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보라시먼스-늑대와굴뚝새-1화 (2/21)
  • 1

    캠피온. 마리온은 웅장하고 거대한 돌벽이 저 멀리에 그 모습을

    드러내자 숨을 들이마셨다. 무수한 탑들이 너무도 멋지고 단단해

    보여서 두려움이 등골을 훑고 지나갔다. 저곳에선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마리온은 무리를 인도하는 검은 머리의 기사들을 걱정스런 시선

    으로 바라보았다. 갑자기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았다. 지난 몇 주

    동안 여행하면서 그녀는 길에서 자신을 발견한 그들을 믿게 되었

    다. 하긴 별다른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그들만이 그녀가 아는

    전부였다.

    그 외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머리에 부상을 당했기 때문이다. 현명한 조프리는 머리에 큰 충

    격을 받으면 기억을 잃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그의 말을

    믿을 수 밖에 없었다. 실제로 아무런 기억이 없었으니까. 드 부

    르그 형제를 만나기 전까지의 인생은 완전한 공백이었다.

    멀쩡하게 살아 있으면서도 자신의 근본을 모른다는 것은 너무

    상했다. 새의 지저귐을 들으면 그것이 참새란 것을 알 수 있었다

    . 음식 요리법도 기억이 났다. 하지만 그 요리법을 언제 어떻게

    배웠는지는 전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녀 과거는 백지였다.

    그들은 그녀를 마리온이라고 불렀다. 그들이 발견한 그녀의 성

    가집에 그 이름이 수놓아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녀의 소

    지품을 보고는 그녀가 귀족일 거라고 했다. 좋은 옷, 거울, 책,

    동전, 보석..., 이런 것들은 귀족이 아니고선 지닐 수 없는 물건

    이었다. 그녀가 자신이 누군지 모르기 문에 그들은 그녀를 자

    신들의 집으로 데리고 가기로 했다.

    "이쪽으로 오시오, 아가씨"  조프리가 외쳤다. 집에 도착해서

    무척 기쁜 것 같았다. 커다란 성문이 열리면 그들을 환영했다.

    그는 얼른 그녀가 말에서 내리는 것을 도왔다. 마리온은 자신을

    안내하는 조프리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조프리는 기사이면서도

    온화하고 아는 게 많았다. 그녀는 그를 좋아했다.

    마리온은 주위를 살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듯한 커다란 홀

    을 보며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천장까지 높이 뚫린 아치형 창문

    으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굉장히 멋진 곳이었지만 매우 더러웠다.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

    하고 음식 썩는 냄새며 동물 냄새가 곳곳에 떠돌았다. 캠피온 성

    에 여주인이 필요하다는 것은 그녀도 느낄 수 있었다.

    그 생각에 마리온은 걸음을 멈추었다. 목덜미의 털이 곤두섰다.

    내가 할 수 있어. 그녀는 확신을 가졌다. 갑자기 마음이 설레기

    시작했다.

    "어이! 사이먼! 조프리!" 커다란 고함 소리에 마리온은 하마터

    면 귀를 틀어막을 뻔했다. 여러 마리의 커다란 개가 컹컹 짖으며

    달려나왔고, 큰 몸집에 검은 머리의 남자들이 개들보다 더 크게

    소리를 지르며 달려나왔다. 조프리와 사이먼만큼 거구의 남자들

    이 그들을 끌어안으며 악수를 나누었다.

    소리를 지르고 툴툴대긴 했지만 그 아래 애정이 깔려 있다는 것

    을 금세 느낄 수 있었다. 갑자기 그들은 말을 뚝 그치고 다가오

    는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는 그들만큼 키가 크지도 어깨가 넓지도 않았지만 마리온은

    한눈에 그 사람이 이들의 아버지라는 것을, 캠피온의 백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군데군데 섞여있는 은발을 뺀다면 그의 머리

    카락은 아직 젊은 사람만큼이나 까맸다. 얼굴이 좀더 여위고 입

    매가 좀 딱딱하긴 하지만 확실히 닮은 얼굴이었다. 나이가 들었

    는데도 매력적이었다.

