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컨의 청혼-8화 (7/11)

8

리스는 기대했던 만큼, 아니 그 이상의 금액으로 육우를 처분했다. 콜레스테롤 수치를 염두에 두고 사육한 덕분에 지방질이 낮으면서도 육질은 부드러운 최상급의 육우를 키울 수 있었고, 그 결과가 금전적인 결실로 나타난 것이다.

그는 씁쓸한 기분으로 그 돈의 일부를 떼어 은행 대출금을 갚았다. 나머지 돈은 내년 봄에 시험해 보고 싶은 신품종의 종자 소를 구입하는 데 쓸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꼭 필요한 비용을 제외하고도 당분간 목장 운영에 사용될 돈과 매들린에게 가끔 외식을 시켜줄 수 있을 정도의 돈을 손에 쥘 수 있었다. 물론 그녀와 외식을 한 적이 한 번도 없는 건 아니지만, 그동안은 겨우 플로리스의 카페에서 커피나 사주는 게 고작이었다는 건 무척이나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그는 매들린에게 보석이나 값비싼 드레스 같은, 예전의 그에겐 너무나 당연했던 그런 선물들을 사주고 싶었다. 예전처럼 목장이 번성하려면 아직 오랜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안간힘을 다해 그 시절의 영화를 되찾으려 노력하고 있으니 조만간 좋은 결과를 볼수 있지 않겠는가! 7년 만에 드디어 이익을 보게 되자 그는 희망에 부풀었다. 마침내 목장 운영이 흑자로 돌아선 것이다!

매들린은 은행 대출금을 갚으러 빌링스로 나온 그를 따라나섰다. 그녀가 같이 가고 싶다는 말을 꺼냈을 때 그는 쇼핑이라도 하고 싶은 모양이라고 짐작하곤 순순히 동행을 허락했다. 그의 짐작대로 매들린은 쇼핑을 하러 온 거였다. 하지만 그녀가 그의 청바지와 속옷만 몇 벌 사고는 그만 집으로 돌아가자고 하자 그는 내심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는 요즘 매일같이 매들린이 전처와는 전혀 다른 여자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있었다. 그 다른 점 중의 하나가 매들린은 별로 옷에 관심이 없다는 거였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들린이 에이프릴보다 더 세련되게 보인다는 점이었다. 목장에서 일할 때 입는 작업복만 봐도 그녀가 특별한 패션 감각의 소유자라는 걸 금세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평범한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일 때도 그랬다. 꼭 끼는 청바지를 입은 그녀의 모습은 그의 피를 순식간에 후끈 달아오르게 만들었고, 평범한 티셔츠 역시 그녀가 걸치기만 하면 파리에서 유행하는 옷처럼 세련되게 보였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그를 가장 달아오르게 만드는 건 바로 그의 셔츠를 걸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었다. 단지 그에게 빌린 셔츠가 너무 커서 소매를 둘둘 걷어올리고 옷자락 양끝을 허리춤에서 대충 묶고 있을 뿐인데도 말이다. 아니, 한 가지가 더 있었다. 헐렁한 셔츠 속에 브래지어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매들린은 그가 자신의 도발에 응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자기 셔츠를 걸친 그녀를 보자마자 곧장 그 안으로 손을 밀어넣을 것이고, 곧이어 셔츠를 아예 벗겨버릴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 다음 순서는 항상 똑같았다. 장소 따윈 상관없이 격렬하고 화끈한 사랑을 나누는 것이다.

어쨌든 그는 아내의 요구대로 곧장 집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그동안 어떻게 뉴욕 같은 대도시에서 살았는지 이해가 안 돼요.]

그녀는 거리에 오가는 자동차를 바라보며 무심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여기도 소음이 심하군요.]

그는 다시 깜짝 놀랐다. 빌링스는 인구가 겨우 7만밖에 안 되는 소도시였다. 물론 술집에서 가끔 싸움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그래봤자 뉴욕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마약 밀매업자나 갱단의 싸움과는 아예 비교도 할 수 없는 단순한 주먹다짐 정도가 고작인 곳이었다.

이로써 매들린과 에이프릴의 다른 점을 한 가지 더 발견한 셈이었다. 에이프릴에게 있어서 빌링스는 그저 유행에 뒤진 시골 촌구석일 뿐이었으니까. 그녀가 즐길 만한 오락은 뉴욕이나 런던, 파리나 로스앤젤레스 같은 대도시에서만 가능했던 것이다.

매들린은 목장으로 돌아가는 게 정말로 기뻤다. 그곳에서의 삶이 제일 행복하다는 게 새삼 느껴졌다. 목장은 대지와 가까이 지내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평화가 가득한 곳이었다. 그녀는 그런 목장을 집으로 가진 게 너무나 행복했다.

그들이 집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가 절반 정도 지나 있었다. 리스가 작업복으로 갈아입으러 집에 들어간 사이, 매들린은 베란다로 나가 그네에 앉아 있었다. 저녁 식사 준비를 시작하기엔 너무 시간이 일렀던 것읻. 가을 문턱에 접어든 탓인지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리스의 말에 따르면 이곳에서는 10월에 눈이 내리는게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했다.

