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새벽 4시 반에 자명종 시계가 울렸다. 한참을 뒤척이던 리스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자명종을 끄고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스탠드를 켰다. 곤히 잠들어 있던 매들린은 갑자기 환한 불빛이 쏟아지자 눈이 부신 듯 짜증스런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알몸으로 당당하게 욕실로 향하는 그의 뒷 모습이 보이자 그녀는 황급히 침대에서 뛰어내려 서둘러 옷을 걸치기 시작했다.
그녀가 막 청바지에 발을 꿰는 순간 리스가 세수를 마치고 욕실에서 나왔다. 그녀는 아직 청바지로 가려지지 않은 자신의 맨 다리에 그의 시선이 쏟아지는 걸 의식하며 황급히 바지를 걸치고 단추를 잠갔다.
이른 새벽의 고요한 어둠 속에서 스탠드 불빛만이 비치는 가운데 그의 알몸을 보는 건, 지난 밤 그와 나누었던 행위만큼이나 은밀하고 친근한 기분을 느끼게 만들었다. 단지 그와 섹스를 나누었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서로 상대방의 벌거벗은 모습을 아무렇지도 않게 볼 수 있고, 또 같이 옷을 갈아입는 그런 평범한 일상 생활을 함께 누릴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는 게 그런 느낌을 주는 것 같았다.
그는 옷을 입으면서 브러시로 머리를 빗는 그녀의 모습을 계속 훔쳐보았다. 한 번 머리를 빗어내릴 때마다 그녀의 가냘픈 몸이 여성적인 우아함의 극치를 보여주듯 살짝살짝 흔들리는 모습에서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문득 지난밤 그녀의 몸 속에서 얼마나 강렬한 쾌감을 느꼈는지에 생각이 미치자, 즉시 그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몸의 중심이 단단하게 솟아올랐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를 가질 수 없다. 지난밤의 일로 아직 온몸이 욱신거릴 테니까. 곧이어 어젯밤 격심한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을 줄줄 흘리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면서 자기 마음이 얼마나 아팠는지도.
그래, 난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어. 그는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그녀는 이제 브러시를 내려놓고 침대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구겨진 침대 시트를 매끈하게 펼 생각으로 이불을 들어올린 그녀의 눈에 시트 한가운데 묻은 붉은 자국이 보였다. 순간 그녀는 동작을 멈추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리스 역시 그 자국을 발견했다. 그는 자기처럼 그녀도 환희에 가까운 심정을 느끼고 있을지, 아니면 자신이 겪여야 했던 아픔만 떠올리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다음번엔 괜찮을 거요.]
그는 얼른 침대 시트를 벗겨내 둘둘 말았다. 그녀의 새침한 표정을 보자 그녀를 안고 마구 흔들어 주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녀가 원했다면 어떻게든 그녀 역시 황홀함을 느낄 수 있도록 손을 썼을 터였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그럴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녀가 자신을 완전히 그에게 맡겼다면 과연 그가 욕구를 조절할 수 있었을지 장담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지난밤 그 자신의 욕구를 조심스럽게 억제하면서 그녀를 사랑했어야 했던 탓에 그의 욕망은 아직 충분히 채워지지 못한 상태였다. 조심하지 않으면 그녀에게 완전히 빠져버리는 실수를 저지르게 될지도 모른다. 그 말은 결국 언제가 되든 자신의 욕망을 충분히 채울 수는 없다는 뜻이 아닌가! 그는 갑자기 짜증스런 표정으로 시트를 바닥에 내 팽개쳐 버렸다.
[아침 일과를 마치고 올 테니 그동안 식사 준비를 해놓으시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던 매들린이 막 문을 열고 나가려던 그를 불러 세웠다.
[잠깐만요! 혹시 핫 케이크 좋아해요?]
[좋아하오. 양이 많으면 더 좋고.]
리스는 그 말과 함께 곧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녀는 하품을 하면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는 곧장 부엌으로 가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디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는 낯선 부엌에서 아침 준비를 하려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던 것이다.
일단 커피부터 끓여야겠지? 얼른 식탁 위에 놓여 커피 메이커를 살펴보니 다행히 커피 원두만 넣으면 자동으로 커피를 내릴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녀는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때 그가 꽤 진한 커피를 마시던 걸 기억해 내곤 커피 원두를 평소 자신이 마시던 양보다 두 배는 더 넣었다.
베이컨과 소시지도 양을 얼마나 만들어야 할지 고민이었다. 온종일 목장 일을 하는 남자라면 하루에 적어도 4, 5천 칼로리 정도는 섭취해야 할 것이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녀는 일단 좀 지나치게 많다 싶을 정도로 준비하기로 결정했다.
부엌 가득히 진한 커피 향과 고소한 베이컨 냄새가 떠돌 무렵 그녀는 요리라는 게 상당히 머리를 써야 하는 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극히 기본적인 요리밖에 할 줄 모르는 그녀로선 아무래도 당분간 요리책을 옆에 끼고 살아야 할 것 같았다.
핫케이크를 만드는 것도 그랬다. 지금껏 슈퍼마켓에서 파는 핫케이크 가루로 간단하게 만들어 먹기만 했던 터라 그냥 밀가루로 어떻게 핫케이크를 만들어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그녀는 일단 찬장을 뒤져보기로 했다. 다행히도 리스가 사다둔 핫케이크 가루를 발견한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서둘러 반죽을 만들고 핫케이크 위에 뿌릴 시럽을 준비했다. 이제 그가 돌아오는 대로 핫케이크를 굽기만 하면 된다. 그녀는 리스가 돌아오길 기다리며 식탁을 차렸다.
그가 집 안으로 들어선 건 그녀가 막 식탁 위에 한 접시 가득 구운 베이컨과 소시지, 그리고 우유 한 잔을 올려놓고 있을 때였다. 그녀는 부엌으로 들어서는 리스를 발견하곤 서둘러 프라이팬을 달구기 시작했다. 그는 신선한 생우유가 들어 있는 커다란 통을 조리대 위에 올려놓고 손을 씻었다.
