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와결혼하는법-18화 (18/18)

18장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지만 조프리는 무시했다. 하늘이 어두웠지만 그래도 해가 지기 전에 엘렌을 찾을 시간은 충분하다고 속으로 타일렀다. 그녀를 데리고 간 자가 누군지는 몰라도 멀리는 못 갔을 것이다. 그리고 영지 안을 떠나는 사람을 본 목격자도 아직 없다. 그녀의 발자국을 찾으려고 기사들을 사방으로 풀었지만 발자국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테일보트가 그만 돌아가자고 소리쳤다. 비가 쏟아붓듯이 내리고 있었고, 바람까지 불어 앞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아내를 찾고 싶은 마음에 걸음을 계속했다.

“아무 것도 안 보여요!” 테일보트가 소리쳤다.

조프리는 고개를 저으며 강풍이 불어서 뒷걸음질치는 말의 고삐를 더욱 꼭 쥐고 서쪽으로 향했다. 테일보트가 뭐라 하든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엘렌 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다급한 마음에 이성은 어디론가 달아나고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이 그를 몰아댔다. 침실에서 자신을 덮쳤던 광기는 그녀를 찾아낼 때까지 그 억센 손길을 풀어 주지 않을 작정인 것 같았다. 자신이 왜 이렇게 미친 사람처럼 구는지 원인을 규명해 보기 위해 발길을 멈출 수도 없는 일이었다. 숨쉴 때마다 고통이 가슴을 조였다.

그는 테일보트의 항의를 무시하고 피곤해하는 말을 앞으로 몰다가 폭우와 바람소리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말을 세웠다. 고삐를 잡아채면서 언덕을 향해 말을 돌리자 눈이 멀 것 같은 빗줄기가 온몸을 후려쳤다. 그는 눈을 깜빡거렸다. 차가운 빗줄기에 실려 작은 소리가 들려 오고 있었다. 소리 나는 쪽을 보자 언덕을 오르는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그는 말을 차면서 칼을 뽑고 그 쪽으로 달려갔다.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지옥의 사자처럼 달려 언덕 위의 일행을 쫓던 그는 곧 자신과 테일보트만으로는 턱없이 수가 모자란다는 것을 알았다. 등뒤에서 테일보트가 경고하듯 급하게 소리치는 것이 들렸지만 관심이 가지 않았다. 저 앞에 말 탄 사람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족히 열 명은 되어 보였다. 조프리는 계속해서 말을 달렸다. 저쪽이 몇 명인지는 상관없었다. 저자들이 엘렌을 데리고 있는 거라면 저들은 이미 죽은 목숨이다.

“이 땅 주인인 드 부르그의 이름으로 명령한다, 당장 멈춰라!” 그는 일행의 가운데로 달려들어가면서 소리쳤다가 놀라 눈을 깜빡거렸다. 맨 앞에 가던 덩치 크고 갑옷 입은 기사가 요란하게 욕설을 퍼부으면서 돌아섰다.

“조프?” 사내가 소리쳤다. 조프리는 낯익은 얼굴을 보자 경악하여 눈을 깜빡거렸다. 그리고 또 낯익은 얼굴. 또..... 그는 머리 속을 맑게 하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면서 빗줄기 너머로 그들 일행을 바라보았다.

“던스탄?” 물으면서도 자신이 정말 미친 게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늑대가 으르렁거리듯 대답하는 것을 듣고 다른 형제들을 돌아보았다. 흐릿하던 얼굴들이 점점 뚜렷하게 보였다. “로빈? 니콜라스?” 그의 목소리는 낮고 떨렸다. 형제들이 대답하듯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였다.

“그래. 우리가 왔어, 조프.” 모두들 대답했다.

“네 장원으로 가는 도중에 이렇게 폭우를 만났다.” 늑대가 말하면서 성난 하늘을 향해 팔을 휘저었다. “그건 그렇고, 대체 넌 이 빗속에서 뭘 하는 거냐?”

너무나 피곤해서 던스탄의 말을 거절할 수 없었던 조프리는 장원으로 향하는 형제들에게 합류했다. 던스탄은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험한 날씨에서 벗어나고 싶어하고 있었고, 조프리도 질척한 길 위에서 자신의 사정을 조리 있게 설명할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집으로 들어서자 젖은 옷도 갈아입지 않고 의자에 주저앉았다. 형제들이 와준 것도 아무 의미 없었다. 엘렌이 보고 싶을 뿐이었다.

누군가 어깨에 담요를 던져 주었지만 모른 척하고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벽을 씻어 내리는 빗줄기처럼 절망감이 온몸을 하얗게 씻어 내려갔다. 밤이 다가오고 있는데 그녀를 찾을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영지의 경계선을 넘어서 다른 곳으로 간지가 오래되었다면 어떻게 하지?

대체 어디쯤 가 있을까? 전남편에게 당한 일을 고통스럽게 들려주던 그녀의 모습이 생각나자 뱃속이 요동을 쳤다. 누가 데려갔을까? 에이버리 같은 작자일까? 몽고메리는 덩치가 크고 야만적인 사내인데. 조프리는 흠칫하며 몸을 떨었다. 그는 비참하고 토할 것 같은 기분으로 맥없이 앉아 있었다. 형제들에게는 조금도 관심이 가지 않았다. 그 동안 형제들은 불안하고 초조한 얼굴로 그의 주변을 맴돌았고, 던스탄은 테일보트와 맬콤에게 사정을 캐묻고 있었다.

“조프?” 늑대가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에 조프리는 마지못해 고개를 들고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니 던스탄을 바라보았다. 다른 형제들은 가까이 다가오기가 겁난다는 듯이 뒤에 서 있었다.

“네 편지 받고 곧장 달려왔다. 마침 로빈과 니콜라스가 우리 성에 와 있던 참이라 같이 왔지. 도움이 될 게다.” 던스탄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아무 소용없어.” 조프리가 중얼거렸다. “저 밖을 보라구.” 조프리는 창문을 가리켰다. “발자국이 있었다고 해도 비에 다 씻겨 나갔을 거야. 그녀는 사라졌다구. 내가 지키질 못했어, 던스탄. 내가 실패했어.” 마지막 말이 목에 걸렸다. 한때 자신을 강한 존재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신만한 지성이면 어떤 어려움도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는 쓰디쓴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드 부르그 가는 실패를 모른다.” 던스탄이 격렬하게 쏘아붙였다. 그러고는 분노를 누르려는 듯이 말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다가 몸을 굽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던스탄이 홀 안에 들어오면서 놀라서 바라보는 하인들을 물리쳐 놓긴 했지만 이곳은 그래도 단둘이 말을 나누기엔 적당한 장소가 아니었다. 하지만 조프리는 다른 곳으로 걸어갈 힘이 없었다. “누군가가 데려간 것이 확실하니?” 던스탄은 불편한 표정으로 물었다. “사실....누구한테 힘으로 쉽게 꺾일 여자가 아니잖아.”

