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컨의 청혼-2화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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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는 예정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다. 매들린은 마중 나온 사람들을 하나씩 유심히 살펴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자시을 기다리는 것 같은 남자는 눈에 띄지 않았다. 약간이나마 시간을 벌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자 절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아마도 생각했던 것보다 신경이 더 곤두서 있었던 모양이었다.

화장실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고 밖으로 나오던 매들린은 안내 방송에서 자기 이름이 호명되자 화들짝 놀랐다.

[매들린 패터슨 양은 즉시 안내 데스크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매들린 패터슨 양은 지금 즉시 안내 데스크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마중 나온 분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녀의 심장이 흥분으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를 만나는 순간이 바로 눈앞에 와 있는 것이다. 엄청난 기대감과 호기심이 그녀를 덮쳐왔다. 그녀는 애써 차분하게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기대감으로 반짝반짝 빛을 발하고 있었다. 공항 한복판에 자리잡은 대형 분수를 쳐다보면서 그녀는 흥분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다. 그러니 긴장이 되는 것도 당연하지 않겠는가!

잠시 후 안내 데스크에 편안히 기대서 있는 남자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그 남자임이 분명했다. 비록 모자 때문에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균형 잡힌 건장한 체격이 인상적이었다. 문득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갑자기 자신이 어쩌다가 이런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됐는지 기가 막혔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때늦은 후회였다. 예의바르게 그와 인사를 나누곤 헤어지는 수밖에.

남자가 문득 그녀를 향해 돌아서더니 몸을 똑바로 했다. 그의 찌르는 듯한 시선이 그녀에게로 날아와 꽂혔다.

다음 순간 그녀는 생전 처음 '감전되었다'는 말의 의미를 절감했다. 지금처럼 냉정을 완전히 잃은 것도 생전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다. 그녀는 공항 한가운데 문자 그대로 얼어붙었다. 무슨 묵직한 물건으로 세게 얻어맞은 듯 머릿속이 멍한 가운데 심장 박동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게다가 호흡까지 곤란해졌다. 그녀는 쿵 수리가 들리고 나서야 자신이 여행 가방을 떨어뜨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스스로가 바보처럼 느껴졌지만 그를 바라보는 걸 멈출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감정은 단지 흔한 욕망일 뿐이다. 저 사람은 생전 처음 보는 남자가 아닌가!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그녀의 내부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슬며서 고개를 쳐들며 항의했다. 그 항의를 듣는 순간 그녀는 돌연한 공포를 느꼈다.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이건 단지 욕망에 불과하다!

그는 결코 눈에 확 들어오는 외모를 가진 남자는 아니었다. 뉴욕에는 그보다 더 근사하게 생긴 남자들이 발에 채일 정도로 많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말이다. 그러니 잘생긴 외모 때문에 이런 감정을 느끼는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독히도 매력적이었다. 가장 원시적이고 본능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기에 전혀 모자람이 없을 정도로! 지극히 간단한 동작 하나에도 땀에 젖은 탄탄한 몸과 구겨진 시트를 떠올리게 만들 정도로 남성미와 관능이 철철 넘쳐흘렀다.

맙소사, 왜 저런 남자가 아내를 구한다는 광고를 냈을까?

그는 적어도 190 센티미터는 되어 보였으며, 온통 근육으로 뭉친 듯한 남성적인 체구였다. 그리고 얼굴은 햇볕에 그을린 건강한 구릿빛이었고, 모자 아래로 보이는 머리카락은 거의 흑발에 가까운 진한 갈색이었다. 강인해 보이는 턱과 선명한 윤곽을 그린 입술도 시선을 끌었다. 소매를 걷어올린 평범한 흰 셔츠에 낡은 청바지, 그리고 여기저기 흠집이 난 낡은 부츠를 신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멋져 보였다.

그녀는 낯선 남자로 인해 촉발된 감각의 혼란을 회복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자신의 시선이 쉴새없이 그의 모든 걸 샅샅이 살펴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다시금 혼란스러워지고 말았다.

이토록 한순간에 관능을 타오르게 하는 남자를 만나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던 그녀였다.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러운 것도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리라. 그렇다고 이대로 멍청하게 서 있으면 어떡하니? 그녀는 스스로를 다그쳤다. 그럼 어떻게 해? 이대로 도망쳐 버릴까? 이성은 이대로 돌아서서 도망치는 게 제일이라고 그녀를 재촉했다. 하지만 그녀는 마치 제자리에 얼어붙은 듯 한 발짝도 움직일수가 없었다.

그녀를 본 순간 리스의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은 곧바로 그녀를 데리고 침대로 가고 싶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를 아내로 삼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혹시나 이런 여자가 나타나면 어쩌나 걱정스러워했던 바로 그런 타입의 여자였다. 목장 생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우아하고 세련된 도시 여성 말이다.

딱 달라붙는 탑 위로 세련된 흰색 정장을 걸친 그녀는 오랜 비행기 여행에도 불구하고 방금 전에 갈아입기라도 한 듯 주름 하나 잡히지 않은 완벽한 옷매무새를 하고 있었다. 무릎 길이의 타이트 스커트 아래로 드러난 멋진 다리를 본 순간 그는 온몸이 욱신대는 걸 느끼고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그건 그의 실수였다. 다음 순간 그녀의 잿빛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친 그는 기겁을 하고 말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푸른 기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한 회색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당황한 듯 휘둥그레진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온화해 보였다. 그런데 '당황한 듯' 이라니?

