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와결혼하는법-17화 (17/18)

17장

그를 죽일 수도 있었다. 서둘러 계단을 내려가는데 그가 칼을 빼들고 달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배에 단도를 꽂을 수 있었다. 그녀는 웬만한 기사들보다는 행동이 재빨랐다. 그리고 그녀는 계단을 내려가는 입장이라 더욱 유리했다. 하지만 달려오는 기사는 조프리가 부리는 테일보트였다. 그래서 팔을 잡히고도 얌전히 따라 내려갔다.

그의 우악스러운 손을 뿌리치지 않으려고 마음을 달래면서도 그녀는 그의 행동이 저녁 식사에 늦은 이유만은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 하지만 아래층에서 벌어진 광경을 보자 날카로운 공포의 칼날이 그녀의 가슴을 베고 지나갔다. 처음에는 조프리의 의자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검은 화살이 박혀 있었다. 공포로 숨막히는 비명 소리가 새어 나가려는 것을 삼키면서 보자 그가 한쪽에 멀쩡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걸음이 휘청거렸다. 크나큰 안도감에 맥이 빠지고 다리가 풀리려고 했다.

조프리는 무사해.

그럼 다른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어.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자신을 두고 속삭이는 말소리들을 무시하기는 힘들었다. <마녀!> 모두들 마녀라고 외치면서 자신에게서 얼굴을 돌렸다. 엘렌은 그들의 불안해하는 얼굴을 보고 웃고 싶었다. 하지만 조프리의 기사가 왜 이렇게 자신의 팔을 꽉 움켜쥐고 있는지 그녀 스스로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 순간 자신을 덮친 마음의 고통에 비하면 차라리 죽는 쪽이 쉬워 보였다.

테일보트는 자신 때문에 손이 더러워진다는 투로 그녀를 거칠게 앞으로 당겼다. 이 자의 다리를 걸어 넘어지게 해야 해. 엘렌은 속으로 소리쳤다. 아니면 그냥 목을 베어 버리든가. 하지만 가슴이 너무 아팠다. 간신히 숨만 쉴 수 있었다. 두 사람이 조프리 앞에 이르자 홀 안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녀를 놔줘.” 조프리가 말했다. 엘렌은 눈을 깜빡이면서 단단하게 굳은 그의 턱을 흘끗 보았다. 토할 것만 같았다. 목구멍에서 쓴 물이 솟구쳤지만 의지력으로 눌렀다. 여기서 토해서는 안 돼. 온통 적으로 둘러싸인 앞에서는. 이제까지 잘해 왔는데 마지막에 수치스러운 꼴을 보여서 허사로 만들 수는 없어. 테일보트는 안 그래도 얼른 손을 놓고 싶은 참에 조프리가 그렇게 말하자 그녀를 놓고 등을 떼밀었다. 엘렌은 칼에 손을 뻗지 않았다. 서 있는 것만도 힘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님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테일보트가 말했다.

“더구나 무기 잘 다루기로 악명 높지 않습니까.” 맬콤이 거들었다. 그는 공포를 감추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엘렌에게는 노려볼 기운조차 없었다. 그런 것은 아무 상관없었다.

아무것도.

“그래요.” 나이 든 기사 케넴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저 여자가 특별히 만든 자신의 활로 과녁을 맞추는 것을 보았어요. 아무도 따를 수 없는 솜씨였죠.” 그는 싱긋 웃었다. 엘렌이 눈도 깜빡거리지 않고 그를 바라보자 그가 불편한 얼굴로 눈을 돌렸다. 그나마 케넴을 쳐다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조프리의 눈을 마주할 수가 없으니까. 아직은. 아니, 앞으로도 영영 못 볼지도 모른다.

