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조프리는 홀 구석에 있는 의자에서 몸을 뒤척이면서 형이 재판을 주재하는 것을 한가롭게 구경했다. 캠피온 성에서 아버지가 재판을 주재하는 모습은 종종 보았지만 던스탄이 재판하는 것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는 너무나 공정한 재판에 내심 놀랐다. 던스탄 형은 무사인 줄만 알았는데..... 나이가 들면 지혜가 힘을 누그러뜨리는가 보군. 아니면 형수님이 그렇게 만들었는지도 모르지. 조프리는 싱긋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때 엘렌이 홀 안으로 들어왔다. 엘렌은 조프리를 보고는 얼굴이 백짓장처럼 변했다. 홱 돌아서서 도망가지나 않을까 하고 생각한 그는 놀라서 몸이 굳었다. 설마 엘렌이.....? 그는 일어나서 그녀를 맞으러 앞으로 나갔다.
며칠 동안 엘렌은 묘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이 새로운 행동을 뭐라 설명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은 평소와 다를 것이 없는데 그녀가 묘한 얼굴로 바라보는 것을 몇 번이나 목격했다. 너무 관심 있게 바라보는 바람에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엘렌은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고 나서는 민망한 듯이 돌아서곤 했다. 엘렌이 민망해한다고? 조프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무슨 일에 부끄러워하는 여자가 아니다.
하지만 요전날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속치마만 입은 모습을 본 날......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처녀처럼 홍조가 피어오르는 모습에 그는 후끈 몸이 달았다. 그때 그녀는 평소와는 사뭇 다른 사랑스럽고 나긋나긋한 모습이었다. 젖은 머리에 윤기가 흐르고 낡은 리넨 속옷 밑으로 가슴이 탄탄하게 솟아 있었다. 반쯤 벗은 그녀의 탄탄한 몸매를 생각하자 온몸이 굳어지면서 숨이 막혔다.
나를 피하는 것이 그 일 때문일까? 속옷 차림을 보았기 때문에?
조프리는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공손히 그녀를 맞았다. “안녕, 엘렌.” 목소리가 이상하게 쉬어서 나왔다. 엘렌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턱을 숙였지만 조프리는 얼굴을 가린 머리칼 너머로 붉어진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왜 저렇게 얼굴을 붉히는 걸까? 엘렌도 요전날 속옷 차림을 들킨 일을 생각한 걸까? 머리 속에서 다시금 그 광경이 떠오르려고 해서 그는 얼른 생각을 돌렸다. “할 이야기가 있소.”
“난 잡담할 시간이 없어요. 할 일이 있거든요.” 엘렌은 얼른 대꾸하고는 그를 지나쳐 가려고 했다. 하지만 조프리가 손목을 잡아 세웠다. 그녀가 들으면 반가워할 소식인데 듣지 않으려 하자 화가 났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녀는 손을 잡히는 것을 못 참을 텐데. 이제 곧 고래고래 소리지를 테지. 형의 재판을 망쳐 버리고 말 거야. 그러면 늑대의 불호령이 떨어질 테고...... 조프리는 얼른 그녀의 손을 끌고 그늘진 구석으로 데리고 갔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눈을 크게 뜨고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그가 어리둥절했다. 문득 손에 잡힌 그녀의 살갗이 매끄럽고 따스하게 손바닥을 눌러왔다. 부자연스럽게 뛰는 맥박이 전해지자 그에 답하듯 그의 심장도 요란하게 뛰었다. 손을 내려다본 그는 갑작스런 충동에 휘말렸다.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풍만한 곡선을 느껴 보고 싶은 충동에. 그 순간 그녀가 숨을 토하면서 손목을 잡아챘다. 그러고는 아프다는 듯이 손목을 문질렀다. 분명히 아프게 쥐지 않았는데......
“무슨 말을 해도 내가 듣고 싶은 소리는 아닐 거예요.” 그녀가 입을 열었지만 그 목소리에는 평소와 달리 기백도 없고 노려보는 눈길도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칼이 앞으로 쏟아졌다. 조프리는 그 머리칼에 손가락을 감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마침내 소원을 풀게 되었는데?” 그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뭐라구요?” 그녀가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자 빨갛게 달아오른 뺨이 보였다. 어디가 아픈 것일까?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홀 안이 더워서?