    마리온은 그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그는 잔인하거나 거만해 보

    이지 않았다. 그는 매우 우아하게 움직였다. 힘이 아닌 지혜로

    사람들을 다스렸다. 마리온은 그를 보며 답답하던 가슴이 시원하

    게 뚫리는 것을 느꼈다.

    아들들처럼 떠들썩하게 환영하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반가워하는

    눈치였다. 그의 미소와 목소리에 따스함이 배어 있었다. "사이먼

    , 조프리" 백작은 팔을 벌려 갑옷을 입고 있는 사이먼을 안았다.

    한 번이라도 이런 가족의 품에 안겨 본 적이 있었을까. 그녀는

    경의에 찬 눈으로 백작이 조프리를 포옹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갑자기 백작이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가 점잖게 눈썹을 치

    켜올리자 그녀는 인사를 했다. 근심이 몰려들었다.

    "아버지, 저희는 마리온 양의 일행이 도둑들에게 습격당하는 것

    을 목격하였습니다" 조프리가 설명했다. "그들을 쫓기는 했지만

    그녀의 부상은 미쳐 막지 못했습니다. 머리를 다쳐서 이젠 자신

    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수행원들은 모두

    살해당했거나 달아난 뒤라서... 그녀가 건강을 다시 되찾을 때까

    지 보호해 주겠노라 약속하였습니다."

    "아가씨" 캠피온이 정중하게 머리를 약간 숙였다. "오셔서 매우

    영광스럽습니다. 숙녀가 우리 서을 밝혀 준 것도 매우 오래되었

    군요. 나는 캠피온이고 이들은 나의 아들입니다." 그가 손을 들

    어 아들들을 가리켰다.

    "사이먼과 조프리는 이미 만났을 테고, 스티븐을 소개합니다. "

    이마에 검은 머리를 드리운 남자가 한 걸음 다가섰다. 그는 사이

    먼이나 조프리와는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캠피온 가의 남자들과

    는 달리 매우 자유로운 태도였다.

    "아가씨" 스티븐이 짓궂게 씩 웃었다. 아주 잘생긴 얼굴이었다.

    "로빈입니다" 이번에는 스무 살쯤 된 남자가 말했다. 그의 머리

    는 다른 사람들보다 밝은색이었다. 그는 구애하는 연인이라도 되

    는 양 사근사근하게 말했다. 마리온은 웃으며 그에게 인사했다.

    "레이놀드입니다" 좀 마른 듯한 남자가 부자유스럽게 걸어나왔

    다. 로빈보다 더 나이들어 보였는데, 나이에 어울리지않게 화가

    난 듯했다. 그는 그녀의 미소에 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니콜라스입니다." 백작의 말에 아무도 앞으

    로 나서지 않자 캠피온이 짜증 섞인 투로 그의 이름을 다시 불렀

    다. 가장 어린 소년이 앞으로 튀어나오는 바람에 마리온은 웃음

    을 터뜨릴 뻔했다. 겨우 열 네살이나 되었을까. 형들보다 훨씬

    작고 부드럽게 생겼다.

    "예, 아버지?"

    "손님께 인사드려라."

    "안녕하세요!" 니콜라스가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그녀를 위아

    래로 훑어보았다. 소년의 얼굴엔 하고 싶은 질문이 가득 담겨 있

    었다. 그긔 아버지도 그런 조짐을 눈치챈 듯 꾸짖는 듯한 표정으

    로 아들의 입을 막았다.

    캠피온이 홀을 둘러보았다. "윌다" 젊은 하녀가 곧 그에게 다가

    왔다.

    "예, 주인님?" 그녀는 진심으로 존경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곳에서는 하인들조차 자부심을 가지고 일하는 모양이었다. 웬

    지 꼬집어 얘기할 순 없지만 그 점이 굉장히 낯설게 느껴졌다.

    "이 아가씨께서는 앞으로 우리와 함께 지내실 거다. 벽난로가

    있는 방으로 안내해 드리고 드실 것을 좀 가져다 드리거라. 늦은

    시간인 데다가 긴 여행 끝이라 쉬고 싶으실 게다."

    "예, 주인님" 윌다는 따스한 환영의 인사를 했다. 마리온은 백

    작에게 자리를 떠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지만 물러날 수 없어서

    백작을 바라보았다.

