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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네엔 밤 시간에 나가서 즐길 만한 장소가 별로 없소. 여기서 한 30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술집이 하나 있긴 한데, 혹시 춤추는 걸 좋아한다면 모르겠지만.......]
매들린은 잠시 주저했다.
[저...... 난 그냥 집에서 편히 쉬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 안 될까요? 좀 피곤해서요. 당신도 피곤해 보이구요.]
리스는 순간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녀가 외출을 거절하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그 역시 피곤하긴 했지만, 춤을 춘다는 핑계로 그녀를 안아보고 싶은 충동이 더 큰 상태였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다 보면 그녀에 대한 관심이 조금은 누그러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고.
젠장, 그녀는 결코 가난한 목장주에게 어울리는 여자가 아니니까 말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냥 집에서 쉬고 싶다는 그녀가 천사처럼 보이기도 했다. 새벽 4시부터 일어나 지금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일을 했던 탓이었다. 하지만 그녀와 함께 쉬어야 한다는 게 문제였다.
[모노폴리 게임이라도 하지 않을래요? 아까 보니까 책장에 모노폴리 게임판이 있던데.]
그녀가 계속 말을 이었다.
[카드 게임도 괜찮구요. 난 포커부터 시작해서 블랙잭, 스페이드, 상하이, 스파이트, 말리스는 물론 진 러미나 도둑잡기까지 카드 게임이라면 모르는 게 없거든요.]
그는 매들린의 입에서 줄줄 나오는 엄청난 카드 게임 목록에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의 귀가 의심스러웠다. 저렇게 천사처럼 순진해 보이는 여자 입에서 튀어나올 만한 단어들이 절대 아니었던 것이다.
[도둑잡기는 게임 방법을 잊어버린 지 오래요. 진 러미라면....... 가능할 것 같군.]
[조커와 잭, 그리고 레이첼이 와일드 카드라는 것만 알면 돼요.]
그녀는 진지한 얼굴로 게임 규칙을 상기시켜 주었다.
[젠장, 오늘밤에 야구 중계를 볼 생각이었다는 걸 깜박했군. 그건 그렇고 레이첼은 또 뭐요?]
[그거야 당연히 다이아몬드 퀸의 이름이죠. 다른 세 가지 퀸도 각각 별칭이 있어요. 당신도 알잖아요.]
[아니, 난 몰랐소. 당신이 지은 이름이요?]
[아니에요. 어쨌든 레이첼은 다이아몬드 퀸이고, 팰리스는 스페이드 퀸, 그리고 주디스는 하트 퀸, 아진은 클로버 퀸이에요.]
[킹과 잭에도 따로 이름이 있소?]
[그건 나도 잘 몰라요. 하지만 그런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어요.]
리스는 그녀를 한 번 더 흘끗 쳐다보고는 소파에 등을 기대며 커피 테이블 위에 부츠 신은 발을 올려놓았다.
[당신의 구두끈 끝에 붙은 작은 플라스틱 장식은 '애글릿' 이라고 하지.]
그녀는 웃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살짝 깨물면서 잠자코 그의 동작을 따라했다.
[샴페인 병 바닥에 움푹 들어간 곳은 '펀트'라고 불러요.]
[술병 바닥의 빈 공간은 '얼리지'라고 하오.]
[방금 수정된 상태는 '자이고트'라고 하죠.]
[제비집 수프는 작은 바다제비의 둥지로 만드는데, 그 제비는 혀 밑에서 접착성 물질을 분비해서 둥지를 만들지.]
매들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의 새로운 도전을 받아들였다.
[핑크 플라맹고는 새우를 너무 많이 먹어서 분홍색을 띠죠.]
[태양에서 지구까지 빛이 도달하기까지는 8분 20초가 걸리오.]
[파리는 보통 시속 8킬로미터로 날아다녀요.]
[개미는 자기 몸무게의 50배까지 들 수 있지.]
그녀는 잠시 공격을 멈추고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제비집 수프 얘기는 거짓말이죠?]
그는 고개를 저었다.
[포기하는 거요?]
[아뇨. 하지만 첫 전투에서 탄약을 다 써버리는 건 어리석은 짓이죠.]
후속 전투가 있을 가능성은 그다지 높지 않다고 그는 생각했다.
열여덟 시간 후면 그녀를 뉴욕 행 비행기에 태울 것이고, 그럼 다시는 그녀를 만날 일이 없을 테니까.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매들린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야구 경기를 보세요. 난 베란다에서 귀뚜라미 소리를 들으며 그네나 탈 테니까요.]
리스는 밖으로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의 엉덩이가 나른하게 흐들렸다. 잠시 뒤 그녀가 그네에 앉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삐걱거리며 그네가 움직이는 소리도 들려왔다. 그는 TV를 켜고 잠시 야구 경기를 보았다. 그러나 베란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온통 마음을 빼앗긴 탓인지 야구 경기가 통 눈에 들어오지를 않았다. 그는 결국 TV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를 타면서 눈을 감은 채 백일몽을 꾸고 있던 매들린은 방충망 문이 열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베란다 바닥에 부츠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곧 맞은편 기둥에 어깨를 기대고 서서 담배를 꺼내드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어둠 속에서 라이터 불빛이 깜박이더니 담배 끝이 빨갛게 다아오르기 시작했다.
매들린은 그에게 다가가 그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어깨에 머리를 올려놓을 권리가 자신에게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그의 희미한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꺼낼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녀는 다시 눈을 감고 평화로운 밤 분위기를 만끽했다. 바로 이게 그녀가 원했던 삶이었다. 평화로운 자연 속에서 대지를 일구며 살아가는 그런 삶 말이다.
