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엘렌은 성안을 이리저리 걸어다니면서 새벽이 온 지 얼마 되지 않는데도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것을 보고 놀랐다. 커다란 홀 안을 지나가는데 하인이 사과 한 개를 건넸다. 그녀는 놀란 눈으로 한참 사과를 내려다보았다. 이 사람들은 내가 누군지 모르나? 그렇다면 내가 누군지 보여 줘야지. 그런데 왠지 소리지르고 싸울 생각이 들지 않았다. 게다가 배가 고팠다. 어제도 두 끼를 걸렀다. 몇 달 사이에 몸무게가 부쩍 줄었는데 더 이상 말라선 안 된다. 체력이 있어야 버티지.
그녀는 말없이 하인에게 고갯짓을 해서 답례를 보냈다. 그러자 하인이 달려가더니 사과뿐 아니라 치즈 한 덩이와 빵까지 가져왔다. 엘렌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음식들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이 살던 곳에서는 식사 때말고는 아무도 창고에서 음식을 꺼내 먹지 못했다. 물론 아버지를 제외하고. 오랫동안 눌러온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미움이 새삼스레 솟구쳐 음식을 빼앗아 들었다.
“날이 맑고 상쾌하대요. 성 꼭대기에서 식사하고 싶으시면 말입니다.” 하인은 덧붙이고 나서 서둘러 걸어갔다.
엘렌은 그 자리에 서서 하인이 한 말을 생각해 보았다. 혹시 성 위에 올라가면 늑대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를 성 아래로 밀어버릴 작정으로?
알아볼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다.
몇 번 모퉁이를 돌다 보니 지붕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였다. 꼭대기에 도착해 보았지만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경비병 한 사람 밖에는. 경비병은 이곳에 올라오는 사람들에게 익숙한 듯 고개만 끄덕였다. 엘렌은 놀라서 눈을 깜박거렸다. 아버지 밑의 병졸들은 모두 믿음직스럽지가 못했다. 그래서 일부러 보란 듯이 단도를 끄집어내고 경계하는 눈으로 바라보면서 음식을 먹었다.
하지만 그는 곧 돌아서서 저쪽으로 가버렸다. 그녀는 조금 긴장을 풀고 영지를 내다보았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놀라 숨을 들이쉬었다. 푸른 초원에 아침이 깃들이면서 저 멀리 펼쳐진 구릉과 숲 너머로 햇살을 던지고 있었다. 조물주가 온 세상을 쓰다듬는 듯했다.
전에도 일찍 일어난 적은 많았지만 경치를 감상한 적은 없었다. 그리고 경치를 감상할 기회도, 그럴 생각도 없었다. 뭔가를 보고서 경외감에 사로잡힌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떠오르는 햇살이 그녀의 눈을 아프게 찔렀다. 그녀는 눈을 깜빡거려서 물기를 지웠다.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지금까지 보아온 어떤 것보다 아름다웠다. 조프리말고는.
베어 문 사과가 목에 걸려 바닥에 뱉어 버렸다. 그런 생각은 위험해. 누군가 등을 공격해 오지 않을까 경계해야 하는 판에 경치 감상이나 하는 것도 시간 낭비야. 이곳은 늑대의 성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해. 아무리 경치가 아름다워도 웨섹스 성은 나에게 한을 안겨준 곳이야. 아버지는 이곳이 지닌 매혹적인 분위기에 홀렸다가 결국 파멸했어. 뿐만 아니라 나를 제물로 바치기까지 했어.
하지만 잠에서 깨어 북적거리는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자 평소처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 상쾌한 아침 바람, 그리고 구릉 너머로 반짝거리는 햇살들 모두가 평소의 경계심을 앗아간 듯했다.
그녀는 자나깨나 경계를 하면서 살아야 하는 삶에 염증이 났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행동을 지켜보면서 혹시나 음모나 모략이 있지 않을까 의심하는 데도 진력이 났다. 이번 한 번만은 조용히 앉아 풍경을 만끽하고 싶었다. 성안에 들끓는 갈등과 자신 안에 들끓는 혼란에서 벗어나서.
