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컨의 청혼-12화 (11/11)
  • 12

    그가 카페 안으로 들어서자 모든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쏠렸다. 요즘은 그가 마을에 얼굴을 보이기라도 할라치면 사람들이 나누던 얘기도 멈추고 그를 흘끗흘끗 쳐다보는 통에 마치 버림받은 부랑아라도 된 듯한 느낌이었다.

    플로리스는 카페 한가운데서 손님 중 한 사람과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들려오는 소리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플로리스가 일방적으로 손님을 몰아붙이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런 플로리스조차도 카페에 들어서는 그를 쳐다보느라 소리지르는 것을 멈췄다. 갑자기 플로리스는 주방으로 들어가 버렸는데, 아마도 주걱을 가지러 가지 않았나 싶었다.

    매들린은 아는 체를 하지 않았지만, 잠시 후 그의 자리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가 한 잔 놓여졌다. 오늘따라 멋져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리스는 손을 내밀어 그녀를 와락 끌어당기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느라 무진 애를 써야 했다. 머리를 하나로 땋아 늘인 그녀는 통이 넓은 청바지에 깃을 살짝 세우고 옷자락 양끝을 허리춤에서 묶은 카키색 셔츠, 그리고 하얀 운동화 차림이었다. 왠지 낯이 익은 셔츠를 유심히 살펴보다가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저건 그의 셔츠였다! 젠장, 그녀는 그의 옷도 갖고 나온 것이다.

    다시 생각해 볼 필요도 없었다. 이 여자를 되찾아야 했다. 그의 셔츠를 되찾기 위해서라도.

    잠시 후 그녀가 초콜릿 케이크를 슬며시 갖다주었다. 그는 케이크를 한 입 맛보면서 속으로 웃었다. 별거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그를 거둬 먹이고 있었다. 마치 병아리를 보호하는 암탉처럼 항상 그를 편안히 돌보기 위해 세심하게 신경을 쓰는 그녀가 언제나 놀라웠다. 하지만 그녀에 관한 한 그의 보호본능도 지나친 감이 없지 않아 있으므로 전체적으로 공평하다고 봐야했다.

    겨우 그녀의 시선을 붙잡은 그는 턱짓으로 이리 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 오만한 부름에 그녀는 코웃음으로 응대했다.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대체 뭘 기대했지? 스스로 수긍하지 않는 한 그녀가 아무 명령에나 복종할 여자가 아니라는 걸 이제 알 때도 됐건만.

    요즘 플로리스의 카페에는 손님이 부쩍 늘었다. 내가 트럭을 카페 앞에 주차시키면 자동으로 온 마을에 통보해 주는 경보 시스템이라도 생겼나 보군. 그는 씁쓸하게 생각했다. 카페가 한가해 지려면 한 시간 정도는 지나야 했지만, 그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기다리는 자에게 기회는 오는 법,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 온갖 격언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리스는 그녀가 커피를 다시 채워주기 위해 다가오자 재빨리 입을 열였다.

    [매디, 제발 여기 잠깐만 앉아봐요.]

    '제발'이란 말 때문이었는지 그녀는 놀란 표정으로 그를 흘끗 쳐다보더니 순순히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때마침 주방에서 나온 플로리스가 왜 아직 안 갔냐는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용기를 내서 그녀에게 장난스런 윙크를 보냈고, 격분한 플로리스는 몸을 홱 돌려 주방으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매들린은 조용히 소리내서 웃었다.

    [요즘 당신은 플로리스의 '별 볼일 없는 못된 바람둥이 남편 녀석들' 리스트에 올라 있어요.]

    그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툴툴거렸다.

    [그럼 예전에 어떤 리스트에 속했지? '별 볼일 없고 못됐지만 바람은 피지 않는 남편 녀석들'이었나?]

    [플로리스는 남자들을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아요.]

    [알고 있소.]

    리스는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며 물었다.

    [오늘 기분은 어떻소?]

    [좋아요. 요즘은 만나는 사람마다 그 말을 제일 먼저 물어봐요. 어찌나 관심을 보이는지 이 마을에선 그 동안 임산부가 한 명도 없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라니까요.]

    [내 아이를 가진 여자는 한 명도 없었으니 내 관심은 당연하다고 보는데?]

    그는 테이블 위로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아직 결혼 반지를 끼고 있었다. 그 역시 그녀에게 받은 결혼 반지를 지금껏 한 번도 뺀 적이 없었다.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만지작 거리면서 그는 그녀에게 결혼의 중요성을 상기시켜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매디, 나와 함께 집으로 갑시다.]