그녀 몸에는 여기저기 단도가 숨겨져 있었다. 하지만 의지력을 총동원해 두 손을 앞으로 깍지 꼈다. 관절에 하얗게 핏기가 가시도록. 식탁에 있던 사람들뿐 아니라 주방에서 일하는 하인들과 식사에 늦은 사람들이 새록새록 모여들었다. 불나방이 불 주위에 몰려들 듯 무서워하면서도 다가왔다. 그리고 모두들 웅성거리면서 그녀가 몰락하는 장면을 고대했다. 분위기가 긴장으로 팽팽해졌다. 엘렌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조프리의 표정이 다른 사람들처럼 비난하는 표정이라면 나는 죽어 버릴 거야. 고문 같은 시간을 질질 끄느니 당장 끝내는 편이 나아.

그녀는 심호흡을 하면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조프리의 눈은 케넴을 쏘아보고 있었다. 그는 두 손으로 탁자를 짚고 케넴을 향해서 몸을 굽혔다.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전투에 참가한 기사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또 누가 저렇게 화살을 쏠 수 있지?”

엘렌은 그가 묻는 말에 여러 사람이 동시에 시끄럽게 대답하는 것을 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조프리는 다시 몸을 일으켜 맬콤을 돌아보았다. 뭔가 생각하고 있구나. 엘렌은 그를 보며 생각했다. 조프리는 뭔가 골똘히 생각하느라 사람들이 떠드는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듯했다. “화살이 날아들 때 식탁에 앉아있던 사람이 누군지 기억 나나?”

몇몇 사람이 시끄럽게 항의했지만 그 소리는 다른 사람들이 놀라 속삭이는 소리에 파묻혀 버렸다. 조프리가 여전히 활 쏜 범인을 찾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의 속삭임이 홀 안에 가득 찼다. 머리 속이 멍멍해서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뒤에 사태를 깨달은 엘렌은 막혔던 숨을 토해냈다. 크나큰 안도감에 쓰러질 것만 같았다.

목에서 낯선 신음 소리가 새어 나오고 발이 휘청거렸다. 조프리가 불안한 눈으로 다가서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쓰러졌을 것이다. 그는 그녀의 허리에 부드럽게 손을 얹어 부축했다. 하지만 엘렌은 이대로 쓰러져서 그의 발치에 엎드리고 싶었다. 눈두덩과 가슴속이 뻑뻑해졌다. 그녀는 조프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현명하고 경이로운 조프리..... 그는 사람들이 나를 모함하는 소리를 무시했어.

그녀의 목에서 숨이 막힐 듯한 소리가 터져나왔다. 뺨에 뜨거운 물기가 흘러내리면서 조프리의 얼굴이 갑자기 흐릿해졌다. 엘렌은 한 손을 들었다가 물기가 만져지자 경악했다. 왜 눈물이 흐르는지 설명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내 아내가 화가 났군.” 조프리의 말이 들렸다. 타일 바닥이 빙그르르 돈다고 느낀 순간 그녀는 그의 품에 있었다. 그의 팔은 너무나 단단하고 따스했다. 그런데도 감기에 걸린 사람처럼 추워서 얼굴을 그의 어깨에 파묻었다. 조프리의 기사들이 항의했지만 그는 기사들을 물리치고 다급해진 걸음으로 계단을 향해 걸었다.

“나중에 이야기하지.” 그는 어깨 너머로 소리치면서 한 번에 두 계단씩 올라갔다. 그녀의 무게쯤 별 것 아니라는 듯.

침실에 들어선 그는 문을 닫고 미끄러지듯 천천히 그녀를 내려놓았다. “괜찮소? 설 수 있소?”

엘렌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다시 걷잡을 수 없는 신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조프리는 나직하게 욕설을 퍼부었다. 좀처럼 듣지 못하던 격한 어조였다. “미안하오! 테일보트가 감히 손대지 못하게 했어야 하는데. 하지만 화살을 쳐다보느라고 미처.....”