다른 때였다면 던스탄이 듣기 좋게 말하려고 애쓰는 것을 보고 재미있어하거나 감동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낙담해서 그런 예의를 감상해 줄 기분이 아니었다. “그래, 누군가 데려갔어.” 그가 속삭였다. “방으로 올라가 직접 보라구.”

던스탄이 무슨 뜻이냐는 얼굴을 하자 조프리는 한 손을 올려 얼굴에서 떨어지는 물기를 닦았다. “벽에 경고문이 쓰여있는데, 엘렌이 남긴 것이 아니야.” 그는 말을 멈추면서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엘렌은 읽지도 쓰지도 못하니까.”

조프리는 딱딱하게 굳은 몸으로 형의 반응을 기다렸다. 던스탄은 눈도 깜빡거리지 않고 계단 쪽을 흘끗 보았다. 그러고는 로빈과 니콜라스에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하고 계단으로 향했다. 자신이 직접 증거를 보기 위해서였다. 그제야 조프리는 자신이 엘렌에 대해서 실패한 것이 한 가지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던스탄은 그녀가 문맹이든 아니든 개의치 않았다. 엘렌이 읽을 수도 쓸 수도 없는 사람이라 해도 늑대에게는 아무런 느낌이 없는 듯했다. 나는 그것을 무거운 돌덩이처럼 가슴에 얹고 다녔는데..... 그리고 또 날 괴롭히는 그녀의 단점들이 뭐가 있더라?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엘렌은 말소리가 크고 상스러우며 드 부르그 가의 신부에겐 어울리지 않게 예의범절이 엉망이었다. 아름답게 옷을 입을 줄도 모르고, 최신형으로 머리를 빗을 줄도 몰랐다. 장검이나 단도에는 능했지만 글자나 숫자에는 조금도 능하지 못했다. 조프리는 그녀를 갈망하면서도 그런 단점들을 방패삼아 거리를 두어 왔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단점이라는 듯이 거기서 헤어나지 못했다. 그런 것들은 그녀의 강인함이나 정열, 배우고 싶은 의욕, 활이나 칼을 쓰는 능숙한 재주와 남들에게는 내색하지 않는 관대한 정신 같은 것에 비하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닌데도. 그리고 나는 오히려 그런 것들 때문에 그 어떤 사람보다 엘렌에게 마음을 주었다. 그녀보다 잘 교육받고 예의 바르고 옷을 잘입는 그 어떤 여자도 나의 마음을 움직인 적은 없었다.

엘렌만이 움직였다. 그것을 깨달음과 동시에 너무나 깊은 고통이 덮쳐 왔다. 그는 고통을 누를 수가 없었다. 그는 두 손에 얼굴을 떨구고 자신이 잃은 것을 슬퍼하며 흐느꼈다. 어리석은 자존심 때문에 그녀의 가치를 모르고 있다가 지금에야, 그녀가 사라진 뒤에야 그 가치를 깨닫다니.....

그는 비참한 심정에서 허우적거리느라 던스탄이 돌아오는 것도 몰랐다. 던스탄이 낮게 투덜거리면서 퉁명스럽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이윽고 던스탄의 손이 어색하게 등에 얹혔다. 조프리는 더욱 솟구치는 비애에 몸을 떨었다.

“조프?” 던스탄이 헛기침을 했다. “나도 그 메시지를 읽었다. 하지만....그녀가....누굴 시켜서 대신 쓴 것이 아닐까?”

조프리는 피곤한 심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아니야. 나말고 다른 사람들은 그녀가 읽을 수도 쓸 수도 없다는 걸 몰라. 그녀는 오랫동안 모든 사람들을 속여 왔어.” 그녀의 진짜 모습을 숨겨 온 것처럼.

“흠......” 던스탄은 그 말을 곱씹는 듯한 얼굴이었다. 조프리는 한숨을 쉬었다. 늑대는 영리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드 부르그 형제들이 이해 못할 것을 한 가지 이해하고 있었다.

조프리는 몸을 펴면서 형의 묻는 듯한 눈길을 잡고 놓지 않았다. “난 그녀를 사랑해, 형.”

늑대가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조프리는 언제나처럼 형이 고마웠다. 늑대가 심호흡을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그녀를 사랑한다니, 잘 되었구나.”

그는 다른 말은 할 필요 없다는 듯이 로빈과 니콜라스 앞으로 걸어갔다. 다행히 조프리는 냉정을 찾을 수 있었다. 다 이해한다는 투의 작은 행동 하나에, 주저 없이 포용해 주는 형의 몸짓에 사기가 올랐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형제들에게 다가가는데 던스탄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저걸 봐! 비가 그치고 있군. 다시 나가 보기로 하자. 로빈하고 니콜라스말고도 기사 여섯 명을 더 데려왔으니까 몇으로 나누어서 수색하면....” 전술의 달인이 벌써 전략을 짜고 있었다.

조프리는 던스탄의 활기가 홀을 가득 채우는 것을 보며 길게 숨을 토했다. 밑바닥으로 내려갔던 사기가 새 희망으로 맥박치기 시작했다. 조금 전 형제들이 왔어도 아무 소용없다고 생각한 자신의 어리석음이 부끄러웠다. 가족이라는 것, 그리고 혈연이라든가 서로 사랑해 주는 관계에서 얻는 힘은 실로 중요하다. 전에도 모두 힘을 합쳐 피츠휴를 제거하지 않았던가?

그 힘이 이번에는 그의 딸을 구해 줄지 모른다.

“좋아.” 조프리는 어깨를 덮고 있던 담요를 던졌다. “새 말들을 빌려주지. 하지만 고를 것들이 많지는 않아.”

“난 조프 형하고 같이 다니겠어. 이곳 지리를 잘 모르니까.” 로빈이 말했다.

“내가 안다. 이곳 언덕들을 오랫동안 익혀 왔으니까.” 던스탄이 중얼거렸다.

“나도 그래.” 니콜라스가 말하자 문으로 걸어가던 형제들이 모두 걸음을 멈추었다.

“네가 어떻게 안다는 거냐?” 남의 말을 잘 못 믿는 로빈이 막내 동생의 말을 비꼬았다.