    같은 어조의 같은 대사, 슬픈 미소를 띠고 그녀도 같은 대답을 했다.

    [내가 그래야 하는 이유를 한 가지만 말해봐요.]

    [왜냐면 당신은 나를 사랑하니까.]

    그는 조용히 말하고 그녀의 손가락을 꽉 쥐었다. 그것이 그가 생각해 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이유였다. 아마 그녀도 부정하진 못할 것이다.

    [난 항상 당신을 사랑했어요. 새로운 사실이 아니잖아요? 짐을 챙겨 목장을 나올 때도 내 사랑엔 변함이 없었어요. 하지만 당신을 사랑한다는 게 목장에 머물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되지 못했으니 돌아갈 이유로도 충분치는 않겠죠?]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은회색 눈동자는 더 이상 감정의 동요가 없이 차분했다.

    겨우 해답을 얻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 역시 그녀가 바라던 대답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 사실을 깨닫자 그의 가슴이 아프게 조여들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든 그녀는 그에게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카페 앞에 하얀 스테이션 왜건이 주차되어 있는 것을 본 순간부터 그는 희망이라는 쾌속 열차에 올라탄 셈이었지만, 갑자기 끝이 보이지 않는 나락으로 추락하는 느낌이 들었다.

    목구멍에 묵직한 것이 치밀어 올랐다. 그는 목소리를 내기 위해 한참 침을 삼켜야 했다.

    [매일 당신 상태가 어떤지 보러 와도 괜찮겠소? 그저 당신이 괜찮은지 확인하고 싶어서 그러오. 그리고 정기 검진을 받으러 병원에 갈 때도 당신만 괜찮다면 같이 가고 싶소.]

    매들린은 당장이라도 흘러내릴 것 같은 눈물을 참기 위해 숨을 삼켰다. 이렇게 자신 없어하는 리스의 모습은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그 모습에 가슴이 아팠다. 대담하고 오만하며 성질이 불 같은 리스를 그녀는 사랑하게 되었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가 변하는 것이 싫었다.

    [리스, 이 아기는 당신의 아기이기도 해요. 난 절대 당신에게서 아이를 떼어놓을 생각이 없어요.]

    그는 여전히 그녀의 손을 움켜쥔 채 한숨을 내쉬었다.

    [귀염둥이, 내가 잘못했소. 예전의 경험 때문에 목장과 관련된 문제라면 지나치게 예민한 반응을 보이게 된 것 같아. 일종의 강박관념처럼 말이오. 하지만 이제 당신은 에이프릴이 아니고, 7년 전에 에이프릴이 저지른 잘못을 갖고 당시을 괴롭혀선 안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소. 물론 당신이 몇 번이나 그렇게 말했었지만, 내가 듣지 않았지. 당신에게 보상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말해줘요.]

    [오, 리스. 내게 보상하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에요.]

    그녀는 조용히 반박했다.

    [그저 당신과 나, 우리의 관계, 그리고 우리가 미래를 함께 할 수 있느냐의 문제죠.]

    [그럼 걱정하고 있는 게 대체 뭔지 말해줘요, 베이비. 뭔지도 모르는데 준비할 수는 없잖소.]

    [그게 뭔지 스스로 알아내지 못하면 아무 의미도 없어요.]

    [다시 수수께끼를 풀어야 하는 거요? 난 사람 마음을 읽는 재주 따윈 없소.]

    그는 경고하듯 말했다.

    [당신이 원하는 게 뭔지 솔직히 말해주지 않겠소? 난 정말 이런 일엔 자신이 없소.]

    [당신을 휘두르려고 이러는 게 아니에요. 나도 지금의 이런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구요. 전혀 행복하지도 않구요. 하지만 미래에 대한 확신이 들기 전까지는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내 마음은 변함이 없어요.]

    그는 천천히 일어나 주머니에서 몇 장의 지폐를 내놓았다.

    매들린은 필요 없다는 듯 손을 저으며 말했다.

    [오늘 계산은 내가 할게요. 팁 수입이 꽤 되거든요.]

    갑작스런 그녀에 대한 갈망이 그를 온통 뒤흔들었고, 그는 그 욕구에 저항할 수가 없었다. 그는 몸을 숙여 그녀의 입술을 덮치고 강렬한 키스를 퍼부었다. 자주 사랑을 나눴던 두 사람인지라 서로의 감각에 민감하게 반응했고, 순간 황홀한 천국을 맛보았다. 그녀는 조그많게 신음을 흘리며 그의 혀를 반갑게 맞아들였다. 두 사람만 있었다면 그 키스는 사랑의 행위로 끝났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숨을 죽이고 그들이 키스를 지켜보느라 카페 안이 일순 조용해졌다. 말 그대로 완전한 침묵 상태였다. 리스 던컨과 그의 용기 있는 아내가 연출한 돌발 상황은 이 작고 조용한 마을에 수년 만에 찾아온 가장 즐거운 볼거리였다.