“집으로 돌아갈 거요.” 그는 속삭이면서 대화에만 신경쓰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와 분홍빛 뺨에 자꾸 눈길이 쏠렸다. 그녀가 하도 놀란 얼굴로 올려다보자 그는 더욱 근심스러워졌다. “당신, 괜찮소?”
엘렌은 욕설을 퍼붓지 않고 눈을 돌렸다. “괜찮아요. 언제 떠나죠?”
“주말까지는 있을 거요. 하지만 날씨가 좋아지는 대로 떠나면 좋겠소. 형하고는 아직 의논하지 않았지만.” 그는 형을 흘끗 바라보고 이마를 찌푸렸다. 늑대가 이 말을 들으면 못마땅해할 것 같아서였다. 신분이 위인 영주로서 그는 더 있으라고 명령할 수도 있다.
“우리 둘 다 간다구요?” 엘렌의 목소리가 묘하게 맥없이 들렸다. 맥없고 낮게 쉰 목소리.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잘됐군요.” 그녀는 몸을 돌렸다. 한시바삐 벗어나고 싶다는 듯이. 그는 그녀가 서둘러 가버리자 화가 나서 따라갔다.
“겨우 그것뿐이오? 돌아가자고 몇 주 동안 괴롭히고 협박했으면서? 엘렌!” 그는 소리쳐 불렀다. 하지만 그녀는 못 들은 척하고 멀리 가버리고 말았다. 조프리는 어떤 것이 더 놀라운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자신의 비난을 못 들은 척하고 욕을 퍼붓지 않는 것이 놀라운지, 아니면 이런 희소식을 듣고도 그녀가 기뻐 날뛰지 않는 것이 놀라운지.
그녀를 기쁘게 할 일이란 이 세상에 없는 모양이군.
그는 한숨을 쉬면서 콧잔등을 눌렀다. 머리가 아팠다. 그리고 두통의 원인을 제공한 여자가 원망스러웠다. 엘렌을 정중하게 대접하다니, 내가 멍청이지. 그런데도 그녀를 쫓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저렇게 서둘러 어딜 가는 것일까? 혹시 사람들이 침대 속에서 곤히 자는 동안 성안을 불태울 계획을 꾸미는 건 아닐까?
침대..... 침대 생각을 하자, 그리고 그 침대에서 누구와 함께 잤는지 생각하자 숨이 막혔다. 아내 옆에서 밤새 알몸으로 잤다. 그런데 요즘은 잠자기가 힘들어졌다. 목욕을 하고 나서 축축한 머리칼에 속치마만 입은 그녀 모습을 본 뒤부터는. 그는 신음 소리를 냈다. 그것이 언제였더라...... 처음 침대에 올라가 보란 듯이 잠을 잔 날이. 그 날이 후회스러웠다. 그 뒤부터는 꼼짝없이 침대에서 자야 했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 잠에서 깨면 옆에 엘렌이 없어도 온몸이 달아올라 있었다.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이름뿐인 아내로 생각해야지 괜한 생각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흥분했다.
악마 같은 여자가 지금 날 죽일 계획을 짜고 있는지도 몰라. 그는 씁쓸한 심정으로 중얼거렸다. 당장 찾아봐야지. 못된 짓을 꾸미는 건 아닌가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그는 몸을 펴고 계단으로 향했다. 그녀를 찾아봐야 할 이유가 또 있었다. 마리온하고 있는지도 모르니까.
마리온은 아기와 둘이 있었다. 조프리는 묘한 실망감이 들었다. 하지만 마리온은 반가운 얼굴이었다. 그녀는 창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뭔가 꿰매고 있었다. 아기는 발치 옆 요람에서 잠들어 있었다.
“조프 도련님! 여기 와서 앉아요. 요즘은 형님하고만 쑥덕거리고 나한테는 틈을 안 주더군요.” 그녀가 부드럽게 꾸짖었다.
