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컨의 청혼-4화 (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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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로부터 열 이틀 후, 두 사람은 빌링스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매들린은 완전히 녹초가 된 상태로 결혼식장 - 결혼식장이라고 해봐야 판사 집무실이었지만 - 에 도착했다. 전화로 리스에게 청혼을 받은 이후로 잠자는 시간까지 줄여가며 결혼식 준비를 한 탓이었다.

    지금껏 살아오며 모은 살림살이들 중에서 버릴 것은 버리고 꼭 필요한 물건들만 골라내는 작업은 예상외로 시간이 많이 걸렸다. 게다가 그 와중에 병원에 들러 건강 검진을 받고 진단서를 리스에게 보내는 일까지 해야 했다. 같은 날 리스가 보낸 건강 진단서를 받아들었을 때도 감탄할 여유조차 없었을 정도로 바쁜 상태였다.

    마침내 책과 앨범, 테이프와 CD, 그리고 겨울 옷가지 등 몇몇 짐을 목장으로 부친 날, 그녀는 리스가 곧 아내가 될 낯선 여자의 물건들이 자기 집을 점거하는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한 마음에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리스는 그녀가 짐을 보냈다는 얘기를 해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어쨌든 그런 식으로 정신없이 바쁘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빌링스로 날아갈 날이 되었다. 이제 그녀가 뉴욕으로 다시 돌아갈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그녀는 아쉬운 심정으로 뉴욕을 떠났다.

    리스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빌링스 공항까지 그녀를 마중 나왔지만 단지 그것뿐 의례적인 키스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애석해하기는커녕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동안의 강행군으로 몹시 피곤한 데다 신경이 날카로워진 상태인지라 그와의 결혼에 대한 회의까지 느끼고 있었던 탓이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을 본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한 걸 보면 결혼을 앞둔 신부들이 으레 경험한다는 일시적인 신경과민 현상이었던 게 분명했다.

    그녀는 결혼식을 치르기 전까지 닷새 동안 빌링스 시내의 모텔에서 지낼 작정이었다. 그러나 리스는 그녀의 계획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목장에서 묵으면 되지 왜 굳이 모텔에서 지내겠다는 건지 모르겠군.]

    [아뇨, 그냥 모텔에서 지낼래요. 뉴욕에서 입던 옷들을 정리하다 보니 거의 목장에선 쓸모가 없는 것들뿐이더군요. 그래서 일부러 모텔을 예약한 거예요. 청바지도 몇 벌 더 필요하고 부츠도 사야 할 것 같은데 매일 목장에서 여기까지 왔다갔다하긴 좀 힘들 것 같아서요. 게다가 당신은 어떤지 몰라도, 아직 결혼도 하기 전에 목장에서 단둘이 지내는 것도 좀 그렇고요.]

    리스는 그녀의 허리를 잡고 거의 눈높이까지 들어올렸다. 그녀는 어두운 초록빛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래, 당신이 내 집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난 당신을 덮치겠지.]

    그녀는 가녀린 손을 그의 가슴에 댄 채 침을 꿀꺽 삼켰다. 손바닥 아래로 그의 빠른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그 힘찬 심장 박동은 그가 지금 성적인 긴장을 겨우 억누르고 있다는 증거였다.

    [맞아요. 난 아직 당신과 성적인 관계를 맺을 준비가 안 된 상태에요. 아직 당신에 대해 잘 아는 것도 아니고........]

    [닷새 후면 당신은 나와 결혼을 할 거요, 베이비. 그때까지 우리가 지금보다 서로에 대해 좀더 알게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겠지. 하지만 난 결혼 첫날밤을 혼자 침대에서 보낼 생각은 전혀 없소.]

    [물론 그렇겠죠.]

    그녀의 음성은 거의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작았다.

    [흠. 그 말은 당신을 침대로 데려가려면 먼저 당신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줘야 한다는 뜻이오?]

    그의 목소리가 돌연 날카로워졌다. 화가 난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녀로선 그를 화나게 만들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저 리스가 그녀의 마음을 이해해 주기 바랐을 뿐.

    [그렇지는 않아요. 만일 결혼식이 두 달, 아니 한 달 후라면 아마 식을 올리기 전에 사랑을 나눌 수도 있으리라 생각해요. 하지만 지금은 경우가 틀리잖아요. 내 말뜻은 단지 내게 시간을 좀 달라는 거예요. 당신도 알다시피 난 지난 며칠 동안 정말 눈코 뜰새 없이 바빴거든요. 그래서 다만 며칠이라도 휴식을 취했으면 좋겠어요.]

    그녀는 침착한 어조로 대답했다.

    리스는 그제서야 맑고 투명하던 그녀의 피부가 창백하게 변했고, 눈 밑도 거무스름하게 그늘이 져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거기다 몸을 가누기조차 힘든지 그에게 기대서 있었다. 하긴 겨우 며칠 만에 지금껏 익숙했떤 환경을 떠나오게 됐으니, 육체적으로는 물론 정신적으로도 완전히 진이 빠진게 당연한 일일 것이다.

    [당신 말이 맞소.]

    그는 나지막이 속삭였다.

    [베이비, 충분히 휴식을 취하도록 해요. 나도 닷새 동안 어떻게든 참아볼 테니까.]

    매들린은 그의 말대로 충분히 휴식을 취하긴 했지만, 정신적인 스트레스는 여전한 상태였다.

    하긴 난 결혼을 앞둔 예비 신부가 아닌가! 그러니 신경이 날카로운 것도 당연한 일이다. 매들린은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했다.

    변호사 사무실에서 혼전 계약서에 서명하던 날 역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심하게 만든 하루였다. 리스는 모텔로 그녀를 데리러 왔을 때부터 그녀가 하는 말마다 대놓고 툴툴거렸다. 결국 그녀는 아예 입을 다물고 말았다. 하지만 그 사건 자체가 그와의 결혼 생활이 순탄하지 못할 거라는 증거 같아서 기분이 영 말이 아니었다.