    [어험!]

    난데없이 들려온 헛기침 소리에 리스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 커다란 헛기침 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플로리스였는데, 자신의 고용인을 보호하기 위해 분연히 주방에서 달려나온 듯했다. 주걱 대신에 날카로운 부엌칼을 들고 나타난 플로리스를 보면서 리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내 카페에서 그런 짓거리를 벌이는 건 참을 수 없어.]

    플로리스가 그를 노려보면서 걸걸한 목소리로 으름장을 놓았다.

    그는 몸을 펴고 조용하지만 명확한 목소리로 말했다.

    [플로리스, 당신은 그 퉁명스런 성질을 고쳐줄 사랑과 끈기를 가진 착한 남자를 만날 필요가 있어요.]

    플로리스의 미소는 사악함 그 자체였다. 그녀는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부엌칼을 위협적으로 휘두르며 말했다.

    [그런 시도를 했던 마지막 바보 녀석에겐 커다란 혹이 생겼지.]

    주위를 둘러보면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할 때를 모르는 사람들이 꼭 있다. 리스가 매들린을 처음 이 카페에 데려왔을 때 플로리스와 말다툼을 버이고 있었던 그 카우보이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숙적 플로리스를 놀려줄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눈치 없이 끼여들었다.

    [플로리스, 그게 언제 적 일이에요?]

    그가 싱글싱글 웃으며 물었다.

    [혹시 남북 전쟁 전 얘기 아니에요?]

    새로운 먹이를 만난 암곰처럼 플로리스는 그 불쌍한 카우보이에게 공격의 화살을 돌렸다.

    [빌어먹을 녀석 같으니라구! 그 놈팽이는 바로 네 애비였어! 네 애비라는 인간이 남은 물건으로 만든 작품이 바로 네 녀석이야, 이놈아!]

    4월 말이 되었다. 봄은 다른 해보다 빨리 왔지만, 그는 예전처럼 봄에 새로이 태어나는 대지의 부활을 기뻐할 수 없었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집 안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지내고 있었고, 다른 어느 때보다 집이 텅 빈 느낌에 흠뻑 젖어 있었다. 정신없이 바빴지만 만족할 수가 없었다. 매들린은 여전히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외할머니의 유산으로 그에게 금전적인 안정을 주었다. 은행에 상환해야 할 대출금 부담이 없어지자, 그는 지난해 육유 판매 대금을 가지고 원래 계획대로 목장 확장을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또한 목장을 담보로 융자를 받아 새로이 일손을 도와줄 목동들을 채용할 수도 있었다.

    매들린 덕분에 이제는 예전처럼 목장을 재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예전의 목장이 어땠는지 본 적이 없으니까, 채산성이 좋은 대규모 목장의 활기찬 생명력을 상상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는 몇 가지 중요한 결정을 조만간 내려야 할 필요가 있었다. 목장을 확장하려면 당장 일을 추진해야 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더 이상 목장에 있지 않았다. 이곳은 그가 항상 사랑했던 목장이고, 그의 영혼은 장엄하고 아름다운 이 평원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만, 그는 목장에 대해 예전과 똑같은 열정을 불러일으킬 수가 없었다. 매들린 없이는 아무것에도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옳았다. 이곳은 두 사람의 아이에게 물려줄 유산이었다. 그 이유 때문에라도 그는 최선을 다해 목장을 돌봐야 했다.

    인생은 항상 물처럼 흘러가는 선택의 연속이다. 환경과 선택의 내용이야 하루하루 달라지겠지만 항상 어떤 식으로든 선택을 해야 했고 지금 그는 아주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만일 혼자 힘으로 목장을 확장하려면 보유하고 있는 현금을 다 동원해야 했고, 그렇게 되면 살인적인 눈보라가 다시 몰아치기라도 할 경우 대비책을 세울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또다시 목장을 담보로 은행에서 융자를 받는다는 건 매들린에게 구원받기 직전과 똑같은 상황에 다시 놓인다는 것을 의미했다. 목장에서 생기는 모든 이윤을 재투자하면서 목장을 확장시켜 나간다면 결국 성공하리라는 것은 확신했지만 더 이상 은행 융자는 받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면 투자자를 구해야 했다. 로버트 캐넌은 뛰어난 사업가였다. 그 사람이라면 훌륭한 사업 파트너가 될 것이다. 리스 또한 냉철한 사업적인 두뇌를 자졌으니 그들의 동업은 서로에게 이익이 될 터였다. 재정적인 여유뿐만 아니라 사업상의 다각화를 꾀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적어도 목장의 사활이 겨울 기후에 의존하는 일은 없게 될 것이다.

