것은 배더슬리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리고 그 곳에 가

    면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울 것이란 느낌도 지울 수가 없었다.

    기억이 없는 채로 살아야 할 듯했다. <슬픔 속의 마리아> 수녀원이든 다른 곳이든,

    마음씨 고운 수녀들이 그녀를 받아 줄 것이다. 드 부르그 형제들이 그녀를 처음 발견

    했을 때부터 가지고 있던 두툼한 지갑과 보석을 보여 주면 환영할 것이다.

    만일 그들이 그녀를 거절한다면, 도시 어딘가로 숨어들어 미망인 행세를 하며 살 수

    도 있을 것이다. 입가에 번지던 미소는 던스탄 드 부르그 생각에 사그러들었다.

    사람들은 그를 웨섹스의 늑대라고 부른다지. 그 이름이 그에게 썩 잘 어울렸다. 그는

    남녀 간의 비밀스런 만남에 대해 능통하겠지. 그녀는 그에게 잡혀 멍든 손목을 어루

    만졌다. 그런 건 알고 싶지도 않아.

    던스탄 드 부르그에게서 바라는 것은 작별이다. 그것도 빠른 시간 안에.

    "그래, 그녀는 어디에 있던가?" 월터가 물었다.

    웃음기가 잔뜩 배어 있는 월터의 목소리에 던스탄은 투덜거렸다. "듣고 싶지도 않을

    걸세." 그는 딱딱하게 말하며 행렬의 선두로 나아갔다.

    월터의 웃음소리가 그를 쫓아왔다. " 인정하라구, 던스탄. 웨섹스의 늑대가 고작 여

    자 하나에 농락당하다니."

    "아냐, 월터. 거의 농락당할 뻔했던 것뿐이야. 그건 엄청난 차이가 있어."

    "오, 그렇겠지." 월터가 코웃음쳤다.

    "결국 내가 그녀를 찾아냈잖아?" 던스탄이 짜증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부하 앞에서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네."

    월터는 갑자기 웃음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무슨 말을 하려는 듯 하다가 곧 입을 다물

    고 비웃는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대장님. 하지만 아직도 궁금하네. 도대체 왜

    도망을 한 거지? 길을 잃었다던가?"

    "아니야. 집으로 돌아가기 싫어서 몸을 숨겼던 거라네."

    "뭐라구?" 월터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난 그녀가 아주 부자라고 들었는데."

    "그래. 하지만 캠피온에 있는 걸 더 좋아하는 것 같더군." 내 동생들을 홀리면서 말

    야. "후견인에게 돌아가는 것을 원치 않네. 아마 후견인은 그녀를 단단히 붙들어 매놓

    을 테지. 내 개인 의견으로는, 그 여자는 그렇게 하는 편이 좋을 거야."

    월터가 킬킬대며 마리온을 흘낏 넘겨다보았다. "특이한 여자로군."

    던스탄은 월터가 눈을 빛내며 그녀를 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마리온 워렌이 순진한 아이 같은 표정을 지으며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엄청난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여자라는 것도 말하지 않았다. 그것도 금방 들

    통날 그런 거짓말을.

    그녀에게서 진실을 캐내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다가 생각이 그녀의

    감촉에 이르렇고 그는 얼른 머리를 비우려 고개를 저었다. 마리온 워렌은 배달해야

    하는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 부드럽고 풍만한 곡선을 그리고 잇긴 하지만, 배달물이라

    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녀와 사랑에 빠질 남자가 불쌍하게 여겨졌다.

    던스탄은 시종 세드릭이 그녀를 잘 감시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말에 박차를 가했다

    . 그녀를 캠피온에서 처음 본 순간부터 그녀는 문제만 불러일으켰다. 그런 일은 맡는

    게 아니었다. 안 그래도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더미같이 많은데.