[아침 식사를 언제쯤 먹을 수 있겠소?]
[2분만 기다려요. 핫케이크만 구우면 되니까.]
그녀는 달구어진 팬에 국자로 핫케이크 반죽을 떠넣었다.
[커피는 직접 따라 드세요.]
그는 머그잔을 꺼내 커피를 따른 다음 가스 레인지 옆 찬장에 기대서서 그녀가 핫케이크를 굽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잠시 후 매들린은 다 구워진 핫케이크 넉 장을 접시에 담아 그에게 내밀었다.
[시럽은 식탁 위에 있어요. 난 나머지 핫케이크를 구워야 하니까 당신 먼저 드세요.]
그는 입맛을 다시며 핫케이크 접시를 들고 식탁으로 갔다. 그리고는 그녀가 다음 핫케이크를 미처 다 굽기도 전에 벌써 첫 번째 접시를 깨끗이 비워버렸다. 매들린은 두 번째 핫케이크 접시를 식탁으로 갖다주고는 또다시 걸쭉한 반죽을 프라이팬에 떠넣었다. 도합 열두 장째였다. 대체 얼마나 더 만들어야 할까?
하지만 리스는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겨우 열 장으로 끝을 냈다. 그녀는 나머지 핫케이크를 먹을 작정으로 의자를 잡아당겨 그의 옆에 앉았다.
[오늘 할 일이 뭐예요?]
[서쪽 방목장의 울타리를 점검해야 하오. 그쪽 목초지에 소떼를 풀어놓을 작정이거든.]
[그럼 점심 시간에 맞춰 돌아올 건가요, 아니면 샌드위치를 싸줄까요?]
[샌드위치로 하지.]
말에 안장을 얹고 서쪽 방목장으로 나가기 전까지 리스와 나눈 대화는 그게 전부였다. 아침 식사를 하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다는 그녀의 꿈은 허무하게 끝났다. 그는 오늘 아침 아예 키스도 하지 않았다. 그에게 할 일이 많다는 건 잘 알고 있지만, 아침 키스를 나누는 것 정도는 그리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도 아니지 않은가!
결혼식 다음날 아침치고는 너무 무미건조한 분위기였다. 매들린, 그럼 뭘 기대했니? 그녀는 스스로를 나무랐다. 리스가 무슨 생각으로 너와 결혼한 건지 잘 알잖아!
게다가 그는 그녀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싶어하는 게 분명했다. 그 거리를 좁히기까진 꽤나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동안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목장주의 아내가 되는 법을 배우는 것뿐이리라. 그가 아침 키스를 해주지 않았다고 섭섭해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녀는 서둘러 부엌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바닥을 닦고, 오븐 청소를 하고, 대형 냉장고도 깨끗이 정리했다. 그리고 식품 저장실에 쌓여 있는 식료품들의 목록을 작성하고 쇼핑 리스트도 만들었다. 그 일을 다 마치고 보니 어느새 점심 시간이 다 되어 있었다.
그녀는 점심 대신 간단히 요기를 하고 빨래를 시작했다. 그 다음엔 2층으로 달려 올라가 침대 정리를 해야 했다. 종종걸음으로 다시 아래층에 내려온 그녀는 진공 청소기로 집 안 구석구석에 쌓인 먼지를 걷어내곤 곧바로 욕실 청소를 시작했다. 세 개나 되는 욕실을 차례차례 깨끗이 청소하고 나니 다음엔 옷 수선이 기다리고 있었다. 떨어진 셔츠 단추를 꿰매고 찢어진 작업복을 수선하다 보니 문득 그의 아내가 아니라 가정부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고 매일같이 강가에서 로맨틱한 피크닉이나 즐기고 파티에나 참석하는 그런 생활을 기대했던 건 아니지만 말이다. 결혼은 낭만이 아니라 생활이라고 하지 않던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결혼한 지 하루도 안 돼 이렇게 일에 파묻혀 살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던 게 사실이었다. 아니, 그녀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앞으로는 매일같이 어젯밤처럼 그와 한 침대에 들어 그의 정열을 온몸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 역시 충격적이긴 마찬가지였다. 섹스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건 아니지만, 현실적으로 남녀간의 사랑 행위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탓이었다. 그는 조금만 지나면 좋아질 거라고 했고, 그녀 역시 곧 그의 말대로 될거라는 예감은 들지만 말이다.
그녀는 미리 목장으로 부쳐 보냈던 짐 상자를 열고 오디오 세트와 즐겨 읽던 책들을 꺼내 거실에 들여놓았다. 문득 시계를 보니 벌써 저녁때가 다 된 시간이었다. 리스가 돌아올 때가 다 됐는데도 아직 저녁 준비를 해놓지 못한 것이다.
그녀는 하던 일을 멈추고 부엌으로 달려들어갔다. 뭘 만들지 미처 생각도 못해둔 상태였지만, 아까 오전에 식품 저장실에 있는 재료를 파악해 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냉동실에 들어 있는 거라고는 꽁꽁 언 스테이크 고기 몇 덩어리와 냉동 제품인 폭찹 한 봉지가 전부였다. 그녀는 폭찹의 비닐 포장을 벗겨 전자 레인지에 해동시키면서 머릿속으로 쇼핑 목록에 몇 가지 물건을 더 추가했다. 만약 전자 레인지가 없었다면 아마 상당히 곤란한 지경에 처했을 거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뒷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을 때쯤 그녀는 꽤 많은 양의 감자 껍질을 막 다 벗긴 참이었다. 리스가 부츠의 먼지를 털면서 피곤한 듯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곧장 부엌으로 들어서던 리스는 텅 빈 식탁을 발견하곤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섰다.
[왜 아직 저녁이 준비되지 않은 거지?]
