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와결혼하는법-12화 (12/18)
  • 12장

    웨섹스를 떠나는 엘렌의 마음은 도착했을 때와는 사뭇 달랐다. 이렇게 다르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기쁘고 흥분되기는커녕 가슴이 쑤시는 듯한 익숙한 통증이 느껴졌다. 내가 왜 이러지? 몹쓸 병에라도 걸렸나, 아니면 에드레드 신부가 말한 것처럼 귀신이 들린 걸까?

    이 느낌의 정체가 뭐든 성을 떠나는 것이 실망스러워서 이러는 건 아니야. 엘렌은 속으로 다짐했다. 성에 도착한 순간부터 떠나고 싶어 안달했잖아? 일부러 쫓겨나려고 환영받지 못할 짓만 골라서 하기까지 했잖아. 마리온 같은 바보 아니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마리온 생각을 하자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그녀의 발치에 침을 뱉던 짓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불현듯 자신의 행동에 전과 같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문제만 해도 그랬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토록 집에 돌아가고 싶었는데 지금은 전처럼 집이 애타게 그립지 않았다. 오히려 낡고 추운 늑대의 성이 더욱 따스하게 다가왔다. 마리온의 보조개 팬 미소와 던스탄의 기운 찬 모습이 햇살처럼 성을 데워 주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유치한 생각이라고 코웃음쳤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장원과 다른 대접을 받았다. 늑대는 예외였지만 모두들 자신을 두려워하거나 혐오스러워하지 않았다. 상스러운 욕설 때문에 경계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친근한 태도로 접근했고 미소지으면서 시중을 들어주었다. 내가 조프리의 아내이기 때문이다. 피츠휴이기 때문이 아니라.

    조프리의 아내로 대접받는 일에 익숙지 못했지만 이제 그런 대접은 받기 싫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도 없었다. 자신의 위치가 무엇인지 몰라 머리 속이 혼란스러웠다. 그 혼란을 더해주려는 듯이 마리온과 아기의 모습이 떠올랐다. 마리온은 자신을 포옹하고 키스하면서 떠나는 것을 슬퍼했고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그녀가 멍청한 여자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친절하다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었다.

    그와 반대로 자신의 장원 사람들을 생각해 보니 그다지 탐탁지 않았다. 반질반질 눈을 빛내는 서얼과 뿌루퉁한 얼굴을 한 하인들, 걸핏하면 탄식을 일삼는 에드레드 신부, 남아 있는 기사들 모두가 그랬다. 장원의 투박하고 차가운 담벽도 밝은 색채와 위안이 깃들인 마리온의 성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마리온의 성보다 작고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는데도 오히려 더 생기가 없어 보였다. 죽음이 쓸고 간 곳 같았다. 사실이 그렇지 않느냐는 생각도 들었다. 그녀는 목에 치밀어오르는 것을 삼키고 멀리 사라져 가는 웨섹스 성에서 눈을 돌려 눈앞의 널찍한 어깨에 눈길을 주었다.

    그래도 조프리가 남아 있잖아.

    그녀는 불쑥 떠오른 생각에 놀라고 말았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생각에 평온함이 밀려온다는 사실이었다. 착각이야. 그녀는 조소를 떠올리면서 스스로를 꾸짖었다. 하지만 평온한 감정은 그대로 남아있어 두꺼운 외투처럼 자신을 감싸주면서 불안한 심정을 몰아냈다. 그녀는 이마를 찡그리면서 심호흡을 했다. 이제야 여행길의 피로가 몰려드는 모양이군. 조프리가 나를 이끌고 먼길을 온 이유가 뭘까? 만일 나의 집이었다면 조프리가 침대 옆자리로 밀고 들어오게 놔두지 않았을 텐데.....

    집에 돌아가면 앞으로는 어떻게 잠자리를 정할까? 조프리는 전처럼 바닥에 자리를 깔고 누울까, 아니면 웨섹스에서처럼 한 침대에 누워 자려고 들까? 만일 침대에서 같이 자겠다고 하면 내가 바닥에 자리를 깔아야 할까? 이것저것 가능성을 생각해 보자 온몸이 달아올랐다 식었다 하며 변덕을 부렸다. 조프리와 침대에 같이 눕는 것은 반갑지 않았다. 그렇다고 자신이 딱딱한 타일 바닥에 눕고 싶지도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그 동안 익숙해져 버렸다. 그의 커다란 체구에서 배어 나오는 따스한 온기에 익숙해졌다. 커다란 알몸에서 배어 나오는 온기라고 해야 마땅하겠지.

