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컨의 청혼-11화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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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일을 나서는 그의 등뒤에 대고 매들린은 차갑게 물었다.

[방목장에 나가 있을 때 집에서 울리는 차 경적 소리를 들을 수 있나요?]

그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물론 못 듣소.]

리스는 왜 그런 걸 묻느냐는 눈초리로 그녀를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여전히 그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그럼 당신에게 어떻게 연락해요?]

[왜, 그러고 싶을 것 같소?]

그는 비꼬듯 물었다.

[난 지금 임신중이에요. 자칫 계단에서 넘어질 수도 있고, 갑자기 유산의 징후가 보일 수도 있죠. 사고의 가능성은 항상 있으니까요.]

그가 반론을 제기할 수 없는 문제였다. 리스는 입을 굳게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그는 지금 아내에게 목장을 떠날 수 있는 수단을 주든지, 아니면 아내와 아이의 목숨을 위험에 처하게 하든지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다. 아니, 사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문제였다.

그는 마지못해 바지 주머니에서 차 열쇠를 꺼내 수납장 위에 소리나게 내려놓았다. 하지만 그녀에게 차 열쇠를 넘기기 전에 확인하듯 이렇게 묻는 걸 잊지 않았다.

[도망가지 않겠다고 약속하겠소?]

그녀는 비로소 그를 쳐다보았지만 눈빛은 차갑고 무표정했다.

[아뇨. 내 말을 믿지도 않는 사람한테 왜 입 아프게 약속을 해야 하죠?]

[내가 믿어줬으면 하는 게 대체 뭐요? 목장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술수를 꾸미지 않았다는 건가? 이미 한 번 한 여자가 나를 바보로 만들고 내가 가진 재산의 절반을 강탈해 갔소. 두 번 다시는 그런 일을 허용하지 않을 거요. 그런 일을 당하기 전에 이 집을 홀랑 불태워 버리고 어떤 손해를 버더라도 목장을 통째로 팔아버릴 테니까, 알겠소?]

그는 목청을 점점 돋우더니 말을 끝낼 때즘엔 거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녀를 매섭게 노려보는 그의 얼굴은 분노와 증오로 보기 흉하게 번들거렸다.

매들린은 몸을 움찔하지도, 표정을 바꾸지도 않았다.

[그걸 원했다면 벌써 오래 전에 대출금을 갚아버렸겠죠.]

이번에는 그녀의 말이 먹혀들었다는 걸 그의 눈 속에서 읽을 수 있었다. 계속 밀어붙일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에게 생각할 거리를 준 것으로 충분했다. 그리고 오늘이 끝나기 전에 그에게 생각할 거리를 더 많이 만들어 줄 것이다.

그는 수납장 위에 차 열쇠를 남겨둔 채 문을 쾅 닫고 나갔다. 그녀는 잠자코 열쇠를 집어들고 2층으로 올라갔다. 벌써 필요한 짐을 챙겨두었고, 지난 이틀 밤 동안 혼자 침대에 누워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그리고 어디로 갈 것인지 이미 생각해 둔 상태였다. 리스는 이제 목장에 대한 권리가 생겼으니 그녀가 뉴욕으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럴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서라도 근처에 머물러야 했다.

그가 가까운 방목장에서 일을 할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바로 떠나지 않았다. 하루 종일 나가 있겠다고 한 그가 점심 시간에 돌아오자, 그녀는 자기 생각이 맞았다는 데 씁쓸한 만족감을 느꼈다. 만들어 놓은 음식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간단히 샌드위치를 만들어 주고 다시 하던 일을 계속했다. 오븐을 청소하는 일이었다.

그가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물며 무뚝뚝하게 물었다.

[당신은 안 먹을 거요?]

그녀는 냉랭하게 대답했다.

[벌써 먹었어요.]

몇 분 있다가 그가 다시 물었다.

[그렇게 무리해도 되는 거요?]

[힘든 일도 아니잖아요.]

그녀의 차가운 대꾸는 더 이상의 대화를 허용하지 않았다. 쉽게 그의 마음을 편하게 해줄 생각은 없었다. 두 번씩이나 에이프릴의 죄를 대신 속죄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못박아 두었는데 그녀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은 게 분명했다. 이제 그녀는 몸소 행동으로 보여줄 작정이었다.

그가 다시 일을 나간 뒤에도 30분을 더 기다렸다가 그녀는 가방을 챙겨들고 차에 올랐다. 멀리 갈 생각도 없으니, 그가 그녀를 찾아내는 데도 별로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기껏해야 며칠 정도? 원한다면 차는 돌려줄 생각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몰래 차를 몰고 나간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진 않았다. 어차피 차를 쓸 일도 없었다. 다음번 산부인과 의사와의 약속 전까지는 목장에 돌아올 생각이었고, 그게 여의치 않다면 병원에 가는 날 리스에게 전화해 데려다 달라고 하면 된다. 어쨌든 그녀는 리스와 너무 오랜 기간 떨어져 있을 생각은 없었다.

플로리스의 카페 2층에는 언제나 월세 방이 비어 있었다. 토박이들만 모여 사는 크룩 같은 작은 마을에선 월세 방을 임대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분간 거기서 머물면 될 것 같았다. 크룩에 도착한 그녀는 차를 카페 앞에 세워놓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차피 리스에게서 몸을 숨기려는 목적이 아니었으니 일부러 차를 카페 뒤편에 주차시킬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사실 그녀는 리스에게서 몸을 숨길 생각이기는커녕 오히려 그가 한시라도 빨리 자신을 찾아내길 바라고 있었다.

