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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와결혼하는법-15화 (15/18)
  • 15장

    조프리는 그녀를 바싹 끌어안았다. 엘렌은 따스하고 포근한 그의 품을 외투처럼 온몸에 둘렀다.

    몇 년 만인지는 알 수 없지만 실로 오랜만에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한 행동이었다. 그를 위해서 자신을 내준 보답으로 잠깐의 키스의 즐거움을 맛보는 것 외에는 기대하지 않았다. 키스가 끝나면 그의 무게가 몸을 눌러올 것이고 그 뒤에는 분명 고통이 따르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고통은 없고 전혀 상상도 못했던 쾌락과 전율이 있을 뿐이었다. 눈을 감고 조금 전의 기억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그가 머리칼 위에 뺨을 댔다.

    “그자가 강제로 덮쳤군, 그렇지?”

    나직한 질문이지만 엘렌은 흠칫했다. 몸을 빼려고 했지만 조프리가 꽉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도 저항할 기운이 없었다. 그는 진실을 들을 때까지 놔주지 않을 모양이었다. 그 생각을 하자 행복했던 기분이 사그러들었다.

    이제 곧 피치 못할 사태가 벌어지겠지. 엘렌은 중얼거리면서 눈두덩이 뻑뻑해지는 느낌에 눈을 깜빡거렸다. 마침내 그가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장애물을 벗겨냈다. 그 동안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던 장애물. 그녀 역시 그것을 무시했다. 처음에는 아무 상관없다는 심정이었기 때문에 무시했고, 나중에는 경솔하게도 스스로를 속여왔다. 별 것 아니라고. 맙소사. 이렇게 엄청나게 중요한 일이 될 줄은 미처 몰랐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나쁘게 생각해 주길 바라고 그렇게 행동하면서 살아왔지만 조프리만은 자신의 속마음을 알아주길 바랐다. 그를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혐오스러운 듯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조프리가 그런 질문을 할만큼 사정을 잘 알고 있다면 나머지도 곧 의심하겠지. 내가 살인을 저질러 놓고도 후회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는 목안이 뻐근해지는 것을 참으면서 있는 힘껏 각오를 다졌다. 두 사람 사이에 뭔가 싹튼 것은 분명하지만 일찌감치 뿌리 뽑는 게 바람직하다. “그래요.”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인정했다. “비열한 에이버리는 늑대한테서 도망쳤어요. 늑대를 치려던 그의 음모는 실패했지만 그래도 최소한 이 장원만은 건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전쟁터에서 피를 뚝뚝 흘리면서 달려와 에드레드 신부를 재촉해 나와 결혼식을 강행했어요. 내가 꿈에도 원치 않은 결혼식을. 그러고는 혹시 무효가 될까 봐 강제로 첫날밤을 치러서 합법적인 결혼으로 만들려고 했죠. 몹쓸 인간 같으니!”

    그녀는 그날 밤처럼 온몸이 떨렸지만 의지력을 총동원해서 가라앉혔다. 조프리에게 이 괴로움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건드리지 말라고 경고했어요. 하지만 들은 척도 않더군요. 그래서 죽여 버렸어요.” 그녀는 침을 뱉듯이 말을 토했다. 에이버리의 시체에 침을 뱉은 것처럼. 그녀는 여태 그를 죽인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는 나를 조롱하며 내 몸에 더러운 손을 댔고 역겨운 몸으로 눌러왔어. 땀에 젖어 헐떡거리면서.....

    엘렌은 코웃음을 치며 머리 속에서 에이버리의 영상을 지웠다. 조프리는 불같이 성을 내겠지. 날 욕할 거야. 나 같은 살인자와 결혼한 것도 모자라 잠까지 잤으니까. 조금 전의 일을 후회하면서 더러운 것이라도 닿은 듯 나를 밀쳐 버릴 거야. 나에게 가까이 가는 사람은 모두 더럽혀진다던 에드레드 신부의 말이 지당하다는 듯이.

