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와결혼하는법-8화 (8/18)

8장

조프리는 어깨에 매달린 엘렌을 돌아보지도 않고 계단을 올라갔다. 나도 마침내 한계에 다다랐어. 몇 달 동안 그녀의 거친 행동과 상스러운 말버릇, 그리고 정신병자 같은 협박을 참아 왔는데 이제는 더 이상은 못 참아. 그는 요란하게 방문을 열고 한 발로 차서 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누가 듣든지 상관하지 않고 몸부림치며 발길질을 해대는 여자를 침대 위로 팽개쳤다. 그녀는 대자로 나동그라졌다. 팔다리와 머리칼이 출렁거리며 얽혔다. 그녀는 함정에 빠진 맹수처럼 으르렁거리면서 침을 뱉었다.

그녀를 내려다보자 유창한 말솜씨를 발휘할 수가 없었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혐오감을 표현할 말이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입을 열었지만 정작 입 밖에 나온 것은 묘하게 귀에 거슬리는 소리뿐이었다. 그 소리는 던스탄이 투덜거리는 것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

맙소사, 누가 형제 아니랄까 봐! 그는 헛기침을 하고 다시 입을 열어 최대한 낮고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날 어떻게 대하든 그건 상관하지 않겠소, 엘렌. 하지만 감히 마리온을 해치려 들지는 말아요. 그녀는 순진하고 따스하고 자애롭고 부드러운 사람이오.” 당신하고는 하나부터 열까지 틀리지. 그는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적개심 가득한 엘렌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야생마 같은 그녀 앞에는 언제나처럼 소용없는 소리였다.

그는 욕설을 중얼거리면서 돌아섰다. 어느 쪽이 더 화가 나는지 알 수 없었다. 엘렌이 마리온에게 덤벼든 것이 화가 나는지 마리온에게 아내의 최악의 모습을 보인 것이 화가 나는지. 마리온이 자신의 괴로운 생활을 엿보았다고 생각하니 서서히 뺨이 달아올랐다. 다른 형제들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상관없었다. 형제들은 자신의 비밀스러운 갈망을 알지 못했고 사랑을 그리워하는 자신의 소원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마리온은 여자다운 직관력으로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능력이 있었다. 그녀의 동정만은 정말 받고 싶지 않았다. 그는 손가락을 틀어쥐었다. 뭔가 부수고 싶었다. 쳐부숴서 분노를 날려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온몸이 굳었다. 아내 탓이긴 하지만 방금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은 것이다. 이성을 잃었다.

그는 화가 나서 숨을 들이켰다. 자신은 다른 형제들과 다르다고 생각해 왔는데..... 가장 많이 교육받은 데다가 아버지 캠피온 백작이 당신을 닮았다고 하지 않았던가. 상스러운 욕설을 하거나 고래고래 소리친 일도 없고 취해서 혀가 꼬부라지는 일도 없었다. 전쟁터에서 즐거움을 찾는 피에 굶주린 전사도 아니었다. 그런데 아내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싶은 생각밖에 못했다니.....

“누가 뭐라고 하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예요. 내가 당신의 그 매춘부를 못마땅해한다고 해서......”

조프리는 홱 돌아서서 그녀의 말문을 막아 버렸다. 하지만 그녀는 반항적인 기개를 잃지 않았다. 침대 위에 무릎을 대고 일어나 그를 향해 단도를 겨누고 있었다. 역시 시작이었다. 저 칼로 위협받은 것이 도대체 몇 번이던가? 더구나 자신은 그럴 때마다 방관해 왔다. 이유는 모르지만 그녀에게 그 칼들이 꼭 필요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안 된다. 그는 잽싸게 몸을 날려 칼을 쳐서 떨어뜨리고 그녀의 가는 손목을 움켜잡았다.

“마리온은 내 매춘부가 아니오.” 그는 말하면서 그녀 위로 몸을 굽혔다. “마리온은 내 형수요. 당신은 뭐든 추악하게 만들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을 만큼 뒤틀려 있다는 것은 알고 있소. 하지만 감히 형수님을 나쁜 여자로 만들지 마시오. 형수님은 정말 착한 여자요. 우리 가족이 만난 최대의 행운이지. 그러니 오늘이 가기 전에 형수님에게 사과하시오.”