평소와 달리 카페는 텅 비어 있었다. 언제나 카운터 뒤를 지키고 있던 플로리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플로리스? 아무도 없어요?]

[잠깐만 기다려.]

주방 안에서 플로리스의 퉁명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주방과 연결된 회전문을 거칠게 밀치며 그녀가 나왔다.

[커피, 아니면 식사?]

[2층에 있는 방을 며칠 빌리고 싶은데요.]

너무나 의외의 말에 플로리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무슨 이유로?]

[머물 장소가 필요하기 때문이죠.]

[당신 같은 여자가 왜 초라한 월세 방을 내달라는 거지? 목장에 커다란 저택도 있고, 긴긴 밤을 뜨겁게 달궈줄 그 덩치 좋은 남편도 있잖아.]

[지금 현재로선 따끔한 교훈이 필요한 고집불통 남편이 있을 뿐이죠.]

매들린다운 재치 있는 대답이었다. 플로리스는 심술궂게 입을 삐죽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흠, 난 고집불통이 아닌 남자는 지금껏 본 적이 없는데.........]

[그리고 난 임신 중이에요.]

[그 사실을 집에 있는 멍청이도 알고 있어?]

[물론이죠.]

[당신이 어디 있는지도?]

[곧 알게 될 거예요. 꽁꽁 숨을 생각은 없으니까요. 아마도 조만간 저 문을 걷어차며 엄청 큰소리로 소란을 피우며 쳐들어오지 않을까 싶은데요? 하지만 몇 가지 문제를 명확히 하기 전까진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어떤 문제?]

[내가 그의 전처와는 다른 사람이라는 거요. 물론 그런 끔찍한 경험을 했으니 그가 과민하게 구는 것도 이해가 가지만, 당사자도 아닌 내가 그 여자의 죗값을 대신 치를 순 없잖아요? 사사건건 색안경을 끼고 보는 데는 정말 질렸어요.]

플로리스는 분개한 얼굴로 열변을 토하는 매들린을 찬찬히 훑어보고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주름진 얼굴엔 즐거운 표정이 감돌았다.

[좋아, 그 방을 내주지. 남자들이 당하는 꼴을 구경하는 건 언제나 신나는 일이니까.]

그 말을 끝으로 용건을 모두 마쳤다는 듯 주방으로 돌아가던 플로리스가 갑자기 우뚝 걸음을 멈추고 매들린을 돌아보았다.

[직업적으로 요리를 해본 적은 없겠지?]

[네. 왜, 요리사가 필요한가요?]

[필요하지 않다면 내가 물었겠어? 그 멍청이 런디 녀석이 달걀 요리가 고무 같다고 하니까 성질을 부리면서 지난주에 갑자기 그만뒀지 뭐야. 혼자서 주방 일에다 웨이트리스 일까지 해야 하니,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판이야.]

매들린은 잠시 궁리하다가 괜찮은 생각이 떠오른 듯 눈을 반짝였다.

[웨이트리스 일이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경험은 있어?]

[아뇨, 하지만 지난 9개월 동안 리스를 돌봐야 했죠.]

플로리스는 심히 동정이 간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그렇다면 자격이 있군. 쉽게 만족할 남자로 보이진 않았으니까. 그래, 몸은 어때? 뱃속의 아기에게 해가 된다면 오래 서 있어야 하는 웨이트리스 일은 권하고 싶지 않은데.]

[아주 건강해요. 어제 의사를 만나고 왔거든요.]

[그럼 당장 오늘부터 일을 시작해. 먼저 당신이 쓸 방을 보여주지. 화려한 것하고는 거리가 멀지만 난방은 잘되는 방이야.]

방에는 가구가 거의 없었지만 - 싱글 침대와 옷장, 그리고 등받이 없는 의자 하나가 전부였다 -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임시로 머물 방인데 가구가 무슨 상관이겠는가. 난방 잘되고 깨끗하면 그만이지.

매들린이 가방을 나르는 동안 플로리스는 난방을 켜주고 주방으로 돌아갔다. 조그만 옷장에 몇 가지 안 되는 옷을 챙겨넣은 매들린은 카페로 내려가서 허리에 앞치마를 두르고 웨이트리스로서의 첫 업무를 시작했다.

그날 저녁 집에 돌아온 리스는 당장이라도 곯아떨어질 것처럼 피곤했다. 오늘은 정말 불운의 연속이었다. 성질 사나운 소에 채이고 손은 로프를 당기다기 살갗이 온통 벗겨졌으니 말이다. 이제 곧 봄이 되면 암소들이 송아지를 낳기 시작할 테니 말 그대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질 터였다.

지친 몸을 이끌고 집 쪽으로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던 리스는 텅빈 차고와 불빛 하나 없이 컴컴한 창문을 발견한 순간 가슴을 심하게 두들겨 맞은 것처럼 숨이 턱 막혔다. 비통함과 분노로 온몸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그녀가 정말로 떠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었다. 내심 그녀가 전에도 여러 번 그랬던 것처럼 물러서지 않고 그에게 대항할 거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떠나버렸다. 두려워하던 일이 현실로 나타났다는, 심장을 가르는 듯한 깨달음에 그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녀는 역시 가난한 목장주의 아내로 살아갈 수 없는 욕심 많고 천박한 여인이었던 것이다. 멋진 옷을 차려입고 화려한 생활을 즐길 수 있는 불빛 찬란한 도시로 그녀는 도망가 버렸다.

