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컨의 청혼-9화 (8/11)

9

1월 하순경 또다시 한랭 전선을 동반한 폭설이 내린다는 일기예보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지난번보다 상황이 훨씬 심각했다. 그는 본격적인 한파가 밀어닥치기 전 이틀 정도의 경고 기간 동안 최선을 다해 소들을 안전한 지역으로 대피시켰다.

일기 예보대로 하룻밤 사이에 기온이 급강하하더니 수은주가 영하 10도에 가깝도록 내려갔다. 하지만 다행히도 지난번처럼 바람이 심하게 불지는 않았다.

살을 에는 듯한 차가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리스는 소들이 물을 먹을 수 있도록 냇가의 얼음을 깨서 구멍을 뚫어놓기 위해 두어 차례나 바깥에 나갔다 왔다. 매들린은 그가 돌아올 때까지 내내 공포에 질려 있었다. 라디오에선 살읹거인 한파가 이어진다는 일기 예보가 연신 들려왔다.

그날 밤이 되자 수은주는 영하 23도까지 뚝 떨어졌다. 다음날 아침에는 영하 30도에 육박할 정도로 기온이 떨어진 건 물론이고 바람까지 불기 시작했다.

리스는 우리에 갇힌 동물처럼 하루 종일 집 안을 서성거렸다. 그들은 옷을 몇 겹씩 껴입고 난방 온도를 한껏 올린 것으로도 모자라 벽난로에 불까지 피우고 있었다. 그리고 체온을 유지할 복적으로 계속해서 뜨거운 커피나 코코아를 마셔댔다.

사흘째 되던 날, 그는 하루 종일 절망적인 기분을 어쩌지 못했다. 소들이 바깥에서 죽어가고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아무런 조치를 취할 수 없는 자신이 너무나도 원망스러웠다. 강한 바람까지 동반한 한파로 기온은 이제 영하 40도에 이른 상태였다. 이런 날씨엔 무리해서 나가봤자 소들을 피신시켜 둔 곳에 도착하기도 전에 얼어죽을 게 뻔했다.

그날 밤 벽난로 앞에 나란히 자리를 깔고 누운 채 매들린은 딱딱하게 굳은 그의 몸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하지만 그는 미동도 하지 않고 지친 표정으로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팔꿈치를 괴고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린 극복할 수 있을 거예요.]

그녀의 조용한 위로에 리스는 날카로운 음성으로 쏘아붙였다.

[소들이 떼죽음을 당했는데 대체 무슨 수로 극복한단 말이오!]

[그래서 그냥 포기하겠다는 건가요?]

리스는 사납게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는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아니, '포기'라는 단어조차 낯설었다.

[우리 더 열심히 일해요.]

그녀가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힘껏 도울게요.]

리스는 그녀의 손을 들어 불빛에 비춰보았다. 가냘프고 여자다운 우아한 손이었다. 리스는 아내가 자신을 돕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런 그녀에게 당신이 옆에 있으면 당신의 안전이 걱정돼서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말을 어떻게 하겠는가!

그녀는 그와 결혼한 이후로 지금껏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거뜬히 해냈다. 그에게 맞설 때도 절대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그는 잠시 그녀와 말다툼을 벌였던 기억을 떠올렸다. 몇몇 기억은 그를 미소짓게 만들었고, 또 다른 몇몇 기억은 그를 흥분시켰다. 분명한 건 그녀와 함께 지내면서 단 한순간도 지루함을 느껴보지 못했다는 거였다.

[당신 말이 맞소.]

그는 매들린의 손을 자신의 얼굴로 가져갔다.

[우리 더 열심히 일합시다.]

나흘째 되던 날, 그들은 겨우 일을 나갈 수 있었다. 바람은 잠잠해진 지 오래였고, 하늘은 살을 에는 듯한 추위와는 전혀 어울리지 안게 티 없이 맑고 푸르렀다.

얼굴까지 칭칭 동여매고 나갔는데도 냉기가 뼛속까지 스며들 정도로 추워서 헛간까지 가는 것도 힘겨울 정도였다. 며칠 동안 우유를 짜지 못한 탓에 젖이 불어 신경이 곤두선 젖소들이 리스가 다가갈 때마다 발길질을 해대는 통에 거의 한 시간 넘게 걸려서야 간신히 우유를 짤 수 있었다. 매들린은 그가 우유를 짜는 동안 말들에게 사료와 물, 그리고 새 건초를 듬뿍 갖다주었다.

녀석들 역시 예민해져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리스가 즐겨 타는 말의 콧등을 쓸어주는 그녀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헛간에 들여놓은 놈들은 예민해져 있긴 해도 무사했지만, 바깥에 방목해 놓은 소들에 대해선 생각만 해도 겁이 더럭 났다.

리스는 트럭 뒤칸과 트레일러에 건초를 가득 싣고 운전석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매들린이 조수석에 올라타자 그는 못마땅한 듯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리 눈치를 줘도 차에서 내릴 생각이 없다는 듯 그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이렇게 추운 날씨에 그를 혼자 내보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던 것이다. 만에 하나 이런 날씨에 트럭이 고장난다든가 빙판에 미끄러져 어디가 부러지는 사고라도 당하면 꼼짝없이 얼어죽게 될 테니 말이다. 아무래도 혼자보단 둘이 나은 법이다.