리스는 그제서야 그녀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제자리에 얼어붙은 듯 서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녀의 여행 가방 역시 바닥에 떨어뜨려져 있는 상태였다.

그는 무의식중에 앞으로 한 걸음 나서서 가느다란 그녀의 팔뚝을 잡았다.

[패터슨 양, 괜찮습니까?]

매들린은 그의 손길을 느낀 순간 저도 모르게 온몸을 떨었다. 상상했던 것처럼 강인한 손길이었다. 하지만 단지 팔뚝을 잡힌 것만으로도 이토록 격렬한 감정에 휩싸이다니! 그녀는 당장이라도 그의 품으로 뛰어들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당황하고 말았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마지막 남은 이성조차 어디론가 사라지기전에 어서 그에게서 벗어나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뒤돌아서 도망치는 대신 남아 있는 자제력을 몽땅 끌어모아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던컨 씨?]

매혹적인 목소리였다. 약간 초조한 기색이 배어 있긴 했지만 말이다.

리스는 그녀의 팔뚝을 잡았던 손을 내려놓고 그녀와 악수를 했다. 그녀는 금으로 된 자그마한 링 귀걸이 외에는 아무런 장신구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 점 역시 그의 취향에 딱 맞았다. 그는 손가락마다 반지를 주렁주렁 낀 여자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나 그녀처럼 가느다란 손가락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그는 여전히 그녀의 손을 잡은 채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괜찮습니까?]

매들린은 자신의 눈동자에 어린 표정을 감추려는 듯 눈을 깜박였다.

[네, 고마워요.]

그녀는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는 대신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에 대한 욕망 때문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물론 좀더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다면 이 어색한 분위기를 약간이나마 누그러뜨릴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지금의 그녀로선 아무렇지도 않은 어조를 가장하는 것만으로도 최선을 다한 셈이었다.

그들은 옆으로 다른 사람들이 스쳐 지나가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은 듯 서로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리스는 모자 아래로 표정을 감춘 채 그녀를 관찰하고 있었고, 매들린은 그가 지극히 남성적인 시선으로 마치 값이라도 매기듯 자신을 위아래로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며 그저 서 있었따. 하지만 관찰 결과 자신이 그의 마음에 들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었다.

비록 모자 테두리에 가려져 있긴 했지만, 그녀는 그의 눈동자가 드문드문 하얀 반점이 박힌 어두운 청록색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눈가에 잡힌 주름은 웃어서 생긴 건 전혀 아닌 듯했다. 과연 지금껏 단 한 번이라도 긴장을 푼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엄격하고 단호해 보이는 얼굴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그가 거친 삶과 힘든 노동에 익숙한 남자라는 건 분명했다.

[짐을 찾으러 갑시다.]

그가 불쑥 말을 꺼냈다. 거칠고 무뚝뚝한 어조였다.

[저거예요.]

매들린은 자신의 여행 가방을 흘끗 눈짓으로 가리켰다.

[이게 전부요?]

[네.]

그렇다면 화려한 옷차림으로 내게 깊은 인상을 주려는 계획 따윈 없는 모양이군. 리스는 그녀의 가방을 집어들며 냉소적으로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있는 게 더 강한 인상을 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지도 모르지.

그녀는 한 마디로 걸어 다니는 매혹덩어리였다. 하지만 가난한 목장주의 아내감은 절대 아니었다. 그는 한눈에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지금 당장 그녀를 돌려보내는 게 제일 이성적인 결정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내부에 존재하는 지극히 남성적인 본능이 굳이 그럴 필요가 어디 있느냐고 속삭이며 그를 유혹하는 게 문제였다. 어차피 내일이면 뉴욕으로 돌아가겠다고 나설 여자인데, 지금 당장은 그녀와 함께 있는 걸 즐기면 그만이지 않겠느냐고 말이다.

목장 생활은 결코 쉬운 게 아니었다. 도시 여자들에게는 더더욱 그랬다. 지금 눈앞에 서 있는 이 여자처럼 목장 생활에 대해 아무런 개념조차 없는 여자라면 그의 목장을 한 번 훑어본 즉시 돌아가겠다고 나설 게 뻔했다. 그렇다면 오늘 하루 정도는 아무런 죄책감 없이 그녀와 즐겨도 되지 않을까?

일단 목장으로 돌아가서 허드렛일만 대충 마치고 재스퍼의 식당으로 외식을 하러 나가는 거다. 거긴 식사는 물론 춤도 가능한 곳이니 그녀와 춤을 추면서 여성적인 체취에 한껏 취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러고 나서는........ 또 누가 알겠는가? 오늘밤 그녀와 한 침대를 쓰게 될는지? 물론 그런 일이 있게 된다면 미리 그전에 그녀가 목장 생활에는 맞지 않는다는, 목장주의 아내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얘기를 해야 할 것이다. 만에 하나 오해가 없도록 말이다.

