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컨의 청혼-10화 (9/11)

10

리스는 장부에 적힌 숫자를 다시 한 번 계산해 보았다. 하지만 합계는 변함이 없었다. 그는 잔뜩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창 밖을 내다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더 이상 주일 수 없을 때까지 경비를 절감했건만 장부의 숫자가 의미하는 건 명백했다. 그는 모든 걸 잃은 것이다. 1월에 불어온 거센 눈보라로 가축의 반을 잃은 탓이었다. 은행에도 벌써 석달째 대출금 상환을 미룬 상태였다. 이제 더 이상 상환 기한을 연장할 수도 없었다.

결국 남은 방법은 세 가지뿐이었다. 첫 번째 방법은 은행에서 저당권을 행사하게 내버려두는 것,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는 모든 재산을 잃을 것이다. 두 번째는 파산 선고를 하는 방법이었다. 그렇게 되면 목장은 지킬 수 있겠지만 신용 불량자가 되는 걸 감수해야 한다. 세 번째 방법은 로버트의 투자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세 번째 방법은 로버트의 제안이 여전히 유효한 경우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로버트는 이 목장에서 이익을 볼 수 있겠다는 판단하에 그런 제안을 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달랐다. 이제 목장은 완전히 파산 직전의 상태가 아닌가!

뭐니뭐니해도 가장 아쉬운 건, 부채를 완전히 다 갚기 직전이었다는 것이다.

7년 전 에이프릴과의 이혼 소송에서 야기된 사태는 결국 목장을 잃은 것으로 끝을 맺은 셈이었다. 궁극적으로 그녀가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이었다. 그녀는 대체 무슨 이유로 그랬던 것일까? 혹시 내가 그녀보다 목장을 더 사랑했기 때문에? 그렇다면 그녀는 결국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 셈이다. 목장은 그의 생명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런데 이제 그걸 완전히 잃게 된 것이다. 로버트가 투자자로 나서주지 않는 한 말이다.

그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는지 심사숙고해 봤지만, 결국 로버트가 투자자로 나서주는 것만이 목장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목장의 재정 상태에 대해 알게 되면 로버트가 과연 투자를 할지 의문이었다. 어쨌든 일단 시도는 해봐야 했다. 지금은 자신만 생각할 처지가 아니니까 말이다. 그는 매들린과의 결혼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그녀로선 남편이 파산하거나 재산을 몽땅 차압당하게 되리라고는 아마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3월이 되었다. 땅에는 아직 눈이 남아 있었지만, 그래도 대기엔 다가오는 봄을 알리듯 훈훈한 기운이 감돌았다. 아마 2주 정도만 지나면 나무에 싹도 돋고, 대지도 깨어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생각으로 자신이 처한 처지를 잊으려 해도 씁쓸한 기분은 어쩔 수가 없었다. 어쩌면 이번이 목장에서 보내는 마지막 봄이 될지도 몰랐다.

부엌 쪽에서 매들린이 케이크 반죽을 하면서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케이크 굽는 냄새만 맡아도 입 안에 침이 고일 정도로 그녀는 케이크 만들기 선수가 되어 있었다.

그녀와의 결혼은 그에게 많은 의미를 주었다. 사실 신문에 아내를 구한다는 광고를 낼 때까지만 해도 그는 상대에게 단지 함께 사는 파트너로서의 역할 이상의 것을 기대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마음이 따뜻하고 지적이며 유머 감각이 뛰어난,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를 사랑하는 섹시한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이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녀는 그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절대 감추려 들지 않았고, 또한 그가 줄 수 있는 것 이상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런 그녀에게 목장을 잃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괴로웠다. 하지만 그녀도 사실을 알 권리가 있다는 생각에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그가 부엌에 들어섰을 때 그녀는 주걱에 묻은 케이크 반죽을 핥아먹고 있던 중이었다. 그의 모습을 발견한 그녀가 살짝 윙크를 보내며 나무 주걱을 내밀었다.

[맛볼래요?]

반죽은 그녀의 손가락에도 묻어 있었다. 그는 말없이 그녀의 손을 잡고 그녀의 손가락부터 시작해서 주걱에 묻은 반죽까지 남김없이 핥아먹었다. 그리고는 아쉬운 듯 그녀의 손가락을 다시 한 번 샅샅이 핥았다.

[더 없소?]

그녀는 반죽 그릇을 집어들고 가장자리에 묻은 반죽을 손가락에 찍어서 핥아먹었다. 그리고는 다시 손가락에 반죽을 묻혀 그에게 내밀었다.

[자, 당신 차례에요.]

두 사람은 아이들처럼 그릇에 묻은 반죽을 싹싹 핥아먹었다. 아주 사소한 일에도 쉽게 즐거움을 발견하는 것 역시 매들린의 사랑스러운 특성 중 하나였다. 그녀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리스 역시 삶의 즐거움을 되찾도록 만들어 주었다. 덕분에 그는 상식 게임을 벌이거나 이렇게 반죽 그릇을 핥아먹는 것 같은 단순한 일에서도 삶의 재미를 느끼게 되었다. 그녀가 그의 인생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그런 게 있다는 사실조차도 잊어버리고 있었건만.