그리고 뱃속의 아기도 그녀와 더불어 사라졌다.

에이프릴이 저질렀던 것보다 열 배는 더 지독한 배신이었다. 그는 매들린을 신뢰하기 시작하고 있었고, 미래를 함께 할 반려자로 생각하기 시작한 참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1년 가까이 함께 살면서 그를 위해 요리를 하고, 세탁을 하고, 함께 웃고, 함께 일하고 매일 밤 그의 품안에서 잠들었다. 심지어 그의 아기를 갖기까지 했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그녀가 난데없이 그의 등을 비수로 찌른 것이다. 악몽이 현실로 나타난 것 같았다. 다시 예전의 아픈 기억과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는 마구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집안으로 들어갔다. 거의 자동적으로 부엌에 들어선 그는 새삼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환하게 웃으며 그를 맞아들이던 매들린의 모습이 너무나 보고 싶었다. 보글보글 꿇고 있는 스튜 냄비에서 풍기던 맛있는 냄새도 못 견디게 그리웠다. 하지만 매들린의 손길이 사라진 부엌에는 시계 초침 소리와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만 공허하게 울릴 뿐이었다.

리스는 모든 정황에도 불구하고 잠깐 마을에 나갔다 온다고 쓴 메모가 어딘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매달렸다. 열 개나 되는 방을 모조리 뒤졌지만 그녀가 남긴 메모는 찾을 수 없었다. 지난 이틀 동안 그녀가 사용했던 침실로 가보니 서랍장이 텅 비어 있었다. 욕실 선반에 올망졸망 놓여 있던 화장품도 사라지고 없었다. 집 안 어디에서도 그녀의 자취를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 갑자기 참을 수 없게 화가 났다.

상처에 소금을 문지르는 것 같았지만 그는 황급히 그녀가 뉴욕에서 입던 옷들을 간수해 놓았던 다른 침실의 옷장을 살펴보러갔다. 그는 지금 너무나 엄청난 상처를 입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런 상태였다. 아내의 부재를 어떤 식으로든 확인해야만 세상을 향해 그가 지금 느끼고 있는 상실감과 분노를 터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옷장 문을 열자 비닐 커버에 덮인 형형색색의 실크 블라우스와 세련된 정장들이 가지런히 걸려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옷장 아래쪽에는 여러 켤레의 하이힐이 질서정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충동적으로 흰색 실크 블라우스의 소매를 움켜쥐고 코에 갖다댄 리스는 희미하게 풍기는 그녀 특유의 향기에 가슴이 미어질 듯한 상실감을 느꼈다.

그는 재빨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녀가 가져온 책들은 그대로 있었다.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오디오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많은 물건들을 놔두고 떠났으니 결국 한 번은 돌아올 것이다. 어쩌면 그가 집을 비우는 낮 시간에 돌아와서 나머지 물건들을 모두 챙겨 떠날 예정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 뉴욕으로 돌아갔다면 왜 도시에서 입을 정장들은 내버려두고 목장에서 입던 편안한 옷들만 가져간 것일까?

하긴 그녀의 행동을 누가 다 알 수 있겠는가! 그가 도저히 참지 못하는 그 한 가지가 무엇인지 뻔히 알면서도 신탁 예금으로 대출금을 상환한 여자가 아닌가!

평생 이렇게 분이 치민 적은 없었다. 법정에서 판사가 에이프릴에게 전재산의 반을 위자료로 지불하라고 판결을 내렸을 때보다 몇 백 배는 더 화가 났을 정도였다. 사실 에이프릴은 그런 짓을 하고도 남을 여자였다. 그녀의 안하무인격인 행동과 터무니 없는 변명은 그 전에 이미 질리도록 경험한 터라 그녀에 대해선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마 매들린은 그를 장님처럼 눈멀게 하고는 정말 어이없이 그의 뒤통수를 쳤다. 그는 그 충격에서 아직도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한 짓을 떠올릴 때마다 분노가 치솟아 도저히 이성적으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이제 그녀가 떠나버렸으니 생각할 시간이 아주 많아지겠군. 그는 씁쓸하게 실소를 흘렸다. 어쨌든 나중에 짐을 가지러 돌아왔을 때 그녀는 꽤 고생을 할 것이다. 시간이 나는 데로 제일 먼저 현관 자물쇠부터 바꿀 생각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에이프릴이 그의 인생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을 때조차 하지 않았던 일을 해볼 생각이었다. 오랫동안 자리만 차지하고 있던 위스키 한 병을 통째로 비우고 죽도록 취해볼 작정인 것이다. 그러면 옆에 매들린이 없어도 잠을 이룰 수 있을지 모르니까.