[왜 내 광고에 답장을 보낸 거요?]
그의 거친 목소리가 어둠을 뚫고 조용히 울렸다.
매들린은 천천히 눈을 뜨고 그의 질문에 대답했다.
[아마 당신이 광고를 낸 이유와 같을 거예요. 물론 호기심도 있었겠지만, 어쨌든 나도 결혼을 해서 가정을 갖고 싶었어요.]
[단지 가정을 갖기 위해서라면 굳이 내 광고에 답장을 하고 이곳까지 올 필요는 없었을 텐데?]
[아마도요.]
진지한 어조였다.
[뉴욕에는 남자 친구가 없소?]
[그냥 단지 친구라면........ 있어요. 하지만 결혼을 생각할 정도로 맘에 드는 사람은 하나도 업섰어요. 게다가 결혼 후에도 뉴욕에서 살 마음은 추호도 없었구요. 그런데 이곳은 굉장히 멋지네요.]
[당신은 마침 가장 좋은 계절에 온 거요. 아마 이곳의 겨울을 한 번 겪어보면 뒤도 안 돌아보고 달아날걸. 마치 얼어버린 지옥같으니까. 세상 모든 일에는 다 단점이 있는 법이오.]
[그리고 장점도요. 만일 장점이 전혀 없다면 당신이 이곳에 머물 리가 없잖아요?]
[여기는 내 고향이니까. 에스키모들도 자기 고향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지만, 난 그곳에서는 잠시도 못 견딜 거요.]
매들린은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싼 어둠을 바라보았다. 그녀에게 목장 생활의 단점을 설파하는 말을 듣고 있자니 그가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그가 미처 말하지 못했던 게 뭔지 불현듯 깨달을 수 있었다.
[매들린, 당신은 이곳과 맞지 않소.]
그녀는 규칙적으로 오른발을 굴러가며 느릿느릿 그네를 움직였다.
[그 말은 내 이번 방문이 실패로 끝났다는 뜻인가요?]
[그렇소.]
[비록 당신이 내게 끌리더라도?]
아마 평소 같았으면 그런 질문은 꿈도 꿎 못했을 테지만, 어둠의 세례를 받은 덕분인지 대담한 질문이 불쑥 튀어나왔다. 용기 있는 자만이 숙녀를 얻을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 말은 바꿔 말하면 숙녀들은 늘 용기 있는 자를 얻을 수 있다는 뜻도 된다.
[불꽃은 일방 통행이 아니라, 작용 반작용이라고 난 생각하오.]
그는 피우던 담배를 부츠 뒷굽으로 밟아 끈 뒤 마당 저쪽으로 차버렸다.
[나도 인정해요. 그래서 도대체 내 어떤 면이 당신의 아내감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거죠?]
[당신은 침대 안에서 아내 역할을 하기엔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해 보이오.]
그가 잔인하게 말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당신이 그 역할에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보여주고 싶군. 하지만 침대 밖에서는....... 아니오, 어느 한 가지도 적합한 데가 없소.]
[제발 어떤 점이 그렇게 적합하지 않다는 건지 설명해 줘요. 나도 내가 거부당한 이유를 알고 싶단 말이에요.]
갑자기 그가 성큼성큼 다가와 그네 한쪽 끝에 털석 주저앉았다. 그의 무게를 받은 그네가 기우뚱하고 가라앉으면서 거세게 흔들리자 그는 즉시 바닥에 발을 고정시켜 그 움직임을 중단시켰다. 그네는 다시 그녀만 싣고 움직이던 때처럼 느긋하게 앞뒤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내가 전에 결혼했던 적이 있다는 말은 이미 했을 거요. 그 결혼 생활은 딱 2년 동안 유지되었소. 당신은 여러 가지 면에서 내 전처와 많이 닮았어. 전처도 당신처럼 전형적인 도시 여자였지. 나와 결혼하기 전에는 한 번도 목장을 본 적이 없을 정도니까. 그래서 그런지 목장주와의 결혼 생활이 영화에서 보던 것처럼 로맨틱할 거라고 착각을 했던 거요. 그러다가 이곳에서 겨울을 맞이하게 되었지. 그 지독한 겨울을 말이오. 그러나 그건 단지 시작일 뿐이었소. 결혼 2년째는 그야말로 지옥 같았지.]
[리스 던컨,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날 판단하는 건 실수라는 말을 하고 싶군요. 그래요, 당신 전처와 내가 닮았다고 쳐요. 대체 어디가 닮았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무리 닮았다고 해도 한 여자가 목장 생활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해서 다른 여자 역시 그럴 거라는 법이 어딨죠?]
[바보 천치라면 그렇게 지독한 실수를 하고서도 아무것도 배우지 못할 거요. 하지만 난 바보가 아니오. 내가 다시 결혼을 한다면 그 상대는 목장 생활이 어떤 건지 확실히 아는 여자가 될 거요. 물론 목장 일도 거들어 줄 수 있어야 하고, 난 두 번 다시 이 목장을 걸고 도박을 할 생각이 없으니까 말이오.]
[그게 무슨 말이죠?]
[여긴 한때 이 근처에서 최고의 목장이었소. 4천 마리가 넘는 소를 키웠고, 일꾼만 해도 50명이 넘었으니까. 종자 소도 다른 목장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훌륭한 품종이었지.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이혼을 하게 된 거요.]
그는 그네 등받이에 팔을 올려놓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그의 입가에 서린 비통함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의 목소리 역시 씁쓸하기 그지없었다.
