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와결혼하는법-10화 (10/18)
  • 10장

    엘렌은 마리온을 노려보면서 그녀가 입에 달고 다니는 미소는 머리 속이 텅 비었다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엘렌은 속으로 짓궂게 싱긋 웃었다. 그래, 마리온은 멍청이인지도 몰라. 늑대한테는 천생 연분이로군! 그 생각이 재미있어서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참았다. 마리온은 치수를 재려고 줄자를 그녀의 발치로 늘이고 있다가 놀라서 올려다보았다.

    “미안해요. 내가 찔렀어요?” 마리온이 물었다. 커다란 눈동자에 걱정이 가득 담겨 있어서 엘렌은 오히려 코웃음이 나왔다. 드레스를 받지 말자고 다짐하고 다짐했는데도 어쩌다 보니 마리온의 손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이 바보짓 좀 얼른 끝내 줘요. 전에도 말했지만 당신 선물은 받기 싫어요.” 엘렌은 자신의 팔을 잡아당기는 마리온에게 쏘아붙였다. 그런데 늑대의 아내는 체구가 작은 여자치고는 놀랄 만큼 힘이 셌다. 그리고 고집스러웠다.

    그래도 맞붙어 싸운다면 자신이 한수 위라고 생각했다. 바닥에 메다꽂고 목에 단도를 들이대면 끝나는 일이다. 그렇게 하면 적어도 싱글거리는 저 미소만은 사라지겠지! 엘렌은 픽 웃었지만 이번에는 마리온이 쳐다보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어떤 위험에 처했는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엘렌이 행동에 나서지 않은 것은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조프리 때문이기도 했다.

    남편 생각을 하자 얼굴이 붉어졌다. 오늘 아침 눈을 뜨니 또 그의 옆이었다. 간밤에는 피곤하고 머리가 어지러워서 옷궤 속에서 자기가 싫었다. 반항이라도 하듯 침대에 자리를 잡고 잠을 청하려고 했다. 하지만 조프리가 올 때까지는 잠이 오지 않았다. 그녀는 숨을 죽이고 눈을 질끈 감고서 그가 옷을 벗고 옆에 들어와 눕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다시 옷을 입든지 칼 세례를 받으라는 소리가 혀끝까지 나왔지만 소리치기도 전에 잠이 들고 말았다. 그러고는 아무 기억도 없는데, 새벽녘에 몸을 뒤척이다 보니 그의 벗은 몸에 바싹 다가가 웅크리고 누워 있었다. 맙소사. 자신의 무릎이 그의 아랫도리를 스치려 하고 있었고, 손가락은 그의 가슴 털 속에 들어가 있었다! 그 생각을 하자 뺨이 달아올랐다.

    침대에서 빠져 나온 그녀는 성 꼭대기로 도망갔다. 민망해서 화끈거리던 얼굴은 곧 식었지만 대신 묘한 열기가 몸 속 깊숙한 곳에서 솟아났다. 다시금 펼쳐지는 일출의 장관을 보고 그녀는 감동 받았다. 웨섹스를 떠나고 싶은 마음이 수그러들었다. 당분간은 그저 모든 것을 관망하면서 기다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조프리를 위해서.

    마리온이 찾아와 목욕을 하라고 다그쳤을 때 그녀의 목을 베지 않고 순순히 받아들인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마리온의 목을 베면 조프리가 좋아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솔직히 목욕을 하고 싶기도 했다. 뜨거운 물로 목욕을 하고 나니 정말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속치마 차림으로 서서 젖은 머리를 등에 내려뜨리고 있자 또 짜증이 났다. 마리온의 끊임없는 간섭이 성가셨다.

    그만 좀 하라고, 앞으로는 절대 이런 짓 안 하겠다고 말하려는 순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들어와요.” 마리온이 명랑하게 소리치자 엘렌은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엘렌은 여자 하인들 앞에서도 이런 벌거벗다시피 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마리온에게 잔소리를 하려는데 문이 열렸다.

    조프리가 서 있었다.