리스는 한파가 닥치기 전에 소들을 피신시켜 놓았던 곳으로 조심스럽게 차를 몰았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눈부시게 하얀 눈밭이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한동안 망연자실하게 주위를 둘러보던 리스는 참담한 심정을 감춘 채 묵묵히 선글라스를 썼다. 햇살이 눈밭에 반사되어 빛나는 바람에 앞이 잘 안 보일 지경이었던 것이다. 매들린도 아무 말 없이 선글라스를 썼다.

그는 다시 가축들의 흔적을 찾아 트럭을 몰았다. 하지만 살아 있는 소들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만약 살아남은 녀석이 있다면 그야말로 기적 같은 일이리라. 백색의 설원은 얼어죽은 소들의 시체조차 마치 담요처럼 감쪽같이 덮어버렸다.

두 사람은 희미하게 들리는 기진맥진한 소 울음소리를 따라간 끝에 나무숲 한가운데 옹기종기 모여 있는 열댓 마리의 소를 찾을 수 있었다. 먹을 것을 찾아나섰는지, 아니면 피난처를 찾아나섰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나무숲 쪽으로 이동한 덕분에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녀석들이었다. 나무 둘레에 쌓인 눈이 거대한 둑처럼 바람을 막아주었던 듯했다.

트레일러에서 건초를 내리는 리스의 표정은 여전히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매들린은 ㄱ의 심정을 십분 이해했다. 그는 희망을 가진다는 것에 겁을 내고 있었다. 살아남은 소는 저 녀석들이 전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운 것이다. 그는 건초를 여기저기 흩뿌려 놓은 다음 삽으로 눈을 파헤쳐 소들을 해방시켰다. 잔뜩 굶주렸던 소들은 저마다 앞다퉈 건초를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소들의 숫자를 헤아리던 리스의 얼굴이 점점 더 굳어졌다. 매들린은 그의 표정에서 살아남은 소가 원래 피신시켜 두었던 무리의 극히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는 트럭으로 돌아와 장갑을 낀 손으로 운전대를 부여잡고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우리 다른 데를 더 찾아봐요. 저 녀석들처럼 어디 다른 곳으로 몸을 피한 소들이 더 있을 수도 있잖아요?]

얼어붙은 샘 근처에서 그들은 수십 마리의 소를 발견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미 모두 얼어죽은 후였다. 리스는 죽은 소들의 숫자를 헤아렸다. 모두 서른 여섯 마리였다. 송아지들은 너무 작아서 눈에 덮여 있는 것들은 잘 보이지도 않았다.

그들은 울타리 사이에 끼인 채 버둥거리는 암소 한 마리도 발견할 수 있었다. 송아지 한 마리가 어미 소 옆에 누워서 순한 갈색 눈으로 어미 소가 울타리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리스는 얼른 암소를 풀어줬지만, 녀석은 간신히 두 발로 서 있을 뿐 꼼짝도 하지 못했다. 송아지도 어미소를 따라 일어나더니 비틀거리는 다리로 다가가서 젖을 찾았다. 리스는 녀석들에게 여물을 주고 다시 다른 소들을 찾아 출발했다.

그들은 협곡 근처에서 살아 있는 소 일곱 마리를 발견했다. 잔뜩 희망에 부풀었던 두 사라은 그곳에서 5백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열 마리의 소가 죽어 있는 걸 발견하고 절망감에 어깨를 늘어뜨렸다.

두 사람은 하루 종일 살아남은 소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살아 있는 소들을 찾아낸 경우보다 꽁꽁 얼어죽은 소들을 발견한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았다. 리스는 살아남은 소들에게 건초를 던져 주고 얼음이 두껍게 언 냇물에 도끼로 구멍을 뚫어 식수를 확보해 주는 한편, 장부에 죽은 소의 숫자와 살아남은 소의 숫자를 기록했다. 대충 계산을 해보니 소떼의 절반 정도가 이번 한파에 얼어죽은 셈이었다. 아니, 어쩌면 죽은 놈들의 수가 더 많을 지도 몰랐다. 절망적인 상황이 그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겨우 목표에 가까이 다가갔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일이 생기다니!