    하지만 조프리는 자신을 더 가까이 끌어안으며 머리칼에 뺨을 문질렀다. 위로하는 몸짓이라는 것을 그녀도 알아챘다. 뭘 하는 짓일까? 왜 병사들을 불러 감방으로 끌어가게 하지 않을까?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내가 그 자를 죽여 버려야 했는데.....” 그가 속삭였다.

    엘렌은 그답지 않게 격렬한 어조에 고개를 들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그의 눈이 번뜩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턱이 단단하게 굳어져 있었다. “당신을 보호해 주어야 했는데. 웨섹스에서 그자를 찾아내 그 자리에서 죽여야 하는데. 당신한테 달려가기 전에.” 조프리는 격하게 말을 토했다.

    엘렌은 그의 맹렬한 적의에 놀라 눈을 깜빡거렸다. 생각지 못한 그의 반응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는 그녀가 불안해하는 것을 눈치채고는 어조를 조금 누그러뜨렸다. “할 수만 있다면 그 자식의 기억을 모두 쓸어버리고 싶소.” 그는 격하게 말하면서도 그녀의 얼굴 위에 흘러내린 머리칼을 부드러운 손길로 걷어 올렸다. “오로지 나의 손길만 알게 해주겠소.” 그가 그녀를 내려다보면서 속삭였다.

    엘렌은 몸을 떨었다. 그의 위압적인 눈길에 항복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는 그녀의 뺨과 머리선, 목덜미를 따라 키스했다. 엘렌은 그의 입술이 모험을 계속하는 동안 몽롱하게 누워 있었다. 한 남자가 자신의 편을 들어주었다는 것이, 비난하지도 멋대로 판단하지도 않았다는 것이 아직도 믿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깜빡거리며 눈두덩에 덮쳐 오는 뜨거운 것을 눌렀다. 조프리는 이 세상 어떤 사람하고도 다른 사람이었다.

    그의 키스는 그녀에게 남아 있던 어두움을 몰아내면서 그녀 몸에 따스한 낙인을 찍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꿈속으로 밀려들어가면서 그에게 자신을 모두 내맡겼다.

    잠을 깨자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그녀는 놀라 몸을 굴렸다. 이제까지 늦잠을 자본 적이 없었다. 잠을 자다가 적이라도 나타나 공격할까 봐 두려웠기 때문에. 그녀는 멍한 심정으로 눈을 깜빡거리다가 온몸의 근육이 모두 저항하는 바람에 신음 소리를 냈다. 그리고 눈을 번쩍 떴다.

    조프리.....

    간밤의 기억이 떠오르자 혼미한 신음 소리가 낮게 새어 나왔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방안을 둘러보았다. 놀랍게도 방석 의자 위에 치즈와 빵, 그리고 맥주가 놓여 있었다. 가까이에는 물이 담긴 작은 대야까지 있었다.

    조프리.....

    엘렌은 그가 직접 대야와 먹을 것을 들여놓았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다른 영주들 같으면 꿈에도 생각지 못할 일이었다. 하지만 조프리는 달랐다. 그는 나를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았어. 그녀는 갑자기 허기가 느껴져서 이불을 젖히고 빵 한 조각을 움켜쥔 채 대야가 있는 쪽으로 갔다. 들어앉아 씻기에는 크기가 작아서 그대로 서서 몸을 닦았다. 그런 다음 리넨 수건으로 몸을 감싸고 잠깐 망설였다.

    그녀는 이마를 찡그리면서 웨섹스 성에 가지고 갔던 옷궤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다시 한 번 망설이다가 무릎을 꿇고 뚜껑을 열었다. 남편의 옷가지 아래에 손을 넣자 마리온이 만들어 준 드레스가 나왔다. 드레스를 받았을 때는 코웃음치고 말았는데...... 지금 그녀는 경이로운 심정으로 아름다운 천을 쓸어 보았다. 정말 내가 입을 수 있을까?