눈이 내리면 곧 겨울로 접어들 것이다. 이곳 겨울은 정말 견디기 힘들 정도로 춥고 황량하다지만 그녀는 어서 겨울이 오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기나긴 겨울밤을 기다리는 거지만, 그녀는 기나긴 밤 시간 동안 그와 단둘이 지낼 생각을 하며 미소를 머금었다.

옷을 갈아입고 아래층으로 내려온 리스는 베란다 그네에 앉아 있는 그녀를 보았다. 어서 일을 하러 나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그녀의 옆에 바짝 붙어 앉아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그녀가 허공을 아련히 바라보며 말했다.

[곧 겨울이 오겠죠?]

[당신 생각보다 더 빨리 올 거요.]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았네요. 로버트를 초대해도 될까요?]

[당연하지. 로버트는 당신 가족이잖소.]

그녀는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알아요. 하지만 결혼식 때 보니 두 사람 사이가 서먹서먹한 것 같아서 물어본 거예요.]

[그때야 상황이 그랬으니까. 남자들에겐 저마다 자기 영역을 지키려는 경향이 있거든. 로버트는 당신을 주고 싶지 않았을 테고, 난 나름대로 지옥의 강을 건너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을 데려오겠다고 단단히 결심을 한 상태였으니 서먹서먹했을 수밖에.]

리스는 그녀의 턱을 들어 천천히 입을 맞추었다.

[당신 오빠 눈에는 아마 내가 자기 누이동생을 빼앗으러 나타난 적으로밖에 안 보였을 거요.]

한동안 그네가 흔들리는 소리만 들려왔다. 그는 다시 그녀에게 살짝 입을 맞췄다. 그녀와의 결혼 생활은 처음 그가 생각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로선 이렇게 정열과 만족으로 가득 찬 결혼 생활을 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제 우리 아기를 가질 때가 온 것 같소.]

그녀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오늘부터 피임약 복용을 그만두겠어요.]

그녀는 그의 손을 잡아끌어 자신의 얼굴을 감싸게 했다. 그 부드러운 몸짓에 가슴이 메어왔다. 그는 그녀를 들어올려 자신의 무릎에 앉히고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당신도 내 아이를 원하오?]

그녀의 얼굴은 환하게 밝아졌다.

[물론이죠. 당신도 알잖아요.]

그는 다시 한 번 천천히 입을 맞췄다. 눈을 감고 그의 입술 감촉을 음미하던 매들린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당신 가족 중에 혹시 쌍둥이는 없어요?]

[아니, 없소?]

그는 깜짝 놀란 듯 소리를 지르더니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럼 당신 가족 중에는 있다는 소리요?]

[음, 그래요. 릴리 할머니가 쌍둥이였어요.]

쌍둥이라니! 그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라는 듯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아가씨, 한 번에 한 명씩이오. 쌍둥이는 아예 생각도 하지 말아요.]

리스는 그녀의 허벅지를 어루만지던 손을 치마 속으로 밀어넣어 팬티를 아래로 끌어내렸다. 그리고는 밀가루 반죽처럼 부드러운 그녀의 엉덩이를 부드럽게 감싸쥐었다.

[크리스마스 때쯤이면 임신이 될 수도 있겠군.]

[으흠, 정말 그러면 좋겠어요.]

그의 눈이 위험스럽게 빛났다.

[내 최선을 다하리다.]

[하지만 그보다 오래 걸릴 가능성이 더 커요.]

[그렇다면 더 열심히 노력할 수밖에.]

그녀는 장난꾸러기처럼 씩 웃었다.

[뭐, 손해볼 건 없으니까요.]

그녀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결론을 내렸다.

10월에 들어서자마자 함박눈이 내렸다. 첫눈인데도 10센티미터 정도 쌓일 정도로 펑펑 쏟아진 것이다. 그녀는 막상 겨울이 닥친 다음에야 날씨가 추워지면 오히려 목장 일이 더 많아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리스는 극심한 추위가 이어지면 소들에게 건초를 날라다 줘야 하고, 또 얼음이 꽝꽝 언 냇가에 구멍을 내서 녀석들이 물을 마실 수 있게 해줘야 한다고 설명해 주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길잃은 송아지들이 얼어죽기 전에 녀석들을 찾아내야 했고, 기온이 너무 떨어지면 피난처로 소떼를 이동시켜야 하기도 했다.

그제서야 그녀는 겨울을 넘기는 걸 걱정하기 시작했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면 어떻게 해요?]

그녀는 유난히 강한 바람이 불던 어느 날 그에게 걱정스럽게 물었다.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지 않기만을 기도해야지.]

그는 솔직하게 대답해 주었다.

[소들도 웬만한 눈보라는 견뎌낼 수 있으니까 말이오. 물론 송아지 몇 마리 정도는 잃을 각오를 해야 하지만. 어쨌든 눈보라나 한파가 오랫동안 계속되면 그야말로 문제가 심각해지지. 앞이 안보일 정도로 눈보라가 심하면 건초를 갖다줄 수가 없으니까 다들 굶어죽거나 얼어죽기 십상이거든. 바로 그럴 경우에 대비해서 미리 집하고 헛간에 고리를 갖다둔 거요. 폭설이 휘몰아칠 징조가 보이면 집에서 헛간까지 줄을 연결해 놓고 고리를 사용해서 헛간까지 이동할 수 있게 말이오.]

