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와결혼하는법-14화 (14/18)
  • 14장

    조프리는 옆구리에 작은 꾸러미를 안고 식당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의자 밑에 꾸러미를 내려놓았다. 얼굴이 붉어졌다. 신중히 고르긴 했지만 그녀에게 선물을 줄 생각을 하자 이상하게 민망스러웠다. 하지만 간밤에 우리 사이에는 분명 변화가 있었어. 엘렌은 나를 믿고 등을 돌려 기대앉았어. 그런 믿음을 가볍게 취급할 수 없지. 그는 새로 싹튼 화기 애애한 분위기를 축하할 만한 선물을 해서 그녀의 믿음에 보답하고 싶었다.

    꽃이나 자질구레한 장신구 따위를 선물하면 어떨까 하고도 생각했지만 그런 것은 엘렌에게 적당하지 않을 것 같았다. 엘렌은 평범하지 않은 여자니까 그런 그녀가 좋아할 선물이 필요했다. 진지했던 어제의 분위기를 기념할 선물이.....

    지금 그는 마치 짝사랑하는 사춘기 소년처럼 의자에 앉아 초조하게 몸을 뒤틀고 있었다. 불안해할 이유가 없다고 스스로에게 타일렀지만 엘렌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가 없었다. 나의 선물을 소중히 받아 줄까, 아니면 코웃음치면서 나의 얼굴에 대고 던져 버릴까?

    그는 헛기침을 하면서 맥주잔에 손을 뻗었다가 엘렌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라 도로 내렸다. 그녀의 모습은 너무 환상적이었다! 얼굴을 가리지 않고 어깨 위로 길게 늘어뜨린 머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움직임이 우아했다. 늘 웅크리고 다니고, 눈을 희번덕거리며 당장이라도 덤벼들 것 같던 모습과는 너무 달랐다.

    그녀는 고개를 높이 쳐들고 타일 바닥 위를 걸어오고 있었다. 그처럼 차분한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녀의 변화를 눈치챈 것이 자신만은 아닌 듯 홀 안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저녁을 먹던 사람들이 모두 자신들의 여주인을 흘끔흘끔 바라보았다.

    그녀의 당당한 태도를 바라보자 가슴속이 미어졌다. 그는 술잔을 들어 크게 한 모금 마셨다. 미소로 그녀를 맞기 위해서였다. 우정..... 그가 바라는 것은 그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마련한 선물을 주면 우정은 공고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식사는 간단했지만 무척 괜찮았다. 요즘은 나날이 음식 맛이 좋아졌다. 조프리는 열심히 먹어 치웠다. 하지만 누군가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는 불편한 느낌이 즐거운 식사를 방해했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자신을 노려보는 눈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조프리는 어깨를 들썩이면서 불편한 느낌을 털어 버리고 올해 처음 나온 체리 하나를 집었다. 너무 시어서 입 속에 침이 고였다. 그는 그 짜릿한 맛을 즐기면서 싱긋 웃었다. 그러고는 몸을 옆으로 기울이고 통통한 체리 하나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흠칫 물러나면서 체리를 바라보고 눈을 깜빡거렸다. 그리고 넋빠진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왜? 먹고 싶지 않소?”

    그녀는 체리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난.....글쎄.....” 그녀는 말꼬리를 흐리더니 손을 뻗어 뜨거운 것이라도 만지듯 그의 손에서 체리를 낚아챘다.

    평소에도 그랬지만 조프리는 그녀의 묘한 행동을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입에 체리를 넣더니 얼굴을 찌푸리면서 그를 노려보았다. 그 표정은 너무 익숙한 것이었다. “너무 시네요.”

    조프리는 웃음을 삼키고 남아 있는 체리를 맛있게 먹었다. “나한텐 딱 좋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맛이오.”

    그녀는 다시 묘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렸을 때 스티븐하고 가장 먼저 체리를 땄소. 스티븐은 어김없이 배탈이 났소. 다른 형제들은 더 익을 때까지 먹지 않았고. 하지만 난......” 조프리는 쓴 미소를 지으며 엘렌을 바라보았다. “난 신 것을 좋아했소.”

    그 순간 엘렌이 얼굴을 붉힌 채 이만 실례한다는 말을 중얼거리며 일어서려 했다. “아, 기다려요. 당신에게 줄 것이 있소.” 조프리는 그녀의 손목을 잡으며 만류했다. 그리고 약해지려는 마음을 누르고 선물을 꺼냈다.