[에이프릴의 집안은 법조계에 폭넓은 영향력을 갖고 있었소. 결국 어떤 판결이 나왔는지 짐작하겠소? 그 빌어먹을 판사는 단지 그녀가 2년간 내 아내로 지냈다는 이유만으로 내 재산의 절반을 가질 권리가 있다는 판결을 내리더군. 물론 그 여자는 그 액수 만큼의 현찰이 더 좋다고 달콤하게 말했고, 덕분에 난 거의 파산직전의 상태까지 몰리게 됐지. 그녀에게 위자료를 주기 위해 내가 가진 모든 걸 현금으로 바꿨지만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었소. 결국 백 년도 넘게 이어져 내려온 땅까지 팔았지. 그게 바로 7년전의 일이오. 그 이후로 난 이 목장을 꾸려나가기 위해 엉덩이에 불이 나도록 일을 해야 했소. 하지만 겨우 올해 들어서야 이익이 날 징조가 보이더군. 덕분에 재혼을 할 엄두도 내게 됐지. 왜냐하면 난 자식을 원하거든. 목장을 물려줄 내 자식 말이오. 자, 이제 내가 왜 전처와는 전혀 다른 여자를 고르고 싶어하는지 잘 알겠소?]
매들린은 그가 처한 상황에 경악하면서도 궁금증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 사랑은요? 사랑은 그 계획에 어떻게 포함시킬 거죠?]
[내 계획에는 사랑 따윈 전혀 없소.]
그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당신 아내가 당신이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걸 원하다면요?]
[난 내 아내감에게 듣기 좋은 얘기나 늘어놓을 생각은 전혀 없소. 내 재혼 상대는 이 모든 사항을 분명히 인지한 상태에서 나와의 결혼을 선택하게 될 거요. 사랑을 제외하는 대신 난 정말 좋은 남편이 되어줄 생각이오. 바람을 피거나 손찌검을 하는 일 따윈 절대 없을 테니까. 내가 상대에게 원하는 건 나와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있을 것, 그리고 아내의 역할을 충실히 해줄 것. 그 두가지뿐이오.]
[아내의 역할에는 물론 당신 자식을 낳아주는 것도 포함되겠죠?]
[물론이지.]
그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복부를 칼로 난도질당한 것처럼 날카로운 실망감이 엄습했다. 그는 내가 아닌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하려는 것이다. 그녀는 지금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애써 자제력을 찾으려 했다.
[그렇다면 당신에게 행운을 빌겠어요. 이번에는 행복한 결혼 생활이 되길 바랄게요. 아마 나말고 다른 지원자들이 더 있나봐요?]
[두 명이 더 있소. 그 두 여자 중 목장 생활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 결혼을 신청할 생각이오.]
그는 사업상의 계약을 맺듯 냉정하게 결혼 상대를 정할 모양이었다. 사실 그가 생각하는 결혼은 파트너와 잠자리를 같이 한다는 점 외에는 사업상의 계약과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매들린은 그가 가진 정열이 낭비되는 게 아까운 나머지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고 그를 잊으려 노력하는 것뿐이었다. 앞으로 만날 남자들마다 그와 비교하는 이이 없게끔 말이다.
지금의 그녀에겐 리스 던컨과의 사이에 드리워진 어둠이 자신의 눈에 담긴 낭패감을 감춰주고 있다는 것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산토끼도 경주마처럼 빨리 달릴 수 있어요. 단거리일 경우에는.]
그는 즉시 그녀의 말을 되받았다.
[사실 곰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날랜 놈들이오. 하지만 그놈들 중에서도 '게으름뱅이'라 불리는 곰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느려 터졌지.]
[태평양의 넓이는 거의 8천만 평방 킬로미터예요.]
[안전핀은 1849년에 발명되었소.]
[설마......... 그렇게 오래 전에 발명됐어요? 지퍼는 1893년에 발명됐는데. 어쨌든 다행이군요. 당신도 안전핀에 찔리고 싶진 않았을 테니까요.]
다음날 아침 두 사람은 트럭을 타고 다시 빌링스로 향했다. 그녀는 빌링스까지 가는 내내 침묵을 지켰다. 어제 저녁 시간은 두 사람이 알고 있던 황당한 상식을 주거니받거니 하면서 그럭저럭 즐겁게 보냈지만, 방으로 돌아와서는 이런저런 생각 때문에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던 것이다.
그를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생각만으로도 견딜 수 없이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그 정도 고통은 당연한 것이었다. 아무리 그를 생각하며 울부짖어도 그의 곁을 떠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그녀는 마구 울음을 터뜨리고 싶은 기분을 어쩔 수 없었다.
그는 몹시 피곤해 보였다. 하루 종일 목장 일에 시달린 것만으로도 충분히 피곤할 텐데, 그녀를 데리러 나오고 또 이제는 데려다 주기 위해 몇 시간씩 운전을 해야 했으니 당연히 그럴 것이다.
[괜히 나 때문에 왔다 갔다 시간 낭비를 하게 만든 것 같아 미안하군요.]
그는 의외라는 듯 그녀를 흘끗 쳐다보았다.
[당신도 헛걸음을 하긴 마찬가지잖소.]
한 마디로 그녀가 '헛걸음을 시킨 상대'로 규정되어 버린 순간이었다. 그녀는 혹시나 예전에 데이트했던 남자들이 다 자신에게 아부를 했던 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공항에 도착한 건 뉴욕 행 비행기가 출발하기 딱 30분전이었다. 정말 시간도 잘 맞췄군.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사실 서두를 필요는 전혀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그와 작별 인사를 나눌 시간이 거의 없다는 게 기쁘기도 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눈물을 참을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난 여기서 내릴 테니 이대로 돌아가세요. 일부러 주차장까지 들어가지 않아도 돼요.]
