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컨의 청혼
린다 하워드
김선영 옮김
그녀가 원하는 것은 오직 사랑뿐.......
목장 재건을 위해 모든 열정을 쏟아붓는 리스는 사랑이라는 감정보다는 아이를 낳아주고, 살림을 하면서 그의 생활을 복잡하게 만들지 않을 단순한 아내가 필요했다.
매들린은 신붓감을 찾는 리스의 광고를 보고 직접 그를 만나기로 결심한다. 그녀는 거칠고 남성적인 리스에게 첫눈에 반해버리지만 그는 매들린이 목장에 어울리지 않는다며 돌려보낸다. 어느날, 허탈감에 빠져있던 그녀에게 뜻밖에도 리스의 전화가 걸려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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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아내를 구해야 할 때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아내를 구하는 데 '사랑'을 염두에 두고 있지는 않았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고 어느 정도 분별력도 생긴 만큼 결혼에 있어서 '사랑'이 필수적인 것도 아니고, '사랑'만 가지고 하는 결혼이 반드시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오는 건 아니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리스 턴컨은 한때 사랑 때문에 바보가 된 것은 물론, 거의 모든 것을 잃은 경험이 있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선 안 될 터였다. 이번에는 바지 속에 있는 녀석에게 휘둘리는 대신 냉철한 이성으로 아내를 골라야겠다고 그는 결심했다. 고립된 목장에서의 삶에도 불만을 품지 않고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으며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에게도 좋은 엄마가 될 만한, 그리고 외모보다는 가족에게 더 신경을 쓰는 그런 아내감을 고를 참이었다. 미모는 더 이상 그의 배우자 선택 조건에 들어 있지 않았다. 예쁜 얼굴은 한번 혹했던 걸로 충분했다. 그는 건강한 성적 욕구를 가진 지극히 정상적인 남자였다. 그것만으로도 아이들을 갖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열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열정은 한때 그의 인생을 최악으로 만든 바 있었다. 그는 이제 신뢰할 수 있는 성실한 여자를 원했다.
문제는 그런 여자를 찾을 만한 시간이 별로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하루에 열두 시간 이상을 목장 일에 전념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지옥 같은 7년을 보낸 끝에 올해 들어 겨우 흑자로 돌아설 것 같은 희망이 보이긴 했지만, 소유지의 절반을 잃고 엄청난 양의 가축을 헐값으로 팔아 넘길 수밖에 없었던 일은 그의 영혼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자서 팔고 남은 소떼를 돌보며 빠듯한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었던 건 오로지 남은 것마저 잃어버릴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이를 악문 덕분이었다.
어쨌든 임금을 감당할 수 없어 일꾼들을 모두 내보낸 것은 물론 청바지 한 벌 살 여유도 없이 지난 7년 동안 헛간이나 집조차 수리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살았던 그와는 달리 그의 전처 에이프릴은 이혼과 동시에 결혼 전에 졌던 엄청난 채무를 깨끗이 해결한 것은 물론 맨해튼에 값비싼 의상이 가득한 아파트도 소유하게 되었다.
그녀가 요구한 위자료를 내주기 위해 그는 땅과 가축들을 팔고 은행 잔고를 몽땅 털 수밖에 없었다. 몇 대에 걸쳐 그의 가족 소유였던 목장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와의 결혼으로 2년 동안 문명으로부터 완벽하게 고립된 목장에서 지옥 같은 몬태나의 겨울을 두 번이나 겪어가며 끔찍한 결혼 생활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목장의 절반에 상응하는 현찰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하긴 그가 그 정도의 돈을 마련하려면 땅을 팔 수 밖에 없다는 사실 따윈 그녀에게 아무 상관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에이프릴의 아버지가 몬태나를 포함한 서부 전역에서 손꼽히는 실업계의 거물인 반면 자신은 그녀가 요구하는 위자료를 모두 주고 나면 알거지가 될 거라는 사실을 판사에게 호소해도 소용없었다.
다시는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으리라. 이번에 결혼할 여자와는 기필코 혼전 계약서를 작성할 것이다. 그의 아이들에게 물려줄 목장을 한 평이라도 축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혼전 계약서는 필수적이었다. 어떤 여자도 두 번 다시 그를 빈털터리로 만들진 못하게 할 것이다. 만약 또다시 아내와 이혼을 하게 되더라도 그의 소유물을 뺏기는 일은 절대 없게 하리라.
사실 아이 문제만 아니면 평생 독신으로 사는 게 더 편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아이들을 원했다. 자신이 부모님에게 배운 것처럼 자식들에게 대지에 대한 사랑을 가르치고 목장이 다음 세대까지 이어지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 무엇보다도 텅 비고 오래된 저택 안에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재잘대는 소리가 울려퍼지는 광경을 보고 싶었다. 그런 아이들을 갖기 위해서라도 절대적으로 아내가 필요했다.