    봄바람이 부드러운데도 그녀는 몸을 떨었다. 봄이 지나고 초여름으로 들어서고 있는 참이어서 들판이 신록으로 피어나고 있었다. 아름다웠다. 하지만 주위의 풍경도 눈앞에 보이는 그의 등만큼 시선을 끌지는 못했다. 그녀는 자석에 끌리듯 조프리의 모습을 연거푸 바라보았다. 그의 가무잡잡한 모습이 요즘은 더욱더 그녀를 유혹하고 있었다.

    그가 한 이불을 덮자고 하면 안 된다고 할 수 있을까? 못할 것 같았다. 그와 가까이 누워 있는 데서 오는 작고도 순수한 즐거움을 뿌리치지 못할 것 같았다. 그와 함께 누워 있으면 묘한 안도감이 밀려와서 밤마다 푹 잘 수 있었다.

    남자와 있는데 안도감이라니? 픽 웃으려고 했지만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다른 남자들이 잔인함과 힘을 뽐내려는 반면 조프리는 따스함과 안전함을 보여 주었다. 처음부터 그는 과분할 정도로 예의 있게 대해 주었고 부드러운 태도로 일관했다. 그밖에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뭔가 보답을 해줘야 하는지도 모른다.

    문득 회의가 들어 그녀는 거칠게 숨을 들이마셨다. 보답을 해주기 시작하면 나는 분명 약해질 것이다. 그녀는 험상궂게 얼굴을 찌푸리면서 그의 넓은 등을 바라보았다. 피츠휴로서의 자존심을 지키면서 적당한 보답을 해줄 길은 없을까?

    자신이 없었다. 그에게 보답을 하려면 천성적인 수줍음을 극복하고 지금까지와 다르게 행동해야 하는데 그럴 자신이 없었다. 세상에 대한 분노와 증오를 품고 살아 온 세월이 너무 길어서 선하고 친절한 행동이 어떤 것인지 아예 잊어버렸다. 목안이 다시 뻐근해졌다. 그녀는 얼른 그것을 눌러 버리고 남편의 매력적인 모습에서 눈을 돌려 저 멀리 사라지는 물푸레나무 숲을 바라보았다. 단단하지만 유연한 물푸레나무들은 바람에 휘청거렸지만 부러지지는 않았다.

    나도 저 나무들을 닮을 수 있을까? 조프리를 위해 그 정도는 노력해야 한다. 웨섹스 성에서 과분한 대접을 받은 게 모두 다 그의 덕이니까. 웨섹스 사람들은 조프리를 왕처럼 대접했다. 하지만 장원에서는 모든 사람이 짙은 의혹의 눈초리로 그를 바라본다. 그 가운데 가장 그를 괴롭힌 사람이 나다. 백성들 사이에 불안을 조성해 새 영주를 미워하게 만들었고, 조프리 성자라고 놀려댔으며, 그의 부드러운 태도를 실컷 조롱했다. 그의 행동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는 명예를 아는 남자로서 행동한 것뿐인데도. 그런 남자가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엘렌은 턱을 치켜들고 다짐했다. 이제까지 어떤 도전 앞에서도 움츠러든 적이 없었듯이 이번 일도 내 힘으로 하리라. 그의 앞길을 최대한 쉽고 편안하게 터주리라. 그리고 남편의 등을 경계하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으리라.

    집에 가까워질수록 진짜 적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확신이 들면서 자신의 집이 전처럼 안식처로 보이질 않고 시커먼 독거미로 보였다. 배신과 증오가 얽힌 거미줄에 먹이를 끌어들이려는 독거미......