    "백작님, 베풀어 주신 은혜에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

    다. 후회하시지 않게 보답하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마리온은 행

    여 백작의 마음이 바뀔 새라 얼른 윌다의 뒤를 쫓았다.

    비록 성의 일부분을 보고 단지 사람 몇 사람을 만났을 뿐이지만

    그녀는 모든 것이 마음에 들었다. 몸집이 크고 사납게 보이긴 하

    지만 드 부르그 형제들은 핸섬한 데다가 매력적이었고, 그들의

    아버지는 온유하고 친절했으며 그의 하인들은 모두 행복해 보엿

    다. 우뚝 솟은 성까지 그녀를 환영하는 듯했다.

    벌써 캠피온이 집으로 느껴졌다.

    "이리 오너라, 너희를 위해 음식과 음료수를 가져오라고 했다"

    백작이 돌아온 아들들에게 말했다.

    "저도요, 아버지!" 니콜라스가 말했다.

    캠피온이 가장 어린 아들을 보며 미소지었다. "그럼 모두 함께

    하자꾸나"

    하인이 빵과 치즈, 과일들을 날라 오자 그들은 커다란 탁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는 사이먼이 고집센 소작인에게 돈을 받

    으러 남쪽에 다녀온 얘기를 들었다.

    "그러다가 바람이 차가워져서 돌아오는 발걸음을 서두르던 중에

    , 난폭한 도적떼에게 공격당하고 있는 한 무리를 발견했습니다.

    그 악마들을 죽이는 과정에서 우리 부하 몇 명이 부상을 당했습

    니다." 사이먼이 말했다.

    "이상한 것은 무법자들이 흔히 볼 수 있는 산적들이 아니었다는

    거예요, 그들은 마치 훈련된 군인처럼 잘 싸웠습니다." 조프리

    가 끼어들었다. "게다가 산적이 타는 말치고는 너무 좋은 말을

    타고 있더군요."

    사이먼이 그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언제나 그렇듯이 궁지에 몰

    려 목슴을 걸고 싸운 것뿐이야."

    백작은 다시 조프리를 바라보았지만 그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

    지 않았다. 논쟁을 벌이는 건 조프리답지 않았다. 하지만 캠피온

    은 현명한 자신의 아들이 진실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조프리는 사이먼처럼 강하진 않지만 사려가 깊었다. 그는 뒤로

    한 발 물러나 관찰하고 계산한 후 계획을 짜는 타입이다. 그게

    조프리의 장점이었고 언제나 좀더 단순한 사이먼에게 그를 딸려

    보내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공격당하던 무리의 일부는 숲속으로 달아났습니다." 사이먼이

    경멸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그들은 고귀한 신분의 숙녀를 호위

    하기는 커녕 농사일도 제대로 못할 정도로 어리더군요. 유일한

    생존자가 그녀입니다. 그녀는 깨어났지만 자신의 이름도 기억하

    지 못합니다. 입고 있던 옷에도 아무런 문장이 없었습니다."

    조프리가 다시 말했다. "그녀가 귀족이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아버지. 그녀의 옷가지나 소지품, 말투만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그녀와 오래 얘기를 나눠 보았는데 교육도 제대로

    받은 것 같습니다. 읽고 쓸 줄 알뿐더러, 셈도 할 줄 알더군요."

    "그런데도 자기 이름조차 기억할 수 없단 말이냐?" 캠피온이 물

    었다.

    "네, 아버지." 캠피온이 그에게 질문을 던지듯 시선을 고정 시

    켰으나 조프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캠피온은 아들이 그녀의

    말을 진실이라 믿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캠피온은 사이먼

    에게 대답을 구하는 시선을 던졌으나, 그는 동생과는 달리 그녀

    애게 더 이상의 관심이 없는 듯했다. 벌써 지루한듯 칼집을 만지

    작거리고 있었다.

    "이름은 누가 지었어? 형이?" 스티븐이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캠피온은 포도주 잔을 들고 있는 그를 노려보았다. 아들

    은 점점 다루기 힘들어지고 있었다.

    "우린 그녀를 마리온이라 부르고 있어" 조프리가 스티븐의 비아

    냥거림을 무시하고 말했다. "그녀의 책에서 이름을 발견할 수 있

    었다."