그는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조용히 물었다.
[저녁 준비를 좀 늦게 시작했거든요. 바쁘게 움직이다 보니까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더라구요.]
[내가 돌아오는 시간에 맞춰 식사를 준비하는 게 당신의 의무라는 걸 몰랐소? 내가 지금 얼마나 피곤하고 배가 고픈지 아시오?]
그의 질타가 그녀를 매섭게 후려쳤다. 하지만 그녀는 그저 묵묵히 껍질을 다 벗긴 감자를 씻기 시작했다.
[되도록 서두를게요. 일단 샤워부터 하고 오세요.]
그는 쿵쾅거리며 계단을 올라갔다.
그녀는 이를 악문 채 감자를 썰어 스튜 냄비에 집어넣었다. 그가 그렇게 지쳐 보이지만 않았어도 냅다 한 마디 쏘아붙였을 것이다. 하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먼지를 뒤집어쓴 채 어깨를 늘어뜨리고 있는 그를 보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완두콩 통조림을 따서 냄비에 통째로 붓고 양념을 했다. 폭찹은 이제 접시에 담기만 하면 될 테고, 빵은........ 이런, 빵은 커녕 비스켓도 없지 않은가!
그녀는 비스킷 만드는 법을 기억해 내려고 머리를 쥐어짰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다. 수백 번도 넘게 할머니가 비스킷을 굽는 광경을 지켜봤는데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다니! 그녀는 서둘러 요리책을 펼쳐들고 비스킷 만드는 법을 찾아보았다.
책에 적힌 요리법을 보자 곧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녀는 밀가루를 골고루 섞고 끈기가 생길 때까지 열심히 치댄 다음 반죽을 넓게 폈다. 그리고는 비스킷 틀 대신 유리컵을 사용해서 동그랗게 잘라낸 다음 오븐에 넣고 굽기 시작했다.
이제 디저트만 준비하면 된다. 그녀는 가게에서 파는 컵 케이크가 식품 저장실에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내곤 컵 케이크와 복숭아 통조림을 꺼내왔다. 그리고는 깡통 따개를 찾아 통조림을 따고 그 안에 든 내용물을 그릇에 쏟았다.
리스는 그녀가 식탁을 차리기 시작할 무렵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조금 전과는 달리 깨끗하게 씻긴 했지만, 기분은 여전히 엉망인 듯했다. 그는 심통 사나운 얼굴로 음식이 다 차려져 있지 않은 식탁을 흘끗 쳐다보고는 곧장 거실로 가버렸다.
그녀는 초조한 얼굴로 스튜 냄비를 들여다보았다. 감자가 완전히 익으려면 조금 더 끓여야 할 것 같았다. 오븐 타이머가 울리자 그녀는 얼른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비스킷을 꺼냈다. 적당히 부풀어오른 비스킷이 꽤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맛은 어떨까? 그녀는 요리책에 적힌 방법대로 했으니 그렇게 맛이 나쁘지는 않을 거라고 자위했다.
매들린은 식탁에 준비한 음식을 다 차리고 돌아서서 행운을 비는 뜻으로 손가락을 가슴 위로 교차시켜 십자가를 그린 다음 리스를 불렀다.
[리스, 어서 오세요! 저녁이 다 준비됐어요!]
[그럴 때도 됐다고 봐.]
리스는 심술궂은 얼굴로 비아냥거리며 부엌으로 건너왔다.
매들린은 그제서야 미처 커피를 준비하지 못했다는 걸 깨닫고 대신 우유를 한 잔 따라 식탁으로 가져갔다.
폭찹과 스튜는 그런 대로 맛이 괜찮았고, 비스킷도 약간 두텁긴 했지만 맛은 좋았다. 하지만 그는 배가 몹시 고팠던 듯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꾸역꾸역 먹고만 있었다. 수북히 쌓여 있던 비스킷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녀는 겨우 한 개만 먹었을 뿐인데 말이다. 그가 감자 스튜를 세 그릇째 깨끗이 비우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디저트도 드실래요?]
그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디저트?]
그녀는 7년 동안 혼자 살았다는 사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한 그의 표정에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대단한 건 아니에요. 제대로 준비할 시간이 없었거든요.]
그녀는 작은 접시에 컵 케이크를 담고 그 위에 복숭아를 얹은 다음 통조림 국물을 끼얹었다. 리스는 그녀가 디저트 접시를 내려놓자 미심쩍은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먹어봐요.]
그려는 생긋 웃으며 디저트를 권했다.
[인스턴트 제품이지만 맛은 괜찮을 거예요.]
리스는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디저트 접시를 싹싹 비웠다.
식사를 마치고 나자 그의 안색이 좀 제대로 돌아온 것 같았다.
[오디오가 꽤 좋더군.]
[내가 아끼는 물건 가운데 하나예요. 여기까지 오는 동안 혹시 고장이라도 나지 않았는지 모르겠어요.]
그의 오디오는 몇 년 전 이미 팔려나간 상태였다. 그때 그는 음악보단 돈이 더 절실하다고 판단을 내렸고, 그 이후로는 결코 그 판단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려 하지 않았다. 생존을 건 투쟁에 뛰어든 사람은 금세 우선 순위를 결정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는 법이다. 그러나 음악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는 언젠가는 다시 음악을 듣게 되는 날이 오리라는 기대로 즐겨듣던 클래식 음반을 거실 한구석에 소중히 간직해 두었다.
집안은 그녀가 하루 종일 수고한 덕분에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식사 준비를 해놓지 않았다고 그녀에게 소리를 질렀던 게 미안할 정도였다. 지난 몇 년 동안 한 번도 손을 대지 못해 얼룩덜룩 때에 절어 있던 마룻바닥도 깨끗이 닦여 있었고, 가구 역시 마찬가지였다. 집 안 가득 청소용 세제와 가구 광택제 향기가 풍겼고, 욕실도 눈이 부실 정도로 반짝반짝했다. 단 하루 만에 후줄근했던 그의 집이 침실이 열 개나 있는 전형적인 목장주의 저택으로 완전히 탈바꿈한 것이다. 비록 화려한 도시 여자이긴 했지만, 매들린은 확실히 일하는 법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식탁을 치우는 아내를 돕다가 냉장고에 붙여둔 메모지를 발견하곤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저게 뭐요?]