다음날 아침 그는 지옥에 다녀온 듯한 기분을 느끼며 집에서 깨어났다. 머리는 지끈거리고 속은 곧 넘어올 것처럼 울렁거렸지만, 그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소를 돌보러 나갔다. 그의 바보짓 때문에 애꿎은 녀석들이 고통을 받을 필요는 없었다. 두통이 잦아들기 시작하고 어느 정도 다시 사람 같은 몰골을 되찾았을 땐 자물쇠를 사러 나가기엔 시간이 너무 늦어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다음날부터 암소들이 송아지를 낳기 시작했다. 항상 똑같은 일의 반복이었다. 가장 먼저 진통이 시작된 암소가 새끼를 낳으려고 조용한 곳을 찾아 숨어 들어가면 다른 암소들도 하나둘씩 똑같이 어딘가 안전한 곳을 찾아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녀석들이 송아지를 낳는 장소는 정말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구석지고 후미진 곳이었다.

혼자 힘으로 구석에 숨어 난산 중인 암소를 도와주고, 갓 태어난 송아지들을 하나하나 찾아 안전을 돌봐주고, 병이 나거나 사산된 송아지들의 뒷처리를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반드시 한 마리쯤은 본능적으로 자기가 낳은 송아지를 거부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그럴 땐 다른 암소의 젖을 먹게 해주거나 아니면 직접 헛간에 데려다가 손으로 먹여야 했다.

사흘 정도 지나서야 겨우 휴식을 취할 여유가 생겼다. 그는 거실 소파에 털썩 쓰러져 열여섯 시간을 내리 잠만 잤다.

그런 연유로 매들린이 떠나고 1주일이 지나서야 겨우 새 자물쇠를 사러 크룩에 나갈 수 있었다. 처음에 느꼈던 고통과 분노는 이제 가슴 시린 허탈감으로 바뀌어 있었다.

트럭을 몰고 플로리스의 카페 앞을 지나는데 언뜻 흰색 포드 스테이션 왜건이 세워져 있는 게 보였다. 그의 심장이 갑자기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아마도 두고 간 물건들을 가지러 그녀가 돌아온 것 같았다. 그는 이웃에 있는 잡화점 앞에 트럭을 대고 초조하게 운전대를 손으로 두드리며 낯익은 흰색 차를 노려보았다.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진 분노의 감정이 일순간 폭발했다가 갑자기 멍한 감정의 혼란 상태가 찾아왔다. 그 순간 리스는 한 가지 사실을 명확히 직시하게 되었다.

그녀가 떠나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생을 마칠 때까지 리스 던컨의 아내로 살아가야 한다. 예전에 에이프릴과 헤어질 땐 속박에서 풀려난 듯 기분이 홀가분했지만, 매들린은 절대 그런 식으로 떠나보낼 수 없었다. 그녀는 그의 아이를 가진 여자였다. 아침에 일을 나갈 때 침대 기둥에 묶어놓는 한이 있더라도 그녀를 곁에 둘 것이다. 그의 아이는 목장에서 태어나 자라날 것이다.

그는 트럭에서 내려 카페로 걸어갔다. 구릿빛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고, 결연한 시선은 정면을 향해 꽂혀 있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리스는 재빨리 사방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각선미가 끝내주는 금발 미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카페 안에는 안면이 있는 카우보이 두 명이 카운터 앞쪽 자리에 앉아 있었다.

바로 그때 주방과 연결된 회전문이 열리더니 그가 찾고 있는 멋진 각선미의 금발 미녀가 앞치마를 두른 채 양쪽 손에 햄버거와 프렌치 프라이가 담긴 접시를 들고 나타났다. 그녀는 그를 흘끗 쳐다보더니 얼굴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다른 손님들 앞에 접시를 내려놓았다.

[자, 주문하신 음식이 나왔습니다. 혹시 후식으로 파이를 드시고 싶으면 말씀하세요. 조금 전에 플로리스가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정도로 맛있는 애플 파이를 만들었거든요.]

손님들에게 생긋 웃어 보이고 몸을 돌린 그녀는 감정이 전혀 담기지 않은 냉정한 눈빛으로 리스를 바라보았다.

[뭘 주문하겠어요?]

무심코 뒤를 돌아보던 두 명의 카우보이는 매들린이 누구와 얘기를 나누고 있는지 알게 되자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리스는 이 마을에 사는 사람들을 거의 대부분 알고 있었고, 마을 사람들 역시 개인적인 친분 관계는 없더라도 그가 누군지는 알았다. 또한 모두들 매들린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사실 그녀처럼 눈에 띄는 미인을 모르고 지나치기가 더 어려울 것이다. 등뒤에 서 있는 험악한 분위기의 남자가 새로 온 웨이트리스의 남편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커피를 한 잔 부탁하겠소.]

조용하면서도 왠지 위협적으로 들리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커피를 주문한 리스는 칸막이가 둘러진 자리로 뚜벅뚜벅 걸아갔다.

매들린은 즉시 커피 한 잔과 물 한 컵을 그의 자리에 갖다주었다. 그리고는 기계적인 미소를 떠올리며 사무적으로 물었다.

[다른 건 필요 없나요?]

질문과 동시에 그녀는 대답을 기다릴 필요도 없다는 듯 곧장 몸을 돌렸다.