그녀는 담담한 어조로 제안했다.
그는 왠지 모르게 화가 난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흘끗 쳐다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트럭을 세우고 그녀를 위해 문을 열어주었다. 매들린은 그가 먼젓번처럼 허리에 손을 뻗기 전에 얼른 차에서 내렸다. 지난번과는 달리 폭넓은 치마를 입은 덕분이었다.
리스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그녀의 등에 손을 댄 채 공항청사로 갔다. 그녀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폭넓은 치마가 다리에 휘감기며 살랑거리는 모습이 눈에 띄자 지난번 하얀 타이트 스커트를 걸친 모습을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아니, 이번이 더 심했다. 자꾸만 저 치마는 타이트 스커트와는 달리 간단하게 위로 끌어올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리스, 잘 있어요. 당신에게 행운이 함께 하길 기원할게요.]
그녀가 작별 인사를 하며 손을 내밀었다.
리스는 여기저기 못이 박힌 투박한 손에 감겨오는 부드러운 감촉을 느낀 순간 그만 이성을 잃어버렸다.
[나는 당신을 맛봐야겠소.]
그는 예의 그 낮고 거친 목소리로 말하며 그녀의 손을 들어올려 자신의 목에 두르게 했다.
[단 한번만이라도.]
그는 다른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붙잡고 와락 끌어당겼다. 그리고 곧이어 그녀의 입술을 차지했다.
그건 예의상 하는 작별 키스와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그녀를 차지하고 싶다는 거센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키스에 가까웠다. 매들린은 무릎에 힘이 빠지는 걸 감지하곤 그에게 바짝 매달렸다. 가슴이 짓뭉개지고, 아랫배에 잔뜩 성이 난 남성이 느껴질 정도로 밀착된 포옹이었다.
희미하게 주위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하지만 그녀에겐 아무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의 입술이 그녀를 흥분시키고 만족시키는 한.
리스는 그녀의 입 안 깊숙이 혀를 밀어넣으며 처음 그녀를 본 순간부터 타올랐던 갈망을 마음껏 불태우기 시작했다. 최초의 충격이 쾌락으로 바뀌고 곧이어 거의 참을 수 없을 것 같은 긴장이 고조되었다.
매들린은 그의 관능적인 침입을 열렬히 환영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도 그가 제공하는쾌락을 똑같은 방법으로 돌려주었다. 그는 즉시 경련을 일으키며 그녀를 더욱 세게 껴안았다. 하지만 그녀가 고통을 호소하는 신음을 흘리자 그 즉시 팔의 힘을 풀고 마지못한 듯 고개를 들었다.
그들은 멈췄던 숨을 몰아쉬며 바로 코앞에 있는 서로의 얼굴을 뚫어질 듯 쳐다보았다. 그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이었지만 동시에 관능적이기도 했다. 그의 눈은 여전히 흥분에 들떠 초첨이 흐려져 있었고, 입술 또한 방금 나눈 키스로 인해 번들거렸다.
그가 다시 그녀에게 몸을 기울이려는 순간, 그녀가 타고 갈 비행기편의 탑승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그러자 그는 즉시 동작을 멈추고 천천히 그녀를 놓아주었다.
매들린은 그가 곧 떠나지 말아달라는 얘기를 할 거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소리는 그녀의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렸다.
[이제 그만 가보는 게 좋겠소. 비행기를 놓치지 않으려면........]
그녀는 말문이 막힌 듯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고개만 끄덕인 후 그에게서 돌아섰다. 그리고는 떨리는 다리로 천천히 한 발자국씩 걸음을 내디뎠다. 그녀는 애써 뒤를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비행기 탑승구에 올랐다. 마지막으로 그를 돌아보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지만, 만약 그랬다간 볼썽 사납게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아 두려웠다.
빌링스 공항에 도착해 비행기에서 내릴 때만 해도 자신감과 기대감에 가득 차 있던 그녀였건만, 불과 24시간 만에 끔찍한 절망감에 휩싸인 채 이곳을 떠나는 것이다.
로버트는 뉴욕 공항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얼굴엔 걱정스런 기색이 완연했다. 매들린은 그런 그를 향해 애써 미소를 지으려 했지만 그를 속일 수는 없었다. 로버트는 금세 그녀가 얼마나 우울한 기분인지 알아차리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뜯어보기 시작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려는 헛된 노력을 포기한 채 곧장 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이대로 그의 품에서 울음을 터뜨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둔다면 결코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덕분에 울음보를 터뜨리지는 않았지만, 자제력을 찾을 때까지 그녀는 한동안 숨을 몰아쉴 수밖에 없었다.
[그 녀석을 죽여버리고 말겠어.]
로버트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나지막한 목소리로 저주를 퍼부었다.
매들린은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마지막으로 심호흡을 한 뒤 말을 꺼냈다.
[그 사람은 완벽한 신사였어요. 성실하기 그지없는 사람이기도 했구요. 단지 내가 자기 아내 자리에 적당한 사람이 아니라고 한 것뿐이에요.]
로버트는 그녀를 끌어안고 가만히 앞뒤로 흔들었다.
[그래서 자존심이 상한 거야?]
그녀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아뇨. 내 생각엔 그 사람한테 실연을 당한 것 같아요.]
로버트는 여동생의 깊은 회색 눈동자에 어린 표정을 발견하곤 내심 깜짝 놀랐다.
[단 하루만에 사랑에 빠지는 건 소설에서나 가능한 얘기라고 생각하는데.]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현실에서도 간으한 얘기더라구요. 하지만 그 사람은 그렇지 않았어요. 그것 역시 내가 감수해야 할 일이겠지만요.]