매들린은 그의 시선을 따라가 뭘 묻는 건지 확인했다.
[쇼핑 목록이에요. 식품 저장실이 거의 비어 있기에.......]
그는 무안함을 감추기 위해 어깨를 으쓱했다.
[평소엔 그냥 샌드위치로 때우곤 했거든.]
[가장 가까운 슈퍼마켓이 어디예요? 설마 빌링스까지 나가야 하는 건 아니겠죠?]
[여기서 30킬로미터 정도 가다보면 가게가 하나 있소. 슈퍼마켓은 아니지만 기본적인 식료품은 거의 다 있지. 내일 모레쯤 나랑 같이 갑시다. 소떼를 이동시키기 전에 울타리 손질을 마쳐야 하기 때문에 내일은 시간이 없으니까.]
[가는 길만 가르쳐 주면 돼요. 지금 있는 걸로는 내일 모레까지 못 버틸 것 같으니까.]
[난 당신이 혼자서 여기저기 돌아 다니는 게 싫소.]
그는 퉁명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않을게요. 그러니까 가는 길만 가르쳐줘도 돼요.]
[그냥 내일 모래까지 기다려요. 혼자 나갔다가 차라도 고장나면 큰일이니까.]
[그럼 트럭을 가져가면 되죠.]
[아니, 내일 모레 나랑 같이 가는 거요. 그냥 내 말대로 하시오. 알겠소?]
매들린은 그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2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대체 저 남자는 왜 저렇게 고집이 센 걸까? 마치 내가 무슨 쇼핑을 핑계로 하루 종일 밖에 나가 노닥거리다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 않은가! 혹시 전처가 그랬기 때문에 날 의심하는 건 아닐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난 평생 동안 에이프릴이 지은 죄의 대가를 대신 치르며 살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녀는 대충 샤워를 마치고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가 올라오지 않자 옷 가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당장 입을 옷만 이 방에 두고 나머지는 다른 방 옷장에 보관하려고 따로 분류하다 보니, 결국 이 방 옷장에 간수할 옷은 몇 가지밖에 없었다. 여기선 뉴욕에서 입던 옷들이 거의 쓸모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몇 가지 안 되는 옷이나마 리스의 옷과 나란히 걸려 있는 걸 보니 기분이 묘했다. 물론 대학 기숙사에서 지냈을 때도 다른 친구들과 옷장을 같이 쓰긴 했지만, 지금은 좀 경우가 다르지 않은가! 게다가 좀더 심각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평생 이런 광경을 보게 될 테니 말이다.
새벽 4시 반에 기상한 경험에 대한 소감은 저녁 8시도 안 돼 잠이 쏟아진다는 거였다. 물론 지난 2주 동안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데다 하루 종일 분주히 몸을 움직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어쨌든 지금은 겨우 눈을 뜨고 있는 게 고작이었다.
옆방 옷장에 옷들을 걸던 그녀는 리스가 침실로 들어가는 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잠시 후 그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매디?]
평소보다 가라앉은 음성이었다.
[여기요.]
그녀는 목소리를 높여 대답했다.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따라 방으로 들어서던 리스는 침대 위에 잔뜩 쌓여 있는 옷 더미를 발견하곤 대뜸 사나운 표정으로 따져 물었다.
[지금 뭘 하는 거요?]
그의 어깨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어딘가 모르게 긴장한 기색이 느껴졌다.
[별로 입을 일이 없을 것 같은 옷들만 이 방에 따로 걸어두고 있었어요. 자주 입을 옷도 아닌데 쓸데없이 공간을 차지하면 괜히 정신만 산란하잖아요.]
[잘 준비는 다 됐소?]
[네. 나머지는 내일 정리하죠, 뭐.]
리스는 그녀가 밖으로 나가기를 기다렸다가 불을 끄고 방문을 닫은 다음 복도로 나왔다. 어젯밤에 입은 것과 비슷한 잠옷을 걸친 채 맨발로 걸음을 옮기는 매들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매들린은 자신의 뒤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는 그의 존재를 감지한 순간 다시금 가슴이 답답해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는 그녀보다 최소한 30센티미터는 더 큰 데다 몸무게 역시 아무리 날렵한 몸매라 해도 90킬로그램에 육박하는 거구의 남자였다. 그런 그와 한 침대에 누울 생각만 해도 주눅이 들었다. 하지만 곧 그와 함께 침대에 드는 데 익숙해질 것이다. 그는 그녀와의 결혼 생활이 얼마 가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그녀로선 천만의 말씀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이번 잠자리는 그리 고통스럽지 않았다. 덕분에 그녀는 그의 애무에 따라 따뜻한 열기에 휩싸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어느 정도 긴장이 풀리고 보니 뭔가 이상한 게 느껴졌다. 그가 감정을 배제한 채 그녀와 사랑을 나누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 것이다. 일정 한도 내에서 최대한 즐거움을 추구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고나 할까?
매들린은 그가 자신을 원해서 사랑을 나누는게 아니라 그저 본능적인 욕구를 해소하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그에게 있어서 그녀는 그저 욕망을 해소하기 위한 존재에 불과하단 말인가!
이건 전쟁이다. 그의 마음을 획득하기 위한 전쟁 말이다. 그녀는 완벽한 전술을 궁리하다가 스르르 잠에 빠져들었다.
[오늘은 당신이랑 같이 일하러 가고 싶어요.]
그녀는 다음날 아침 식사를 하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꺼냈다. 하지만 그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제안이라는 듯 고개도 들지 않았다.