그렇게 결심하고 나자 묘한 평화가 마음속에 깃들이었다. 왠지 익숙한 듯한 평화로움이 느껴졌다.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행복을 맛본 기억이 없었다. 하지만 전에도 꼭 이런 기분을 맛본 적이 있는 것만 같았다. 그것도 최근에. 그녀는 눈을 감고 기억을 더듬어 보다가 번개처럼 떠오르는 생각에 놀라 몸을 폈다.
이렇게 마음 느긋했던 유일한 기억은 바로 오늘 새벽이었다. 남편의 침대에서 따스하고 안전하다는 느낌을 안고 눈을 떴을 때..... 이 멍청이! 그녀는 엉뚱한 생각을 한 자신을 비웃으면서 막연한 갈망 같은 것이 피어오르는 것을 무시해 버렸다. 조프리 때문에 생긴 갈망인 듯했다. 그녀는 얼른 먹던 음식으로 눈을 돌렸다.
대충 끼니를 때운 그녀는 식사 자리를 피해 혼자 시간을 보냈다. 늑대도, 보조개 패는 그의 아내도, 조프리도 보고 싶지 않았다. 그의 키스가 떠오르자 뺨이 후끈 달아올랐다. 그래서 아예 피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꼭대기에서 내려와 성안을 이리저리 걸어다니며 큰 성들을 그린 그림도 보고 웨섹스보다 더욱 화려한 성의 이야기도 들었다. 웨섹스는 작고 낡아빠진 성일 뿐이라고 자신을 타일렀지만 저도 모르게 찬탄하는 심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마리온은 이 성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려고 무척 애쓰는 듯했다. 벽에 걸린 태피스트리나 푹신하고 예쁜 베개가 늑대의 솜씨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위층에 있는 넓은 방에서 사람들 목소리가 들려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열린 방문 쪽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방안에 조프리가 보였다. 한 순간 그녀는 그의 모습에 넋이 빠졌다. 까무잡잡하고 핸섬했다. 하지만 늑대의 커다란 덩치가 흘끗 보이자 얼른 그늘 속에 몸을 숨겼다. 그래도 문 앞을 떠나지는 못했다. 엿보고 엿듣는 것쯤 익숙하게 해온 일이었다. 누군가 배신하지 않을까 살피는 데는 최고였으니까. 그녀는 몸을 앞으로 쑥 빼고 귀를 기울였다.
그 보답으로 늑대의 깊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아예 이리 와서 살지 그러니, 조프? 그렇게 하면 네 형수도 좋아할 게다. 형수가 너희를 얼마나 보고 싶어하는지 알잖아.”
“보살필 아기가 생겼는데 험상궂은 시동생들 낯짝을 보고 싶어할 리가 있겠어.” 조프리가 가볍게 대꾸했다.
늑대가 코웃음을 쳤다. “나도 네가 있는 건 상관없어.”
조프리가 싱긋 웃자 흰 이가 보기 좋게 반짝거렸다. “고마워, 형. 어쨌든 기분이 좋네. 더구나 형이 한때는 형제들하고 떨어지지 못해 애쓴 걸 생각하면 말이야.” 늑대가 과거사는 듣기 싫다는 듯이 투덜거렸지만 조프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조금 정색을 했다. “고맙긴 하지만 장원에 할 일이 많아서 올 수 없어.”
늑대가 뭔지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리며 툴툴거렸다. “할 일이라면 먼저 네 아내부터 시작해라.” 엘렌은 긴장해서 벽의 그늘 속에 깊숙이 몸을 숨겼다. “최소한 목욕이라도 하게 할 수는 없는 거냐?”
조프리는 재미있다는 얼굴로 입술을 씰룩거리면서 몸을 돌렸다. “안 될 거야. 엘렌에게도 나름대로 생각이 있을 테니까.” 그는 그 말을 하고 나서 방안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넌 바로 그게 문제야, 조프!” 늑대가 소리쳤다. “그 여자한테는 엄한 사람이 있어야 해. 사이먼이라면 잘했을 텐데......”
조프리가 홱 돌아섰다. 엘렌은 그가 형을 노려보는 무서운 표정에 놀랐다. 그가 형만큼 위험한 남자로 보였다. 아니, 더 위험한지도 모른다. “아니.” 그는 격한 어조로 말했다. “엘렌은 하늘이 내리고 내가 택한 아내야.”