    조프리는 착잡한 심정으로 영지를 바라보았다. 머리 속에 던스탄의 경고가 울려 퍼졌다. 앞으로 할 일도 태산 같았다. 하지만 영지를 바라보고 있자 자부심이 밀려왔다. 저곳이 모두 내 거야. 어떤 어려움이 닥쳐와도 지킬 테야. 그는 아내 쪽을 흘끗 보았다. 다시금 뿌듯한 소유감이 밀려들었다. 이번에는 더 강렬하게. 그는 싱긋 웃었다. 그녀 스스로 항의한다면 모를까 자신이 그녀를 소유한 것에 항의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웃음을 삼키면서 홀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재미있던 기분은 불편한 심기가 덮쳐 오면서 사라지고 말았다. 누군가 음흉한 눈으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던스탄이 한 말에 지나치게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지도 모르지. 그는 불안한 눈으로 홀 안을 둘러보면서 자신을 악의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보려고 했다. 솔직히 자신을 다시 보게 되어 반갑다는 표정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때 서얼이 달려나와 일행을 맞았다. 조프리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리고 있지만 눈은 그와 엘렌, 그리고 두 사람의 시종을 지나쳐 새로 온 기사들을 관심 어린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조프리는 그의 눈길을 따라 쳐다보았다가 천천히 기사들에게 고갯짓을 했다. 기사들은 일행에서 슬쩍 빠져나갔다.

    “늦게 나와서 죄송합니다, 영주님. 돌아오시리란 생각을 못했기 때문에......” 서얼이 입을 열었다.

    조프리는 무슨 말이냐는 듯이 눈썹을 치떴다. “몇 주 있다가 돌아오겠다고 했을 텐데.....”

    “네, 하지만......” 서얼이 과장스레 어깻짓을 했다.

    “하지만 뭐지?” 조프리는 궁금하기도 하고 화도 났다. 모두들 내가 거짓말을 한 거라고 생각했단 말인가? 웨섹스에서 편히 지내다 보면 자신들에 대한 책임감도 팽개치게 될 것이라고? 아니면..... 그는 좀더 불길한 의심이 들어 흠칫했다. 내가 그 동안 죽을 거라 생각한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누구 손에? 그는 저도 모르게 엘렌을 돌아보았다. 엘렌은 경멸의 표정을 감추지 않고 서얼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의 그런 표정은 수없이 보아 왔기 때문에 금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보지 못한 표정이어서 수상한 의미가 담긴 것이 아닌가 궁금해졌다. 던스탄이 엘렌을 의심하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 말을 깡그리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는 자신이 처한 어려움에 욕이 나왔다. 장원 안에 정말로 자신의 적이 있는 거라면 정신을 집중시켜 경계해도 모자랄 판에 아내의 속마음까지 의심해야 하다니....

    “죄송합니다만, 영주님, 저 기사들 말입니다.” 서얼이 말했다. “영주님 부하들이세요?”

    조프리는 서얼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저런, 서얼! 당신이 이렇게 오래 집사 자리를 부지하고 있는 것이 놀랍군 그래, 전에 모시던 영주에게도 이런 식으로 질문을 했다면 말이야.”

    조프리의 귀에 여자의 낮은 코웃음 소리 비슷한 것이 들렸다. 엘렌이 낸 소리일까? 역시 내 머리를 교란시키는군. 괜한 집사를 들볶는 대신 묘한 코웃음소리를 다그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직무상 여쭤본 겁니다. 저 기사들이 다른 기사들과 함께 지하실에서 지내야 할지, 아니면 새로 숙소를 정해야 할지 몰라서요.” 서얼은 죄송하다는 듯이 고개를 조아렸다.

    “관습대로 지하실에 묵을 거요.” 조프리는 그렇게 말하고 기사들의 정체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이곳을 보호하는 임무를 맡으러 왔지. 몽고메리가 떠난 자리를 보강해 줄 걸세.” 그는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들릴 만큼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러고는 다시 만나 기쁘다는 소감을 짤막하게 밝히고 전에 누린 번영을 되돌리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두의 생활을 개선시켜 줄 사람이니까 잘 듣고 따라야 해.” 조프리는 누가 말하는 것일까 잠깐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서얼이 놀라 바라보는 눈길을 따라가 보니 다름아닌 엘렌이었다. 엘렌이 저런 말을......? “그리고 누구든지 내 남편의 명령에 어긋나는 일을 할 때에는 내가 가차없이 손봐 줄거야. 평생 후회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명심하라구.” 평소처럼 난폭한 어조였다.

    입을 딱 벌리고 바라보는 조프리의 뒷덜미 털이 곤두섰다. 아까 들어서면서 느낀 묘한 느낌이 다시 덮쳐 왔다. 자신을 위해서 도전장을 던진 그녀의 모습이 유연하고 위험해 보였다. 조프리는 자신 혼자서는 몸을 지킬 수 없을 거라는 의미가 담긴 그녀의 말에 모욕을 느껴야 할지 아니면 고마워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결국 고마운 마음이 우세했다. 그는 벌렸던 입을 다물고 그녀에게 고갯짓을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눈을 마주 할 수 없다는 듯이 눈길을 돌렸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뒤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누가 알겠어.