매들린은 그가 지금껏 오랜 세월 동안 혼자서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목장을 지켜왔다는 사실에 새삼 놀란 듯 그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여태껏 어디 하나 다친 데 없이 멀쩡하게 살아 있다는 건 그가 얼마나 탁월한 지성과 체력의 소유자인지, 또 얼마나 고집스러운 성격인지를 증명하는 증거나 마찬가지였다.

겨울을 대비하는 준비는 계속되었다. 그는 우선 소들을 집 근처 목초지로 이동시켰다. 뒷문 옆으로 땔감을 가득 쌓아놓은 건 물론 식품 저장실에는 양초와 비상 전지를 챙겨두었다.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히터를 청소하고 시험 가동까지 마쳤다. 트럭과 스테이션 왜건의 부동액을 다시 채우고 배터리도 새 것으로 교환해 둔 건 물론이었다.

기온은 계속 떨어졌다. 결국 10월 중슨 무렵엔 정오가 지나서야 겨우 수은주가 영상을 가리키게 될 정도였다.

[그럼 6개월 동안 계속 이렇게 추운가요?]

그녀의 걱정스런 물음에 그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아니, 가끔씩 따뜻한 날씨가 이어질 때도 있소. 1월에도 영상으로 기온이 올라갈 때가 있으니까. 어쨌든 한파가 계속되면 눈보라가 몰아칠 가능성도 커지지. 안 그래도 눈보라에 대비해 일단 준비를 하고는 있지만, 그래도 날씨가 따뜻해지기를 기도할 수 밖에 별 방법이 없소.]

그의 기도에 응답이라도 하듯 얼만 안 가 따뜻한 날씨가 이어졌다. 물론 밤에는 확실히 영하로 떨어졌지만.

매들린은 리스의 겨울나기 준비를 지켜보면서 점점 자신감이 붙었다. 그는 아마 지난 7년간 저런 식으로 혼자서 모든 걸 준비하며 지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주의를 해도 언제 어떤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그녀가 할 일은 그저 리스가 몸을 돌보지 않고 일에 매달리는 일이 없도록 세심히 챙겨주는 것뿐이었다.

크리스마스 직전에 로버트가 목장을 방문했다. 그는 사흘간 머물 예정이었다. 인사를 나누자마자 날카로운 시선으로 여동생을 찬찬히 훑어본 로버트는 비록 아무 말도 없었지만 마음을 놓은 듯 이내 긴장을 풀고 목장 생활을 편안히 즐겼다.

그녀는 리스와 로버트가 서로를 상대하는 모습을 흥미로운 시선으로 관찰했다. 두 사람 다 지극히 개성이 강한 남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대화는 단문의 나열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둘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그녀는 두 사람이 무척 비슷한 분위기를 풍긴다는 사실을 깨닫고 내심 깜짝 놀랐다. 말 그대로 세련된 사업가의 표상인 로버트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긴다는 말은 리스 역시 이혼하기 전까진 로버트와 마찬가지로 풍요로운 생활을 누렸다는 뜻이었다.

로버트는 놀랍게도 목장 일에 관심이 있는 듯 매일 리스와 함께 말을 타고 나갔다. 두 사람은 함께 목장 일을 하면서 미래 사회와 인터넷, 스톡옵션과 시중 금리, 소에게 먹일 사료의 비율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얘기를 나눴는데, 로버트는 리스의 의견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는 것 같았다.

떠나기 전날 매들린은 로버트와 단둘이 오붓하게 지낼 시간을 마련했다. 그녀는 커다란 팔걸이 의자에 축 늘어져 앉아 눈을 감고 음악을 들으면서 한쪽 발로 박자를 맞췄다. 로버트는 모처럼 편안한 분위기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여동생을 보며 장난스런 표정을 지었다.

[달리는 것보다는 걷는 게 낫고, 걷는 것보다는 그냥 서 있는 게 낫고, 그냥 서 있는 것보다느 앉아 있는 게 낫고, 앉아 있는 것보다는 누워 있는 게 낫지?]

[말하는 것보다는 듣는 게 훨씬 낫구요.]

매들린은 눈도 뜨지 않고 중얼거렸다.

[그래. 말은 내가 할 테니 넌 듣기만 하렴.]

[심각한 얘긴가 봐요? 혹시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기라도 한 거예요? 그래서 청혼을 할 생각이라든가. 뭐 그런 건 아니겠죠?]

[맙소사, 정말 입이 딱 벌어지는군. 어쨌든 그런 건 아니야.]

그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듯 껄걸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펄쩍 뛰는 걸 보니 정말 수상하군요. 정말 오빠의 세계를 뒤흔들어 놓은 만한 여성이라도 나타난 거 아니에요?]

[그것보다는 좀더 진전된 관계야.]

[그런데 왜 이곳엔 같이 오지 않았어요? 혹시 내가 아는 사람이에요?]

[크리스마스는 가족끼리 지내야 하는 거야.]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그 짧은 대답은 지금의 연인이 이전의 다른 여자들보다 더 심각하게 그의 마음을 차지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나탈리 반 웨인이라는 여자야.]

