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와결혼하는법-16화 (16/18)

16장

아무도 본 사람이 없었다.

조프리는 초조한 한숨을 쉬면서 손으로 머리를 긁어 올렸다. 사정 모르는 사람이라면 영지 내의 모든 백성들이, 피츠휴가 남긴 기사들부터 가장 신분이 낮은 농노까지 모두 합세해서 자신을 배신할 음모를 꾸미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백성들과 사이가 좋아진 요즘은 그건 말이 안 되는 소리다. 그는 혼란스러워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번 일은 정말 믿고 싶지 않을 정도로 실망스러웠다.

그는 서얼이 쓰던 창고 옆방에 앉아 있다가 벽에 몸을 기댔다. 지금까지 이 방에서 저녁 식사에 참가한 사람들과 사건을 목격한 사람들을 한 사람씩 불러 심문해 보았다. 그는 이성적으로 문제에 접근하려 애썼다.

내게 불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왜들 반항하려 들까? 다른 사람을 영주로 세우기 위해서 뭉친 것은 아닐까? 혹시 몽고메리를 위해서? 아니면 서얼?

하지만 몽고메리나 서얼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도 모두들 그를 경계했고 말하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침묵을 지켰다. 그는 다시 한 번 한숨을 쉬면서 콧등을 눌렀다. 자신을 경계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냉혹한 인간도 아니고 이제까지 폭력을 휘두른 일도 없는데..... 맙소사. 배신자 서얼을 놔주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드 부르그라는 이름 때문에 불편해 하는지도 모른다. 아버지 캠피온 백작은 온 나라에 다 알려진 분이니까. 드 부르그는 권력과 부를 상징하는 이름이었다. 그런데 무지한 사람들 가운데는 그런 것에 공포심을 갖고 미워하는 사람이 많았다.

벽에서 몸을 뗀 조프리는 마지막 촛불을 껐다. 오랫동안 심문하느라 피곤했다. 그저 유치한 장난일 뿐인데 내가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는 건 아닐까? 아, 이만 자야지.

그 생각을 하자 한나절만에 겨우 웃음이 나왔다. 엘렌이 위층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지..... 그녀의 부드러운 살결과 톡 쏘는 체취, 그리고 자신이 쾌락을 안겨 줄 때 내는 부드럽고 가쁜 신음 소리가 생생히 기억났다. 갑자기 마음이 초조해졌다.

그는 좁은 계단을 올라 침실로 향했다. 기대감에 팽팽히 부풀었으면서도 일부러 천천히 방으로 들어갔다. 혹시 그녀가 잠들었다면 깨우지 않기 위해서.

그는 침대 옆에 멈춰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놀랄 만큼 맹렬한 소유욕이 솟구쳤다. 그녀의 머리가 베개와 얼굴 위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 머리칼의 감촉을 기억하자 심장이 요란하게 뛰었다. 그는 몸을 앞으로 기울여 기다란 머리채를 들어 올려 손가락 사이에 대고 문질렀다. 매끄럽고 탄력 있고 생생했다. 엘렌처럼.

조프리는 다시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가슴에 흘러내린 머리칼 너머 리넨 옷자락을 보고 이마를 찌푸렸다. 그녀는 속치마를 입고 있었다.

묘하게 실망스러웠다. 초원에서 알몸을 부딪히고 난 지금에는 둘 사이에 옷이 필요 없다고 생각했는데..... 물론 그 뒤에 몇 가지 언짢은 일이 있긴 했지만.

얼굴이 더욱 찌푸려졌다. 사람들이 그녀를 마녀라고 부르자 그녀는 울화를 삭이지 못하고 거북이처럼 다시 자신의 껍질 속으로 숨어 버렸다. 그녀가 자신을 보호하려고 둘러친 벽이 그렇게 단단하지 않다는 사실은 자신만 알고 있었다. 불현듯 죄의식이 가슴을 찔렀다. 그녀에게 더 신경을 써주어야 했는데.....