    엘렌은 처음에는 망설이다가 그가 자신의 손에 얇은 책을 얹어 놓자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말없이 책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기분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녀의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빗어 넘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불안하게 그녀의 반응을 기다렸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불안했다. 책은 찬송가였는데 누가 봐도 즐거워할 아름다운 그림이 많아 여자들이 보기에 적합했다. 이윽고 엘렌은 경이롭다는 표정으로 가죽 장정을 쓰다듬었다. 내내 불안한 마음으로 기다리던 조프리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 역시 소중한 책을 보면 경이감을 품었다. 그녀와 자신이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하자 전에 느끼지 못한 진한 동지애가 밀려왔다.

    “열어 봐요.” 조프리가 초조해져서 다그쳤다. 그녀는 뜸을 들이다가 책을 열었다. 그녀가 밝은 색채가 가득한 페이지 위에 손을 얹고 가장자리를 쓰다듬는 것을 본 그는 바보처럼 활짝 웃었다. 그녀는 여전히 아무 말도 없었다. 이윽고 그녀가 고개를 들고 윤나는 머리칼 너머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름답군요.” 너무도 작은 소리여서 간신히 알아들었다.

    조프리는 용기를 얻어 첫 페이지를 폈다. “주는 사람 글을 읽어 봐요.” 자신이 그곳에 쓴 글귀가 더 이상 민망스럽지 않았다. 서둘러 내려오느라고 머리 속에 떠오르는 대로 갈겨썼다. 나중에 후회할지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지만 지금은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싫어요.” 그녀가 속삭였다.

    “읽어 봐요.” 조프리는 주저하는 그녀의 모습에 묘한 감동을 받았다. 이 선물에 얼마만한 의미가 있는지 눈치챈 걸까? 간밤에 있었던 일이 얼마나 나를 뒤흔들었는지 알아챘을까? 설마..... 그는 쓰디쓴 미소를 떠올렸다. 나 자신도 이렇게 혼란스러워하고 있는데 그녀가 무슨 수로 내 깊숙한 감정을 알아챌 수 있겠어?

    “아뇨, 싫어요.” 엘렌이 이번에는 좀더 큰 소리로 말했다. 고개를 숙이자 윤나는 머리가 앞으로 쏟아졌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그녀의 가는 손목을 잡아 멈춰 세웠다. “그럼 나중에 읽겠소?”

    그녀는 물러서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가 손목을 놓지 않자 그녀는 작지만 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에게만 간신히 들릴 만큼. “난 글을 몰라요.”

    조프리는 숨이 막혔다.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고개를 들고 자신을 마주 보는 그녀의 얼굴은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는 너무 놀라 말이 나오지 않는 얼굴로 그녀를 잡은 손가락을 놓았다. 그녀의 손목이 스르르 빠져나갔다. 그는 손을 내리고 멍한 얼굴로 뒤돌아보지도 않고 걸어가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엘렌은 글을 읽을 줄 모른다.

    그는 거칠게 한숨을 쉬었다. 놀랄 일도 아니지.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은 많으니까. 맙소사. 하긴, 나의 형제들도 아버지가 엄하게 다그치지 않았다면 글을 배우지 않았을 거야. 형제들 가운데 공부를 즐거움으로 안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까.

    귀족이나 영주 가운데도 글을 배울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피츠휴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틀림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서얼한테 그렇게 쉽게 속아넘어갔을 리가 없다. 조프리는 신음 소리를 눌렀다. 엘렌이 장원의 여주인 역할을 하지 못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글을 읽을 수도 장부 정리를 할 수도 없었으니....

    그 생각을 하자 명치를 얻어맞은 것처럼 뱃속이 요동쳤다. 내 아내가 셈을 못하고 간단한 글을 못 읽으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는데.....

    주위의 분위기가 어렴풋이 의식에 들어왔다. 식탁에 앉은 사람들이 낮게 수군대는 소리가 들리고 식탁을 떠나는 사람들이 부스럭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그들의 말소리가 불현듯 귀에 크게 울려왔지만 모두 무의미했다. 이 장원과 그것이 상징하는 모든 것들이 숨막혔다. 신선한 공기를 쐬고 생각을 더듬을 조용한 곳이 필요했다.