목장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남자는 모름지기 자기 아내를 책임지고 돌봐야 하는 법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시대에 뒤떨어진 사고 방식이라는 말을 들어도 할 수 없었다. 그녀를 제대로 부양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만으로도 그의 자존심은 쓰라린 상처를 입었다.

그는 고통스러운 얼굴로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할 얘기가 있소.]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의 안색을 살폈다.

[그렇게 시작되는 대화의 내용이 마음에 들었던 적은 한 번도 없는 것 같은데요?]

[이 얘기도 마음에 들지 않을 거요. 심각한 내용이거든.]

그의 표정을 자세히 살펴본 그녀는 금세 진지해졌다.

[무슨 얘기에요?]

[지난 한판에 가축의 절반을 잃고 나니 적자가 너무 심해서 대출금 상환을 할 수가 없게 됐소.]

그는 가능한 한 간단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은행에 연장 신청을 할 수 없을까요?]

[안 될 거야. 소가 다 살아 있다면 그 녀석들을 담보로 가능했겠지만, 지금으로선 그 엄청난 채무의 일부분도 감당할 수 없는 실정이거든.]

[로버트는 당신이 자기가 본 사람들 중에서 가장 냉철한 비즈니스 감각을 가졌다고 하던데요? 찾아보면 뭔가 방법이 있을 거예요. 혹시 생각해 둔 게 있나요?]

그는 예의 그 세 가지 선택 가능한 방법에 대해 얘기해 주었고, 그녀는 진지하게 그의 말을 경청했다.

그의 설명이 끝나자 그녀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물었다.

[로버트의 제안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뭐예요?]

[목장의 손실이 너무 큰 상태니까.]

[당신이 있잖아요. 오빠가 이 목장에 투자할 마음을 먹었던 건 바로 당신 때문이에요. 소가 많고 적고의 문제가 아니라.]

매들린은 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당신이 언급하지 않은 다른 선택의 여지도 있어요.]

[그게 뭐지?]

[전에도 말했지만, 내 돈이 있잖아요.]

그는 얼굴을 굳히며 그녀의 허리에서 손을 내렸다.

[그건 안 돼. 나도 이미 말했던 것 같은데.]

[왜 안 되죠?]

그녀는 조용히 물었다.

[그 이유는 전에 말해줬고, 여전히 변함이 없소.]

[그러니까 당신 말은 내 돈을 쓸 바엔 차라리 목장을 포기하겠다는 건가요?]

그의 눈이 냉혹하게 빛났다.

[그렇소, 정확히 그런 뜻이야.]

그녀를 대하는 그의 태도는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그부분만큼은 확고했다. 사업상의 파트너라면 계약서에 의해서 권리가 명확히 구분되지만, 결혼은 별개의 문제였다. 후자의 경우엔 감정적인 문제가 개입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 점은 이미 에이프릴의 경우에 지나치게 훌륭하게 증명된 바 있었다.

매들린은 표정이 드러나기 전에 얼른 몸을 돌렸다. 그의 말에 얼마나 상처를 입었는지 그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스스로도 놀랄 정도의 자제력을 발휘해 담담하게 말했다.

[당신 목장이니 당신이 알아서 결정할 일이겠죠.]

[정확히 그렇소. 은행에 넘기기 전까지는 내 목장이니 내가 알아서 처리할 거요.]

그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부엌에서 나가버렸다.

매들린은 저녁을 준비하느라 부지런히 손을 놀리면서도 마음은 여러 가지 생각으로 복잡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의 생각은 점점 확고해졌다. 목장을 구할 수 있는 돈이 있는데도 목장을 포기하게 내버려 두리라고 생각했다면 그건 리스가 잘못 판단한 것이다. 그녀는 대출금의 총액이 정확히 얼마인지 몰랐고, 할머니가 물려주신 신탁 예금이 별로 대단한 액수는 아니라고 말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 돈이면 목장 운영이 정상 궤도에 오를 때까지 시간을 벌어줄 정도는 될 것 같았다.

리스는 한 번도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그녀를 좋아하고 있는 것 같기는 했다. 남자들이란 상대를 좋아하지 않아도 육체적인 욕망을 느낄 수 있는 법이라지만, 그녀의 육체에 대한 그의 갈망은 그런 식으로 보기엔 너무나 격렬했으니까.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9개월이나 같이 살았으면서도 여전히 그녀가 전처와 비슷한 유형의 여자일 거라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그의 감정을 낙관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지만, 이제 그 행복의 풍선에서 점점 바람이 빠지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지금은 아기를 가졌다고 말할 시점이 아닌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말하는 게 오히려 나을지도 모른다. 임신 사실을 알게 되면 그도 이성적으로 상황을 판단할 수 있게 될지 모르니까 말이다. 자식에게 물려줄 유산인 목장을 그렇게 허무하게 포기할 순 없다고 설득하면 그도 고집을 꺾고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리스에게 임신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요즘의 그는 아예 입을 다물고 있거나 아니면 가시가 돋친 냉소적인 말을 내뱉을 뿐이어서 뭐라고 말을 붙일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이제 겨우 임신 2개월째인데도 벌써부터 기운이 없고 가끔씩 경미한 입덧도 했다. 남편이라는 사람과 전투를 벌이기엔 별로 좋은 컨디션이 아닌 것이다.