바로 그때 그의 손이 번개처럼 튀어나와 그녀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손에 잡힌 그녀의 손목은 놀라울 정도로 가늘었다. 리스는 새삼 그녀가 자신에 비해 얼마나 왜소한지 깨닫고 충격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불같이 화를 내는 그와 맞닥뜨렸을 때조차 한 번도 겁을 집어먹거나 뒤로 물러선 적이 없었다. 그건 침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엉덩이를 움켜잡고 거세게 돌진할 때조차 그녀는 그 멋진 다리로 그의 허리를 휘감으며 열렬히 그를 받아들였다. 매들린은 결코 비겁하게 도망칠 타입이 아니었다. 하지만 도망친 게 아니라면 왜 여기 있는 걸까? 그의 손이 미치지 않는 뉴욕으로 돌아가지 않은 이유는 또 뭘까?

[잠깐 앉아봐요.]

그는 나직하지만 위엄 있는 어조로 말했다.

[할 일이 있어요.]

[앉으라고 했잖소.]

그는 완력으로 그녀를 자리에 앉혔다. 그녀는 차갑고 거리감이 느껴지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여기사 뭘 하는 거요?]

리스는 호기심 어린 얼굴로 흘끗흘끗 쳐다보는 두 명의 카우보이를 무시한 채 날카롭게 물었다.

[보시다시피 일하고 있어요.]

[내 말이 그 말이요. 대체 왜 여기서 일을 하고 있냔 말이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 이유죠. 돈을 벌어야 하니까요. 그럼 내가 뭘 할 거라고 기대했나요?]

[내가 경고한 대로 목장에 그 조그만 엉덩이를 꼭 붙이고 앉아 있길 기대했지.]

[날 원하지 않는 곳에 왜 머물러야 하죠? 어쨌든 원한다면 차는 도로 가져가세요. 이제 필요 없으니까.]

그는 치솟아 오르는 짜증과 울화를 참으려 애썼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어디서 지내고 있소?]

그는 간신히 화를 참고 물었다.

[여기 2층에서요.]

[짐을 챙겨요. 함께 집으로 갑시다.]

[싫어요.]

[지금 뭐라고 했소?]

[싫다고 했어요. 집에 돌아가기 싫다구요. 설마 '싫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건 아니겠죠?]

리스는 그녀의 어깨를 움켜쥐고 정신을 차릴 때까지 마구 흔들어 주거나, 그도 아니면 무릎에 앉혀놓고 정신을 잃을 지경이 될 때까지 미친 듯이 키스를 퍼붓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기 위해 손을 테이블 위에 꼭 고정시키고 있었다.

[매디, 이런 식의 행동은 용납하지 않을 거요. 빨리 2층에 가서 짐을 가져와요.]

나름대로 애썼지만 더 이상 언성을 낮출 수가 없었다. 두 명의 카우보이는 이제 노골적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다음 순간 그녀가 붙잡을 틈도 없이 벌떡 일어섰다. 그녀는 평소엔 느긋하지만 필요할 경우엔 바람처럼 빠르게 행동할 수 있는 여자였다.

[내가 그래야 하는 이유를 한 가지만 말해보시죠?]

그녀가 차가운 눈동자에 열기를 띠며 속사포처럼 쏘아붙였다.

[당신은 내 아이를 임신하고 있잖소!]

리스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크게 소리쳤다.

[당신 말을 빌리자면, 내가 뭘 하든 관심이 없다면서요. 게다가 직접 대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나와 결혼한 것을 후회한다고 했던 사람이 당신 아니었던가요? 그때도 난 여전히 임신 중이었어요. 자, 차이가 뭐죠?]

[마음이 변했소.]

[오, 그래요? 정말 잘났군요! 내가 당신이 바라는 아내감도 아니고, 목정주의 아내가 될 자질도 없다고 한 사람이 대체 누구죠? 그것도 당신이 한 말이에요.]

바로 그때 카우보이 중 한 남자가 헛기침을 하며 끼여들었다.

[매디 양, 내가 보기에 당신은 자질이 충분해요.]

리스는 바아죽일 듯한 표정으로 그 카우보이를 노려보면서 위협적으로 주먹을 쥐어 보였다.

[이빨을 그냥 달고 다니고 싶소, 아니면 손에 들고 다니고 싶소?]

그는 나직하게 거의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로 으름장을 놓았다.

카우보이는 목에 뭐가 걸린 것처럼 다시 헛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잔뜩 주눅든 목소리로 말했다.

[그저 한 마디 거들고 싶었을 뿐인데요.]

[정 그러고 싶으면 밖에 나가서 해, 이 자식아! 이 문제는 나와 내 아내 사이의 일이야!]

서부에서는 누가 무슨 짓을 하든 제 3자는 절대 참견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그 카우보이는 서둘러 음식값을 카운터에 올려놓고 친구를 잡아끌었다.

[이봐, 빨리 가자.]

[가고 싶으면 자네나 가라구.]

다른 한 명의 카우보이는 케첩을 뿌린 프렌치 프라이를 열심히 포크로 찍어먹는 중이었다.

[난 아직 다 안 먹었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은 아직 구경거리가 남아 있는데 가긴 어딜 가냐는 말을 하고 싶은 것 같았다.

바로 그때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고 플로리스가 주방에서 나왔다. 가뜩이나 험상궂은 얼굴이 평소보다 더 험악하게 찌푸려져 있었다.

[어떤 놈이 이렇게 시끄럽게 구는 거야?]

그녀는 일단 큰소리로 상황을 제압하고 나서 리스를 쳐다보았다.