    "그녀에게 매혹당한 거야?" 스티븐이 놀렸다.

    "조프리 형이 사랑에 빠졌대!" 니콜라스가 소리쳤다. 자리에 앉

    아 있던 형제들이 그 말을 따라하자, 캠피온이 그들을 중지시켰

    다. 조프리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으로 미루어 보아, 아들이 그녀

    에게 가진 감정은 그저 단순한 연민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냐?" 스티븐이 물었다. "그럼 큐피드의 화살에 찔린 건 사이

    먼 형인가?" 모두들 스티븐의 말에 와하고 웃었다. "우리 형은

    작달막하고 둥글둥글한 여자가 좋은가 보지!"

    갑자기 사이먼이 벌떡 일어서는 바람에 모두들 조용해졌다.

    "싸움을 거는 거냐?" 그가 으르렁댔다.

    "무슨 소리" 스티븐이 하품하는 척했다. "형이 없으니까 참 평

    화스러웠는데 말야"

    "그만 해라." 캠피온이 말했다. "앉거라, 사이먼. 그리고 스티

    븐, 손님에 대해서 심한 말은 하지 말거라." 하루 종일 사사건건

    트집잡는 스티븐 때문에 캠피온도 짜증이 나고 있었다. 그녀는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사람의 눈을 끌 만큼은

    예뻤다.

    스티븐이 소년 같은 몸매에 금발 아가씨를 선호하는 요새의 유

    행만을 따지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하트 모양 얼굴 주위에 어지

    럽게 달라붙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잘 빗기만 한다면 찰랑거리는

    갈색 머리가 더 아름답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이다. 유령

    처럼 창백하진 않지만 그녀의 피부색은 하얗고 깨끗했다. 또한

    커다란 검은 눈이 하얀 피부와 멋들어지게 어울렸다.

    하지만 손님의 시선을 끌려고 아들들끼리 싸움하는 것을 원치

    않는 캠피온은 자신의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녀

    의 미모는 무시하게 내버려 두자. 하지만 그녀에게 무례하게 구

    는 것은 용서하지 않으리라. 그의 표정이 그들에게 경고하는 듯

    했다.

    잠시 숨막히는 순간이 지나자 사이먼은 부끄러움도 모른채 헤헤

    거리고 있는 말썽꾸러기 동생을 노려보며 자리에 앉았다.

    저러다가 스티븐도 언젠가는 크게 혼줄이 날 날이 올 것이다.

    캠피온은 속으로 중얼거리다가 다시 주의를 돌렸다. "그럼 앞으

    로도 계속 그녀를 마리온이라고 부르도록 하자. 자, 그녀를 어디

    서 발견했는지 말해다오. 어쩌면 마을을 찾아가는 길이거나 이웃

    의 누군가를 방문하던 길이었을지도 모르니까."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아버지. 수레에는 긴 여행을 위한 여

    러 가지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아마도 순례 여행인 듯합니다."

    조프리는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는 듯 잠시 멈추었ㄷ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길을 따라 되돌아가서 그녀의 신분에 대해 수소문

    해 보고 싶었지만, 사이먼 형은 ... 더 이상 늦어지는 걸 원하지

    않아서요."

    캠피온은 고개만 끄덕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프리의

    말에서 형에 대한 비난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아마도 두 형제는

    마리온의 운명을 놓고 작은 다툼을 보였을 것이다. 사이먼은 그

    녀에게 별로 신경을 쓰지 않으므로, 그녀의 일보다는 되돌아오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을 것이다. 그를 비난 할 수도 없었다. 그

    주위에서 수소문을 하고 다니다가 그녀를 집으로 부사히 돌려보

    낼 수도 있지만 그러지 못할 수도 있었다. 변덕스런 날씨와, 나

    쁜 길 상태를 감안한다면 사이먼도 어쩔수 없었을 것이다.

    "그 주위에 누가 사는지 사람을 보내 알아보게 하는 것도 나쁘

    진 않겠지. 하지만 겨울이 다가오고 있으니 별 소득은 없을 것

    같구나. 일단 그녀에게 먼저 물어 보고, 그녀가 소지하고 있던

    보석이나 뭐, 신분을 나타낼 만한 것을 전령에게 보내서 알아보

    도록 하자."