니콜라스는 드 부르그 형제답게 오만한 얼굴로 턱을 치켜들었다. “전에 우리가 여기 왔을 때 사이먼 형하고 영지 안을 뒤졌어. 신부를 찾아냈잖아. 기억 안 나?”

“신부?” 조프리는 잠깐 어리둥절했지만 곧 결혼식 날 일이 생각났다. 형제들이 에드레드 신부를 찾으러 나가는 바람에 식이 지연되었던 일...... “그래, 네가 동굴에서 찾아냈지.” 조프리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거야! 동굴이라구!” 니콜라스가 소리쳤다. “엘렌은 분명 거기 있을 거야! 동굴이 몇 개나 있더라구. 사이먼이 그 가운데 한 개는 아주 커서 한 소대는 능히 들어갈 수 있다고 했어.”

“하지만 엘렌을 데려간 범인이 이 장원하고 그렇게 가까운 곳에서 머물고 있을 리가 없는데.....” 조프리가 나섰다.

던스탄은 곰곰이 생각하는 눈길로 그를 보았다. “그래도 한 번 찾아볼 만한 일이야. 범인은 날씨가 험해지자 동굴에 숨어 비가 그치길 기다리는지도 몰라.”

조프리는 용솟음치는 희망으로 머리가 아찔해지고 숨이 막혔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너무 지나친 기대는 금물이겠지만 그래도 일단 계획을 세우고 수색 방향이 정해지자 마음이 든든해졌다.

그는 형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고마움을 전했다.

“좋아.” 그는 세 형제들을 둘러보았다. “니콜라스, 네가 앞장서라. 그리고 거기 적들이 숨어 있을 경우를 대비해서 모두 함께 가도록 하자.”

니콜라스는 흥분해서 마구 소리를 질렀고, 로빈은 싱긋 웃었다. “드 부르그 만세!” 니콜라스가 소리쳤다. “드 부르그 만세!”

아까만 해도 빗줄기가 거세서 온몸이 젖은 생쥐꼴이었는데 지금은 가랑비로 가늘어져서 견딜 만했다. 일행은 장원에서 나와 시냇가로 향했다. 물살이 빨라지고 수위도 높아져 있었다. 시내를 따라 말을 달려 황무지와 숲을 지나니 마을 한쪽의 경계선을 이루는, 바위가 울퉁불퉁한 골짜기가 나왔다. 언덕 위로 잿빛 암벽이 높이 솟아 있었다. 골짜기에 가까이 다가가자 동굴의 음침한 입구가 똑똑히 보였다. 일행은 주위에 사람이 없는데도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던스탄과 조프리는 니콜라스와 로빈에게 말을 맡기고 칼을 빼들고 큰 입을 벌리고 있는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조프리는 숨을 죽이고 전진했지만 동굴 깊숙한 곳에서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밖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던스탄이 한 손을 들어 그를 저지하면서 무릎을 꿇고 바닥을 살펴보더니 바싹 마른땅을 손으로 만져보았다. “최근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군.” 그는 고개를 저으며 일어섰다. “하지만 니콜라스 말처럼 큰 동굴이라면 우리가 모르는 다른 입구가 있을 수 있지. 더 깊이 들어가려면 횃불을 밝혀야겠다.”

조프리는 몸을 떨었다. 사방이 바위라 꽤 추웠다. 젖은 옷 속으로 한기가 스며들었다. 저 앞에 캄캄한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넓고 불길해 보였다. 그 길을 모두 뒤지려면 여러 날이 걸릴 것이다. 그는 늑대의 직감을 믿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다른 곳으로 가지.” 조프리는 실망감이 무겁게 짓눌러오는 것을 누르면서 대답했다.

밖으로 나온 일행은 다시 니콜라스를 따라서 가파른 암벽을 향해 걸었다. 조프리는 한숨을 눌렀다. 이 계곡은 전에 와본 적이 없었다. 염소가 다니기에도 가파른 길이었다.

“저기야.” 니콜라스가 말을 멈추더니 암석이 툭 튀어나온 한 곳을 가리켰다. “저기가 신부가 숨어 있던 곳이야. 십자가 모양이잖아.”

“십자가?” 조프리는 빗줄기 때문에 흐리게 보이는 묘한 모양새의 바위를 바라보았다.

“니콜라스니까 그렇게 보이는 거지.” 로빈이 빈정거렸다.

조프리와 던스탄은 말과 동생들을 남겨 두고 언덕을 올라 니콜라스가 말한 암석 쪽으로 향했다. 두 사람은 진흙탕과 미끄러운 땅바닥을 헤치면서 간신히 목적지에 다다랐다. 비 때문에 힘들었지만 유리한 점도 있었다. 빗소리가 두 사람의 발소리를 덮어 주었기 때문이다.

니콜라스 말대로 조금 기묘하게 생긴 암반 아래에 동굴 입구가 드러났다. 여름풀들이 자라서 입구를 부분적으로 가려주었지만 분명 누군가 풀들을 밟은 흔적이 있었다. 조프리는 칼에 손을 갖다대면서 몸을 기울여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캄캄하기만 하던 아까의 동굴과 달리 이 동굴은 안쪽이 은은한 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조프리는 칼을 빼들었다. 아직은 축축한 벽밖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눈앞을 방해하는 나뭇가지들을 옆으로 밀치고 바위가 울퉁불퉁한 동굴 안으로 전진했다.

조심스럽게 전진해 들어가는 조프리를 던스탄이 바싹 따랐다. 둥글게 휜 벽을 따라가자 넓은 공터가 나왔다. 언뜻 보면 동굴은 여기서 끝나는 듯했다. 하지만 공터 뒤에 있는 좁은 틈새에서 묘한 불빛이 흘러나와 그 뒤에 또 다른 공간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두 형제는 서로 눈짓을 하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틈새의 양쪽 벽에 등을 바싹 붙이고 그 너머를 들여다보았다. 정적이 깔린 어두운 동굴 속에서 던스탄이 낮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조프리 역시 눈앞에 펼쳐진 장면에 신음 소리가 새어 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흔들리는 촛불 아래 이제까지 본 적 없는 기묘한 풍경이 펼쳐졌다. 사방의 벽마다 넓은 천이 에워싸고 있었다. 그리고 장작이나 바윗돌, 방석 의자 같은 것을 모아 사람이 앉게 만든 자리 위에도 천이 덮여 있었다. 그리고 평평한 곳에는 어디나 촛불이 일렁이고 있었다. 초는 커다란 것, 굵직한 것, 그리고 교회에서 쓰는 가느다란 것 등 여러 모양이었고, 양초 토막들도 많이 보였다. 동굴 입구에서 흘러드는 바람에 옷가지들이 펄럭거렸다. 촛불 때문에 실내는 대낮같이 밝았다. 자연적으로 침강한 동굴 지형을 이용해서 만든 예배당 같았다.