    그는 수화기를 내려놓았을 때 서류 작업을 제외하고는 모든 문제가 해결된 상태였다. 그와 로버트는 말이 잘 통하는 편이었고, 그 결과 두 사람은 최소한의 대화로도 만족스런 거래를 성사시킬 수 있었다. 그는 낯설면서도 약간 아찔한 느낌을 받았다. 그때서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자각할 수 있었다.

    그는 자발적으로 목장의 독점 권리를 양보함으로써 다시 타인을 신뢰하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그의 새로운 사업 파트너는 아내의 갖고이었다. 1년 전의 그였다면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수년 동안 그를 괴롭혀 왔던 증오와 원한에서 마침내 자유로워진 것이다.

    이제야 겨우 에이프릴은 과거가 되었다. 그는 첫 아내를 선택할 때 실수를 했다. 영리한 사람이라면 실수에서 교훈을 얻고 다시 새로운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도 물론 교훈을 얻었지만, 매들린이 방법을 가르쳐 주기 전까지는 새로운 삶을 개척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 비틀린 선입견에만 집착하다가 매들린과의 결혼 생활을 망친 것이다.

    그녀를 돌아오게 설득할 수만 있다면 그는 무릎을 꿇고서라도 사정할 것이다.

    날짜가 하루하루 지나면서 그는 점점 절망적인 심정이 되었지만, 그 심정을 도저히 자제할 수 없게 되기 바로 직전에 충격적인 전화를 받았다. 에이프릴의 언니인 에리카에게서 온 전화였는데, 에이프릴이 얼마 전 교통 사고로 갑작스럽게 사망했으며, 그가 에이프릴의 주요 상속인이라는 내용이었다. 에리카는 그에게 맨해튼으로 와달라고 했다.

    에리카는 공항까지 그를 마중 나왔다. 그녀는 키가 크고 마른 타입으로 에이프릴보다 두 살 위였지만 워낙 보수적인 성격이라 언니라기보다는 이모처럼 보였다. 앞머리에 벌서 백발이 생기기 시작했지만 그것을 감추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 듯했다. 그녀는 냉정하고 거리가 있는 태도로 악수를 청했다.

    [리스, 와줘서 고마워요. 상황을 고려해 볼 때 당신이 정말 여기까지 와주리라고는 기대도 안 했는데.]

    그는 에리카의 손을 맞잡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1년 전이라면 아마 오지 않았겠죠.]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나요?]

    에리카가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재혼을 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자립하게 됐구요.]

    그녀의 눈이 일순 어두워졌다. 매들린의 눈처럼 부드럽진 않았지만, 에리카의 눈동자도 연한 회색이었다.

    [이혼 과정에서 생긴 일에 대해 사과하고 싶어요. 에이프릴도 항상 그 부분에 대해 미안해했어요. 하지만 상황을 밖ㄹ 방도를 찾을 수가 없었죠. 당신이 재혼을 했다니 정말 기뻐요. 부인과 행복하기를 바랄게요.]

    같이 살 수 있게 아내를 설득할 수만 있다면 그도 그럴 작정이었다. 하지만 에리카에게 그런 전후 사정을 말하지는 않았다.

    [감사합니다. 10월 말경이면 아기가 태어날 예정이죠.]

    [축하해요.]

    그녀의 심각한 얼굴이 잠시 밝아졌고 실제로 미소까지 지었다. 하지만 그녀의 영혼은 많이 지친 듯해 보였다. 여동생의 갑작스런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을 그녀로서는 리스에게 전화를 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으리라.

    [그런데 에이프릴은 어떻게 된 거죠?]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어디가 아팠나요?]

    [아뇨. 마음의 병도 병이라고 할 수 있다면 모르겠지만, 당신도 소식을 들었겠지만, 그 애도 재혼을 했었죠. 당신과 이혼하고 나서 1년쯤 뒤에. 하지만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2년 뒤에 다시 이혼을 했어요.]

    그는 두 번째 남편에게서도 그렇게 위자료를 많이 받았냐고 묻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동생의 갑작스런 죽음에 슬퍼하고 있는 에리카 앞에서 너무 속 좁은 일이 될 것이다. 예전 같았으면 누구에게 상처를 입히든 상관하지 않고 그런 말을 던졌을 테지만, 매들린으로 인해 그는 변화했다.