리스는 그녀를 공항 밖으로 데리고 나가면서 자연스럽게 매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한때 모든 여자들을 매혹시켰던 그 특유의 미소를 지은 건 물론이었다. 아주 먼 과거의 일인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도 불구하고 아직 그때의 감각이 조금은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더더욱 다행인 건 그녀가 몬태나 지방에 대한 궁금증을 표시하며 먼저 말을 걸었다는 점이다. 리스는 그녀의 질문에 간단히 대답을 해주는 틈틈이 그녀의 표정 변화를 유심히 관찰했다.

사실 그녀는 눈에 확 띄는 미인은 아니었다. 다만 어딘지 모르게 사람의 시선을 잡아끄는 데가 있다고나 할까? 코도 약간 휜 데다 콧등에는 온통 주근깨가 흩뿌려져 있었다. 끌로 다듬은 듯한 광대뼈에도 주근깨 천지였다. 하지만 늘씬하게 뻗은 다리처럼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축에 드는 광대뼈이긴 했다. 입술 역시 도톰하진 않았지만 입매가 아름답고 표정이 살아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동자는 지금껏 그가 본 것 중 가장 깊은 회색이었고 마치 꿈을 꾸는 듯해 보였다. 하지만 가까이에서 쳐다보면 모든 걸 꿰뚫는 듯한 지성이 엿보였다. 만일 그가 재앙과도 같은 결혼 생활과 이혼을 겪기 전에 그녀를 만났다면 단번에 그녀를 차지해 버렸을 것이다.

젠장, 그녀의 긴 다리가 자신의 허리에 휘감겨 있는 광경을 떠올린 것만으로도 성적 흥분이 일자 그는 속으로 욕설을 중얼거렸다. 매들린은 결코 자신이 원하는 아내감이 아니었다. 그녀는 아마 지금껏 황소 같은 건 한 번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생각을 떠올려 봐도 그녀가 불러일으킨 육체적인 반응은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그렇다고 이제껏 누군가에게 첫눈에 반한 경험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물론 매들린 처럼 복부를 한 대 걷어 채인 듯한 충격을 준 여자는 하나도 없었지만.

그가 매들린에게 느끼는 감정은 단순히 '끌린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것이 결코 아니었다. 그보다는 훨씬 강렬하고 갑작스러운 감정이라고나 할까? 그게 아니라면 바로 여기 공항 한복판에서 그의 육체가 관능적인 열기에 휩싸이는 일은 절대 없었을 것이다.

리스는 그녀를 만지고 싶어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그의 머릿속은 그녀의 가슴과 엉덩이를 감싸쥔 채 마치 맹인이 점자를 읽듯이 매끈하고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그녀의 육체를 어루만지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목적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여자였다.

그는 문득 주변의 다른 남자들이 그녀를 흘끗흘끗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하긴 저 사람들도 일부러 저러는 건 아닐거야. 그저 무의식중에 그녀에게 시선을 줄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바로 나처럼 말이야.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이해하고 넘어가려 해도 그녀를 차지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의 그가 감당할 수 없는 존재였다. 물론 한때는 그에게도 돈이 넘쳐나던 시절이 있었다. 매들린 역시 그 당시의 그 만큼이나 넉넉하게 살아온 게 분명했다. 유명 디자이너의 작품이 분명한 세련된 옷을 걸치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달콤하 향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그녀가 한 병에 수백 달러는 족히 나가는 향수를 뿌렸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문제는 지금의 그가 유명 디자이너의 옷은 고사하고 향수조차도 감당할 수 없는 처지라는 점이었다.

[뉴욕에서는 무슨 일을 하고 있소?]

리스는 그녀와 나란히 공항 밖 밝은 햇살 속으로 한 걸음 나서며 불쑥 질문을 던졌다.

그녀는 콧등에 주름을 잡으며 얼굴을 찌푸렸다.

[의붓오빠 소유의 회사에 다니고 있어요. 일종의 명예직이나 마찬가지죠. 그저 자리만 지키고 있으니까요.]

그녀는 이미 사표를 제출한 상태라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혹시나 그와 결혼을 하고 싶어 미리 사표까지 내고 온 게 아닌가 생각할까 싶어서였다. 사실 사표를 낸 것과 그와의 결혼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요동치는 맥박은 그의 명령이 떨어지기만 한다면 순식간에 이곳으로 옮겨올 수도 있다는 증거나 마찬가지였다.

[목장에서 살아본 적이 있소?]

그는 이미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슨 확이이라도 하듯 물었다.

[아뇨.]

매들린은 고개를 돌려 그를 올려다보았다. 8센티미터 가까운 힐을 신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는 그녀보다 한참 키가 컸다.

[하지만 말을 타는 법은 알고 있어요.]

사실 그녀는 꽤 승마 솜씨가 좋은 편이었다. 버지니아 대학 시절 거의 말에 미쳐 있던 룸메이트 덕분이었다. 하지만 던컨의 질문이 의미하는 건 그런 식으로 취미 삼아 배운 승마 경험에 대한게 아니었다. 그의 말은 모두 경주마처럼 대단한 값어치를 지닌 작업용 말들이니까. 결국 그녀가 그의 아내 자리에 적당한 여자가 아니라는 증거가 하나 더 추가된 셈이었다.