물론 또 다른 이점도 있었다. 특히 섹스 상대를 찾기 위해 낭비할 시간 따윈 전혀 없는 그로서는 마음 내킬 때면 언제든 섹스를 할 수 있는 상대가 생긴다는 점이 상당히 솔깃했다. 그가 원하는 아내감은 한 마디로 매일 밤 침대를 함께 쓸 수 있는 건강하고 성격 좋은 그런 여성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결혼 적령기 여성들은 시골 생활을 끔찍하게 여겼다. 심지어는 이곳 몬태나 출신 여자들도 짐을 싸들고 도시로 떠나는 상황이었다. 하긴 고된 목장 생활을 원하는 여자가 얼마나 있겠는가! 게다가 그는 여자에게 구애할 시간도, 돈도 없는 형편이었다. 아니, 설사 시간과 돈이 있다 해도 구애할 마음 따윈 전혀 없었다. 그보다는 훨씬 효율적인 방법을 사용할 생각이었다.
그는 중서부 지방의 농부들이 아내를 구한다는 광고를 내 결혼에 성공한 경우가 꽤 많다는 기사를 잡지에서 본 적이 있었다. 더불어 알래스카에 사는 남성이 같은 방법을 사용하여 결혼에 성공한 스토리가 텔레비전에 방영된 것도 보았다. 물론 본질적으로 사생활을 중요시하는 성격인 데다 재앙과도 같은 결혼 생활을 경험한 터라 그런 방법이 아주 마음에 든 건 아니었다. 하지만 신문 광고를 내는 데는 그다지 많은 돈이 들지 않는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그는 마음을 굳혔다.
요즘의 그에게 돈은 너무나 많은 것을 의미했다. 어쨌든 그 방법을 쓰면 서로를 알아가기 위해 외식이나 데이트를 하느라 시간을 낭비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는 아내가 될 여자는 물론 어떤 여자도 알고 싶지 않을뿐더러 자신에 대해서 알리고 싶은 마음 역시 전혀 없었다. 감정이라는 구름에 가려져 있지 않으면 모든 걸 선명하게 볼 수 있는 법이니까. 문제는 광고라는 게 개인의 사생활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는 곧 그러한 광고의 몰개성적인 특성 역시 지금 자신이 원하는 부분 중의 하나라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리스 던컨은 일단 결정을 내리면 더 이상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즉시 실행에 옮기는 그런 타입이었다. 서부와 중서부의 신문사 몇 곳에 광고를 싣기로 결정을 내리자마자 그는 곧 메모지를 끌어다 놓고 광고 문구를 구상했다. 그리고 잠시 후 또렷하고 시원시원한 글씨체로 백지를 메우기 시작했다.
건장한 목장주가 아내를 구함.
매들린 생거 패터슨은 점심 식사를 마치고 사무실로 천천히 걸어들어갔다. 직장 동료이자 친구인 크리스틴은 다가오는 매들린의 모습을 보면서 그녀가 서두르는 모습을 좀처럼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매들린이 땀을 흘리는 모습은 아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바깥 기온은 35도가 넘었지만 그녀는 주름 한 점 없는 깔끔한 연회색 정장을 차려입고 세련된 실크 스카프로 포인트를 준 완벽한 모습이었다. 옷에 관한 한 매들린은 거의 패션 모델에 가까웠다. 그녀가 걸치면 모든 게 멋져 보였고, 그녀만의 스타일과 색감은 여자들에겐 부러움을, 남자들에겐 갈망을 불러 일으켰다.
[널 보면 넌더리가 나.]
크리스틴은 매들린의 모습을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의자에 등을 기대며 투덜거렸다.
[땀을 흘리지 않는 게 건강에 얼마나 안 좋은지 모르니? 주름 하나 잡히지 않은 옷차림이 얼마나 부자연스러운지 알아? 게다가 머리카락 하나 헝클어져 있는 걸 못 봤으니, 한 마디로 넌 신을 모독하고 있는 거야.]
[나도 땀을 흘려.]
매들린이 나른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언제?]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오후 7시에.]
[믿을 수 없어. 땀샘하고 언제 땀을 흘릴 건지 미리 약속이라도 한다는 말이니?]
[그게 아니라 라켓볼을 하거든.]
크리스틴은 매들린의 입에서 '라켓볼'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마치 기도라도 하듯 두 손을 모았다. 그녀의 지론에 따르면 운동은 여덟 번째 죄악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이런 날씨에 그냥 앉아만 있어도 땀을 줄줄 흘린다구, 알아? 그런데 넌 늘 주름 하나 없는 옷차림에 머리카락 한 홀 흐트러져 있는 꼴을 못 봤으니, 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다니까.]
[나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일 때가 있어.]
[언제? 사람들이 보지 않는 데서만?]
매들린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크리스틴의 책상에 기대앉아 발을 꼬았다. 여자다운 구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자세였다. 하지만 매들린의 경우엔 왜 우아해 보이는 걸까? 매들린과의 입씨름에서 이겼다고 의기양양해하던 크리스틴은 한숨을 내쉬었다. 매들린은 아무런 눈치도 못 챈 듯 크리스틴이 읽고 있던 신문 - 크리스틴의 어머니가 정기적으로 보내주시는 오마하 지역판 일요 신문 - 을 들여다보았다.
[뭐 재미있는 기사라도 있어?]
[고등학교 때 제일 친했던 친구가 이번에 약혼을 했다나 봐. 그리고 아는 사람이 하나 죽었고, 또 가뭄 때문에 사료 값이 천장부지로 치솟았다나? 뭐 그 정도야.]
크리스틴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신문을 접어서 매들린에게 건넸다.