조프리는 조금 미안한 심정으로 싱긋 웃었다. 솔직히 말하면 마리온을 피하고 싶었다. 마리온이 엘렌에 대해 불평하는 소리를 할까 봐, 그리고 사랑 없는 결혼 생활을 한다고 잔소리를 할까 봐. “죄송해요. 하지만 다음에 오면 서운하지 않게 해드리죠.” 그가 달랬다.
“그럼 떠날 거예요? 이렇게 빨리?” 마리온이 항의했다. “어제 막 온 것 같은데요. 한 달도 안 되었잖아요.”
“그래요.” 조프리가 인정했다. “하지만 갈 때가 되었어요. 장원에서 할 일이 많거든요. 형이 보내 주기만 한다면요.”
“강제로 더 있으라고 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더 있길 바랄 거예요. 형이 가장 아끼는 동생이잖아요.”
조프리는 어깻짓을 했다. “그건 다른 동생들보다 자주 봐서 그런 것뿐이에요. 이제 날씨도 좋아졌으니 다른 형제들 모두 초대해서 아기하고 인사시켜요.”
마리온이 얼굴에 보조개를 패며 말했다. “모두들 아기를 안아 보고 싶어 안달하고 있겠죠!”
조프리는 우락부락한 형제들이 아기를 보듬고 있는 모습을 떠올리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아버지도 손자를 보고 싶으실 거예요.” 조프리가 말하면서 요람으로 다가갔다.
“그래요.” 마리온이 말했다. “날씨도 많이 따뜻해졌으니까 그다지 걱정 안 해도 될 거예요.” 두 사람은 의미 심장한 눈길을 주고받았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손자를 만나고 싶어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마리온이 알아주었다는 것은 기쁘지만 아버지의 나이를 생각하니 쓸쓸했다. 조프리는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아기를 내려다보았다.
“조프 도련님.”
“네.” 그는 귀엽고 잘생긴 아기를 들여다보면서 중얼거렸다.
“엘렌 말인데요......”
조프리는 신음 소리를 낼 뻔했다. 이 방에 찾아오는 것이 아니었어. 마리온과 함께 아내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마리온은 이해 못한다. 아무도.
“도련님, 난 도련님이 너무 성급하게 그녀를 판단하지 않길 바라요.”
“누굴요?” 그는 놀라 얼굴을 쳐들었다.
마리온은 참을성 있는 미소를 지었다. “엘렌 말이에요.”
“아......” 그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설마 형수님이 그 악녀를 마음에 들어한다는 말은 아니겠지?
“겉은 흉폭해도 속마음은 선량해요. 어떨 때 보면 형님하고 닮았어요.” 마리온이 중얼거렸다.
조프리는 놀라 숨이 막혔다. 그 흉폭하고 요란한 여자가 명예로운 기사인 늑대를 닮았다니..... 천만에.
그가 항의하려 입을 열었지만 마리온이 계속했다. “모든 일을 흑백으로만 본다는 점에서 그녀도 형님과 많이 닮았어요. 하지만 서글프게도 그녀는 주로 검은색만을 본다는 점이죠. 그녀 인생에는 빛이 없어요, 도련님.”
“그래도 그렇지, 그 난폭한 여자를 형님에게 비교하다뇨!”
“왜, 안 돼요?” 마리온이 정색을 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형님이 날 삼촌의 성으로 데려갈 책임을 맡았을 때도 그는 내가 애원하는 말에는 귀기울이지 않았어요. 그곳에 가면 난 틀림없이 죽는다고 경고했는데도 못 들은 척했어요. 날 생각 없는 바보 취급을 하면서 혼자 잘난 척 잔인하게 굴었어요. 결혼하자고 정식으로 청한 적도 없었어요. 삼촌의 복수를 피하려면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일 거라고만 했죠.”
조프리는 형이 결혼한 뒤에도 마리온에 대한 사랑을 인정하길 꺼려한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생각을 읽은 듯 마리온이 싱긋 웃었다. “처음에 난 차라리 도망갈까 생각했어요. 하지만 대신 싸우는 길을 택했죠. 그의 고집에 대항해 싸우기로 한 거예요. 아버님도 전에 말씀하셨지만 그 덕에 늑대를 길들일 수 있었죠.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싸워 볼 만한 가치가 있었어요. 무슨 이유에선지 몰라도 사람들 중에는 자신의 마음이 가는 대로 놔두기를 꺼리는 사람이 있어요. 엘렌의 경우에도 괜한 추측은 하기 싫지만 그녀의 성장 배경에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해요. 어머니도 없이 그런 아버지 밑에서..... 명예라든가 부드러움 같은 것을 경험하지 못하고 자랐으니 그 인생이 어땠겠어요?”