    캠피온은 그 말을 하며 탁자 위에 손바닥을 올려놓았다. "그녀

    의 신분을 알아보기 전까지는 손님으로 잘 대접해 주길 바란다."

    그가 아들들을 훑어보며 명령했다.

    불행하게도 여자 없는 삶에 익숙해진 그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말을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오직 니콜라스만이 관심을 나

    타내었을 뿐이다. 사이먼과 레이놀드는 시무룩해 보였고, 로빈과

    스티븐은 우습게 생각하는 듯했고 조프리는 약간 불편해 하는 듯

    했다. 아마도 그 여인을 불쌍하고 딱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리라.

    하지만 캠피온 본인은 여자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었다. 비록

    자그마하긴 했지만, 그녀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많은 것을 참

    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심지어 맹렬한 드 부르그 형제들조차도

    . 마리온에게는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은 매력이 있다는 걸

    그는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마리온의 사슴같이 부드럽고 커다란

    눈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아마도, 아마도... 그녀라면 늑대까지 길들일 수 있을지 모르지

    ... 그가 미소지으며 생각했다.

    아름다운 맹수야. 마리온은 자신의 작품을 내려다보며 미소지었

    다. 겨우내 만든 태피스트리가 지난 주에 겨우 끝이 났다. 이제

    그것은 홀에 걸려 화려한 색상으로 실내를 환하게 만들 것이다.

    그녀가 직접 디자인한 태피스트리는 여덟 마리의 늑대가 캠피온

    성을 등진 녹색 초원앞에서 뛰노는 모습이었다. 늑대는 드 부르

    그 가의 상징이었다. 드 부르그 형제들은 그 태피스트리를 보며

    웃음을 자아냈다. 형들은 가장 작게 묘사된 니콜라스의 늑대를

    보고 낄낄댔으며, 자신들이 알록달록한 색깔의 동물로 묘사된 것

    에대해 불만을 터뜨렸다. 불만을 털어놓지 않은 드 부르그 가 사

    람은 언제나 점잖은 백작과 이곳에 살지 않는 백작의 장남 던스

    탄 뿐이었다.

    지난 주 내내 홀은 조롱기 섞인 늑대 울음 소리로 가득 찼다.

    다른 여자라면 당황했겠지만, 마리온은 끄떡도 없었다. 그녀는

    사이먼의 불평과, 스티븐의 꼬임, 로빈의 속임수, 레이놀드의 날

    카로운 목소리, 니콜라스의 호기심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 이제 그들은 그녀의 형제처럼 느껴졌다.

    불가에 앉아 바느질을 하며, 마리온은 자신이 운이 좋은 사람이

    라고 생각했다. 드 부르그 가 사람들은 이름이나 가문, 출생도

    모르는 남인 그녀를 받아들여 주었다. 그녀는 이제 성의 여주인

    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무언가 목적이 있다는 것은 즐거

    운 일이었다. 캠피온과 핸섬한 그의 아들들은 그녀에게 집과 지

    위뿐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제공하였다. 그들은 애정을 베풀었

    다. 그래서 그녀는 그들이 아무리 짓궂게 놀려대도 언제나 웃음

    을 잃지 않았다.

    행복한 생각에 잠겨 있는데 갑자기 앞문이 큰소리를 내며 여릴

    더니 커다란 남자가 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는 기사 복장을

    하고 있었으며, 비슷한 차림새의 남자 몇 명을 대동해고 있었다.

    그 남자는 거대했다. 캠피온 서엥 거주하는 그 누구보다도 큰

    드 부르그 형제들보다 훨씬 더 커 보였다. 그는 누구일까. 그는

    마치 자기 집처럼 홀을 걸어다녔다. 발걸음에서 거만함이 뚝뚝

    묻어 나왔다.

    갑자기 마리온은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걸음걸이가 왠지

    낯익었다. 강하지만 우아한, 하지만 그녀가 여태껏 보아온 누군

    가의 걸음과도 달랐다. 그는 자신의 투구를 벗어 검은 머리카락

    을 드러냈다. 그 순간 그의 신분이 드러났다.