[직업을 얻기 위해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기사도 있어. 내가 오마하를 떠나기 전에 읽어봤더라면 좋았을 걸 싶은 기사 말이야.]
[벌써 2년도 더 전의 일이야. 문화 충격을 받기엔 너무 늦은 거아니니?]
[고향을 그리는 마음은 세월과는 상관이 없다구.]
[정말 그럴까? 지난주에 월스트리트 슈퍼맨이랑 깨지고 난 뒤에 그 자리를 대신할 사람을 찾지 못해서 우울한 건 아니고?]
크리스틴은 연극 배우처럼 과장되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 하트 화살표는 방향이 잘못됐나 봐.]
[드디어 그 높은 콧대가 꺾인 것 같구나.]
[콧대가 꺾인 게 아니라 화살표 방향이 잘못된 거라니까.]
[흠, 나한텐 콧대가 꺾인 것처럼 보이는데?]
[네가 너무 앞서가는 거라구.]
[그러지 말고 솔직히 인정하지 그래.]
[좋아, 네 맘대로 생각해!]
두 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매들린은 고개를 저으며 신문을 들고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녀와 크리스틴은 그런 식으로 재치를 겨루며 서로를 좋아하게 된 사이였다. 그러나 매들린은 모든 사람들이 그런 종류의 대화를 즐기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학교를 다니면서 사귀었던 남자 친구들은 다들 그녀와 입씨름을 벌인 후로는 모욕을 당했다고 느끼고 화를 내거나 주눅이 들었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사춘기 소년들은 여자 친구가 새로 발견한 그들의 남성성에 대해 조금이라도 경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면 그것을 참지 못하고 호르몬이 시키는 대로 공격적이 되거나 난폭할 정도로 방어적이 되는 법이다. 그러니 그녀의 재치 있는 대꾸가 그런 그들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였으리라는 건 분명하지 않은가!
그녀는 회상에 잠긴 채 한숨을 내쉬었다. 어떤 면에서는 지금도 그때와 상황이 그리 많이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무심코 자신의 책상을 쳐다보았다. 책상은 넌더리가 날 정도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문득 그녀는 지금 이대로 퇴근해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런다고 해도 퇴근하겠다는 말만 하지 않고 나간다면 아무도 그녀가 그냥 가버렸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그만큼 그녀는 눈에 띄지 않는 존재였다.
회사 소유자의 의붓동생이라는 사실은 많은 이점이 있었지만 권태만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한가하다는 건 그녀에게 고통이나 마찬가지였다. 조만간 그녀는 로버트의 배려에 고마움을 표시하고 이 '직장'을 그만둬야겠다고 정중하게 사의를 표명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먼 곳으로 이사를 가는 것이다. 서부 해안 쪽으로 가든가, 아니면 피지 같은 곳도 괜찮을 것이다. 피지에는 로버트의 사업체가 없으니까. 아직까지는.
그녀는 의자에 기대앉아 책상 위로 발을 뻗으며 신문을 펼쳐들었다. 그녀는 다른 지역의 신문, 특히 소도시에서 발행되는 신문을 읽는 걸 좋아했다. 오마하 신문은 사실 자질구레한 마을 소식을 다루기엔 큰 지역 신문이긴 했지만, 그녀에게 뉴욕이라는 대도시가 아닌 다른 곳에서도 활기차게 삶을 꾸려나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줄 수 있을 만큼의 특색은 살아 있었다. 뉴욕 같은 대도시는 너무 크고 복잡해서 거기 사는 사람들은 도시 생활에 완전히 동화되어 버리는 경향이 있지만, 그녀는 뉴욕에서의 생활이 아닌 다른 방식의 삶에 매우 흥미가 많았다. 결코 뉴욕에서의 삶이 싦다거나 지루해서가 아니라 그저 호기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뉴욕 신문에서도 볼 수 있는 국제 정세에 관한 부분은 건너뛰고 중서부 지역을 강타한 가뭄이 농부들과 목장주들에게 미친 악영향과 도축업 붐에 관련된 기사, 그리고 결혼식이나 약혼식과 관련된 기사들을 읽었다. 판매 광고는 물론, 뉴욕과 오마하의 부동산 시세를 비교해 보고는 전에도 그랬듯이 그 차이에 놀라기도 했다. 구인 광고란을 대충 흝어 넘기던 그녀의 시선이 한 광고에 멈췄다.
건장한 목장주가 아내를 구함. 건실한 성격이어야 하며, 아이들을 원하고, 목장에서 일을 할 수 있어야 함. 나이는 25세에서 35세 사이면 좋겠음.
광고에 관심 있는 사람은 몬태나 주 빌링스에 있는 건장한 목장주의 사서함 번호로 연락 바란다고 적혀 있었다.
매들린은 즉시 그 광고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우스워해야 할지, 아니면 분노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어떤 미지의 남자가 '아내'가 아니라 자식을 낳아주고 더불어 일손도 거들어 줄수 있는 일꾼을 원한다는 노골적인 광고를 냈다. 물론 그는 자신의 목적에 대해 무지막지하게 정직하긴 했다. 그 광고는 뉴욕의 신문이나 잡지에서도 보았던 비슷한 종류의 광고에 신물이 난 그녀에게 신선하게 다가왔다. 최소한 거기에는 '민감한 물병자리 태생의 남성이 우주의 신비를 함께 탐구할 90년대의 뉴에이지 여성을 구합니다'와 같은 광고처럼 광고를 낸 당사자 스스로도 단어에 대해 명확한 개념이 없다는 것 외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과대 포장된 번지르르한 부분은 없었다.