    그는 싱긋 웃는 얼굴로 양피지 만 것을 들고 있다가 성큼 들어섰다. “형수님, 아버지한테서 전갈이 왔어요. 던스탄 형이 형수더러 이걸....” 그 말을 하다가 그는 갑자기 멈추었다. 속치마를 입은 엘렌의 모습을 본 그의 손가락에서 편지가 떨어지고 눈이 휘둥그래 벌어졌다.

    엘렌은 벗다시피 한 자신을 의식하고는 얼굴이 빨개졌다. 잠잘 때도 옷을 입고 잤는데 지금 이 꼴이 뭐란 말인가. 여기저기 물기가 있는 얇은 리넨 속옷 바람에 머리는 뒤로 빗어 넘겼다.

    정적이 너무 무거워서 손에 잡힐 것 같았다. 그런데 정적을 깨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가슴이 빠르게 오르내리고 숨이 가빠졌다. 그녀는 조프리의 촉촉하고 매혹적인 갈색 눈동자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온몸에 기묘하면서도 따스한 기운이 돌았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가슴이 딱딱해지더니 축축한 옷 위로 솟았다. 그의 눈길이 그녀의 가슴으로 내려갔다.

    그는 헛기침을 했다. 그 소리에 그녀는 최면 상태에서 깨어났다. 정신없이 머리칼을 끌어내려 얼굴과 가슴을 덮었다. 입을 열었지만 욕은 나오지 않고 맥없는 신음 소리만 새어 나왔다.

    “아, 이거 놔둘 테니 읽어보세요, 형수님.” 조프리는 목이 막힌 듯한 소리로 말하고는 창백하고 맥없는 얼굴로 나갔다.

    “고마워요, 도련님!” 마리온이 소리쳤다.

    마리온! 엘렌은 마리온이 방안에 있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엘렌은 마리온을 홱 돌아보았다. 수치스러운 꼴을 당한 것이 모두 그녀 탓이라고 소리치려 했다. 하지만 마리온이 웃음을 터뜨리자 흠칫했다.

    “봤어요?” 그녀는 명랑하게 킬킬거렸다. “조프리가 저렇게 면구스러워하는 건 처음 보았어요.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남자애 같았다니까요!” 그녀가 뒤로 주저앉으면서 킬킬댔다. “동서한테 반한 증거를 직접 보니 너무 반가워요.”

    엘렌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리온은 정말 미친 여자가 분명했다.

    마리온은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서 매끄러운 짙은 색 옷감을 펼쳐놓기 시작했다. “이제 일을 시작해야겠군요. 방에 가 있어요. 도련님을 보내 줄 테니까.” 마리온이 말하면서 매끄러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겁이 난 엘렌의 표정을 보았는지 그녀의 미소가 재빠르게 사그러들었다. “왜 그래요? 설마 도련님이 동서를 어떻게 한 건 아니죠?”

    “바보 같으니! 그 사람은 나한테 아무런 감정 없어요, 나도 그렇고요!” 엘렌이 소리쳤다. 자신에게 강조할 목적이 더욱 컸다.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마음을 준 적이 없었다. 더구나 드 부르그 가 남자한테 마음을 준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자신의 손을 잡아 무릎에 얹던 성자 같은 남편한테는 특히 더. 그녀는 그 생각에 반발하듯 몸을 떨면서 드레스를 집어들었다. 낡고 모양 없지만 자신의 분신 같은 드레스였다. 그녀는 그 드레스를 머리 위로 뒤집어썼다.

    “도련님이 다른 여자들하고 있는 것을 보았지만 저렇게 침착하지 못한 얼굴은 처음이에요. 동서에게 마음이 있는 게 분명해요.” 마리온이 어리둥절해서 항의했다. “이해 못하겠군요. 두 사람은 결혼한.....”

    “내 결혼 생활이나 내 인생에 대해 뭘 안다고 그래요, 마리온! 팔자 좋은 상속녀에 사치나 부리는 당신이 나에 대해 뭘 알아요?” 엘렌은 드레스 소매에 팔을 넣으며 으르렁거렸다. 빨리 이 여자 옆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꼬치꼬치 캐물으면서 걱정해 주는 척하는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요, 모르죠.” 마리온이 조용히 인정했다. “얘기해 줄래요?”