엘렌의 황갈색 눈동자가 겁에 질린 듯 크게 벌어졌다. 조프리는 곧 그녀의 손목을 놓았다. 그러고는 자신이 혐오스러워 침대 가장자리에 주저앉아 두 손에 머리를 묻었다. 엘렌은 그를 자신과 같은 수준으로 끌어내리고 있었다. 그는 지성과 상상력을 빌려 남은 평생 미친개처럼 싸우는 그녀와 자신의 모습을 눈앞에 그려보았다.

“다시는 나한테 손대지 말아요, 드 부르그.”

그녀의 목소리에 조프리는 고개를 들었다. 꿈이 분명했다. 꿈이 아니고서야 어깨 위로 칼날이 찔러 오는 느낌이 들 리 있겠는가. 제정신 아닌 여자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방금 그렇게 닦달을 당하고서도, 자신이 불만 붙이면 폭발할 지경이라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또다시 협박할 수가 있단 말인가. 조프리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돌아보았다. 믿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출렁거리는 매트리스에 위태로운 자세로 무릎을 짚고 일어나 새로운 단도를 겨누고 있었다.

“가까이 오지마.” 그녀가 경고했다.

조프리는 수많은 훈련과 기술로 다져진 재빠른 몸짓으로 그녀의 손에서 다시 칼을 빼앗았다. 하지만 성이 난 그녀가 덤벼드는 바람에 휘청거렸다.

“돌려 줘!” 그녀가 소리치면서 달려들었다. 그녀의 손이 얼굴을 할퀴는 순간 잽싸게 피했다. 하지만 날카로운 통증에 마주 소리쳤다.

“당신이 어린애처럼 굴지 않으면 주겠소! 버릇없는 어린애처럼 으르렁거리지 않고 어른답게 굴면 돌려주겠단 말이오! 언제쯤이면 당신 인생을 스스로 책임질 거요? 대체 언제쯤이면 아이들한테 겁이나 주고 내 머리를 아프게 만드는 짓을 하지 않고 당신의 의무를 다할 거요? 그리고 언제쯤이면 당신이 마땅히 해야 하는 여주인 역할을 해줄 거요? 언제 주방을 감독하고 당신의 집을 집같이 꾸며 놓을 거요?”

그녀는 한참이나 그를 노려보았다. 충격을 받은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입술을 벌린 채. 그러더니 얼굴을 한껏 찡그렸다. “당신이 떠나면 그렇게 하죠!” 그녀가 손을 비틀어 빼며 그의 가슴을 있는 힘껏 떠밀었다.

조프리는 몸의 균형을 잡으려고 뒷걸음질쳤다. 혼란스럽고 화가 났다. 그녀가 이성적으로 행동하도록 설득하지 못한 자신에게. 아냐, 저 여자는 이성이라고는 아예 없는 여자야! 그는 욕설을 중얼거리면서 뺨을 만져 보았다. 악마 같은 여자가 내 얼굴에 피를 내고 말았군!

“당신은 아직도 어린애니까 어린애 취급을 해줘야겠군. 엉덩이 좀 맞아 봐요!” 그는 즉시 행동에 옮겨 그녀의 손목을 움켜잡고 침대에 앉아서 허벅지에 엎어놓았다.

그런데 막상 무릎 위에서 고함을 지르고 발로 차는 그녀를 보자 망설여졌다. 그녀의 다리에 얹힌 자신의 손이 움직이려 들지 않았다. 보기 싫은 모직 드레스로도 감출 수 없는 그녀의 둥근 엉덩이에 눈길이 못 박혔다. 눈앞에서 고혹적으로 꿈틀대는 엉덩이를 내려다보자 서서히 피어오르는 열기에 차갑던 분노가 녹아 버렸다.

“가만 좀 있어요.” 그는 거칠게 속삭였지만 요란한 심장 고동 소리에 가려 들릴 듯 말 듯했다. 하지만 엘렌은 그의 말을 들은 척도 않고 계속 꿈틀거렸다. 그는 손을 내밀어 그녀를 누르려고 했다. 하지만 손바닥 아래 닿는 따스하고 부드러운 엉덩이 곡선에 숨이 막혔다. 분노는 사라지고 분노와는 다르지만 역시 위험하고 원초적인 그 무엇이 밀려왔다. 그녀의 엉덩이 아래 깔린 자신의 하반신이 용트림하는 것을 느끼고 그는 당황했다.