    그는 사람들이 놀라 속삭이는 말을 무시하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엘렌은 오후 내내 칼날을 갈며 칼날들이 조프리의 갑옷에 단단히 박힌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그리고 전에 자주 그랬던 것처럼 작은 단도를 빙그르르 돌리면서 피에 대한 갈증을 불러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지금은 평소와 달리 조금도 즐겁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그럴 만큼 분노가 치밀지 않았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지금 이 심정은 괴로움이었다. 통증은 더 이상 애매 모호하지도 않고 미약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지금 갈고 있는 칼처럼 생생하고 날카로웠다. 다른 사람들까지 자신의 괴로움을 목격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더욱 괴로웠다. 차라리 단둘이 있을 때 그 수치를 겪었더라면......

    쳇! 바보 같으니! 잘생긴 얼굴에 넘어가서 그 꼴을 당해? 그녀는 속으로 혀를 찼다. 게다가 그를 위해 변하려고 노력까지 해? 엘렌은 제 귀에도 낯선 신음 소리가 새어 나오는 것을 삼켰다. 간밤에 그가 머리를 빗겨 줄 때의 기분 좋은 느낌이 되살아났다. 어젯밤에 그는 나의 머리를 쥐고 너무나 부드러운 손길로 감겨 주고 빗겨 주었는데..... 그 손길에 오랫동안 잊고 있던 꿈속으로 이끌려 가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그녀는 가장 긴칼을 바닥에 내던지고 다른 칼을 집어 이를 가는 심정으로 갈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처음으로 다른 사람의 손에 몸을 맡겼다. 머리뿐만이 아니라 그 동안 묻어 둔 깊숙한 그 무엇까지 그의 손에 내맡겼다. 그런데 그 결과가 어떤가. 그녀는 웃음을 터뜨리려고 했지만 쿡쿡거리는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내가 어리석었지! 남을 믿으면 후회만 생기는 법인데. 약점이 있는 사람은 저절로 약한 입장에 서게 마련이다. 그런데 나만 그 약점을 깨달은 것이 아니라 홀 안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목격하고 말았으니. 백성들에게 약점을 들켰으니 이제 무슨 수로 내 몸을 보호하지.....?

    간밤에 자신에게 다정하게 다가온 그의 이름이 마치 조롱하듯 머리 속에서 울려 퍼졌다. 엘렌은 칼 갈던 손을 잠깐 멈추고 물러나 앉았다. 맙소사. 테이블에 앉은 그가 너무나 멋있어 보여서 손을 뻗어 그가 정말 살아 있는 인간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웨섹스에서 돌아온 뒤 그가 그처럼 느긋해 보이기는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가 체리를 내밀었을 때는..... 체리를 내밀던 그의 모습이 떠오르자 지금도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느긋한 미소를 띠고 체리를 건넸다. 아내에게 맛있는 음식을 건네는 건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늑대가 마리온에게 한 것처럼.

    그녀는 가슴이 벅찼다. 그 동안 두려워서 인정하지 못한 감정들이 가슴속에서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가 책을 건네는 순간 자신이 착각한 것을 알았다. 책을 받고 싶지 않았다. 귀중한 책을 받아 기쁘기는 하지만 곧이어 일어날 사태가 두려워서 차마 받을 수가 없었다.

    결국은 피치 못할 일이 생기고 말았다. 조프리는 경악하는 표정을 숨기질 못했고, 그녀는 각오하고 있었으면서도 움츠러들었다. 다른 사람들에게서 숱하게 보아온 표정이지만 그의 얼굴에서만은 보고 싶지 않았다. 드 부르그 형제들은 처음부터 나를 혐오스럽게 바라보았지만 조프리만은 아니었어. 조금 전까지는. 충격과 경멸의 감정이 뒤섞인 그의 표정이 날카로운 칼날보다도 아프게 그녀를 후벼팠다. 그의 표정을 떠올리자 몸이 떨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돌아서서 나오긴 했지만 가슴속은 칼끝이 심장을 파고든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처음으로 그가 아니라 차라리 다른 드 부르그와 결혼할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차갑고 매서운 사이먼도 좋고 아니면 불구자이면서 표정이 신랄한 그 남자도 좋고. 그들 가운데 하나와 결혼했다면 오히려 쉬웠을 텐데. 그랬더라면 서로를 미워했을 테니까. 지금처럼 오래 전에 잊은 생생한 감정이 되살아나는 것보다는 그 편이 바람직했을 텐데. 그랬다면 여전히 강한 여자로 행세하면서 조프리의 경멸 따위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을 텐데.....