    [에이프릴은 그때부터 아주 심하게 술을 마시기 시작했어요.]

    에리카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계속 말을 이었다.

    [어렵게 설득해서 요양원에 들어갔지만 조금 나아진 것 같더니 다시 나빠졌어요. 그 애는 많이 슬퍼했어요, 리스. 정말 많이. 살아가는 것 자체에 지쳤다고 봐도 좋겠죠.]

    그는 날카롭게 물었다.

    [그럼 자살입니까?]

    [표면상으로는 아니에요. 의도적인 것은 아니겠죠.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 애가 자살을 했다니, 그런 생각은 참을 수가 없거든요. 하지만 에이프릴은 술을 끊지 못하고 계속 마셨어요. 그 애의 유일한 위안거리였죠. 죽던 날 밤에도 아주 심하게 술을 마시고 나서 해안 도로를 따라 운전하다가 깜박 잠이 들었나 봐요. 검시 결과가 그래요. 음주 운전 사고의 통계 수치를 한 건 더 늘린 셈이 됐죠.]

    감정을 배제한 듯한 에리카의 음성은 조용하고 평온했지만, 보일 듯 말 듯 눈물이 어린 눈은 무척이나 고통스러워 보였다.

    리스는 차를 몰고 시내로 들어서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가 왜 에이프릴의 주요 상속인이 된 거죠?]

    [내 생각에는 죄책감 때문이지 싶어요. 아니면 사랑이었든가. 그 앤 당신과 이혼한 후에 정말 고통스러워했어요. 당신도 알겠지만 그 애는 목장을 질투했었죠. 한 번은 내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당신에게 그 목장보다는 차라리 여자가 있는 게 더 참기 쉬울 것 같다고 말이에요. 다른 여자와는 싸울 수 있지만 당신의 영혼을 옭아매고 있는 그 목장과는 싸울 수가 없었다고 했어요. 당신을 벌주기 위해서 목장을 망쳐버리고 싶었대요.]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대단한 변명이죠? 그 애는 자기가 당신이 필요로 하는 아내 타입이 아니라는 걸 몰랐던 것 같아요. 두 사람은 가치관이나 생활 방식도 많이 달랐고, 각자 삶에서 원하는 것도 차이가 있었죠. 그 앤 당신이 목장만큼 자기를 사랑해 주지 않자 자기한테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나봐요. 두 사람의 가치관에 차이가 있을 뿐이라는 걸 못 받아들이고 말이에요.]

    리스는 그런 관점에서 에이프릴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시각으로 결혼 생활과 이혼 과정을 생각해 본 적도 역시 없었다. 그녀에게서 본 것은 단지 괴로움뿐이었다. 그의 인생 역시 한동안 그 음울한 색깔로 채색되어 있었다. 자신의 생각이 잘못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는 마치 주먹으로 한 방 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색안경을 끼고 사물을 왜곡되게 바라보았던 것이다.

    그는 맨해튼을 방문할 때마다 투숙하곤 했던 특급 호텔에서 밤을 보냈다. 이렇게 특급 호텔에 묵을 수 있는 금전적인 여유가 이상하게 여겨졌다. 그는 자신이 이전의 부유함을 그리워하는지 생각해 보았다. 화려한 특급 호텔에서 묵을 여유가 있다는 것은 확실히 기분 좋은 일이었지만, 초라한 모텔에서 묵어야 했어도 별로 상관없을 것 같았다. 금전적으로 여유 없이 지낸 그동안의 세월이 그의 가치관을 재배열한 것이다.

    다음날 변호사 사무실에서 이루어진 유서 공개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에이프릴의 갖고은 슬픔에 잠긴 나머지 그에게 별다른 적의를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에이프릴은 마치 죽음을 예상했던 것처럼 유산을 어떻게 분배할지 자세하게 유서에 남겨두었다. 보석과 개인 소유물은 갖고에게 골고루 나눠졌고, 주식과 채권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리스에게 남긴 유산은 그를 놀라게 했다.

    [전남편인 기드온 리스 던컨에게는 그에게서 위자료로 받은 돈 전액을 돌려준다. 그가 먼저 사망한다면 같은 금액이 그의 상속인에게 남겨질 것이다.]