    못 입을 건 뭐람. 그녀는 중얼거리면서 새 리넨 속치마를 입고 노란 실크드레스를 입었다. 그리고 눈을 크게 뜨고 몸을 빙빙 돌리면서 손바닥으로 천을 만져 보았다. 감촉이 말할 수 없이 좋았다. 그러다가 흠칫 손을 멈추고 낮은 방석 의자에 앉아서 머리를 빗어 내렸다. 조프리가 해준 것처럼 가지런히 빗겨 내려고 애썼지만 조프리처럼 손이 부드럽지도 못했고, 그만큼 참을성도 없었다. 그녀는 손을 멈추고 얼굴을 붉혔다. 간밤에 보여 준 그의 부드러움과 참을성이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났기 때문이다.

    그녀는 빗을 내려놓고 달아오른 두 뺨에 손을 댔다. 갑자기 불안해졌다. 이렇게 달라진 모습을 아랫사람들이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레이디로 보이고 싶은 나의 노력을 백성들이 비웃으면 어떻게 하지? 게다가 조프리까지 합세한다면? 갑자기 그를 대하기가 두려워졌다. 밝은 아침에 그를 대하려니 부끄러웠다. 간밤에 한 일들이 아직도 머리 속에 생생한데....

    바로 그때 조프리가 문 앞에 나타났다. 엘렌은 괴로운 비명소리가 터지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그녀는 그의 넓은 가슴을 노려보면서 그의 눈길을 피했다. 오늘 아침 그의 눈이 어떤 표정을 담고 있을지 자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간밤에 그런 일이 있었는데 그가 새삼 꾸짖는다거나 무관심한 눈빛으로 대한다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너무 아름다워서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겠소.” 그가 따스하고 친근감이 담긴 어조로 말했다.

    엘렌은 놀라 입을 떡 벌리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꿈꾸는 듯한 표정에 자신에 대한 욕망이 담겨 있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그녀 안에 있던 불안이 모두 녹아 버렸다. 늦은 아침의 밝은 햇살 속에서도 그는 여전히 그녀를 욕심내고 있었다. 엘렌은 저도 모르게 화답하는 미소를 입술에 떠올렸다.

    “엘렌......” 그가 가까이 다가오면서 속삭였다. 그녀는 기대감으로 몸을 떨면서 그가 몸을 굽혀 키스해 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는 손만 내밀 뿐이었다. “자, 어서 와요. 당신을 또다시 침대로 데려가기 전에.”

    엘렌은 새삼 얼굴이 붉어졌다. 그의 노골적인 말투 때문이기도 했지만 온몸을 타고 흐르는 실망감 때문이기도 했다. 저 침대에서 그토록 엄청난 쾌락을 맛보았는데 다시 간들 뭐 어떻다고. 이 밝은 아침에 그런 생각을 하는 내가 음탕한 걸까? 그녀는 실망을 감추면서 고개를 숙였다.

    “자, 갑시다. 날이 화창하니 당신과 말을 타고 싶소.” 그는 낮게 속삭이면서 그녀의 손을 쥐었다.

    그녀는 어색하긴 했지만 그의 손바닥을 느끼고 싶은 욕심에 그에게 이끌려 홀을 지나고, 놀라서 입을 딱 벌리고 있는 하인들을 지나쳐 마구간으로 향했다. 말들이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내가 자고있는 동안 조프리는 꽤 바빴던 모양이야.

    말을 달려 영지를 나서서 언덕으로 향하자 기분이 상쾌해졌다. 조프리는 신선하고 달콤한 냄새가 나는 잡초들이 빽빽이 들어선 초원에 이르자 말을 세웠다. 가까운 언덕을 따라 꽃과 들풀의 연청색 꽃봉오리들이 살랑대고 있었다. 엘렌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이토록 활력에 가득 차고 평화로운 느낌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말없이 조프리를 바라보았다. 그는 우아하게 말에서 내려 그녀를 도우려고 앞으로 나왔다. 그녀는 웃음을 터뜨리고 싶었다. 이제까지 말에서 내리는 자신을 도우려는 남자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조프리말고는.