    그녀는 목이 졸리는 듯한 신음 소리를 누르면서 창문을 바라보았다. 창가에 길게 덮이는 어둠으로 보아 곧 저녁 식사시간이다. 내려가서 저녁을 먹어야지. 그녀는 냉소를 흘리며 속으로 자신을 타일렀다. 피츠휴 가의 딸이라면 당연히 내려가야지. 내려가서 감히 나를 비웃는 사람이 있다면 호통을 쳐야지. 하지만 가면을 쓰는 일도 이제 진력이 났다. 이미 본래의 모습을 발각당했는데 가면을 써보았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모두 조프리 탓이야.

    그때 문이 열렸다. 그녀는 그 소리에 흠칫 놀라 칼날을 돌에 갖다댔다. 이미 완벽하게 갈아 놓았으면서도 또 가는 척했다. 고개를 들지 않고도 누가 방안에 들어왔는지 알 수 있었다. 그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방안에 그의 활력이 진동하고 청신한 그의 체취가 코에 흘러 들어왔다.

    칼을 노려보고 있자 머리 속에 팽팽 돌았다. 어떻게 감히 이 방에 들어올 수 있담! 설마 같이 저녁을 먹자는 것은 아니겠지? 그녀는 얼른 일어나 소리질러 내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나약해질 대로 나약해진 상처 입은 가슴을 안고 차마 그를 쳐다볼 수 없었다. 그의 얼굴에서 어떤 표정을 보게 될지 두려웠다. 겁쟁이! 그녀는 자신이 그토록 약해진 데 놀라면서도 계속 칼을 갈았다. 이윽고 그가 앞으로 걸어왔다. 그가 무릎 한쪽을 세우고 앉자 그녀는 더욱 고개를 숙이고 머리로 얼굴을 가렸다.

    그는 늘 그렇듯이 핸섬했다. 숱 많은 검은머리에 어울리는 반듯한 윤곽과 자신의 눈길을 더듬는 커다란 갈색 눈동자는 부드럽고 어딘가 달라 보였다. 후회하는 듯한 눈빛. 그것을 깨닫자 엘렌은 온몸이 조여드는 것 같았다. 역시 또 조롱하려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아내로서 정말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이제 그만 떠나겠다고 말하려는 것일까? 비참한 심정에 허우적거리면서도 그녀는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을까 봐 두려웠다. 다시 혼자가 되다니.....

    “미안하오.” 그가 말했다. 엘렌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어 눈을 깜빡거렸다. “글을 못 읽는 건 수치스러운 일이 아닌데.” 그는 따스한 눈길로 그녀의 눈을 마주하면서 덧붙였다. “놀라긴 했지만 그뿐이오. 내가 책을 얼마나 아끼는지 알잖소.” 그는 씁쓸한 미소를 떠올렸다.

    엘렌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자신에게 미안해한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이 강인하고 힘찬 사내가 무릎을 꿇고 후회하는 심정을 토로하고 있었다.....

    “책을 가져왔소.” 그는 한 손에 든 책을 들어 보였다. “당신에게 준거니까 당신이 어떻게 하든 상관없소. 하지만 내가 쓴 글은 읽어 주길 바라오.” 그는 그 말을 하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내어 읽었다. “<우연히 아내가 된, 하지만 친구로 선택한 엘렌에게>”

    그는 읽고 나서 말없이 고개를 수그리고는 책을 덮었다. 뭔가 이상한 것이 눈두덩을 눌러왔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충동도 밀려왔다. 그를 끌어안고 그에게 안기고 싶다는......

    그녀가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도 모르고 조프리는 책을 내려놓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당신을 모욕할 생각은 아니었소, 맹세하오, 엘렌. 당신이 용서해 준다면 내 기꺼이 당신에게 책 읽는 법을 가르쳐 주겠소. 당신만 원한다면.”

    그의 얼굴에는 자신을 평가하는 듯한 표정은 사라지고 평소처럼 성실한 표정이 들어차 있었다. 엘렌은 몸 속에서 뭔가 산산이 부서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조프리가 내게 글을 가르친다고? 그 무엇보다 벅찬 선물이고 그 어떤 친절한 행위보다도 아름다운 일을 해주겠다니! 어떤 훌륭한 선생이라 해도 조프리처럼 친절하게 가르쳐 주지는 못할 것이다.

    “조프리.....” 그녀는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두 팔을 벌렸다. 그는 그녀를 팔에 끌어안았다. 따스하고 위안이 되는, 마음 든든한 포옹이었다. 그녀는 그의 가슴에 뺨을 갖다댔다.