“그래요.” 조프리도 인정했다. “하지만 형수님도 괴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형수님처럼 상냥한 사람은 못 본걸요.”
마리온은 웃음을 터뜨렸다. “고마워요, 도련님! 하지만 아다시피 사람이라고 다 같은 것은 아니에요. 그래도 각자 좋은 점이 있으니까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살아야 해요. 난 엘렌이 우리들에게 보여 주는 것만큼 난폭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대신 고슴도치처럼 위험한 겉모습으로 적들이 접근 못하게 하는 거죠. 그녀가 사람을 때리거나 동물을 때리는 것을 본 적이 있나요?”
조프리는 얼굴을 외면하고 이마를 찡그렸다. 마리온이 먼저 말했다. “삼촌은 개를 걷어차고 하인들을 때리는 걸 재미로 알던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엘렌에게서 그런 사악한 면은 보질 못했어요.”
“첫 남편을 잔인하게 죽인 일을 잊고 있군요.” 조프리가 딱딱하게 말했다. 맙소사, 자신도 종종 그 사실을 잊을 때가 많았다. 똑똑히 기억하는 것이 신상에 좋으리라.
마리온은 숨이 막힌 얼굴이었다. 표정이 황량했다. “잊었어요.” 스스로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그녀가 도련님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으면..... 두 사람을 바라보노라면 에이버리라는 괴물 같은 사내는 조금도 떠오르지 않아요. 아, 참, 요전날.....” 그녀는 말을 멈추고 괴로운 표정으로 눈을 크게 떴다.
“뭐죠?” 조프리는 그녀의 표정에 불안이 커졌다.
“아, 도련님.” 그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난 그 남자를 본 적이 없어요. 이야기만 들었죠. 자신이 모시던 영주를 배신하고 그것도 모자라 형님을 조롱하고 고문했다는 이야기.”
“에이버리 말인가요?” 조프리는 형을 배신한 사내의 이름을 입에 올리면서 몸을 떨었다.
마리온은 멍하니 고개를 끄떡였다. “그가 살해당한 일을 둘러싸고 많은 말이 오갔죠. 안 그래도 악명 높은 엘렌이었기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고, 그가 아내 손에 죽은 사실이 남자들 마음속에 숨은 공포를 불러일으킨 탓일 수도 있죠. 섣불리 결론내리지는 않겠어요. 하지만 난 도련님이 한 여자가 왜 침실에서 남자를 죽여야만 했는지를 생각해 주길 바라요.”
조프리에게 가장 먼저 떠오른 대답은 형제들 모두 공통적으로 의심한 것이었다. 엘렌은 피에 굶주린 마녀이고 결혼하기가 싫어서 남편을 죽였을 거라는 의심. 그렇게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마리온의 표정에서 뭔가를 읽고 도로 닫았다.
“엘렌이 왜 그 자는 죽이고 도련님은 죽이지 않을까요?” 마리온이 낮게 물었다.
조프리는 대답하려던 말을 삼켰다. 결혼한 뒤 처음으로 떠오르는 궁금증이었다. 엘렌의 첫날밤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 동안 그는 엘렌이 다른 남자와 함께 있었던 일을 되도록 생각지 않으려고 했다. 처음에는 월터 에이버리의 전철을 밟고 싶지 않아 그랬고, 나중에는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스스로도 깊이 캐묻고 싶지 않은 그 어떤 이유......
그런데 지금 새삼 깨닫고 보니 첫날밤에 죽은 남자는 평범한 남자가 아니었다. 명예심이라고는 조금도 없이 자신의 친구이자 상전인 던스탄을 배신하고 잔인하게 다루었다.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인간이라면 여자 다루는 것은 과연 어떨까? 문득 뱃속에 낯설고 차가운 공포가 고였다. 에이버리가 엘렌에게 강압적으로 어떤 짓을 시킨 것은 아닐까?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었다. 하지만 만일 그랬다면 엘렌이 잠자코 당하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엄두도 내지 못하겠지만 그녀는 분명 반격했을 것이다. 그래서 결국 살인자라는 이름이 붙은 것일까?