    “싫어요!” 엘렌이 소리쳤다. 얼른 방을 나가고 싶은 마음에 레이스를 매만지는 손이 허청거렸다.

    “그렇다면 내 이야기는 듣고 싶을지 모르겠군요.” 마리온이 말했다. “동서만 험한 인생을 산 것이 아니라는 걸 알고 실망할 수도 있겠지만.”

    레이스를 매던 엘렌의 손이 얼어붙었다.

    마리온은 그녀의 험악한 눈길을 무시하고 자리에 앉아서 심호흡을 했다. “그래요, 상속녀란 말은 맞아요. 아버지는 남쪽 배더슬리의 부유한 영주였죠. 하지만 어렸을 때 부모를 모두 잃었어요.” 그녀의 덤덤한 어조에 엘렌은 귀를 기울였다.

    “그 뒤로 내 인생은 영지를 탐내는 비정한 삼촌의 손에 얼룩져 버렸어요. 아마 동서의 아버지 같은 사람이었을 거예요. 물론 아닐 수도 있지만. 어쨌든 난 동서처럼 강한 여자가 아니었어요. 난 마치 유령처럼 사람들을 피해 다녔죠. 나와 친해보려는 사람들까지. 삼촌의 성미를 건드릴까 봐서요. 어떤 사람과도 말을 나누지 않고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게 되었죠. 삼촌에게 맞을까봐......”

    엘렌은 흠칫했다. 아버지도 자신에게 손을 댄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삼촌이 멀리 여행을 떠났을 때를 틈타 성에서 탈출했어요. 그런데 삼촌이 곧 알아차리고는 자신의 부하들을 강도로 위장해서 나와 내 시종들을 죽이게 했어요. 내가 살아난 건 때마침 조프리와 사이먼이 그곳을 지난 덕분이에요. 하지만 난 머리에 충격을 받고 기억 상실증에 빠졌죠. 전에도 말했지만 그들 형제가 날 캠피온 성으로 데려갔어요. 그런데 삼촌이 날 돌려달라고 요구하고 나왔죠. 그래서 던스탄이 대표로 뽑혀 날 데려가는 역할을 맡게 된 거예요. 내가 아는 가족은 드 부르그 가 사람들뿐이었는데. 던스탄은 두려워서 기억하기조차 싫어하는 곳으로 날 데려가는 역할을 맡았죠.”

    그녀는 말을 계속하기가 힘들었는지 잠깐 쉬었다가 계속했다. “그런데 가는 도중에 습격을 받아 모두 죽었어요. 학살의 현장을 보았죠. 던스탄의 부하와 시종들이 모두 다 죽었어요.....” 그녀는 이번에는 더 크게 심호흡을 했다. “시체들을 보고 있는데 기억이 되살아났어요. 잘된 일이기도 했지만 나쁜 일이기도 했죠. 내 앞에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 분명하게 알게 되었으니까요. 던스탄에게 사정을 설명했지만 그는 나중에 아슬아슬한 지경에 이르러서야 내 말을 믿었죠.”

    그녀는 싱긋 웃었다. “돌아가는 길은 온통 가시밭길이었어요. 그런데 웨섹스로 돌아와 보니 동서의 아버지가 던스탄의 성을 점령하고 있었어요. 월터 에이버리가 던스탄을 사로잡았을 때 나도 그 자리에 있었어요. 하지만 일부러 몸을 숨겼죠. 그런 다음 태양과 별을 나침반 삼아 캠피온 성으로 달려갔어요. 나 혼자서. 만나는 사람이 모두 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두려웠기 때문이죠. 내 적이 아니면 던스탄의 적일 거라 생각했어요. 힘든 여행이었죠.”