[흠, 내가 모르는 이름이군요.]

[넌 내가 말하는 동안 듣기만 하겠다면서?]

동생 가까이로 의자를 당겨 앉은 로버트는 지금까지 심각한 얘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그녀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럼 말해봐요.]

[리스처럼 사업적으로 뛰어난 두뇌를 가진 사람은 처음이야. 물론 날 제외하고 말이지.]

그는 거만하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오, 물론 그렇겠죠.]

[넌 일단 듣기만 해라. 어쨌든 리스는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고야 마는 강한 의지력을 갖고 있어. 리스는 분명 이 목장을 제대로 돌아가게 만들 게다. 이전처럼 풍요로운 목장으로 거듭날 때까지 아마 지옥의 전사처럼 싸울 거야.]

매들린은 한쪽 눈을 살짝 떴다.

[그래서요? 이제 이 대화의 요점을 말해주지 않을래요?]

[난 사업가야. 이 목장은 엄청난 성공을 거둘 가능성이 매우 높아. 조만간 내가 그동안 투자했던 그 어떤 벤처 기업과도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성공을 거둘 거야. 만약 이곳에 투자하겠다는 사람만 있으면 말이야.]

[그래서 이 목장에 투자를 하고 싶다는 건가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이야. 그리고 리스는 조만간 이윤을 창출할 가능성이 아주 크고, 하지만 캐넌 기업을 끌어들일 생각은 없다. 개인적으로 투자하고 싶다는 거지.]

[리스에게 얘기는 해봤어요?]

[일단 너하고 상의를 해보고 나서 얘기할 생각이다. 넌 그 사람의 아내니까 나보다 리스를 더 잘 알고 있을 것 아니니? 리스가 내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고 보니? 아니면 괜한 시간 낭비에 불과할까?]

[글쎄요, 나로선 오빠가 알아서 하라고밖에 못하겠군요. 오빠 말처럼 사업 문제는 나보다 리스가 더 잘 알고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자기 목장에 대한 일이니까 난 그이가 결정하는 대로 따르는 게 최선일 것 같구요.]

[하지만 여긴 이제 네 집이기도 하잖니?]

[리스를 돕고 싶어서 열심히 노력하고는 있지만, 아직 그렇게 중요한 결정을 내릴 정도로 목장 운영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난 지금 내가 사는 곳이 아니라 내 결혼 생활이 이루어지는 곳이 내 집이라고 생각해요. 리스와 함께라면 여기가 아니라 그 어떤 곳에서 살아도 행복할 테니까요.]

그녀를 내려다보는 로버트의 눈에 부드러운 표정이 어렸다. 그로선 좀처럼 짓지 않는 표정이었다.

[넌 정말 리스에게 푹 빠져있구나, 그렇지?]

[처음부터 그랬어요. 그렇지 않았다면 아예 결혼도 하지 않았을 거예요.]

로버트는 처음 목장에 도착했을 때 그랬던 것처럼 여동생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마치 그녀의 말이 진심인지 알아보려는 것처럼, 잠시 후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난 이만 리스의 생각을 알아보마.]

매들린이 예상했던 대로 리스는 로버트의 제안을 거절했다. 목장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만큼 설사 오랜 시간이 걸릴지라도 혼자 힘으로 목장을 다시 살리고 싶었던 것이다. 이 땅은 그에게 속해 있었다. 그는 이 땅의 나무 한 그루, 흙 한 줌이라도 외부인에게 양도해야 할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로버트는 그의 거절을 기분 좋게 받아들였다. 사업은 사업일 뿐이니까 말이다. 그는 지금껏 여자 문제뿐만 아니라 그 어떤 일에도 개인적인 감정을 포함시킨 적이 없었다.

리스는 그날 밤 침대에 누워 어깨를 그녀에게 베개로 내어준 채 로버트와 나눴던 얘기를 들려주었다.

[오늘 로버트가 사업상의 거래를 제안하더군. 자기를 투자자로 받아들이면 목장의 규모도 배로 늘릴 수 있고, 일손을 도와줄 사람도 고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전에 팔아버렸던 땅도 5년안에 모두 되찾을 수 있을 거라고 말이오.]

[알아요. 오빠가 나한테 먼저 그 제안을 했거든요.]

그의 몸이 일순 굳어졌다.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지?]

[당신과 얘기해 보라구요. 여긴 당신 목장이고, 목장 경영에 대해선 당신이 잘 알고 있으니까 직접 상의해 보라고 했죠.]

[내가 로버트의 제안을 받아들이길 바랐소?]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니잖아요.]

[돈이 결부됐는데도?]

그가 비꼬듯이 물었다.

[그렇다고 밥을 굶는 것도 아닌데요, 뭐.]

그녀의 음성에는 기분 좋은 웃음이 배어 있었다.

[하지만 더 많이 가질 수 있단 말이오.]

[아니면 지금보다 더 나빠질 수도 있겠죠.]

처음엔 가볍게 응수하던 그녀가 이내 진지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리스, 난 지금 무척 행복해요. 그리고 오빠의 제안을 받아들일지 여부는 전적으로 당신이 결정할 문제라고 생각하구요.]

[로버트는 당신이 어느 편도 들지 않을 거라고 하더군.]