[오, 당신이구먼!]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말투였다. 그가 무슨 전염병균이라도 되는 것처럼.

[매디를 집에 데려가려고 왔습니다.]

리스는 남아 있는 인내심을 몽땅 그러모아 최대한 공손하게 말했다.

[당신 성질이 그렇게 달콤한데, 매디가 가고 싶어할 이유를 모르겠는걸.]

[그녀는 내 아냅니다.]

[여기서는 식사를 내다주면 돈이라도 벌 수 있지.]

플로리스는 주걱을 흔들며 신랄하게 말했다.

[당신 바지 속의 그 장작 같은 물건을 빼고 그녀에게 줄 만한 특별한 거라도 있나?]

리스의 턱이 화강암처럼 굳어졌다. 정 이렇게 나온다면 그녀를 어깨에 둘러메고 집으로 데려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물리적인 힘은 가급적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아기를 가진 몸이라는 이유도 물론 있었지만, 더 큰 이유는 그녀가 스스로 원해서 돌아와 주기를 바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 표정을 보니 반갑게 따라나설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다.

이제 그녀가 있는 곳을 알았다. 뉴욕으로 돌아간 것도 아니고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으니 앞으로도 설득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작전상 후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리스는 마지막으로 그녀를 한번 쳐다보고는 테이블에 돈을 던지고 성큼성큼 나가버렸다.

문이 닫히는 소리에 매들린은 참았던 숨을 크게 내쉬었다. 한 고비는 넘겼다. 리스는 그녀를 전처와 같은 부류의 여자라고 믿고 있으면서도 다시 목장으로 데려가려 했다. 리스 던컨에 대해서 그녀가 확실하게 알고 있는 사실은 당나귀처럼 고집이 세고 절대로 포기를 모른다는 거였다. 그는 분명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녀는 리스가 손도 대지 않은 커피를 카운터로 갖고 갔다. 리스가 너무 세게 닫고 나가는 바람에 아직도 흔들거리는 출입문을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바라보던 플로리스가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음 순간 호수 표면에 잔물결이 번지듯 플로리스의 험상궂은 얼굴에 감출 수 없는 즐거움이 떠올랐다. 그때까지 카페에 남아 있던 두 명의 카우보이는 항상 뚱한 표정이던 플로리스가 입을 쩍 벌리고 웃는 모습에 충격을 받은 듯했다.

플로리스가 손바닥을 위로 해서 매들린에게 내밀었다. 매들린은 승리를 자축하는 의미로 힘차게 하이파이브를 했다.

[아내 1점, 남편 0점.]

플로리스가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선언했다.

다음날도 카페에 모습을 드러낸 리스는 칸막이가 둘러진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아 매들린이 손님들에게 주문을 받고 음식과 커피를 날라다 주는 모습을 한동안 지켜보았다. 평보소다 북적대는 카페를 보니 어제 벌어졌던 실랑이가 벌써 온 마을에 소문난 모양이었다. 공짜 싸움 구경처럼 군중 동원력이 뛰어난 것도 없는 법이니까 말이다.

매들린은 약간 피곤해 보였다. 어제는 놀라움과 분노, 안도감등의 감정으로 온통 뒤범벅이 되어 있던 터라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듯했다. 그녀가 혹시 어디가 아픈 건 아닌지 걱정스러워졌다. 목장을 떠나기 전에도 가끔씩 입덧을 했지만 그렇게 심하진 않았었는데........ 지금 그녀의 모습을 봐서는 아무래도 본격적인 입덧이 시작된 것 같았다. 리스는 그 생각에 더욱 화가 치밀었다. 목장을 떠나지 않았다면 지금쯤 침대에 편안히 누워 휴식을 취할 수도 있지 않았겠는가.

그녀는 물어보지도 않고 그에게 커피를 갖다준 뒤 얼른 돌아서려 했다. 어제의 재방송처럼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카페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들에게 집중됐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입덧이 심한 거요?]

그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오늘 아침엔 좀 그랬는데, 플로리스가 준 토스트를 먹고 나니 나아졌어요. 실례해요. 다른 손님들이 있어서.]

리스는 어제의 상황을 그대로 재현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더 이상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대신 커피를 마시면서 그녀가 손님들 사이를 돌아 다니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쪽에서는 달콤한 미소를, 다른 쪽에서는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는 동안 손님들은 하나같이 웃음을 터뜨리거나 표정이 밝아졌다. 조그만 일에서 즐거움을 찾고 다른 사람들과 그 즐거움을 나누는 건 그녀만의 독특한 재능이고 마법이었다. 그녀와 함께 보낸 9개월은 그의 인생에서 정서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가장 만족스런 나날이었다.

그는 매들린이 돌아와 주기를 바랐다. 아무 일도 안 하는 것처럼 느긋하게 돌아다니며 기적같이 집 안을 변화시키는 모습을 다시 보고 싶었다. 예전처럼 그를 놀려대고, 황당한 퀴즈를 생각해내서 그의 지성을 자극해 주길 바랐다. 그녀의 촉촉이 젖은 몸 안으로 깊숙이 밀고 들어가는 그 황홀한 느낌도 다시 맛보고 싶었다. 하지만 다른 무어보다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그는 아직도 매들린이 왜 뉴욕으로 돌아가지 않고 여기 크룩에 있는지 그 이유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여기라면 너무 쉽게 그녀를 찾아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크룩으로 도망친 건 아예 도망이라고 볼 수도 없는 것이다.