    하지만 재미있다는 기분은 그의 따스한 손이 자신의 허리에 얹히고 그의 단단한 몸이 자신의 몸에 닿자 곧 사라졌다. 그는 천천히 그녀를 내려놓고는 싱긋 은밀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돌아서서 담요를 풀밭에 펴고 그 위에 앉아 차분히 부츠와 칼을 벗어 옆에 놓았다. 그녀는 놀란 심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짙은 의혹이 피어오르면서 얼굴이 진홍색으로 달아올랐다. 하지만 고개를 숙이고 그의 옆에 앉았다. 멀리 있는 산등성이들을 감상하는 척하면서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의 손가락이 숱 많은 머리채를 빗어 내리기 시작하자 그녀는 어쩔 수 없는 쾌감에 고개를 뒤로 젖혔다. 이제까지 자신의 머리칼을 특별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아니, 자신의 어떤 부분도.....아름답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바보 같은 생각이지만 묘한 확신이 들었다. 조프리라면 자신을 특별하게 봐줄 거라는.

    그가 가까이 다가온 듯 그의 따스한 체온이 등에 닿았다. 그는 그녀의 머리칼을 옆으로 치우고 목덜미에 키스했다.

    “조프리!” 그녀는 온몸을 덮치는 나른한 기운을 물리치려고 소리쳤다.

    “엘렌.....” 그의 두 손이 천천히 올라오더니 그녀의 가슴을 감쌌다.

    “여기서, 이렇게요?”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다그쳤다. “당신, 제정신이에요?”

    “아니, 당신 때문에 갈증났을 뿐이오.” 그는 거친 목소리로 속삭였다.

    엘렌은 눈을 깜빡거렸다. 후끈 하는 열기가 온몸을 짓눌렀지만 돌아앉아 그를 바라보았다. 침대 속에서도 할 수 있는데 왜 굳이 이리로 데려왔을까? 그녀는 묻는 듯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다가 그의 눈 속에서 해답을 찾았다. 조프리는 흉한 기억들로 가득한 침실과 장원에서 멀리 벗어나게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을 깨닫자 갑자기 가슴이 조여들었다. 그는 어둠이 훼방 놓지 않는 이곳에서, 초원의 밝고 아름다운 경치 속에서 자신에게 쾌락을 가르쳐 주고 싶은 것이 틀림없었다. 그의 친절함에 몸이 떨리고 목안에서 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두 손으로 조프리의 얼굴을 감쌌다.

    “오, 엘렌.....” 이윽고 그는 키스했다.

    부드러운 키스에 너무나 많은 감정이 담겨 있어서 엘렌은 긴장으로 폭발할 것만 같았다. 그녀는 열렬히 그에게 키스를 돌려주었다. 그것만이 온몸을 타고 흐르는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마침내 조프리가 신음 소리를 냈다. 그녀는 그 소리를 듣자 기뻤다. 그를 위해.... 뭔가를 해주고 싶었다. 그녀는 그의 부드러운 옷감 위로 그의 가슴을 쓸었다.

    “날 만져 줘요, 엘렌.” 조프리가 다그치면서 입술을 떼고 웃옷을 머리 위로 던져 버렸다.

    엘렌은 숨이 막혀 그의 상체를 바라보았다. 널찍한 근육질 가슴에 검고 곱슬곱슬한 털이 가득 덮여 있었다. 밝은 햇살에서 보니 그의 자태가 경이로웠다.

    그녀는 천천히 망설이듯 한 손을 들어 그의 가슴에 댔다. 그의 심장이 세차게 뛰고 있었다. 그녀는 놀라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표정에 그녀는 뺨이 달아올랐다. 꿈꾸는 표정이라기보다는 강렬한 표정이었다. 그 눈길은 곧장 그녀의 깊숙한 곳으로 파장을 보냈다.