    혼전 계약서의 내용은 간단했다. 결혼 후에도 두 사람은 각자 결혼 전에 가지고 있던 재산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으며, 만일 이혼을 하게 되더라도 매들린은 절대 그에게 위자료를 청구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문제는 이혼을 할 경우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의 양육권 역시 그가 가진다는 점이었다.

    [아뇨, 난 절대 내 아기를 포기할 수 없어요. 그러니 이 조항은 삭제해 주세요. 안 그러면 절대 서명하지 않을 거예요.]

    그녀는 강력하게 요구했다.

    리스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꿰뚫을 듯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그건 안 돼. 당신에게 아이를 빼앗길 수는 없어!]

    [자, 자, 진정들 하세요.]

    변호사가 황급히 중재에 나섰다.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두 분 모두 마치 몇 달 후에 이혼을 하고 말 사람들처럼 말씀하시는데, 그럴 바엔 아예 결혼을 재고해 보는 게 낫지 않겠어요? 물론 신혼 부부의 절반이 1년 내에 이혼을 한다는 통계도 나와 있긴 하지만, 그건 즉 나머지 절반은 평생을 해로한다는 뜻도 되는 겁니다. 두 분의 경우도 마찬가지죠. 게다가 아이 양육권 문제는 일단 아이가 생긴 후에 의논해도 되는 문제 아닙니까?]

    매들린은 변호사의 말을 무시한 채 리스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당신에게서 아이를 아예 빼앗을 생각은 전혀 없어요. 그렇다고 해서 내 아이를 포기하겠다는 뜻은 아니고, 그저 공동 양육권을 가지자는 거죠. 에이프릴이 당신에게 저지른 짓 때문에 이런 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난 에이프릴이 아니에요. 그녀의 잘못으로 희생양이 되는 건 절대 사양하겠어요!]

    그녀는 분명하게 경고했다.

    [하지만 당신 역시 아이들과 함께 살기를 원한다는 거 아니오?]

    [물론이죠. 당신이 아이들과 함께 살기를 원하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어쨌든 난 아이를 포기한다는 조항이 든 서류에는 절대 서명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설사 이혼을 하게 되더라도 아이들이 당신에게 등을 돌리게 만들거나 아이들을 만나지 못하게 할 생각 따윈 추호도 없어요. 약속해요.]

    리스는 그녀의 차분한 회색 눈동자가 때로는 단호하게 변하기도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지금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덤벼들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고 있는 모양이었다. 마냥 느긋한 성격인 줄로만 알았는데, 늘 이런 건 아닌 게 분명했다.

    어쨌든 아직은 가정이긴 했지만,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날 아이에 대해 그녀가 단호한 태도를 취하는 게 마음에 들었다.

    만일 에이프릴과의 사이에도 아이가 있었다면, 그녀 역시 양육권을 빼앗으려고 싸웠을 것이다. 단지 그를 괴롭히기 위해서 말이다. 에이프릴은 아이를 원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매들린은 진정으로 아이를 원하는 게 분명했다. 그러니 가상의 아이를 두고도 저렇게 단호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리라.

    [알았소.]

    마침내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조항은 삭제하겠소. 만일 이혼을 하게 되면 그때 가서 해결해도 될 것 같으니까.]

    매들린은 완전히 낙담한 상태로 변호사 사무실을 나섰다. 그때까지는 리스가 저토록 심하게 꼬여 있을 줄은 미처 깨닫지 못했었다. 리스는 다시는 어떤 여자도 믿지 않겠다고 단단히 결심을 한 게 분명했다. 내가 과연 그런 리스의 마음을 풀 수 있을까? 어쩌면 헛된 투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녀의 어깨를 무겁게 내리눌렀다.

    [당신 의붓오빠와 친구는 언제 도착할 예정이오?]

    리스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는 로버트와 크리스틴이 그들의 결혼식에 참석하러 오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아예 대놓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시를 했을 정도였다. 그녀는 이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결혼식을 무슨 사업상의 계약처럼 치르려던 계획이 완전히 어긋나게 되었기 때문이리라. 그 두사람이 참석하는 것만으로도 진짜 결혼식 같은 분위기가 조성될 게 뻔하니까 말이다. 리스가 원하는, 그리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결혼은 그저 사업상의 거래 - 그것도 파트너와 침대를 같이 쓸 수 있는 특권이 붙은 - 와 같은 개념일 뿐이었다.

    [결혼식 전날 도착할 거예요. 그리고 결혼식이 끝나는 대로 곧장 뉴욕으로 돌아갈 거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여기 도착하는 날 같이 식사라도 할까 하는데, 당신도 참석할 거죠?]

    [아니, 그날 저녁엔 소도 축사에 집어넣어야 하고, 또 정리할 일도 있소. 당신도 알다시피 일꾼 하나 없는 목장이니 천상 내가 할 수밖에 없잖소. 게다가 빌링스 시내까지 나오는 데만도 세 시간이나 걸리는 걸 감안하면 아무리 서둘러도 저녁 10시가 지나서야 도착할 거고 말이오.]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미처 그 점을 생각하지 못한 자신이 너무나도 창피스러웠다. 목장 일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증거를 들이댄 거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미처 생각을 못했어요. 정말 미안해요. 그럼 로버트에게 전화해서.........]

    리스가 그녀의 말을 끊고 끼여들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취소할 필요는 없소. 당신이라도 즐기도록 해요. 결혼 후에는 외식할 기회가 거의 없을 테니까.]

    그 정도로 그녀가 겁을 먹을 거라고 기대했다면, 천만의 말씀이다. 이미 그 정도는 짐작했거니와, 설사 그렇다 해도 아무 상관 없는 일이니까 말이다. 그녀는 이미 목장을 재건하기 위해 애쓰는 리스를 힘껏 도울 각오가 되어 있었다. 목장이 다시 예전처럼 풍요로워지면 리스가 받은 마음의 상처도 조금은 아물리라. 그런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외식 따윈 기꺼이 포기할 수 있었다.