마침내 트럭을 세워둔 곳에 도착한 리스는 그녀를 흘끗 쳐다보았다. 먼지가 잔뜩 묻은 낡아빠진 트럭을 보고 그녀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해서였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그가 트럭 문을 열고 그녀의 가방을 들어놓는 걸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하릴없이 옆으로 물러서서 그녀가 차에 올라타기를 기다렸다.

한참을 트럭 발판 위로 올라서려고 낑낑대던 매들린은 결국 당혹스런 표정으로 한 발짝 물러서고 말았다. 타이트 스커트를 입은 바람에 트럭 발판 위로 다리를 올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래서야 당신이 날 쓸데없는 허영심 덩어리라고 생각한다 해도 어쩔 수 없겠군요.]

그녀는 싱긋 미소를 짓고는 치맛자락을 위로 끌어올렸다.

[당신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싶어서 일부러 골라 입은 옷인데...... 차라리 낡은 바지를 걸치고 올 걸 잘못했다 싶어요.]

그녀가 치맛자락을 끌어올리는 바람에 눈부시게 하얀 허벅지가 드러나자 리스는 숨이 막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열기가 그의 몸 전체를 훑고 지나갔다. 만일 그녀가 치마를 1센티미터라도 더 올린다면 더 이상 그녀에 대한 갈망을 억누를 수 없으리라.

그는 돌연 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감아쥐고 트럭 의자에 올려놓았다. 매들린은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깜짝 놀란 듯 작은 신음을 내지르며 그의 팔을 움켜잡았다.

[다시는 내 앞에서 치마를 끌어오리지 마시오! 내가 강제로 당신을 덮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면 말이오!]

그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가까스로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하지만 방금 전 그녀의 치마 아래로 드러난 길고 늘씬한 다리가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리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 다리가 격한 사랑의 행위를 나누는 동안 자신의 허리에 관능적으로 휘감겨 있는 모습이 아찔하게 떠올랐다.

매들린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숨이 막힐 듯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그는 그녀를 온통 태워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 조용하지만 격렬한 욕망의 빛에 사로잡혀 여저니 그의 팔을 움켜쥔 채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손바닥 아래로 강철처럼 단단한 근육질의 팔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느껴졌따. 그제서야 매들린은 그 역시 자기만큼이나 혼란스러운 상태라는 걸 감지할 수 있었다. 다음 순간 그녀의 심장 박동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사과의 말을 중얼거렸다.

[미안해요. 일부러 그랬던 건 아니었어요. 난 당신을........]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차마 그를 자극하려는 의도는 없었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그녀에게 있어서 만난 지 채 하루도 안 된 낯선 남자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건 그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니 혹시나 그의 눈빛에 어린 감정을 그녀가 잘못 이해했을 가능성도 많았다.

비록 그녀 자신은 그에게 뜨거운 욕망을 느끼고 있는 게 사실이지만, 그게 상대방 역시 마찬가지일 거라는 증거는 아니니까 말이다.

그는 멍하니 그녀의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치마는 아직도 허벅지 위로 올라가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그의 손 역시 여전히 그녀의 허리를 움켜쥔 채였다. 그는 그녀가 놓아달라는 듯 몸을 비틀자 그제서야 황급히 손을 풀었다.

[오, 알았소. 이제 괜찮소.]

그는 허둥지둥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중얼거렸다. 여전히 귀에 거슬릴 정도로 푹 잠긴 목소리였다.

맙소사, 내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전혀 괜찮지 않은데, 대체 뭐가 괜찮다는 거냐고! 그녀의 치맛자락을 좀더 위로 끌어올리는 거야. 그럼 곧바로 그녀를 가질수 있잖아?

하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그녀의 다리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천천히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온몸의 근육이 그의 행동에 항의라도 하듯 일제히 딱딱하게 굳어지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대로 그 충동에 굴복한다면 그의 자제력은 산산이 부서지고 말리라.

그가 다시 말을 꺼낸 것은 빌링스 시내를 빠져나가고도 한참이 지나서였다.

[혹시 배고프지 않소? 조금만 더 가면 간단히 요기를 할 수 있는 식당이 하나 있는데......]

[난 괜찮아요.]

매들린은 차창 밖 시골 풍경을 넋이 나간 나머지 꿈꾸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갑자기 지금껏 익숙했던 거대한 빌딩 숲 풍경이 너무나도 보잘 것 없어 보였다. 끝없이 펼쳐진 짙푸른 하늘과 드넓은 평원이 그녀의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어 주었다. 마치 진정한 삶의 시작을 알리는 것 같은 풍경이었다.

[당신 목장까지는 얼마나 더 가야 하죠?]

[한 2백 킬로미터쯤 남았소. 이제 세 기간쯤 더 가면 되지.]

그녀의 눈이 깜짝 놀란 듯 휘둥그레졌다. 그가 빌딩스까지 마중 나와준 게 얼마나 큰일인지 미처 몰랐었던 것이다.