    대담해진 그녀는 손가락으로 그의 숱 많은 머리칼을 쓸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그의 가슴에 입술을 대고 넓은 가슴 구석구석 키스를 퍼부었다.

    그가 신음 소리를 내며 드레스를 잡아당겼다. 그녀는 무모한 격정에 사로잡혀 드레스를 머리 위로 벗어 그의 옷 옆에 던져 버렸다. 그리고 속치마까지 벗어버린 채 두 팔로 그의 목을 껴안고 가슴을 그의 가슴에 누르면서도 아무런 수치도, 불안도 느끼지 않고 뜨거운 전율을 맛보았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경이로운 남자인지 알고 있을까?

    “이것도 도와 줘요.” 그가 속삭였다.

    엘렌은 그가 바지를 벗겨 달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그의 옷을 벗겼다. 불안이나 혐오감은 조금도 없었다. 조프리는 몸을 떨며 그녀를 끌어당기면서 뒤로 누웠다. 그녀는 그의 몸 위에 엎어졌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몸 속에서 욕구가 고동치는데도 그녀를 아래에 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초조해져서 그의 어깨를 물었다.

    그는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그녀의 이름을 거칠게 속삭이면서 그녀를 더욱 앞으로 끌었다. 그 순간 그녀는 조프리의 의도를 깨닫고 후닥닥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그녀는 확실히 알았다. 그가 이러는 것은 자신을 위해서라는 것을. 간밤에 그는 자신의 몸무게가 나를 불안하게 만든 것을 알아챘어. 그래서 이런 자세를 취한 거야. 키 크고 담대한 기사 조프리가, 돈 많고 권력 있는 드 부르그 가의 기사가 내 아래 누워 몸을 내맡기고 있다니.....

    그녀는 눈두덩이가 무거워지는 것을 참고 너무나 아름답고 관대한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보답으로 뭔가 주고 싶었다. 모든 것을. 그녀는 심호흡을 하고 머리를 흔들어 그의 알몸 위로 머리채를 드리웠다.

    그는 거칠게 한숨을 쉬더니 두 손 가득 머리칼을 쥐고서 깊고 축축하고 뜨거운 키스를 퍼부었다. 그가 입술을 떼고 숨막히게 속삭였다. “날 받아들여 줘요.” 거친 목소리였다.

    그의 다급한 애원에 그녀는 온몸에 갈증이 퍼지는 것을 느꼈다. 이윽고 그가 몸 속으로 침입해오자 그녀는 숨이 막혔다.

    느리게 율동하는 듯한 두 사람의 움직임이 점점 더 빨라지고, 두 사람은 동시에 신음 소리를 터뜨렸다. 엘렌은 그 어떤 것도 이 완벽한 순간을 망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이 똑같은 꿈속에 잠긴 이 순간만은. 가혹한 현실과 싸우면서 살아왔지만 그것도 지금은 딴 세상 일만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현실에서 도망칠 수는 없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키 큰 잡초 속에 숨은 누군가가 두 사람의 종말을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원으로 돌아온 뒤에도 그가 불어넣어 준 경이로운 느낌이 아직도 몸 속에 머물러 있었다. 그녀는 온종일 그 느낌을 붙잡아 두고 싶었다. 조프리와 헤어지고 나자 정원밖에 갈 곳이 없었다. 기사 한 명이 달려와서 엘렌의 아버지가 남긴 재산 문제로 할 이야기가 있다며 조프리를 데려갔기 때문이었다.

    엘렌은 걸음을 멈추고 이마를 찡그렸다. 자신의 변화가 스스로도 놀라웠다. 영지에 대해서 더 이상 아무 욕심이 없기 때문에 누구에게든지 거저 내주고 싶었다. 어차피 이 땅을 탐내 본 적도 없었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매달려 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땅이 아니라 다른 것들이었다. 그녀는 엉뚱한 생각을 하는 자신을 비웃느라 목이 뻑뻑해졌다.