    [당신만 괜찮다면.........]

    [벌써 괜찮다고 하지 않았소?]

    그가 날카롭게 반문했다.

    매들린은 허리에 손을 척 걸치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도대체 문제가 뭐죠? 전립선염에 걸린 남자나 생리 전 증후군에 시달리는 여자처럼 극도로 예민해진 사람도 당신만큼 자주 화를 내진 않는다구요! 혹시 화약이라도 삼킨 거예요? 그래서 그렇게 자꾸 성미를 폭발시키는 거냐구요!]

    [뭐가 잘못됐냐고?]

    그도 질세라 언성을 높였다.

    [열흘이나 담배를 피우지 않았기 때문이오! 이참에 아예 끊으려고!]

    리스는 그대로 트럭까지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한참을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던 매들린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감돌기 시작했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트럭에 올라탔다.

    [그래서 그렇게 상처 입은 물소처럼 신경이 날카로워진 거예요?]

    [그렇소.]

    그는 악문 잇새로 말을 내뱉었다.

    [혹시 내가 도울 일이 있으면 말해봐요. 최선을 다해 도울 테니까.]

    그는 갑자기 눈을 가늘게 떴다.

    [사실 내가 이러는 건 단지 담배를 끊어기 때문만은 아니오. 또 다른 이유가 있소.]

    [그게 뭐죠?]

    [그게 궁금하면 지금 당장 팬티를 벗어던지고 그 늘씬한 다리를 내 허리에 휘감는 거요. 그럼 내가 직접 몸으로 보여주겠소.]

    그녀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리스를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비록 그가 그녀의 육체만 원하는 것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다만 장소가 문제였다. 아무리 그래도 첫 경험인데 모텔 방에서 뒹굴기는 좀 그렇지 않은가! 게다가 자신은 지금 스트레스 때문에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상태이고, 리스 역시 니코틴의 금단 현상 때문에 짜증이 많이 난 상태라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물론 그렇다고 결혼식을 올리고 나면 두 사람의 상태가 좋아질 거라는 확신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최소한 그녀의 마음만이라도 안정을 되찾은 후에 하는 게 더 낫지 않겠는가!

    리스는 그녀의 눈 속에서 대답을 발견하곤 목 뒤로 손을 둘러 깍지를 끼며 나지막이 욕설을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이틀만 참으면 되겠지.]

    [우리 두 사람 모두를 위해서예요.]

    그녀는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실 그 순간을 될 수 있는 한 뒤로 미루고 싶은 마음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에요. 그...... 그게........ 너무 두려워서요.]

    [왜? 내가 혹시 당신을 학대라도 할까 봐? 물론 처음에야 충분히 자제를 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두 번째부터는 절대 그런 일이 없을 거요. 난 당신 쪽에서 먼저 즐기게 만들 자신이 있소.]

    [알아요.]

    그녀는 부드럽게 말했다.

    [단지 당신이 너무 낯설어서 더 그런 것 같아요.]

    [난 도시 여자들은 독신자 전용 술집에서 우연히 만난 남자와 곧장 침대로 직행하는 경우도 많다고 들었는데?]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난 아니에요.]

    [그런 확실한 것 같군. 당신은 결혼 상대와 침대에 들어가는 것도 그리 좋아하지 않으니까.]

    그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당신, 정말 비영하군요! 우린 일반적인 부부와 같은 과정을 겪고 결혼에 도달한 게 아니라는 건 당신도 잘 알 텐데요. 계속 이런 식으로 사사건건 쏘아붙이고 잠자리를 같이할 걸 강요한다면 결혼식 날까지 서로 보지 않고 지내는 게 더 나을 것 같군요.]

    그는 이를 악물었다.

    [기꺼이 그렇게 하리다. 정말 멋진 제안이군.]

    이런 연유로 그녀는 결혼식 날까지 마지막 이틀을 혼자서 쓸쓸하게 보내야만 했다. 로버트와 크리스틴이 도착한 결혼식 전날 오후까지 그 언짢은 기분은 계속 이어졌다. 물론 리스가 빌링스 공항까지 함께 마중 나가주길 기대했기 때문에 마음이 불편한 건 아니었다. 사실 리스는 그녀가 도착하던 날과 혼전 계약서를 작성하기 위해 변호사 사무실에 들렀던 날을 제외하곤 빌링스에 나온 적이 없었지만.

    그녀의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은 그들이 벌써 싸움을 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들의 결혼 생활이 앞으로 계속 지속된다 하더라도 그 생활은 상당히 격렬한 형태가 될 것 같았다.

    그녀는 혼자 크리스틴과 로버트를 마중 나갔다. 크리스틴은 그녀와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초조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어, 그 사람은 어디 있어?]

    [목장에서 일하고 있어. 가축들을 돌볼 다른 일꾼이 없어서 항상 바쁘거든. 오늘밤에는 만나지 못할 거야.]

    그녀의 설명에 크리스틴은 인상을 찌푸렸지만, 놀랍게도 로버트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로버트 역시 일이 무엇보다도 우선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인 듯했다.

    매들린은 두 사람과 포옹을 나눴다. 그리고는 활짝 웃으며 가운데 서서 두 사람과 팔짱을 꼈다.

    [이렇게 와줘서 정말 고마워요.]

    의붓오빠에게 먼저 치하를 한 매들린은 친구를 돌아보며 짐짓 활기차게 물었다.

    [비행기 여행은 어땠어?]

    [신나던걸.]

    크리스틴은 정말 들뜬 얼굴이었다.

    [보스와 함께 여행을 하니까 정말 좋더라구. 어딜 가든 완전히 칙사 대접이었어.]

    [과장이야.]

    로버트는 크리스틴의 수다를 한 마디로 잘랐다.

