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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와결혼하는법-13화 (13/18)
  • 13장

    하루의 끝을 알리며 스러져 가는 햇살 속에 엘렌은 전에 거처하던 방으로 가만히 들어갔다. 음식을 쿡쿡 찔러 보기만 하다가 일찍 식탁에서 일어섰다. 간밤부터 계속 심기가 불편했다. 그래서 침대 발치에 놓인 오래된 옷궤 앞으로 걸어갔다. 옷궤 앞에 무릎을 꿇고 오래 전에 작아져서 못 입게 된 낡은 옷들을 젖히고 깊은 곳을 더듬었다. 손가락에 매끄럽고 평평한 것이 닿았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꺼내서 손에 쥐어 보았다. 작은 은거울. 어머니가 가장 아끼던 물건 가운데 하나였다. 아버지의 탐욕스러운 손에 닿으면 망가질까 봐 숨겨 두었다. 그런데 지금 충동에 이끌려 꺼내 보았다. 몇 년만에 처음으로 자신의 얼굴을 비추어 보려고.

    창문으로 들어오는 황혼의 햇살 속에서 거울을 들어올린 그녀는 이마를 찡그렸다. 혐오감 가득한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마구 헝클어진 머리칼 너머로 난폭한 노란색 눈동자가 자신을 마주보고 있었다. 그녀는 흠칫했다. 머리도 칙칙하니 윤기가 없고 말할 수 없이 거칠었다. 일부러 그러고 다녔으니까 당연한 일이지. 하지만..... 그녀는 거울이 보기 싫어져서 왈칵 내려놓았다.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습이 싫고 남편이 미웠다.

    이게 모두 조프리 탓이야.

    자신이 요즘 안고 있는 모든 문제의 근원은 남편이었다. 특히 이 거북한 통증과 기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 근원이었다. 그것들은 벌써 오래 전에 모든 것에 무감각해졌다고 생각한 몸과 영혼을 괴롭혔다.

    그는 그녀에게 자신을 돌아보게 했다. 그리고 더 나쁜 것은 지금과 다른 자신의 모습을 보고 싶다는 바람을 갖게 했다. 그리고 그녀는 여러 가지를 바랐다. 그것이 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서 그가 미웠다.

    그녀는 코웃음치며 웨섹스를 떠나지 말 것을 하고 아쉬워했다. 장원으로 돌아오는 날부터 시작된 일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성자라는 별명을 붙인 남자는 사라지고 한 남자로 다가왔다. 엘렌은 얼굴을 붉혔다. 홀에 가득한 사람 앞에서 자신을 위해 열변을 토하던 조프리를 생각하자 온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가 금세 식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무릎을 감쌌다. 조프리의 영상이 밀려드는 것을 온몸으로 막아 보려는 듯했다. 까무잡잡하고 핸섬한 얼굴로 무거운 칼을 휘두르며 열변을 토하던 모습이, 그 모습이 그녀를 괴롭혔다.

    조프리는 학자다운 지혜를 갖추었을 뿐 아니라 그녀가 아는 누구보다 기지가 뛰어났다. 서얼의 배신 행위를 꼬집어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쳇! 서얼의 배신 행위는 별로 놀랄 일도 아니야. 서얼이 고분고분하게 구는 것은 겉으로만 그러는 것임을 꿰뚫어본 지 벌써 오래니까. 워낙 비겁해서 살인은 못하겠지만 그것말고는 무슨 짓이든 저지를 인간으로 보였다. 탐욕스러운 아버지가 자신의 집사가 도둑질하는 걸 모르고 있었다니..... 우스웠다. 아버지가 자신에게 장원의 여주인 역할을 하도록 해주었더라면 그의 도둑질을 미연에 방지하거나 자신이 집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결코 그녀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마를 찡그렸다. 서얼이 자신에게 누명을 씌우려 든 것은 도둑질하고는 다른 문제였다. 그 자리에 조프리가 없었다면..... 그녀는 자동으로 단도에 손을 뻗어 움켜잡았다. 하지만 아무런 위안도 느끼지 못했다. 칼은 여전히 지니고 다녔지만 전과 달리 만져도 힘이 솟아나지 않았다. 자신은 힘보다 더 소중한 무엇을 잃어버렸을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 생각을 지우려 애썼다. 하지만 자신이 살아서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것은 자신이 늘 경멸하던 것들 덕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성실과 믿음, 존경..... 남편과 마리온 같은 바보들이나 믿는 그런 것들은 이 세상에 있을 리 없는 불가능한 감정들이었다. 그녀는 갑자기 심기가 불편해져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른 남자 같으면 그렇게 열렬히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쳇! 다른 남자 같으면 서얼의 거짓말을 믿고 당장에 나를 잡아넣었을지도 모르지. 이제야 처치하게 되었다고 좋아하면서.