    “영주님.” 돌아보니 던스탄의 기사 한 명이 서 있었다. 테일보트라는 이름의 기사는 식품 창고에 있던 것 같은 흙그릇을 들고 있었다. 그의 얼굴 표정을 보자 짓궂은 만족감과 쓰디쓴 실망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테일보트가 조프리에게 다가가자 또 한 명의 기사가 서얼의 등뒤를 둘러쌌다. 서얼은 뚜껑이 열린 흙그릇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에는 새우눈이던 집사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조프리는 영지의 재산을 훔친 도둑의 정체를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게 뭐지, 테일보트?”

    “동전들인데 밀랍을 깔고 밑에 교묘하게 숨겨 놓았습니다.” 기사가 엄숙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말린 땅콩 속에 보석이 있었구요.” 그는 손을 내밀어 손바닥에 놓인 커다란 루비를 내보였다.

    조프리는 혐오스러운 눈으로 루비를 바라보았다. “어째서 내가 돌아오지 않기를 바랐는지 알겠군.” 그는 집사를 돌아보았다. “피츠휴한테서처럼 나한테서도 훔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서얼은 여자처럼 울음을 터뜨릴 듯한 표정으로 몸을 떨었다. 하지만 곧 홀 맞은쪽의 누군가를 바라보았다. “아가씨 짓이에요!” 그는 손가락으로 엘렌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홀 안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숨막힌 소리를 냈고, 이어서 정적이 흘렀다. 깊은 정적에 조프리는 집사의 거친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엘렌의 경악하는 표정을 보았다. 그 표정으로 그는 그녀가 이 일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는 확신을 얻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탐욕과 아집에 빠져서 자신의 부하가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듯이 그녀 역시 이 일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아가씨가 시켰다구요. 내 방에 돈을 숨겨 놓으라고 시켰어요. 안 그러면 죽인다고 협박했단 말이에요.” 그가 소리치면서 조프리의 발치에 몸을 던졌다. “아가씨가 고래고래 소리치는 거 많이 들으셨잖아요. 에드레드 신부 말마따나 저 아가씨는 사탄의 딸이에요! 전 목숨이 아까웠어요, 그래서 명령에 따랐을 뿐이에요, 영주님. 제발 살려 주세요. 아가씨한테서 보호해 주시면 충성스레 모시겠습니다.”

    조프리는 서얼의 역겨운 몸집을 내려다보았다. 집사의 민대머리를 힘껏 내려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감히 그런 소리를!” 그는 격한 분노에 떼밀려 소리치며 칼을 빼앗아 들었다. 서얼은 그가 혐오하는 모든 것을 골고루 갖추고 있었다. 배신, 도둑질, 그리고 비겁함. 주인들의 재산을 훔쳐서 백성들을 굶주리게 하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다른 사람한테까지 뒤집어씌우다니! 그것도 죄없는 엘렌에게! 그는 분노에 밀려 칼을 쳐들었다. 하지만 이성이 손목을 붙들었다. 서얼을 죽인다고 해서 엘렌에 대한 백성들의 마음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떨리는 한숨을 쉬며 칼을 내렸다. 하지만 멀리 내려놓지는 않았다. 오랫동안 눌러온 분노가 너무 커서 쉽게 지워버릴 수가 없었다. 학자다운 성품으로도 분노에 고삐를 조일 수가 없었다. 그는 홱 돌아서서 칼로 둥그렇게 원을 그리면서 눈앞에 모인 얼굴들을 훑어보았다. 볼멘 표정의 얼굴들이 마치 흉년든 보리밭 같았다.

    “내 아내에 대해 또 할 말 있는 사람 있나?” 그는 일부러 더 소리쳤다. “지금 말하지 않으면 앞으로는 절대 말할 기회가 없을 테니까 지금 말하기 바란다! 자네, 월더프!” 그는 건방진 표정의 하인에게 소리쳤다. “무슨 말을 하고 싶지?”

    “아무 말씀도 드릴 게 없습니다, 영주님.” 월더프는 서둘러 뒤로 물러났다. 신부랍시고 행세하던 에드레드도 슬금슬금 물러나는 것이 보였다.