다음날 두 사람은 다시 길 잃은 소들을 찾아나섰다. 외진 곳도 샅샅이 훑어보기 위해 리스는 말을 타고 갔고, 매들린은 남편 대신 건초를 가득 실은 트럭을 몰았다. 기온은 어제보다 많이 올라갔지만 여전히 영하 10도를 밑돌고 있었다. 한 마디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찾아낸 소들을 안전한 곳으로 몰고 가던 도중에 수송아지 한 마리가 무리에 합류하지 않으려고 왼쪽으로 튀어나가자 리스는 즉시 그쪽으로 말을 몰았다. 소몰이에 능숙한 말은 별도의 지시 없이도 그 말썽꾸러기 송아지를 가로막고 서서 무리 쪽으로 유도했다. 하지만 수송아지는 마치 사춘기 소년처럼 고집을 부리며 머리를 마구 흔들더니 이번엔 얼어붙은 냇가 쪽으로 방향을 바꿔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것도 하필이면 리스가 방금 전 구멍을 뚫어놓은 곳으로 돌진하는 게 아닌가! 어리긴 했지만 그래도 꽤 근수가 나가는 송아지가 얼음이 언 냇가로 뛰어들자 뒷발 근처의 얼음이 쩍 하고 깨지면서 엉덩이 쪽부터 물 속으로 빠져들었다. 녀석은 큰 눈을 굴리며 마구 울어대기 시작했다.

리스는 욕설을 퍼부으며 로프를 든 채 냇가로 달려갔다. 매들린도 얼른 트럭을 세우고 차에서 내렸다.

[얼음 쪽으로는 절대 가지 말아요.]

그녀가 목소리를 높여 경고했다.

[걱정 말아요. 난 저 녀석처럼 어리석지 않으니까.]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로프를 힘껏 던졌다. 로프는 동그랗게 원을 그리며 허공으로 솟구쳤다. 하지만 송아지가 미친 듯이 요동을 치는 바람에 첫 번째 시도는 불발로 그쳤다. 송아지가 몸부림을 칠 때마다 얼음이 쩍쩍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매들린이 그의 곁으로 달려갔을 땐 송아지의 몸통 대부분이 얼음물 속에 잠겨 있었다. 리스는 욕설을 중얼거리며 다시 로프를 던졌다. 이번엔 성공이었다. 로프가 송아지 목에 걸리자 리스는 잽싸게 반대편 끝자락을 안장에 묶었다. 말은 리스의 명령에 따라 천천히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그리곤 마침내 수송아지가 물 밖으로 끌려나오자 걸음을 멈췄다.

리스는 안장에 묶인 줄을 풀어 손에 쥔 채 송아지의 목에 감긴 로프를 풀어주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로프에서 풀려난 송아지가 공포에 질린 울음소리를 내며 리스에게 달려들더니 그대로 어깨로 받아 물에 빠뜨렸다.

매들린은 터져나오는 비명을 애써 참으며 즉시 냇가로 뛰어가 그가 표면으로 떠오르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그의 머리가 냇가에서 3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불쑥 떠올랐다. 혼자 힘으로 빠져나오기엔 너무 먼 거리였다. 순식간에 몸이 얼어붙을 정도로 수온이 낮았던 것이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이리저리 떠다니는 얼음 조가을 붙잡고 매달려 있는 것뿐이었다.

그녀는 재빨리 로프를 집어들었지만 불행히도 로프 던지는 법을 몰랐다. 설사 방법을 안다 해도 송아지처럼 그의 목에 로프를 걸고 끌어당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지만.

[로프를 잡을 수 있겠어요?]

그녀는 다급히 물었다. 그가 할 수 있다는 표시로 한쪽 손을 쳐들자 그녀는 즉시 로프를 던졌다. 그는 팔을 쭉 뻗어 로프를 잡으려 했지만 생각대로 몸이 움직이지 않는 듯했다. 결국 로프는 그가 미처 잡기도 전에 물에 첨벙 빠지고 말았다. 그녀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발을 동동 굴렀다.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다. 지금 당장 그를 물 밖으로 끌어내야 했다. 몇 분만 더 지체해도 그를 구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지금 그를 구할 사람은 그녀밖에 없었다.

더 이상 망설일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로프를 다시 잡아당긴 다음 몸을 납작 엎드린 채 얼음 위를 기어가기 시작했다. 체중을 분산시키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안 돼!]

리스는 그녀가 다가오고 있는 걸 발견하곤 목이 쉬도록 외쳤다.

매들린은 그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얼음 위를 기어갔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얼음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3미터였다. 겨우 3미터. 그러나 그녀에겐 너무나도 먼 거리였다.

그녀가 절반쯤 리스에게 다가갔을 때였다. 생명줄처럼 단단히 붙잡고 있던 얼음이 부서지면서 그가 물 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녀는 안전 대신 속도를 택하고 앞으로 몸을 던졌다. 그리곤 물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아슬아슬하게 그의 코트 깃을 잡고서 초인적인 힘으로 그의 몸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두 사람의 체중이 합쳐지자 얼음 위로 쩍쩍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얼음이 깨지기 직전에 가까스로 몸을 뒤로 뺐다. 극심한 공포로 이가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팔을 올릴 수 있겠어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로프를 당신 팔 밑으로 넣어 허리에 묶을 거예요. 그럼 곧바로 말이 당신을 끌어당길 거구요.]

그는 새파랗게 언 팔을 힘겹게 위로 들어올렸다. 그녀는 앞으로 몸을 내밀고 그의 허리에 재빨리 밧줄을 묶었다. 그러나 너무 갑작스럽게 움직이는 바람에 그녀의 몸을 지탱하고 있던 얼음에 금이 가면서 쩍하고 반으로 쪼개졌다. 결국 그녀는 그대로 물에 빠지고 말았다.