저녁 식사 내내 그녀는 돌처럼 굳어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달랠 틈 없이 사람들을 심문할 일만 생각하고 있었다. 한시바삐 범인을 찾고 싶었다. 하지만 그 일이 허사가 되고 보니 차라리 아내에게나 신경쓸걸 하는 후회가 일었다.

이제야 남편 구실을 제대로 하게 되었는데..... 그는 나직하게 한숨을 쉬며 아내 옆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엘렌은 눈을 깜빡거리며 온 정신을 조프리에게 집중했다. 저녁 식사 때 그런 일이 벌어지고 난 뒤라 단둘이 있는 침실에서 그가 어떻게 나올지 자신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비겁하지만 자는 척하고 있었다.

사태는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모두들 자신이 남편에게 보내는 경고의 의미로 그 물건을 갖다 두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을 탓할 수도 없었다. 나 역시 결혼 초기에 그런 생각을 했다면 당장 실행에 옮겼을 테니까. 그때는 그를 쫓아낼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오, 지금은 아니야. 그녀는 속으로 소리치면서 신음 소리를 눌렀다. 그녀는 그가 방안에 들어와 침대 옆에 서서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의식하면서 속으로 차곡차곡 괴로움을 쌓아 가고 있었다.

불안한 심정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걸까? 아니면 혐오스러운 눈으로? 날 떠나려는 걸까, 아니면 나더러 떠나라고 할까? 그와 헤어져서는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은데. 문득 자신의 약한 마음이 두려워졌다.

난 요즘 너무 나약해지고 있어. 그리고 너무 조프리를 믿고 있어. 내가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그가 믿고 있다고. 믿음이라니, 쳇! 엘렌은 쓴웃음을 눌렀다. 날 믿어줄 사람이 누가 있다고. 하지만 그가 아까의 일을 자신에게도 캐물을까 봐 두려웠다.

“오!” 엘렌은 그의 뜨거운 몸이 등에 닿자 나직하게 신음을 토했다. 그의 단단한 팔이 자신을 감싸안고 바싹 끌어당겼다. 그녀는 그가 흥분한 증거를 감지하고 놀랐지만 달콤하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여전히 나를 원해. 그리고 아무 것도 묻지 않았어. 아니, 말이라고는 일체 없이 나의 머리에 코를 문지르면서 짜릿한 신음 소리만 토했어. 아까 초원에서 그랬던 것처럼. 엘렌은 격한 감동에 사로잡혀 눈을 깜빡거렸다.

그녀는 몸을 돌려 그를 뉘고 머리칼로 덮었다. 그가 좋아하는 모양으로. 그는 신음 소리를 내면서 그녀를 움켜잡았다. 엘렌은 그가 아무 것도 묻지 않으리란 것을 알았다. 역시 조프리다웠다. 안도감과 고마움에 휩싸인 그녀는 그의 가슴에 키스를 퍼부었다.

그녀는 더 밑으로 입술을 가져갔다. 그녀의 혀가 배 위를 움직이자 그는 거칠게 신음 소리를 내면서 그녀의 이름을 토해냈다.

자신의 혀에 이토록 격하게 반응하는 그의 모습을 보자 머리 속이 아찔해지고 자신이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골이 장대한 남편이 나의 밑에 누워 힘없이 신음 소리를 토하고 있다니.....

온몸이 짜릿했다. 오랫동안 묻혀 있던 감정의 봇물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것만 같았다. 그에게 모두를 내주고 싶었다. 몸과 마음과 영혼 모두.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그가 지쳐서 베개에 등을 묻는 것을 보고 그녀는 싱긋 웃으며 그의 옆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의 따스한 품에서 오늘 하루를 망친 사건을 까맣게 잊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꿈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조프리는 일찍 눈을 떴다. 뭔가 대책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아내를 아쉽게 바라보고 난 뒤 방을 나섰다. 문 밖에는 벌써 던스탄의 기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얼굴이 침통했다.