눈을 깜빡거리던 엘렌은 그의 낮은 목소리에 발이 휘청거렸다. 그의 목소리가 뜨거운 쇠몽둥이처럼 그녀를 후려쳤다. 영영 사라졌다고 생각한 그녀 속의 어떤 것들이 욱신거리면서 타올랐다. 그녀가 넘어지지 않으려고 벽에 기대는데 늑대가 놀라 흠칫하는 것이 보였다. “맙소사, 조프, 너 꼭 그렇게 고고한 척해야겠니?”
조프리는 쿡쿡 웃었다. 험상궂었던 얼굴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래, 맞아. 엘렌도 날 조프리 성자라고 부르더라니까. 그러니까 형도 성자 앞에서 공손해야지.”
늑대는 숨이 막힌 얼굴이더니 동생의 농담에 어지럽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럼 대신 정부를 두든지.”
조프리는 몸이 굳었다. 엘렌도 훅 하고 숨을 쉬었다. 정부라고! 영주들이 아내 말고 다른 여자들을 거느린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조프리는.......
엘렌은 그가 한 여자에게 강렬한 관심을 갖는 것을 상상해 보았다. 몸이 떨렸다. 조프리가 다른 여자에게 관심을 가지면 자신이 그를 두려워할 일이 덜어진다고 생각해 보았지만 그래도 위안이 되지 않았다. 조프리와 마리온의 수상쩍은 관계만 해도 마음이 불편한데 정부라니.....! 엘렌의 목덜미에 묘한 한기가 밀려들면서 온몸이 싸늘하게 식어 버렸다. 그녀는 뼛속까지 차가워진 느낌으로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니.” 조프리는 차갑게 대답했다. “형도 형수님을 놔두고 정부를 두고 싶지 않듯이, 나도 마찬가지야.” 부드럽지만 조소가 어린 목소리였다. 엘렌은 떨리는 한숨을 토했다. 안도감이 몰려들어 벽에 등을 기댔다. 그런데 등뒤에서 뭔가 가만히 부스럭대는 소리에 놀라 몸을 일으켰다. 남편에게 정신을 파느라 주위 상황을 깜빡했다. 하지만 이곳에는 온통 적뿐이라는 것을 곧 기억해 냈다. 그녀는 허리를 굽혀 스커트 밑에 숨겨 둔 단도에 손을 얹고 홱 돌아섰다.
마리온이 서 있었다. 엘렌이 겁을 주려고 코웃음을 쳐도 마리온은 꿈쩍 않고 싱긋 웃었다.
“엘렌! 만나서 다행이에요.” 마리온은 낮고 은밀한 목소리로 말했다. 엘렌은 멍하니 눈을 깜빡거렸다. “내 방으로 같이 가요. 오후에는 늘 거기서 바느질을 하거든요.”
엘렌은 남자들이 있는 방을 흘끗 보았다. 하지만 마리온은 이미 돌아서 가고 있었다. 그녀는 서둘러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마리온은 엘렌을 이끌고 널찍한 방으로 들어갔다. 엘렌의 장원에 있는 방보다 두 배는 큰방이었다. 마리온이 이 방에도 솜씨를 부린 듯했다. 밝은 색깔의 베개와 안락해 보이는 의자가 길고 좁은 유리창으로 스며드는 햇살을 받을 수 있도록 그쪽을 향해 놓여 있었다. 엘렌은 문득 가슴을 찌르는 질투를 눌러 버렸다.
그리고 방안을 서성거리다가 걸음을 멈추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태피스트리의 가장자리를 만져 보았다.
“맘에 들어요?” 마리온이 물으면서 태피스트리를 들어 보였다. 엘렌은 놀라 신음 소리가 나오는 것을 눌렀다. 녹색 풀밭 위에 거칠고 대담한 선으로 늑대가 수 놓여 있고 배경으로 웨섹스 성이 미완성인 모습으로 높이 솟아 있었다.
“아뇨.” 엘렌은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태피스트리를 잡은 손을 놓고 지나가 버렸다. 마리온의 재능에 형언할 수 없는 분노가 치솟았다. 하지만 마리온은 자신의 모욕에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마리온은 엘렌에게 고갯짓으로 의자를 가리켜 앉으라는 시늉을 하고는 자신은 낮은 방석 의자에 앉았다.