차가웠다. 너무나 차가워서 제대로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팔다리의 감각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가까스로 눈을 떠보니 머리카락이 수초처럼 물 속에 둥둥 떠다니는 게 보였다. 흔들리는 수면 위로 어떤 거무스름한 형체가 요동을 치는 것도 어렴풋이 보였다.

리스......... 그래, 리스가 분명했다.

리스를 떠올리자 정신이 번쩍 났다. 그녀는 깨진 얼음 조각 사이로 보이는 검은 물체를 목표로 얼어붙은 팔다리를 움직이려 애썼다.

한참을 버둥거리던 그녀는 어느 순간 수면 위로 떠올랐다. 바로 그때 말이 뒷걸음질을 쳐서 리스를 물 밖으로 끌어냈다. 냇가에 무사히 당도한 리스가 몸을 일으키려고 애쓰는 동안 그녀는 간신히 얼음 가장자리에 손을 올려놓을 수 있었다.

[매디!]

그는 허리에 묶인 로프를 풀어내려고 애쓰며 안타깝게 울부짖었다.

버텨야 했다. 그녀가 할 일은 버티는 것뿐이었다. 물 속에 빠진 리스를 향해 요구했던 그 일이 바로 지금 그녀가 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몸이 따라주질 않았다.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팔에 힘이 스르르 풀리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 그녀는 다시 차가운 얼음물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머릿속엔 온통 무슨 수를 쓰든 수면 위로 떠올라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녀는 허파가 터져나가는 드산 고통 속에서 오로지 숨을 쉬어야 한다는 목적으로 계속해서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수면 위로 떠올라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얼음을 붙잡아, 매디! 얼음을 붙잡아야 해!]

그녀는 리스의 지시에 따라 거의 무의식적으로 한쪽 손을 뻗었다. 다행히 손 끝에 얼음 조각이 잡혔다.

물에 젖은 로프는 빳빳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게다가 그의 몸역시 동태처럼 얼어붙은 상태였다. 하지만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로프를 던질 수 밖에 없었다. 그것만이 매들린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얼음을 잡지 않고 있는 손을 위로 들어! 내가 로프를 던질 테니까! 매디, 어서 팔을 쳐들어!]

불가능한 요구였다. 물 속에 천근만근 가라앉은 팔을 들어올릴 기력이 없었다.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얼음을 붙잡고 있는 손을 위로 들어올리는 것뿐이었다. 결국 그녀는 완전히 물속으로 가라앉기 전에 그가 던진 로프를 잡을 수 있기만 빌면서 얼음을 붙잡고 있던 손을 위로 쳐들었다.

리스는 신중히 겨냥을 하느라 그녀의 얼굴이 물속으로 사라지기 직전에야 로프를 던졌다. 다행히 그 로프는 물 위로 솟아 있는 그녀의 팔을 향해 정확이 날아갔다. 그녀의 손목에 로프가 걸린 것을 확인한 리스는 미친 듯이 줄을 잡아당겨 바짝 조였다.

[뒤로! 뒤로!]

그는 말을 돌아보고 소리를 질렀다. 녀석은 똑똑하게 주인의 명령이 떨어지기 전에 벌써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마침내 그녀가 물 밖으로 끌어올려졌다. 리스는 그녀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가 기침과 함께 물을 토해내기 시작할 때까지 애절하게 그녀의 이름을 불러댔다.

[괜찮을 거야. 아무 일도 없을 거라구.]

그는 주문을 외듯 계속해서 중얼거리며 그녀의 손에 감겨 있는 로프를 풀었다.

[이제 집에까지 가기만 하면 되는 거야. 그럼 아무 문제도 없을 거라구.]

그는 두 사람이 집에까지 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따윈 아예 떠올리지 않으려 했다. 무슨 수를 써서든 집에까지 가리라. 그는 굳게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 자신의 몸 역시 꽁꽁 얼어붙어 있는 바람에 그녀를 안아들 수조차 없었다. 결국 그는 트럭까지 그녀를 질질 끌고 갔다. 그녀의 눈은 계속 감겨 있었다.

[잠들면 안 돼.]

그는 거칠게 소리쳤다.

[매디, 어서 눈을 떠. 포기하지 말고 싸워야 해. 빌어먹을, 제발 싸우라고!]

그녀는 눈꺼풀을 파르르 떨다가 천천히 눈을 떴다. 하지만 그녀의 회색 눈동자는 멍하니 허공을 향해 열려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가 허공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는 게 아닌가!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헤매던 그녀가 싸우라는 그의 외침을 듣고 주먹을 휘두른 것이다.

그는 트럭 문을 열고 안간힘을 다해 그녀를 밀어올렸다. 그녀는 물을 뚝뚝 떨구며 조수석에 엎어졌다.