[빌딩스에는 자주 나오는 편인가요?]

그는 목장이 얼마나 고립된 지역에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그런 질문을 한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오.]

그는 간단히 대답했다.

[그럼 오늘은 날 데리러 일부러 나온 거로군요?]

[아침에 볼일도 좀 있었소.]

그는 아침 일찍 은행에 들러 목장의 가장 최근 재정 상태를 확인했었다. 지난 수년 동안 그랬듯이 아직도 거의 파산 직전의 상태이긴 했지만, 그래도 지금은 파산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이 보였다. 은행 직원 역시 목장의 재정 상태에 만족을 표시했으니까.

매들린은 눈치를 살피는 듯한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럼 새벽 일찍부터 나왔겠네요?]

[거의 그렇소.]

[피곤하겠군요.]

[목장에선 매일 새벽부터 일을 시작해야 한다오. 당신도 나와 함께 있을 땐 아침 일찍 일어나는 데 익숙해져야 할 거요.]

그녀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여기선 아침 일찍 일어나 새벽 경치를 둘러보는 게 침대에 누워 빈둥거리는 것보다 훨씬 나을 것 같군요. 정말 장관일 거예요.]

리스는 목장에서 맞는 새벽 풍경을 떠올려 보았다. 그녀의 말대로 그 광경은 정말 장관이었다. 하지만 탄성을 토하며 그 장관을 지켜본 게 언젯적 일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새벽 풍경이야 어디든 마찬가지 아니겠소? 아마 뉴욕의 새벽 풍경과 별다를 게 없을 거요.]

매들린은 그의 냉소적인 어조를 무시한 채 킬킬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글쎄요. 하지만 전 주로 일출 대신 일몰을 보는 편이죠. 제 아파트가 서향이라서요.]

그는 수많은 새벽을 당신과 함께 맞이하고 싶다는 말이 튀어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삼켰다. 그들이 함께 맞이하는 새벽은 내일 단 한 번밖에 없을 것이다. 매들린은 그의 아내감으로 적합한 그런 여자가 아니니까 말이다.

그는 셔츠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담뱃갑을 꺼내 한 개비 입에 물었다. 그리고는 라이터를 찾아 바지 주머니를 더듬거렸다. 그녀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연 건 바로 그때였다.

[당신, 혹시 담배 피워요?]

리스는 마치 그가 무슨 범죄자라도 되는 듯 쳐다보는 그녀의 시선을 느끼곤 짜증스런 표정으로 담뱃불을 붙이고 연기를 내뿜었다.

[그렇소.]

그가 도전적으로 말했다.

[피워도 괜찮겠소?]

누가 뭐라던 간에 꼭 담배를 피우고야 말겠다는 단호한 의지가 담긴 어조였다.

매들린은 다시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난 내게 무슨 해가 될까 봐 당신이 담배를 피우는 걸 반대하는 게 아니에요. 단지 누가 됐든 담배를 피우는 걸 보기가 싫은 거죠. 흡연은 러시아 룰렛 게임이나 마찬가지라는 게 내 지론이거든요.]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오. 어찌됐든 다른 누군가의 목숨이 아니라 자기 목숨을 가지고 게임을 하는 거니까 다른 사람이 상관할 필요 없는 거 아니오?]

그녀는 그의 퉁명스러운 대답에 입술을 꼭 깨물었다. 아무래도 그의 개인저인 습관을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참견한 것 자체가 실수였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미안해요.]

그녀는 정중하게 사과했다.

[내가 뭐라 말할 문제가 아니었는데 주제넘게 나선 것 같군요. 그저 갑자기 당신이 담배를 피워 무는 바람에 당황한 나머지 그만.........]

[난 도무지 이해를 못하겠군. 대체 뭣 때문에 당황했다는 거지? 설마 당신 주변엔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뜻은 아니겠지? 아니면 담배를 피우는 사람하곤 아예 상종을 하지 않았던 거요?]

비꼬는 듯한 어조였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런 눈치도 못 챈 듯 진지하게 대답했다.

[꼭 그런 건 아니에요. 내가 상대하던 고객 중 몇 명은 담배를 피우니까요. 하지만 내 친두들은 아무도 담배를 피우지 않죠. 나 역시 한 번도 담배를 피워본 적이 없구요. 굳이 변명을 하자면 아무래도 할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난 할머니와 꽤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거든요. 제 할머니는 꽤나 구시대적인 사고 방식을 가진 분이셨죠. 그렇다고 내가 뭐 요조숙녀처럼 군다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흡연 문제에 관한 한 할머니의 영향을 특히 많이 받은 건 분명해요. 할머니는 그래도 남성의 흡연에 대해선 관대하신 편이었지만, 난 남자든 여자든 담배를 피우면 건강을 해치는 건 마찬가지라는 생각이에요.]

그는 짜증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간신히 웃음을 참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건 즉 당신도 화가 나면 욕설을 중얼거리기도 하고 술도 마실 줄 안다는 뜻이오?]

[그럼요. 내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얼마나 공격적으로 변하는지 알아요?]