“재봉을 해보고 싶어요?” 마리온이 물었다.
“별로.” 엘렌은 대답하면서 문득 조잡스러운 자신의 옷에 생각이 미쳤다. 재미있어서 옷을 만든 게 아니라 만들어 입어야 하니까 만들었다. 게다가 솜씨조차 없었다. 하지만 난 옷 만드는 것을 거들어 줄 하인이 없잖아. 부유한 늑대의 응석받이 아내처럼 말이지. 그녀는 속으로 신랄하게 중얼거렸다. 나를 돕고 보호해 줄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
“얼마나 오랫동안 거기 있었어요?” 마리온이 물었다.
“어디요?” 엘렌은 갑자기 화제가 바뀌어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방문 앞에.”
엘렌은 놀라 눈을 깜빡거리다가 코웃음을 날렸다. “꽤 오래.”
마리온은 한숨을 쉬었다. “그렇다면 이야기를 들었을 테니 남편을 대신해 사과할게요. 남편은 모든 것이 이거 아니면 저거 하는 식이고, 만사를 분명하게 자르길 좋아해서 어중간한 것은 못 참아요.”
엘렌은 혼란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않고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리온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남편이 그런 일을 권하는 게 아닌데, 더구나 조프리 도련님한테.” 마리온이 설명하면서 입가를 찡그렸다.
엘렌은 의자 뒤로 물러나 앉아 얼굴을 가린 머리칼 너머로 마리온을 바라보았다. 이 여자는 동생에게 정부를 얻으라던 늑대의 말이 싫었나 보군. 그렇기도 하겠지. 자신이 조프리의 정부가 되고 싶을 테니까! “내 남편은 당신에게 마음이 있으니까 정부 따위가 필요 없죠.” 엘렌이 딱 잘라 말했다.
마리온은 숨막히는 얼굴로 오랫동안 그녀를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사랑스럽고 맑은 웃음소리가 방안을 가득 메웠다. “도련님과 내가? 말도 안 돼요! 물론 도련님과 나는 서로 사랑해요. 하지만 그건 사이 좋은 시동생과 형수의 사랑일 뿐이에요.”
엘렌은 의심스러워 눈을 가늘게 떴다. 내가 늑대의 아내를 믿을 이유가 어디 있어?
마리온은 계속 재미있어하는 얼굴을 하다가 깊게 숨을 쉬었다. “2년 전에 조프리와 사이먼 도련님이 길에서 날 발견했어요. 난 다친 몸이었고, 두 사람이 날 캠피온 성에 데리고 갔죠.” 그녀는 아련한 기억을 더듬듯이 싱긋 웃었다. “그곳 형제들은 난폭한 전사들인데도 날 누이처럼 대해 주었어요. 그들에게 난 정말로 누이였죠. 내 말이 믿어지지 않으면 형제들 아무한테나 물어 봐요. 내가 떠날 때가 되어서 아버님이 누가 나하고 결혼하겠느냐고 물었는데 아무도 날 아내로 맞겠다는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엘렌은 그녀가 왜 거절당했는지 궁금했다. “왜죠? 왜 아무도 당신을 아내로 맞지 않으려고 했죠?” 그녀는 작고 날씬한 마리온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숨겨진 약점이라도 있나 해서.
“그들 형제는 모두 독립심이 강해요. 자신들의 생활 방식에 파묻혀 변화를 두려워했죠. 특히 결혼처럼 돌이킬 수 없는 변화는!” 마리온은 웃음을 터뜨렸다. “커다란 무사들이 결혼 같은 간단한 일을 무서워하면서 몸을 움츠리는 것을 보자 재미있었어요. 정말 쥐구멍을 찾더라구요. 그리고 그들은 명예를 소중히 여겼죠. 아내 감이 아무리 많은 유산을 상속할 여자라 해도 사랑하지 않으면 아내로 맞을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정색하고 말하는 바람에 엘렌은 그녀를 험악하게 노려보았다. “조프리는 아니었죠.”
마리온은 잠깐 주저했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듯이. “그래요.”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왕의 명령이 도착했을 때 나도 거기 있었어요.” 그녀는 잠깐 엘렌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엘렌은 속으로 찔끔했다. “하지만 조프리 도련님 이상 가는 상대는 없었을 거예요. 가장 현명하고 학식이 많은 사람이니까. 또한 가장 부드럽고 친절하죠. 난 내 인생도 그렇지만 모든 인생사는 하느님의 손길에 따라 움직인다고 생각해요.”