유일하게 짐작이 가는 이유는 처음부터 뉴욕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는 것, 그거 하나뿐이었다. 그의 곁을 떠나고는 싶은데 복잡한 대도시는 싫었던 것이다.

그녀에게 퍼부었던 독설이 뇌리에 되살아나자 그는 바늘에 찔린 것처럼 몸을 움찔했다. 그녀도 그의 폭언을 모두 기억하는 것같았다. 심지어 몇 마디는 인용하기도 했으니까. 나중에 후회하게 될 말은 안 하는 게 좋을 거라고 그녀가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그는 그녀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기엔 너무 화가 난 상태였다. 그녀는 받은 만큼 돌려주는 사람이라는 걸 기억했어야 했는데.

바로 그때 매들린이 커피 주전자를 들도 와서 빈 잔에 채워주며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파이도 갖다줄까요? 오늘은 신선한 코코넛 파이에요.]

[좋소.]

이곳에 더 오래 머무를 좋은 구실이 될 거라는 생각에 그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곧 카페 안에 가득 찬 구경꾼들도 흥미를 잃고 돌아갈 것이다. 모두들 할 일들이 있을 테고, 오늘은 흥미를 끌 만한 실랑이도 없었으니까.

잠시 후 매들린이 다시 그의 자리로 와서 빈 파이 접시를 치우고 커피를 한 잔 더 따라주며 물었다.

[다른 할 일은 없어요?]

[많소. 암소들이 송아지를 낳는 시기거든. 우리 목장에도 여러 마리가 태어났지.]

아주 잠깐 그녀의 눈이 빛을 발했다. 하지만 그녀는 곧 어깨를 으쓱해 보이곤 돌아서 가려 했다.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얼른 입을 열었다.

[매디, 잠깐 앉아서 쉬면 안 될까? 내가 여기 온 지 두 시간이 넘었는데 한 번도 쉬는 걸 못 봤소.]

그녀가 시계를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아침은 유난히 바빴어요. 당신도 피곤하다고 소들을 그냥 내팽개쳐 두진 않잖아요. 그렇죠?]

카페 손님을 소와 비교하다니, 그는 자신도 모르게 씩 웃었다.

[어쨌든 앉아요. 오늘은 소리지르지 않을 테니까.]

[그래요? 새로운 변화로군요.]

그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맞은편 자리에 앉더니 그의 옆 의자에 다리를 올려놓았다. 그는 그녀의 다리를 들어 자기 허벅지 위에 올려놓고는 테이블 밑으로 손을 넣어 근육이 뭉친 종아리를 주물러 주기 시작했다. 그녀는 몸을 움찔하며 다리를 내리려 했다.

[그냥 힘을 빼고 가만히 있어요.]

그는 조용히 타일렀다.

[이렇게 장시간 서 있어도 괜찮은 거요?]

[목장에 있었어도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요리도 앉아서 하는게 아니잖아요. 몸은 괜찮아요. 그저 임신을 했을 뿐이라구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가 능숙한 솜씨로 종아리를 마사지해 주자 그녀는 눈을 스르르 감고 긴장을 풀었다. 오랫동안 목장의 소들을 볼보면서 익힌 솜씨라 그런지 그의 마사지는 정말 느낌이 좋았다.

그는 침대에서도 멋진 연인이었다. 모든 여자들은 리스 같은 연인을 가져야 한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야성적이고 정열적인 리스는 그녀의 육체를 갈구하는 만큼 그녀에게도 아낌없이 자신을 주었다. 그와 사랑을 나눴던 기억이 떠오르자 서서히 몸이 뜨거워졌다. 그녀는 눈을 번쩍 떴다. 이런 식으로 계속 공상에 잠겨있다간 무슨 짓을 하는지 깨닫지도 못하는 사이에 그의 무릎에 올라앉을지도 몰랐다.

리스가 조용히 말했다.

[나와 같이 집으로 가줬으면 좋겠소.]

소리를 지르며 집으로 돌아가자고 했으면 같이 고함을 지르며 맞섰겠지만, 그의 조용한 말투는 요구라기보다 부탁에 가까웠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올렸다.

[내 대답은 항상 같아요. 내가 그래야 하는 이유를 한 가지만 말해봐요.]

[내 대답도 마찬가지요. 당신은 내 아이를 갖고 있고, 그 아이는 언젠가 자신이 물려받을 목장에서 자라날 권리가 있단 말이오. 당신도 신탁 예금으로 대출금을 갚은 이유 중의 하나가 그거라고 했잖소. 우리 아이들을 위해 목장을 지킬 거라고.]

[난 지금 몬테나에 있어요. 앞으로도 여길 떠날 생각이 없구요.]

그녀는 실망한 기색을 애써 감추며 말했다.

[이렇게 가까이 살고 있으니 아이는 목장과 이곳을 자주 오가면서 지낼 수 있을 거예요. 아이 때문이라면 내가 꼭 목장으로 돌아가야 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죠.]

[매디 양, 여기 커피 좀 더 주겠소?]

손님 하나가 소리쳐 부르자 그녀는 다른 말 없이 그의 무릎에서 다리를 내리고 다시 씩씩하게 일을 하러 갔다.