다음날 아침, 리스는 여전히 기분이 저조한 상태로 점심을 싸들고 집을 나섰다. 점심을 싸 갖고 갔다는 것은 저녁때까지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의미했다. 매들린은 한 5분 정도 망설이다가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몰래 일을 벌이고 싶진 않았지만 꼭 그래야 한다면 먼저 저지르고 나중에 수습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빌링스까지 가려면 꽤 장거리 운전을 해야 했다. 그가 돌아오기 전에 집에 도착할 수 있을지 조금 불안했지만, 그것 역시 상황이 닥치면 해결될 일이었다. 그녀는 이왕 빌링스까지 나간 김에 산부인과 의사와 진찰 약속도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크룩에는 의사가 없기 때문에 어차피 아기를 낳으려면 빌링스까지 가야 했다. 문득 진통이 시작되면 꽤나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를 낳기 위해 차로 세 시간이나 가야 하니 말이다.

그녀는 급히 옷을 차려입고 수표책과 필요한 서류들을 챙긴 뒤 차고로 갔다. 차에 시동을 걸면서 그녀는 속으로 빨리 다녀올 수 있게 되기만을 기원했다.

최대한 속도를 내서 차를 몬 덕분인지, 고속도로가 그리 혼잡하지 않았던 덕분인지 생각보다 빨리 은행에 도착했다. 전에 리스를 따라왔을 때 대출 담당자가 누군지 알아뒀기 때문에 15분정도 지난 뒤 그와 대면할 수 있었다.

대출 담당자인 반 로슨이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며 사무적인 미소를 지었다.

[던컨 부인, 안녕하십니까? 뭘 도와드릴까요?]

[안녕하세요, 반 로든 씨? 다름이 아니라 우리 목장의 융자 상환금이 얼마나 되는지 알고 싶어요.]

그는 콧수염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윗입술을 만지작거리며 잠시 망설였다.

[글쎄요. 그건 말씀드리기가 좀 어렵군요. 아시겠지만 융자는 부군 앞으로만 설정이 되어 있거든요.]

은행의 관행적인 절차를 두고 짜증나는 논쟁을 벌이긴 싫었기 때문에 그녀는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말했다.

[20만 달러 이하라면 지금 당장 상환하고 싶어요.]

돈처럼 확실하게 은행원의 주의를 끄는 것은 없는 법이다. 반 로든은 곁눈질로 재빨리 그녀의 재정 능력을 가늠해 보는 듯했다. 그녀는 차분하게 앉아서 상대가 자신의 외양을 보고 스스로 판단을 내리게 했다. 이럴 때를 대비해 뉴욕에서 입었던 정장을 꺼내 입고 머리도 우아하게 틀어올리지 않았는가! 눈치 빠른 은행원이라면 고급스런 회색 정장의 깃 부분에 매달린 공작새 모양의 보석 브로치가 얼마나 값비싼 것인지 금세 알아차릴 것이다.

그는 아주 조금 뜸을 들인 다음 결정을 내렸다.

[대출 현황을 먼저 봐야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녀는 결과를 확신한 채 기다렸다. 누가 대출금을 갚든 간에 빚을 청산하겠다는 데 거절하는 은행은 없을 테니까.

반 로든은 5분도 채 안 지나 손에 서류를 들고 나타났다.

[던컨 부인, 이제 본격적인 상담을 진행시켜 볼까요? 던컨 씨의 계좌를 보니 대출금을 상환할 만한 돈이 없더군요. 실례지만 어떻게 지불하실 예정인가요?]

[제 명의로 신탁 예금이 조금 있거든요. 벌써 뉴욕에서 이곳 빌링스의 다른 은행으로 옮겨놓았어요. 우선 갚아야 할 대출금이 20만 달러 이하인지 알고 싶군요.]

그는 두어 번 헛기침을 한 뒤 정확한 대출 상환금 총액을 알려 주었다. 다행히도 신탁 예금 한도 내에서 해결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시원스럽게 말했다.

[그렇다면 곧 돌아오겠어요. 지금 바로 신탁이 예치되어 있는 은행에서 이쪽 은행의 제 개인 계좌로 돈을 이체 시키도록 하죠. 25세 이후엔 언제든 인출할 수 있는 신탁이니까 아무 문제도 없을 거예요.]

반 로든이 전화기를 그녀 앞으로 돌려주면서 친절하게 말했다.

[우선 그쪽 은행에 전화를 해서 상황을 설명하시죠. 곧 점심 시간이니까요.]

그녀는 미소와 함께 수화기를 넘겨받으며 불쑥 물었다.

[혹시 제게 소개해 주실 산부인가 전문의를 알고 계신가요?]

미리 전화를 해둔 덕분에 그녀는 신탁을 예치해 둔 은행에서 신속히 일을 처리할 수 있었다.