    변호사는 계속 유언장을 읽어 내려갔지만 리스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마치 부지불식간에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했다. 그는 무릎에 팔꿈치를 고이고 몸을 앞으로 숙인 채 발 밑의 페르시아 카펫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모든 돈을 돌려줌으로써 증오감에 사로잡혀 보냈던 세월의 허무함을 웅변적으로 보여주었다.

    가장 기가 막힌 것은 그가 이미 그 부분에 대해서 마음을 풀었다는 사실이었다. 목장을 예전의 규모로 재건하지 못하더라도 매들린이 옆에 있는 한 그는 행복했을 것이다. 그녀와 함께 웃고 사랑하며 지내는 동안 그의 강박 관념은 강렬한 사랑으로 바뀌어 그녀 없는 삶이란 사는 것이 아니라 단지 존재하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갑자기 심장이 조여드는 듯한 느낌에 그는 가슴을 움켜잡을 뻔했다. 제기랄! 그는 정말 어리석었다.

    '함께 집에 갑시다!'

    '그래야 하는 이유를 한 가지만 말해봐요.'

    그녀가 원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이유였지만, 그는 그것을 주지 않았다. 여러 가지 이유를 댔지만 그것은 그녀가 요구하는 대답도, 필요로 하는 대답도 아니었다. 그녀는 그에게 해답을 거의 알려주었지만, 그는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에 너무 사로잡힌 나머지 그녀가 필요로 하는 것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것은 정말 단순했다. 이제 그는 자신이 해야 할 말을 알게 되었다.

    '그래야 하는 이유를 한 가지만 말해봐요.'

    '왜냐하면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이오.'

    플로리스의 카페로 걸어 들어간 리스는 가게 한가운데 버티고 섰다. 날이 갈수록 카페를 찾는 손님들이 점점 더 많아지는 것 같았다. 이제 사나운 플로리스가 주방으로 물러나고, 매들린이 느긋한 말씨와 섹시한 걸음걸이로 상냥하게 손님들을 맞이하기 때문인 듯했다.

    언제나처럼 그가 들어서자 가게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보기 위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매들린은 카운터 뒤에서 행주로 커피 흘린 자국을 훔치며 글레나와 기분 좋게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무심코 고개를 들다가 그를 발견한 매들린은 일순 동작을 멈추고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

    그는 벨트 고리에 엄지손가락을 찔러넣고 그녀에게 윙크를 했다.

    [귀염둥이, 수수께끼 한 문제 풀겠소? 다리가 두 개고 고집불통에다 멍청이처럼 행동하는 게 뭐지?]

    [아주 쉽군요.]

    그녀는 가볍게 어깨를 들썩였다.

    [리스 던컨이에요.]

    주위에서 사람들이 킥킥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눈에 담긴 즐거움을 본 리스도 껄껄 웃었다.

    [기분이 어떻소?]

    그의 나직한 목소리는 마치 주위에 아마도 없는 것처럼 은밀하고 섹시했다. 여자 손님 몇몇이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입술 한쪽 끝을 치켜올리며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바로 그 순산 리스는 그녀를 와락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별로 좋은 상태는 아니에요.]

    [함께 집으로 갑시다. 내가 당신을 돌봐주겠소.]

    그녀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내가 그래야 하는 이유를 한 가지만 말해봐요.]

    바로 그곳에서, 몬태나 주 크룩 사람들이 모두 지켜보는 앞에서 그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일생일대의 도박을 했다. 그의 음성은 그리 높지 않았지만 카페 안의 사람들이 이젠 아예 노골적으로 두 사람의 대화를 듣느라 숨을 죽이고 있었기 때문에 모두의 귀에 똑똑히 들릴 정도로 아주 분명하게 울렸다.

    [왜냐하면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이오.]

    매들린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그는 놀랍게도 그녀의 눈이 눈물로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그가 앞으로 한 걸음 나서기도 전에 구름을 헤치고 나오는 햇살처럼 환한 미소가 그녀의 얼굴 가득 퍼졌다. 그녀는 카운터를 돌아나가는 시간도 아깝다는 듯 카운터 위로 올라섰다.

    [그럴 때가 되기도 했죠.]

    그 말고 함께 그녀는 그의 품안으로 뛰어들었다.

    손님들은 일제히 박수를 치기 시작했고, 그 소리에 놀란 플로리스가 주방에서 뛰어나왔다. 매들린이 리스의 품에 안겨 있는 것을 본 그녀는 혀를 차면서 짐짓 기분 나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이제 새 웨이트리스를 구해야 한다는 소리 같군.]

    그녀가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젠장, 플로리스, 당신이 주방에만 틀어박혀 있어준다면 우리가 새 웨이트리스를 구해주지.]