엘렌은 미소를 지으려고 했다. 하지만 얼굴에 계속 물기가 흘러내렸다. 조프리가 다시 욕설을 토하면서 그녀의 팔을 쓰다듬었다. 어디를 만져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했다. “내가 부상을 입은 줄 알았소? 맙소사, 당신한테 어떻게 보일지 미처 생각도 못했소! 난 생각이 모자라는 인간이오. 당신 남편이 되기엔 턱없이 모자라!”

말도 안 되는 그의 탄식을 듣고 그녀는 웃고 싶었다. 턱없이 모자라는 쪽은 그녀였다.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항의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정작 터져 나온 것은 커다란 흐느낌이었다. 그녀는 세찬 흐느낌에 떼밀려서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두 팔로 그의 다리를 끌어안았다.

난 이 남자를 남편으로 맞을 자격이 없어. 이 멋지고 강한 남자를. 뚜렷한 증거가 보이는데도 내가 자신을 해치려 했다고는 털끝만큼도 생각지 않다니..... 그런 믿음을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더없이 반기는 심정으로 허겁지겁 그의 신뢰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의 다리를 끌어안았다. 평생 지금처럼 뭔가를 끌어안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가 무릎을 꿇고 두 손을 자신의 등에 얹는 기척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낮고 괴로운 목소리로 뭔가 묻는 소리도 어렴풋이 들렸다. 하지만 자신의 울음소리가 커서 들리지 않았다. 언제 이렇게 울어 보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제야 모든 응어리가 풀어지면서 가슴이 후련했다. 눈물 한 방울마다 영혼이 씻기는 듯했다.

조프리는 가만히 그녀를 흔들었다. 그의 핸섬한 얼굴에 놀란 표정이 역력했다. 그의 불안을 지워주기 위해서라도 대답을 해야 했다. “내가 울고 있어요!” 간신히 입을 열면서 증명하려는 듯 자신의 뺨을 만져 보았다.

“그렇소. 하지만 왜?” 조프리가 그녀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무슨 일이오?”

엘렌은 간신히 목소리를 냈다. “당신은 날 의심하지 않았어요.” 그녀가 속삭였다. 조프리가 너무나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바람에 웃음을 삼켰다.

“물론 의심하지 않았소.” 그가 말하면서 짙은 눈썹을 치떴다. “의심해야 하오?”

엘렌은 눈을 깜빡거렸다. 그는 너무나 용감하고 핸섬하고 현명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확신이 넘쳤다. 그녀는 그에 대한 벅찬 감정으로 할 말을 잊었다. 강렬한 감정이 온몸에 솟구쳐서 눈물을 앗아가더니 대신 기쁨과 경이로움과 정열이 그 자리를 메웠다. 더 이상 누를 수 없을 정도로.

“당신을 사랑해요, 조프리.”

엘렌의 고른 숨소리를 듣자 조프리는 긴장이 풀렸다. 그녀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너무나 연약하고...... 인간적이었다. 그래서 불안했다. 그는 빨리 범인을 찾아내겠다고 속으로 맹세했다. 엘렌을 이런 식으로 괴롭힐 수는 없었다. 그녀는 나를 사랑한다고 했어. 나를 사랑한다고..... 그 생각에 남자다운 자부심이 솟구쳤다. 내가 늘 바라던 것이잖아,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

그는 아쉬운 심정을 안고 그녀 옆에서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서둘러 옷을 입고 방을 나갔다. 생각대로 테일보트가 계단 맨 위에서 경비를 서고 있었다. 그는 테일보트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복도에서 횃불이 타고 있었다. 그는 엘렌이 전에 쓰다가 비워 둔 방으로 향했다. 아내를 혼자 두고 너무 멀리 가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단둘이 이야기해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테일보트와 맬콤이 뒤를 따라 들어왔다. 조프리는 문을 닫고 그들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두 사람은 불안한 얼굴로 눈을 피했다. “오늘 자네들이 한 짓에 대해서 반성해 보았길 바라네.” 그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두 사람이 입을 열려는데 그가 날카로운 눈초리로 막았다. “자네들이 내 아내를 다그치는 동안 진짜 범인은 도망갔을 거라구. 식은 죽 먹기였지.”