[오빠 말이 맞아요. 난 어느 편도 들 생각이 없어요. 어떻게 결론이 나든 나한테 별로 득이 될 것 같지도 않고, 무엇보다 쓸데없이 신경 쓰고 싶지 않아요.]

그녀가 품안에서 곤히 잠든 뒤에도 리스는 한참을 깨어 있었다. 로버트의 제안은 단번에 재정적인 안정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귀가 솔깃했지만, 그만큼 위험 부담도 컸다. 다시는 목장을 위험에 처하게 만들지 않겠노라 다짐했던 그가 아닌가! 게다가 그는 이미 땅을 담보로 은행에서 융자를 받은 상태였다. 물론 투자자를 구하면 은행 융자를 당장 갚아버릴 수 있겠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빚이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버트의 제안에 미련을 떨치지 못하는 것은 매들린을 호강시켜 주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그의 목숨과도 같은 목장을 걸어야만 했다.

로버트가 떠난 다음날부터 한랭 전선의 영향으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눈발만 날렸지만, 갈수록 문제가 심각해져 갔다. 수은주는 큰 폭으로 떨어졌고, 바람도 점점 거세졌다. 일기 예보에 따르면 상황은 더 나빠질 터였다.

리스는 가능한 한 소들을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키고 건초도 잔뜩 갖다주고 왔다. 하지만 언제 또 건초를 갖다줄 수 있을지조차 지금으로선 알 수 없었다. 상황이 그만큼 안 좋았던 것이다.

건초를 갖다주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눈보라에 휩쓸려 길을 잃고 말았따. 눈을 감고도 찾아갈 수 있다고 믿었던 길인데, 한 치 앞도 분간하기 힘든 엄청난 눈보라 때문에 완전히 감에 의지한 채 방향을 잡을 수밖에 없는 지경에 처하고 만 것이다.

그는 눈앞에서 소용돌이치는 눈보라를 보지 않으려 애쓰며 조심조심 말을 몰았다. 말이 더운 김을 뿜으며 숨을 내쉴 때마다 콧등에 성애가 맺힐 정도로 추운 날씨였다. 그의 얼굴 역시 온통 얼음 결정으로 뒤덮여 있었다.

2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가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혹시 방향을 잘못 잡았나 싶은 불안감이 들 무렵 눈보라 속에서 저 멀리 헛간의 형체가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열린 헛간 문틈으로 새어나오는 희미한 불빛이 아니었다면 하마터면 그냥 지나칠 뻔했던 순간이었다. 그는 잠시 이맛살을 찌푸렸다. 분명 헛간 문을 닫은 기억이 있는 데다 불을 켜놓고 나왔을 리는 더더욱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빛 덕분에 위험한 고비를 넘긴 후라 그저 고마운 마음뿐이었다. 만약 불빛이 보이지 않았다면 완전히 길을 잃을 뻔했던 것이다.

눈보라를 피해 머리를 숙인 채 서둘러 헛간 안으로 달려들어간 리스는 헛간 구석에 어른거리는 사람 그림자를 발견하고 나서야 매들린이 헛간까지 나와 자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창가에 불을 밝힌 채 커다란 헛간 문을 닫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거센 눈보라 때문에 균형을 잡기가 힘에 부친 것 같았다. 리스는 얼른 말에서 내려 그녀를 도왔다. 마침내 두 사람은 문을 닫고 커다란 빗장을 찔러넣을 수 있었다.

[대체 여긴 왜 나와 있는 거요?]

리스는 그녀를 붙들고 잔뜩 쉰 목소리로 따져 물었다.

[제기랄, 매디, 이런 날씨에 밖으로 나오다니! 자칫 잘못하면 바람에 날려갈 수도 있었단 말이오!]

[줄에 고리를 걸고 왔어요.]

매들린은 그에게 바짝 매달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요? 앞이 잘 보이지 않았을 텐데.]

그는 공포에 휩싸여 있는 와중에도 아내가 얼마나 그의 안위를 걱정했는지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말대로 자칫 1미터만 길을 벗어났더라도 아예 불빛을 보지 못했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불빛을 발견한 게 다행이었지.]

그는 음울하게 중얼거렸다.

그녀는 성애를 뒤집어쓴 그의 얼굴을 안쓰러운 듯 올려다보았다.

[동상에 걸리기 전에 어서 몸부터 녹여야겠어요.]

[말이 우선이오.]

[그건 내가 할게요.]

그녀는 조그만 히터를 커둔 마구 보관실로 그를 들여보냈다.

[히터를 커놓았으니 따뜻할 거예요. 자, 어서 가봐요.]

바깥에 있다 들어온 그로서는 헛간 안도 따뜻하게 느껴졌다. 일단 바람이 없고 거기다 가축들의 온기까지 더해진 덕분에 그런 대로 훈훈한 온기가 느껴졌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내의 권유에 따라 순순히 마구 보관실로 갔다. 그곳은 기분 좋은 열기로 가득했다.

그는 얼굴에 맺힌 성애를 그대로 녹게 내버려두었다. 억지로 떼어내려고 했다간 자칫 피부가 상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불빛을 발견하지 못하고 5분만 더 바깥에서 지체했더라도 분명히 동상에 걸렸을 것이다. 그는 새삼 가슴을 쓸어내렸다.