어느새 트럭 옆으로 다가온 말이 콧등으로 그의 등을 슬쩍 떠밀었다. 만일 녀석이 그런 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 그대로 차를 출발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평생 동안 말을 돌봐온 습관은 말고삐를 트럭 뒤쪽 범퍼에 비끄러매게 했다. 그의 모든 본능은 빨리 집으로 가서 두 사람 다 몸을 녹여야 한다고 소리를 질러댔지만, 지금 그는 말이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운전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는 미끄러지듯 운전석에 올라타 시동을 걸고 히터를 틀었다. 그러자 곧 뜨거운 바람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는 그런 사실조차 감지하지 못할 정도로 감각이 마비되어 있었다.

둘 다 가급적 빨리 젖은 옷을 벗어야 했다. 얼음물에 흠뻑 젖은 옷이 체온을 앗아가기 전에 말이다. 그는 매들린에게 옷을 벗으라고 소리를 지르곤 자기부터 꽁꽁 얼어붙은 손으로 최대한 빨리 옷을 벗어던졌다.

그녀는 간신히 몸을 세우고 앉아 있는 상태였다. 그러니 손이 제대로 움직일 리 만무했다. 리스가 완전히 옷을 벗었을 때까지도 그녀는 겨우 두꺼운 코트만 벗은 상태였다. 코트에는 벌써 성애가 끼여 있었다.

리스는 서둘러 그녀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귀염둥이, 어서 옷을 벗어야 해. 젖은 옷을 입고 있으면 오히려 더 체온을 뺏길 뿐이라구. 내 말 알아들었소? 매디, 무슨 말이 든지 해봐. 어서 말을 해보라구.]

그녀는 대답 대신 한쪽 손을 천천히 쳐들었다. 그는 주먹을 쥔 채 가운뎃손가락만 치켜올린 그녀의 불경스러운 손동작을 발견하고는 다음 순간 심각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귀염둥이, 이 문제는 나중에 꼭 따지겠어. 집에 가서 보자구.]

대답 대신 그녀의 눈이 순간적으로 빛을 발하자 그는 겨우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잠시 후 그의 온몸에 발작적인 경련이 찾아들었다. 이를 덜덜 떨며 돌아보니 매들린은 죽은 듯이 늘어져 있었다. 저체온증에 빠지기 시작했다는 징조였다. 그는 겨울이면 항상 트럭에 싣고 다니는 모직 담요와 뜨거운 커피가 든 보온병을 꺼냈다. 그 정도 동작을 하는데도 온힘을 쏟아야 했다. 그는 일단 담요의 먼지를 턴 다음 그녀의 몸을 감싸주었다. 이어서 그는 떨리는 손으로 보온병의 마개를 열고 김이 오르는 뜨거운 커피를 뚜껑에 따라 그녀의 입으로 가져갔다.

[베이비, 이걸 마시면 몸이 좀 따뜻해질 거야.]

그녀는 간신히 커피를 한 모금 삼킬 수 있었다. 그는 나머지 커피를 단숨에 들이켰다. 뜨거운 커피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게 느껴졌다. 어서 집까지 운전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기운을 차리지 못하면 두 사람 다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그는 커피를 한 잔 더 따라 매들린의 입에 갖다대고 억지로 마시게 했다. 지금으로선 그게 그가 해줄 수 있는 전부였다.

그는 정신을 모아서 기어를 넣고 차를 출발시켰다. 하지만 다시 운전을 하기 힘들 정도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잠시 떨리는 몸이 정상으로 돌아오길 기다렸다가 다시 차를 몰았다. 뜨거운 커피를 마시고 히터에서 나오는 따뜻한 바람을 쐰 덕분인지 매들린도 아까보다는 조금 기운을 차린 듯했다.

멀리서 집이 보이자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지름길로 트럭을 몰았다. 가능한 한 뒷문 가까이 트럭을 세운 리스는 벌거벗은 몸으로 차에세 뛰어내려 재빨리 매들린을 안아들었다. 그는 맨발 아래로 밟히는 차가운 눈의 감촉을 전혀 느끼지 못할 정도로 온몸의 감각이 둔해진 상태였다.

리스는 젖 먹던 힘까지 모두 발휘해 매들린을 안아들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다용도실 맞은편에 있는 욕실까지의 거리가 천리는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욕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기 시작했다. 아직 아무 감각도 없는 상태인지라 물 온도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저 적당히 따뜻한 물이기를 바랄 수밖에.

[자, 욕조로 들어갑시다.]

매들린은 그의 지시대로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도무지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거의 기다시피 욕조 안으로 들어간 그녀는 그의 다리 사이에 앉아 힘없이 몸을 기댔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자 곧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바늘로 콕콕 쑤시는 듯한 견디기 힘든 통증이 느껴지자 그만 눈물을 쏟고 말았다. 리스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그는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며 고통의 신음을 흘렸다. 사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는 건 단시간내에 얼어붙은 몸을 녹이기엔 제일 좋은 방법이었지만, 동시에 제일 고통스러운 방법이기도 했다. 하지만 리스로서는 그들을 돌봐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상황인지라 이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시간이 흐르자 최악의 고통은 지나갔다. 리스는 어깨까지 푹 잠기도록 몸을 담그며 매들린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좀 나아진 것 같소?]

[네.]

평소와 달리 그녀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정말 위험했어요.]