“하지만 영주님......” 테일보트가 입을 열었다.

“아니.” 조프리가 그의 말을 잘랐다. “변명하지마. 자네는 마술을 막아주는 부적이라며 산호 조각을 탐내는 무지한 농부처럼 행동했어!” 조프리는 말을 멈추고 심호흡을 하면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가라앉혔다. 그리고 두 기사를 차분히 바라보았다. “논리적으로 생각하자구.” 그는 피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네가 천장 틈에 있는 엘렌을 보았나?” 그는 물으면서 테일보트를 돌아보았다.

“아뇨, 전......”

“그럼 복도에 있는 것을 봤군.”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테일보트가 우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럼 어디서 봤지? 정확히.” 조프리가 딱딱하게 말했다.

“계단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도망가려는 사람처럼.”

“아니면 급히 저녁을 먹으러 달려왔는지도 모르지.” 조프리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녀의 활은 어디 있었지?”

테일보트도 불편한 얼굴이었다. “영주님이 홀을 나가신 뒤 모두 뒤져보았지만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솔직하게 고백했다. “하지만 이 방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큰 침실에 있거나. 제가 직접 들어가 보지 못해서 모르죠. 영주님이.... 그 방에 있어서요.”

조프리는 테일보트의 어색한 설명을 못 들은 척했다. “그러니까 엘렌이 화살을 쏴서 목표를 정확히 맞히고는 천장 틈구멍에서 기어나와 복도를 달려와서 큰 침실이나 이 방에 숨었단 말이지. 그런 다음 방에 활을 감추고서도 계단까지 달려와서 자네와 마주쳤다는 건가?” 그는 눈썹을 치켰다.

테일보트는 얼굴을 찡그리면서 발을 바꿔 섰다. 하지만 맬콤은 조프리의 논리적인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동의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마녀들이 날아다닐 수 있다는 건 잘 알려진 일이죠.”

조프리는 그를 노려보았다. “다시는 내 아내를 마녀라고 부르지 마, 다시 한 번만 더 그 소리를 하면 가만두지 않겠네.” 그는 나직하게 쏘아붙이고는 한 손으로 눈을 문지르면서 바닥을 드러내는 인내심에 욕설을 중얼거렸다. 왜 이 자들은 제대로 진상을 파악하지 못하는 걸까? “진짜 범인은 자네들의 그런 무지한 점을 이용하고 있는 거라구!” 조프리가 쏘아댔다. “범인은 사람들에게 의심을 사게 해서 내가 인심을 잃고 결혼으로 만들어진 이곳과의 공조관계를 산산조각내고 있어. 화살 한 개, 깃털 하나 갖고 말이야.”

부츠만 내려다보고 있던 테일보트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조프리는 그가 이제야 알아들었나 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맬콤은 가망이 없었다. “더 있는지도 모르죠, 영주님. 마님에게 죄를 뒤집어씌울 목적인지도 몰라요.”

조프리는 흠칫 놀라 손바닥으로 이마를 쳤다. 너무나 간단한 사실인데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니 스스로를 걷어차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래, 그거야.” 그가 속삭였다. 흥분해서 목소리가 거칠었다. 이제야 나갈 길이 보이는군! 하지만 의기 양양한 기분도 잠깐, 그는 벽에 등을 기대고 신음을 토했다. “좋아. 이제 할 일은 엘렌의 적 가운데서 누가 한 짓인지 알아내기만 하면 되는군.”

테일보트는 맞장구치듯 헛기침을 했지만 맬콤은 손으로 턱을 긁었다. “적이 많은가요?” 그는 시치미를 떼며 물었다.

조프리는 몇 주 동안 쌓인 긴장을 풀고 웃음을 터뜨렸다.