[당신이 할 만한 일이 아니오.]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아요?]
그녀는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제야 리스는 포크를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왜냐하면 남자들도 거의 다 나가떨어질 정도로 고된 일이기 때문이오.]
짜증이 섞인 어조였다.
[하지만 오늘은 울타리를 고칠 거라면서요. 철사로 울타리를 엮는 일 정도면 얼마든지 도울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안 그래요? 그것도 안 되면 그냥 당신 말동무를 해줘도 되구요.]
말동무라니! 리스가 지금 가장 원치 않는 게 바로 그거였다. 그녀와 오랜 시간 같이 있으면 결국 그녀와 사랑을 나누고 싶은 충동에 굴복하고 말 것이다. 그는 이미 하루에 한 번, 그것도 밤에만 그녀를 안기로 결심을 굳힌 상태였다. 그래야 지금처럼 자신이 주도권을 쥔 채 그녀와의 관계를 유지해 나갈 수 있을 테니까.
[울타리 수리는 두 시간이면 끝나오. 그 다음엔 소떼를 이동시킬 거요.]
[전에도 말했지만 난 말을 탈 줄 알아요.]
그는 귀찮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마지막으로 말을 타본 게 언제지? 게다가 그때도 잘 정비된 오솔길을 따라 얌전한 말을 타고 달려본 게 고작이었을 거요. 말을 타고 소떼를 모는 일은 그런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고된 일이란 말이오, 알겠소? 내가 가진 말들은 모두 소몰이용으로 훈련받은 놈들이오. 그런데 그렇게 거친 놈을 타고 넓은 황야를 달리겠다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시오!]
[안 그래도 1년 만에 말을 타는 거라서 미리 근육통에 쓸 연고도 준비해 왔다구요. 그러니 아무 문제 없을 거예요. 게다가 어차피 나도 익숙해져야 하는 일이잖아요.]
[당신이 옆에 있으면 괜히 방해만 될 거요. 그러니 집에서 저녁 준비나 하시오. 집에 돌아오는 대로 저녁을 먹을 수 있게 해주는 것도 날 돕는 일이란 말이오.]
그녀는 허리에 손을 척 올리고 눈을 가늘게 떴다.
[리스 던컨, 난 당신과 함께 일하러 나갈 거예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그렇게 하고야 말 테니까. 더 이상 아무 말도 말아줬으면 고맙겠어요.]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여긴 내 목장이라는 사실을 똑똑히 명심하시오. 여기선 내 말이 곧 법이라는 사실도 잊지 말고. 당신이 내 아내인 건 사실이지만, 그게 모든 일에 이래라저래라 할 권리가 있다는 뜻은 아니니까 말이오! 그러니 이제 내 말대로 따르는 게 좋을 거요. 목장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당신은 집안 일이나 하는 거요, 알겠소? 그건 그렇고 오늘 저녁은 모처럼 닭튀김을 먹고 싶군. 가능하겠소?]
[하지만 닭튀김을 하려고 해도 닭고기는커녕 그 비슷한 것도 없는 걸요.]
그녀는 고소해 죽겠다는 얼굴로 대꾸했다.
[그렇다고 장을 보는 것도 안 된다니, 결국 닭튀김은 불가능하다는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겠군요.]
그는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창 밖을 가리켰다.
[저기 마당에서 돌아 다니고 있는 건 닭이 아니고 뭐란 말이오. 설마 비닐 포장이 된 채 슈퍼마켓 냉장고에 들어 있는 것만 닭고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도시에서 온 순진한 아가씨?]
매들린은 원래 누가 건드리지만 않으면 특유의 여유 있는 걸음걸이 만큼이나 느긋하고 차분한 성격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은 아니었다. 그가 마침내 그녀를 인내심의 한계까지 몰아붙인 것이다!
[지금 나더러 살아 있는 닭을 잡으라는 건가요?]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당신은 내가 스스로 목장 일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는 얼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만들고 싶었을 거예요. 그래서 그런 말을 하면 내가 이 자리에서 항복해 버릴 거라고 생각했겠죠. 안 그래요? 좋아요, 당신이 이겼어요. 당신은 오늘 저녁 바라던 대로 닭 요리를 먹게 될 거예요. 하지만 털도 뽑지 않은 생닭을 먹게 만들었다고 날 원망하는 일은 없길 바라요. 난 단지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한 것뿐이니까 말이에요, 알겠어요?]
그녀는 몸을 홱 돌려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리스는 무거운 망치로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매들린이 저렇게 재빨리 움직이는 모습을 보기는 처음이었던 것이다.
매들린은 그가 울타리를 고치는 데 쓸 자재와 연장을 트럭을 거의 다 실었을 무렵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막 트럭 운전석에 올라타려던 리스는 뒷문이 쾅 하고 닫히는 소리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다음 순간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낡은 청바지로 갈아입고 무릎과 팔꿈치에 보호대를 찬 채 운동화까지 챙겨 신은 매들린의 모습이 보였던 것이다. 그녀는 아직 화가 풀리지 않은 듯 그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고 곧장 마당 한가운데로 갔다.
리스는 엄지손가락을 벨트 고리에 건 채 트럭에 기대서서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런 그녀를 지켜보았다.
그녀는 그 중 순해 보이는 암탉 한 마리를 골라 천천히 접근을 시도했다. 그녀가 한 손에 쥐고 있던 사료를 뿌리며 녀석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하자 그는 내심 감탄했다.
하지만 그녀는 적당한 기회가 올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서둘러 행동에 나서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기겁을 한 암탉이 요란하게 꼬꼬댁거리며 사력을 다해 도망쳤다. 매들린은 얼른 그녀석의 뒤를 쫓아 마치 다이빙이라도 하듯 몸을 날렸지만 간발의 차이로 암탉을 놓치고 말았다. 리스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저도 모르게 트럭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저러다가 혹시 상처라도 입진 않을까 걱정이 돼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암탉은 그녀의 마수를 피해 정신없이 도망을 치다가 결국엔 트럭 밑으로 뛰어들었다. 매들린은 녀석의 진행 방향을 예상하고 다시 몸을 던졌지만, 이번에도 아슬아슬하게 놓치고 말았다.