    [크리스틴도 너처럼 꽤나 재치 문답을 즐기는 경향이 있더구나. 스튜어디스들이 왔다갈 때만다 계쏙 뭐라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귀가 아프도록 들어야 했다구.]

    [그 여자들은 그냥 지나친 게 아니었어.]

    크리스틴이 부연 설명을 했다.

    [다들 가던 길을 멈추고 보스 옆에 서서 넋을 잃고 쳐다보느라 정신이 없더라니까.]

    매들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늘 있는 일인데, 뭐.]

    그녀는 크리스틴이 로버트를 보스가 아닌 친구 오빠로서 스스럼 없이 대하는 걸 보면 내심 기뻤다. 회사에서라면 보스에게 저런 식으로 허물없이 농담을 던지는 건 꿈도 꾸지 못할 일일 텐데 말이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차가운 시선만으로도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 정도로 카리스마가 넘치는 오빠가 모처럼 세련된 매너를 발휘한 것도 크리스틴으로 하여금 스스럼없이 그를 대하게 만든 원인 중의 하나일 것이다.

    매들린이 바라는 건 이 두사람이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에게 호감을 느끼게 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려면 그저 내일 아침 리스가 니코틴 금단 현상에서 회복된 몸으로 나타나길 기원할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만일 그가 계속 신경이 날카로운 상태라면 자칫 로버트와 불미스런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컸다.

    세 사람은 택시를 잡아타고 그녀가 묵고 있는 모텔로 갔다. 이미 그곳에 로버트가 묵을 방을 예약해 둔 데다, 크리스틴도 매들린의 강권에 따라 그녀와 같은 방을 쓰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매들린은 오늘이 처녀로서 지내는 마직막 날이라는 생각 때문에 신경이 몹시 곤두서 있는 상태였다. 이런 상태라면 오늘밤에도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그럴 바엔 절친한 친구와 밤새도록 얘기를 나누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크리스틴에게는 좀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진정한 친구라면 즐거움뿐만 아니라 고통도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매들린은 그렇게 자기 합리화를 시켰다.

    일단 짐 정리를 마친 후 세 사람은 저녁 식사를 하면서 유쾌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매들린은 리스도 함께 있었다면 정말 최고로 즈럭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10시쯤 됐을 때 크리스틴이 먼저 피곤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뉴욕 시간으로는 이미 자정이 넘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로버트는 즉시 웨이터를 불러 계산을 마쳤다. 장시간 일을 하는 데 익숙해 있고 하루에 4시간 수면이 습관으로 굳어진 로버트는 그날 아침 공항에서 봤을 때처럼 여전히 쌩쌩한 얼굴이었다.

    [푹 잘 수 있겠니?]

    로버트가 피곤해 보이는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나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내일 결혼을 앞둔 신부라면 누구나 잠을 설칠 거라고 생각해요.]

    [허니, 다른 신부들은 보통 첫날밤에 잠을 설친단다.]

    그녀는 콧등을 찡그렸다.

    [그렇다면 난 이틀 밤을 설치게 되겠군요. 몹시 피곤하긴 한데. 너무 떨리고 흥분이 돼서 잠이 올 것 같지가 않아요. 아니, 전화로 리스에게 청혼을 받은 이후론 계속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고 해야겠죠.]

    [네 결정을 후회하는 건 아니겠지?]

    [물론이에요. 몇 번을 생각해 봐도 항상 같은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더라구요. 절대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는 결론이요.]

    [결혼식을 좀 연기할 수도 있지 않겠니?]

    그녀는 인내심이 거의 바닥을 드러낸 듯 거칠게 굴던 리스의 상태를 떠올리곤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럴 수는 없어요.]

    로버트는 그녀를 꼭 끌어안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래, 알았다. 정 그렇다면 최선을 다하거라. 아마 그 남자는 자기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잘 모를 테니까. 그리고 혹시 아무리 노력해도 잘되지 않으면 쓸데없이 자학하지 말고 곧장 집으로 돌아오는 거야. 알았지?]

    [오빠처럼 회의적인 사라은 아직 보지 못했다니까요. 뭐, 그래서 내가 오빠를 많이 사랑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그녀는 농담조로 오빠에 대한 사랑을 드러냈다.

    [어쨌든 걱정해 줘서 정말 고마워요.]

    그녀가 모텔 방으로 올라갔을 때 크리스틴은 이미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고 있는 중이었다. 매들린은 즉시 친구를 흔들어 깨웠다.

    [어서 일어나! 일어나라구! 친구 좋다는 게 뭐니? 어서 내 손을 잡고 안심시켜 줘야지. 그게 네 임무라니까.]

    크리스틴은 하품을 하면서 졸음 섞인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러지 말고 차라리 맥주를 한 박스 주문해. 술기운을 빌려서라도 잠을 청해보는 거야.]

    [그래서 지금 나더러 술에 절은 채 결혼식장에 나타나라고?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알코올이 아니라 너의 위로라구!]

    [내가 줄 수 있는 건 아스피린 두 알이 전부야. 널 위호하기 전에 내가 먼저 죽을 지경이라구! 게다가 대체 왜 위로가 필요하다는 건지 모르겠구나. 그 사람과의 결혼을 원한 건 바로 나잖아.]

    [그래, 내가 원한 거지. 그것도 아주 간절히 원해서 하는 결혼이라구. 너도 그이를 한 번 보면 내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알게 될 거야.]

    크리스틴이 한쪽 눈을 번쩍 떴다.

    [무섭게 생겼니?]

    [뭐랄까....... 정말 남자다워.]

    [흠.]

    [아주 대단한 반응이구나.]

    [그 정도면 됐지 더 이상 뭘 바라니?]

    크리스틴은 핀잔을 주면서 벽시계를 흘끗 쳐다보았다.

    [벌써 새벽 1시야. 이제 자야지. 설마 내가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라도 읊어주길 바라  건 아니겠지?]

    [여긴 아직 겨우 11시밖에 안 됐다구!]