“무슨 일이지? 뭘 좀 알아냈나?” 기사들은 서로 불안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말을 하기가 어렵다는 듯이. 그것을 보자 조프리는 간밤의 심문이 헛수고로 돌아간 것이 새삼 생각나서 더욱 화가 났다. “그럼 서얼이 쓰던 방으로 가지. 우리끼리만 있다 보면 혀가 풀릴지도 모르니까.” 조프리는 홀을 걸어가면서 하인들에게 빵과 맥주를 가져오라고 시켰다. 방에 들어가서 작은 통 위에 자리를 잡은 그는 빵과 맥주가 오길 기다렸다가 벽에 등을 기대고 눈썹을 치떴다. “그래, 뭐지? 이야기할 게 뭐야?”

기사들은 다시 한 번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테일보트가 입을 열었다. “저희도 막연한 추측이나 소문밖에는 얻어듣지 못했습니다.”

“소문이 무성하더군요.” 맬콤이 말하면서 부지런히 빵을 뜯었다. 조프리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듯했다.

“적어도 나보다는 성과가 좋군. 난 아무리 달래도 아무 소리 못 들었는데.” 조프리가 털어놓았다.

테일보트는 음식은 쳐다보지 않고 헛기침을 했다. “영주님이 어떻게 나오실지 두려웠던 모양이죠.”

조프리는 손으로 머리를 긁어 올렸다. “왜 그렇게들 생각하지? 난 공평하게 일을 처리해 왔다고 생각하는데. 솔직히 말해서 누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조금도 짐작 못하겠어.”

맬콤이 다시 불편한 얼굴을 했다. “그냥 장난질 같지는 않고 영주님더러 이곳을 떠나라는 경고 같습니다.” 그의 말에 조프리는 한숨을 쉬었다. 누가, 왜 자신이 떠나길 바라는지 여전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당분간이라도 떠나 계시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테일보트가 불쑥 말했다. “웨섹스의 형님은 아무 때라도 환영해 주시는 것을 잘 알고 계시잖습니까.”

조프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우스꽝스러운 화살에 꿰인 고깃조각 하나에 겁먹고 도망가야 한다고? 농담이겠지!” 그는 그따위 협박에 굴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런 우스꽝스러운 협박 따위에는.

테일보트는 엄숙한 얼굴로 조프리를 바라보았다. “누구의 짓인지 확실히는 모르지만 이 장원 안에는 영주님이 떠나면 이득을 얻는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 영주님이 돌아가신다고 쳐도요.”

“그게 누구지?” 조프리가 캐물었다. 그런 사람이 누군지 알고 싶었다. 이제야 적의 정체를 알게 되나 보군. 끊임없이 날 괴롭히던 수수께끼가 이제 풀리는 건가.

맬콤은 주춤했지만 테일보트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그를 마주 보았다. “마님입니다.”

조프리는 벌떡 일어서다가 냉정을 찾고 주저앉으면서 험악하게 욕설을 중얼거렸다. 개인적인 감정은 잠깐 한 쪽으로 접어두고 억지로나마 논리적인 태도로 엘렌을 변호했다. “그렇게 해서 그녀가 얻는 게 뭐지? 이 집인가, 유산 말이야?” 그는 그들의 서툰 논리를 비웃었다. “설령 그녀가 이 영지를 손에 넣는다 해도 왕은 독신녀가 영지를 다스리게는 하지 않을 거야. 다른 남자와 또 결혼시킬 거라구.” 그녀가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는 생각을 하자 입  안이 썼다. 난 누구에게도 엘렌을 넘겨주지는 않을 거야.

“그럴까요? 남편 몇쯤 땅에 묻고 나면 그녀도 마침내 자유를 얻을지 모르죠. 세상에는 왕의 명령보다 더욱 강력한 것들도 있으니까요.” 테일보트가 말했다.

조프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말도 안 돼!”

“그래요?” 테일보트가 대꾸했다. “그 화살만 봐도 보통 화살보다 작은 게 여자한테 꼭 맞는 크기예요. 그리고 마님은 무기를 능숙하게 다루는 걸로 유명하잖습니까.”