[매들린, 당신에게 닭을 잡으라고 했던 건 취소하겠소. 그러니 저놈는 포기하고 그만 집으로 돌아가요.]
하지만 그녀는 어느새 저쪽으로 가버린 후였다.
암탉은 이제 마당 한쪽에 심어진 나무 위로 뛰어오르려고 용을 쓰고 있었다. 녀석이 폴짝 뛰어오른 나뭇가지는 매들린의 머리보다도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녀는 잠시 눈을 가늘게 뜨고 곰곰이 궁리를 하더니 마침내 결정을 내린 듯 몸을 숙여 땅바닥에 굴러 다니는 돌멩이를 몇 개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닭을 겨냥해서 돌을 던졌다.
첫 번째 돌팔매질은 닭이 머리를 숙이는 바람에 실패로 돌아갔다. 그녀는 약이 바짝 오른 얼굴로 두 번째 시도를 했다. 하지만 그것 역시 녀석이 서 있는 바로 옆 나무 등걸을 맞히고 땅에 떨어졌다. 암탉은 바로 옆으로 돌이 날아들자 당황한 듯 정신없이 우왕좌왕했다. 매들린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서둘러 세 번째 돌을 던졌다. 이번에는 성공이었다. 다리에 돌을 맞은 암탉은 잠시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매들린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즉시 녀석에게 몸을 날렸다. 그리고 마침내 성과를 거뒀다. 돌멩이나 흙먼지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몇 번이나 과감하게 몸을 날린 끝에 결국 도망치려는 닭의 한쪽 다리를 잡는 데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닭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미친 듯이 몸부림을 치며 날개를 퍼덕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자기 다리를 잡고 있는 손을 날카로운 부리로 마구 쪼아댔다. 그녀는 잠시 실랑이를 벌인 끝에 암탉을 거꾸로 잡아들고 승리를 선언했다. 그녀의 손에서 피가 뚝뚝 흘렀다. 최후의 발악을 하듯 녀석이 마구 쪼아댔던 탓이었다.
[내가 아무리 느려도 그렇지, 너보다 느리기야 하겠니?]
그녀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녀석을 내려다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리스는 한 걸음 한 걸음 자신에게 다가오는 매들린을 그저 멍하니 지켜보았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마구 헝클어진 채 거의 눈을 다 가릴 정도로 흘러내려 있었고, 얼굴 역시 온통 먼지투성이였다. 게다가 입고 있던 윗도리는 흙먼지로 온통 얼룩이 진 데다 여기저기 찢어지기까지 한 게 아무리 세탁을 하고 수선을 해도 원래 상태로 돌아가긴 그런 것 같았다. 물론 청바지도 흙투성이이긴 마찬가지였고, 무릎 보호대도 한쪽 끈이 풀린 바람에 무릎 위에서 달랑거리고 있는 상태였다. 너무나도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지만, 그녀의 회색 눈동자에 어린 표정을 보자 도저히 웃을 수가 없었다.
[자, 당신 거예요. 어서 받아요. 이제 속이 시원해요?]
그녀는 그의 코앞에 멈춰선 채 이를 악물고 잇새로 말을 내뱉었다.
그는 얼떨결에 그녀가 내민 닭을 받아들었다. 녀석이 푸드득러리며 그의 가슴을 치자 그는 얼른 양쪽 날개를 한데 모아 쥐었다.
그녀는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곧장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쾅 소리가 나도록 현관문을 닫고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리스는 손에 쥔 닭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문득 녀석이 쪼아댄 바람에 피가 낭자하던 매들린의 손등이 떠올랐다. 다음 순간 그는 암탉의 목을 단숨에 비틀어 버렸다. 정말이지 기분이 더러웠다.
그는 죽은 닭을 들고 집 안으로 들어가 현관 한구석에 닭을 내려놓은 다음 곧장 부엌으로 향했다. 개수대 앞에 서서 상처 입은 손을 조심스레 닦고 있는 매들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디 한 번 봅시다.]
리스는 그녀의 등뒤에 바짝 붙어 섰따. 그가 그 자세에서 그대로 그녀의 손을 잡은 까닭에 그녀는 꼼짝없이 그에게 안긴 자세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빌어먹을 암탉이 얼마나 세게 쪼아댔는지 손등 여기저기에 피가 맺혀 있었다. 게다가 상처 주위는 파랗게 피멍이 들어 있었다. 리스 역시 이미 여러 번 그런 상처를 입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상처가 얼마나 쉽게 곪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깨끗한 수건으로 그녀의 손을 감쌌다.
[2층 욕실로 갑시다. 빨리 상처를 소독하고 연고를 발라야 덧나지 않지.]
[고맙지만 나 혼자 가도 돼요. 상처가 난 건 손이지 등이 아니니까 나 혼자서도 충분히 처치할 수 있다구요.]
하지만 말과는 달리 그의 강한 팔이 마치 강철 띠처럼 그녀를 감싸안고 있는 탓에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문득 자기보다 30센티미터는 더 큰 남자와 결혼한 게 실수였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는 오른팔을 그녀의 무릎 아래에 넣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안아올렸다. 매들린은 균형을 잃지 않기 위해 그의 어깨를 붙잡을 수밖에 없었다.
[내 다리로 걸어갈 수 있어요. 그 암탉이 쪼아댄 건 다리가 아니라 손이라구요.]
그녀는 다시 한 번 항의했다.
그는 경고라도 하듯 그녀를 노려보기만 했을 뿐, 여전히 그녀를 안아든 채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갔다.