    [비록 몸은 여기 빌링스에 있지만 내 바이오 리듬은 아직 뉴욕에 속해 있다구, 알아? 어쨌든 난 이만 자야겠어. 그러니 너도 어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해보도록 해. 푹 쉬어야 내일 무사히 결혼식을 치르지.]

    그녀는 크리스틴의 충고대로 잘 준비를 마치고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동틀 무렵까지도 계속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이리저리 뒤척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지극히 고풍스런 디자인의 웨딩드레스를 선택했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길이에 목선과 치맛단에 섬세한 레이스 장식이 달린 아름다운 드레스였다.

    그녀는 일단 웨딩드레스를 입은 다음 머리를 우아하게 틀어올리고 하얀 레이스 스타킹과 흰 구두를 신었다. 최대한 행복한 신부처럼 보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막상 결전의 날이 닥치자 그녀는 오히려 차분해지는 걸 느꼈다. 아마 너무 피곤해서 신경이 예민한 상태를 유지할 수가 없는 것 같았다.

    [정말 아름답구나.]

    크리스틴이 감탄했다. 피부색과 잘 어울리는 연푸른 들러리용 드레스를 입은 그녀도 아주 멋진 모습이었다.

    [세련되고 고풍스러우면서도 보호해 주고 싶은 기분이 들 정도로 연약해 보여.]

    연약해 보인다는 건 자신과 거리가 먼 표현이라고 늘 생각해 왔던 매들린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친구를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네가 연약하다는 말은 아니야. 그저 연약해 보인다는 거지. 결혼식 날의 신부는 모름지기 그렇게 보여야 하는 법이라구.]

    [꽤나 흥미로운 생각이구나. 난 늘 신부는 환하게 빛이 나야 한다고 생각했어. 연약해 보여야 한다는 생각은 꿈에도 안 해 봤다구.]

    [빛이 나 보이게 하는 건 간단해. 그저 볼연지를 조금 진하게 발라주면 되거든. 하지만 연약해 보이기는 정말 어렵지. 혹시 그렇게 보이려고 일부러 날밤을 새운 거 아니야?]

    매들린은 한숨을 쉬며 다시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았다.

    [그렇게 표시가 날 줄은 몰랐는데........]

    [잠을 자긴 한 거니?]

    [응, 두 시간 정도.]

    [내 그럴 줄 알았어.]

    바로 그때 노크 소리가 들리자 매들린은 순간 얼어붙고 말았다. 거의 본능적으로 노크 소리의 주인공이 리스라는 사실을 알아챘던 것이다. 그녀는 심장 박동이 점점 빨라지는 걸 느끼며 천천히 방을 가로질러 문을 열어주었다.

    거의 195센티미터에 육박하는 큰 키로 문가를 꽉 채우듯 버티고 선 채 그녀를 내려다보는 리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니 회색 카우보이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는 바람에 그의 표정을 볼 수는 없었다. 등뒤에서 크리스틴이 내지르는 탄성이 들려왔다. 하지만 리스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 오로지 그녀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준비됐소?]

    [네.]

    그녀의 대답은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짐 정리도 다 한걸요.]

    [당신 짐을 미리 차에 실어놓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왔소.]

    그는 검정에 가까운 진회색 정장에 하얀 와이셔츠 차림이었다. 옷의 재질이나 재단이 극히 고급스러운 걸 보니 아마도 이혼 전에 구입한 옷인 듯했다. 정장을 차려입은 그의 모습은 숨이 막힐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매들린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서 있는 크리스틴을 소개했다.

    [크리스틴, 이분은 나와 결혼할 리스 던컨 씨야. 리스, 이쪽은 내 가장 친한 친구인 크리스틴 리조토예요.]

    리스는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를 띤 채 모자챙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반갑습니다.]

    크리스틴은 여전히 넋을 잃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면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

    [던컨 씨. 저도 반가워요.]

    그는 바닥에 놓인 가방 두 개를 가볍게 들고 크리스틴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인 다음 밖으로 나가버렸다.

    크리스틴은 그제야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정말이지........ 강해 보이는 남자구나.]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제야 네가 왜 이런 결정을 내렸는지 알겠다.]

    매들린 역시 크리스틴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진주 목걸이를 걸었다.

    로버트에게 리스를 소개하면서도 그녀는 계속 몸을 떨고 있었다. 하지만 리스는 로버트의 차가운 시선에도 전혀 움츠러드는 기색 없이 정중하게 인사를 나눴다. 두 사람의 만남은 형식적으로 끝이 났다. 두 사람 다 강한 성격의 소유자들이니 혹시나 불미스런 사태가 벌어지지 않을까 싶어 불안해하던 매들린은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애초부터 저 두 남자가 쉽게 친해지리라고는 전혀 기대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체크아웃을 하고 모텔에서 나온 뒤에야 그녀는 리스의 말을 기억해 내곤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아까 방에서 가방을 미리 차에다 실어두겠다고 했죠? 하지만 당신은 트럭밖에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대체 무슨 차에다 가방을 실은 거죠?]

    [지금은 있소. 트럭은 늘 내가 사용해야 하는데, 당신에게도 차가 필요할 것 같아서 한 대 구입했소. 새 차는 아니지만 아직 쓸만하더군.]

    모텔 현관 앞에 세워진 흰색 포드 스테이션 왜건을 발견한 그녀는 감격한 나머지 목이 메어왔다. 재정 상태가 별로 좋지 않은 리스가 차를 샀다는 건 즉 그녀에게 상당히 마음을 쓰고 있다는 표시가 아니겠는가! 사실 뉴욕 같은 대도시에선 굳이 차를 몰고 다닐 필요가 없었던 탓에 미처 차를 구입할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은 곧장 판사 집무실로 향했다. 매들린은 서둘러 지갑을 열고 리스를 위해 준비한 반지를 꺼내들었다. 그런 그녀의 행동을 본 판사는 싱긋 미소를 짓더니 주의를 환기시키려는 듯 두어 번 헛기침을 하곤 곧바로 결혼식 시작을 알렸다. 매들린은 허둥지둥 크리스틴에게 지갑을 건네곤 판사 앞으로 나아갔다.