    누군가 뒤쪽에서 짓궂게 소리쳤다.

    [그거 좋은 생각이야.]

    플로리스는 그 말과 함께 활짝 웃어 보임으로써 카페 안의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집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차가 목장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트럭을 세우고 그녀를 무릎 위로 끌어올렸다. 매들린은 그가 거친 음성으로 사랑한다고, 그녀가 너무나 필요하다고, 지금 당장 그녀를 갖고 싶다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자 심장이 터져 나갈 것 같았다. 그를 만지고 또 만져도 충분하지가 않았다. 그녀는 절박한 몸짓으로 그에게 매달리면서 온힘을 다해 그를 가졌다.

    마침내 집에 도착하지 리스는 그녀를 번쩍 안아들고 2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침대 위에 그녀를 내려놓고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녀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은밀한 목소리로 물었다.

    [또요?]

    [당신을 보고 싶소.]

    그의 목소리에는 간절함이 베어 있었다. 그녀가 완전한 알몸이 되었을 때 그는 그녀의 몸에 생긴 변화에 매혹되어 벙어리처럼 침묵을 지켰다. 여전히 날씬했지만 그녀의 몸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로서는 미묘한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복부는 완만하게 부풀어오르기 시작했고, 젖가슴도 전보다 더 풍만해지고 단단해진 데다가, 유두는 적갈색으로 짙어졌다. 그가 앞으로 몸을 숙이고 혀로 한쪽 유두에 원을 그리자 그녀의 온몸에 경련이 일었다.

    [정말 당신을 사랑해.]

    그는 매끄러운 복부에 살며시 입술을 갖다대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매들린은 손가락으로 그의 모리를 쓸었다.

    [그 말을 하는 데 꽤 시간이 걸렸군요.]

    그녀는 부드럽게 말했다.

    [속도가 느린 대신 지구력으로 보충해 주리다.]

    [그게 무슨 뜻이죠?]

    [지금부터 50년이 지난 뒤에도 사랑 고백을 들을 수 있을 거라는 뜻이오.]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방향을 바꿔 그녀의 배에 키스했다.

    [할 얘기가 또 있소.]

    [좋은 얘기예요?]

    [그렇다고 생가가는데. 곧 - 아마도 꽤 빨리 - 이곳에 변화가 있을 거요.]

    [어떻게요?]

    그녀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 변화가 내 마음에 들지 모르겠군요.]

    [새 파트너를 구했소. 로버트에게 1주일 전에 전화를 했지. 로버트는 이곳에 투자하기로 했소. 준비가 되는 대로 대규모 확장 작업을 시작하기로 결정을 본 거요. 이제 이곳은 던컨 & 캐넌 목장이 됐소.]

    그 이름을 듣고 매들린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깜짝 놀란 리스는 고개를 번쩍 들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뭘 해도 상관없지만 절대 D & C(인공 유산을 의미하기도 함) 목장이라고 부르진 마세요. 이름을 들을 때마다 사람들이 이상한 연상을 하게 되는 목장에서 살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그녀의 웃음소리에 활력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낀 리스도 씩 웃었다.

    [당신 소원대로 약자는 절대 쓰지 않으리다.]

    [좋아요.]

    천천히 미소를 지우면서 그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오빠에게 왜 전화했어요?]

    [당신을 믿었기 때문이오.]

    그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당신을 통해서 처남도 믿게 됐소. 사업적인 면에서 보면 탁월한 결정이 분명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원활하게 운영되는 목장을 당신에게 보여 주고 싶었거든. 게다가 이제 곧 아기도 생기잖소. 무엇보다도 이류 목장에 만족하기엔 내 자존심이 너무 강하니까. 이만하면 충분한 이유가 되는 것 같소?]

    [맨 처음에 댄 이유 하나만으로도 충분해요.]

    그녀는 그의 얼굴을 감싸쥐고 온 마음을 담아 그의 눈을 응시했다. 매들린의 과분한 사랑을 느낄 때마다 그는 세상을 정복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숙연해지기도 했다. 그는 그녀에게 키스하기 위해 몸을 숙였다.

    11월 3일, 매들린은 산부인과 입원실에 누워 리스의 손을 잡고 호흡을 조절하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지난 36시간 동안 계속 진통을 겪었기 떄문에 완전히 탈진한 상태였지만, 간호사는 모든 상태가 좋다고만 말했다. 리스는 눈 밑이 거무스름하고 수염을 안깎아 초췌한 모습이었다. 로버트는 아마 카펫에 구멍이 날 정도로 초조하게 복도를 서성이고 있을 터였다.