엘렌은 하느님을 들먹이는 그녀의 말에 흠칫했다. 그녀 자신도 오늘 아침에 하느님의 손이 땅 위로 태양을 굴리는 상상을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마를 찡그리며 마리온을 노려보았다.
“비록 강제로 이루어진 결혼이라 해도 마음먹기에 따라서 당신 좋은 쪽으로 풀릴 수도 있어요. 조프리 도련님은 멋진 남자예요. 그리고 당신을 좋아하게 된 것이 분명해요......”
엘렌은 코웃음치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날 참아 주는 것뿐이에요. 그 이상은 아니라구요!” 그녀는 그런 바보 같은 소리를 믿기 싫어 소리쳤다. 정체 모를 통증이 다시 덮쳐왔다. 맙소사, 내가 왜 이러지? 정말 병이라도 난 걸까?
“좋아요.” 마리온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 이야기는 더 하지 않겠어요. 어쨌든 이리 와요, 줄 게 있으니까.” 그녀는 커다란 옷궤 앞으로 걸어가더니 둘둘 만 옷감을 꺼냈다. 엘렌은 호기심에 다가갔다가 윤나는 녹색 천을 보고 숨이 막혔다. 서둘러 숨을 토해내는데 마리온이 아름다운 노란 실크를 꺼내서 펼쳐놓았다.
“뭐 하는 거예요?” 엘렌이 쏘아붙였다.
“두 가지면 되겠어요.” 마리온은 엘렌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 말했다. 그리고 옷궤에 더 깊이 손을 넣었다. 엘렌은 옷궤 전체가 천과 모피로 가득한 것을 보았다. “아, 그리고 이거!” 마리온이 소리치면서 자수가 가득 놓인 묵직한 흰 리넨을 꺼냈다. “그래, 이거면 당신 머리하고 아주 잘 어울릴 거예요!”
“뭐라구요?”
“시종들을 시켜서 새 드레스를 만들어 주게 할게요. 물론 나도 거들어야죠!” 마리온이 말했다.
엘렌은 너무 놀라 할말을 잃었지만 곧 의혹이 피어올랐다. 세상에 대가가 없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떴다. “왜요?”
마리온은 놀란 얼굴이었다. “왜는요, 당신은 드 부르그 가문과 결혼한 사람이니까 좋은 옷 몇 벌은 가지고 있어야죠. 조프리 도련님도 그 생각을 했겠지만 지금은 장원의 일에 너무 바쁜 모양이에요.”
엘렌은 유혹적인 옷감 앞에서 뒷걸음질쳤다. 마리온은 내게 옷치장을 시켜서 조프리에게 어울리는 아내로 만들려는 것일까? 하지만 나는 남편의 가족이나 재산에 대해서 아무 관심도 없어. 비웃고 싶으면 비웃으라지. 악당 같은 자들을 흐뭇하게 해줄 생각은 절대 없으니까!
“난 그런 것 필요없어요.”
마리온의 미소가 흔들렸다. “하지만 난 이 예쁜 천들이 소용없어요. 던스탄은 이런 것들을 내게 주고 싶어해요. 물론 내 돈을 보고 결혼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자신의 금고에 보태 준 것을 생각하면 언짢은가 봐요. 그래서 자주 선물을 주죠. 언짢은 기분을 달래려고.”
엘렌은 아름다운 녹색 옷감을 내려다보고 코웃음쳤다. 자신이 이제까지 가져본 어떤 것보다 훨씬 좋은 옷감이었다. 아버지가 입던 옷감보다도 좋은 듯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갑자기 그것을 갖고 싶은 반항적인 기분이 들었다. 아버지의 기억에 복수하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마리온을 흘끗 보았다. “그런데 그걸 왜 하필 나한테 주려고 하죠?”