    “쉬....잇.” 그는 그녀가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는데 말렸다. “모두가 내 잘못이오. 내가 혼자 잘난 척했소.” 엘렌은 그의 말에 바보처럼 싱긋 웃고 말았지만 그 말에 맞장구칠 수가 없었다.

    그녀는 한참이나 얼굴을 대고 있다가 바싹 더 다가들었다. 그의 몸 속에 변화가 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남자라는 증거..... 뺨 아래 그의 가슴이 점점 더 빠르게 오르락내리락하고 귀밑에 닿은 심장이 요란하게 뛰었다. 엘렌은 그의 품에 안긴 채 굳어 버렸다. 등에 놓였던 그의 손바닥이 천천히 쓰다듬듯 밑으로 움직였다. 위로하려던 손길에 갑자기 다른 의미가 담겼다. 그녀는 숨이 막혔다.

    키스하려는 것일까? 그 생각을 하자 후끈한 열기가 치솟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몸이 떨렸다. 난생 처음 어떤 생각을 떠올리고 있는 자신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입술 위에  남자의 입술이, 조프리의 입술이 닿길 원하는. 그가 자신을 바닥에 뉘고 전처럼 그를 어루만져 달라고 애원해 주길 바랐다. 그녀는 평소처럼 보호 본능이 밀려들기 전에 먼저 고개를 쳐들었다, 숨가쁜 기대와 함께. 하지만 조프리는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뒤로 쓸어 줄 뿐이었다.

    “자, 이제 그만. 같이 저녁 먹으러 내려가겠소, 아니면 접시를 내던질 테요?”

    “실은 새로 간 칼로 당신 갑옷을 시험해 볼까 생각했어요.” 엘렌은 그의 팔을 떼내면서 대꾸했다. 그가 순순히 놓아주자 실망감이 밀려들었다. 그가 싱긋 웃는 기척을 알았지만 마주 웃지는 않았다. 위험했던 순간은 사라졌다. 그녀는 그것을 다행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다행스럽지가 않았다.

    저녁 식사를 하면서 그녀는 남편을 훔쳐보았다. 조프리에게 안겼던 순간들이 떠오르면서 숨결이 가빠지고 몸이 떨렸다. 간밤처럼 용기가 다시 솟구치고 그 용기가 이끄는 대로 행동하라고 자신을 다그치고 있었다. 부디 한 걸음 더 내딛으라고. 저녁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그녀는 지금까지의 자신이 허물처럼 벗겨져 내려가는 기분을 맛보았다. 난생 처음 육체와 정신이 한데 어울리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가 가장 맛있는 양고기 조각을 내밀자 그녀는 자신이 할 일을 분명히 알았다.

    조프리에게 뭔가 보답할 때가 온 것이다.

    조프리는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다. 잔인하고 오만한 자신 탓에 엘렌과의 사이에 어렵사리 이루어진 동지애가 깨질 뻔했다는 생각을 하자 잠이 오지 않았다. 그녀가 글을 읽지 못하는 것은 그녀 탓이 아니야. 그녀의 아버지가 악당이고 무심했기 때문이야. 게다가 도둑질이나 일삼는 서얼 같은 배신자를 집사랍시고 두었으니...... 그녀의 인생을 생각하자 몸이 떨렸다.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고 나서야 그는 자신이 성급하게 반응한 것을 후회했다. 그래서 엘렌에게 직접 글을 가르치고 싶었다. 엘렌은 겉보기처럼 강인하지 않았다. 저녁 식사 전 침실에 들어서는 순간 그는 자신의 경솔한 행동이 그녀에게 깊이 상처를 주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모두들 감정이라고는 없는 여자라고 생각한 엘렌이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글을 가르쳐 주겠다고 하자..... 맙소사, 한순간 그는 그녀가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 아닌가 했다. 기쁘고 고마움에 겨운 눈물..... 자신이 비열한 인간이 된 느낌이었다. 그런 제의를 한 것은 갑작스러운 충동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녀에게는 훨씬 더 큰 의미가 있었다. 지식을 얻는다는 의미였으니까. 지식에서 오는 힘과 자유, 지혜를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저녁 내내 희망의 불빛처럼 환하게 타올랐다. 배울 수 있다는 희망. 조프리는 진작에 가르쳐 줄 생각을 못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 동안 그는 그녀와 결혼을 감행한 자신이 자랑스러워서, 자신의 참을성과 책임감이 자랑스러워서 정작 아내한테서는 한 가지도 장점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는 낮게 한숨을 쉬면서 베개에 고개를 묻다가 흠칫 굳어버렸다. 가슴 위에 부드러운 손가락이 얹혔기 때문이다. 엘렌이 잠결에 한 행동 같았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의 몸에 손을 댄 기억은 없었다. 그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고 매끄러운 어깨 살갗을 어루만지면서 자신의 잘못을 다시 한 번 돌아보았다.