한 시간 후 그녀는 목장 권리증과 대출금을 상환했다는 증명 서류를 가지고 은행 문을 나섰다. 차에 오르면서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역시 사람을 안다는 것은 쓸모가 있었다. 불쌍한 반 로든씨는 산부인과 의사를 추천해 달라는 그녀의 난데없는 부탁에 처음엔 깜짝 놀라는 듯했지만 이내 축하 인사를 건네며 자기 아내가 다닌다는 산부인과 의사를 소개해 주었다. 덕분에 산부인과 예약도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대출금을 다 갚았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환상은 갖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결코 가벼운 마음으로 이 일을 처리한 게 아니었다. 리스는 분명 엄청나게 화를 낼 것이다. 하지만 태어날 아기와 두 사람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언제든 그와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리스의 첫 번째 아내가 남기고 간 상처와 싸우는 문제는, 집에 페인트칠을 새로 하는 문제로 다툼이 벌어졌을 때와 비교도 안 되게 심각했다. 실제로 리스는 페인트 값과 그녀의 노임을 나중에 계산해 주겠다는 각서까지 작성했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이런 문제에 대해 리스가 얼마나 철저한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였다.

그에게 오늘 자신이 벌인 일을 털어놓아야 한다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정말이지 난감했다.

'아무래도 임신을 한 것 같아요. 그래서 오늘 빌딩스에 나가 산부인과에 예약을 했어요. 은행에 들러서 대출금도 상환하고 왔구요.' 다짜고짜 이렇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물론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면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다 해결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4시 반쯤 집에 도착했을 때도 그녀는 여전히 그 문제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다. 트럭이 눈에 띄지 않는 걸로 봐서 리스는 아직 안 돌아온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그녀가 외출했었다는 것을 그는 아예 모를 수도 있었다. 만일 점심 시간에 그가 어떤 이유로든 집에 들렀었다면 저녁때 돌아오자마자 어딜 나갔었는지 물어볼 테고, 그렇다면 그녀는 거짓말을 하진 않을 작정이었다. 아무리 그 후의 일이 두려워도 리스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뱃속의 아기가 그런 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것이다.

그녀의 계산이 맞는다면 10월 중순이나 11월 초에 아기가 태어날 것이다. 그녀는 뱃속에 있는 아기만 생각하면 마음이 따스해졌다. 리스와 이 소식을 함께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쁠까? 그녀는 씁쓸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목장 문제만 아니었다면 벌써 임신 사실을 털어놓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고민이 많은 리스에게 아이 문제로 걱정을 안기고 싶지 않았다. 그는 요즘 들어 계속 우울해 보였고, 얼굴에도 주름이 부쩍 늘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사력을 다해 지키려 했던 것을 모조리 잃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그로서는 어쩌면 당연했다. 그녀는 그런 남편에게 이번엔 아이 문제로 새로운 부담을 주기가 괴로웠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말을 안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옷을 갈아입고 나니 갑자기 견디기 힘들 정도로 피고감이 몰려왔다. 저녁을 준비해야 할 시간이라 어떻게든 참아보려 했지만, 부엌에 들어가 음식 냄새를 맡을 생각을 하니 갑자기 현기증이 나고 속에서 욕지기가 치밀었다. 그녀는 진땀을 흘리며 침대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잠시 앉아 있었더니 울렁거리는 속은 진정이 됐지만 피로감은 더 심해졌다. 식사 준비는커녕 아래층에 내려갈 힘도 없었고 눈꺼풀은 자꾸 감겨왔다. 잠깐만 눈을 붙이면 괜찮아질 것 같은데..........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스르르 침대에 쓰러졌다.

평소보다 조금 늦게 집에 돌아온 리스는 부엌 창문에 불이 밝혀져 있지 않은 것을 보고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습관대로 집에 들어가기 전에 헛간의 허드렛일을 먼저 돌봤다. 잠시 후 언제나처럼 뒷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던 리스는 뭔가 이사안 느낌에 흠칫 걸음을 멈췄다. 다른 때와는 달리 집 안이 너무나 조용했던 것이다. 그는 황급히 부엌을 먼저 살펴보았다. 그곳은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흔적조차 없이 텅 비어 있었다. 리스는 당황한 얼굴로 아내를 소리쳐 불렀다.

[매디?]

몇 번이나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그의 이마에 걱정으로 주름이 잡혔다. 그는 아래층을 샅샅이 둘러보고 나서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올라갔다.

[매디?]

침실로 들어가 떨리는 손으로 전등을 켠 리스는 안도감에 거의 주저앉을 뻔했다. 침대에 몸을 웅크린 채 누워 있는 매들린을 발견한 것이다. 갑자기 방이 환해졌는데도 그녀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순간적으로 겁이 덜컥 났다. 혹시 몸이 아픈 건가? 아침까지만 해도 괜찮아 보였는데.

온몸이 먼지투성이였지만 그는 신경도 쓰지 않고 침대에 걸터앉아 그녀를 돌려 눕혔다. 열이 약간 있는 것 같았지만 그리 심한 건 아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흔들어 깨웠다.

[매디, 일어나 봐.]

그녀는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리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리스.]