이 광고 내용을 보면 광고를 낸 '건장한 목장주'가 솔직하다는 것 외에도 여러 가지 점을 알 수 있었다. 그의 나이는 최소한 오십 이하로 보였다. 하지만 아이를 원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아마도 삼십대 이상 사십대 초반 정도가 아닐까 싶었다. 또한 건장하다는 부분 역시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건실한 성격의 아내를 원한다는 걸 보면 남자 역시 십중팔구 파티나 따라 다니는 사람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아내를 원하기는 하지만 구애할 시간이 없는 성실한 목장주가 아닐까?
그녀는 몇 달 전에 우편 주문 신부에 관한 기사를 읽은 기억을 떠올렸다. 비록 그 기사는 그녀의 관심을 끌었지만, 그건 전적으로 그 제도의 비인간적인 면 때문이었다. 동양 여성을 서구 남성과 연결시키는 건 아주 기발한 사업이긴 했다. 여성 인구가 적은 주의 농부와 목장주들이 단순히 그 지역에 여성이 적다는 이유 때문에 그런 광고를 내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은 물론, 급기야는 그런 종류의 광고와 기사만 전문으로 싣는 잡지까지 창간된 걸 생각하면 더더욱 그랬다.
그러나 사실 이런 광고의 목적은 단 하나였다. 비록 재치 있고 로맨틱한 문구들로 포장되어 있긴 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번 광고에 응답하는 것 역시 누군가를 만나보기로 결정했다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그저 누군가를 사귀는 방법 중의 하나일 뿐인 것이다. 누굴 소개받든, 아니면 연애를 하든 다들 처음엔 데이트로 시작하지 않는가!
그녀는 그쯤에서 신문을 접고 당면한 문제에 신경을 집중했다. 지금 당장 위층으로 올라가 로버트의 책상을 두드리며 제대로 된 일을 달라고 항의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그래봤자 아무 소용없는 일이라는 건 그녀 자신도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로버트는 그녀의 항의를 적당히 무마시키기 위해 잘 돌아가는 사무실을 휘저어 놓을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 그는 불과 몇 달 사이에 어머니와 할머니를 모두 잃은 그녀에 대한 위로 차원에서 이 일자리를 제공한 것뿐이었다. 이 일자리의 기한이 한참 초과되었다는 건 두 사람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지금껏 계속 출근을 하고 있는 건 불치병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녀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 때문이었다. 그 낙천주의가 그녀로 하여금 이 일이 결국 공식적인 직업이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게 만든 탓인 것이다.
그러니 만약 그녀가 로버트의 책상을 두드리며 항의하도 한다면 그는 의자에 몸을 기대고 짓궂은 표정으로 그녀를 놀릴 것이다.
[공은 이미 네 코트로 넘어갔어. 그러니 서브를 하든지 집에 가든지 결정을 하라구.]
맞다. 이제는 새로운 생활을 시작해야 할 때였다. 할머니와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이 그녀를 무력하게 만든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적어도 2년 전에 이 일자리를 팽개치고 떠났을 테니까.
건장한 목장주가 아내를 구함. 건실한 성격이어야 하며, 아이들을 원하고, 목장에서 일을 할 수 있어야 함. 나이는 25세에서 35세 사이면 좋겠음.
그녀는 신문을 집어들고 그 광고를 다시 한 번 읽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이런 광고를 보고 남편감을 찾을 정도로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는 건 아니었다. 단지 새로운 환경, 새로운 직업이 필요한 것뿐이지 결코 남편이 필요한 게 아니라는 말이다.
어쨌든 그녀는 벌써 스물 여덟 살이었다. 유행의 첨단을 걷는 도시 생활이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엔 충분할 만큼 나이가 든 것이다.
비록 지금껏 도시에서 살긴 했지만, 사실 그녀는 도시 생활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리치먼드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녀는 주말에 시골에 사시는 할머니를 방문하는 걸 끔찍이도 좋아했었다. 비록 할머니가 사시던 곳은 진짜 시골 목장이 아니라 한적한 교외에 위치한 전원 주택에 불과했지만. 그러나 그녀는 어머니가 재혼해서 뉴욕으로 이사한 후로 늘 그 집에서 느꼈던 평화로움과 한적함을 그리워했다.
어쨌든 그녀는 천성적으로 호기심이 많은 성격이었고, 어떠한 종류의 직업을 찾아야 하는지, 어디서 그런 직업을 구해야 하는지 결정을 내릴 때까지 생각을 돌릴 만한 게 몹시 필요했다. 광고를 낸 목장주를 만나는 건 첫 데이트와 같은 것이다. 만일 그와 마음이 맞는다면 계속 관계를 지속시켜 나가면 그만이다. 누가 알겠는가! 할머니가 됐을 때 손자들에게 자신이 우편 주문 신부였다는 황당한 얘기를 들려줄 수 있게 될는지!