그는 새삼 몸을 부르르 떨며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그 송아지는 종자 소로 쓸 놈이었소.]

그는 딱딱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빌어먹을 녀석은 이제 거세해 버리고 말겠어. 내년 봄까지 무사히 버틴다면 말이야.]

그녀는 입술 한쪽 끝을 살짝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말은 절대 팔지 않겠다고 약속해 줘요. 우리를 구해준 생명의 은인이잖아요?]

[그 녀석에겐 우리 마구간에서 가장 크고 좋은 마방을 줄 거요.]

그들은 물이 미지근하게 식을 때까지 그렇게 앉아 있었다. 몸에 와닿는 물이 서늘하게 느껴지자 리스는 욕조 마게를 빼서 물을 비우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 매들린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샤워 커튼을 닫고 샤워 꼭지를 틀었다. 곧 뜨거운 물줄기가 그들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그녀는 그의 품에 안긴 채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으며 가만히 서 있었다. 전에도 여러 번 그의 품에 안긴채 서 있었던 적이 있지만, 지금 이 순간처럼 소중하게 느껴졌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함께 죽음의 고비를 넘긴 후가 아닌가!

비처럼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으며 그는 그녀의 입술을 찾아 고개를 숙였다. 그들이 정말 살아 있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확인시켜 주고 싶었다. 자신의 목숨이 위험에 처했던 것은 물론, 눈 깜짝할 사이에 하마터면 매들린을 잃을 뻔했던 것이다.

잠시 후 샤워 꼭지를 잠그고 수건을 꺼내 그녀의 머리에 감아 준 리스는 수건을 한 장 더 꺼내 몸의 물기를 닦아준 다음 조심스레 안아들고 욕조 밖으로 나왔다. 그는 타일 바닥에 그녀를 살며시 내려놓으며 상태를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다행히도 입술과 손끝에는 핏기가 돌기 시작한 것 같았지만, 여전히 추운 듯 덜덜 떨며 서 있는 그녀를 보자 가슴이 아팠다.

매들린은 가만히 서 있기조차 힘들 정도로 온몸이 나른한 상태였다. 유행성 독감에 걸렸을 때보다 더 힘든 게 이대로 그냥 침대에 쓰러져 잠이나 자고 싶었다. 지금 같아선 1주일은 내리 잘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자꾸만 잠이 쏟아지는 것도 저체온증의 증상 중 하나라는 걸 알고 있는 그녀로선 눈을 감기가 두려웠다.

그녀는 변기 뚜껑에 걸터앉아 리스가 몸을 다 닦기를 기다렸다. 벌거벗은 그의 몸은 오늘다라 더 힘차 보였다. 강바닥에 가라앉기 직전 그녀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건 오로지 리스의 존재 덕분이었다. 그리고 그건 지금 그녀를 엄습하고 있는 무기력증과 싸워야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감싸쥐고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게 한 다음 또박또박 말했다.

[자면 안 돼.]

엄중한 경고였다.

[당신 잠옷을 갖고 올 테니까 자지 말고 잠깐만 기다려요. 내말 알아들었소?]

그녀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금방 다녀올게.]

그녀는 그를 안심시키려는 듯 살짝 미소를 지었다.

[브러시하고 드라이어도 좀 갖다줘요.]

잠시 후 그는 잠옷과 드라이어, 그리고 브러시를 들고 욕실로 돌아왔다. 잠옷을 걸치자 따뜻해서 그런지 한결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이미 2층에서 옷을 걸치고 내려온 상태였다. 단추를 잠그지 않아 가슴이 훤히 드러나 보였고 청바지도 엉덩이에 대충 걸친 엉성한 차림이었지만, 그래도 양말은 제대로 챙겨 신고 있었다. 지금은 체온을 유지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니까 말이다.

리스는 그녀의 양말도 가져와서 무릎을 꿇고 직접 신겨주었다.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마친 리스는 그녀를 번쩍 안아들고 부엌으로 갔다.

그는 부엌에 들어서자마자 의자를 꺼내 그녀를 앉힌 다음 2층 욕실에서 가져온 체온계를 물렸다.

[여기 가만히 앉아 있어요. 내 곧 커피를 끓이리다.]

고마운 제안이었다. 자꾸만 눕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게 문제일뿐.

디지털 체온계가 신호음을 울리자 그는 즉시 체온계를 빼보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아직 35도밖에 안 되는군. 최소한 36도는 되야 하는데.........]

[당신은 어때요?]

[나야 당신보다 훨씬 체격이 큰 데다 물 속에 그리 오래 있지도 않았잖소.]

한기는 여전했지만 그래도 조금 전처럼 뼛속까지 얼어붙은 듯한 느낌은 없었다. 게다가 뜨거운 커피를 마시자 한결 견디기가 쉬었다. 그는 매들린에게 커피를 세 잔이나 먹였다. 커피가 너무 진해서 이러다가 카페인 중독이 될지도 모른다고 투덜대는 소리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이다. 결국 석 잔이나 먹인 다음에야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물을 한 잔 따라주었다.