    그녀는 한숨을 쉬면서 물기 어린 눈으로 엘렌을 보았다. “하지만 결국 도착했어요. 그리고 드 부르그 형제들이 도와주어서 웨섹스 성을 되찾고 삼촌에게서 내 땅까지 되찾을 수 있었죠. 그들은 삼촌 손에 죽을 뻔한 날 살려 주었어요. 지금 이렇게 평화롭게 살고 있는 것도 다 그 덕분이에요. 그런 고난을 겪었기에 지금의 평화가 더욱 소중하죠.”

    엘렌은 눈을 깜빡거렸다. 놀라웠다. 그렇게 끔찍한 일들을 어떻게 저리 빨리 잊을 수 있을까. 그렇게 쉽게 잊힐 리가 없는데...... 그런데도 마리온에게서는 그런 것을 눈치챌 수가 없었다. 내가 장원의 문 밖에 나가는 것도 두려워하고 있을 때 이 여자는 혼자 몸으로 한 나라를 가로질렀다. 충격적인 사실에 그녀는 뼛속까지 흔들렸다.

    “그만하면 동서도 내가 왜 내 인생을 최대한 즐기면서 행복을 누리고 있는지 이해가 되겠죠.” 마리온이 사치스러운 방안을 손짓해 보였다. “과거를 모조리 잊을 수는 없지만 손에서 놔줄 수는 있어요. 동서도 그렇게 해봐요.”

    엘렌은 마리온의 간단 명료한 철학에 압도되어 불현듯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알았다. 지금까지 자신은 용감하고 맹렬한 여자고, 마리온은 머리가 빈 인형 같은 여자라고 무시했는데......

    나는 무슨 짓을 해도 늑대의 아내보다 용감하게 행동하지 못할 거야.

    마리온의 방을 나온 엘렌은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마리온에게서 들은 이야기쯤 웃어넘기고 싶었다. 하지만 목이 눌린 것 같은 한숨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얼른 성을 빠져 나왔다. 아예 목숨마저 내놓고 빠져 나오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어렸을 때는 마구간에만 가면 위안을 받았다. 하지만 그곳으로 가지 않았다. 지금은 뭔가에 기대고 싶지 않았다. 조프리가 말했듯이 나도 이제는 어린아이가 아니다. 대신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정원으로 걸어갔다. 마리온이 정성 들여 가꾸는 곳이었다. 봄의 첫 꽃봉오리들이 솟아나고 있었다. 거기라면 아무도 찾지 못할 것이 틀림없었다. 엘렌 피츠휴가 아름다운 것을 감상할 줄 안다고는 아무도 생각지 않을 테니까.

    정말 그런가?

    더 이상 자신할 수가 없었다. 몸이 떨리고 뼛속까지 뒤흔들렸다. 세상이 거꾸로 뒤집히고 앞이 캄캄했다. 이렇게 사는 것만이 유일한 생존 방식이라고 생각했는데.....

    마리온은 자신에게 충실했는데도 살아남고 승리했다. 그리고 내가 해온 모든 일을 다시 점검하게 만들었다. 가슴속에 깔려 있던 신념이 허물어지자 다른 신념들도 덩달아 허물어지려고 했다. 드 부르그는 전쟁을 즐기는 무뢰한들인가, 아니면 명예를 아는 기사들인가? 조프리는 땅 욕심에 눈이 먼 악당인가, 아니면 조용한 성품의 학자인가? 누구보다 정중하게 대해주는 부드러운 남자..... 그것이 과연 진실한 모습일까? 엘렌은 물 밖에 나온 고기처럼 몸을 떨었다.

    난 너무 오랫동안 세상과 싸우다가 어둠에만 익숙해져 버렸는지도 몰라. 그래서 모든 것을, 모든 사람을 내치고 있는지도 몰라. 그녀는 떨리는 숨을 들이마셨다. 아, 이젠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어.....