    그녀는 낮은 담에 앉아 전과 달라진 눈으로 정원을 둘러보았다. 정원 안에는 조프리의 명령으로 심겨진 약초들이 줄지어 자라고 있었다. 이곳에는 한때 향내 나는 아름다운 꽃들이 가득 피어 있었다. 이 자리에 벤치가 있지 않았나? 이런 날은 벤치가 있어야 거기 앉아 화창한 날씨를 감상할 수 있는데.....

    어린 시절을 생각하는데도 모처럼 쓰디쓴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 시절의 강렬한 그림자도 이제는 힘을 잃었고, 그 시절의 어두운 색채도 조프리라는 밝은 빛에 비하면 그림자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그 시절을 떠올리면서 힘을 얻곤 했지만 지금은 그 시절의 어두움에서 빠져나와 밝고 선한 빛줄기에 손을 뻗고 있었다. 그 빛줄기를 오늘 비로소 찾아냈다. 그것은 모험이었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녀는 심호흡을 하면서 손에 든 책을 내려다보았다. 조프리는 책을 두고 가면서 당장 글자 공부를 시작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엘렌은 개의치 않았다. 오늘은 그 어떤 날보다 즐거웠기 때문이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면서 앞으로 공부할 책의 첫 페이지를 폈다.

    자신을 전혀 새로운 세계로 이끌어 줄 첫 글자..... 그 글자를 바라보자 아찔한 현기증이 덮쳤다. 이 글자가 나를 조프리에게 어울리는 여자로 만들어줄 테지.....

    조프리가 저녁을 먹으러 들어갔을 때 홀 안은 이미 북적거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새로 임명한 집사와 사무를 보느라고 시간이 걸렸다. 조프리는 평소의 자신답지 않게 안달이 났다. 식사를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엘렌을 보고 싶어서였다. 엘렌은 이제 속속들이 그의 아내였다. 어젯밤에 있었던 일은 첫날밤이라고 할 수 없다. 오늘 아침 어두움이 훼방놓지 않는 밝은 햇살 아래 그녀를 자신의 아내로 만든 때야말로 첫날밤이었다. 엘렌과 결혼하고 나서 미래를 향한 희망에 부풀기는 처음이었다.

    하지만 희망은 의자를 끌어당기는 순간 사그러들었다.

    알 수 없는 악취가 코에 흘러드는 바람에 몸이 굳어서 한 걸음 물러났다. 의자 위에 있던 거무튀튀한 물건이 모습을 드러냈다. 자동으로 칼에 손이 갔지만 그것은 이미 죽은 것이었다. 던스탄이 보낸 기사들이 놀라 앞으로 달려와서 자신을 둘러쌌다가 흉측한 물건을 보고 역시 숨막혀 했다.

    처음 보는 화살이 수상한 물건을 꿰뚫고 의자에 꽂혀 있었다. 조프리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가까이 들여다보다가 욕설이 나오는 것을 참았다. 심장이었다. 다행히 사람의 것이 아니라 동물의 것이었다. 사람의 것이라면 좀더 커야 했다. 누가 이것을 장난처럼 나의 의자에 올려놓았을까?

    누구라도 가능한 일이다. 누군가 여전히 자신을 환영하고 있지 않은 증거를 목격하자 가슴속에 분노가 가득 피어올랐다. 화살을 뽑으려고 손을 내미는데 던스탄의 기사 한 명이 말렸다.

    “안 됩니다. 자세히 보십시오, 영주님.” 맬콤이 말했다. “까맣고 언짢은 게 끈적끈적하잖습니까. 독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요, 불길합니다.” 테일보트가 맞장구쳤다.

    “불길한 징조일까요?” 맬콤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경고의 뜻인지도 모르죠.” 테일보트가 말했다. 조프리는 화가 나서 다시 그 흉측한 물건을 내려다보았다. 혹시 이곳 사람들만 알고 있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그저 나를 화나게 하기 위한 장난일 뿐일까? 몽고메리와 서얼의 짓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미 영영 추방된 몸인데.... 그럼 또 다른 적이 숨어 있단 말인가?