그는 죄책감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목이 막혔다. 그는 엘렌의 과거를 누구보다 많이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왜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왜 더욱 너그럽게 그녀를 봐주지 못했을까? 차라리 전쟁터에서 내가 직접 월터를 죽일걸...... 손에 닿기만 했다면 분명 죽였을 것이다! 조프리는 세차게 헛기침을 했다. “엘렌이 형수님에게 무슨 말을 했어요?”
마리온은 서글프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소리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거 알잖아요. 하지만 엘렌은 남녀 사이의 일에 대해 아무 것도 몰라요. 내가 거리낌없이 그런 이야기를 하자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하더라구요.”
조프리도 얼굴이 후끈거렸다. 여자하고 이런 대화를 하는 것에 익숙지 않았을 뿐더러 아내하고 잠자리를 하지 않은 자신의 무성의를 마리온이 은근히 꾸짖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잠깐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데 아기가 울음을 터뜨렸다. 마리온이 일어서서 아기에게로 발을 돌렸다. 하지만 먼저 조프리의 팔에 부드럽게 위로하는 손을 얹었다. “엘렌이 어떤 가시밭길을 겪어 왔는지 잘 안다고는 말할 수 없어요. 그리고 도련님한테 이렇게저렇게 하라고 떼밀지도 않겠어요. 내가 부탁하는 건 오직 하나뿐이에요. 엘렌과 도련님을 위한 일.....” 마리온은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말했다. “제발 그녀를 포기하지 말아요.”
웨섹스를 떠날 때가 되었다. 던스탄과 마리온, 그리고 새 아기와 함께 있는 것이 즐겁기는 했지만 장원에 일이 산더미처럼 기다리고 있었다. 의무 때문에 돌아가는 것이라고 스스로 타이르긴 했지만 떠나는 데는 다른 이유들도 있었다. 마리온이 친절하게 대해 주었지만 조프리는 엘렌과 형 사이에서 심기가 불편했다. 결혼하기 전 같으면 형의 성에서 보내는 날들이 편안하고 좋기만 했겠지만 이제 그런 일은 불가능했다. 그리고 엘렌이 불행한 것 같았다.
“언제 떠날 거니?”
조프리는 형의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누가 들어오는 기척을 느끼지 못했는데.... “이틀 뒤에.” 조프리가 털어놓았다. “어떻게 알았어?”
“형수가 말하더구나. 나더러 널 윽박지르지 말라고 다짐시키더구나. 왜 그런 약속을 시키는지는 모르겠다만.” 던스탄이 말했다. 그런 약속을 한 것이 못마땅해 보였다. “난 네가 더 있으면 좋겠다.”
“알고 있어.”
“쳇!” 던스탄은 약속한 것이 있어서인지 윽박지르지는 못하고 투덜거릴 뿐이었다. “할 수 없지. 하지만 내 부하 몇 사람을 딸려 보내게 해다오.”
조프리가 그럴 필요 없다고 하려는데 늑대가 큼직한 손을 쳐들었다. “나도 네가 뭐든지 네 힘으로 하고 싶어하는 건 알고 있어, 조프. 젠장! 웨섹스 성을 맡으면서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 그 바람에 무척 고생했다. 충고해 줄 사람도 없고, 같이 일할 친구도 없고, 네가 장부를 맡아 주지도 않았으니.....” 그는 쓴 미소를 지었다. “너는 나 같은 실수를 하지 말고, 내가 신임하는 기사를 보낼 테니 데려가도록 해.”
조프리는 처음에 거절하려고 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았다. 장원에 있는 사람들에게 경호원이라고 기사들을 소개하기는 싫었다. 그런 것은 백성들을 더욱 멀리 밀어내는 짓이니까. 하지만 문득 몽고메리와 맞붙은 일이 떠오르며 앞으로도 누군가 자신을 배신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넌 사람을 너무 잘 믿어, 조프. 난 네가 그곳에 홀홀 단신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안 놓여. 피츠휴 밑에 있던 기사들뿐이잖니.”