조프리는 그 광경에 몸을 떨었다. 그는 교육받은 합리적인 인간이었다. 테일보트와 맬콤이 마술 운운하며 불안해하는 것을 학자답게 웃어버린 그도 지금은 이곳이 정말 마녀가 마술을 부릴 때 쓰는 장소가 아닌가 하는 궁금증을 떠올리고 있었다. 아니, 마녀보다 더 끔찍한 누군가가 숨어 있는지도 모르지. 자신의 의자에 놓여 있던 동물의 심장이 더욱 불길한 의미로 다가왔다. 문득 공포가 심장을 찔러왔다. 여기서 어떤 괴상한 의식이 거행되었든지 간에 엘렌이 그 안에 포함되지 않았기만을 빌었다.

바로 그때였다. 피에 굶주린 악마 같은 인간이나 시끄럽게 꽥꽥대는 늙은 할멈이 나타났다 해도 지금 나타난 사람만큼 놀랍지는 않았을 것이다. 작은 나무통 뒤에서 사람이 걸어나왔다. 눈부시게 흰 머리칼을 금세 알아볼 수 있었다.

에드레드 신부......

조프리가 앞으로 나서려 하자 던스탄이 붙잡고 울퉁불퉁한 바닥에 길게 늘어진 옷을 말없이 가리켜 보였다. 조프리는 눈가에서 젖은 머리칼을 밀어올리다가 흠칫 몸이 굳었다. 아까는 버려진 옷가지라고 생각한 것이 이제 보니 사람의 형태였다. 리넨 옷에 감싸인 것이 사람의 몸이라는 것을 깨닫자 그는 숨이 막혔다. 리넨 옷자락 한쪽에서 계피색의 긴 머리채가 땅위로 늘어져 있었다.

엘렌..... 그리고 에드레드가 그녀 위로 단도를 빼들고 있었다.

조프리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공포가 온몸을 치달렸다. 매끄러운 그녀의 머리채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서야 가슴속을 짓누르던 숨을 토해냈다. 아직은 살아 있구나. 하지만 얼마나 오래 살아 있을지..... 신중하자는 던스탄의 뜻을 이해하면서도 에드레드의 목을 움켜잡고 싶어 손이 근질거렸다. 이쪽은 멀리 떨어져 있는데 에드레드의 칼은 그녀에게 너무 가까웠다.

“물.” 나약하고 맥없는 목소리는 피츠휴라는 이름으로 악명을 떨치던 맹렬한 여자의 목소리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조프리는 몸을 떨었다. 저 미친놈이 그녀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일까? 그는 손잡이를 꽉 움켜쥐고 몸을 일으켜서 최대한 빠르게 쳐들어갈 수 있는 자세를 취했다.

“아.” 에드레드가 중얼거렸다. “이제야 깨어났군. 영영 자는 건 아닌가 했네. 난 마녀처럼 약초 다루는데 능숙하지 못하거든, 엘렌 피츠휴.”

약초라구? 그럼 저 자가 엘렌에게 약물을 먹였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그녀가 맥을 못 추는 것도 이해가 갔다. 아주 죽일 뻔했군. 조프리는 이를 악물었다.

“물.” 엘렌이 다시 속삭였다.

너무나 안타까운 속삭임에 조프리가 앞으로 몸을 내밀었지만 이번에도 던스탄이 저지했다.

“아니. 엘렌한테서 멀리 떨어질 때까지 기다려.” 던스탄은 조프리의 귀에 속삭이면서 신부의 손에서 번뜩이고 있는 긴칼을 가리켰다. 칼은 엘렌을 바싹 겨누고 있었다. 에드레드는 그녀를 돌아보면서 크게 칼을 휘둘렀다.

조프리는 심호흡을 했다. 던스탄 형에게 참을성을 배우다니..... 거북한 생각이 들자 억지로나마 냉정을 찾았다.

“그렇지, 내가 준 약을 먹으면 목이 마르지. 하지만 좀 기다려야겠어. 널 붙잡아 온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이 사악한 마녀. 그러니 나한테 공연한 술수 부릴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 이제 넌 악마하고 거래해서 얻은 그릇된 힘을 없애 버리고 주의 품으로 돌아가야 해, 엘렌 피츠휴.”

조프리는 에드레드가 엘렌의 목에 칼을 대자 몸이 뻣뻣해졌다. 손마디가 욱신거리고 미칠 듯이 뛰는 심장 고동에 가슴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네 아버지를 섬기려고 이 영지에 왔을 때부터 네가 타락한 인간이라는 것을 알았어. 네 아버지는 그런 못된 종자를 낳은 걸 재미있어하고 내 말은 귀에 담지도 않았어!” 에드레드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게다가 넌 지금 사악한 술수로 다른 사람까지 물들이고 있어. 난 그 사람을 멀리 보내려고 했지만 그는 네 사악함에 물들어 버렸지. 그래서 내가 직접 해결하기로 한 거야. 그래, 소감이 어때, 이 마녀야?”

“난 마녀가 아니야.” 엘렌이 중얼거렸다.

“아니긴!” 에드레드가 소리쳤다. 조프리는 칼끝이 그녀의 목 위로 내려가는 것을 보고 흠칫했다. “다른 여자들이 상스러운 욕설이나 퍼붓고 남자들한테 으름장을 놓는 걸 본 적이 있어? 다른 여자들이 제 남편에게 소리지르고 멀쩡한 기사를 죽이는 걸 보았냐고?”

엘렌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건 내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어.” 그녀가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조프리는 그녀가 여전히 몽롱한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말소리가 목에 잠기고 느렸다. “내가 어머니처럼 끝나고 싶지 않아한 건 당신도 잘 알잖아. 우리 어머니는 아버지와 부하들 때문에 망가져 버렸어. 어머니는 선하고 친절한 분이셨어. 하지만 그 때문에 아버지 손에 죽고 말았지. 아버지는 자신의 의지에 맞설 만한 인간만을 존중했으니까.”

엘렌은 말을 멈추고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조프리는 그녀의 가슴 저린 고백에 온몸이 산산조각 나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나도 아버지처럼 행동했지.” 그녀가 말하면서 쓴웃음을 터뜨렸다. 너무나 낯익은 웃음소리였다. “난 상스럽고 사납고 잔인하게 굴어서 아버지한테 날 그런 여자라고 믿게 만들었지. 모든 사람도 다 그렇게 믿게 했어. 그제야 모두들 날 가만 내버려두더군.”