그녀는 꺼질 듯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중얼거리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리스는 다시 그녀를 흔들어 깨웠다.

[당신, 괜찮은 거요? 좀 일어나 보라니까.]

그녀는 손으로 눈을 비비면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지금 몇 시예요?]

다음 순간 그녀는 상황을 깨달은 듯 소리쳤다.

[이런, 저녁 식사!]

[저녁은 나중에 먹어도 돼. 그보다 당신 정말 괜찮은 거요?]

그의 얼굴을 올려다본 매들린은 가슴이 찡해졌다. 뿌연 흙먼지에 덮이고 주름이 잡혀 있었지만, 그의 눈에 담긴 표정은 짜증이 아니라 걱정이었다. 그녀는 손을 들어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이 남자의 모든 것을 사랑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의 고집스러운 성미까지도. 그녀는 그의 손을 잡아 복부로 가져갔다.

[임신이 됐어요.]

그녀는 조그맣게 속삭였다.

[우리에게 아기가 생길 거예요.]

그는 커라대진 눈으로 날씬한 그녀의 복부에 올려진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피임약 복용을 중지한 뒤로 그녀를 사랑할 때마다 임신 가능성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실제로 아기를 가졌다는 소리를 듣자 참을 수 없이 가슴이 벅차올랐다. 두 사람의 아기가 그녀의 뱃속에서 안전하게 보호를 받으며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것이다.

그는 침대에서 내려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언제요?]

그가 긴장된 목소리로 물었다.

[출산 예정일 말인가요? 10월 마지막 주, 아니면 11월 첫째 주요.]

리스는 그녀의 스웨터를 위로 들어올리고 천천히 고개를 숙여 불빛 아래 드러난 평평한 복부에 가만히 입을 맞췄다. 매들린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의 머리를 쓸어주면서 태어날 아기가 리스처럼 검은 머리일지, 아니면 자신을 닮아 금발일지 궁금해했다. 두 사람이 함께 나눈 열정의 순간에 한 생명이 창조되었다고 생각하니 아기의 존재가 너무나 경이롭게 느껴졌다. 리스의 강한 손이 아기를 부드럽게 안아드는 모습을 볼 수 있을 때까지 아직도 7개월이나 기다려야 한다니, 갑자기 그 세월이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아들이 좋아요, 아니면 딸?]

그녀는 이 소중하고 달콤한 순간이 망가질까 두려운 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은 어떻소?]

꺼칠한 뺨을 그녀의 복부에 비벼대는 리스는 그 감촉이 너무나 황홀해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저는 어느 쪽이라도 상관없어요.]

[나도 그래.]

한동안 침묵 속에서 이제 곧 아빠가 된다는 가슴 벅찬 사실을 음미하던 리스는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혹시 어디가 아픈 거요?]

[약간 속이 메스껍고 피곤할 뿐이에요. 아까도 저녁 준비를 해야 할 시간이라 자지 않으려 했는데 눈꺼풀이 말을 안 듣더라구요.]

그녀는 미안한 듯 말했다.

[지금은 괜찮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시스템이 정상 작동이에요.]

그는 뒤로 물러나 그녀를 일어서게 한 다음 품으로 끌어당기며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가벼운 키스와는 대조적으로 그의 눈빛은 그녀를 통째로 집어삼킬 듯 강렬했다.

[확실한 거요?]

[확실해요.]

그녀는 생긋 미소를 지으며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내가 아프면 당신도 알 거예요. 온통 새파랗게 질려서 캑캑 토할지도 몰라요.]

다시 키스를 하면서 그는 그녀의 엉덩이를 움켜잡아 자신의 몸에 바짝 밀착시켰다. 이번 키스는 아주 길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그의 몸이 기분 좋게 압력을 가해오자 그녀도 눈을 감고 그를 꼭 끌어안았다. 너무나 그를 사랑하는 나머지 가끔은 두렵기까지 했다. 그녀가 이토록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가 나중에도 꼭 기억하길 바랐다.

그날 밤 그는 가슴이 저밀 정도로 천천히 부드럽게 그녀를 사랑해 주었다. 아무리 해도 충분치 않다는 듯 몇 번이나 그녀를 가졌고, 모든 게 끝난 후에도 오랫동안 그녀의 몸 속에 머물러 있었다. 새벽녘에야 겨우 두 사람은 잠을 청했다. 매들린은 그의 품으로 깊숙이 파고들며 만족스런 한숨을 내쉬었다. 뱃속에 그의 아기를 품은 채로 그의 품안에 안겨 있는 지금 이 순간보다 더 완벽한 순간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1주일 후, 매들린은 부엌 창문을 통해 잔뜩 찌푸린 얼굴로 헛간을 나와 집 쪽으로 터벅터벅 걸어오는 리스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모든 것을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 더 이상 그가 목장 일로 고민하게 놔둘 수가 없었다. 하루하루 주름이 깊어지는 그의 얼굴을 지켜보는 것보단 차라리 그를 화나게 만드는 편이 나았다. 매일 밤 그는 몇 시간이고 서재에 틀어박혀 장부를 보고 또 보면서 점점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들고 있었따.