    어떻게든 보상을 해야겠어. 이제 그렇게 급한 일이 없으니까 내일부터 당장 글공부를 시작해야지. 친절하게, 그리고 참을성 있게 가르치기만 하면 내가 저지른 비열한 행동을 속죄할 수 있을 거야.

    살갗이라고? 그는 문득 그 사실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설마 꿈이겠지. 엘렌은 언제나 옷을 입고 자니까. 하지만...... 그는 엄지로 천천히 그녀의 팔을 쓸어 보았다. 그러나 만져지는 것은 탄력 있는 살갗뿐이었다. 그는 서둘러 손을 그녀의 목덜미로 가져갔다. 그녀는 속옷 차림이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드레스를 벗은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왜?

    그는 베개에 더 깊이 머리를 묻으면서 마른침을 삼켰다. 잠을 자긴 다 틀린 것 같았다. 그녀가 속옷밖에 안 입고 있다고 생각하자 온몸이 굳어 버렸다. 특히 아랫도리가. 하지만 감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엘렌이 잠에서 깨어 욕설을 터뜨릴까 봐 두려웠다. 아니, 그 이상의 사태가 생길까 봐 두려웠다.

    그는 꼼짝 않고 누워 분명하게 생각을 정리하려 애썼다. 하지만 엘렌의 무릎이 무심하게 허벅지를 스쳐 가자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신음 소리를 누르면서 다리를 빼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뭔가 또 감촉이 왔다. 더욱더 놀라운 감촉..... 자신의 손아래에서 그녀의 손이 떨고 있었다.

    조프리는 눈을 번쩍 떴다. 하지만 흐릿한 윤곽밖에 보이지 않았다. 방안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은은한 달빛 외에는 어둠에 잠겨 있었다. 그는 흐릿한 사물 윤곽에 눈이 적응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천천히 엘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며. 잠꼬대를 하던 그녀가 당장이라도 홱 몸을 돌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돌리지 않았다. 낮은 숨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너무 가까워서 뺨에 숨결이 닿을 것만 같았다. 가슴이 요란하게 뛰었다. 어두워서 그녀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긴장한 기색이 전해졌다. 이윽고 그는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너무 놀라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손대는 날에는 가만두지 않겠다는 협박을 얼마나 자주 들었던가? 그런데 지금은 진지한 얼굴로 마주 보고 있다니..... “엘렌?” 그는 쉰 목소리로 속삭이면서 그녀의 손가락에 자신의 손가락을 얽고 가슴에 올려놓았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경이로운 듯 손마디로 그의 가슴 털을 문질렀다.

    “엘렌.....” 조프리는 목에서 맴돌기만 하는 말을 차마 입 밖에 낼 수가 없어 속삭였다. 그러고 나서 옆으로 돌아누워 조심스레 그녀 위로 몸을 기울였다. 하지만 그녀는 등에 칼을 꽂지도, 발길질을 하지도 않았다. 그저 말없이 동의하는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조프리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너무나 오래 기다렸다.

    몇 번 훔치듯 키스한 적은 있지만 지금의 이 아찔한 키스에 비하면 모두 그 빛을 잃었다. 전과 달리 그녀는 그를 반겼다. 조프리는 그 키스에 온몸이 녹아들었다. 혀로 그녀의 입 속을 탐사하면서 짜릿하고 뜨거운 그녀의 감촉에 빠져들었다.

    이어서 그녀가 마주 키스해 왔다.

    그녀의 혀가 밀려오자 온몸의 감각이 소용돌이쳤다. 그녀의 입술은 처음에는 부드럽다가 점점 대담해지고 끈질기게 다가들었다. 그녀에 대한 갈증과 욕망이 세차게 흔들었지만 그는 거칠게 고삐를 조였다. 욕망을 내보이는 바람에 그녀를 두렵게 만든 순간들이 생생히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는 천천히 그녀 위로 몸을 실었다. 팔로 몸을 지탱하려고 조심하면서 실었다가 아랫도리가 그녀의 부드러운 속옷에 닿자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녀는 그의 무게에 놀란 듯 그의 손가락을 놓았다. 그는 그 손가락으로 그녀의 머리칼을 감았다. 이제야 마침내.