“지금은 나한테 충성을 맹세했잖아.” 조프리가 대꾸했다.
던스탄이 투덜거렸다. “모반이 얼마나 순식간에 가능한 것인지 우린 잘 알고 있잖아. 특히 적의 후계자가 살아 있을 경우에는......” 그는 엘렌을 거론하기가 언짢다는 듯 말꼬리를 흐렸다. 하지만 조프리의 눈길을 잡고 놓지 않았다. “누군가 네 등을 보호해 줄 사람이 필요해.”
조프리는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엘렌도 똑같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가? 그 이야기를 형에게 하고 싶었지만 던스탄이 그런 아이러니한 일을 달갑게 받아들일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조프.” 던스탄은 눈을 밑으로 깔았다. 조프리는 형의 어조에 긴장했다. 설마 또 엘렌에 대해 불평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너희 장원의 식품 창고가 텅 비어 있다는 말을 듣고 생각해 봤는데.... 믿어지지가 않아.”
조프리는 엘렌의 이야기가 아닌 것에 안심하기는 했지만 어리둥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피츠휴는 아내한테 빼앗은 재산이 꽤 많았거든. 아내가 훨씬 부자였으니까. 그 돈을 나하고 전쟁하느라 썼다구. 병사들을 들여놓고 전쟁 물자를 들여오느라고. 피츠휴는 늘 가장 비싼 무기와 옷을 사들였고 보석까지 사댔어. 소문에 따르면 아내의 재산을 빼앗아서 자신이 쓸 반지나 장신구로 바꾸었어.”
던스탄의 낮은 탄식이 못마땅한 그의 심사를 대변했다. “하지만 그 재산이 전쟁 중에 모두 없어지진 않았을 거야. 포로가 된 기사들을 데려오느라고 많은 몸값을 치렀다 해도 그래. 그는 웨섹스 성이 퇴락한 것을 알고 있었어. 그렇기 때문에 성을 차지할 경우 보수할 비용을 숨겨 두었을 거야. 성을 살기 편하게 만들기 위해선 당연한 일이지.”
조프리는 형을 바라보았다. 이치에 맞는 말이지만 그런 말을 하는 형의 속셈이 불안했다. “하지만 장원을 아무리 둘러봐도 사치한 데라고는 눈씻고 봐도 없던걸.” 딱딱하게 대꾸했다.
“젠장, 무슨 말인지 알면서 그러니?” 던스탄이 으르렁거렸다. 화가 났다는 표시였다.
“정말 모르겠어.” 조프리는 말하면서도 커져 가는 의심으로 신경이 곤두섰다. “좀더 알기 쉽게 말해 줘.”
던스탄은 거북한 얼굴이었지만 결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 생각엔 엘렌이 어딘가에 그 재산을 숨겨 두었을 거야.”
조프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자신이 듣기에도 신랄한 웃음소리였다. “아, 그래, 그래서 엘렌이 그렇게 열심히 멋진 드레스와 보석을 사들이는 거로군!” 그는 한껏 빈정거렸다.
던스탄의 얼굴이 험악하게 변했다. “이런, 망할! 물론 그런 것에 돈을 쓸 여자는 아니야. 하지만 군사들을 사들여 모반을 일으키게 하거나 네 등에 칼을 꽂게 할 수는 있단 말이다. 어줍잖은 명예심 때문에 마땅히 봐야 할 것도 놓치지는 말란 말이야! 그 여자는 위험하다구! 가두든지 아니면 멀리 보내야 해. 수녀원도 좋을지 모르지. 하긴 그 여자를 거저 받아 줄 수녀원은 없겠지만. 그 여자가 숨긴 돈주머니를 찾아내서 수녀원 쪽을 구워삶아야 해.”
조프리는 온몸에 치달리는 뜨겁고 격한 분노를 억눌렀다. 마침내 분명히 알았다. 형은 엘렌을 미워하고 있어. 그는 형의 솔직한 심정을 알게 된 것을 오히려 잘된 일로 생각해야 한다고 속으로 타일렀다. 조프리는 솔직함과 담백한 거래를 좋아했다. 하지만 난생 처음 형을 메다꽂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실컷 두들겨 패서 그 둔한 머리통에 이성이라는 것을 심어 주고 싶었다.