그러나 십중팔구 그런 일은 없을 테니 그 남자를 만나는 건 아무런 해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잘 알지도 못하는 도시 남자를 만나는 것보다 몬태나에 살고 있는 그 광고의 주인공을 만나는 편이 훨씬 더 안전할지도 모른다. 그녀는 몬태나에 대해 아무런 선입견도 없으니 더더욱 다행이지 않은가!
그녀는 재빨리 새 종이를 한 장 꺼내 전동 타자기에 끼웠다. 그리고는 광고에 대한 답변을 쓰고 봉투에 주소를 기입한 다음 우표를 붙여 우편물 투입구에 집어넣었다. 은빛 나는 금속 재질의 우편함 뚜껑이 봉투를 삼키자마자 그녀는 마치 인생 최대의 실수를 저지르기라도 한 것처럼 위가 텅 비는 듯한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처음 자동차 운전석에 앉아 핸들을 잡았을 때의 느낌과 비슷했다. 유원지에 놀러가서 처음 롤러코스터를 탔을 때도, 그리고 대학에 입학해서 첫 데이트를 했을 때도 느낌이 이랬었다. 한 마디로 뭔가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마다 늘 이런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결코 재앙의 징조는 아니었다. 오히려 첫 번째라서 느낄 수 있는 모든 걸 고스란히 즐길 수 있었으니 좋은 징조라고 할까?
그렇지만 우편 주문 신부라니......... 내가?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걱정할 것 없어. 이 몬태나의 목장주 한테서 답신이 올 확률보다는 오지 않을 확률이 더 높으니까 말이야.
리스 던컨은 뉴욕에서 온 편지 봉투를 개봉하고 안에 들어 있는 타자기로 친 편지를 꺼내며 눈살을 찌푸렸다. 뉴욕에서 사는 여자가 목장 생활을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그는 한순간 그 편지를 그대로 휴지통에 던져버리려고 했다. 우편물을 찾으러 빌링스까지 일부러 나온 것과 마찬가지로 편지를 읽는 것도 시간 낭비에 불과하리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오늘 그의 광고에 대한 응답이라곤 전국을 통틀어 뉴욕에서 온 이 편지가 유일했다. 그러니 읽어보기는 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이건 그가 받은 세 번째 응답 편지였다. 그건 즉 몬태나 골짜기의 목장 생활을 갈망하는 여성이 그리 많지 않다는 증거였다.
어쨌든 편지 내용은 인상적이었다. 본인에 관해 아무런 정보도 들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하물며 이 여자는 사진을 동봉하지도 않았다. 세 통의 회신 중 유일하게 사진을 보내지 않은 편지였다. 그가 알 수 있는 건 오로지 이 여자의 이름이 매들린 S. 패터슨이고, 나이는 스물 여덟 살이며, 목장 일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하다는 것뿐이었다.
이 뉴욕 여자는 회답을 보낸 다른 두 명에 비해 나이가 적었다. 나머지 두 명은 모두 삼십대였다. 한 명은 학교 선생님으로 나이는 그와 동갑이었으며 그리 볼썽 사납지 않은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다른 한 명은 서른 여섯 살로 그보다 두 살이 많았다. 그리고 한 번도 직업을 가져본 적이 없다고 했다. 어머니를 돌보면서 집에만 있었는데, 그 어머니가 최근에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외모는 그저 평범하다고나 할까? 어쨌든 그 두 여자는 매들린 S. 패터슨에 비해 목장 생활이 몹시 힘들 거라는 상당히 현실적인 예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쩌면 이 여자는 대도시로 이사를 간 후에 자신이 도시 생활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시골 출신의 여자일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일부러 고향 신문까지 배달해 보는 게 아니겠는가. '뉴욕 타임즈'에 광고를 실은 기억 따윈 전혀 없으니 말이다. 그 정도로 돈이 썩어나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매들린이라는 여자의 편지를 무시해 버리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그래도 좋을 정도로 많은 회신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가 답장을 보낼 때까지도 그녀가 그 광고에 관심이 있다면 그녀도 다른 두 명과 마찬가지로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우체국을 떠나 트럭을 세워둔 곳까지 걸어가는 동안 그는 접힌 편지로 허벅지를 탁탁 쳤다.
이번 일은 이미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을 잡아먹은 상태였다. 그는 적어도 7월까지는 이 일을 끝낼 결심이었다. 벌써 5월도 중순을 넘겼지만 말이다.
6주. 그는 6주 이내로 아내를 구해야 했다.
매들린은 평범한 흰 봉투에 씌어진 몬태나의 주소를 본 순간 하마터면 그 편지를 떨어뜨릴 뻔했다. 그녀가 그 광고에 대한 회신을 보낸 건 겨우 아흐레 전이었다. 그렇다면 이 남자는 그녀의 편지를 받자마자 답장을 보낸 게 분명했다. 지난 며칠 동안 매들린은 그가 절대 답장을 보내지 앟을 거라고 스스로를 설득했었다.
그녀는 식탁 앞에 앉아 편지 봉투를 열었다. 그 안에는 종이 한 장이 들어 있었다.
패터슨 양에게
내 이름은 리스 던컨이오. 서른네 살의 이혼남으로 아이는 없고, 몬태나 주 중부에 목장을 소유하고 있소.