조프리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자세히 보니까 그 물건을 싼 껍데기가 벨라도나(유독 식물의 일종)나 투구꽃무리 같은 겁니다.”

“그런 독초는 손만 닿아도 사람을 쓰러뜨립니다.” 맬콤이 속삭였다.

불안이 조프리를 휘감았다. 대화가 진행되는 방향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테일보트는 맬콤의 말을 무시하고 계속 말했다. “그리고 화살 만드는 직공들을 심문해 보니까 그 화살은 흔히 쓰는 깃털이 아니라 올빼미 깃털이랍니다. 올빼미요.” 그는 중대한 발견을 해서 경이롭다는 듯 거듭 강조했다.

“그렇습니다.” 맬콤이 숨죽인 소리로 맞장구쳤다. “올빼미 깃털이란 사람을 해코지할 때 쓰는 물건이라고들 알고 있죠. 올빼미 깃털, 검은 잉크, 독약, 제물 등등.....” 그는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작은 소리로 소곤거렸다. “모두 마녀들이 쓰는 것이죠.”

조프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지금 내 아내가 마녀라는 건가?” 조프리의 목소리는 속마음하고 달리 나직했다. 조프리의 행동거지는 던스탄과 전혀 달랐지만 기사들도 두 형제가 닮은 것을 눈치챈 것이 분명했다. 그의 노기 앞에 두 기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닙니다, 영주님.” 맬콤이 말을 더듬었다. “제 말은 그런 것들은 여자들이나 쓰는 수단이지 남자들이 할 짓이 아니라는 거죠.”

조프리는 주먹이 나가려는 것을 강한 의지력으로 눌렀다. 이 두 사람을 때리는 일은 피해야 한다. 하지만 나의 아내를 나쁘게 말하는 인간은 누구라도 때려눕힐 테다. 영지의 백성들을 몽땅 때려눕혀야 한다 해도 어쩔 수 없지. 그는 분노를 누르면서 속으로 소리쳤다.

“모욕할 생각은 없습니다, 영주님. 하지만 던스탄 형님이 저더러 영주님을 위해서 경계를 게을리하지 말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저는 마님이 누리는 특권이 줄어든다면 마음이 가벼울 것 같습니다.”

조프리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무례한 태도와 제안에 경악했다. 맬콤은 용감한 기사였다. 키가 크고 늘씬하기는 했지만 수많은 전투를 겪으면서 단련된 몸이라 병사 한 무리쯤은 능히 다룰 수 있었다. 그런데도..... “내 아내가 겁이 나나?” 조프리가 믿어지지 않는 심정으로 물었다.

“그녀가 전에 영주님을 협박하던 것을 생각하면 당분간이라도 가둬두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테일보트가 입술을 씰룩이며 말했다.

조프리는 다시 한 번 뜨거운 분노가 치솟았다. 칼에 손을 뻗었지만 자신이 지금 격렬하게 분노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멈칫했다. 드 부르그 형제 가운데서 가장 인내심 많고 차분하다는 내가 지금 눈앞의 기사를 폭력으로 무릎 꿇리려 하고 있다니.....

그는 마지못해 손을 거두고 뒤로 물러섰다. 기사들은 눈에 띄게 안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그들이 자신을 위해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는 것을 탓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그 와중에 무지와 의혹에 떼밀려 엉뚱한 생각을 한 것뿐이다.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아니. 깃털 몇 개와 핏자국 정도를 가지고 아내를 감옥에 넣지는 않겠네.” 조프리가 말했다. “그 따위 경고쯤에 도망가지도 않고 말이야. 그러니 자네들도 다른 용의자를 찾아보게. 내 아내가 정말 겁난다면 모르지만.” 그는 일부러 놀리듯 눈썹을 치떴다. “겁이 난다면 두 사람 모두 던스탄에게 돌아가도 좋아.”

기사들은 격렬하게 도리질하면서 그에게 협력하겠다고 맹세했다. 조프리는 초조한 손짓으로 두 사람을 물러가게 했다. 그들이 가고 나자 그는 통 위에 주저앉아 다시 생각에 골몰했다.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이 일을 마무리지어야 한다.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지경이 되기 전에.