다용도실 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잠시 후 그가 흙투성이 부츠를 벗고 양말만 신은 채 부엌으로 들어섰다.

[트럭 배터리가 나갔소.]

그가 지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매들린은 초조한 나머지 손에 들고 있던 행주를 꼭 쥐고 비틀었다. 몸이 긴장으로 굳어지고 속이 울렁거렸다.

[그럼 새로 사야겠군요.]

그녀의 대꾸에 리스는 입술 한쪽 끝을 씁쓸하게 비틀어 올리며 냉소적으로 말했다.

[뭐하러? 다음달이면 여기 있지도 않을 텐데.]

그녀는 손에 틀어쥐고 있던 행주를 천천히 내려놓고 싱크대에 등을 기대며 그를 마주보고 섰다.

[아니, 우리는 여기 있을 거예요.]

리스는 그녀의 말뜻을 이해했다고 생각했다. 로버트의 투자 제안을 받아들이라는 말로 해석한 것이다. 사실 지금이라도 로버트에게 전화를 해볼 수는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목장에 투자할 만큼 로버트가 멍청해 보이지는 않지만 말이다.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뤄봤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매들린은 임신 중이었다. 벌써부터 돈 들어갈 데가 하나둘이 아니었다. 당장 내일만 해도 의사에게 진찰을 받으러 가야 했다. 아마 출산 비용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게다가 점입가경으로 그는 의료 보험도 들지 않은 상태였다.

[처남에게 전화하리다.]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

[하지만 너무 기대하진 말아요.]

그녀는 어깨를 뒤로 젖히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내 얘기부터 들은 뒤에 오빠에게 전화하세요. 아마 그때는 상황이 달라져 있을 테니까........]

그녀는 말을 멈추고 곤혹스런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결심한 듯 폭탄 선언을 했다.

[내 신탁 예금으로 대출금을 상환했어요.

한동안 그는 아무 반응 없이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하지만 곧 그의 눈빛이 차갑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최악의 경우에 대비해 그녀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뭐라고?]

그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대출금을 갚았다구요. 서류는 내 속옷 서랍에 있어요.]

한 마디 말도 없이 그는 몸을 홱 돌려 2층으로 올라갔다. 매들린도 얼른 뒤를 쫓아갔다. 심장이 마구 두근거렸다. 예전에 그가 화를 냈을 땐 조금도 겁나지 않았지만, 이번은 경우가 달랐다. 그의 자존심을 정통으로 건드린 것이다.

그녀가 침실에 들어섰을 때 리스는 벌써 그녀의 속옷 서랍을 거칠게 잡아빼고 있었다. 굳이 바닥에 숨겨놓을 필요성을 못 느꼈는지 은행에서 받아온 서류들은 가지런히 정리돈 속옷 바로 위에 떡 하니 놓여 있었다. 그는 서류 뭉치를 집어들고 앞뒤로 뒤적이며 거기에 적힌 금액과 날짜를 확인했다.

그는 서류에서 고개도 들지 않고 조용히 물었다.

[언제 이런 거지?]

[지난주에 빌링스에 갔었어요. 당신에게 임신 소식을 알린 바로 그날 말이에요. 은행은 빌려준 돈을 갚기만 하면 누가 갚는지는 상관 안 하잖아요. 거기다 내가 당신 아내라는 걸 은행 사람도 다 아니까 아무 문제도 없었어요.]

[일부터 저지르고 나면 내 마음이 바뀔 거라고 생각한 거요?]

저렇게 차분하고 가라앉은 목소리가 더 무서웠다. 화가 나서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는 리스는 많이 봐왔지만,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다음 순간 그가 고개를 번쩍 쳐들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청요석 같은 눈동자가 얼음장처럼 빛났다.

[어서 대답해 봐.]

그녀는 속으로 침착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타이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뇨, 무슨 말로 설득하든 당신 마음을 바꿀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당신 몰래 일을 저지른 거구요.]

[당신 생각이 옳아. 무슨 말로도 내 마음을 못 바꿀 테니까. 내 목장 한 귀퉁이라도 손에 넣기 전에 먼저 지옥을 구경하게 될걸.]

[당신한테서 목장을 뺏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한 번도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구요.]

[매디, 당신은 그동안 정말 자기 역할에 충실했었어. 그건 인정해 주지. 불평 한 마디 없이 완벽한 아내처럼 굴었으니까. 심지어 나를 사랑하는 척하기까지 했고.]

[당신을 정말 사랑해요.]

그녀는 안타까운 얼굴로 그에게 한 발 다가가며 손을 내밀었다.

[내 말을 좀 들어봐요.]

갑자기 그의 분노가 폭발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서류 뭉치를 그녀에게 집어던졌다. 서류들이 한 장 한 장 흩어져 그녀 주위로 원을 그리며 떨어졌다.

[제기랄, 날 사랑한다고?]

그는 악문 잇새로 말을 내뱉었다.

[내가 가장 참을 수 없어하는 짓을 하면서 그게 당신의 사랑을 표현하는 거라고 생각했다면, 당신은 사랑이 뭔지 전혀 모르는 여자야.]