아직 내 광고에 관심이 있다면 2주 후 토요일에 만나보고 싶소. 내게 답장을 보내 당신 의사를 알려주었으면 하오. 답신을 받으면 빌링스까지 오는 버스 티켓을 보내겠소.
편지에는 G. 리스 던컨 이라는 서명만 있을 뿐 아무런 끝인사도 없었다. G는 어떤 이름의 약자일까? 그의 필체는 진지하고 시원시원했으며 알아보기 쉬웠다. 그리고 틀린 철자가 하나도 없었다.
이제 그녀는 그의 이름과 나이는 물론이고 그가 이혼한 경험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그녀에게 있어서 그는 현실적인 인물이 아니라 아내를 구한다는 광고를 게재한 익명의 남자였을 뿐이다. 하지만 그런 그가 이제는 실재 살아있는 인물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녀를 만나기 위해 2주 후 토요일에 시간을 내겠다는 편지 문구로 미루어 볼 때 그가 아주 바쁜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매들린은 문득 미소를 지었다. 그는 확실히 광고를 내서라도 아내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절망적인 상태에 처한건 아닌 모양이었다. 사실 처음 그의 광고를 봤을 때부터 단지 아내를 구할 시간조차 없을 정도로 바쁜 사람이라서 그런 광고를 냈을 거라는 인상을 받았던 것이다.
어쩌면 그가 이혼을 한 것도 너무 바쁜 나머지 아내를 전혀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녀는 손톱 끝으로 그의 편지를 톡톡 치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처음부터 그녀는 이 남자의 광고에 흥미를 느꼈었다. 그리고 그 흥미 때문에 사태가 이 정도로 커진 것이었다. 그래, 아 남자를 만나는 거야. 나머지는 나중에 결정해도 되겠지. 그녀는 결국 그를 만나보기로 결심을 굳혔다.
매들린 S. 패터슨으로부터는 즉시 답장이 왔다. 다른 두 명은 아직 소식이 없었다. 리스는 즉시 그녀의 편지를 개봉했다.
던컨 씨에게
전 당신을 만나보기로 결정을 내렸답니다. 하지만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확실치도 않은 상황에서 당신이 제 여행 경비를 부담하는 건 옳지 않은 일인 것 같아요.
어쨌든 제가 탈 비행기는 2주 후 토요일 오전 10시 39분에 빌링스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혹시 너무 이른 시간이 아닐까 걱정스럽군요. 제가 탈 비행기 일정표를 복사해서 동봉했으니 확인해 보세요. 그리고 만약 계획이 바뀌게 되면 즉시 연락해 주시길 바랍니다.
좋아, 좋아. 패터슨 양은 버스 대신 비행기를 타고 오기로 했나보군. 하긴 나라도 그랬을 테지만.
그는 입술을 뒤틀며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 사실 그도 한때는 자가용 비행기까지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건 다 에이프릴과 이혼하기 전의 일이었다. 지금은 에이프릴 때문에 자가용 비행기는커녕 앞으로도 몇 년 동안은 비행기 티켓을 살 여유조차도 없는 형편이 되어 버린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패터슨 양의 배려가 고마웠다. 하지만 그녀에게 비행기 티켓조차 보낼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분노가 더 컸다. 어쨌든 지금의 그로서는 버스 티켓을 사는 것조차 힘든 게 사실이니까.
아마도 그가 얼마나 가난한지 알게 되면 그녀는 잽싸게 줄행랑을 놓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설사 그런 결과를 낳게 되더라도 일이 이렇게까지 진행된 이상 그녀를 한 번 보지도 않고 거절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해도 될 정도로 응모자가 많은 것도 아니고 말이다.
몬태나로 떠나기에 앞서 매들린은 목요일 저녁에 로버트를 초대했다. 로버트는 항상 금요일 저녁에 데이트 약속을 잡기 때문에 목요일밖에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로버트는 정각 8시에 그녀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미니 홈바로 가서 독한 스카치 위스키를 한 잔 따르더니 그녀를 향해 술잔을 들어올렸다. 언제나처럼 눈에까지는 미치지 못하는 웃음이 그의 입가에 살짝 걸려 있었다. 매들린 역시 와인 잔을 들어 보였다.
[수수께끼 씨에게 건배를!]
그녀의 엉뚱한 건배 제안에 로버트는 뭔가 묻듯 짙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너를 두고 하는 말이니?]
[물론 아니죠. 나는 활짝 펼쳐진 책인걸요.]
[아무도 알 수 없는 언어로 씌어진 책이지.]
[흠, 난 오빠의 경우가 더 궁금한데요? 로버트 캐넌이라는 책이 만에 하나 펼쳐진다면 과연 어떤 내용이 거기에 씌어 있을까요?]
그는 어깨만 으쓱했을 뿐, 사람들과 늘 거리를 두고 있다는 매들린의 지적에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매들린은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녀가 열 살이고 그가 열여섯 살일 때, 그의 아버지와 그녀의 어머니는 재혼을 했다. 친남매 사이에도 그 정도 차이가 난다면 그리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로버트는 늘 그녀가 새로운 가정에서 환영받는 존재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들 남매가 함께 극복했던 최초의 시련은 아버지의 죽음이었다. 그리고 5년 후 어머니마저 세상을 뜨고 말았다. 대부분의 의남매라면 그 후로는 서로 멀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오빠 동생 사이를 더나 친구로서도 서로를 진심으로 아꼈기 때문이다.