맙소사, 내가 왜 이러지! 이렇게까지 타락했단 말인가? 이런 못된 악녀에게 마음이 동할 정도로? 내가 폭력이나 협박 앞에 흥분하는 그런 인간이었단 말인가? 그는 겁에 질려서 손을 치웠다. 그러자 엘렌이 곧장 몸을 비틀고 일어나 앉아 똑바로 마주 보았다. 무릎 위에 앉은 그녀의 부드러운 엉덩이가 그의 딱딱해진 남성을 눌렀다. 핏줄이 요란하게 맥박치면서 그의 몸 속에서 뭔가 탁 하고 매듭이 풀렸다.

그녀가 소리지르려는 찰나 그는 자신의 입술로 그녀의 입술을 틀어막았다. 처음에는 조심스럽던 입술이 뜨겁고 필사적으로 변했다. 분노와 혐오감은 밀려오는 갈증 속에서 순식간에 까맣게 잊혀졌다. 그런 갈증은 난생 처음이었다. 그녀가 탐났다. 그녀가 필요했다. 숨넘어갈 듯한 욕망이 그를 불살랐다. 지성보다 강력한 본능은, 이 욕망을 달랠 수 있는 것은 야생마 같은 이 여자뿐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의 혀가 그녀의 입술을 핥으면서 그녀를 맛보았다. 축축하면서도 뜨거운 그녀의 입안에 혀를 들이밀자 승리감에 머리가 아찔했다. 그녀의 뒤통수를 손으로 받치고서 잡아당겼지만 그녀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후려칠 거라고 생각했던 주먹이 펴지더니 손바닥이 그의 가슴으로 올라와 목을 껴안았다. 그는 도저히 자신의 목소리라고 여겨지지 않는 소리로 낮고 깊은 신음 소리를 내면서 그녀를 돌려 안고 침대에 뉘였다.

“엘렌, 그래, 내 사랑, 키스해 줘요.” 그는 그녀 위에 몸을 얹고 자신의 몸무게로 그녀를 누르면서 그녀의 입술에 대고 재촉했다. “그래.....” 그녀가 입술로 자신의 요구에 답하자 그는 숨을 토했다. “그래......”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일은 이 달콤한 육체의 만남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조프리는 그녀의 탄력 있는 가슴이 자신의 가슴을 눌러오는 감촉에 다시 신음 소리를 토했다. 더 이상 걷잡을 수 없었다. 피가 끓고 아랫도리가 뜨겁게 조여들었다. 이렇게 빨리 뜨거워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는 둘 사이를 가로막은 옷들을 짓이기면서 그녀를 더욱 밀어붙였다.

평소 그는 여자와의 전희를 즐기면서 느리게 진행시키는 타입이었다. 자신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여자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뜸을 들였고, 순간의 열기 속에서 자신을 망각하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자신을 삼킬 듯한 욕구 속에 이성도 분별심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뜨거운 욕구 외에는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팔을 쓸어 내려가는 날씬한 손을 더듬어 찾아서 그 손을 아래로 끌어내려 흥분한 자신의 아랫도리를 덮었다. “날 만져 줘요, 엘렌.” 그는 속삭이면서 그녀의 손안에 자신을 더욱 밀어붙였다. “그래. 아, 그래!”

그는 눈을 감고 온몸을 치달리는 아찔한 쾌감에 숨을 몰아쉬었다. 미처 예기치 못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쾌감이었다. 하지만 순간적인 해방감은 느닷없이 사라졌다. 자신을 감싸던 따스한 온기가 사라지면서 몸 아래 눌려 있던 그녀가 빠져 나와 침대 아래로 굴렀다.