[당신이 목장을 잃는 모습을 가만히 두고볼 수 없었어요.]

[그래서 대출금 문제를 해결했다 그건가? 어떤 이혼 법정이든지 이제는 당신이 목장의 공동 소유주라고 생각하겠지. 모두 내가 당신을 꼬드겨 유산을 투자하게 했다고 생각할 거야. 이제 혼전 계약서는 아무런 효력도 없을 테고, 에이프릴보다 당신이 적게 가져야 할 이유가 전혀 없어졌지. 전처럼 잘 나가는 목장은 아니지만, 여전히 땅값은 꽤 나갈 거요.]

[나는 이혼하고 싶지 않아요. 아니, 이혼 따윈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그녀는 애원하듯 말했다.

[당신을 위해서 목장을 지키고 싶었어요. 대출금을 갚고 나면 목장을 재건할 기회가 있잖아요.]

그는 냉소적으로 비꼬았다.

[그래, 가치를 높여서 나중에 더 많이 갖겠다는 건가?]

[마지막으로 말하는데, 난 이혼하고 싶지 않아요!]

그는 조롱하듯 손으로 그녀의 턱을 치켜들었다.

[그렇다니 좀 미안한데, 어쨌든 당신은 이혼을 하게 될 거야. 등뒤에서 칼로 찌르는 아내는 필요없으니까 말야. 난 처음부터 당신 같은 여자는 내 아내감이 아니라고 생각했어. 내 판단을 믿었어야 했는데......... 빌어먹을, 당신을 처음 본 순간 난 트럭 뒷좌석에서 첫 경험을 치렀던 열 여섯 살 때처럼 뜨겁게 반응했지. 에이프릴이 암캐라면, 당신은 더 나쁜 여자야. 이 모든 고새을 마치 흔쾌히 받아들이는 것처럼 날 속이고 비겁하게 등뒤에서 비수를 꽂다니.......]

[나는 당신과 함께 하는 이 생활을 원해요.]

그녀의 얼굴은 창백해지고 눈빛은 어두워졌다.

[그래? 하지만 나는 당신을 원하지 않아. 침대 안에서는 뜨겁지만, 당신은 진정한 목장주의 아내라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쥐뿔도 모르는 여자야.]

그는 잔인하게 말했다.

[리스 던컨, 날 당신에게서 도망치게 만들고 싶은 거라면, 지금 아주 잘하고 있어요.]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경고했다. 하지만 리스는 코웃음을 치며 얼음장같이 차가운 어조로 비아냥거렸다.

[어디로 가시려고? 내가 직접 모셔다 드리지.]

[그 태산 같은 자존심을 버리고 제정신이 들면 당신 생각이 얼마나 잘못됐는지 알 거예요!]

그녀는 마지막으로 그의 이성에 호소했다.

[나는 목장을 뺏고 싶지 않아요. 여기서 살면서 아이들을 키우고 싶어요. 당신과 나만의 문제가 아니잖아요? 나는 당신의 아이를 갖고 있고, 이 목장은 그 아이가 물려받을 유산이기도 해요.]

뱃속에 들어 있는 아이를 상기한 순간 그의 눈동자가 짙은 색으로 변했다. 그는 아직은 날씬한 그녀의 몸매를 훑어보며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다시 생각해 보니 당신을 보낼 수 없겠어.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 당신은 여기서 머물러야 해. 그 다음엔 당신이 무슨 일을 하든 상관하지 않겠지만, 아기는 나와 함께 살아야 돼.]

얼음처럼 싸늘한 냉기가 그녀 안에 자리잡으며 그의 독설로 인해 생겨난 마음의 상처와 분노를 옆으로 밀쳐버렸다. 이해하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참을 만큼 참았고, 동정도 할 만큼 했다. 그녀를 사랑하지 않고, 그녀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도 믿지 않는 상대와 어떤 결혼 생활을 할 수 있겠는가? 오직 더 이상 아무 의미 없는 섹스로 지탱하는 생활이 될 것이다.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점점 텅 빈 것처럼 공허해졌다. 나중에는 고통을 느끼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녀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중에 진정이 되면 지금 한 말들을 후회할 거예요.]

[내가 후회하는 건 당신과 결혼한 거요.]

그는 서랍장 위에 올려진 그녀의 지갑을 집어들며 야멸차게 내뱉었다.

[뭘 찾고 있는 거예요?]

그녀는 지갑을 뺏으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 그와 힘을 겨룬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얘기니까 말이다.

그는 지갑에서 자동차 열쇠를 빼냈다.

[이것.]

그는 지갑을 다시 내려놓고 바지 주머니에 차 열쇠를 집어넣었다.

[이미 말한 것처럼 당신은 내 아리를 가진 채로 아무데도 갈 수 없어. 당신이 할 일은 내 침대에서 비키는 거야. 남아 있는 침실중 아무 거나 골라잡으라구.]