    그러나 조프리는 아니었다.

    엘렌은 남편이 자신을 옹호해 주던 장면을 떠올리고 목안이 묵직해지는 것을 눌렀다. 그가 그런 짓을 하지 않으리란 것쯤은 알지만 그래도 몸에 밴 선입관 때문에 그녀는 서얼의 말을 믿은 남편이 자신에게 칼을 휘두르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먼저 공격하기 위해서 칼을 뽑기는커녕 죽음을 앞둔 사람이 망나니의 칼을 기다리듯 그저 기다리고 서 있었다. 게다가 이상하게도 조프리가 자신을 비난하고 나선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리 없다고 자동으로 부인하는 말이 튀어나왔지만 갈수록 자꾸 황당한 생각이 떠오르는 것을 그녀 스스로도 어쩔 수 없었다. 황당한 생각에 떼밀려 행동하는 일도 많았다. 집에 돌아온 날 그를 위해 사람들에게 으르렁거린 기억이 떠오르자 얼굴이 달아올랐다. 자신이 그런 말을 해서 조프리에게 도움이 되었는지 방해가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그 순간만은 입을 다물고 있기가 어려웠다. 사람들이 그를 차갑게 맞는 것을 보자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결코 충동적인 성격이 아닌데도 저도 모르게 그의 편을 들면서 으르렁거렸다. 그녀는 이제까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손가락 하나 까딱한 적이 없었다. 오직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싸워 왔다. 오직 자신을 위해.

    하지만 한때는 나도 누군가를 아껴 준 적이 있어. 그 기억이 떠오르자 신음 소리가 나왔다. 그녀는 단도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아니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괴로웠던 그 시절을 지금과 비교하다니, 말도 안 돼. 그녀는 어머니와 여동생을 구하려고 애썼다. 아무런 도움이 되어 주지 못했지만.

    남편을 위해서 목청을 높이다니, 왜 그랬을까? 그녀는 머리를 흔들었다. 머리를 빗겨 주겠다던 그의 말이 생각났다. 두려우면서도 흥미로웠다. 지금까지 어머니말고는 아무도 시중을 들어 준 적이 없었다. 몸 하나 돌보는 것쯤 오래 전에 배웠다. 왜 지금 와서 남의 손이 닿게 한단 말인가? 그런데 조프리는 왜 내 머리를 빗기고 싶어할까?

    그녀는 이마를 찡그렸다. 간밤에 그 말을 듣고는 그의 목에 칼을 들이대는 대신 겁먹은 아이처럼 달아나 버렸다. 조프리에게 좀더 친절히 굴자고, 칼에는 절대 손대지 말자고 맹세한 탓도 있지만 자신이 달아난 데는 그보다 큰 이유가 있었다. 그 생각을 하면 지금까지 마음이 무거웠다. 어떤 무기나 폭력보다도 더 두려웠다. 진실을 마주하기가 겁났다. 빨아들일 듯한 그의 눈동자에 맞서야 했는데...... 호소하는 듯한 그 눈동자를 피하지 않고 맞서야 했는데......

    나는 결코 비겁한 여자가 아니야. 겁쟁이처럼 구석에 숨었다가 당하기보다는 무기를 들고 맞서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을 오래 전에 터득했잖아.

    그녀는 다시는 침대에서 자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방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널찍한 어깨에 촛불이 일렁거리는 남자 옆으로 걸어갔다. 가장 좋은 담비털보다 더 윤나는 그의 머리칼이 목덜미에 흘러 내려와 있었다. 그녀는 온몸에 기운이 빠졌다. 하지만 움츠러들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슬리퍼를 벗고 촛불을 끈 다음에 침대로 들어가 누웠다. 그런데 그가 몸을 꿈틀거리더니 돌아누웠다.

    “엘렌?” 그가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온몸을 떨었다. 이윽고 그의 팔이 그녀를 감싸안고 끌어당겼다. 그녀는 드레스를 입었는데도 그의 가슴에서 전해지는 열기로 등이 타는 듯했다. 그의 단단한 허벅지가 닿은 다리도 마치 불이 붙은 것 같았다. 현기증이 나고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는데 그의 커다란 손이 배에 힘없이 늘어졌다. 헝클어진 머리칼에 닿은 그의 숨결이 낮고 평온했다. 남자의 손이 자신의 배에 얹혀져 있는 상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지만 이미 잠든 남자인데 어떠랴 싶었다.