그녀는 순순히 인정하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음주 문제에 대해서라면........... 릴리 할머니는 여자도 와인 한 잔 정도는 마실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셨어요. 그 정도는 건강에도 좋다고 하시면서요. 어쨌든 나도 대학에 다닐 땐 맥주 한 잔 정도는 단숨에 들이킬 정도였죠.]

[단숨에 들이켰다고?]

[난 그게 대학생들이 술을 마시는 방법에 대해 설명하기엔 딱알맞은 표현이라고 생각해요.]

리스 역시 그녀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 자신의 대학 생확을 되돌아봐도 그랬으니까.

[그렇다고 내가 술 마시는 걸 즐긴다는 뜻은 아니니까 오해는 하지 마세요.]

그녀는 계속 말을 이었다.

[어쨌든 난 릴리 할머니의 가르침을 최소한 반 정도는 지키고 있다고 말할 수 있어요. 그 정도면 그리 나쁘진 않은 편이죠.]

[당신 할머니께선 도박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씀도 없으셨소?]

매들린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가엔 진지하면서도 부드러운 표정이 감돌고 있었다. 그리고 회색 눈동자엔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했다.

[릴리 할머니는 인생 자체가 도박이라고 믿으셨죠.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자신의 운을 시험하며 살도록 운명지어진 존재라고 생각하셨던 거예요.]

그게 바로 릴리 할머니가 손녀인 그녀에게 물려준 인생관이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지금 그녀가 저 낯선 이방인가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이다!

리스가 제 3자의 시선으로 자신의 집을 바라보게 된 건 정말 오래간만의 일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지독한 수치심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건물 외벽은 군데군데 페인트칠이 벗겨져 있었고, 잡초가 무성한 정원은 차마 정원이라 하기에 창피할 정도로 처참한 상태였다. 트럭이나 트랙터의 부품을 갈아 끼우는 게 페인트칠보다 훨씬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가축 사료 또한 화단의 잡초를 뽑아주거나 잔디밭에 제초제를 뿌려주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었다.

지난 7년 동안 그저 살아남기에만 급급한 나머지 우아한 생활따윈 전혀 꿈도 꾸지 못했던 그였다. 물론 그렇다고 현재의 집 상태가 마음에 든다는 뜻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매들린에게 초라하기 그지없는 집을 보여주기가 싫었다. 하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 집 역시 인테리어 잡지에 실릴 정도로 화려하진 않았지만 누군가에게 보여주기가 창피할 정도는 절대 아니었다.

매들린도 건물 외벽의 페인트칠이 군데군데 벗겨져 있는 상태라는 걸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 문제도 아니었다. 단지 약간의 시간과 노력, 그리고 페인트만 있으면 곧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니까 말이다.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바로 현관 앞의 널찍한 베란다였다. 비를 피할 차양이 쳐진 베란다엔 그네도 매달려 있었다. 릴리 할머니의 집에도 저런 베란다가 있었다. 어린 시절 그녀는 종종 그네에 앉아 할머니가 만들어 주신 시원한 레모네이드를 마시며 나른한 여름 오후를 보내곤 했었다.

[이 집을 보니까 릴리 할머니의 집이 생각나는군요.]

그녀는 다시금 꿈꾸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리스는 조수석 쪽으로 돌아와 차문을 열고 그녀를 번쩍 안아올려 바닥으로 내려주었다. 그의 손길이 닿자 그녀는 화들짝 놀란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다시 한 번 당신 치마가 올라가는 걸 보며 내 인내력을 시험하고 싶은 마음은 없소.]

그는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그녀의 심장이 또다시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그는 트럭 안으로 손을 뻗어 그녀의 여행 가방을 집어든 다음 나머지 한 손으로 그녀의 팔을 잡았다. 두 사람은 뒷문을 통해 집안으로 들어갔다. 놀랍게도 뒷문은 열려 있었다. 하루 종일 집을 비우는데도 불구하고 문단속을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 그녀는 내심 깜짝 놀랐다.

뒷문은 흙 묻은 우비와 장화 등을 보관하는 다용도실 겸 세탁실과 연결되어 있었다. 왼쪽 벽에는 세탁기와 건조기가 나란히 놓여 있었고, 오른쪽 벽에는 모자와 코트, 판초와 밝은 노란색 우비 등이 걸려 있었다. 그곳을 나와서 작은 복도를 통과하자 바로 커다란 욕실이 나타났다. 아마도 목장 일을 마치고 진흙범벅이 되어 집으로 돌아오더라도 집 안을 더럽히는 일 없이 씻을 수 있도록 일부러 그렇게 배치해 놓은 듯했다.

그들은 왼쪽 복도를 돌아 부엌으로 들어갔다. 환한 햇살이 내리쬐는 널찍한 부엌 안엔 온갖 조리 도구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한쪽 구석에는 자그마한 간이 식탁이 놓여 있었다. 매들린은 의외라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 자신이 둘러보고 있는 현대적인 설비를 갖춘 널찍한 주방보다는 독신 목장주가 흔히 사용할 법한 훨씬 작고 간단한 요리만 가능한 그런 부엌을 상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집에는 방이 열 개가 있소.]

그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 중 여섯 개는 아래층에 있고, 나머지 네 개는 2층에 있지.]