[오히려 더 잘된 일인지도 몰라.]
로버트는 다정하게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출구 쪽으로 데려갔다.
[그 남자에 대해서 조사를 해봤거든. 아, 네가 그러지 말라고 한 건 알지만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야지.]
그녀는 살기 등등한 표정으로 의붓오빠를 노려보았다.
잠시 망설이던 그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어쨌든 내가 보기에 그 남자는 어떤 여자라도 함께 살기엔 벅찬 상대인 것 같더구나. 물론 이혼 때문에 잔뜩 뒤틀린 건 이해가 가지만........]
[나도 알아요.]
그녀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말해줬거든요.]
[그렇다면 너도 그 남자가 생각하는 결혼이 어떤 건지 알고 있겠구나. 어떤 여자와 결혼하든 엄청난 분노를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도.]
[오빠도 그의 목장이 어떻게 됐는지 봤어야 해요. 그가 그렇게 변한 것도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라니까요.]
[전처에게 된통 당해 거의 무일푼이 됐더구나. 나도 그 전처의 집안과 한 번 거래를 한 적이 있어서 잘 아는데........ 그런 식인종 같은 사람들과 상대할 때는 아무리 조심을 해도 모자란 법이거든.]
[할 수만 있다면 오빠한테 그 집안에 복수해 달라고 부탁하고 싶은 심정이에요.]
그녀는 파티에서 포도주를 한 잔 더 달라고 청하는 것처럼 손쉽게 말했다.
[그렇게 해도 그 사람이 잃은 걸 돌려받을 순 없을 텐데?]
[그야 그렇겠죠. 하지만 그 사람들이 죗값을 받는 모습을 보고 싶어 죽겠는걸 어떡해요. 그걸 보면 나도 꽤 심통 맞은 데가 있는 것 같지 않아요?]
[하지만 네 어디에 그런 심통 맞은 성격이 숨어 있다는 거냐? 난 아무리 봐도 모르겠는데.]
[아뇨. 내 말이 맞을 거예요.]
지극히 온화하지만 왠지 상대방을 긴장하게 만드는 그런 어조였다. 로버트는 그녀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며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이제부터 뭘 하면서 지낼 건지 생각해 봤니?]
[그저 시간을 보내야 겠죠.]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잘 하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로버트는 뜻밖의 대답에 내심 깜짝 놀랐다. 사실 매들린은 그 어느 누구보다도 강한 회복력을 가진 편이었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늘 묵묵히 자신의 책음을 다하는 경향이 그 누구보다도 강하다고나 할까? 때로는 목발 신세를 지는 한이 있어도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가곤 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런 그녀의 입에서 저런 나약한 소리가 나오게 만들다니, 아마도 리스 던컨이라는 녀석이 꽤나 멋진 남자였던 모양이다.
2주 뒤, 리스는 마지막 아내감 후보인 줄리엣 존슨을 배웅하고 트럭으로 돌아오자마자 욕설을 퍼부으며 운전대를 주먹으로 쾅 내리쳤다. 그리고는 허탕한 표정으로 담배를 피워 물고 연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결국 아내를 구하는 광고를 낸 건 실수였다. 애꿎은 시간과 돈만 낭비했으니 말이다.
학교 선생이라던 데일 퀸란은 목장이 외진 곳에 고립되어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꽤나 망설이더니 결국은 그의 청혼을 거절하고 말았다.
줄리엣 존슨은 다행히도 그의 아내 자리가 꽤나 탐이 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가 도저히 청혼을 하고 싶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줄리엣 존슨은 그가 지금껏 만났던 여자 중 제일 심통 사나웠다. 유머 감각이라곤 찾아볼 수조차 없는 데다 어느 것하나 불평불만을 늘어놓지 않는 게 없을 정도였다.
리스는 그녀가 거동이 불편한 어머니를 오랫동안 돌보느라 결혼이 늦었다는 말에 가족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막상 만나고 보니 그 여자의 어머니 역시 차라리 일찍 죽기를 바라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줄리엣 존슨은 그에게 딱딱한 목소리로 일단 결혼을 하게 되면 자신의 의무는 수행하겠지만, 그가 자주 그런 어리석고 야만스런 짓을 하는 건 싫다고 선언을 했다. 그 자리에서 바로 그런 쓸데없는 걱정은 할 필요 없을 것 같다고 날카롭게 대꾸해 주었지만, 지금 생각해도 실소가 나왔다.
세 명의 응모자 중 한 여자는 그가 가질 수 없었고, 다른 한 여자는 그를 가지지 않겠다고 했으며, 나머지 한 여자는 도저히 적당한 상대가 아니라니......... 이렇게 실망스러운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문득 매들린의 자태가 떠올랐다. 늘씬한 다리와 비단결 같은 금발, 그리고 그윽한 회색 눈동자를 가진 매들린의 모습이. 그와 동시에 꿀처럼 달콤했던 그녀의 입술 감촉 역시 생생하게 떠올랐다.
지난 2주 동안 그는 거의 매일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욕망으로 달아오른 몸이 쉽사리 잠을 허용하지 않았고, 어쩌다 겨우 잠이 들었어도 내내 매들린이 등장하는 꿈에 시달리다가 잠이 들기 전보다 더 기분이 나쁜 상태로 깨어나야 했다. 그의 남성은 늘 성이 나 있었고, 성미 역시 극도로 예민해진 탓에 그는 평소보다 두 배가 넘는 줄담배를 피워대고 있었다. 매들린이 그의 이상형 바로 그 자체인 여자라는 사실이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아니, 그런 그녀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이 더욱 원망스러웠다.