    그녀는 그의 몸에서 전해져 오는 쾌감과 짜릿한 포옹의 맛을 모른 척하면서 눈을 감았다. 위험하다는 생각도 접어 두고 따스한 담요처럼 자신을 감싸는 조프리의 팔에 몸을 맡겼다. 안전하고 따스했다. 그리고 상상 이상으로 편안했다.

    그녀는 눈을 깜빡거리며 몸을 일으켜 묵직한 기운을 떨어냈다. 조프리는 위험한 남자야. 그 위험이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야. 불안이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니고. 하지만 아무리 그가 위험한 인물이라고 자신에게 타일러도 머리를 빗겨 주겠다던 그의 유혹스런 말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리고 온종일 자신이 비겁하게 그를 피했다고 생각하니 은근히 약이 올랐다. 그의 도전에 맞서 보자는 충동이 생겼다. 그를 피해 달아난 것이 벌써 몇 번째인가.

    눈길이 저절로 거울로 갔다. 거울 속에 비친 헝클어진 모습이 자신을 마주 보았다. 그녀는 머뭇거리면서 헝클어진 머리칼을 만져 보았다. 빗지 않고 안 감아서 역겨운 촉감이었다. 그녀는 욕설을 뱉고 머리칼을 놓았다. 머리뿐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를 바꿀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감정에 굴복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아 두려웠다. 그런 것들에 굴복하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지? 누가 나를 보호해 주지?

    해답이 불쑥 튀어나왔다. 해답 속의 그 이름은 나는 힘있고 안전하니 믿으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엘렌은 눈을 깜빡거렸다. 다시는 비겁하게 웅크리지 않으리라. 유혹과 마주하리라.

    조프리는 옆으로 돌아누워 마리온이 준 책을 내려다보았다. 평소 같으면 정이 넘치는 눈길로 한 쪽 한 쪽 삼키듯 읽어 내려갔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한 문장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일찍 방에 오지 말고 아래층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엘렌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걱정이 되었다. 저녁을 먹는 동안 엘렌은 내내 긴장하고 굳은 모습으로 자신을 피하면서 코웃음만 날렸다.

    간밤에 자신이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죄책감에 이마가 찡그려졌다.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를 빗겨 주고 싶은 어리석은 충동에 떼밀려 살얼음 같던 휴전 협정을 깨뜨리고 말았다. 그는 머리칼을 긁어 올리면서 자신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그때 문소리가 나서 올려다보자 그녀가 서 있었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는 그녀를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헝클어진 머리와 난폭한 표정까지도. 그녀에게는 그의 몸 속을 휘젓는 뭔가가 있었다. 그 어떤 단정하고 고상한 숙녀도 하지 못한 뭔가가. 사람 마음이란 참으로 아리송하군.

    그는 불안하게 몸을 뒤척이다가 그녀가 신은 새 슬리퍼를 보고 흠칫 놀랐다. 그녀가 자신이 준 슬리퍼를 별 불만 없이 신고 있는 것을 보자 마음이 따스해졌다. 그는 드레스 밑에 숨겨진 그녀의 다리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하는 자신을 누르면서 눈을 들었다가 자신을 향해 내민 그녀의 손을 보았다.

    이건 또 뭐지? 조프리는 멍하니 생각했다. 칼일까, 아니면 독풀인가? 그것도 아니면 내 목덜미라도 움켜잡으려고? 그는 한숨을 쉬며 일어나 앉아 그녀의 벌린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깜짝 놀랐다.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그녀가 쥐고 있는 것은 무기가 아니라 빗이었다. 머리빗.

    그는 넋이 나간 채 한참동안 그대로 앉아 있었다. 유창하던 말도 지금은 한 마디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가 말없이 눈썹을 치키자 그녀는 그의 손에 빗을 건넸다.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헝클어진 머리칼 뒤에 숨겨진 그녀의 얼굴엔 그의 호기심 어린 눈길을 충족시킬 만한 아무런 표정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말없이 앞에 버티고 서서 빗만 내밀고 있었다. 마음대로 해보라는 것이겠지.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갑작스럽게 움직이지 않으려고 주의하며. 숲 속에서 뛰어나와 손바닥에 있는 먹이를 먹으려는 암사슴을 보는 기분이었다. 기대감으로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지만 애써 눌렀다. 그녀는 야생 동물이나 다름없어. 놀라서 달아나게 하고 싶지 않아. 내 손으로 그녀를 길들이고 싶어.