결국 아무 소득 없이 집으로 발길을 돌린 리스는 그날 밤 커다란 침대에 홀로 누워 이리저리 몸을 뒤척였다. 밤의 장막이 고요하게 드리워지자 매들린에 대한 그리움이 뼛속 깊이 사무쳤다. 그녀의 향기, 그녀의 감촉, 그녀의 맛.......... 모든 것이 그리웠다.

다음날은 망가진 울타리를 수리해야 했기 때문에 플로리스의 카페에 갈 수 없었다. 리스는 거의 기계적으로 손을 놀리면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문든 자기가 원하는 게 목자에 대한 권리였다면 왜 진작에 대출금을 상환해서 혼전 계약서를 무효로 만들지 않았겠냐는 그녀의 항변이 떠오르자 그는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보았다. 정말 목장이 그녀가 원하는 전부였다면 왜 9개월이나 기다렀겠는가? 왜 눈보라와 싸우며 자신의 목숨을 위험에 처하게 만들면서까지 그의 목숨을 구하려 들었겠는가? 아니, 그보다 원하는 전부였다면, 대출금을 대신 갚아줌으로써 갖게 된 권리만으로도 충분했다. 굳이 임신까지 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그녀는 분명히 아이를 원해서 임신했으며,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에 대출금을 대신 상환했던 것이다. 리스 턴컨. 그를 위해서 목장을 구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는 아이에게 물려줄 유산을 지키기 위해 그랬다고 했지만, 아직까지 뱃속의 아기는 추상적인 존재일 뿐이었다. 아무리 그녀의 모성 본능이 강하다고 해도 아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남편을 위해서 목장을 구했다고 보는 게 더 정확했다.

무엇보다도 매들린에게는 돈이 필요 없었다. 로버트 캐넌이라는 든든한 보호자가 있으니 원하는 건 무엇이든 가질 수 있는 처지가 아닌가! 로버트 캐넌은 에이프릴의 가족이 가진 재산 정도는 새 발의 피일 정도로 엄청난 부자였다.

여전히 모든 것은 한 가지 의문으로 귀결되었다. 그가 펄펄 뛸거라는 걸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을 텐데 그녀는 왜 그 모든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굳이 대출금을 대신 상환한 걸까? 대답도 한 가지 뿐이었다. 그녀가 결코 감추려고 하지 않던 진실. 그녀는 그를 정말로 사랑하는 것이다.

그 깨달음은 새롭게 그를 괴롭혔다. 그는 얼굴에 솟아나는 진땀을 힘없이 닦았다. 매들린은 그를 사랑했다. 그가 말도 안되는 비난을 퍼부으며 소리를 질러댈 때, 그녀는 바로 그 말을 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는 귀를 막고 듣지 않았다.

그는 거칠게 철사를 잡아당겨 꺾쇠로 울타리에 고정시켰다. 잘못을 인정하는 건 씁쓸한 일이지만, 매들린이 그에게 돌아오기를 원한다면 몇 번이라도 인정해야 했다. 수렁에 빠진 기분이 되었던 그는 그녀가 에이프릴과 똑같은 여자라고 치부하고 그녀를 잔인하게 내쳤다. 하지만 지금은 똑똑히 알 수 있었다. 매들린과 에이프릴은 하늘과 땅, 빛과 어둠, 여름과 겨울만큼이나 다른 여자다. 에이프릴은 몬태나에서 사는 것을 한 번도 즐긴 적이 없지만, 매들린은 아이처럼 즐거워했다. 그녀는 목장에서의 삶을 진정으로 원했다.

그녀는 그가 지독하게 반응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대출금을 상환할 정도로 그를 사랑한 것이다. 그를 위해 목장을 구하고 싶었기 때문에. 그녀는 항상 자신보다 그의 안위를 먼저 생각했고, 그것이 바로 그녀가 보여준 진실한 사랑이었으나, 그는 눈먼 고집불통 당나귀처럼 굴었다.

그의 불 같은 성질로 인해 상황은 지옥처럼 변했다. 모든 것이 그의 잘못이었다. 에이프릴의 탐욕으로 망쳐졌던 그의 삶이 더 황폐해지는 걸 이제는 막아야 했다. 에이프릴이 저지른 가장 큰 죄악은 그를 금전적으로 궁핍하게 만든 게 아니라 그가 더 이상 사람들을 순수하게 보지 못하도록 만든 것이다. 매들린을 처음 만났을 때 그 자신도 인정한 사실이었다.

만일 에이프릴과 결혼하기 전에 매들린을 먼저 만났다면, 그는 자기가 가진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서라도 그녀에게 구애했을 것이고 마침내 차지했을 것이다. 필요하다면 세상 끝까지라도 그녀를 쫓아가서 자신의 침대로 데려다 놓았을 것이다. 어쨌든 그는 처음 본 순간부터 그녀의 매력에 깊이 빠져들고 말았다. 만약 그 학교 선생이었던 여자 - 벌써 이름도 잊었지만 - 가 그의 청혼을 받아들였더라도 아마 결국 그는 매들린을 선택하고 말았을 것이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그녀만이 그의 성을 가질 유일한 여자가 되었으니까.

제기랄, 뒤늦게 정신을 차렸군. 선견지명이 있었더라면 이 커다란 과오를 막을 수 있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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