리스는 그녀가 혼자 있어도 될 정도로 상태가 좋아지자 벽난로 앞에 퀼트 이불을 깔고 그 위에 그녀를 앉혔다.

[잠깐 나갔다 오겠소.]

그의 말에 그녀는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공포로 휘둥그래진 그녀의 눈을 본 리스는 재빨리 그녀를 안심시켰다.

[마구간에 말을 들여놓고 돌봐줘야 할 것 같아서 그렇소. 끝나는 대로 곧 돌아오리다.]

[걱정하지 말고 다녀와요. 여기 가만히 앉아 있을게요.]

그녀는 서둘러 표정을 수습하며 그를 안심시켰다.

평소 같으면 밤새도록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양의 카페인을 섭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잠이 올까 두려워 자리에 누울 수조차 없었다. 그녀는 머리에 두른 수건을 벗겨내고 브러시를 들어 머리를 빗기 시작했다.

서둘러 집 안으로 들어서던 그의 눈에 매들린이 가지런히 머리를 빗어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그 자리에 멈춰선 채 지극히 여성적인 의식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팔을 들어 머리를 빗을 때마다 통이 넓은 잠옷 소매가 아래로 흘러내려 가냘픈 팔목을 드러냈다. 우아한 곡선을 그리는 섬세한 목덜미가 눈에 띄자 그는 마치 온몸의 피가 한 방울도 남김없이 남성으로 집중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벌써 7개월이나 함께 생활해 왔건만, 단지 그녀를 보기만 해도 마치 발정난 종마처럼 마구 욕망이 치솟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기분은 어떻소?]

그는 겨우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그녀에 대한 갈망이 역력하게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혹시나 그녀가 눈치를 챘을까 싶어 가슴을 졸인 것도 잠시, 환하게 미소짓는 그녀를 보자 마구 피가 끓었다.

[많이 나아졌어요. 당신은 어때요?]

[괜찮소.]

괜찮은 것 이상이었다. 두 사람 다 심한 부상을 입지 않고 무사히 살아남았으니 말이다.

그는 다시 한 번 그녀의 체온을 쟀다.

[36도, 음, 이제 됐군.]

[난 원래 체온이 좀 낮은 편이에요. 보통 때도 36도 5부 정도니까요.]

[난 37도 정도인데.]

[별로 놀라운 사실도 아니네요. 안 그래도 당신과 같이 자면 화로를 끼고 자는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불만이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잠시 후 그녀의 눈빛이 짙어지는가 싶더니 곧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하마터면 당신을 잃을 뻔했어요.]

순간 그의 눈빛에 감출 수 없는 공포의 그림자가 떠올랐다. 그녀는 차마 그의 눈을 마주보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복받치는 감정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살아 숨쉬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베이비, 난 아무렇지도 않아.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한 건 바로 당신이야. 내가 아니라.]

리스는 그녀의 머리카락에 입술을 댄 채 허스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매들린은 아무 말 없이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사실 그녀는 별로 눈물이 많은 편이 아니었다. 원래가 차분한 성격이라 그런 것 같았다. 7개월간 결혼 생활을 하면서도 단 두 번밖에 울어본 기억이 없었다. 그것도 다 통증 때문이었다. 한 번은 결혼 첫날밤을 치르면서였고, 다른 한 번은 방금 전 뜨거운 물에 들어갔을 때였다.

그들이 겪었던 그 긴박했던 상황을 떠올리자 갑자기 가슴이 메어왔다. 그녀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참으려 애썼지만 아무 소용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결국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펑펑 눈물을 쏟았다.

리스는 그녀가 갑자기 소리내어 울자 주먹으로 한 방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의 매들린은 타고난 전사였다. 무섭게 화가 난 그에게 맞설 때조차도 절대 물러서는 법이 없는 여자였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지금 눈물을 쏟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겪어야 했던 고난의 깊이가 느껴지는 눈물이었다. 그는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문질러 주면서 천천히 퀼트 이불 위에 눕혔다.

울음소리가 그친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였다. 그는 그녀가 마음껏 눈물을 쏟도록 그냥 내버려두었다. 그녀도 감정을 분출시킬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 역시 말을 돌보러 나갔을 때 사료 양동이를 힘껏 걷어차는 것으로 화를 풀지 않았던가!

그는 한바탕 감정의 폭풍이 휩쓸고 지나갈 때까지 그녀를 가만히 안고 있다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녀는 여전히 지켜 보였지만, 부어오른 눈 속에는 조금 전까지 느껴지던 긴장감이 어느 정도 사라지고 없었다.

리스는 팔꿈치에 체중을 실을 채 그녀의 가운 허리띠를 끄른 다음 앞자락을 펼쳐 황홀한 알몸을 드러냈다. 그리고는 움푹 패인 쇄골 뼈를 거쳐 가녀린 목덜미를 천천히 어루만졌다.

[내가 당신을 보기만 해도 아플 정도로 흥분된다는 말을 했던가?]

그가 허스키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뇨. 하지만 몸으로 보여준 것 같기는 해요.]

그녀의 목소리도 잔뜩 쉬어 있었다.