    엘렌은 오후 내내 앉아 있었지만 해답을 찾지 못했다. 모든 것을 설명해 줄 만한 깨달음은 그녀를 외면했다. 깨달은 것이라고는 세상에는 여러 가지 삶의 방식이 존재한다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세상에는 진실한 것이 있었다. 더 이상 그런 것들을 부인할 수 없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때 조프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와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엘렌! 하인이 말해 주었소. 당신이 여기서 외투도 없이 몇 시간이나 앉아 있더라고.” 그녀는 눈을 깜빡거리다가 불현듯 차가워진 봄 날씨를 느꼈다. 부드럽던 산들바람도 싸늘해졌다. 그게 뭐 큰일이야? 마음속에서는 이미 훨씬 더한 폭풍이 휩쓸고 지나갔는데.

    “괜찮소?” 조프리가 물었다. 그녀가 대답하지 않자 그는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이제까지 어떤 남자도 내 앞에 무릎을 꿇은 적이 없는데.... 조프리는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고 있을까? 검은 머리칼에는 윤기가 흐르고 근심을 담은 눈동자는 따스하고 부드러웠다. 연기일까, 진심일까? 그녀는 더 이상 자신할 수가 없었다.

    “어디 아픈 거요?” 그가 묻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저런, 차라리 욕이라도 퍼부을 것이지. 그러면 당신이 아프지 않다는 걸 확인할 수 있겠는데.....” 그는 말하면서 짓궂게 싱긋 웃었다.

    그녀는 울고 싶었다. 난 지금 정상이 아니에요. 당신은 내가 누군지 알고 있나요? 그렇게 묻고 싶었다.

    조프리는 그녀가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자 몸을 굽히더니 그녀의 손을 잡았다. 뜨거운 열기가 그녀의 몸에 퍼져 나갔다. 두렵기도 하지만 위안이 되어 주었다.

    본능으로 말하면 얼른 손을 빼야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조프리가 외투로 감싸안는데도 그녀는 몸을 빼지 않았다. 그는 늘 그렇듯이 부드럽고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녀는 생전 처음 보는 듯한 경이로운 심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이 너무나 멋있었다. 갈색 눈동자는 부드러웠고 뭐든지 다 아는 듯한 표정이 담겨 있었다. 엘렌은 그 지혜로운 눈빛에 경이로움을 느꼈다. 그가 읽고 배운 모든 것이 경이로웠다. 그런데 나는.....

    그의 눈길이 갑자기 자신의 입술로 내려오자 엘렌은 몸이 후끈해지면서 추위를 잊었다. 여러 가지 기억들도, 자신을 집어삼키려던 그 모든 생각도 머리 속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그 순간 마치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바람이 불어서 헝클어진 긴 머리를 휘날렸다.

    “자, 갑시다.” 조프리가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감기 들기 전에.”

    엘렌은 그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몸 속에서 새삼 훈기가 돌았다. 무거운 모직 코트와는 아무 상관없는 훈기였다.

    엘렌은 자신이 그 동안 알고 있던 모든 것이 의심스러웠다. 적을 알려면 주의 깊게 살펴보고 엿듣는 것이 최선인데 바로 지금이 그러한 전략을 써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낯선 나라에 온 손님 같은 기분으로 모든 것을 살펴봐야지. 객관적인 호기심으로 모든 사람을 살펴보는 거야. 아직은 의심스러우니까. 그녀는 드 부르그 형제들의 경계선 밖에서 살펴보고 스스로 알아내자고 다짐했다.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늑대와 마리온의 관계였다. 결혼한 부부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잔인하게 어머니를 괴롭혔다는 것과 강제로 한 자신의 짧은 결혼 생활 말고는 아는 것이 없었다. 마을의 남녀가 어울리는 것은 많이 보았다. 자유민은 자유민끼리, 농노는 농노끼리. 하지만 그런 사람들의 부부 생활은 거칠고 냉담했다.

    그러나 던스탄과 마리온은 달랐다. 싸우고 언성을 높이기는 하지만 던스탄은 아내에게 손을 올린 적이 없었다. 그리고 마리온도 그를 피해서 움츠러들거나 숨는 법이 없고 마주 고함을 질렀다. 그렇게 싸우고도 언제나 뒤끝은 열렬한 화해의 장면이었다. 그것도 공공연히 화해를 하는 장면에 엘렌은 얼굴을 붉혔다.