매들린은 말 잔등에서 안장을 끌어내리고 갈기를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그러자 녀석은 기분이 좋아진 듯 사람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얼른 따뜻한 담요를 덮어주고 사료와 마실 물을 갖다준 다음 감사의 마음을 담아 말의 목을 두드려 주었다. 마음 같아선 정말이지 이 녀석에게 큰절이라도 올리고 싶었다.

일이 끝나자 그녀는 서둘러 리스에게로 가서 외투에 덮인 눈을 털어내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히말라야 설인처럼 얼굴이며 머리에 온통 달라붙어 있던 성애는 벌써 다 녹아 없어진 듯했다. 그러나 정작 그녀를 놀라게 한 건, 조금 전의 고난 따윈 일상적인 일이라는 듯 벌써 원기를 회복한 것처럼 보이는 그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별로 한 일도 없으면서 지금껏 가슴이 터질 듯이 두근 거리는데 말이다. 굳이 그의 입을 통해 듣지 않아도 어쩌면 그가 영영 돌아오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집까지 가는 게 쉽지는 않을 거요.]

그가 심각하게 말했다.

[밖에는 시속 7, 80킬로미터가 넘는 강풍이 불고 있소. 그러니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서 당신 몸을 두 번 묶는 게 최선일 것 같소.]

그는 일단 자신의 허리에 견고해 보이는 금속 고리가 달린 나일론 줄을 묶은 다음 1미터 정도 간격을 두고 그 줄로 그녀의 허리를 묶었다.

[당신은 내 손이 닿는 곳에 있어야 하오. 일단 당신을 잡고 출발할 테지만, 어쨌든 이 간격 이상 내게서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해요.]

그는 코트를 입고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면서 확인하듯 물었다.

[모자는 안 쓰고 왔소?]

그녀는 얼른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울 머플러를 꺼내 머리에 두르고 단단하게 매듭을 지었다.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두 사람은 조그만 옆문을 통해 헛간을 나섰다. 줄이 바로 옆에 고정되어 있었지만 리스는 그녀가 바람에 몸이 꺾이지 않도록 그녀의 허리를 한 손으로 붙든 채 집과 헛간을 연결한 줄에 각자의 금속 고리를 걸었다.

앞으로 걸어가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었다. 겨우 1미터 가량 전진하는 동안에도 그들은 넘어졌다 다시 일어서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겨우 앞으로 한 걸음 전진했나 싶으면 다음 순간 거센 바람을 맞고 뒤로 밀려나가기 십상이었다.

어느 순간 갑자기 그녀의 몸이 그의 손에서 떨어져 나가면서 그녀는 균형을 잃고 공중으로 들려 올라갔다. 그녀가 혼자 힘으로 서 있을 수 없다는 게 분명해지자 그는 갈비뼈를 짓누를 정도로 강하게 그녀를 붙잡아 자신의 옆구리에 고정시켰다. 그녀는 거의 숨을 쉴 수조차 없는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놓아달라고 소리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설사 소리친다 해도 윙윙거리는 바람 소리에 휩쓸려 들리지 않을 게 뻔했다. 그녀는 결국 시야가 흐려지고 점점 숨이 막혀오는 상황에서 헝겊 인형처럼 그의 옆구리에 매달려 있을 수밖에 없었다.

리스는 현관 앞 계단에서 몇 번이나 구르길 반복한 끝에 간신히 위로 올라섰다. 집이 바람을 어느 정도 막아준 덕분에 간신히 뒷문을 잡고 허리춤에 묶은 줄을 푼 다음 집 안으로 구르듯 들어갈 수 있었다. 그 와중에도 그는 자신의 몸이 아래로 향하게 하는 걸 잊지 않았다. 미처 닫지 못한 문을 통해 거센 바람이 휘몰아쳤다.

[괜찮은 거요?]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간신히 그녀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러나 그녀로부터는 아무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리스는 공포에 질린 얼굴로 그녀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그녀는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있었고, 입술 역시 시퍼렇게 색이 죽어 있었다. 그는 그녀의 어깨를 거세게 흔들면서 큰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매디! 매디! 대체 어딜 다친 거요? 어서 눈을 떠보라구!]

그녀는 나지막이 신음을 흘리며 콜록콜록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옆으로 몸을 웅크린 채 양팔로 상체를 꼭 감싸안았다. 다음 순간 그녀는 헛구역질과 함께 발작적인 기침을 터뜨리며 경련을 일으켰다. 리스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다급히 그녀를 안아올렸다.

바로 그때 그녀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문을 닫아달라고 요구했다. 리스는 즉시 부츠를 신은 발로 문짝이 흔들리도록 세게 문을 걷어찼다. 그리곤 그녀의 머리에서 머플러를 끄르고 코트를 벗기기 시작했다. 뒤늦게 그녀의 허리에 묶인 줄을 발견한 그는 서둘러 그녀와 자신의 몸을 연결한 나일론 줄의 매듭을 풀었다.

[아직도 아픈 거요?]

그는 걱정스런 얼굴로 다시 한 번 그녀의 상태를 확인했다.