로버트는 진짜 속을 알 수 없는 남자였다. 품위 있고 잘생긴 건 물론이고 소름이 끼칠 정도로 지적이지만, 내면 깊은 곳에 그 어느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자신만의 비밀스런 공간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내면 깊숙한 곳에 그런 비밀스런 공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매들린밖에 없었다. 즉 로버트에 대해서라면 매들린보다 잘 아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다.
그는 캐넌 주식 회사를 물려받은 지 불과 몇 년도 안 돼 그 회사를 전보다 더욱 크고 알차게 키워냈다. 그러나 엄청난 부와 권력을 손에 쥔 지금도 그의 개인적인 성향은 여전한 상태였다. 그의 내부에 존재하는 자신만의 비밀스런 공간은 어느 누구에게도 결코 함락되지 않는 무적의 요새와도 같았다.
그는 또한 엄청난 자제력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열정조차도 늘 조절할 수 있을 정도로. 수많은 여자들의 접근에도 불구하고 그는 늘 한 번에 한 여자와 지속적인 관계를 맺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는 애인을 고르는 눈이 몹시 까다로운 편이긴 했지만, 일단 한 여자를 선택한 후에는 애인에게 지극히 충실한 것은 물론 적어도 1년은 그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일단 관계가 깨지면 그걸로 모든 게 끝이 났다. 그의 예전 애인 중 하나는 로버트와의 관계가 깨지고 난 후 얼마 되지 않아 술에 취한 채 어느 파티에 참석했다가 우연히 만난 매들린의 어깨에 기대어 이제 다시는 어떤 남자도 사랑할 수 없게 되었다며 흐느껴 울기도 했었다. 어떤 남자를 만나도 로버트와 비교하면 형편없이 초라한 상대라는 생각이 자꾸 든다면서 말이다. 그 여자는 그 고백대로 로버트와 헤어진 후 몇몇 애인을 전전하다가 아예 데이트 자체를 완전히 그만두고 말았다.
로버트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짓궂은 표정으로 매들린을 바라보기만 했다. 매들린은 결국 자신의 질문에 스스로 대답하고 말았다.
[오빠의 책에는 아무도 해독할 수 없는 글자가 씌어 있을 거예요. 오빠만 아는 암호로 바꿔놓았을 테니까요. 윈스턴 처칠이라면 오빠를 너무 복잡하게 뒤엉켜 있는 바보가 아니면 복잡한 퍼즐과도 같은 수수께끼의 인물이라고 했을걸요.]
로버트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곤 스카치 위스키를 한 모금 더 마셨다. 마치 그녀의 평가가 맞다는 걸 인정하듯 입술을 씰룩대며 말이다.
[저녁 메뉴는 뭐지?]
[대화예요. 그리고 파스타.]
그는 아쉬운 듯 위스키 잔을 내려놓았다. 파스타와 스카치 위스키는 별로 어울리는 음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매들린은 짐짓 천가 같은 표정으로 그런 그를 지켜보았다. 그 표정을 본 로버트의 눈이 장난꾸러기 아이처럼 짓궂게 반짝이기 시작했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대화를 나눠볼까? 그런데 오늘의 대화는 주제가 뭐지?]
[내 새로운 직업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요. 그리 중요한 얘기는 아니지만.]
그녀는 주방으로 걸어가면서 어깨 너머로 말했다.
로버트는 즉시 식탁으로 음식을 나르는 그녀를 도왔다.
[그러니까 이제 때가 되었다는 거니?]
그가 재빨리 물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결정을 내렸지?]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어요. 하지만 중요한 건 오빠 말대로 때가 되었기 때문이죠.]
[알았다. 그런데 그게 별로 중요하지 않은 얘기라면 중요한 얘기는 뭐지?]
역시 로버트는 예리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그냥 스쳐 지나갔을 말 한 마디도 놓치지 않다니.
그녀는 조용히 와인을 따르면서 미소를 지었다.
[이번 토요일에 몬태나로 떠날 예정이에요.]
그는 흥미로운 듯 눈을 깜박였다.
[몬태나에 뭐가 있는데?]
[뭐가 아니고 어떤 사람이 있어요.]
[누구?]
[리스 던컨이라는 남자예요. 어쩌면 그와 결혼하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마치 기상 캐스터 같은 말투구나.]
로버트의 밝은 초록색 눈동자가 면도날처럼 날카롭게 빛을 발했다. 하지만 여전히 한결같은 목소리였다.
[그래서 결혼할 확률이 40퍼센트냐, 아니면 50퍼센트냐?]
[나도 잘 몰라요. 하지만 일단 그 남자를 만나보면 대충 감이 잡히겠죠.]
그는 포크로 스파게티를 말아 입으로 가져가다 말고 조심스레 포크를 내려놓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매들린은 흥미롭게 그런 그를 지켜보았다. 로버트가 정말 놀라는 모습을 보는 건 그리 흔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네 말은 아직 그 남자를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다는 거니?]
[음, 편지만 주고 받았을 뿐이에요. 실제로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구요. 그러니 그 남자와 결혼할 확률은 거의 없다고 봐야겠죠. 서로에게 첫눈에 반할 나이는 다 지났으니까요. 기상 캐스터처럼 표현하자면 '아직 정확하게 말씀드릴 수는 없는 상황입니다만' 이라고 할까요?]