    조프리는 칼을 떨구고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할 말들이 없다니 좋아. 이제 쓸데없는 소문이나 비방, 거짓말은 진력이 났으니까!” 말하는 순간 조프리는 그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의 반응이 상황에 비해 지나친 것은 알지만 그 동안 참은 것을 생각하면 조금도 지나치지 않다. 아니, 캠피온 성에서 짧은 제비를 뽑아 든 날부터 끓어오른 분노인 것 같았다. 그만큼 참았으면 충분해. 간교하게 삥 둘러 빈정거리는 말과 쓸데없는 동정, 그리고 무턱대고 의심하는 얼굴들......

    “엘렌은 내 아내다. 앞으로는 절대 비방하지 말아라.” 그가 소리쳤다. 그러고는 여전히 떨고 있는 서얼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당신..... 난 자신의 죄를 여자한테까지 뒤집어씌우는 인간은 필요 없네. 테일보트, 이 자를 멀리 쫓아 보내게. 그리고 옷 보따리 말고는 아무 것도 못 갖고 나가게 하고. 내 땅은 물론이고 이웃 던스탄 영주의 땅에서도 영원히 추방이야.”

    “안 됩니다, 오랫동안 이곳에서 일해 온 나를 빈손으로 내쫓는다는 게 말이 됩니까? 피츠휴 가는 나한테 갚을 빚이 있어요!” 서얼이 울부짖었다. 테일보트에게 끌려가면서도 그는 애원했다가 협박했다가 갈팡질팡이었다. 하지만 조프리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칼을 칼집에 꽂으면서 엘렌을 바라보았다. 그녀를 맹렬하게 비호하고 난 뒤라 그런지 어색하고 불편했다.

    그녀 얼굴에 어떤 표정이 나타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놀라면서 욕하고 있겠지. 조롱하는 표정일 수도 있고. 그 속을 누가 알겠어. 그는 발을 바꿔 서면서 어떤 표정이든 담담하게 대하자고 각오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를 놀라게 만들었다. 얼굴을 가린 머리칼 너머로 그녀의 눈동자가 그의 눈동자와 얽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한순간 그는 그녀에게 동지애를 느꼈다. 결혼 서약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보다 한층 더 높은, 서로 존경심을 담은 유대감이었다. 뭐라 말할 수 없는 밀착감까지 생겼다. 비록 짧게 스치고 지나간 표정이지만 그녀의 황갈색 눈동자에 서린 생생한 동지애를 보자, 격분하며 그녀를 보호한 것이 조금도 후회스럽지 않았다.

    어쨌든 그녀는 나의 아내가 아니던가.

    서얼을 추방하고 나자 조금 안심이 되었다. 그가 떠난 뒤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다. 집사가 숨겨 두었던 보석과 돈을 발판으로.

    그는 곧 장원의 담을 수리하고 잡초 뽑는 일을 시작했다. 잡초를 뽑아 넓어진 땅에 나무를 심으라고 명령했고 백성들을 독려해 작물을 기르게 했다.

    사람들은 머뭇머뭇 따를 뿐이었다. 조프리의 엄청난 인내심도 종종 혹독한 시련에 부딪혔다. 사람들이 오랫동안 습관적으로 해온 대로 일하려고 고집했기 때문이었다. 조프리는 장원의 외벽을 허물고 단계적으로 더 튼튼히 쌓는 일을 계획했다. 그리고 장원 뒤쪽에 일광욕실을 짓는 일도 생각했다. 한때는 미래가 우중충해 보였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몽고메리와 서얼을 내쫓은 것으로 적을 일망 타진한 것이길 빌었다. 기분은 뿌듯했지만 남은 문제 두 가지가 그를 괴롭혔다.

    백성들의 마음을 얻으려는 노력의 결실이 그다지 신통치 않았다. 어떻게 해야 나를 받아들일까? 종종 사람들이 귀엣말을 속삭이거나 흘끗흘끗 보는 것이 눈에 띌 때면 자신의 얘기를 하는 것 같아 궁금했다. 누군가 사람들을 부추겨 나에게 맞서라고 시키는 것은 아닐까?

    던스탄의 기사들은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되었다. 반가운 일이었다. 하지만 조프리는 그들에게 염탐질하는 것은 엄격하게 금했다. 스스로의 마음을 증명하는 것 외에는 백성들의 마음을 살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가면 해결되리란 것도.