[한 사람이 쓰기엔 굉장히 큰집이네요.]

그의 뒤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가면서 그녀가 감상을 말했다.

[그래서 내가 아내를 맞이하려는 거요.]

그는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 집은 내가 갓 태어났을 때 부모님이 직접 지으신 집이오. 난 내가 자란 이 집을 내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소.]

그의 아이를 갖는다는 생각만으로도 그녀는 숨이 막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는 2층 복도를 가로질러 그녀가 사용할 침실로 안내했다. 방에 들어서자 하얀 침대보가 덮인 고풍스런 침대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창문에도 침대보와 똑같은 하얀색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녀는 부드럽게 탄성을 질렀다. 창가에는 오래된 흔들의자가 놓여 있었고, 반질반질한 나무 바닥에는 누군가 직접 짠 듯한 러그가 깔려 있었다. 나무 바닥만 해도 족히 한 재산 들어갔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모든 매력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모르게 텅 빈 듯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곧 그 허전한 느낌의 원인을 찾아냈다. 그 방에는 사람의 온기가 전혀 배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애써 그런 생각을 하지 않으려 했다. 이곳엔 지금 저 남자 혼자 살고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미처 손님용 방까지 꾸밀 여력이 없었을 것이다.

리스는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가 그녀의 여행 가방을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난 이만 목장에 나가봐야 하오.]

그가 약간 굳은 얼굴로 말했다.

[아무래도 한참 걸릴 것 같으니 당신은 그 동안 좀 쉬도록 해요. 먼저 목욕을 하고 싶다면 복도 오른쪽에 있는 욕실을 쓰시오. 내 방에도 욕실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느긋하게 사용해요. 혹시나 내가 불쑥 그 욕실로 들어서면 어쩌나 하는 걱정일랑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오.]

하지만 매들린은 그가 돌아올 때까지 하루 종일 무료하게 지낼 생각 따윈 털끝만큼도 없었다.

[저도 같이 가면 안 되나요?]

[같이 가도 지루하긴 마찬가지일 거요. 게다가 그리 깨끗한 곳도 아니고.]

그녀는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저도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지금이야 큰소리를 치지만, 지금 신고 있는 저 하이힐에 퇴비를 만들려고 모아둔 분뇨가 한 방울이라도 튀게 되면 당장 마음이 바뀌겠지?

[좋소.]

마침내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녀가 눈가에 주름을 잡으며 생긋 웃었다.

[그럼 딱 3분만 기다려 줘요. 옷을 갈아입고 나올 테니까.]

리스는 그녀의 말을 무시해 버렸다. 경험상 이런 경우 3분은 최소한 30분 이상 걸린다는 뜻으로 알아들으면 된다. 세련된 여자일수록 그 시간은 더 길어지게 마련이다. 지금껏 그가 본 경우 중에는 세 시간까지 걸린 여자도 있었다. 매들린 역시 아무리 봐도 세 시간은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난 헛간에 가 있을 테니 준비가 되면 바로 그곳으로 와요.]

그가 나가자마자 매들린은 재빨리 입고 있던 옷을 벗어버리고 미리 준비해 온 청바지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역시 이런 장소에 딱 어울릴 거라 생각하고 챙겨온 낡은 운동화로 갈아 신었다. 아슬아슬한 하이힐을 신고 목장을 어슬렁거릴 생각 따윈 애초부터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소매 없는 면 티셔츠를 뒤집어 쓰곤 부리나케 문을 열고 밖으로 튀어나갔다.

리스는 그때 마침 자기 방에서 셔츠를 갈아입고 나와 막 아래층으로 내려가려던 참이었다. 그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곧 티셔츠 밖으로 드러난 어깨와 목덜미로 향했다.

매들린은 그의 지극히 남성적인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와 가슴에 고정되자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갑자기 온몸이 뜨거워지고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저렇게 노골적으로 욕망을 드러낸 남자의 시선을 받아보기는 정말 처음이었다. 민감한 젖꼭지가 얇은 면 티셔츠를 뚫어버릴 듯한 기세로 뾰족하게 솟아올랐다.

[정말 3분 만에 준비를 마치고 나올 줄은 몰랐소.]

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버릇이에요. 옷 고르는 데 그리 까다로운 편이 아니거든요.]

그럴 필요가 없을 테니까,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옷차림 따위는 아무 상관도 없었다. 그녀의 가슴과 길고 늘씬한 다리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침이 고일 정도니까 말이다. 지금은 비록 청바지 속에 감춰져 있지만, 그는 이미 그녀가 얼마나 쭉 뻗은 다리를 가졌는지 잘 알고 있었다. 바로 그때 침실 문을 닫으려고 그녀가 뒤돌아서는 바람에 청바지에 감싸인 멋진 엉덩이 곡선이 눈에 들어오자 저도 모르게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헛간까지 가는 내내 목장을 둘러보느라 연신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댔다. 집 뒤쪽에 위치한 널찍한 차고가 눈에 띄자 그녀는 그쪽을 가리키며 질문을 던졌다.

[차가 전부 몇 대나 있죠?]

[트럭밖에 없소.]

그는 무뚝뚝한 어조로 대답했다.