    [이번엔 당신 차례예요.]

    매들린이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리스는 괴롭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녀는 정신을 분산시킬 필요가 있었다.

    [인디아 잉크는 사실 인도가 아니라 중국의 산물이오.]

    [이런, 당신의 상식도 이제 거의 바닥이 난 모양이죠? 이번엔 내 차례로군요.]

    바로 그때 진통이 찾아들었고, 고통의 순간이 지나갈 때까지 그녀는 그의 손을 꽉 쥐고 참아야 했다. 다시 말을 할 수 있게 되자 그녀는 호흡을 고르며 입을 열었다.

    [배에서 나는 꾸르륵 소리는 '복명'이라고 해요.]

    리스는 그녀의 손을 자신의 뺨에 살며시 갖다댔다.

    [다시 사전을 인용하기 시작한다면 그건 반칙이야. 내 상식이야말로 진짜지. 샌디에이고 차아저는 원래 소유주가 카르테 블랑쉬라는 신용 카드 회사의 소유주였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오. 자기 회사의 신용 카드 사용자들이 '차아지'(지불하다) 라는 단어를 떠올리길 바랐거든.]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지만, 다시 진통이 찾아오자 그 웃음은 도중에 멎었다. 아까보다 심해진 통증의 강도에 그녀는 본능적으로 때가 다 됐음을 알아차렸다. 호흡을 고르면서 흐릿한 눈으로 분만 과정을 체크하고 있는 모니터를 흘끗 쳐다본 그녀는 리스의 손을 꽉 잡으며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요.]

    [정말 잘됐군.]

    리스는 자기가 얼마나 더 견딜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고통에 시달리는 아내의 모습을 지켜보는 건 정말 견디기 힘든 고문이었다. 단산에 대해 진지하게 고려해 볼 만큼 견디기 힘들었다.

    그는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매들린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간절하게 속삭였다.

    [귀염둥이, 당신을 사랑해.]

    그 말을 듣고 그녀는 나른하게 미소를 지었다.

    [나도 당신을 사랑해요.]

    또다시 진통이 찾아들었다. 간호사가 와서 그녀의 상태를 살펴보고는 격려하듯 미소를 지었다.

    [던컨 부인,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요. 분만실로 옮겨야겠습니다.]

    분만실에서도 리스는 그녀의 곁을 지켰다. 임신 기간 동안 태아의 발달 상태를 주의 깊게 지켜보았던 의사는 출산이 별로 힘들지 않을 거라고 했었다. 지금 리스는 그 문제 있는 의사에 대해 격분하고 있었다. 진통이 시작된 지 벌써 36시간이나 지난 것이다. 하지만 매들린에게 샌디에이고 차아저에 대해서 말한 지 30분도 채 안 돼서 리스는 새빨간 얼굴로 우렁차게 울어대는 아들을 품에 안게 되었다.

    매들린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리스의 얼굴에 떠오른 격정적이면서도 강한 소유감과 부드러움이 느껴지는 표정을 지켜보던 그녀는 목이 메었다.

    [3.6킬로그램이란 말이지.]

    그는 갓 태어난 아들에게 중얼거렸다.

    [이 녀석, 아슬아슬하게 네 엄마를 안 괴롭혔구나.]

    매들린은 환하게 웃으며 남편과 아들을 향해 팔을 벌렸다. 리스는 아기를 그녀의 품에 안겨주고 나서 그녀를 다시 자신의 품에 안았다. 아내와 아기,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땀에 젖어 머리가 찰싹 달라붙고 헝클어졌어도 지금 이 순간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게 보였다. 정말이지 기분이 좋았다! 완전히 탈진한 상태였지만 기분만큼은 날아갈 듯했다.

    그녀는 하품을 하면서 남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우리 작품이 정말 멋지지 않아요?]

    그녀는 아기의 조그만 손가락을 찬찬히 살펴보면서 선언했다.

    [앞으로 1주일 정도는 자야 할 것 같아요.]

    입원실로 옮겨져 잠에 빠져들기 직전 그녀는 리스의 다정한 속삭임을 다시 들을 수 있었다.

    [귀염둥이, 정말 당신을 사랑해.]

    대답을 하기엔 너무 졸렸기 때문에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 사랑한다는 말은 정말이지 아무리 들어도 싫증이 나지 않았다. 지난 몇 달 동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말이라 해도.

    리스는 침대 옆에 앉아서 잠든 아내의 모습을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지켜보았다. 피곤에 지쳐 그의 눈도 감기기 시작했지만, 그는 잠든 동안에도 결코 그녀의 손을 놓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