    리스는 그녀의 왼손을 잡고 나란히 섰다. 하지만 곧 그녀의 손이 몹시도 차가운 걸 감지하곤 자신의 온기를 나눠주려는 듯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그는 판사의 주문에 따라 차분한 태도로 나지막하게 결혼 서약을 했다. 매들린은 그제서야 그의 이름이 기드온이고, 리스는 중간 이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곧 그녀의 순서가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 역시 리스처럼 차분하게 흘러나오자 내심 깜짝 놀랐다.

    잠시 후 리스가 평범한 금반지를 그녀의 손에 끼워 주었다. 다음은 신부 차례라고 판사가 일깨워 주었다. 매들린이 준비한 반지 역시 평범한 디자인의 금반지였다. 리스는 전혀 기대도 하지 않았던 듯 깜짝 놀란 얼굴이었다. 에이프릴과 결혼할 땐 반지를 받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그는 왼손 가운뎃손가락에 끼워진 결혼 반지를 흘끗 내려다보았다. 이제 누구든 이 결혼 반지를 보면 그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거라 생각하니 새삼 기분이 묘했다.

    예식의 마지막 순서는 신부에게 키스를 하는 것이었다. 리스는 스치듯 가볍게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자칫 잘못하면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자제력을 잃어버릴 것 같아서였다.

    그것으로 모든 의식이 끝났다.

    로버트와 크리스틴을 공항에 바래다주는 동안 매들린은 내내 침묵을 지켰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두 사람이 탈 비행기의 탑승 안내 방송이 들리는 바람에 길게 작별 인사를 나눌 틈조차 없었다. 결국 로버트와 크리스틴은 매들린을 힘껏 안아주고 리스와 간단히 악수만 나눈 후 총총히 탑승구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매들린은 두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지기 직전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애써 눈물을 삼켰다.

    리스는 단둘이 남겨지자 즉시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것 같군.]

    그가 불쑥 말을 걸었다. 퉁명스런 목소리였다.

    그녀는 잠시 현기증을 느꼈다.

    [그럴지도 모르죠. 결혼이 이렇게 가슴 떨리게 힘든 일인 줄은 미처 몰랐으니까요.]

    리스는 조용히 그녀를 차에 태웠다.

    [오늘 아침에 식사는 했소?]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저었다.

    리스는 운전대를 내리치며 화를 벌컥 냈다.

    [그러니 이렇게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보이는 게 당연하지! 당장 식사부터 해야겠군.]

    [아뇨, 그럴 필요 없어요. 그냥 집으로 가면 돼요. 지금은 뭘 먹는다는 생각만 해도 속이 울렁거리니까요.]

    결국 그들은 목장까지 쉬지 않고 차를 달렸다.

    집에 도착하자 리스는 그녀의 짐 가방을 자기 방으로 들고 올라갔다.

    [이게 옷장이오. 당신 옷도 여기다 걸어요.]

    그가 한쪽 벽에 붙은 문을 열어 보였다. 그러자 웬만한 방보다도 훨씬 큰 벽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짐 정리는 나중에 합시다. 일단 식사부터 해야 하니까 말이오.]

    그녀는 자신의 옷차림을 가리켰다.

    [우선 이 옷부터 갈아입구요. 그래야 식사 준비를 하죠.]

    [식사 준비는 내가 할 테니까 걱정 마시오.]

    다소 날카로운 어조였다.

    그가 준비한 건 수프와 샌드위치뿐이었다. 매들린은 그의 강요에 못 이겨 수프 한 접시와 샌드위치 반쪽을 억지로 입에 쑤셔넣었다. 모든 상황이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내가 정말 오늘 결혼을 한 걸까? 여기서 정말 오늘부터 내가 지낼 집이란 말인가?

    식사를 마친 후 리스는 곧장 2층으로 올라가 작업복으로 갈아입었다. 아무리 결혼식을 치른 날이라 해도 누가 대신 목장 일을 해주는 건 아니니까 말이다.

    매들린은 천천히 설거지를 마치고 방으로 올라가서 짐을 정리했다. 그의 침실은 엄청나게 넓었다. 게다가 그 방에 딸려 있는 욕실엔 대형 욕조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침대 역시 킹 사이즈였다. 그 침대에서 오늘밤 그와 사랑을 나눌거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현기증이 났다. 벌서 저녁이 다 된 시간이었다. 그녀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다시 부엌으로 내려갔다.

    목장 일을 마친 후 지친 몸으로 돌아온 리스는 청바지와 티셔츠로 갈아입은 상큼한 매들린의 모습을 발견했다.

    [배고프죠?]

    그녀가 반갑게 맞으며 물었다.

    [어서 샤워부터 하고 와요. 그동안 저녁을 차릴게요.]

    [복잡하게 이것저것 준비할 거 없소. 그냥 샌드위치면 되니까.]

    그는 잡업복 단추를 풀며 2층으로 올라갔다.

    그녀는 얼른 샌드위치를 만들고 식탁을 차렸다. 잠시 후 샤워를 마친 리스가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내려왔다. 그가 저녁을 먹는 동안 그녀는 우유를 한 잔 마시면서 흘끔흘끔 그를 관찰했다. 하루 종일 힘든 육체 노동에 시달리는 성인 남자에겐 한끼에 어느 정도의 음식이 적당할까? 지금 이 순간까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문제였다. 하지만 그가 저녁을 먹는 모습을 자세히 관찰한 결과 최소한 그녀가 먹는 양의 두 배는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류 작업을 할 게 남아 있소.]

    식사를 마친 리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깨끗이 비운 음식 저시를 개수대에 집어넣었다.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요.]