그녀게에 손가락 하나 닿는 것조차 견딜 수 없다는 듯 옆으로 몸을 피하면서 그는 침실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매들린은 침대에 무너지듯 앉았다. 힘이 풀린 다리가 마치 스파게티 가락처럼 느껴졌다. 거의 숨을 쉴 수가 없어 눈앞이 빙빙 돌고 오한까지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일단 이성이 돌아오자 빠른 속도로 생각들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조용하게 활활 타오르는 분노의 불길이 그녀 안에 깊이 자리잡기 시작하면서 마음의 진공 상태를 태워버렸다.

그녀는 처음 목장을 방문했을 때 사용했던 침실로 잠자코 짐을 옮기기 시작했다. 나중에 제정신이 들면 폭언을 사과하고 자기 곁에 그냥 머물러 달라고 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차마 버릴 수가 없어서 의도적으로 몇 가지 소지품은 그냥 남겨두었다. 그녀가 쓰던 물군을 보고 그동안의 좋은 추억을 되살릴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목장 권리증도 바닥에 그대로 내버려둔 채 나왔다. 버리든지, 간수하든지 그건 그의 자유였다.

그녀는 리스가 전쟁을 원한다면 기꺼이 응수해 주겠다고 결심했다.

상처 입은 자존심을 생각하면 방에서 나가기도 싫고 식사를 하면서 그와 말을 섞기도 싫었지만, 아기를 가진 몸이니 뭔가 먹기는 해야 했다. 그녀는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그의 상처에 소금을 문질러 줄 양으로 정식 만찬을 준비했다. 그녀가 준비한 음식을 먹지 않겠다면 직접 만들든지 아니면 굶든지 그가 결정할 일이었다.

하지만 저녁을 먹으라고 불렀을 때 그는 먹성도 좋게 차려진 음식을 깨끗이 먹어치웠다. 그녀는 빈 접시를 개수대로 가져가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내일 아침 의사와 약속이 있다는 걸 잊지 말아요.]

리스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내가 운전하겠소. 차 열쇠는 안 돌려줄 거야.]

[좋아요.]

그것으로 두 사람의 대화는 끝이었다. 그녀는 설거지를 산더미처럼 쌓아둔 채 2층으로 올라가서 샤워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 빌링스까지 가는 내내 두 사람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병원에 들어서서도 마찬가지였다. 배부른 여자들로 가득한 대기실에서 이름이 불리자 그녀는 천천히 일어서서 간호사에게 다가갔다. 리스는 우아한 걸음걸이로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몇 달만 지나면 그녀도 몸이 불어서 저 멋진 걸음걸이 대신 뒤뚱거리는 오리걸음으로 나다닐 것이다. 갑자기 크게 소리치고 싶었다. 어떻게 이런 식으로 날 배신할 수 있단 말인가!

매들린은 먼저 체중을 달고 혈압을 잰 다음 산부인과 의사에게 검진을 받고서 진료실에 앉아 결과를 기다렸다. 잠시 후 의사가 문을 열고 들어섰고, 리스도 그 뒤를 따라 들어왔다.

[음, 모든 게 정상으로 보이는군요.]

의사가 차트를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그런데 말씀하신 것처럼 9주 내지 10주가 됐다고 보기엔 자궁이 많이 팽창된 상태에요. 다음에 오실 때 초음파 검사를 한 번 해 보도록 하죠. 쌍둥이일 가능성도 있으니까요. 부인의 외할머니가 쌍둥이였다고 차트에 씌어 있군요. 보통 여성 유전 인자 속에 쌍둥이 인자가 들어 있거든요.]

몸을 펴고 앉는 리스의 눈매가 날까로워졌다.

[쌍둥이를 출산하는 데 위험은 없습니까?]

[별다른 위험은 없어요. 단지 조산할 확률이 높으니 조심해야 하죠. 사실 산모의 입장에서 보면 쌍둥이를 낳는 것보단 우량아를 낳는 게 더 힘들어요. 쌍둥이의 경우엔 체중 미달이 많기 때문에 쌍둥이라는 사실 자체는 별로 걱정할 게 없거든요. 실례지만 던컨 씨는 태어날 때 체중이 얼마였죠?]

[4.6킬로그램이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는 심각한 얼굴로 대답했다.

[태아는 3.6킬로그램만 넘어도 부인은 상당히 조심하셔야 합니다. 자궁 입구가 보통 사람보다 좁은 편이라서 난산이 될 가능성도 없지 않아요. 4.5킬로그램은 넘는 태아라면 아마도 제왕절개 수술을 받아야 할 거예요.]

의사는 이어서 임산부가 지켜야 할 몇 가지 주의 사항 - 영양소를 골고루 섭취해야 하고, 틈틈이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을 알려주고, 비타민을 처방해 주었다. 태교에 관한 책자도 몇 권 챙겨 주는 걸 잊지 않았다.

30분 뒤 병원 문을 나설 때 그녀는 비타민 처방전과 얇은 책자 몇 권을 들고 있었다. 약국에 들러 처방전에 적힌 비타민을 산 다음 두 사람은 집으로 향했다. 매들린은 그의 옆에서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정면만 바라보며 똑바로 앉아 있었다. 집에 도착했을 때에야 리스는 하루 종일 그녀가 한 번도 자신을 쳐다보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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