    2년 전, 에드워드 왕은 웨섹스 영지를 그에게 하사했다. 몇년간 길에서 시간을 보낸

    던스탄은 마침내 그곳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하지만 영지가 맞닿은 곳에 사는 탐욕

    스런 클라렌스 피츠휴는 그가 집에서 가만히 쉬게 내버려 두질 않았다. 던스탄은 경계

    선에서 무단으로 침입해 들어와 약탈을 일삼는 도적 떼와 매일같이 싸움을 벌여야 했

    다. 물론 피츠휴가 그들 뒤에 있다는 증거도 없지만 왕의 허가 없이는 피츠휴에게 복

    수할 수도 없었다. 완전하게 궁지에 몰린 것이다.

    웨섹스 성은 끊임없이 개축과 보강을 필요로 했으며, 그 덕에 던스탄의 돈은 계속 축

    났다. 농노들은 병사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일을 돕게 해달라고 요청해 왔다. 작년에는

    흉년이 들어 비축해 둔 식량도 거의 떨어진 상태다.

    아버지처럼 자신의 성에서 편안하게 사는 것은 잡을 수 없는 꿈과도 같았다. 그는 땅

    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기사의 인생을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 영원히 떠돌아다니고 항

    상 등뒤를 조심하며. 어깨가 무거웠다.

    형제들에게 도움을 받고 아버지에게 돈을 빌릴 수도 있다. 하지만 던스탄은 구걸을

    하느니 차라리 자결하는 쪽을 택할 것이다. 요번에 캠피온에 간 것은 도움을 청하기

    위한 이유에서 였다. 그런데 그 결과라니. 아버지의 부하를 빌려서 웨섹스로 돌아가리

    는 커녕, 귀중한 시간을 가출한 여자 하나 돌보는데 쏟아야 한다.

    마리온 워렌을 생각하자 던스탄은 당장이라도 행렬 중간으로 들어가 그녀를 자시느이

    눈으로 감시하고 싶었다. 하지만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머

    리와 몸을 누르는 그 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던스탄은 하루 종일 그녀를 피했다. 저녁 시간이 되자 그는 그녀가 그곳에 있는지 확

    인했다. 하지만 그가 본 것은 갈색 망토가 텐트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모습뿐이었

    다. 혼자 식사를 하려는 듯했다. 하긴, 나와 무슨 상관이람. 어차피 그녀를 보면 밥맛

    이 달아나 버릴 텐데.

    그는 얼른 식사를 마치고 그녀의 텐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고 앉

    았다. 그는 별 생각없이 그녀의 텐트를 바라보았다. 세드릭이 입구 앞에서 보초를 서

    고 있는데도 아무런 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아가씨는 왜 숨으려 하시는 걸까요?" 던스탄이 텐트를 바라보는 것을 깨달은 시종이

    물었다.

    "아마도 오늘 낮에 자신을 찾느라 시간을 낭비하게 만든 게 미안한가 보지." 던스탄

    이 내뱉었다. 물론 그녀가 그런 생각을 할 리는 없다. 괘씸한 여자!

    "거의 드시지도 않던데." 세드릭의 말에 던스탄은 잠시 혼란스러웠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게 무슨 뜻이냐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세드릭은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던스탄은 소년의 약점을 발견했다. 벌써 워

    렌의 요상한 주문에 말려든 것 같았다. 세드릭은 그녀가 먹지 않아서 걱정을 하느 것

    이다. 던스탄은 코웃음을 쳤다. 그녀의 풍만한 몸으로 보아 그녀는 결코 궁중의 여인

    처럼 앙상하게 마를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던스탄은 자신이 그런 숙녀들을 가출한 굴뚝새와 비교하고 있다는 게 놀라웠다.

    하지만 그 갈색 굴뚝새는 기대했던 것보다 더 많은 무언가를 가지고 있었다. 도대체

    그렇게 조그만 여자가 어떻게 나무를 기어오를 생각을 했을까. 부유한 집으로 되돌아

    가느니 위험한 숲속을 거쳐 도망갈 생각을 하는 이유는 무얼까. 아마도 어리석기 때문

    이리라. 그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말 안장 위에서 그녀의 부드러운 감촉과 짙은 속눈

    썹에 감싸인 커다란 사슴 같은 눈을 지우려 애썼다.