[어쨌든 조금이라도 그럴 가능성은 있고?]
[그러니까 오빠에게 이렇게 얘기를 하는 게 아니겠어요?]
[어떻게 알게 된 남자니?]
[잘 알지도 못해요. 그러니까....... 약간 아는 사이라고나 할까요?]
[그럼 편지는 어떻게 주고받게 된 거지?]
[그 사람이 아내를 구한다는 광고를 냈어요.]
로버트는 거의 기절할 지경인 것 같았다. 매들린은 그가 스파게티에 대해선 완전히 잊어버린 것처럼 보이자 오빠가 불어터진 스파게티를 먹게 될까 봐 걱정스러운 나머지 걸쭉한 소스를 좀더 뿌렸다.
[그래서 그 광고에 답장을 보냈어?]
마침내 그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신의 접시로 관심을 돌렸다.
[네. 그랬어요.]
[맙소사. 너 그게 얼마나 위험한 짓인지 알아!]
그는 의자에서 반쯤 일어서며 고함을 질렀다.
[알고 있어요.]
그녀는 그의 손을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러지 말고 자리에 앉아서 내 말을 좀 들어봐요. 만약 내가 맨해튼에 있는 독산자 전용 술집에서 누군가를 만났다면 어떻겠어요? 그래도 지금처럼 화를 냈을까요? 아마 아닐걸요. 몬태나에 사는 목장주를 만나는 것보다 그게 훨씬 더 위험한 짓일 가능성이 있는데도 말이에요.]
[몹쓸 병에 걸릴 확률이 적다는 건 나도 인정해. 하지만 그것 말고도 고려해야 할 사항들이 많단 말이야. 만약 그 남자가 전과자나 사기꾼이라면 어떻게 할래? 도대체 그 남자에 대해 하나라도 알고 있긴 한 거야?]
[그 남자는 서른네 살이에요. 오빠랑 동갑이죠. 그리고 몬태나에서 목장을 운영하고 있고, 이혼남이래요. 아이는 없다고 했구요.]
로버트는 날카로운 눈길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매들린은 오빠가 즉시 리스 던컨에 대해 뒷조사를 하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녀는 당장이라도 오빠에게 항의를 하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로버트가 리스 던컨에 대한 조사 보고서를 받아볼 즈음이면 그녀는 이미 그 남자를 만나 나름대로 그에 대해 판단을 내린 후일 테니까.
하지만 그녀는 단지 편지를 본 것만으로도 그가 절대 사기꾼이 아니라는 확신이 서 있는 상태였다. 게다가 일단 그를 만나고 나면 더 이상 그의 편지에 씌어진 문장의 진위 여부를 가늠하려 애쓸 필요도 없으리라.
[몬태나 행을 취소하면 안 되겠니?]
로버트가 태도를 바꿔 회유에 나섰다.
[아니면 조금 연기라도 하든가, 어때?]
[안 돼요.]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은회색 눈동자가 기대감으로 빛을 발했다.
[난 더 이상 호기심을 주체할 수 없을 지경이거든요. 게다가 이미 그 사람과 만나기로 약속도 했구요.]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매들린이 주위의 모든 것에 얼마나 호기심이 많은 성격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비록 드러내놓고 참견하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자신의 흥미를 끄는 사건이나 상황을 대하면 무슨 수를 써서든 호기심을 만족시키고야 마는 성격이었다.
그런 그녀가 아내를 구한다는 흥미로운 광고를 본 순간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안 봐도 뻔했다. 아마도 그 광고주에 대한 호기심이 마구 피어올랐으리라. 그래서 직접 그 사람을 만나보기로 결심을 굳힌 것이 분명했다.
그는 결국 동생의 몬태나 행을 말릴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최소한 그녀가 위험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조치를 취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는 매들린이 몬태나 행 비행기에 오르기 전에 리스 던컨에 대한 조사를 마치기로 결정했다. 사소한 주차 위반 기록까지 샅샅이 말이다. 조사 결과 매들린이 완벽하게 안전하다는 확신을 주지 못하는 증거라도 나온다면 그녀를 깔고 앉아서라도 비행기를 타지 못하게 막을 것이다.
그의 마음을 읽은 듯 매들린이 앞으로 몸을 기울이며 천사 같은 표정을 지었다. 매들린이 저런 표정을 짓는 건 무척 화가 나있거나, 아니면 그를 놀리려는 참이거나 둘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그가 알아낸 건 거기까지였다. 그는 늘 마지막 순간에야 동생의 진짜 의도를 눈치챌 수 있었다.
[만일 오빠가 내 사교 생활을 방해한다면 오빠에 대해서도 똑같은 조치를 취할 거예요.]
그녀는 달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오빠 역시 이성 문제에 있어서는 내게 큰소리를 칠 처지가 아닐 테니까요.]
로버트는 그녀가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는 사람이라는 사실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위협을 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이제껏 단 한번도 허세를 부린 적이 없었다. 만약 행동으로 옮기지 못할 위협이라면 아예 말을 꺼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로버트는 아무 말 없이 항복의 제스처로 주머니에서 하얀 손수건을 꺼내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