마리온이 다시 싱긋 웃었다. 양 뺨에 보조개가 팼다. “내 동서니까 주죠! 내 평생 얼마나 가족을 갖고 싶었는지 당신은 모를 거예요. 드 부르그 형제들이 날 받아 주고 거처를 마련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 생활에 한자리를 차지하게 해주었어요. 물론 모두가 거칠고 퉁명스러운 기사들이긴 하지만 하나하나 보면 모두 선량한 마음씨에 특별한 존재들이에요.” 마리온은 진실을 담아 반짝이는 암사슴 같은 눈으로 엘렌을 바라보다가 문득 눈에 고인 물기를 지우고 경쾌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던스탄과 결혼한 뒤에도 형제 가운데 누군가 얼른 결혼해서 내 친구가 생기길 바랐어요. 나와 같이 생활할 레이디가.”
엘렌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친구라고? 나는 친구가 있어 본 적도 없고, 누군가의 친구 역할을 해본 적도 없어. 그리고 레이디라고? 지금까지 아무도 그렇게 불러 준 적이 없었다. 조프리말고는.
정체 모를 통증이 다시금 덮쳐 왔다. 아까보다 더욱 세차고 날카롭게. 엘렌은 자신이 드 부르그 형제들을 잘못 생각한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내가 처음 생각한 것처럼 땅에 걸신들린 탐욕스러운 인간들이 아니라 점잖은 남자들인지도 모른다. 특히 그 가운데 한 사람은 친절하고 선량하고 학식 높은 사람일 수도..... 그때 갑자기 아기의 울음소리가 머리 속을 헝클어뜨렸다. 엘렌은 멍하니 쓰다듬고 있던 실크 옷감에서 손을 떼었다.
“아, 아기가 깼군요.” 마리온은 아기의 울음소리가 점점 더 커지는데도 끄떡하지 않고 태평하게 말했다. “게다가 아버지처럼 폐가 튼튼한 것 같아요!” 그녀는 벽난로에서 멀지 않은 요람으로 걸어가 아기를 안고 달랬다.
늑대의 아들이지. 엘렌은 중얼거렸다. 기분이 다시 씁쓸해졌다. 지금은 비록 작고 약하지만 이 아기도 그의 아버지나 삼촌들과 다를 것 없는 남자로 자라날 것이다. 엄청나게 크고 무서운 드 부르그 가 남자가 되리라. 정말 그럴까? 이윽고 아기가 어머니의 품안에서 조용해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기에게 미움은 솟아나지 않았다.
엘렌은 경계하듯 아기를 바라보았다. 아기를 본 적이 별로 없었다. 주위의 아기 어머니들이 악명 높은 자신한테서 제 아이들을 멀리 떼어놓았기 때문이다. 엘렌은 아기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아기의 작은 얼굴과 완벽하게 갖추어진 작은 손을 보았다.
“늘 배가 고픈가 봐요, 꼭 제 아버지처럼.” 마리온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하고는 엘렌이 앉았던 의자에 앉았다.
마리온이 아기를 어르면서 달래는 것을 보자 엘렌은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엘렌은 묘한 상실감과 아쉬움이 자신을 덮치자 젖을 먹기 시작하는 아기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떨리는 숨을 깊게 쉬었다. 조용해진 방에서 숨소리가 크게 울렸다. 도망가야 해. 아기에게서, 늑대의 이상스러운 아내에게서, 그리고 웨섹스 성에서. 그녀는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기다가 마리온의 목소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여기 앉아서 당신 조카에게 젖먹이는 동안 같이 이야기해요.” 마리온이 재촉했다. “동서랑 좀더 친해져야죠.”
동서! 엘렌은 쓴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애써 눌렀다. 조카. 남편. 모두가 말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 뜻 없는 말. 현실적으로 보면 그들과 자신은 아무런 혈연 관계도 없었다. 엘렌은 발길을 돌렸다. 마리온이나 자신의 울타리에 얌전히 남아 있으라지. 건강한 아기, 너그러운 남편, 형수를 사랑하는 시동생들, 그리고 부와 사치까지 갖추어진 울타리에서. 마리온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살기 때문에 인생이 정말 어떤 것인지 모른다.
그래서 미웠다.
마리온은 불쑥 방을 나간 자신에게 화가 났을 텐데도 내색하지 않았다. 그리고 평소처럼 행복한 얼굴이었다. 엘렌은 마리온처럼 명랑하기만 한 사람은 처음 보았다. 늑대가 아내를 대하는 태도도 끊임없이 놀라움을 안겨 주었다.