[너무 흥분이 돼서 고통스러워. 당장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아 무섭기까지 해. 하지만 당신 몸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그 고통은 쾌락으로 바뀌어 버리지.]

그는 그녀의 목덜미를 어루만지던 손을 아래로 미끄러뜨려 부풀어오른 젖가슴을 덮었다. 곧 가슴 정상의 봉오리가 단단해지는 게 느껴졌다. 그는 그 젖꼭지를 부드럽게 어루만져 뾰족하게 세우고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그 유혹적인 작은 봉오리를 입에 물었다.

그녀의 숨소리가 점점 깊어지고 피부는 미묘하게 홍조를 띠기 시작했다. 살짝 내리뜬 눈꺼풀도 파들파들 떨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그녀를 흥분시키는 데 성공하자 남자로서의 자부심이 가슴 가득 느껴졌다. 자신이 한때 그녀와 관능적인 축제를 벌이는 걸 거부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는 매들린의 몸 구석구석을 애무하는 데 몰두했다. 비단결 같은 피부, 높이 솟은 가슴, 평평하고 탄력 있는 복부, 동그란 엉덩이, 그리고 늘씬한 허벅지 사이의 그늘진 삼각 지대.......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는 그녀의 몸을 마음껏 어루만지던 그의 손이 그 조그만 삼각 지대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햇볕에 그을린 자신의 구릿빛 손가락과 새하얀 그녀의 피부가 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광경에 그는 완전히 매혹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녀만의 풍미는............ 그는 뜨거운 열기로 달뜬 달콤한 입술을 한 번 맛본 다음 더욱 깊숙이 혀를 밀어넣었다. 그리고 입술에 이어서 섬세한 목덜미와 풍만한 가슴을 차례로 맛보았다. 그의 입술은 그녀가 이불을 부여잡은 채 허리를 위로 들어올리며 환희에 몸부림칠 때까지 그 풍만한 가슴에 머물러 있었다.

이윽고 그의 혀가 그녀의 작은 배꼽 주위에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입술에 와닿는 평평한 복부는 서늘하고 비단처럼 매끄러웠다.

마침내 그가 하얀 허벅지를 옆으로 벌리고 자신의 어깨에 다리를 걸치게 한 다음 촉촉이 젖은 동굴 입구에 입술을 갖다대자 그녀는 환희의 비명을 지르며 그의 머리를 양손으로 움켜잡았다. 그는 그녀가 몸을 위로 솟구치며 절정에 오를 때까지 동그란 엉덩이를 단단히 움켜쥔 채 진한 애무를 퍼부었다. 한바탕 절정의 회오리가 몰아쳤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던 그녀는 마침내 기진맥진한 상태로 퀼트 이불 위에 널브러졌다.

그는 그녀의 다리 사이에 무릎을 꿇은 채 다급한 손길로 바지를 벗어던지고는 그녀의 몸 속으로 거세게 들이닥쳤다. 매들린은 그가 그녀의 몸을 가득 채운 채 천천히 앞뒤로 움직일 때에야 겨우 눈을 뜰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커다란 남성이 자신을 완전히 채우고 뭐라 표현하기 힘든 황홀감을 안겨주는 게 느껴지자 다시금 전율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몸 아래 누워 있는 그녀에게 모든 체중을 싣고 마치 짓뭉개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거세게 내리눌렀다. 지금 그의 머릿속엔 오로지 가능한 한 깊이 그녀의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욕망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마치 그렇게 하는 것만이 그녀의 몸을 완전히 소유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처럼.

그녀는 기꺼이 그의 거친 침입을 받아들였다. 그에게선 오로지 그녀만이 진정시킬 수 있는 야만적인 욕망이 소용돌이쳤다. 그가 마침내 정신을 차리고 그녀에게 상처 입힐까 두려워 박자를 조금 늦췄을 때에도 그녀는 가만히 누운 채 자신의 몸 속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열정을 마음껏 발산했다.

하지만 최고의 절정이 찾아들기 직전 그는 갑자기 동작을 멈췄다. 더 이상 계속했다간 절정에 이르기도 전에 끝나고 말 것 같아서였다. 그녀의 얼굴을 감싸쥐고는 흥분 정도를 가늠해 보는 그의 청옥색 눈동자가 잠시 빛을 발했다.

그는 그녀의 귓전에 스치듯 입술을 갖다댄 채 나지막이 속삭였다.

[통계적으로 남자들이 아내를 임신시킬 때까지 얼마나 자주 사랑을 나누는지 알아?]

그녀는 가쁜 호흡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그의 허스키한 음성에 귀를 기울였다. 그와 상식을 겨루는 건 무척이나 즐거운 일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글쎄요? 하지만 단 한 번이면 되는데, 왜 다들 자주 해야 한다고 그러는지 궁금하긴 해요.]

늑대같이 엉큼한 표정을 지으며 그가 속삭였다.

[내 사람, 그건 말이지, 아내를 확실히 임신시키기 위해서야.]

그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더욱 빨리, 그리고 더욱 거세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사랑의 행위를 통해 그는 목적을 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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