    던스탄.

    마리온은 자리에 앉아 흥미로운 시선으로 그를 관찰했다. 모두

    들 맏형 얘기를 자주 하진 않았지만, 그는 자신의 성에 살고 있

    기 때문에 마리온은 한 번도 그를 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호기

    심 어린 시선은 점점 감탄의 눈길로 바뀌었다. 그녀는 노골적으

    로 그르 빤히 바라보았다. 거리가 좀 있긴 했지만 또렷이 볼 수

    있었다.

    드 부르그 형제의 맏형인 그는 마리온이 여태껏 보아 온 그 누

    구보다도 잘생겼다. 키도 크고 어깨도 떡 벌어져 있었다. 사이먼

    보다도 더 큰 것 같았다. 그는 약탈자 처럼 보였지만 그녀는 겁

    내지 않았다. 그녀의 심장 고동이 빨라졌다. 단순히 널따란 남자

    의 어깨와 근육질의 다리를 보기만 했는데 심장이 빨리 뛰는 건

    그녀의 짧은 기억 속에서도 처음인 것 같았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그의 머리카락은 마치 까마귀의 날개마냥 새

    까맸다. 완고한 광대뼈, 딱딱한 턱, 그리고 너무 두껍지도, 너무

    潭層?않은 딱 알맞은 두께의 입술. 그녀는 숨을 들이 마셨다.

    마리온은 드 부르그 형제들이 매우 아름다운 사람들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검은 머리에 잘빠진 몸매. 하지만 형제 중 아무

    도 그녀의 마음을 이렇게 설레게 한 적이 없었다.

    사이먼보다 더 강한 군인처럼 보였지만, 사이먼과는 달리 차가

    워 보이진 않았다. 꼭 다문 입술은 따스해 보였다. 마치 손짓하

    듯... 이런! 마리온은 손으로 입을 가렸다. 남자를 보는 것만으

    로 세상이 흔들리는 듯한 느낌은 처음이었다.

    그녀의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듯 그가 갑자기 그녀를 바라보았

    다. 마리온은 무릎에 놓인 바느질감은 까맣게 잊은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더!"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지나가던 하인을 불

    렀다. "던스탄 주인님께 포도주와 음식을 좀 가져다 드려" 그러

    고는 얼른 주저앉아 바느질감을 주워 들기 시작했다. 자신의 실

    수가 그렇게 부끄러운 적도 없었다.

    갑옷에 싸인 남자의 다리가 코앞에 나타나는 바람에 그녀는 더

    더욱 당황하고 말았다. 고개를 들어 보니 그가 실패를 내밀고 있

    는 게 아닌가. 마리온은 숨이 멎기라도 한 표정으로 그의 손을

    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보호 장갑을 벗은 그의 손을, 마냥 쳐다

    보았다.

    커다란 손이었지만, 투박하지도 살집이 많지도 않았다. 길고 가

    느다란 손가락이었다. 용사의 손답게 거칠로 못이 박혔지만, 우

    아하게 실패를 쥐고 있었다. 마리온은 그의 손등에 난 검은 털을

    보고 얼굴을 붉혔다. 심장이 계속 두근거렸다. 그녀는 천천히 그

    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웃지도 찡그리지도 않았다. 그의 입술이 그녀를 못견디게

    약올리는 듯했다. 그의 입술이 너무도 가까이 있었기에 그녀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그의 눈을 들여다 보았

    다.

    "녹색이군요!" 그녀가 놀라움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가?" 그의 깊은 목소리는 그의 몸집에 딱 어울렸다. 허스키

    한 목소리가 온몸에 전율을 흐르게 했다.

    "당신 눈동자 말이에요. 형제들과 다르군요. 단 늘 단순한 밤색

    눈 대신 녹색 눈이 갖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던스탄의 눈동자는

    그저 평범한 녹색이 아니라 미스터리에 싸인 울창하고 깊은 숲의

    색이었다.

    그는 혼란스러운 듯 실패를 내밀며 몸을 바로했다. "당신은 누

    구요?"

    "마리온" 그녀가 일어서며 대답했다.

    "마리온, 누구?" 그가 좀 무례하게 물었다.