그날 밤 자신에게 매달려 그토록 강렬한 반응을 보이면서 키스를 되돌리던 매들린을 떠올리며 그는 아예 잠을 설쳤다. 하지만 그녀는 뒤도 안 돌아보고 그에게서 떠나가 버렸다. 만일 그녀가 단 한 번이라도 뒤를 돌아봤다면, 아니 조금이라도 망설이는 기색이 보였다면 그는 그녀에게 머물러 달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너무나 담담하게 아내를 구하는 일에 행운이 따르기를 바란다는 말까지 했다. 마치 그의 거절에도 그다지 자존심이 상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그는 매들린을 붙잡을 수도 있었다. 그가 만일 청혼을 했다면 그녀는 더나지 않고 이곳에 머물렀을 것이고, 지금쯤 아마 결혼식도 올렸으리라. 그리고 그랬다면 매일 밤 그녀를 품에 안고 지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새악ㄱ을 하는 것만으로도 그는 미치기 일보 직전의 상태까지 도달하곤 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우선 그녀는 에이프릴과 너무나 비슷했다. 만약 그녀가 에일프릴처럼 마수를 드러낸다면 아마도 에이프릴보다 더 심하게 그를 갈기갈기 찢어버릴 것이다. 매들린처럼 첫눈에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킨 여자는 생전 처음이었다. 에이프릴을 만났을 때조차도 그토록 불타오르지는 않았으니까.
게다가 그녀는 도시 생활에 익숙한 여자였다. 비록 몬태나와 목장 생활을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긴 했지만, 막연한 생각과 실제 생활은 하늘과 땅 차이인 법이다. 그녀가 정말 이곳 생활을 좋아할지 어떨지는 일단 이곳에서 겨울을 지내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다 태운 담배를 비벼 끄고 곧장 한 대를 더 피워 물었다. 모과 허파가 타들어 가는 듯 아팠다. 그러나 분노와 욕구 불만에 휩싸인 그에겐 차라리 그 고통이 반가울 정도였다.
그는 트럭에서 내려 곧장 공중 전화를 찾았다. 그리고는 일단 뉴욕의 안내 전화에 문의해서 매들린의 집 전화 번호를 알아냈다. 이것 역시 시간 낭비일지도 모른다. 지금 이 시간이라면 회사에 출근을 했을 테니까. 하지만 그는 스스로조차 알 수 없는 다급함에 휩싸여 곧장 그녀의 전화 번호를 눌렀다.
그러나 기대했던 신호음 대신 전화 교환원이 나와 통화를 계속하고 싶다면 일단 돈을 더 넣으라고 하는 게 아닌가! 그는 얼른 잔돈을 찾아 주머니를 뒤졌지만 동전이 나오질 않자 그만 좌절감에 욕설을 퍼붓고 말았다.
[손님, 죄송합니다만 먼저 돈을 더 넣으셔야 통화가 가능합니다.]
[잠깐만 기다리시오.]
그는 지갑을 꺼내들고 한참을 뒤진 끝에 전화카드를 찾아내 교환원에게 번호를 불러주었다. 지난 7년 동안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카드였지만 다행히도 아직 유효 기간이 지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감사합니다.]
교환원의 인사와 함께 전화 연결이 이루어졌다. 세 번째 신호음이 떨어졌을 때 상대편에서 수화기를 드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귀에 익은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매들린?]
리스는 황급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자 다시 초조하게 그녀의 이름을 되뇌었다.
[매들린?]
마침내 수화기 너머로 그녀의 대답이 들려왔다.
[네, 그렇습니다만....... 리스?]
[그렇소.]
순간 트럭 한 대가 굉음을 내며 지나가는 바람에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아직도 나와 결혼할 생각이 있는지 궁금해서 전화한 거요. 이미 내 형편에 대해서는 다 알고 있을 테고, 어떻소?]
방금 전보다 좀더 긴 침묵이 흘렀다. 수화기를 쥔 그의 손에 점점 힘이 주어졌다. 수화기가 부서지지 않을까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다른 후보자가 두 명 더 있다더니, 잘 안 됐나요?]
[그렇게 됐소. 당신 대답은?]
[좋아요.]
그녀는 나지막이 대답했다.
리스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아버렸다. 순간 자신이 지금 에이프릴 때보다 더한 실수를 저지른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하지만 아무래도 괜찮았다. 지금은 그저 그녀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당신은 내가 결혼 전부터 소유하고 있던 재산에 대한 권리를 모두 포기한다는 내용의 혼전 계약서에 서명해야 하오. 물론 나와 이혼을 하게 되더라도 위자료를 요구하지 않겠다는 내용 역시 포함되어 있소.]
[그렇다면 나 역시 당신에게 같은 내용의 혼전 계약서에 서명할 걸 요구해도 되겠죠? 그러니까 결혼 후에도 각자 자신의 재산을 관리하는 걸로 하는 거죠, 어때요?]
그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
[물론이오.]
[좋아요. 그렇게 하죠.]
[그리고 한 가지 더 있소. 당신의 건강 진단서가 필요하오.]
[아, 그거요? 안 그래도 나 역시 결혼 전에 서로 건강 진단서를 교환하는 과정이 있어야 하지 않겠냐는 말을 하려던 참이었는데, 잘됐군요.]
짜증이 이제 분노로 변하려 했다. 하지만 화를 낼 수는 없었다. 그녀에게도 결혼 상대의 건강 상태를 확인할 권리가 있지 않겠는가! 성관계로 인한 질병이 어디 에이즈 하나뿐인가 말이다. 게다가 그런 종류의 질병이 몬태나 주 경계선 안으로는 절대 침입하지 못한다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난 당신만 괜찮다면 2주 내에 결혼식을 올렸으면 하오. 어제쯤 여기로 올 수 있겠소?]