    매들린은 즉시 그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얼마 되지 않는 설거지를 끝낸 후, 그녀는 서둘러 2층으로 올라가 목욕을 했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마친 그녀가 발그스름한 얼굴로 막 욕실 문을 나섰을 때 리스가 침실로 들어왔다.

    그의 강렬한 시선이 그녀의 맨발에 꽂히는가 싶더니 하얀 나이트가운으로 감싼 몸을 지나 아직 물기가 남아 촉촉이 젖어 있는 머리카락까지 훑어 올라갔다. 잠시 후 그는 침대에 앉아 부츠를 벗고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셔츠 자락을 바지춤에서 잡아뺐다. 그것도 그녀의 시선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강렬하게 응시한 채로 말이다. 단추를 하나씩 풀고 셔츠를 벗으면서도 그의 시선은 여전히 그녀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마침내 햇볕에 그을린 구릿빛 가슴이 그녀의 눈앞에 드러났다.

    그 단단한 가슴은 온통 거무스름한 체모로 뒤덮여 있었다. 그녀는 벨트 버클을 끄르는 근육질의 팔이 수축과 이완을 되풀이하는 광경을 홀린 듯 지켜보다가 마지못해 고개를 돌렸다.

    [당신이 알아야 할 게 있어요.]

    그는 동작을 멈추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가 몸을 쭉 펴고 엷은 금발을 흔들자 위로 틀어올렸던 머리카락이 등으로 흘러내렸다. 그녀가 걸친 헐렁한 면 가운은 에이프릴이 즐겨 입던 유혹적인 디자인의 실크 가운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초라했다. 하지만 매들린은 유혹적으로 보이기 위해 굳이 실크 가운을 입을 필요가 전혀 없는 여자였다. 그 하얀 나이트가운 아래로 드러난 젖가슴의 곡선만으로도 충분히 유혹적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대체 할 얘기가 뭐기에 저렇게 긴장해 있는 걸까?

    그는 부드럽게 물었다.

    [혹시 며칠 기다리는 게 좋겠다는 얘기라면 아예 꺼내지 않는게 좋겠소. 지금은 그런 말을 들어줄 기분이 아니거든.]

    그녀는 곤혹스런 얼굴로 침대를 가리켰다.

    [난 지금껏 한 번도 이런 일을 해본 적이 없어요.]

    그는 바지 지퍼에 손을 댄 채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자신의 귀를 의심하면서.

    [여태껏 한 번도 섹스를 해본 적이 없다는 거요?]

    [네. 물론 난 당신을 원하고, 당신과 깊은 관계가 되고 싶어요. 하지만 첫 경험을 즐기게 될 거라곤 기대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매들린은 마음을 다잡으며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익숙지 않은 분노가 그를 휩쓸었다.

    [이런 빌어먹을! 매디, 정말 당신이 처녀라면 왜 여태껏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거요?]

    그녀는 여왕처럼 당당한 어조로 대답했다.

    [첫 번째 이유는 오늘 아침 이전까지 우린 결혼한 사이가 아니었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당신이 분명 믿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지금이야 물론 내 말을 믿을 테지만요. 몇 분 후면 들통날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잖아요, 안 그래요?]

    그녀는 고개를 꼿꼿이 치켜들며 냉정한 위엄을 가장했다.

    [제길, 우린 결혼할 예정이었소!]

    [하지만 언제든지 취소할 수도 있는 상황였죠.]

    리스는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는 지금 경악과 흥분으로 뒤범벅된 상태였다. 지금껏 그 어떤 남자도 그녀를 차지한 적이 없다니! 그의 본능은 지금 그녀의 처녀막을 처음으로 여는 사람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무척이나 흥분한 상태였다. 물론 실망스런 점도 있지만. 밤새도록 그녀와 사랑을 나누겠다는 계획이 이제 물거품이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그녀에게 그런 짓을 한다면 빌어먹을 개자식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게 된다. 그녀는 단 한 번의 행위로도 통증을 호소할 게 분명했다.

    아니,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 그녀의 매력에 속수무책으로 빠져드는 일 없이 이 결호을 현실화시킬 수 있을 테니까. 그는 결코 격렬하게 소용돌이치는 욕망의 힘에 굴복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기본적인 욕구를 해소하고, 그녀가 평범한 목장주의 아내 역할에 안주하기만을 바랄 뿐.

    사실 그는 자신이 그녀를 너무나도 절실히 원하고 있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시는 어떤 여자에게도 자신을 송두리째 맡기지 않겠노라 맹세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완전히 빠져버리게 될까 봐 두려웠다. 하지만 그녀를 향한 욕망만 조절할 수 있다면 그녀는 결코 그의 방어막을 무너뜨리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녀의 환심을 살 목적으로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거나 할 필요 없이 때때로 그녀와의 잠자리를 통해 욕망을 해소할 수 있으리라.

    매들린은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첫 경험을 즐기게 되리라는 기대 따윈 없다는 말은 현재 그녀의 심정을 그대로 표현한 말이었다.

    딱 한 번 키스를 나눴던 남자와 결혼했는데, 그 결혼에 대해 낭만적인 환상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게다가 리스는 성적으로 많이 굶주린 상태이니 자제력 따윈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을 테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속절없이 몸을 내어주게 생겼으니 긴장이 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눈에 띄게 긴장한 모습이었다. 그는 일단 편안한 분위기를 만드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그녀의 머리를 살짝 어루만졌다.

    [두려워할 것 없소.]

    그는 나지막이 속삭였다.

    [강제로 당신을 취할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

    그는 그녀의 턱에 손을 대고 자신을 쳐다보게 했다. 그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짙은 초록빛으로 변해 있었다.

    [베이비, 당신도 즐기게 될 거요. 내가 그렇게 만들겠소.]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난 오히려 당신이 너무 애쓰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렇게 긴장해 있는 상태에선 아무리 노력해 봤자 소용이 없을 테니까요. 게다가 만약 그 노력이 실패로 돌아간다면 우리 둘 다 실망이 크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그냥 해버려요. 해치워 버리자구요.]