조프리는 그녀의 말에 경악했다. 이제야 가장 중요한 수수께끼를 풀었다. 처음 장원에 왔을 때 그는 그녀의 행동이 남들의 주목을 끌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주목하지 않게 하기 위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다. 그리고 성공했다. 어느 정도까지는.

하지만 조프리는 그녀 자신도 모르던 아이러니한 상황을 간파했다. 강인한 척 연기하던 엘렌은 실제로 그 누구보다도 용감해졌다. 그는 그녀에 대한 자부심에 가슴이 부풀어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자신에 대해서는 조금도 자부심이 생기지 않았다. 자신이 지닌 모든 학식으로도 엘렌을 대하는 일에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사물을 겉모습으로만 판단하지 말라고 가르침받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대신 겉으로만 보이는 함정에 가치를 두었다. 청결함이라든가 읽고 쓰는 것, 그리고 옷 입은 모양새 같은 것. 그러면서 정말 중요한 것은 무시했다. 강인한 기백이나 타고난 선량함이나 관대함, 정열, 재치 등을.

조프리의 가슴은 그녀에 대한 강렬한 사랑으로 조여들었다.

하지만 에드레드는 그녀의 말을 듣고도 끄떡하지 않았다. 그러기엔 너무 심하게 미쳐 있었다. “네 말은 모두 거짓이야. 하긴 네 탓만은 아니지. 이게 다 사탄에 홀린 탓이니까, 엘렌.” 에드레드가 말하면서 목소리를 낮추고 칼을 그녀의 목에 댔다. “나야말로 너를 영원한 지옥불에서 구해줄 유일한 사람이야.”

조프리는 엘렌이 눈을 깜빡거리는 것을 보면서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넌 악마와 협정을 맺었어. 그래서 네 육체를 정화시켜야만 구원받을 수 있지. 심장을 함께 정화시켜야 깨끗해지는 거야.” 에드레드는 연한 푸른 눈동자를 미친 듯이 번뜩이면서 말했다.

조프리는 마른침을 삼키고 금방이라도 칼을 뺄 태세를 취했다. 에드레드가 엘렌을 어떻게 하려는지 너무나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엘렌에게 손끝하나 대게 할 수 없었다. 칼 따위 알게 뭐야. 던스탄과 재빨리 시선을 교환한 뒤 앞으로 뛰쳐나가려는데 바로 그 순간 엘렌이 세차게 발을 차올렸다. 에드레드가 휘청거리다가 넘어졌다. 그 틈을 이용해서 조프리는 동굴 안으로 뛰어들었다. 뒤를 따르는 던스탄의 늑대 같은 괴성이 귓가에 요란하게 울렸다.

조프리는 엘렌 위로 몸을 날리면서 누워 있는 에드레드에게 칼을 겨누었다. 에드레드가 들고 있던 칼은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죽어라, 이 나쁜 놈아.” 조프리가 팔을 높이 들었다. 하지만 엘렌이 쉰 목소리로 속삭이는 바람에 손을 멈추었다.

“그 사람은 미쳤어요, 조프리.”

조프리는 너무나 자비로운 간청에 놀라 엘렌을 돌아보았다. 그때 에드레드가 소리쳤다. “당신한테 저 여자를 넘길 수 없어!” 에드레드는 그 말을 하면서 가슴에 겨누어진 칼을 보지 못하고 일어서려 했다. 하지만 무거운 칼날에 가슴을 뚫리고 말았다.

조프리는 놀라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말 미쳤군. 이제는 그도 평화를 찾기를.....” 그는 칼을 거두어 바닥에 널린 천을 집어 닦고서 칼집에 넣었다. 그러고는 단도를 찾아 그녀를 묶은 두꺼운 리넨 자루를 베었다.

그녀는 몸을 떨며 일어나 앉았다. 조프리는 무릎을 꿇고 자루를 마저 벗겨 내었다. 그러자 지난번 일이 생각났다. 그때는 두 사람의 입장이 바뀌어서 그녀가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엘렌....” 그가 거칠게 속삭였다. 그녀는 불안한 표정으로 황갈색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그는 그 불안함을 평생이 걸리더라도 지워 줄 작정이었다. 지금부터라도 시작해야지. 그는 목안이 뻐근해지는 것을 참으면서 그녀에게 들려주기 위해 너무나 오랫동안 기다려 온 말을 속삭였다. “사랑하오, 엘렌.” 그는 있는 힘껏 그녀를 끌어안고 미친 듯이 다정한 말들을 속삭였다. 그녀를 사랑했다. 남은 평생 그것을 증명하며 살아갈 것이다. 온 세상에 대고 증명하리라.

던스탄이 낮게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조프리는 그제야 엘렌을 내려놓고 형을 도와 신부의 시체를 천으로 감쌌다. 옮겨다가 매장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번개처럼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몸을 펴면서 엘렌을 노려보았다. “이 미친 남자를 걷어차려 들다니, 무슨 짓이오?” 그가 목소리를 깔고 다그쳤다. “그러다가 죽을 수도 있었잖소! 자루에 묶인 처지에 뭘 어떻게 하려고?”

엘렌은 그 대답으로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붉혔다. 이제 곧 상스러운 욕설을 퍼부으면서 달려들리라 생각하는 순간 그녀가 고개를 들고 어깨를 들썩여 보였다. “이빨로 칼을 물려고 했죠.”

조프리가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던스탄이 고개를 뒤로 젖히고 요란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조프리는 돌아서서 형을 노려보며 이마를 찡그렸다. “엘렌이 잘한 짓인 줄 알고 좋아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형!” 그는 투덜거리면서도 형이 오랜 숙적인 엘렌을 대하는 태도가 변한 것을 보자 기분이 좋아졌다.

던스탄은 찬탄하는 얼굴로 엘렌을 향해 미소지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조프, 이 세상에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네 아내뿐이야!”

에필로그

조프리는 창 밖으로 캠피온 성을 둘러싼 구릉의 장관을 바라보면서 싱긋 웃었다. 눈 덮인 구릉들이 늦은 오후의 햇살아래 반짝이고 있었다. 차갑게 꽁꽁 얼어붙은 길 때문에 하루 일찍 엘렌과 함께 이 성에 도착했다. 길이 미끄러웠기 때문에 오히려 빨리 달려올 수 있었다. 하지만 와 보니 성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 나가고 없었다. 마리온이 재촉하는 바람에 모두들 크리스마스 전날 쓸 장작을 패러 숲으로 나갔다.