    그 생각을 하자 갈비뼈가 아플 정도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는 억지로 숨을 고르면서 빗을 받아들었다. 엘렌은 지금 나에게 헝클어진 머리를 빗겨 달라고 하고 있어. 그것뿐이야. 그는 속으로 그렇게 타일렀다. 하지만 그녀의 머리칼을 만진다는 생각만으로도 온몸이 후끈 달아오르고 숨이 가빠졌다.

    그는 성급한 마음을 감추려고 바닥에 깔린 짐승털 깔개를 가리켰다. 엘렌은 잠깐 망설이다가 어색하게 그 위에 앉았다. 그는 그녀 등뒤에 낮은 방석 의자를 가져다 놓다가 멈칫했다. 자신을 향해서 머리를 젖힌 그녀의 자세가 말할 수 없이 놀라웠다. 그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 광경이 묘하게 마음을 흔들었다. 그녀가 나에게 등을 돌리다니, 나에 대한 믿음이 그만큼 강해졌다는 뜻일까. 그는 그녀의 믿음에 배반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하지만 의자에 앉자마자 금세 맹세를 잊어버렸다. 숱 많고 생생히 살아있는 머리를 보자 갖가지 생각들이 머리 속에서 소용돌이쳤다. 머리를 빗기는 것과는 조금도 상관없는 상상이었다. 그 머리에 얼굴을 묻고 두 손에 머리칼을 휘어감아 그녀의 어깨 위로 들어올리고 싶었다. 그리고 그녀의 뒷목덜미에 숨겨진 살갗에 키스하고 싶었다.

    그는 심호흡을 하면서 자제력을 회복했다. 머리칼에만 정신을 집중시키면서 엘렌의 몸에는 손대지 않고 빗질을 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하도 많이 엉켜서 빗이 내려가지 않았다. 그는 엉킨 머리칼을 한 움큼 쥐고서 조심스레 풀어 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잘 되지 않았다.

    “엉킨 머리를 자르는 게 좋을 것 같소.” 그가 말하자 그녀는 머리를 홱 잡아당겼다.

    “안 돼요! 난 머리 자르지 않을 거예요!”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소리쳤다. 그는 그녀의 어깨를 가만히 누르면서 다시 뒤로 기대게 했다. 마침내 머리를 빗길 기회가 생겼는데 끝까지 해보지도 못하고 놔줄 수는 없었다.

    “좋소. 그렇다면 적셔서 하는 것이 좋겠소.” 그는 그녀의 머리를 놔주기 싫었지만 마지못해 손을 떨구고 문으로 걸어가서 하인을 소리쳐 불렀다. 그리고 뜨거운 물과 대야를 가져오게 했다. 엘렌이 아무 말 않자 조금 놀랐지만 혹시 마음이 바뀔까 봐 서둘렀다.

    그는 다시 자리에 앉아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를 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손가락으로 풀고 이어서 빗으로 빗겨 내렸다. 마침내 빗질을 끝낸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 순간 그는 긴 머리채가 자신의 무릎 위에 웅덩이처럼 고이는 것을 보았다. 숨이 막히고 하반신이 꼿꼿해졌다. 자신의 허벅지에 늘어진 생강빛 머리채는 늘 비밀스럽게 꿈꾸던 장면이었다.

    이대로 앉아 있고 싶었다. 이성으로 누를 수 없는 유혹이 그를 덮쳤다. 하지만 그 순간 문이 열렸다. 하인이 나타나자 그는 불편하게 몸을 뒤척거리고 나서 대야를 자신의 옆에 놓게 했다. 하인이 나가자 그는 의자 위에 그것을 올려놓고 그녀의 묵직한 머리채를 담갔다. 숱 많고 축축한 머리를 감기는 그의 손은 매우 떨렸다. 심장도 요란하게 뛰었다. 혹시 엘렌이 자신의 뛰는 심장 소리를 듣고 코웃음치지나 않을까 걱정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웬일인지 조용했다. 그리고 고분고분했다.