퉁명스럽게 굴고 가끔 커다란 곰처럼 으르렁대긴 해도 그는 가장 맛있는 부분은 아내에게 먹여 주고 몸을 굽혀 뭔가를 속삭이곤 했다. 들으면 기겁할 정도로 은밀한 내용일 것 같았다. 그러고는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아내와 아들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엘렌은 눈을 가늘게 뜨고 늑대를 바라보았다. 새로 아기 아버지가 된 사람들은 다 저러나? 아들이라 그럴 것이다. 그러나 딸일 경우에 아기는 성의 한구석에 처박히고 불만스러운 얼굴을 한 하인이 아무렇게나 돌본다. 그러다가 죽으면 차라리 다행이다. 드 부르그 형제만 봐도 그렇다. 여자 형제라고는 아예 없지 않은가.
하지만 불만스러운 얼굴의 하인이 아무 데도 보이지 않았다. 마리온이 아기를 쉽게 내주는 것도 상상이 가지 않았다. 마리온은 어딘지 이상한 데가 있었다. 겉으로는 따스하고 명랑해 보여도 그 속은 바위처럼 단단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엘렌은 그 생각을 하다가 코웃음을 쳤다. 마리온을 좋아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응석받이에 멍청이라는 생각을 바꾸고 싶지도 않았다.
그때 마리온이 엘렌의 눈길을 의식한 듯 커다란 암사슴 같은 눈동자를 굴리더니 남편의 팔에 작은 손을 얹었다. “아이, 참, 동서가 우리 아들 자랑하는 소리에 신물을 내겠어요.”
늑대는 그 동안 엘렌의 존재를 완전히 잊고 있었는지 눈을 깜빡거리더니 불만스러운 얼굴로 아내에게 이마를 찡그렸다. 하지만 마리온은 개의치 않았다. “형제들 이야기나 더 해줘요. 그래야 동서가 형제들을 구분할 것 아니에요.”
화기 애애하던 식탁 분위기가 갑자기 썰렁해지면서 여러 사람의 눈길이 엘렌에게 쏠렸다. 엘렌은 턱을 내리고 마리온을 노려보았다. 무엇 때문에 모두들 날 쳐다보게 한담?
조프리가 헛기침을 했다. “모두 만났어요, 형수님. 결혼식 때.”
엘렌은 형제들 따위 알고 싶지 않다고 말하려다가 어딘지 피곤한 듯한 조프리의 어조에 입을 다물고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까무잡잡한 얼굴이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드 부르그 형제들이 처음 만난 사람한테 얼마나 심술궂은지 알잖아요!” 마리온이 항의했다. “겉으로는 그렇지 않지만 모두들 장난도 얼마나 잘 치는데요. 아이들처럼.” 던스탄과 조프리가 입을 딱 벌리고 마리온을 바라보았다. 엘렌은 코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눌렀다. “물론 로빈이 가장 재미있죠. 장난하면 일가견이 있으니까 조심해요! 한 번은 내 침대에다가 밤을 가득 집어넣었다구요!” 마리온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 녀석이 당신 침대 옆에서 뭘 하고 있었지?” 늑대가 투덜거렸다.
조프리의 깊고 여유 있는 웃음소리에 엘렌은 그를 바라보았다. 얼굴을 뒤로 젖히고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이 너무나 핸섬하고 무사 태평해 보였다.
“로빈이 당신까지 괴롭혔소, 마리온? 그 녀석은 몇 년 동안 내 침대에 안 넣은 물건이 없소. 예수님이 쓰신 물잔만 빼놓고는 모두 다. 한 번은 가엾은 니콜라스에게 성 그레고리의 정강이뼈가 자신의 베개 속으로 들어왔다고 속이더라구.”
식탁 맞은쪽에서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서 엘렌은 늑대를 바라보았다. 그는 고개를 젖히고 요란스럽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마태 성인이 처음 가졌다는 동전 같은 것!” 조프리가 덧붙였다.
“매끌매끌한 자갈을 갖고 말이야!”
“스티븐이 옆에서 동전에 새긴 초상이 닳아 없어져서 그런 거라고 거들어 주었거든.”
“스티븐이요?” 마리온이 다그쳐 물었다. 바보 같은 이야기들인데도 모두 넋이 쏙 빠진 모습이었다. 엘렌은 얼굴을 찡그렸다.