    “엘렌.” 그는 속삭이면서 한 주먹 가득 머리채를 들어 올려 자신의 얼굴에 그녀의 향취를 들이마셨다. “이 머리칼..... 내내 이러고 싶었소.....” 그는 유창하던 말도 잊어버리고 그녀의 머리칼을 어깨 뒤로 넘겼다. 머리칼이 등을 타고 흘러내리자 몸이 떨렸다. 엘렌은 불안한 듯 떨리는 웃음소리를 토했다. 그는 그녀를 안심시키고 싶었다.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온몸이 굳고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한 손 가득 그녀의 머리를 쥐고서 다시 그녀의 입술을 향해 몸을 굽혔다.

    그러자 그녀의 불안함이 스러지는 듯했다. 조프리는 그녀가 항복해 오는 기쁨을 만끽했다. 엘렌은 이제야 키스의 즐거움을 알아낸 사람처럼 키스했다. 아니, 정말로 그런지도 모르지. 갑자기 불안이 밀려들었지만 조프리는 단호하게 눌렀다. 과거가 어떻든지 그녀는 나의 아내야. 그리고 나는 너무나 오랫동안 그녀를 안고 싶었어. 그는 탐색하는 듯한 그녀의 혀에 굴복하여 그녀의 혀를 빨아들였다.

    그는 뜨겁고 축축하게 맞닿는 혀의 감촉을 만끽했다. 여자와 한 번도 키스해 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그는 숨쉬기 위해 잠깐 입술을 떼면서 그녀의 뺨과 귀에 차례로 키스했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들어 올려 목덜미에 키스했다. 그러자 그녀가 팔 안에서 몸부림을 쳤다. 그도 따라서 몸을 꿈틀댔다. 숨이 막혔다. 너무나 격렬한 욕구에 온몸이 뻣뻣해졌다.

    바로 지금이야! 그는 속으로 소리쳤다. 지금 그녀를 차지하지 못하면 죽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직은. 그는 거칠게 한숨을 쉬면서 떨리는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칼을 손가락에 감았다. 그리고 홀린 사람처럼 달콤한 향내를 들이마셨다. “너무나 아름답소.” 그가 속삭였다. “이 머리칼이 내 몸을 덮어 주는 꿈을 꾸어 왔소.” 그는 묻는 듯 그녀를 내려다보았지만 그녀의 얼굴은 거부하고 있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속옷 가장자리를 천천히 허벅지, 그리고 허리까지 올렸다. 그런데도 그녀는 아무런 항의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일으켜 앉히고 머리 위로 가만히 속옷을 벗기고 나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달빛이 그녀의 가슴 위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녀의 가슴은 작지도 크지도 않고 완벽한 모양이었다. 내 것이야. 조프리는 속으로 중얼거리다가 그런 원초적인 생각을 하는 자신에게 흠칫 놀랐다. 나는 지성인인데.... 그런데 지금은 아내에 대한 격정으로 타들어가고 있었다. 엘렌.... 그는 그녀의 이름을 속삭이면서 매끄러운 머리칼을 한 움큼 쥐고 그것을 그녀의 목 위로, 어깨로, 가슴 위로 펼쳐 내려갔다. 마침내 그녀가 몸을 떨면서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가슴에 입술을 댔다. 그녀는 흠칫 놀라면서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걱정 말아요.....” 조프리는 격렬하게 뛰는 피를 가라앉히려 애쓰면서 속삭였다. 그녀가 지금 이 자리를 떠난다면 당장 죽을 것 같았다. 그녀의 맨 가슴이 자신의 가슴에 닿아 있고 그녀의 매끄러운 허벅지가 아랫도리에 닿아 있는 지금은. 그는 그녀의 가슴을 입에 무는 대신 두 뺨으로 가만히 부드럽게 문질렀다. 그녀의 살갗 구석구석 깨물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주저하는 것을 느끼고 대신 입술에 키스했다.

    그녀가 두 팔로 자신의 목을 감자 조프리는 신음 소리를 내면서 온몸으로 그녀를 눌렀다. 그녀의 가슴이 느껴졌다. 이제야 비로소 두 사람이 알몸을 맞대고 누운 것이다. 그는 온몸을 태우는 갈증을 더 이상 뿌리칠 수가 없었다.