형은 나보다 신분 높은 영주야. 그는 속으로 타이르면서 시뻘겋게 타오르는 분노를 다스렸다. 형이 엘렌을 경멸하는 이유를 이해하니까. 형은 엘렌의 아버지 때문에 온갖 고초를 겪었기 때문에 그 증오심이 딸에게 옮겨 간 거야. 엘렌이 아버지더러 전쟁을 하라고 사주한 것은 아니지만 그녀 역시 쉽사리 남의 호감을 사는 여자는 아니니까.
하지만 형의 말처럼 엘렌이 설령 돈을 감추었다고 해도 내가 무슨 자격으로 그녀를 비난할 수 있겠는가? 그건 그녀 아버지의 돈인데..... 그렇지만 엘렌이 돈을 숨겨 두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겉보기엔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없는 여자 같지만 자신의 영지 안의 백성들에게서 음식을 훔칠 사람이라고는 조금도 상상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두툼한 돈주머니를 안고 어디론가 도망쳐 버릴 거라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태어난 장원을 벗어나면 힘을 쓰지 못할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이 세상 그 누가 꼬인다 해도 그녀가 자신의 영지에 애착하는 심정을 몰아내지는 못할 거라는 본능적인 직감도 들었다. 그녀가 영지를 배신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녀가 군사들을 사서 자신을 몰아내는 것도 상상이 가지 않았다. 엘렌은 아버지처럼 권력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 욕심은커녕 남자들이 흔히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경멸하고 있었다. 나를 죽여 버리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지만 자신의 손으로 죽이겠다고 위협했지 사람을 고용해서 죽이겠다고 한 적은 없었다. 그리고 그 동안 마음만 먹으면 죽일 기회가 많았는데도 그녀가 한 일은 얼굴을 할퀸 것이 고작이었다.
“그건 엘렌답지 않은 짓이야.” 조프리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늑대가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형 말대로 피츠휴의 재산이 일부 사라졌다면 그건 다른 사람의 짓일거야.” 조프리는 문득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쉽게 몽고메리를 놔주는 것이 아닌데.... 몽고메리는 엘렌의 아버지와 각별한 사이였다. 혹시 그 자가 피츠휴의 재산을 가로챘는지도 모른다. 가장 의심 가는 인물이다.
아니면 서얼일 수도 있다. 집사의 반질반질한 눈이며 분명치 않은 이력이 머리 속에 떠올랐다. 많은 액수의 돈이 아무런 설명 없이 서얼 앞으로 기재되어 있던 것이 생각났다. 집안의 물품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서얼이야말로 가장 의심 살 만한 인간이다.
“좋아.” 조프리가 입을 열었다. “형의 기사들을 데리고 갈게. 그리고 영지 안에 도둑이 있나도 찾아볼게.” 그는 일어서서 형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내 아내도 역시 내가 책임질 거야.”
“조프!” 한순간 조프리의 눈이 던스탄의 눈과 마주쳤다. 두 사람의 의지가 허공에서 부딪혔다. 던스탄 쪽이 더 강한 의지였지만 조프리도 참을성으로 다져진 의지였다. 마침내 던스탄이 나직한 욕설을 중얼거리면서 고개를 돌렸다. “가장 우수한 기사 둘을 주마, 조프.”
“고마워, 형.” 조프리는 나직하게 말하면서 다정하게 형을 껴안았다.
하지만 형을 따라 일광욕실에서 나오는 조프리의 마음은 매우 불편했다. 어서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 마음이 우울하고 불안한 생각으로 얼룩지고 있었다. 웨섹스 성에서 맛본 평화와 비교하자 장원으로 돌아갈 일이 끔찍스러웠다. 갈등과 의혹으로 가득 찬 그곳으로 돌아가는 것은 뱀둥지에 발을 들여놓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형이 엘렌에 대해 한 이야기도 여전히 머리 속을 맴돌았다.
지금 수많은 적이 나를 기다리고 있어..... 그런데 나의 아내는...... 엘렌을 친구로 생각해야 할까, 아니면 적으로 생각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