발작적인 기침 때문에 그나마 핏기가 돌아왔던 그녀의 얼굴이 다시 창백하다 못해 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괜찮아요.]

그녀는 간신히 목구멍 밖으로 소리를 밀어냈다.

[잠시 숨을 쉴 수 없었던 것뿐이에요.]

그는 마치 당나귀에게 걷어차인 듯한 충격을 받았다. 세상에, 그가 너무 꽉 붙들고 오는 바람에 하마터면 그녀가 질식해서 죽을 뻔했던 것이다!

그는 악다문 잇새로 욕설을 중얼거리며 최대한 부드럽게 그녀를 바닥에 눕힌 다음 주머니칼을 꺼내 그녀의 코트 아패 입고 있던 풀오버 스웨터를 잘라내기 시작했다.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던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가 스웨터 속에 입은 셔츠는 앞단추가 달려 있는 덕분에 겨우 조각조각 나버리는 운명을 피할 수 있었다. 그는 재빠른 손놀림으로 속옷까지 완전히 벗겨낸 다음 벌거벗은 상체가 드러나자 혹시라도 갈비뼈가 부러지진 않았는지 하나하나 만져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눈에로는 혹시나 통증을 호소하는지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살펴보았다.

[하마터면 당신을 죽일 뻔했군.]

리스는 그녀를 안아들고 일어서며 목멘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끔찍하진 않았어요.]

그 와중에도 위로를 잊지 않는 그녀에게 리스는 울화통을 터뜨렸다.

[당신은 의식을 잃었었다구!]

그는 2층으로 그녀를 데려가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는 다시 조심스럽게 그녀의 몸을 살피면서 나머지 옷가지를 몽땅 벗겨냈다. 다행히도 옆구리에 멍이 든 걸 제외하곤 별다른 상ㅇ처는 없는 듯했다. 그는 고개를 숙여 검푸르게 멍이 든 부분마다 입술을 갖다댔다. 마치 그렇게 하면 멍이 든 부분에 느껴지는 통증이 자신에게로 옮겨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매들린은 그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리스, 난 아무렇지도 않아요. 맹세해요.]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얼음 주머니를 대야겠소. 그래야 멍이 빨리 가라앉을 테니까.]

[난 싫어요. 안 그래도 추워 죽겠는데 얼음 주머니라니! 그보다는 커피나 뜨거운 코코아를 마시고 싶어요.]

그녀가 확고한 어조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자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얼굴에도 천천히 핏기가 돌아오고 있었다. 그녀는 멍이 든 옆구리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다행히 욱신거리기만 할 뿐 찌르는 듯한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는 그녀 쪽에서 그의 상태를 확인할 차례였다.

[그 험한 눈보라를 헤치고 먼 길을 왔으니 속옷까지 몽땅 젖었을 거예요. 당신도 당장 그 옷부터 벗어요. 그런 다음 뜨거운 커피를 마시는 거예요, 어때요?]

그녀는 리스가 젖은 옷을 벗고 수건으로 몸을 닦는 동안 얼른 서랍장에서 갈아입을 옷을 꺼냈다. 애써 신음을 삼키며 마른 옷으로 갈아입던 그녀는 조각조각 나버린 스웨터를 믿어지지 않는 듯한 얼굴로 쳐다보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리스는 그런 그녀의 표정을 보고 희미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혹시 어디 부러진 곳이라도 있을까 봐 그런 거요.]

그는 수건으로 어깨를 닦으면서 설명했다.

[사실 당신이 자른 게 스웨터뿐이어서 조금은 안심했었어요. 아주 잠깐이지만 혹시 당신이 내 목에 구멍을 내려고 달려드는 게 아닐까 걱정스러웠거든요.]

[당신이 숨을 쉬고 말을 했으니까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던 거요. 예전에 한 번 해본 적은 있지만.]

[주머니칼로 사람 목에 구멍을 뚫어본 적이 있다구요?]

그녀는 믿어지지 않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소. 일꾼 중 하나가 목을 정통으로 맞아서 숨을 쉴 수 없는 지경에 처했거든. 그래서 목에 구멍을 내서 손가락으로 연 다음 빨대를 꽂아 숨을 쉬게 만들었소. 나중에 병원으로 데려갔더니 의사들이 빨대를 빼고 대신 튜브를 꽂더군.]

[그런 응급 처치법은 언제 배웠어요?]

[목장주가 되면 그 정도는 배울 수밖에 없소. 어긋난 다리뼈를 맞추거나 찢어진 상처를 꿰매는 일은 다반사고, 심지어는 해독 주사까지 놔야 할 때도 있으니까. 귀염둥이, 내가 말했잖소. 여기 생활은 꽤나 거칠다고.]

그의 얼굴이 점차 어두워졌다. 그녀에겐 목장 생활이 너무 거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만약 그녀를 좀더 세게 붙잡았다면 아예 갈비뼈가 부서져 버렸을지도 몰랐다.

마른 속옷으로 갈아입고 그녀가 꺼내놓은 청바지를 걸친 리스는 브러시로 머리를 빗고 잇는 그녀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녀의 모든 동작은 발레리나처럼 우아했다. 그런 지독한 일을 겪고도 어떻게 저토록 우아해 보일 수 있는지 경이로울 정도였다. 그런데 저 차분한 태도는 대체 뭐란 말인가! 난 아직도 몸이 덜덜 떨리는데 말이다!