이제 모두 저녁을 먹으러 큰 홀에 모일 것이다. 저녁을 먹으면 일광욕실에 몰려가서 향 넣은 포도주와 크리스마스 과자를 먹을 테고. 너무나 익숙한 과정이었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전에 스티븐과 함께 쓰던 방이 아니라 손님방에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다. 작기는 하지만 그의 장원보다 훨씬 사치스러웠다. 하지만 이곳에 오래 머물 생각은 없었다. 이제는 자신의 집이 아니기 때문에.

그의 눈길이 커다란 침대로 향했다. 그곳에서 한 여자가 날씬한 몸을 웅크리고 기다란 머리칼을 베개 위에 흩어놓은 채 자고 있었다. 그는 활짝 웃었다. 앞으로 그녀와 나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온 집안을 채우리라.

그는 만족스러운 한숨 소리를 내면서 허리를 굽혀 잠결에 붉어진 엘렌의 뺨에 키스했다. 그녀의 몸은 아직 홀쭉했지만 부쩍 잠이 많아졌다. 아기 때문에 생긴 가슴의 변화가 드레스 위에 두드러져 보였다.

그 광경에 욕정이 꿈틀거렸다. 그녀 옆에 누울까 하는 유혹이 들었지만 저녁을 먹기 전에 던스탄과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게다가 깊이 잠들어 있는 엘렌을 깨우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머리칼에 입술을 대고 방을 나왔다.

아래층 홀은 시끌벅적했다. 던스탄이 상석으로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조프! 도착하는 것을 못 봐서 미안하다. 하지만 네 형수가 크리스마스에 피울 장작을 구하지 않고는 마음을 못 놓겠다지 뭐냐. 우리 아들한테 최대한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선물하겠다고 작정한 모양이야. 아기가 뭘 아느냐고 타일러도 소용없어.”

조프리는 싱긋 웃었다. 투덜거리고 있어도 던스탄이 아들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엘렌의 몸 속에 자라는 자신의 아이를 생각하자 문득 형을 찾은 이유가 생각나서 정색을 했다. “형, 이번 여름에 있었던 일 말인데.... 형에게 고맙다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어.”

던스탄이 별소리 다 한다는 듯이 투덜거렸지만 조프리는 물러나지 않았다.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무슨 일로도 보답하지 못할 거야. 내 아내를 되돌려 주었잖아. 내 목숨을.....”

던스탄은 어색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넌 나한테 빚진 게 없어, 조프. 지하 감방에 갇힌 날 구해준 게 너잖아.”

이번에는 조프리가 고개를 저었다. “형제들 모두 있었는데 뭘. 다만 내가 가장 먼저 도착했을 뿐이야. 그때 우리가 승리하게 해준 주인공은 드 부르그의 막내였어.” 그는 씁쓸한 얼굴로 던스탄을 보았다. “내가 그렇게 많이 배웠다고 자부해도 막내 니콜라스한테 더 배울 것이 있더라니까. 우리 가운데 가장 관찰력이 뛰어나거든.”

“맙소사, 그 말 니콜라스한테 하지 마라! 말했다간 그 녀석 등살에 살수가 없다구.” 던스탄이 항의하며 조프리를 차분하게 뜯어보았다. “우리가 도움이 되어서 기쁘다만 네가 직접 찾을 수도 있었는걸 뭐.” 그는 조프리가 부인하려 하자 손을 들어 막고 단호하게 계속했다. “아냐. 끝까지 들어. 너도 결국에는 다 알아냈을 거야. 네 머리를 따라갈 사람이 어디 있니? 너도 결국은 그 메시지를 쓴 사람이 누군지 알아냈을 거야. 에드레드 신부와 제수씨는 그 자리에서 꼼짝 않고 있었으니까, 시간이 걸릴 뿐이지 분명 찾아냈을 거야.”

조프리는 한숨을 쉬었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러는 동안 그녀가 다칠 수도 있고 또.....” 그는 마저 말을 못하고 말꼬리를 흐렸다.

던스탄이 투덜거렸다. “에드레드 신부는 엘렌을 해치지 못했을 거야. 약 효과가 약해지는 순간 제수씨가 그 자를 조각 내 버렸을 테니까!”

조프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마음이 홀가분했다. 여름부터 지금까지 내내 죄책감을 안고 살았기 때문이다. 던스탄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 도움 없이 엘렌과 함께 이겨냈을 수도 있다. 그래도 꼭 필요할 때 와준 도움의 손길이 고마웠다. “하긴.... 하지만 그 일로 새삼 형제의 가치를 알았어.”

“그건 나도 동감이다. 나 역시 가족의 가치를 여러 번 깨달았지.” 던스탄이 대꾸했다. “자, 그럼 이야기해 봐, 장원 사정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몇 달만에 처음 보잖니.”

“아마 몰라볼걸.” 조프리가 쿡쿡 웃었다. “하인들 가운데 싱글거리는 사람까지 있더라니까.”

던스탄이 웃자 조프리는 진지하게 설명했다. “분위기도 싹 바뀌었어. 그곳을 덮고 있던 불길한 그림자가 걷힌 모양이야.”

늑대에게서 재미있다는 표정이 사라졌다. “설마 그 신부라는 작자가 정말로 주문을 걸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놀란 얼굴이었다.

“아니지. 그런 비상식적인 일은 있을 리 없어. 신부는 제 영향력과 지위를 이용해서 사람들을 조종했을 뿐이야. 처음에는 나에 대한 거짓말을 흘려서 그렇게 했고, 나중에는 사람들을 협박했어. 지옥의 불이니 뭐니 해가면서.” 조프리는 이마를 찡그렸다. “그자가 신부에 적합치 않은 인간이라는 것을 알아본 사람들도 그의 복수가 두려워서 제대로 입을 떼지 못했지. 이 세상에서, 아니면 저 세상에 가서라도 복수를 당할까 봐.”

던스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방에 적이 깔렸는데도 모두 소탕했구나, 조프. 그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아, 하지만 내가 진정으로 쟁취한 것이 뭔지 보여 주지.” 조프리가 말했다. “그것이야말로 어떤 대가라도 치를 만한 것이었지.” 던스탄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자 조프리는 웃음을 터뜨리면서 하인을 불렀다. 그리고 하인에게 뭔가 지시하고 다시 던스탄을 돌아보는데 마리온이 보조개 팬 뺨을 붉히며 뛰어들었다.