    두 사람은 함께 있을 때는 한시도 서로 손을 떼지 않았다. 남모르게 어루만지거나 대놓고 쓰다듬었다. 눈으로만 쓰다듬는 경우도 있었다. 마리온은 킬킬거리지도 비명을 지르지도 않고, 남편의 부드러운 손길을 받으면서 가르랑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럴 때의 늑대는 조프리와 닮았다. 늑대도 그다지 나쁜 인간이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늑대는 퉁명스러우면서도 부드러웠고, 아내 시중도 잘 들었다. 엘렌은 그처럼 서로 주고받는 부부 관계에 경악했다. 더 놀라운 것은 마리온이 늑대를 놀릴 때였다. 그럴 때면 늑대는 활짝 웃거나 거친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조프리가 종종 자신을 놀리려 들 때와 똑같았다. 그것을 깨닫자 목에서 묘한 것이 치밀었다. 마리온이 남편을 놀리거나 심지어 비웃는 소리를 들으면 그녀는 놀라서 고개를 저었다. 그럴 때 늑대는 투덜거리거나 싱긋 웃었고, 조프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대체 무슨 요술을 부리기에 저렇게 마음대로 남편을 부릴 수 있을까? 저런 권력이 단순히 던스탄의 잠자리 시중을 열심히 들어서 된 것은 아닐 텐데. 엘렌은 마리온의 영향력이 놀랍기만 했다. 그래서 그녀가 어떻게 그런 힘을 얻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입지도 않을 드레스의 가봉을 마리온에게 맡긴 것도 그래서였다. 부드러운 천이 몸에 들러붙는 감촉이라든지 윤택한 색채와 마름질 잘된 모양새 같은 것을 눈여겨보지 않으려 애쓰던 엘렌은 마리온을 노려보다가 얼른 질문했다. “남편인 늑대를 어떻게 휘어잡고 있는 거죠?”

    마리온은 그 질문에 천천히 드레스 소매를 접으면서 싱긋 웃었다. “내가 그를 휘어잡는 유일한 수단은 사랑이에요. 나에 대한 그의 사랑, 그리고 그에 대한 나의 사랑.”

    엘렌은 크게 코웃음쳤다. 이 여자가 날 멍청이로 아나? 사람들을 움직이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권력인데. 육체적 힘이나 재산, 군사력, 혹은 비밀을 쥔 데서 오는 권력 같은 것. 애매 모호한 감정 따위가 아니란 말이야. “당신 재산 때문이에요?”

    “아뇨, 만일 그랬다면 던스탄은 내가 막대한 유산을 상속할 여자라는 것을 알았을 때 즉시 결혼했을 거예요. 하지만 그러지 않았어요. 나중에야 안전하게 보호한다는 명목을 내세워 결혼했죠. 하지만 이미 날 좋아하고 있었어요. 단지 자신의 사랑을 깨닫지 못했을 뿐이죠. 사람들에 따라서는, 특히 고집스러운 사람들은.....” 마리온은 보조개 팬 미소를 떠올리며 엘렌을 보았다. “자신이 갖고 있는 애정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해요.”

    엘렌은 다시 한 번 코웃음쳤다. 마리온은 정말 멍청한 여자인가 봐. “그렇다면 대체 어떤 방법으로 휘어잡는 거죠? 늑대가 욕망에 사로잡힐 때마다 당신 몸을 던져서?”

    마리온은 명랑하게 웃음을 터뜨리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엘렌은 마리온의 눈을 피했다. 뺨에 홍조가 피어오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턱을 내리고 머리칼로 얼굴을 가렸다.

    “몸을 던진다구요?” 마리온이 물었다. “침대 생활의 즐거움을 그런 식으로 생각해요?”

    엘렌은 온몸이 후끈해졌다. 즐거움이라니? 이 여자가 정말 제정신이 아니군. 엘렌이 대답하지 않자 마리온의 커다란 눈동자에 근심이 가득했다. “설마 도련님이 동서를 다치게 한 건 아니죠?”