그녀가 아래층으로 내려가려고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가지 그는 그녀를 와락 끌어당겨 풍성한 머리채에 얼굴을 묻었다. 매들린 역시 그의 허리에 팔을 두른 채 그에게 바짝 매달렸다. 그가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가슴 깊이 되새기면서.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서로를 껴안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던 것이다.

리스는 틈틈이 창 밖을 내다보며 나머지 시간을 보냈다. 라디오에선 계속 똑같은 일기 예보가 흘러나왔다. 날이 저물 무렵 전기도 나가버렸다. 그는 벽난로에 불을 피우고 부엌에는 석유 난로를 켰다. 매들린도 양초와 등유 램프에 불을 밝혔다. 온수와 난방이 가스 보일러로 작동되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들은 촛불 아래서 수프와 샌드위치를 먹고 벽난로 앞에 자리를 폈다. 그리곤 소파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쭉 뻗은 채 퀼트 이불 위에 앉았다. 매들린은 리스의 어깨에 살며시 고개를 기댔다. 그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하고 미리 선수를 쳤다.

[참새 꼬리처럼 끝이 뾰족한 깃발을 '삼각지'라고 부르지.]

그녀는 그를 향해 즐거운 듯 미소를 지었다.

[기병대 앞에서 행렬을 선도하는 깃발 역시 '기병대 삼각지'라고 부르죠.]

[어디 한 번 해보겠다는 거요? 알았소. 깃발에 대한 연구는 '기학'이라고 하오.]

[성조기에는 빨간 줄이 일곱 개, 하얀 줄이 여섯 개죠.]

[그건 반칙이오. 뻔히 다 아는 얘기잖소.]

[그래도 사실은 사실이에요. 계속해요.]

[대나무는 지구상에서 가장 빨리 자라는 식물이야.]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인이 아니라 마케도니아 사람이었어요.]

그들은 한동안 서로가 알고 있는 황당하고 신기한 상식들을 겨루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곧이어 옷 벗기 카드 내기를 벌였다. 하지만 카드 게임은 오래가지 않았다. 일단 그를 완전히 벌거벗기고 나자 카드 게임에 그만 흥미를 잃고 말았던 것이다.

그녀는 곧 카드를 던져버리고 좀더 흥미롭고 자극적인 쾌락에 몸을 맡겼다. 두 사람은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 앞에서 사랑을 나누며 그들만의 세계로 잠겨들었다.

다음날 아침, 드디어 눈보라가 잦아들었다. 전기도 다시 들어왔고, 기온이 점차 상승할 거라는 일기 예보도 나왔다. 리스는 그반가운 소식을 듣자마자 곧장 가축들을 살펴보러 나갔다. 다행히 소들은 무사했다. 단지 어미 소 곁에서 떨어져 나간 송아지 한 마리만 잃었을 뿐이었다. 그는 어미 소의 구슬픈 울음 소리를 따라가 눈밭에 죽어 있는 가엾은 송아지를 찾아냈다. 그 자그마한 녀석을 따엥 묻은 리스는 잔뜩 찌푸린 잿빛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번 겨울을 무사히 보낼 수 있기를 빌었다.

그는 얼마 전에야 겨우 빚더미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얻었다. 하지만 아직은 안심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은행 융자를 갚을 돈뿐만 아니라 가축 수를 늘리고 새로 일꾼을 고용할 자금도 필요했다. 변덕스런 날씨와 기복이 심한 육우 시장 경기에 의존하지 않고도 이익을 낼 수 있어야만 안정적인 미래를 기대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되려면 앞으로도 몇 년은 더 고생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제 매들린이 아기를 갖게 되면 의료비도 고려해야 했고, 아이를 키우는 데 드는 비용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어쩌면 로버트의 제의를 받아들였어야 했던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면 그가 계획했던 일도 당장 실행에 옮길 수 있었을 것이고, 매들린과 곧 태어날 아이를 풍족하게 돌볼 수 있는 여유도 생겼을 것이다. 하지만 로버트의 제의를 받아들이기엔 이미 너무 많은 일을 겪은 후였다.

목장은 그의 살이자 피 같은 존재였다. 그런 목장을 잃을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느니 차라리 목숨을 버리는 게 훨씬 나았다. 그의 조상들이 인디언의 습격과 원인 모를 질병, 그리고 변덕스런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이곳을 지킬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이 땅의 모든 것을 지키려는 소유욕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런 조상들의 피를 이어받은 리스가 어찌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이곳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 무슨 일이 있어도 난 이곳을 지킬 거야!]

그는 새하얀 눈으로 덮인 대지에 대고 크게 소리쳤다. 이 광활한 대지가 요구하는 건 바로 리스 자신처럼 불굴의 의지를 지닌 남자였다. 불굴의 의지와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 자만이 모든 고난을 극복하고 이 황량한 대지를 일구어 낼 수 있으리라. 이 대지는 또한 강인한 여자를 필요로 했다. 매들린은 그가 생각했던 아내감은 결코 아니지만, 누구보다도 강한 여자라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런 그녀를 돌보는 게 너무나도 만족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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