조프리는 테일보트와 맬콤을 잠자리에 들게 한 뒤에 큰방으로 돌아왔다. 엘렌은 평화롭게 잠들어 있었다. 그는 침대 옆에 서서 잠깐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잠을 깨고 싶지는 않았다. 이기적인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그녀의 황갈색 눈동자에 다시 의혹의 그림자가 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고, 그녀가 분신처럼 가지고 다니는 단도에 손을 대는 것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연거푸 일어난 사건 때문에 초조해 있는 엘렌에게 누군가 그녀를 함정에 빠뜨리게 한다는 것을 알려서 부담을 덧붙이고 싶지 않았다. 조프리는 이마를 찡그렸다. 아픈 사람을 낫게 했다든지 나이를 먹었다든지 하는 죄목만으로 마녀라는 누명을 쓰고 화형당하거나 돌에 맞아 죽었다는 이야기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차가운 불안이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를 보호하겠다고 맹세했는데..... 아, 어떤 지혜로 수많은 백성을 잠재울 수 있단 말인가? 불안한 것은 백성들이 점점 흥분하고 있다는 사실뿐만이 아니었다. 아슬아슬하게 의자에 꽂힌 화살도 지금의 불안을 가중시키는데 한 몫 했다. 너무나 아슬아슬했다. 다음 번에는 빗나가지 않을 수도 있어.....

그는 나직한 욕설을 중얼거리면서 침대 가를 떠났다. 자신이 죽을 경우 엘렌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상상만 해도 몸이 떨렸다. 던스탄의 기사들이 그녀를 도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또..... 조프리는 또 다른 현실을 깨닫고 신음 소리를 토했다. 영지 안의 백성이 모두 분노해 일어선다 해도 우리 형제들의 분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테지.

조프리는 불안으로 마음이 급해져서 옷궤에서 필기도구를 꺼냈다. 현명한 남자라면 언제 자신의 능력을 뽐낼 것인지, 그리고 언제 다른 사람의 도움이나 충고를 구해야 하는지 안다. 그는 바보가 아니었다. 던스탄처럼 자신을 과신하고 자존심 때문에 도움을 물리쳐버리는 실수는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러기엔 위험이 너무나 컸다.

그는 밤이 늦었다는 것쯤 무시하고 아버지 캠피온 백작에게 편지를 썼다. 처음에는 조금 망설여졌지만 자신이 불안해하는 내용과 현재의 위험한 상황, 그리고 엘렌에 대해서 썼다. 이 세상 누구보다 그녀를 보호하고 싶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간단하게 또 한 통의 편지를 썼다. 이번에는 웨섹스에 보내는 편지였다.

그는 편지 쓰는 일에 몰두하느라 엘렌이 일어났다는 것도 모르고 있다가 그녀가 자신을 향해 몸을 구부리는 기척에 비로소 깨달았다. 그녀의 긴 머리칼이 속치마 아래 숨은 무릎까지 흘러내렸다. 그는 몸을 펴면서 펜을 놓고 그녀에게 인사말을 건넸다. 편지를 감출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그녀는 읽을 수 없으니까.

그는 자리에서 어색하게 일어섰다.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긴장을 감지했지만 그것이 자신의 탓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엘렌은 창가로 걸어가 어두운 바깥을 내다보았다. 조프리는 그녀가 날씬한 어깨를 당당하게 펴고 있는 모습을 감탄하며 바라보면서도 자신의 발치에 엎드려 사랑을 고백했다는 것을 믿기가 어려웠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녀가 날 사랑해.

그때 엘렌이 돌아서서 애처로운 몸짓으로 두 손을 내밀었다. 평소의 활달한 태도와는 사뭇 달랐다. “당신이 날 어떻게 만들었는지 봐요.” 그녀가 속삭였다. “난 나약해지고 말았어요. 우는 아이나 다름없다구요.”