조프리는 한숨을 쉬고 머리 속을 헤집으면서 단서를 찾았다. 몽고메리와 서얼이 떠올랐다. 어제만 해도 그럴 리 없다고 금세 그 이름을 지워 버렸지만 오늘은 달랐다. 오히려 가장 그럴 듯한 용의자로 떠올랐다.

또 한 명의 용의자에 대해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조프리는 테일보트와 맬콤의 충고를 무시하고 평소대로 행동했다. 두 사람은 그림자처럼 뒤따르면서 홀 안에서 식사도 하지 말고 사람들 사이에 섞이지도 말라고 조언했다. 감옥에라도 가둬두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자신을 해코지하려는 사람이 누군지 몰라도 조프리는 그에게 그런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범인이 그 꼴을 보면 얼마나 좋아하겠는가. 다른 사람이 한 짓을 가지고 엘렌을 다그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여전히 밤마다 아내와 사랑을 나누었고 낮에는 사람들에게 자주 그녀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틈틈이 시간을 내어 글을 가르쳤다. 그녀는 기대 이상으로 명민하고 머리 회전이 빨랐다. 뿌듯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그녀는 아주 똑똑한 학생이고 배우는 데에 열심이었다. 그리고 처음과는 너무나 다른, 밝고 아름다운 여자로 탈바꿈했다. 그는 그런 그녀를 홀린 듯한 기분으로 바라볼 때가 많았다. 하지만 사이가 가까워질수록 서로의 차이점은 더욱 확연해졌다. 도저히 건널 수 없는 장애물 같았다. 아니, 건너고 싶지 않았다.

그런 생각 때문에 엘렌과의 사이에 긴장감이 생겼다. 장원 위에 내려앉은 어두운 구름 때문에 긴장감은 더욱 짙어졌다. 사람들은 전보다 더욱 그를 경계하고 흘끔흘끔 바라보면서 두려워했다.

영주가 이 성을 떠나지 않았으니 당장이라도 누군가의 복수가 가해지리라 생각하는 듯했다. 연달아 뿌리는 빗줄기도 분위기를 악화시키고 사람들의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들판은 늘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저녁 식사를 기다리며 앉아 있던 조프리는 사람들이 노려보는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저들은 내가 비를 몰고 왔다고 원망하고 있는 거야. 성을 떠나라는 분명한 경고가 왔는데도 그 경고를 무시했잖아. 그러니 영주에게 마녀의 분노가 내리길 바랄 수밖에!

조프리는 코웃음치면서 초조하게 의자를 끌어당겼다. 그런 헛소리는 이제 진력이 났다. 두꺼비를 보면 악령이 찾아든다고 믿는 사람들이었다. 두꺼비는 새로 생긴 웅덩이가 좋아서 나온 것뿐인데.

그는 한숨을 쉬며 경호원 노릇을 하는 두 명의 기사를 흘겨보았다. 그들도 무지한 농노들보다 나을 게 없었다. 그들은 자신을 제 몸도 돌볼 줄 모르는 노인네 보살피듯 했다. 이런저런 생각에 조프리는 기분이 나빴다.

두 손이 모두 묶인 것처럼 무기력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화가 났다. 칼을 쳐들어 영지에 있는 사람들을 몽땅 베어 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 때도 있었다. 그렇게 하면 고민이 사라질 테니까. 아니, 정말 그럴까? 모든 지혜를 동원해도 적이 어디에 숨었는지, 아니 적이 누구인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욱 화가 났다.