“조프 도련님!” 그녀가 두 손을 내밀며 반겼다. 조프리가 그 손을 가볍게 쥐었다. “방금 동서를 보고 왔는데 너무나 달라 보이는군요.” 마리온이 교활하게 떠보듯 말했다.

조프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마리온이 엘렌의 임신을 알고 말하는 것인지 자신이 없었다. 아무한테도 알리지 않았는데.....

“형하고 엘렌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그는 늑대의 어리둥절한 얼굴을 모른 척했다. “실은..... 아, 저기 왔군.” 그는 돌아온 하인에게 탁자 위에 가져온 것을 놓으라고 시키고 마리온과 던스탄을 가까이 불렀다.

“이게 뭐냐?” 늑대는 하인이 접시 두 개를 놓아두고 주방으로 가는 것을 보고 의심스럽게 물었다.

“비슷하면서도 아주 다른 두 개의 단 음식이 여기 있지.” 조프리가 설명했다.

“이것도 네가 늘 하는 실험이냐, 조프?” 던스탄이 이마를 찡그렸다. 그리고 마리온에게 설명했다. “이 애는 꼭 자신이 공부한 것을 설명해 주려 든다니까.”

“그냥 보여 주는 것 뿐이야.” 조프리가 대꾸했다. “자, 이 접시 위의 것들을 봐. 하나는 밀크 푸딩으로 윤이 나고 달콤하고 탄탄하지. 다른 쪽은 애플 패스트리인데 생강과 계피와 아몬드를 넣어 아주 향이 강하고 조금 시큼하지. 어느 쪽이 좋아?” 조프리가 형에게 물었다.

던스탄은 제정신이냐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물론 밀크 푸딩이지.”

“그럼 그렇지.” 조프리가 싱긋 웃었다. 마리온은 조프리의 비교가 재미있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리면서 손뼉을 쳤다. “그러니까 내가 밀크 푸딩이란 말이죠?”

조프리는 던스탄의 놀란 얼굴에 대고 의기 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난 조금 톡 쏘는 맛이 있는 음식이 더 좋더군. 그렇다고 밀크 푸딩이 싫다는 것은 아니야. 그걸 좋아하는 사람을 우습게 보는 것도 아니고.” 그는 마리온에게 상냥하게 고갯짓을 해보였다.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만둬요, 도련님, 형은 못 알아 들었다구요!”

던스탄은 조프리가 바보처럼 너무 책만 읽는다는 둥 투덜거리면서 상석에 자리를 잡았다. 어느새 형제들이 몰려들어 인사를 했다.

“조프 형!” 니콜라스가 소리치면서 언제나처럼 명랑하게 깡충깡충 뛰었다. 로빈도 조프리의 등을 두드렸지만 애정 표시가 서투른 사이먼과 스티븐은 뒤로 물러섰다. 레이놀드도 형의 뒤를 따라왔다. 안장에 오래 앉아 있었기 때문에 오늘따라 그의 저는 다리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각자 자리에 앉자 모두 한꺼번에 떠들기 시작했다. 조프리는 엘렌을 데려와야 할지 어떨지 알 수가 없었다. 엘렌 자신은 결코 털어놓지 않았지만 그는 그녀가 형제들을 다시 만날 생각에 불안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그녀가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더구나 아버지 캠피온 백작이 몸소 안내를 하고 있었다.

조프리는 싱긋 웃었다가 완전히 드러난 그녀의 모습에 턱하고 숨이 막혔다. <너무나 달라 보이더군요> 마리온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마리온이 엘렌에게 조금 이른 크리스마스 선물을 한 모양이었다. 엘렌은 그가 본 어느 드레스보다 아름다운 새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짙고 윤택한 진홍색 드레스가 뺨의 혈색을 살려 주며 아기를 가져서 풍만해진 몸매에 달라붙어 있었다. 머리는 언제나처럼 늘어뜨리고 있었지만 얼굴 양쪽의 머리칼을 뒤로 빗어 올리고 붉은 리본으로 단단히 매었다. 나머지 머리는 윤기를 발하며 엉덩이까지 흘러내리고 있었다. 작은 변화가 놀랄 만한 차이를 가져왔다. 그녀의 사랑스러운 얼굴 윤곽이며 깨끗한 살갗, 섬세한 입술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크리스마스 딸기처럼 아름답고 농익은 모습이었다.

지난 몇 달 동안 그녀가 점점 더 아름다워지는 것을 찬탄의 눈으로 바라보았던 조프리도 지금 그녀의 모습 앞에 벼락을 맞은 듯 말을 잃었다. 심장이 방망이질했고 그보다 훨씬 아래쪽의 신체 부위가 제멋대로 날뛰었다. 그는 얼른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그제야 다른 형제들을 살펴보았다. 모두들 엘렌이 우아하게 걸어오는 자태를 찬탄하며 바라보고 있었다. 조프리는 자랑스레 싱긋 웃었다. 이제야 모두들 자신의 아내를 여자로, 그것도 매력적인 여자로 보아주고 있었다. 더 이상 저들이 농담을 소곤거린다거나 무례한 소리를 해대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 그 때문에 사이가 벌어질까 봐 겁낼 필요도 없고.

하지만 스티븐이 의자 등에 몸을 묻고 감상하는 눈으로 엘렌을 바라보며 입술에 천천히 미소를 떠올리는 것을 보자 즐거웠던 기분이 싹 달아났다. 스티븐의 그런 표정은 낯익은 것이었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니콜라스는 숨이 막힌 얼굴로 엘렌을 바라보고 있었고, 로빈은 흥미롭다는 표정이었다. 조프리는 의자에 앉아 불편하게 몸을 뒤척였다. 두려울 만큼 질투에 가까운 감정이 그를 괴롭혔다.

그는 늑대가 놀라 탄식하는 것을 돌아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그때 마리온이 남편에게 가만있으라는 손짓을 하고 몸을 굽히더니 뭐라고 속삭였다. 좀 이상하군. 조프리는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새삼스레 식탁을 둘러보았다. 짙은 의혹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그 의혹은 조금 뒤에 확인되었다. 스티븐이 엘렌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마리온에게 물었다.

“새로 시녀를 두셨나요?” 스티븐의 목소리가 쉬어 나왔다. 마리온은 즐겁게 웃음을 터뜨리면서 그 물음을 무시했다. 그리고 입을 열려는 던스탄을 한 손으로 저지했다. 다른 사람이 모르는 것을 늑대만은 눈치챈 모양이다.