[여자에게 강제로 힘을 행사하는 남자는 달팽이만도 못한 인간이에요.]
순간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이 주어졌다. 하지만 그것뿐, 그는 여전히 아무 대꾸도 없이 그녀를 안아든 채 욕실로 들어가서야 그녀를 내려놓았다. 그가 벽장문을 열고 구급 약품 상자를 꺼내는 사이에 그녀는 눈치를 살피며 문 쪽으로 살금살금 걸어갔다. 하지만 리스가 곧바로 한 손을 뻗어 그녀를 다시 원위치로 데려왔다. 그녀는 그에게 잡힌 팔을 빼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아무 소용없는 일이었다.
[나 혼자서도 할 수 있다고 했잖아요!]
그녀는 약이 바짝 올라 소리를 질렀다.
그는 아무 말도 못 들은 척 변기 덮개를 내리고 그위에 앉은 다음 그녀를 자기 무릎 위에 앉혔다.
[자, 소독을 마칠 때까지만 가만히 있어주지 않겠소? 일단 치료부터 합시다. 그 다음에라도 나와 싸우고 싶다면 그때는 기꺼이 상대를 해줄 테니까.]
매들린은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그가 상처를 소독해 주는 걸 지켜보았다. 소독이 끝나자 그는 상처에 항생제 연고를 바른 다음 일회용 반창고를 붙였다. 치료를 마친 후에도 그는 그녀를 무릎 위에서 내려놓으려 하지 않았다. 마치 다친 아이를 어르고 달래 간신히 치료를 끝내기라도 한 것처럼.
엉덩이 아래로 단단하게 솟은 그의 남성이 느껴지자 그의 무릎에서 내려오려고 한참을 꼼지락거리던 그녀는 결국 그가 자신을 놓아주지 않는 이상 혼자 힘으로 그의 무릎에서 내려오는 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일단 체념을 하고 나자 바로 지금이 그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그제서야 그의 눈동자가 순수한 초록색이 아니라 녹색과 푸른색이 주를 이룬 가운데 드문드문 검은색과 황금색 반점이 섞여 있는 오묘한 색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뺨과 턱에는 바로 어젯밤에 면도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하룻밤 사이에 벌써 거뭇거뭇하게 수염이 자라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끌로 깎은 듯한 그의 입술로 내려갔다. 그러자 갑자기 지난밤 그의 입술이 자신의 젖꼭지를 물고 부드럽게 빨아들이던 기억이 떠올랐다.
리스는 여전히 그녀의 몸에 팔을 두른 채 구급 약품 상자를 닫고 옆으로 치운 다음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당신, 얼굴이 지저분하군.]
[그럼 날 좀 일으켜 주지 않을래요? 그래야 얼굴을 씻든지 하죠.]
그는 그녀를 일으켜 주는 대신 자신이 직접 그녀의 얼굴을 씻어 주었다. 그리고는 마치 애무하듯 수건으로 천천히 그녀의 얼굴을 구석구석 부드럽게 닦아주었다.
수건이 유혹적으로 살짝 벌어진 그녀의 부드러운 아랫입술에 닿았다. 그는 수건을 그녀의 목 언저리로 가져가 노출된 빗장뼈 주위를 문지르더니 느슨한 상의 목선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녀는 가슴에 와닿는 젖은 수건의 차가운 감촉에 흠칫 숨을 멈췄다. 그는 수건을 앞뒤로 움직이며 천천히 그녀의 유두를 자극해 흥분시켰다. 그녀는 더한 자극을 바라듯 등을 활처럼 휘었다. 그의 단단한 남성이 부풀어올라 자신의 엉덩이를 압박하는 게 느껴졌다.
그는 젖은 수건을 세면대에 던져넣고 모자를 벗어젖힌 뒤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리고는 그녀의 등을 감싸고 있던 팔에 힘을 주어 더욱 세게 끌어안고 머리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공항에서 나눈 첫 키스와 똑같은 아찔한 느낌의 입맞춤이 이어졌다. 그때 이후로 그가 이런 키스를 한 건 처음이었다. 뜨거운 그의 혀가 곧바로 그녀의 입 안으로 밀려들었다. 그녀는 반갑게 그를 맞아들여 유혹하듯 부드럽게 그의 향취를 맛보았다.
그녀가 그의 강렬한 침입에 굴복하듯 그의 어깨에 고개를 떨어뜨리자 그는 그 기회를 틈타 다시 거센 키스를 퍼부으며 그녀의 셔츠 속으로 손을 넣어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의 손이 그녀의 풍만한 젖무덤을 부드럽게 주무르며 못이 박힌 손바닥으로 유두를 가볍게 비벼댔다. 그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의 입 안으로 신음을 토해내며 그를 향해 돌아서서 그의 목을 감싸안았다.
미칠 듯한 흥분이 아랫배에서 몰아치기 시작해 전신으로 퍼져갔다. 동시에 그녀의 몸 속 깊은 곳에서도 참기 어려운 긴장감이 옥죄기 시작했다.
거친 욕망의 신음과 함께 그는 그녀의 윗몸을 뒤로 젖히고 상의를 위로 끌어올려 맨가슴을 드러냈다. 그리고는 그녀의 장밋빛 젖꼭지 한 개를 혀끝으로 원을 그리듯 감았다. 단단해진 유두가 더욱 진한 색을 띠며 뾰족하게 일어섰다. 그는 곧바로 다른 한쪽 젖꼭지에도 같은 자극을 가했다. 그리고 그것 역시 뾰족하게 솟아오르는 모습을 즐거운 듯 지켜보았다.
[리스.]
매들린은 그를 움켜잡으며 애원하듯 그의 이름을 되뇌었다. 이토록 그를 절실히 필요로 하기는 처음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느낌이야말로 그를 처음 봤을 때부터 불타올랐던 정열의 실체인 게 확실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가 그녀의 유두를 물고 삼킬 듯한 기세로 사납게 빨아들이자 그녀는 다시 몸을 뒤로 젖혔다. 문득 그의 이빨과 혀, 그리고 입술이 민감한 가슴에 가하는 마법에 황홀한 듯 넋을 잃은 채 그의 무릎에 누워 있는 자신이 그에게 바쳐진 디저트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리스.]