    "성은 없어요" 그녀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름다운 남자에게

    미소를 보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아무리 그가 의심스런 표정

    을 짓고 있다 하더라도.

    "당신은 캠피온 성의 방문객이오?"

    "손님이에요" 방문객은 결국 떠나간다. 하지만 그녀는 떠날 마

    음이 없었다.

    그가 자신의 부하들을 위해 음식을 날라오는 아더에게 눈짓을

    하는 게 보였다. 그녀가 고마움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아더

    는 물러났다. 고개를 돌려 보니 던스탄이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캠피온엔 언제 왔습니까?"

    마리온은 활짝 웃었다. 내가 아버지와 여섯 형제들을 어떻게 한

    줄 아나 봐. 누군가의 자리를 빼앗았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손님의 위치에서 좀 벗어났다고 생각하는 걸까?  "6개월전에 왔

    습니다. 그 동안 당신을 만나지 못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 군요

    . 그 동안 아버지를 찾아온 적이 없으신가 보죠?"

    마리온은 그 순간 그의 눈동자에서 불꽃이 이는 것을 보았다.

    놀림을 받는 데 익숙지 않은 사람인 듯했다. "내 땅 때문에 바쁘

    기 때문이오, 아가씨. 잠시 실례하겠소"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자

    신의 부하들 쪽으로 몸을 돌렸다. 마리온은 그의 소맷자락을 부

    여잡고 싶은 유혹을 눌러 참았다. 다시 그를 불러 옆에 잡아 두

    고 싶었지만, 그것은 그녀 혼자만의 감적이란 것을 깨달았다. 던

    스탄은 일상적인 호기심 외엔 그녀에게 조금도 관심이 없어 보였

    다.

    하긴, 당연해. 그녀는 뛰어난 미인도, 갓 피어나는 파릇파릇한

    풀처럼 젊은 나이도 아니었다. 그녀는 키도 작은 데다가 결혼 적

    령기를 훨씬 넘겼으니까. 캠피온에 온 이래로 처음, 그녀는 이곳

    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녀는 다시 바느질에 몰두하려 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자꾸만 그의 모습 훔쳐보고 싶어졌다. 높은 탁자에 부하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라곤 그의 넓은 어깨와 검은

    머리카락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가끔 캠피온 성의 상속자를 만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지

    만 막상 그를 보니 그가 빨리 떠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외모에 정신을 잃고 소녀 같은 환상을 꿈꾸기에 그녀는 너

    무 나이가 들었다. 가끔, 자신의 인생에 어떤 남자가 있었는지

    궁금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과거를 골똘히 생각하는 게

    두려운 그녀는, 자신의 감정은 던스탄 드 부르그 같은 사람은 없

    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던스탄의 동생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마리온은 다시 미소지었

    다. 그들은 큰 형을 각자의 성격대로 환영했다. 사이먼은 툴툴거

    렸고, 스티븐은 빈정댔으며, 조프리는 칭찬을, 로빈은 장난기 어

    린 말을 건냈다. 캠피온은 멀찌감치 아들들을 따라나왔다. 그는

    커다란 아들을 거칠게 끌어안았다. "만나서 기쁘구나" 마리온은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마리온은 누군가 자신을 정식으로 소

    개해 주길 기다렸지만 아무도 그러는 사람이 없었다. 남자들은

    자기네끼리 쑥덕거리더니 비밀 회의를 하려는 듯 우르를 2층 방

    으로 올라가 버리고 말았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그렇게 갑작스레 회의를 하는 게 불길했다

    . 또한 그들의 태도도 이상했다. 캠피온에 무슨 위험이라도? 성

    은 튼튼했지만, 전쟁은 어디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드

    부르그 가족이 전투를 치르는 모습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한기를 떨쳐 버리려고 불가로 다가서며, 마리온은 캠피온에 온

    이래 처음으로 불편함을 느꼈다. 불길한 예감에 목덜미의 잔털이

    곤두서는 듯했다. 이것이 그녀 자신에게 닥친 위험인지, 새로 얻

    은 가족들에게 닥친 위험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2층 방으로

    올라가 누군가의 팔에 안기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았다. 이왕이면

    던스탄의 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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