    “머리를 뒤로 젖혀요.” 조프리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퉁명스럽게 명령하는데도 엘렌은 전처럼 으르렁거리지 않았다. 오히려 졸린 듯한, 꿈꾸는 듯한 얼굴로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젖혔다. 눈을 감고 고개를 뒤로 젖힌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보자 몸 속이 요동을 쳤다. 이렇게 격하게 요동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그는 불안하게 몸을 꿈틀대면서 마리온이 준 향내 나는 비누로 헝클어진 머리를 문질렀다. 그녀의 머리칼은 매끈하고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하반신이 점점 더 꼿꼿해졌다. 손마디 위로 흘러내리는 머리칼의 무게는 믿지 못할 만큼 짜릿했다. 비누에서 솟는 달콤한 꽃향기가 엘렌의 짜릿한 체취와 엉키자 현기증이 났다.

    그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젖은 머리칼을 감아 올리면서 어떤 여자하고도 이토록 친밀한 기분을 가져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엘렌의 머리를 감겨 주는 단순한 일이 뜻밖에도 말할 수 없이 짜릿한 흥분을 불러일으켰다. 이제껏 경험한 적 없는 흥분을.

    그녀의 말처럼 내가 제정신이 아닌지도 몰라. 그는 그녀의 젖은 머리채를 대야에서 들어 올려 긴 리넨 수건으로 감쌌다. 엘렌이 왜 머리를 못 만지게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머리를 말리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 분명했다. 밤에 하지 말고 아침에 해야 했는데..... 그렇게 생각하는데 엉뚱한 상상이 떠오르면서 심장이 마구 고동쳤다. 침대로 걸어가는 엘렌의 모습, 자신의 알몸에 닿는 매끄럽고 축축한 머릿결..... 그 머릿결이 나의 손과 입술에 닿으면서......

    조프리는 낮게 욕설을 중얼거리면서 긴 머리칼을 잡은 손에 힘을 주고 다른 수건을 집어 축축한 머리칼을 감싸서 물방울이 떨어지지 않게 했다.

    그는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녀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이 무척 편안해 보였다. 그는 머리칼에 가려지지 않은 그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녀는 너무 아름다웠다. 다른 사람이 뭐라 하든 상관없었다. 그녀는 표현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그녀를 안아 침대로 데려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는 명예심에 발이 묶여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리고 티없는 살갗 위로 천진하게 드리워진 그녀의 눈썹을 보자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날 믿고 있어. 죄책감이 몸 속을 후벼팠다. 그는 자신의 원초적 욕망에 가차없이 고삐를 걸었다. 머리로 육체를 다스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짐승이나 다름없어. 만약 내가 육체의 욕망에 지고 만다면 그 동안 받은 우수한 교육도 허사로 돌아가는 거야. 그는 이를 갈면서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아랫도리에서 괴로운 비명을 질렀지만 억지로 눌러 버렸다.

    그러고는 빗을 들고 헝클어진 머리를 풀어 내리는 일에 몰두했다. 어느새 밤이 깊어가고, 마침내 정수리에서 가장 긴 아래쪽 머리까지 한 번에 빗어 내릴 수 있게 되었다. 매끄럽고 유연한 빗의 움직임에 다시 야릇한 공상이 떠올랐지만 억지로 머리칼에만 눈길을 붙잡아 맸다. 묵직하고 화려한 색채의 머리채가 마르면서 윤이 났다. 이토록 윤나는 머리는 난생 처음이었다.

    그는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빗 따위는 방구석에 던져버리고 두 손을 그녀의 머리 속에 파묻고 싶었다. 하지만 팔을 떨구고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자신이 해낸 일을 커다란 경이감을 안고 바라보았다. 엘렌의 머리가 곧고 매끄럽게 등뒤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너무나 아름다웠다. 나의 형제들이 본다 해도 아름답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으리라.

    촛불이 긴 머리칼 위로 반짝이자 계피빛과 생강빛이 한데 어우러지면서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자아냈다. 그는 어떤 여자가 보아도 시샘할 만한 머리라고 생각하면서 가만히 엘렌의 등을 찔렀다. 그녀는 일어서면서 눈을 깜빡거렸다. 꿈에서 깬 듯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곧 평소처럼 경계하는 얼굴로 눈을 가늘게 떴다.

    조프리는 한숨을 쉬면서 그녀의 눈을 피했다. 그녀의 표정을 보고 싶지 않았다. 내가 해낸 일에 자부심을 갖는 것으로 만족해야지. 그 이상을 원하는 것은 재앙을 자초하는 일이야. 그는 그렇게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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