    엘렌은 경멸의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할 수나 있겠어요, 손을 대는 날에는 내가 가만두지 않을 텐데!” 그 말에 마리온은 충격을 받고 놀란 얼굴이었다. 하지만 마리온은 아무 말 없이 다시 드레스 가장자리를 매만지기 시작했다. 그 동안 엘렌은 그녀의 검은머리를 내려다보았다.

    이윽고 마리온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난 보통 여자들처럼 결혼 첫날밤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어서 운이 좋았어요. 이 말을 들으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결혼 전에 이미 던스탄에게 나를 내주었거든요. 그를 사랑했어요.”

    엘렌은 놀라 눈을 깜빡거렸다. 결혼 전에 자진해서 남자하고 잤단 말인가?

    “염치없는 짓이었다는 건 인정해요. 처음에는 나도 던스탄을 경멸했어요. 내가 싫다는데도 삼촌에게 끌고 가고 있었으니까요.” 마리온은 꿈꾸는 듯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그의 존재가 내 마음속에서 점점 커졌어요. 그러면서 난 오만한 그의 모습 밑에 무척이나 외로운 한 남자가 숨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내게 그가 필요한 것처럼 그에게도 내가 필요했죠.”

    엘렌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목이 막힌 소리를 냈지만 마리온은 무시하면서 할 일만 계속했다. “그의 키스와 손길을 애타게 바랐어요. 너무 뜨거워서 태울 것만 같은 그의 정열을 갈망했어요.”

    엘렌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마리온을 바라보았다. 마리온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솔직히 말해도 언짢지 않죠?” 엘렌은 흥분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해서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마리온은 침대 속에서 늑대가 어떻게 해야 가장 기분이 좋은지, 두 사람이 즐겨하는 갖가지 체위의 장점들을 설명했다.

    설명이 자세해질수록 엘렌은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눈앞에서 여러 가지 영상들이 춤을 추었다. 조프리가 주인공이 되어 포즈를 취하는 장면들이었다. 그 영상들이 얼마 전의 기억과 뒤엉켰다. 그가 자신의 손을 잡아서 그의 아랫도리로 가져가던 날의 기억.... 그는 다급하게 속삭이면서 그녀의 손길을 애원했다. 빼어난 기사이자 학자인 조프리가..... 하지만 그 영상 속에 누군가 다른 영상이 끼여들었다. 야비한 영상. 그 영상이 조프리의 영상을 지워 버리며 분노와 공포와 피만이 떠올랐다. “안 돼!”

    엘렌은 자신의 비명소리에 깜짝 놀랐다. 길게 터져 나온 비명 소리는 평소 자신의 신랄한 목소리와 너무나 달랐다. 마리온이 놀라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것이 어렴풋이 보이더니 아기가 깨어 우는소리가 들렸다.

    “왜 그래요, 엘렌?” 마리온이 근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내 말이 좀 지나쳤나요? 결혼한 여자들이니까 그런 것쯤......”

    “가서 우는 아이나 달래요! 날 내버려둬요!” 엘렌이 소리쳤다. 아기가 운 것이 다행스러웠다. 마리온이 한 이야기들을 새삼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이상하고 두려운 갈망으로 머리 속을 어지럽히고 싶지 않았다. 아니, 자신을 나약하게 만드는 그 어떤 것에도 마음을 어지럽히고 싶지 않았다. 나는 절대 나약하지 않으니까. 나는 피츠휴 가의 딸 아닌가.

    그녀는 거의 완성된 드레스를 팽개쳐 버리고 뛰쳐나와 자신의 방으로 성큼성큼 걸었다.

    마리온은 아기와 함께 오두마니 방안에 남아 우는 아이를 달랬다. “울지 마라, 얘야.”

    아기는 평소와 다른 엄마 목소리에 어리둥절한 듯 조용해졌다. 마리온은 깊이 한숨을 쉬었다. 가슴이 실망으로 뻑뻑해졌다.

    “내가 뭘 잘못했기에 저러지?” 그녀는 품안의 아기에게 물었다. “도우려고 했을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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