“아니오.” 조프리가 다가갔다. “당신은 약하지 않소.” 그는 그녀의 얼굴을 살피면서 그녀의 말에 코웃음쳤다. 전보다 덜 난폭해지고 부드러워졌는지는 모르지만 나약해진 것은 절대 아니었다. “당신은 내가 알아온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오. 우리 형제들보다도.”

그녀가 회의적인 눈으로 바라보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들 버릇없는 응석받이일 뿐이지.”

사실이었다. 그의 형제들은 모두 특권층에서 태어나 현명하고도 공정한 부모의 애정과 관심을 받고 자랐다. 반면 엘렌은...... 그는 그녀의 어깨를 쥐었다. 그녀를 어루만지고 그녀에게 그녀 자신이 지닌 가치를 확인시켜 주고 싶었다.

“어떤 사람도 당신 혼자 해낸 일들을 해낼 수 없을 거요. 당신은 훌륭하게 살아남았소, 엘렌! 이긴 거란 말이오!” 조프리는 신념에 넘쳐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진 것을 깨닫고 목소리를 낮추고 나직하게 말했다. “그런 당신이 나 때문에 나약해지지는 않소.”

엘렌은 다시금 평소와 달리 나직한 신음 소리를 내면서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는 그녀를 바싹 끌어안았다. 그러자 희미한 죄책감이 파고들었다. 해주지 못한 말이 너무 많아서 죄책감이 생겼다. 예를 들면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 같은 것.

그녀가 사랑을 고백한 뒤부터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그녀의 진심 어린 고백에 보답할 말이 없기 때문이었다. 아직은 확신이 없었고 주저하는 기분이었다. 엘렌이 자신이 그려오던 아내상과 너무 다르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악당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정말 그 동안 그려온 아내상에 연연하기 때문에 이러는 것일까. 혹시 다른 사람들이 엘렌을 보는 시각에 나도 모르게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조프리는 한숨을 쉬었다. 사랑이란 의심이나 불안이 스며들 여지없는 화려하고 격한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순수하고 달콤한 몰두 상태라고, 그런데...... 던스탄이 얼간이 짓을 하던 때가 생각났다. 형은 마리온에 대한 감정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고집을 부렸다. 형처럼 나도 지금 내 감정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 아닐까.

그는 엘렌을 바싹 끌어안으면서 그녀의 무거운 머리채를 쓸어 내렸다. 몸 속에서 욕망이 솟구쳤다. 엘렌도 자신의 반응이 반가웠는지 느닷없이 그의 웃옷위로 가슴을 물었다. 그는 신음소리를 내면서 두 손으로 아름다운 몸의 곡선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불타오르는 격정 속에 혼란스럽던 생각을 파묻었다.

최소한 이 격정만은 자연스러웠다.

뭔가 이상했다.

조프리는 몸을 돌려 지평선을 살폈다. 하지만 어두워지는 하늘 말고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전과 달리 뜨거운 날씨가 일주일간 계속되면서 축축했던 땅을 바짝 말려 놓았는데 다시 비가 오고 있었다. 차라리 반가운 심정이었다. 곡식을 걱정해서 그런 것만은 아니고 비가 대기에 깔린 빽빽하고 불길한 열기를 몰아내 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의 주변에 날마다 조금씩 높아지고 있는 긴장된 분위기도 그렇게 쉽게 몰아낼 수만 있다면.....

그날 이후 그의 목숨을 노리려는 시도는 아직 없었다. 수수께끼 같은 경고가 날아드는 일도 없었다. 그러나 조프리는 위험이 사라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가오는 저 폭풍처럼 적의 새로운 공격이 급박하다는 예감이 들었다. 전 같으면 그런 예감을 바보 같다고 생각하고 눌러 버렸겠지만 요즘은 그런 불확실한 예감을 믿는 버릇이 생겼다. 자신의 목숨이 그런 조심성에 달려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지금 불안하게 주변을 둘러보는 것도 그런 이유들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무 것도 수상한 것이 발견되지 않자 이마를 찡그렸다. 오두막집 지붕에 이엉을 얹는 것을 감독하다가 불안한 예감에 직접 마을로 내려가 영지 안을 둘러보기로 하고 내려온 참이었다. 사람들을 안심시키기도 하고 자신이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서 경고를 보내기도 할 겸 해서였다. 그리고 저녁때나 돌아올 작정이었다. 하지만 묘한 불안감이 그를 자꾸만 장원으로 이끌었다.