아무도 그녀가 엘렌인 줄 모르고 있었다. 사이먼이 교활한 표정으로 조프리를 바라보았다. “제수씨를 데리고 오는 줄 알았는데.....”“데려왔어.” 조프리는 화가 나서 쏘아붙였다. 사이먼이 놀라서 마시던 맥주를 토해내는 바람에 근처에 앉아 있던 형제들이 고함을 치고 항의했다. 스티븐만이 여전히 의자에 몸을 묻고 앉아서 엘렌을 감상하고 있었다. “피츠휴는 어떻게 하고?” 조프리는 몸이 굳은 채 거칠게 대답했다. “피츠휴란 성은 더 이상 없어.” “뭐라구? 네가 죽였니?” 사이먼이 신음처럼 말을 토했다. 산전수전 겪은 무사의 얼굴에 떠오른 경악한 표정에 조프리는 웃음이 터지는 것을 눌렀다. 레이놀드마저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아니. 살아 있어. 하지만 지금은 드 부르그라는 성이지.” 조프리는 일어나서 엘렌에게 손을 내밀었다. “엘렌, 사이먼 기억하지?” 엘렌은 가문 좋은 숙녀답게 고개를 갸웃하면서 사이먼에게 인사했다. 조프리는 놀란 여섯 쌍의 눈이 그녀에게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우리 가문에 새로 들어온 아주 반가운 선물이지.” 캠피온 백작이 말하면서 조프리에게 엘렌을 넘겨주었다. “모두 환영해야지?” 캠피온은 돌아서서 아들들의 반응을 살폈다.

형제들이 모두 놀랍고 믿어지지 않는다는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쾌감이 느껴졌다. 잠깐 정적이 흐르고 나서 홀에 있던 사람 모두가 그녀에게 인사말을 중얼거렸다. 고갯짓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좋아.” 백작이 말하면서 식탁 상석으로 걸어가다가 멈춰 섰다. “내가 첫 축하 인사를 하게 해다오.” 조프리는 싱긋 웃었다. 아버지는 역시 그 누구보다 현명하고 확실하게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분이었다. 엘렌이 그러시라는 표시를 하는 것을 보자 막혔던 가슴이 후련하게 터지는 듯했다.

갑자기 말이 막혀 고갯짓만 하는 조프리를 보고 백작이 말을 이었다. “여기 모인 사람 모두가 나와 함께 드 부르그 가문의 새로운 일원이 탄생하게 된 것을 축하하리라 믿는다. 조프리, 네 아내를 서 있게 하지 말아라.”

마리온이 흥분해 소리쳤지만 말뜻을 알아들은 형제들이 고함을 치고 환호성을 지르는 바람에 파묻히고 말았다. 모두들 진심으로 기뻐해 주고 있었다. 그는 엘렌을 자리에 앉힌 뒤 자랑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 옆에 앉았다. 일 년 전만 해도 그토록 황량해 보이던 인생인데..... 더 이상의 행복은 있을 수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고함소리 때문에 귀가 먹을 지경이 되자 엘렌은 조프리에게 손을 뻗어 그의 단단한 팔을 움켜쥐었다. 전처럼 단도 손잡이를 잡지는 않았다. 그녀는 왁자지껄한 분위기에 익숙하지 못했다. 그런 분위기 끝에는 으레 폭력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함소리가 잦아들자 조금 긴장이 풀렸다. 조프리의 옛집을 방문하는 이번 여행은 꽤 어려운 걸음이었다. 조프리의 형제들이 우글거리는 소굴로 다시 들어가는 것이 괴로웠다. 하지만 웨섹스 성에서 다정하게 대해 주던 마리온을 생각하고 오겠다고 했다.

하지만 또 한 사람, 기대하지 못했던 사람에게서 따스한 환영을 받았다. 조프리의 아버지이자 드 부르그 혈통의 우두머리인 캠피온 백작이었다.

조프리의 아버지는 여러 가지 면에서 조프리와 비슷했다. 백작 역시 조프리처럼 전사의 육체 속에 지혜와 부드러움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 불편했다. 백작의 눈은 자신의 영혼까지 꿰뚫어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백작은 조프리와 똑같이 예의를 다해 맞아 주었다. 그래서 안심하고 그의 팔에 손을 맡기고 계단을 내려왔다. 그녀 역시 드 부르그 형제들 얼굴을 구분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자 의기 양양해졌다. 모두들 바보라니까. 그녀는 속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그들에게 복수를 하고 싶었다. 한 사람 한 사람마다.  조프리만 빼놓고.  그의 아버지도 역시. 캠피온 백작에게는 충성심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뭔가가 있었다. 남편말고는 누구에게도 공손하게 대하지 못하던 엘렌이지만 아직도 핸섬한 백작에게는 저도 모르게 이끌렸다. 백작에게는 힘이 뿜어져 나왔다. 위압적이고 강렬한 힘이었다. 조프리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겠다고 했는데 백작이 어떻게 자신의 임신을 알았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녀는 호기심 속에 눈을 가늘게 뜨고 백작을 바라보았다. 문득 백작이 자신의 눈길을 느낀 듯 얼굴을 들었다. 그녀는 묘한 전율에 감전된 듯 몸을 떨었지만 백작이 싱긋 웃자 전율은 사그러들었다. 아들의 눈길을 꼭 닮은 따스한 백작의 눈길이 느껴졌다. 장난스러운 눈빛은 둘만 몰래 웃어 보자고 유혹하는 듯했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드 부르그 가의 두 번째 신부를 맞는군. 뱃속의 아기와 함께.” 백작은 말하면서 아들들이 모여앉은 식탁을 둘러보았다. “크리스마스 전통으로 삼아야 할 모양이야.” 그는 의미 심장하게 말을 멈추었다. 엘렌은 그가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궁금했다가 다음 말을 듣고 알았다. “다음은 누가 될 거지?”

목이 졸리는 듯한 신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놀라 둘러보던 엘렌은 용맹하기로 이름난 드 부르그 가의 기사들 얼굴이 창백해지며 겁에 질린 것을 알아차렸다. 두렵게만 보이던 남자들이 결혼이라는 말 한 마디에 쥐구멍을 찾고 있었다. 엘렌은 형제들이 결혼하기 싫어한다던 마리온의 말이 기억났다. 그녀는 코웃음치고 싶은 것을 누르면서 약점을 알아냈으니 앞으로는 전 같은 눈으로 이들을 보지 않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이 약점을 무기 삼아 휘둘러야겠군. 엘렌은 백작의 미소에 미소로 장단을 맞추면서 중얼거렸다. 어떤 복수를 계획한다 해도 이들이 빠른 시일 내에 사랑에 눈이 멀어 결혼하는 것을 구경하는 것보다 더 고소한 복수는 없을 거라고.

-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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