그녀는 다시 그의 이름을 되뇌었다. 욕망으로 낮게 가라앉은 신음과도 같은 목소리였다. 그의 마음속에 내재된 모든 남성적인 본능이 그녀의 갈망 섞인 애원에 거세게 반응을 일으켰다.
리스는 그녀의 깊은 곳까지 단숨에 밀고 들어가 미칠 듯한 욕망으로 가늘게 떨고 있는 그녀의 몸을 가득 채우고 싶었다. 그녀가 채워지고 싶은 절박한 욕망에 휩싸여 있다면, 그는 그녀와 치렀던 단 두 번의 섹스로는 충분히 만족시킬 수 없었던 뜨거운 욕망에 휩싸인 상태였다. 그가 그녀에게 느끼는 욕망은 아무리 채워도 만족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만일 지금 그녀와 끝까지 가버린다면 다시는 그 욕망을 제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첫 번째 결혼에서 쓰라린 교훈을 얻었고, 지금껏 초라하기 그지없는 목장과 무너져 가는 집을 볼 때마다 계속해서 그 교훈을 되새기곤 했다.
그러나 매들린도 이미 말한 적이 있듯이 어쩌면 그녀는 에이프릴과 전혀 다른 여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그동안 쌓아둔 굳건한 방어막을 무너뜨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다시는 어떤 여자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그 맹세를 끝까지 지켜내리라.
눈썹 위에 땀이 송글송글 맺힐 정도로 애를 쓴 끝에 결국 그는 달콤한 그녀의 가슴에서 입술을 떼고 그녀를 바닥에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녀는 풍만하고 탄력 있는 가슴을 그대로 노출한 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는 그를 향해 팔을 벌리고 다가서며 마약과도 같은 유혹적인 광경을 연출했다. 하지만 그는 초인적인 의지력을 발휘해 그녀의 팔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그 결과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는 자세를 취한 채 어정쩡하게 서 있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녀는 부드러운 신음을 토해내며 그의 가슴에 고개를 떨구고는 애무하듯 얼굴을 비벼댔다.
그는 속으로 가슴을 덮고 있는 셔츠를 원망했다. 지금 당장 이 자리를 벗어나지 않으면 그녀에게 팔을 뻗고 싶은 욕구를 억제할 수 없으리라.
[난 할 일이 있소.]
그는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녀는 뒤로 물러서기는커녕 오히려 날씬한 하복부를 그의 남성에 밀착시킨 채 엉덩이를 천천히 흔드는 게 아닌가! 그는 자신의 남성이 그 자극에 대한 응답으로 한껏 부풀어오르는 걸 감지했다.
[매디, 이러지 마. 난 아직 할 일이 남았다구.]
[알았어요.]
그녀는 나지막이 속삭이며 아쉬운 듯 발꿈치를 들고 서서 그의 목덜미에 입술을 대고 스치듯 가벼운 키스를 남겼다.
그는 다음 순간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그녀의 엉덩이를 움켜쥔채 마치 맷돌을 갈 듯 자신의 남성을 거세게 밀어붙였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아쉬운 듯 그녀의 몸을 떼어내더니 모자를 집어들고 쫓기는 사람처럼 욕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녀가 충격에서 회복되어 그를 향해 손을 뻗기 전에 이곳을 벗어나야만 했던 것이다. 이번에는 그녀를 사랑하고픈 충동을 억누를 만한 의지 따윈 완전히 사라져 버린 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매들린은 그의 갑작스런 후퇴와 그로 인한 상실감에 혼란스러운 듯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잠시 후 겨우 혼란스런 감정을 수습한 다음에야 사태를 파악한 그녀는 분노와 고통의 신음을 흘리며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나쁜 자식, 망할 자식, 빌어먹을 자식! 날 열정의 나락으로 떨어뜨려 놓고는 그대로 나가버리다니!
그녀는 리스 역시 자신을 원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남성이 단단하게 일어서고 강철같이 단단한 근육이 바짝 수축하는 걸 분명히 느꼈던 것이다. 그는 이곳 욕실에서 그녀를 가질 수도 있었고, 침대로 데려갈 수 도 있었다. 그리고 만일 그랬다면 두 사람은 황홀감의 극치를 맛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대신 날 밀치고 나가버리다니! 그 역시 자제력을 상실하기 직전이었다고 생각했건만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녀는 번개에 맞은 듯 진실을 깨달았다. 그는 미칠 듯한 욕망에 휩쓸리기 직전에도 그녀를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증명하고 싶었던 것이다. 순간적인 욕구를 억제하지 못할 정도로 그녀를 절실히 원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 확인하고 싶었던 게 분명했다. 그래서 이렇게 그녀를 내버려두고 밖으로 나가버린 것이리라.
그와의 관계가 조금이라도 진전되려면 결국 그 강철 같은 자제력을 부수어 버릴 방법을 찾는 게 우선이라고 그녀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그 방법을 찾을 때까지 자신이 버틸 수 있을지가 문제였다.
그녀는 마침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무릎이 후들거리는 바람에 자주 계단 난간을 붙잡고 멈춰서야 했지만.
사방이 조용한 걸 보니 리스는 이미 나가버린 지 오래인 듯했다.
잠시 멍한 상태에서 주위를 둘러보던 매들린은 현관 한구석에 놓여 있는 죽은 암탉을 발견했다.
[내게 이런 일을 강요하다니, 언젠가는 이 대가를 치르게 하고야 말겠어!]
그녀는 이를 악물고 그 빌어먹을 암탉을 다듬어 요리하는 끔찍한 작업에 돌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