대체 어떤 겁쟁이가 이렇게 불쑥 경고를 던져 놓고 숨어 버렸을까? 그 의문에 대답이 떠오르자 그는 또 머리가 욱신거렸다. 엘렌의 아버지가 던스탄 형에게 쓴 전술들이 생생히 기억났기 때문이다. 그러자 곧 새로운 궁금증이 떠올랐다. 혹시 몽고메리나 서얼이 피츠휴에게서 배운 것들을 써먹는 것이 아닐까? 그들은 정말 이곳을 떠난 걸까? 둘 가운데 누군가 나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조프리는 아련한 심정으로 웨섹스 성을 그리워했다. 캠피온 성마저 그리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망갈 수는 없었다. 그는 콧등을 누르면서 한숨을 쉬었다. 여름이니 아내와 단둘이 초원에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넓은 초원에서 잠깐 즐긴 일이 마치 전생의 일처럼 느껴졌다.

엘렌은 어디 있을까? 엘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에게 홀에서 식사하자고 부탁해 놓았는데. 더 이상 쓸데없는 의심을 사기 싫어서였다. 그런데 그녀는 종종 식사에 늦게 내려왔다. 오늘도 그랬다. 그는 화가 나서 험한 소리가 나가려는 것을 눌렀다. 하지만 이미 음식이 나왔다. 더구나 두 명의 경호원까지 끌고 올라가 그녀를 찾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는 그녀를 기다리지 않고 육즙이 흐르는 고기를 잘랐다. 하지만 테일보트의 낮은 목소리가 그를 저지했다. “제가 먼저 맛보겟습니다, 영주님. 독이 들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조프리는 몸이 굳어진 채 입을 벌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크게 웃어 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테일보트의 눈에 깃들인 표정을 보자 그러지 못했다.

단순하기 그지없는 기사의 눈에 담긴 것은 염려와 희생 정신이었다. 먹고 죽을지도 모르는데 기꺼이 먹겠다는 것이다. 그런 의심은 근거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최소한 그의 뜻을 존중해야 했다.

조프리는 망설이다가 홀 안을 돌아다니는 개에게 고깃조각을 던져 주었다. 바로 그 순간, 그가 타일 바닥에 몸을 구부리고 있는데 머리 위로 뭔가 피잉 하는 기색이 전해지더니 요란하게 탁하는 소리가 났다.

“영주님! 아, 저기, 테일보트!” 맬콤이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조프리는 맬콤의 육중한 무게에 깔려 바닥에 뒹굴었다. 그는 화가 나 으르렁거리면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낯익은 검은 화살이 의자에 꽂혀 있는 것을 보고 헉하고 숨을 들이켰다. 앉아 있었다면 자신의 가슴께가 될 자리였다.

“건드리지 마시오!” 맬콤이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안 그래도 모두들 겁에 질려 멀찌감치 물러나고 있었다. “화살촉에 독이 발라져 있소.”

마술을 쓰는 사람의 짓이라는 의미가 담긴 그 말이 재빠르게 홀에 울려 퍼졌다. 전염병처럼 퍼지는 공포가 손에 잡히는 듯했다.

누굴까? 조프리는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따라 눈길을 주었다. 그러자 아치형 천장 근처 틈새가 보였다. 엘렌은 아버지가 그 구멍을 이용해서 초대한 손님들의 동정을 살폈다고 했다. 하지만 위층 복도 끝에 있는 저 공간을 아는 사람이 또 누가 있을까? 피츠휴를 섬기던 기사 가운데 한 명일까? 저 거리에서 목표를 맞히려면 대단한 기술이 필요할 텐데.....

사람들이 숨막혀 하는 소리에 그는 계단을 돌아보았다. 천장 쪽으로 달려갔던 테일보트가 돌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혼자 오는 것이 아니었다. 때맞추어 현장에 도착해서 용의자를 잡은 것이 틀림없군. 이제야 잡았어! 조프리는 마침내 적과 대면하게 되었다는 생각에 들떠 몸을 폈다.

하지만 들떴던 기분은 금세 사그라지고 말았다. 노란색 옷이 언뜻 보였다. 순간 테일보트가 끌고 오는 사람이 누군지 알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목이 졸리는 듯한 신음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자신의 목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 같았다. 그는 두 사람이 내려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사람들도 테일보트가 데리고 오는 사람이 누군지 알고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엘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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