그는 일하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 말을 돌린 뒤 멀리 있는 장원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하지만 수상한 병사들이 저택을 둘러싸지도 않았고, 수상한 연기나 말썽이 생긴 징조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찜찜한 기분에 온 길을 되짚어 갔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장원이 제대로 굴러가고 있는지 꼭 봐야 할 것 같았다. 그는 테일보트와 맬콤이 따라오는지 확인하러 기다리지도 않고 말에 박차를 가했다.

영지 안에서 말을 달려가니 바쁘게 일하던 사람들이 기겁을 했다. 그것을 보자 자신이 바보짓을 한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서둘러 장원에 도착했다. 그리고 말에서 뛰어내려 놀라 바라보고 있는 시종에게 고삐를 던졌다. 홀 안에도 이상한 것은 없었다. 하지만 불안감은 끈질기게 그를 괴롭혔다. 그는 한숨을 쉬면서 한 손으로 기다란 머리를 빗어 내렸다. 괜한 상상이겠지. 아니면 엘렌이 종종 말한 것처럼 미쳐 가고 있든지.

엘렌.

불현듯 그녀가 보고 싶었다. 그녀가 자신의 아내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두 사람 사이가 점점 더 은밀해지는데도 밤의 어둡고 뜨거운 시간말고는 분명한 거리감이 존재하고 있었다. 자신의 탓인 듯해서 죄책감이 생겼다. 그녀가 발가벗은 자신을 내준 반면 자신은 망설임 없이 마음을 내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신은 생각이 너무 많아요> 간밤에 그가 두통을 물리치느라고 콧등을 문지르자 엘렌은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한때 악명 높은 피츠휴였던 그녀가 그가 잠들 때까지 이마를 문질러 주었다. 그녀의 손가락은 힘차면서도 부드러웠다. 그리고 가만히 꾸짖는 목소리조차 그랬다.

그는 알 수 없는 불안에 떼밀려서 서둘러 계단을 달려 올라갔다. 빈 침실을 보자 불안감은 몇 배로 번져 나갔다. 그는 공포를 누르면서 발길을 돌려 문으로 향하다가 온몸이 꼿꼿해졌다.

아무 것도 없던 회칠벽이 검은색 글씨로 얼룩져 있었다. 누군가 숯조각으로, 아니면 송진에 담가 둔 화살로 휘갈겨 쓴 것 같았다. 글씨가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것을 깨닫자 숨이 막혔다.

사라져라, 드 부르그. 네가 가지 않으면 내가 사라지게 해주마.

크게 흘려 쓴 글씨체 뒤에는 E. 피츠휴라는 서명이 되어 있었다. 조프리는 눈썹을 좁히면서 다가갔다. 서명은 엘렌이 언젠가 결혼 서류에 끼적이던 어린애 같은 글씨와 비슷했다. 하지만 그는 그녀가 그 메시지를 쓰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글자 공부 진도가 빠르긴 했지만 그녀는 아직 글자쓰기를 연습하는 중이었다. 물론 서명 연습도 했다. 엘렌 드 부르그라고.

피츠휴가 아니었다.

조프리는 명백한 거짓 메시지에 쉰 목소리로 욕설을 퍼부으면서 미친 사람처럼 방안에서 달려나갔다. 보이지 않던 적이 마침내 최후의 공격을 해온 것이다. 그러고는 그의 영지보다, 그리고 그의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을 빼앗아가 버렸다.

엘렌이 사라졌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