    조프리는 고개를 들고 우울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처음 이곳에 온 뒤부터 번번이 나를 쫓아내려는 음모에 시달렸다. 처음에는 아내가, 그 뒤에는 몽고메리, 또 그 뒤에는 집사가, 이 음모는 대체 언제쯤 끝이 날까? 지금 저렇게 놀라는 표정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속으로는 배신의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은 아닐까?

    조프리는 수상한 얼굴이 없나 찾아보았다. 모든 사람이 홀 입구를 쳐다보다가 그 다음에는 주방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칼 손잡이를 움켜잡고 돌아서면서 주방으로 가는 아치형 입구에 서 있는 사람을 마주 보았다. 그 사람이 놀라며 숨막혀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앞으로 걸어나온 사람은 불충스러운 기사도 아니고 영주를 못마땅해하는 농부도 아니었다.

    엘렌.....

    조프리는 이마를 찡그렸다. 조용하던 홀이 속삭이는 말소리로 시끌시끌해지는 것을 보자 더욱 실망스러웠다. 대개 너무 낮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간신히 <마녀>라는 말을 알아듣고 몸이 굳었다. 엘렌의 별명을 여러 가지 들었지만 마녀라는 말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엘렌이 악명 높은 것은 난폭하고 성질이 나빠서 그런 것이지 독약이나 마술을 써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마녀라는 소리를 듣자 불안해졌다. 미개한 사람들 중에는 미신을 숭배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은 아무리 이웃이라도 마녀니 뭐니 해서 처벌하는 짓에 열심이었다.

    그런데 엘렌은 결코 그들의 이웃인 적이 없었다.

    조프리는 더 언짢은 말이 나오기 전에 막으려고 칼에 손을 대고 아내를 바라보았다. 엘렌도 그 말을 들은 것이 분명했다. 고개를 수그리고 머리를 앞으로 늘어뜨린 채 사람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것을 보자 조프리는 울분이 치솟았다. 지금 저기 있는 여자는 자신이 낮에 품에 안았던 정열적이고 경이롭던 여자와 조금도 닮은 데가 없었다. 그는 분노에 찬 눈으로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사람들이 그녀를 이렇게 만든 것일까? 왜 사람들은 겉모습뿐인 엘렌의 강한 면만을 볼까? 그는 주위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점점 더 커지자 자신이 직접 상황을 해결하기로 했다.

    “조용히!” 그가 소리쳤다. 던스탄 형과 다를 것 없는 목소리였다. “내 앞에서 허튼 소리들 하지 말아라.” 그는 경고하고 나서 천천히 몸을 돌려 홀 안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면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맙소사, 이 사람들을 모두 의심해야 한단 말인가? 그는 한숨을 쉬었다. 던스탄이 보낸 기사들만이 당당하게 서 있었다. “음식을 가져와요.” 그가 마침내 명령했다. 그러고 나서 이마를 찡그리면서 던스탄의 기사들을 돌아보았다. “테일보트, 저 의자를 마당으로 가져가서 씻게. 그리고 저 물건은 사람들이 보기 전에 묻어 버리고.” 테일보트가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맬콤은 언짢은 일을 맡게 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얼굴이었다.

    조프리는 새 의자를 가져오게 하고는 엘렌을 불렀다. 그녀는 한순간 주저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마침내 우울한 표정으로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몇 시간만에 다시 만났는데 분위기가 이렇게 엉망이 되어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참았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식사를 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란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그것이 최선이다. 하지만 이걸로 다 덮어 둔 것은 아니야, 절대로. 오늘밤 한 사람 한 사람 불러 심문해 볼 테다. 자신의 의자에 심장을 갖다 둔 사람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점심 식사 뒤에 둔 것이 분명하고, 그 시간은 하루 가운데 홀 안이 가장 복잡할 때니까 누군가 분명 목격자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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