    “날 어루만져 줘요, 엘렌.” 그는 거친 목소리로 다그쳤다. 그녀의 손길을 느껴 보고 싶었다. 이번에는 그녀의 자발적인 손길로. 그는 숨을 멈추고 기다리다가 그녀의 손가락이 자신의 몸을 쓸어 내려가자 거칠게 신음 소리를 토했다. “엘렌!” 그는 숨이 막혔다. “그래. 계속 그렇게.... 오, 맙소사, 난.....” 그녀의 손길이 거칠어지자 저도 모르게 간헐적인 속삭임이 터져나왔다. “내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중얼거리고 있지?” 그는 제대로 한 문장을 만들지도 못하고 신음 소리처럼 중얼거렸다. 그래, 정말 말도 안 돼.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여자는 내가 혐오하는 모든 것을 갖추고 있어. 그런데도 나는 평생 그 무엇을 바란 것보다 더 간절히 그녀를 바라고 있어. 그는 지금 그녀를 차지하지 못한다면 죽을 것만 같았다. 바로 지금. “엘렌. 이젠 더 이상.....난.....” 그는 그녀의 손을 치워 버리고 그녀와 손가락을 얽었다. 그리고 잠깐 숨을 고른 뒤에 묻는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대답을 읽기가 두려웠다. 만일 그녀가 거부하면 그만둘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거부하지 않았다. 깜빡거리는 그녀의 눈동자가 아련히 꿈꾸는 듯 해서 그는 몸을 떨었다.

    지금이야. 조프리는 신음 소리를 토했다. 육체가 머리 속을 완전히 장악했다. “엘렌.....” 그는 거칠게 속삭이며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하지만 어두워서 그녀의 표정을 구분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거세게 몰아치는 욕망에 떼밀려 그녀에게 침입해 들어갔다. 그녀의 한 손을 마저 잡고 손가락을 얽었다. 두 사람의 손바닥도 두 사람의 육체와 마찬가지로 빈틈없이 밀착되었다. 그는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다. 더 깊숙이 더 깊숙이.....

    엘렌의 손가락이 발작하듯이 그의 손가락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굳어 있던 몸이 풀리고 마치 당연한 주인을 맞듯 자신을 맞아들이자 신음 소리가 나왔다. 게다가 그녀는 고통스러워하지도 않았다. 너무나 강렬한 감정이 솟구치는 바람에 그는 뼛속까지 떨었다. 그는 저절로 흠칫했다.

    그녀를 내려다보면서 뒤엉킨 감정을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미칠 듯한 욕구에 더욱 고삐를 당겼다. 말로 할 수 없다면 그 깊은 감정을 행동으로나마 보여 줘야 했다.

    그는 온몸에 제동을 걸고 기다렸다. 이윽고 그녀가 완전히 긴장을 풀고 나직이 한숨을 내쉬자 그는 싱긋 웃었다. “원하는 걸 말해요.” 그가 재촉했다. “어떻게 하면 좋은지.”

    “못해요.” 그녀는 속삭이면서 고개를 돌렸다.

    “아니, 할 수 있소. 이렇게?” 조프리는 거칠게 중얼거리면서 자신의 입술을 그녀의 목덜미에 댔다. 그의 입술 아래서 그녀가 몸부림을 쳤다. “이렇게?” 그는 그녀의 가슴에 가볍게 키스했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서 손가락을 풀어 그녀의 머리칼에 묻다가 신음 소리를 내며 두 손에 가득 움켜쥐었다.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다. 말을 할 여유가 없었다. 그는 세차게 그녀를 밀어붙이면서 그녀 속으로 치달려 들어갔다. 그러자 그녀가 낮게 쾌감 어린 신음 소리를 냈다. 그 바람에 그는 놀라 몸이 굳었다.

    “아.....” 그 작은 소리에 그는 심장이 뛰었다.

    “이렇게?” 그는 속삭이면서 천천히 리듬을 탔다. 서둘지 않으려고 애쓰느라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그래요..... 모두 다.....” 그녀가 신음했다. 조프리는 안도의 신음 소리를 내면서 자신을 불태우는 욕망에 온몸을 내던졌다. 머리 속이 새하얗게 비어 그녀 속으로 돌진했다. 엘렌도 그의 리듬에 맞추면서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난폭하고 걸핏하면 고래고래 소리치는 버릇으로 악명이 자자한 자신의 아내가 지금은 억누르듯이 낮은 신음 소리만 흘려 보내고 있었다. 마침내 그녀의 손톱이 그의 손바닥을 세차게 파고들었다. 그도 함께 절정을 맞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마침내 엘렌이 나의 것이 되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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