조프리는 한참 동안 꼼짝 않고 누워 있었다. 몸이 떨려서 제대로 생각을 정리할 수가 없었다.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그는 멍하니 눈을 깜박거리다가 눈을 떴다. 문가에서 허름한 드레스 자락이 보이고 뒤엉킨 긴 머리카락이 휘날리는 것이 보이더니 문짝이 열렸다가 요란하게 닫혔다. 그는 좁은 방안에 혼자 남았다. 그는 벌떡 일어나 앉아 떨리는 손으로 눈을 문질렀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내가 어떻게 된 거 아냐? 그는 자신의 행동에 충격을 받았다. 피츠휴 가의 전설적인 악녀 엘렌이 자신의 몸에 깔려서 키스에 답했다는 것도 충격이었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게다가 그녀의 손이 나의 아랫도리까지 어루만지다니..... 그는 신음 소리를 내면서 매트리스에 등을 묻었다. 엘렌은 상스러운 야생 동물이라고, 여자 옷만 걸쳤을 뿐 어린애에 지나지 않으며 자신이 경멸하는 것을 골고루 갖춘 여자라고 속으로 자신에게 꾸짖었다.

그런데 왜 지금 나는 기나긴 잠에서 깨어난 듯한 느낌일까? 몸과 마음이 진정으로 살아 있는 듯한 이런 느낌은 생전 처음이라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보다는 의문 자체를 무시해버렸다. 학자 기질을 지닌 그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는 심호흡을 하면서 속으로 결론 내렸다. 엘렌 때문에 잠깐 자제력을 잃었지만 심각하게 파고들 가치는 없는 문제라고. 오랫동안 여자를 접하지 못했고 그 동안 쌓였던 긴장이 풀려 잠깐 이성을 잃은 것뿐이라고. 잠깐 발작한 것뿐이라구. 그는 그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결론을 지었다.

엘렌을 찾아내서 조금 전의 행동을 사과해야 한다. 기사로서의 명예가 그렇게 다그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는 손을 들어 올려 얼굴에 난 긴 상처를 쓰다듬었다. 상처는 곧 낫겠지만 상처가 생긴 원인을 생각하면 얼굴이 찌푸려졌다.

평소와 다름없이 버릇없는 어린애처럼 행동하던 그녀가 갑자기..... 그는 얼굴을 붉히면서 혀에 닿던 그녀의 감촉을 기억했다. 자신의 밑에 깔려 있던 탄탄한 육체도 떠올렸다. 그러자 다시금 심장이 고동치기 시작했다. 그는 낮게 욕설을 중얼거렸다. 어떻게 내가, 드 부르그 가 형제 가운데 가장 침착하고 교양 있는 내가 그처럼 충동적인 행동을 저질렀단 말인가? 그는 다시 신음소리를 토했다. 약점을 들킨 듯한 묘한 느낌이었다. 강제로 덮치다시피 했으니 앞으로 엘렌이 어떤 눈으로 나를 바라볼까, 고양이 같은 눈으로 노려볼까, 아니면 마구 조롱하면서 빈정거릴까? 몸이 굳어졌다. 그녀가 어떤 식으로 조롱할지 상상이 갔다.

조프리는 한숨을 내쉰 뒤 던스탄을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형과 있다 보면 엘렌의 생각을 지울 수 있을 테지.

조프리는 하루 종일 던스탄의 영지를 돌아보고 나서도 엘렌의 생각을 몰아내지 못했다. 영지 내의 문제점들을 지적하는 던스탄의 말을 들으면서 자신의 장원에서 개선해야 할 점을 속으로 열거해 보았다. 하지만 형의 말을 새겨 넣으면서도 엘렌이 궁금했다.

그는 불안하게 하늘을 바라보면서 지금 몇 시쯤 되었을까 추측해 보았다. 엘렌을 혼자 남겨 두는 게 아닌데...... 성을 돌아다니면서 말썽을 일으키는 것은 아닐까? 마리온을 해치면 어떻게 하지? 원래는 마리온 일로 엘렌을 꺾어 보려고 했다가 일이 묘하게 틀어져 충족되지 못한 욕망만 남고 말았다. 그 생각이 떠오르자 마음이 불안해졌다. 그녀가 방에서 도망간 것이 항복의 뜻이라고 생각하다니, 무슨 근거로 그렇게 생각했을까?