    그 후 며칠 동안 던스탄은 그녀를 거의 보지 못했다. 그녀와 늙은 시녀는 조용히 죽

    어지냈다. 더 이상 바랄 것 없이 고마운 일이었다. 아마도 그녀는 나무 위에서 벌였던

    우스꽝스런 일들을 부끄럽게 여겨 여행 내내 조용히 지낼 것을 맹세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던스탄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직도 웨섹스로 돌아가고 싶었다. 길 사정은

    나빴지만 그래도 많은 진전이 있었다. 모든 일이 완벽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 속도

    로 며칠만 더 가면 배더슬리에 도착할 것이다.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었다.

    그는 휴식 없이 무리들을 이끌고 나갔다. 해가 중천에 떠서야 늦은 아침 식사를 위해

    잠시 멈추었다. 던스탄은 우연히 그녀를 보게 되었다. 세드릭과 단둘이 앉아 있는 그

    녀의 풀어헤친 머리 위로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바라보며, 왜 그녀는

    매번 볼 때마다 점점 더 사랑스러워지는지 의아해 했다.

    그는 코웃음을 치며 발걸음을 돌리다가 거의 월터와 부딪힐 뻔했다. 월터는 던스탄을

    기묘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녀와 같이 가지 않지? 아니면 함께 말을 타거나? 어쩌면 아예 그녀를 타는 게

    더 좋을지도 모르지." 월터가 비아냥거렸다.

    "뭐라구?"

    월터가 천천히 웃었다. "숙녀 말일세, 던스탄. 며칠 내내 우리들에게 짜증을 내면서

    그녀를 피하고 있잖나. 왜 그냥 그녀를 끌여들여서 자네의 호기심을 채우지 않는 거지

    ?"

    의미 심장한 월터의 말에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난 워렌 양에게 별다른 관심 없네,

    월터.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 줘야 한다는 것 빼고는."

    월터는 노골적으로 껄껄 웃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예민한 반응을 보이나, 친구? 모

    두들 아가씨 때문에 우리들 대장이 이빨 아픈 멧돼지처럼 까다롭게 군다고 수근대고

    있네." 그가 사악하게 웃었다. "아니면 혹시 다른 곳이 아픈 겐가?"

    "저 여자와 내 기분은 아무런 관계가 없네." 그가 이를 갈며 말했다. "난 이 일이 마

    음에 들지 않을뿐더러 한시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 망나니 피츠휴로부터 웨섹스를 지

    키고 싶다네."

    "웨섹스는 무사할 거야."

    "그래." 던스탄은 성의 경비대장 레오나르도 콜린스를 생각하며 부드럽게 말했다. 레

    오나드로와 월터는 던스탄의 오랜 친구들이었다. 젊었을 때 함께 에드워드 왕을 모시

    기도 했다. 던스탄은 그 둘을 믿었다. 그래도 자신의 손으로 웨섹스를 지키고 싶은 마

    음은 가시질 않았다.

    "이리 오게." 월터가 그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나와 함께 식사하자구. 내가 자네

    마음을 편하게 해줄 테니."

    던스탄은 과거에 수없이 그랬던 것처럼 월터와 나란히 앉아 식사를 했다. 그들은 피

    츠휴 얘기면 웨섹스 방어에 관한 얘기를 나누었다. 던스탄은 자신이 없을 때 곡식들이

    잘 자라길 바란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농사 일엔 조금도 관심 없는 뼛속까지 군인인

    월터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웨섹스 일로 마음이 꽉 차 있는 탓인지, 월터의 충고를 들은 후라서 그런지, 그는 식

    사 도중 마리온을 눈으로 확인하지 않았다. 나중에 다시 길 떠날 준비를 할 때가 되어

    서야 그는 그녀의 말을 찾았다. 그녀가 보이지 않자 던스탄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는 신경이 예민해진 탓으로 돌리려고 했다. 참을 수 없는 여자를 에스코트해야 하

    는 스트레스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세드릭도 보이지 않았다. 둘이 함께 보이지

    않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던스탄은 괜스레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둘은 어디에 있을까?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의 시종을 찾았다. 마침내 그를 찾았

    으나, 세드릭의 표정은 별로 밝지 못했다. 세드릭은 덤불 곁에 서서 얼굴 가득 걱정스

    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워렌은 아무 곳에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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