[결혼 허가증의 유효 기간이 며칠이죠?]
[내 기억으로 닷새였던 것 같은데, 확인해 보겠소. 다음주 초까지 올 수 있겠소?]
[그럴 거예요. 당신 전화 번호를 알려주면 출발하기 전에 연락드릴게요.]
그는 얼른 자기 집 전화 번호를 불러주었다. 수화기 너머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럼 다음주에 봅시다.]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네, 그때 만나요, 안녕!]
리스도 작별 인사를 한 다음 수화기를 내려놓고는 그대로 공중 전화 부스에 기대선 채 눈을 감았다.
드디어 모든 일이 끝났다.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결혼 신청을 한게 그녀에게 미안하긴 했지만, 사실 그는 지금 자기 자신과 목장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힘에 겨웠다. 그녀를 배려할 마음의 여유가 전혀 없는 상태라고나 할까?
그는 일단 목장의 안정을 위협할 여지 따윈 아예 없도록 법적인 문제를 확실히 처리한 다음 그녀와 결혼을 할 작정이었다. 그리고 결혼을 한 후에도 그녀와 늘 거리를 두고 관계를 유지하리라. 그게 목장을 팔 수밖에 없는 위험에 처하는 걸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제일 확실한 방법이니까.
그는 또다시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한 시선으로 자신을 쳐다보면서 '당신 혹시 담배 피워요?'라고 묻던 매들린의 얼굴이 떠오르는 게 아닌가! 다음 순간 그는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빼들고 빤히 쳐다보았다. 물론 담배를 끊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요즘 들어 부쩍 줄담배를 피우는 일이 잦아진 건 사실이었다.
'당신, 혹시 담배 피워요?'
다시금 그녀의 말이 떠오르자 그는 욕설을 중얼거리며 담배를 비벼 껐다. 그리고는 더 이상 생각할 틈도 없이 담뱃갑을 통째로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트럭을 몰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그는 욕설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며칠후 그녀가 도착할 때쯤이면 그는 분명 회색곰을 만나도 레슬링을 하자고 덤벼들 정도로 신경이 곤두서 있을 것이다. 그 생각만 해도 짜증이 울컥 치솟았다.
매들린은 충격으로 멍한 상태에서 천천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가 전화를 해오다니, 지금도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와 나눈 대화 역시 믿어지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가 다짜고짜 전화로 청혼을 한 것도, 그녀가 그 청혼을 받아들인 것도 다 현실이었다.
청혼이라니, 그의 청혼은........ 한 마디로 모욕적이었다. 그렇게 낭만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청혼을 받은 여자는 아마 이 지구상에 그녀 하나뿐일 것이다. 중요한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네'라고 대답했다는 점이었다. 아마 똑같은 상황이 수천 번 되풀이된다 해도 '네'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어쨌든 그녀는 1주일 내로 몬태나에 가 있어야 했다. 그 전에 처리해야 할 일이 뭐가 있지? 일단 아파트를 정리하고 짐을 싸야 겠지. 그리고 친구들에게 작별 인사도 해야 할 것이다. 아니, 병원부터 다녀오는 게 우선이다. 머릿속에서 온갖 생각이 휘몰아쳤다.
하지만 무엇보다 먼저 마음을 가라앉히고 현실적이 되어야만 한다. 리스는 그녀와의 결혼 생활에 그다지 기대를 안 걸고 있는 게 분명했다. 자기가 먼저 원한 결혼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런데 그가 다른 두 명의 지원자를 거절한 이유는 뭘까? 목장 생활을 결코 참고 견딜 만한 여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그토록 단호하게 거절했던 나를 울며 겨자 먹기로 선택할 수밖에 없을 만큼 끔찍한 여자들이었을까?
물론 리스가 자신을 원한다는 건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 역시 어떤 한 남자를 이렇게 갈망하는 게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그를 간절히 원했다. 하지만 그가 감기에 걸려 마구 짜증을 부리거나 그녀의 잘못이 아닌 일에 막무가내로 화를 내더라도 그를 원하는 마음이 여전할지 어떨지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리스가 화장기 없는 그녀의 맨얼굴이나 부스스한 머리를 봐도, 또 그녀가 괜히 우울해서 짜증을 부려도 여전히 그녀를 원할지 역시 의심스러웠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녀는 일단 산부인과 의사에게 피임약을 처방받기로 결정했다. 결혼 생활을 계속 유지할 수 있겠다는 판단이 섰을 때 아기를 가지는 게 나을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만일 결혼하자마자 덜컥 임신을 한 상태에서 결혼 생활이 파탄에 이른다면 사태가 복잡해질 것이다.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와 아무런 상의도 없이 피임약을 복용하는 것도 마음에 걸리긴 마찬가지였다. 만약 이게 정상적인 결혼이라면 리스와도 미리 상의를 했겠지만, 그들의 결혼은 어느 것 하나 정상적인 데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은가!
그녀는 지금 인생의 전환점에 서 있었다. 결혼과 동시에 그녀는 처녀에게 유부녀로, 도시 여자에서 시골 아낙네로 이제껏 익숙했던 삶과는 전혀 다른 삶을 감당해야 했다. 그것도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와의 결혼으로 말이다. 그녀는 아직 그가 좋아하는 음식이나 색상조차 몰랐다. 기분 상태에 따라 그의 표정이 어떻게 바뀌는지 따윈 더더욱 그랬다.