차고 옆에 위치한 건물 세 채도 지금은 텅 빈 상태였다. 그녀는 또다시 물었다.

[저 건물들은 뭐죠?]

[일꾼 숙소요.]

커다란 닭장 안에서 먹이를 쪼아대며 이리저리 돌아 다니는 하얗고 살이 통통하게 오른 암탉들을 발견한 그녀가 신기한 듯 입을 열었다.

[당신은 달걀도 자급자족하는군요.]

그는 입꼬리를 치켜올리며 씩 웃었다.

[우유도 직접 짜서 먹고 있소.]

[아주 효율적이군요. 정말 인상적이에요. 난 마지막으로 생우유를 먹어본 게 여섯 살 때였거든요.]

[그럼 뉴욕 토박이는 아닌 모양이군. 하긴 뉴욕 토박이라고 하기엔 억양도 좀 이상한 것 같고, 고향이 어디요?]

[버지니아요. 엄마가 재혼을 하시는 바람에 뉴욕으로 이사를 가긴 했지만 대학도 버지니아에서 다녔어요.]

[그럼 부모님이 이혼을 하신 거요?]

[아뇨, 사별이에요.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3년 만에 재혼을 하셨죠.]

[내 부모님은 1년 사이에 차례로 돌아가셨소. 아마도 서로 떨어져 사는 걸 견딜 수 없으셨던 모양이오.]

그는 헛간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가축 특유의 냄새와 퇴비, 건초, 사료 등의 냄새가 모두 혼합된 듯한 묘한 냄새가 물씬 풍기자 그녀는 커다랗게 심호흡을 했다. 자동차 매연보다는 훨씬 마음에 드는 냄새였다.

헛간은 생각보다 규모가 컸다. 옆쪽으로 마구간과 건초 저장고도 보였다. 하지만 마구간은 거의 비어 있었다. 목장 곳곳을 둘러본 결과 지금은 비록 어려운 지경에 처해 있지만 한때는 매우 풍요로운 곳이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리스처럼 자존심 강한 남자로서는 굉장히 참기 어려운 상황일 것이다. 매들린은 그의 손을 잡고 걱정 말라고, 곧 좋아질 거라고 말해주고 싶은 충동을 겨우 억눌렀다. 이 거대한 목장을 혼자 꾸려나갈 정도로 자존심이 강한 남자라면 그녀의 동정을 받아들일 리가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차라리 조용히 그를 돕는 게 최선이겠지만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그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옆으로 비켜서서 바라볼 수밖에.

그는 마방에 들어 있던 말 세 필을 마구간과 헛간 사이로 끌어 낸 다음 마방을 청소하고, 신선한 건초를 새로 깔고, 사료를 넣어 주고, 말들이 마실 물도 새로 넣어주었다.

매들린은 파도치듯 꿈틀거리는 그의 팔 근육을 홀린 듯이 쳐다보았다. 어느새 마방 청소를 끝낸 리스는 말 세 필의 발굽을 일일이 점검하고 닦아준 다음 다시 마방에 집어넣고 곧이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순한 젖소를 한 마리 끌고 와서 축사에 넣더니 소가 여물을 먹는 동안 젖을 짰다.

그가 뜨거운 거품이 이는 우유를 반쯤 든 통을 들고 집 안으로 들어가자 어디선가 우유 냄새를 맡은 고양이들이 야옹거리며 다가왔다.

[쉿!]

그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너희드은 어서 쥐나 잡으렴.]

매들린은 이제야 그를 도울 기회가 왔다는 걸 알아챘다. 그녀는 서둘러 부엌으로 달려가 수납장에서 깨끗하게 살균 처리를 마친 커다란 우유통을 꺼냈다.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우유통위에 거르는 천을 대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릴리 할머니 댁에서 해봤거든요.]

그녀는 만족스런 어조로 설명했다.

[그때는 너무 어려서 통에 든 우유를 부을 만한 힘이 없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도와드릴 수밖에 없었죠. 하지만 나중에 어른이 되면 할머니 대신 내가 생우유를 거르는 일을 맡겠다고 다짐했던 기억이 나네요.]

[그래서 결국 할머니 대신 그 일을 하게 됐소?]

[아뇨. 내가 학교에 들어가던 해에 할머니가 젖소를 팔아버렸거든요. 할머니 댁 주위에 빌딩들이 들어서기 시작하는 바람에 그럴 수밖에 없었죠.]

그는 생우유가 든 통을 내려놓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럼 이제야 겨우 당신이 생우유를 거를 기회가 온 셈이군. 자, 이건 내가 대고 있을 테니 당신이 우유를 걸러봐요.]

열심히 크림색 액체를 거르던 그녀의 입가에 어느 순간 뜻 모를 미소가 감돌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녀는 텅 빈 통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고마워요. 이제야 진정한 의미에서 성인이 되기 위한 통과 의례를 치른 것 같아요. 운전 면허를 땄을 때보다 더 벅찬 기분이에요.]

리스의 눈가에 주름이 잡히는가 싶더니 그가 활짝 미소를 지었다. 순간 매들린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제서야 자신이 이미 그에게 온통 마음을 빼앗긴 상태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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