    두 번째 문제는...... 이 문제는 처음부터 그를 괴롭혔지만 지금은 더더욱 괴롭히고 있었다. 그것도 전과는 다른 양상으로. 일을 열심히 하고 다른 일에 정신을 팔려 해도 어느새 생각은 엘렌에게 달려갔다. 영지에 돌아온 날부터 두 사람 사이는 뭔가 변했다. 불편한 동지 관계라고나 할까. 잘 어울리지 않는 짝이라는 것은 분명했지만 그래도 주위를 둘러싼 불신의 얼굴들 가운데서 엘렌만은 동지로 다가왔다.

    그는 한숨을 쉬면서 돌아누웠다. 몸은 피곤한데도 마음이 초조해졌다. 침실 벽난로 앞에 누워 책을 펼쳐 놓고 있었지만 한 글자도 읽지 못했다. 시간이 늦었는데 엘렌이 아직 침대에 들지 않았다. 요즘은 한 침대에서 자고 있었지만 언제나 그녀가 먼저 옷을 입은 채 자리에 누웠다. 그는 그녀가 자길 기다렸다가 침대에 들어갔다.

    조프리는 책을 소리내어 덮었다. 생각이 내달리는 방향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람들과 말을 하고 있거나 일에 매달려 있을 때도 그녀는 늘 그의 머리 속을 파고들었다. 그녀가 움직이면 그의 눈동자도 따라 움직였다. 아무리 바라보아도 흡족하지 않다는 듯이. 집에 돌아온 뒤부터 두 사람 사이에는 새로운 긴장이 흐르기 시작했다. 깊고 원초적인 격정에서 오는 긴장감이. 그는 고개를 뒤로 기대면서 거칠게 한숨을 쉬었다. 난 점점 더 그녀에게 집착하고 있어.

    그는 더 이상 책을 읽는 척하지 않고 어색한 자세로 슬리퍼를 깁고 있는 엘렌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길이 그녀의 한쪽 가슴 위로 길게 늘어진 머리로 향했다. 숱 많은 머리칼을 저도 모르게 뚫어져라 바라보면서 그 머리칼을 쓸어보면 어떤 감촉일까, 그 머리칼이 강물처럼 자신의 몸으로 흘러내리면 어떤 기분일까 생각해 보았다. 빗지 않아서 엉망이야. 하지만 그래도.....

    그는 길고 낮게 숨을 내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이 뭘 바라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머리를 제대로 다듬지 않을 거라면 왜 저렇게 기른 걸까? 하인들에게 시키기 싫으면 직접 빗으면 좋을 텐데......

    그는 괜히 울화가 치밀어서 방안을 가로질러 그녀 앞에 버티고 서서 쏘아붙였다. “머리 좀 빗고 살지 않겠소?”

    그녀는 그 말에 흠칫하지도 칼을 뽑아 들지도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도전적으로 노려보았다.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아니! 난 이렇게 하고 살고 싶어요, 드 부르그! 당신이 마음에 안 든다면 더 좋구!”

    “그렇다면 내가 빗겨 주겠소.” 그 말을 하는데 갑자기 심장이 요란스레 뛰었다.

    그녀는 놀라 숨이 막혔다. 그의 말의 여운이 오랫동안 두 사람을 내리눌렀다. 침묵이 길어지자 조프리는 초조해졌다. 자신에게 화가 났다. 조금 전에 한 말을 되삼키고 싶었다. 하지만 온몸에 기대감이 가득 찼다. 바짝 날이 선 기대감이 맹렬한 기세로 파고들었다.

    “내 머리를 빗기고 싶다구요? 지금 제정신이에요!” 엘렌은 그가 싫어하는 뾰족한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그러고는 벌떡 일어나 문을 향해 뒷걸음질쳤다. 갑자기 미친 사람을 목격한 듯한 표정이었다.

    그래, 미쳤는지도 모르지.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생강 빛이 군데군데 얼룩진 숱 많은 머리칼에서 눈을 뗄 수가 없으니까. 마침내 그녀가 욕설을 퍼부으며 문을 박차고 뛰어나가고, 요란하게 문이 닫혔다.

    조프리는 실망감으로 한숨을 쉬며 침대를 향해 발을 돌렸다. 이제야 잘 수 있겠군. 그는 재빨리 옷을 벗고 촛불 하나를 남겨 둔 채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옆에 엘렌이 없으니 침대가 춥고 텅 빈 것 같았다. 그는 오랫동안 뜬눈으로 누워 그녀의 발소리가 들리길 기다리는 자신을 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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