    희미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떠올랐다.

    [그게 무슨 말이오? 마치 내가 무슨 강간범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군.]

    게다가 그건 매들린이 지금 얼마나 공포에 질려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기도 했다.

    [어쨌든 그런 일은 없을 거요. 내가 시간을 들이면 들일수록 당신 기분도 더 좋아질 테니까.]

    [내가 도중에 기절해 버리지 않는다면 그럴 수도 있겠죠.]

    그녀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아랫입술을 스치듯 어루만졌다. 스물여덟이 되도록 처녀성을 간직한 여자라면 당연히 남자와 깊은 관계를 맺는 데 거부감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녀와의 키스는 무척이나 유혹적인 것이었지만, 관계를 맺는 건 키스와는 전혀 얘기가 다르지 않은가! 그녀는 아마 이런 식으로 갑자기 관계를 맺는 것보다는 천천히 단계를 밟아 자연스럽게 그 관계를 받아들이게 되길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새삼 처음부터 차근차근 단계를 밟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그럴 마음도 없지만!

    리스는 그녀를 번쩍 안아들어 침대에 내려놓은 다음 스탠드만 남겨놓고 나머지 불은 모두 꺼버렸다. 매들린은 스탠드도 꺼주기를 바랐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가 너무도 순식간에 청바지를 벗고 침대로 들어오는 바람에 말할 기회를 놓친 것이다. 물론 전에도 남자의 알몸을 본 적은 있었다. 하지만 의학 잡지에 게재된 알몸 사진과 눈앞에 생생하게 모습을 드러낸 남자의 알몸은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남자의 육체적인 기능에 대해서라면 이미 확실히 알고 있다고 자부했건만 실제로 발기한 남성을 보자 그녀는 더럭 겁이 났다. 그저 잠깐 불편한 느낌만 참으면 되리라고 생각했던 건 완전히 오산이었다.

    그의 커다란 체구가 몸 위로 덮쳐오자 그녀는 마치 그의 널찍한 어깨와 근육질의 가슴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에 파묻혀 버린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런 상태에선 숨을 쉬는 것도 힘겨웠다. 그제서야 그녀는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에게 자발적으로 몸을 맡기기로 한 게 얼마나 무모한 결정이었는지 절감했다.

    그는 천천히 잠옷 아래로 손을 밀어넣어 따뜻한 손바닥으로 그녀의 맨살에 충격적인 느낌을 전해주었다. 그의 손이 점점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잠옷 역시 점점 위로 말려 올라갔다. 그는 그녀의 상체가 완전히 노출될 때까지 계속해서 손을 움직였다. 그녀는 과연 자신이 그의 애무를 끝까지 견딜 수 있을지 의심스러워지자 그만 눈을 감아버렸다.

    그가 마침내 그녀의 잠옷을 완전히 벗겼다. 그녀는 맨살에 와닿는 그의 감촉에 온몸을 떨었다.

    [절대 끔찍한 경험이 되게 하진 않을 거요.]

    그는 스치듯 가벼운 키스를 퍼부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약속할 수 있어.]

    다음 순간 그의 입술이 민감한 젖꼭지를 한껏 빨아들이자 그녀는 상상을 뛰어넘는 열기와 압박감에 그만 가느다란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리스는 그녀가 긴장을 풀고 자신의 손길에 반응을 보일 때까지 계속해서 그녀의 몸을 애무했다. 그러나 엄청난 열기에 휩싸인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의 손이 다리 사이에 와닿는 걸 감지하곤 다시금 빳빳이 얼어붙었다.

    잠시 후 그녀는 마지못해 허벅지를 열고 자신의 여성을 애무하도록 허락했다. 그는 그녀의 몸이 자신을 받아들일 준비가 됐는지 확인하듯 천천히 그녀의 몸 속으로 손가락을 밀어넣었다.

    갑작스런 그의 침입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며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쉿....... 괜찮을 거야.]

    리스는 부드럽게 그녀를 달래며 침대 옆 탁자 서랍에 들어 있던 윤활제를 꺼냈다. 그리고는 그녀의 민감한 부분에 윤활제를 바른 손가락을 밀어넣고 천천히 앞뒤로 움직였다. 그녀는 차갑고 미끄러운 이물질의 침입에 마구 몸을 뒤틀었다.

    그가 마침내 그녀 위로 몸을 싣고 단단한 허벅지로 그녀의 다리를 넓게 벌렸다. 그녀는 두려운 듯 눈을 크게 떴다. 가슴이 터져나갈 듯 심장 박동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두려움 때문에 물러서기엔 이미 너무 멀리 오지 않았는가! 그녀는 몸에서 힘을 빼고 긴장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미안해요.]

    그녀는 잠긴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무리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 긴장이 되네요.]

    그는 아무 말도 없이 그녀의 입술에 대고 자신의 입술을 문지르며 엉덩이를 높이 들었다. 그리고 곧 그의 단단한 남성이 그녀의 부드러운 여성을 찌를 듯이 다가왔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그의 어깨에 손톱을 박아넣으며 몸을 굳혔다.

    [당신을 아프게 하고 싶지는 않아.]

    그는 긴장한 듯 나지막이 속삭였다.

    [하지만 당신의 처녀를 갖게 돼서 너무 기뻐.]

    그 말과 동시에 그는 그녀의 몸 속으로 깊숙이 돌진했다.

    그녀는 온몸이 갈가리 찢기는 듯한 고통에 마구 눈물을 흘렸다. 그의 남성이 일정한 리듬을 타고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 고통은 더욱 심해졌다.

    그녀가 그 고통을 참아낸 유일한 이유는 얄궂게도 지금 자신의 몸 속으로 침입해 격심한 고통을 주는 남자가 바로 사랑하는 남편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에게 자신을 내어준다는 사실이, 그리고 그가 그녀 안에서 환희를 발견하게 되는 게 얼마나 원초적이며 자연스러운 경험인지 깨달은 순간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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