그녀가 리스 던컨에 대해 아는 거라곤 그가 자기만큼이나 상식이 풍부하다는 것과 지금껏 만났던 어떤 남자보다도 그녀에게서 격렬한 욕망을 불러 일으키는 힘이 있다는 것뿐이었다. 결국 머리보다는 가슴으로 그와의 결혼을 결정한 셈이었다.
리스는 아마 거창한 결혼식 따윈 아예 꿈도 꾸지 않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판사 앞에서 하는 법정 결혼식을 치르게 될 가능성이 제일 컸다. 그녀는 그렇게 되면 크리스틴과 로버트에게 증인이 되어달라고 부탁하기로 결정했다. 결혼식이야 교회에서 하든 법원에서 하든 아무 상관없지만, 생판 모르는 사람들을 증인으로 세우는 것보다는 하나뿐인 오빠와 절친한 친구를 증인 삼아 결혼식을 올리는 게 훨씬 의미가 있을 테니까.
그러나 로버트는 그녀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실망스런 반응을 보였다.
[네가 그 남자에게 푹 빠졌다는 건 알지만, 좀더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는 게 낫지 않겠니? 넌 그사람을 지금까지 딱 한 번밖에 보지 못했어. 그런데도 그와 결혼을 하겠다니....... 만약 그가 사실은 사기꾼이었다거나 강간범이었다거나 하는 얘기라도 들리면 그땐 어떡할래?]
[말했잖아요. 그이는 완벽하게 신사적으로 행동했다고 말이에요.]
[그건 그랬다 치고, 너는? 너도 완벽한 숙녀처럼 행동했니?]
[난 내가 한 번 맡은 일은 끝까지 잘해내는 편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지금껏 단 한 번도 내 입으로 스스로가 완벽하다는 말은 한 적이 없다구요.]
로버트는 그녀의 볼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벌써 그 남자를 네 걸로 삼기로 단단히 작정을 한 모양이구나, 그렇지?]
[이건 내게 주어진 일종의 기회라고 봐요. 그래서 그 사람이 마음을 바꾸기 전에 기회를 잡을 작정이에요. 그 사람을 납치해서라도 꼭 결혼하고 말 거예요.]
[그 남자는 아마 깜짝 놀랄 거야.]
로버트가 생각에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너의 그 느긋한 걸음걸이와 부드러운 목소리 뒤에 아무도 못 말리는 고집쟁이가 숨어 있다는 걸 과연 그 남자가 아는지 모르겠다.]
[물론 몰라요. 내가 그렇게 바보는 아니잖아요. 어차피 결혼하고 나면 저절로 알게 될 텐데, 미리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있겠어요?]
그녀는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난 언제쯤 그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거니?]
[아마 결혼식 날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그러니 그날은 만사 제쳐놓고 꼭 내 결혼식에 참석해 줬으면 좋겠어요.]
[알았다. 내 무슨 일이 있어도 꼭 가마.]
크리스틴은 훨씬 더 부정적이었다.
[넌 목장 생활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서 그래.]
그녀는 불길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거긴 아무것도 없다구, 알아? 이웃도 없고, 영화나 연극, 오페라나 음악회 같은 구경거리도 전혀 없는 곳이야.]
[하지만 공해도 없고, 현관에 여섯 개씩 자물쇠를 설치할 필요도 없고, 또 장보러 가다가 소매치기를 당할 위험도 없잖아.]
[넌 아직 한 번도 소매치기를 당한 적이 없잖아!]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늘 있었지. 내 주위에도 몇 번씩이나 소매치기를 당한 사람들이 꽤 있다구.]
[모든 일에는 다 가능성이 있는 법이야. 언젠가는 내가 결혼할 가능성도 있고, 하지만 난 숨을 죽이고 그때를 기다리진 않을 거야. 아, 이건 그리 적절한 비유가 아닌 것 같다. 어쨌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난 최소한 그게 어떤 삶인지 알고 있다는 거야. 목장주의 아내는 정말 고되고 외로운 삶을 살 수 밖에 없어. 그런데 넌 그런 삶을 참아낼 타입이 아니라구!]
[친애하는 친구 양. 사실은 정반대야. 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만큼이나 혼자 있는 것도 좋아해. 그리고 설사 외몽고에서 살아야 한다 해도 난 그 사람과의 결혼을 감행할 거야.]
크리스틴은 흠칫 놀란 얼굴이었다.
[오, 하느님 맙소사!]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너, 사랑에 빠졌구나.]
매들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그 사람과 결혼하고 싶어 안달인 거라구.]
[그렇다면 이 갑작스런 열병을 이해할 수도 있지. 그 사람도 너와 같은 감정이니?]
[아직은 아니야. 하지만 그이도 나와 같은 감정이 들도록 최선을 다할 참이야.]
[그럼 내가 너한테 결혼식 전에.......... 그러니까 뭐랄까, 구애 단계를 거쳐야 하는 게 아니냐고 말해봤자 내 입만 아픈 상황인 거니?]
매들린은 입술을 쑥 내밀고 잠시 생각해 잠겼다.
[아니, 내 생각엔 네 입이 아프다기보다는 쇠귀에 경 읽기가 될 것 같은데? 어쨌든 난 그 남자와 꼭 결혼하고 말 테니까.]
결연하게 선언하는가 싶던 매들린이 이내 호소하는 듯한 얼굴로 친구를 바라보았다.
[오, 크리스틴, 난 네가 꼭 결혼식에 참석해 줬으면 좋겠어.]
[물론 가고 말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네 결혼식엔 참석할 테니까 걱정일랑 붙들어 매. 너의 그 완벽한 남자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죽겠으니까.]
[난 그이가 완벽한 남자라고는 말하지 않은 것 같은데?]
두 여자는 동시에 폭소를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