“그래요. 언제나 스티븐이 꾸민 짓이었다구요. 불쌍한 로빈과 동생들을 꼬여서 가짜를 팔고 대신 동생들 물건을 빼앗거나 아니면 할 일을 대신 시켰죠.” 조프리가 설명했다.
“그 동생들에 너도 포함된 거냐?” 늑대가 싱긋 웃자 얼굴윤곽이 완전히 달라졌다. 엘렌은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조프리도 쿡쿡 웃었다. “좋아, 고백하지. 웅변의 성자인 존 크리소스톰의 발톱이라고 보여 주기에 내가 밤참으로 먹을 푸딩을 주었지!”
마리온의 웃음소리가 남자들의 깊은 울림 있는 목소리에 가세했다. 엘렌은 미소짓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대신 이마를 찡그렸다.
“영리한 스티븐 녀석, 장사 놀이하느라 꽤 바빴군 그래.” 늑대가 말했다.
조프리의 미소가 사그러들었다. “그것도 레이놀드에게 셈프링햄의 길버트 것이라면서 이빨을 팔려는 것을 아버지한테 들키기 전까지지.”
“불구자의 성인인 길버트?” 마리온이 속삭이면서 겁이 난 얼굴을 했다.
“그래요.” 조프리가 대답했다. 세 사람의 유쾌한 분위기가 잠깐 주춤했다.
엘렌은 레이놀드를 기억해 보려 했다. 다리가 불구인 우울한 얼굴의 남자였던가? 전쟁터에서 부상을 입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선천적인 불구였구나. 그 생각에 그녀는 마음이 언짢았다.
“레이놀드도 빠지지 않죠. 언젠가는 내가 수놓던 실뭉치를 빼앗아서 이리저리 던지는 바람에 애먹었어요.” 마리온이 말했다. “그리고 당신의 바로 아래 동생이자 가장 용맹한 기사 사이먼도.....” 그녀는 남편에게 싱긋 웃었다. 늑대는 그녀의 말에 화가 난 얼굴이었다. “장난기 있기는 마찬가지예요.”
두 형제가 우습다는 얼굴로 마리온을 바라보았다. 그 표정에 엘렌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씰룩거렸다.
“그렇다니까요!” 마리온이 강조했다. 세 사람이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 엘렌은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살던 장원에서는 웃음소리를 듣기가 쉽지 않았다.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이 취미였다. 그런데 이 드 부르그 형제들은 별 것 아닌 이야기를 재미있어했다.
세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떠들든 무시해 버리려고 했지만 조프리가 재미있어하는 모습은 너무 매력 있게 보였다. 몸 속에서 뭔가가 꿈틀거렸다. 세찬 바람이랄까...... 그녀는 깜짝 놀라서 눈을 깜빡거렸다. 머리칼로 얼굴을 가리고 꼿꼿이 앉아있긴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그들 속에 끼여들고 싶은 감정이 일어 괴로웠다. 그들 가족의 일부가 되고 싶었다. 비록 그 모습이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이 모두가 자신의 발을 걸어 넘어뜨리려는 계략이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간신히 마음을 다잡고 그들 형제의 모습을 몰아냈다. 너무나 친밀해 보이는 그들의 분위기가 유혹적이었지만 그것도 물리쳤다. 그러고는 턱을 내리고 맹렬하게 노려보았다. 적개심이 든 탓도 있었다. 질투란 자신에게 낯선 감정이었지만 받아들였다. 남편과 그의 가족을 멀리하기 위한 방편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을 믿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인생이란 너무나 힘든 여정이다. 예쁜 미소와 재미있는 이야기밖에 없는 마리온 같은 여자는 꿈에도 모를 위험과 두려운 일로 가득 차 있다. 엘렌은 방심하는 사람에게는 위험한 일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일찍부터 알았다. 그리고 오래 전에 맹세했다. 이 세상 그 누구에게도, 그 무엇에도 방심하지 않겠다고.
공연한 속임수에 넘어갈 생각은 없다. 핸섬한 얼굴이나 웃음소리에 넋 나가는 일도 절대 없을 것이다. 나는 인생을 헤치고 살아남은 사람이니까. 드 부르그 형제들 역시 헤치고 살아 날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