조프리는 저녁 식사에 맞추어 돌아오면서도 성에서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불안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없어 보였다. 마리온이 평소처럼 미소지으며 아무 근심 없는 얼굴로 하인들을 감독하고 있었다. 하지만 엘렌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저녁 식사 자리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늑대는 무슨 속셈으로 식탁에 나타나지 않는지 모르겠다며 투덜거렸다. 엘렌이 식사를 하는 대신 성안에 있는 군사들을 모두 무찌르기라도 할 것 같은 말투였다.

“내가 가서 살펴봐야겠어요.” 마리온이 말했다.

“안 돼요, 형수님!” 조프리가 큰 소리로 외쳤다. 엘렌이 내려오지 않는 것은 무슨 짓궂은 계획을 세우고 있기 때문이든지, 아니면 마리온에게 사과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쪽이든 조프리는 아내와 형수 사이에 더 이상 불쾌한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랐다.

“아까 보니 자고 있었어요.” 그는 그럴 듯하게 둘러댔다. 예민한 성미를 건드렸기 때문에 혹시 자살해 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깐 뇌리를 스쳤지만 곧 그런 생각을 지워 버렸다.

“아픈 건 아닌지 가봐야겠군요.” 그는 씹고 있던 음식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던스탄이 요란하게 코웃음을 쳤다. 머리가 이상해졌다면 모를까 엘렌이 아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표정이었다.

“나도 피곤해서 일찍 자야겠고 말이에요.” 조프리가 덧붙였다. 던스탄의 놀란 눈길을 마주할 기분이 아니었다. 늑대는 엘렌하고 한자리에 잘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하는 것이 분명했다. 자신 역시 그런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지만 형의 은근한 모욕을 접하고 보니 몸이 굳었다. 그래서 마리온한테만 퉁명스럽게 고개를 끄떡이고 자리를 떴다. 새삼스럽지만 이곳에 온 것이 후회스러웠다.

그는 무거운 기분으로 침실 문을 밀어젖혔다. 방이 비어 있었다. 엘렌은 대체 어디 있는 것일까? 방금 식사를 했는데도 뱃속이 뻥 뚫린 기분이었다. 엘렌은 하루 종일 방에 있었을까? 웨섹스 성을 떠나 버린 것은 아닐까? 그녀가 사라져 버리면 형은 기뻐서 춤이라도 추겠지. 하지만 조프리는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갑자기 그녀가 지옥의 사냥개에게라도 쫓기듯 도망가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자 느닷없던 자신의 욕망에 죄책감이 들었다. 그녀가 걱정스러웠다. 엘렌이 걱정스러워? 조프리는 씁쓸한 한숨을 토했다. 하지만 그녀가 못된 짓을 꾸미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직감이 들었다. 어디로 갔을까? 그녀는 지금 어딘가에서 제 상처를 핥고 있을 것이다. 그게 어디일까? 엘렌이 위안을 찾기 위해 갈 만한 곳이?

아무 데도 없었다. 아무 데서도 위안을 찾을 상대가 없었다. 그녀에게 위안을 베풀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라는 황량한 대답이 금세 떠올랐다. 하지만 그는 그 대답을 무시해 버렸다. 엘렌은 위안 따위 우습게 볼 여자라고 속으로 타일렀다. 그녀는 야생마이며 상스러운 여자야!

하지만...... 잠들었을 때의 나약한 모습이나 자신의 밑에 깔려서 고분고분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암말에게 조용히 말을 걸던 모습도. 그러자 갑자기 숨이 막혔다. 그는 얼른 돌아서서 마구간으로 내려갔다.

밤에 말을 돌보던 시종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고, 엘렌을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조프리는 건성으로 시종의 대답을 들었다. 엘렌처럼 영리한 여자가 시종 눈에 뜨이면서 마구간에 숨어들 리 없으니까.

그는 마구간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다락방으로 올라가는 사닥다리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는 다락방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 너무나 애처로워 보였다. 그녀에게 언성을 높인 내가 짐승 같았어. 그녀는 낡은 담요에 몸을 감싸고 푹 잠들어 있었다.

그는 황혼이 스며든 마구간에서 그녀의 아름다움을 새삼 깨달았다.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지만 길고 숱 많은 머리칼이 여러 가지 색깔로 빛나고 있었다. 얼굴은 놀랄 만큼 작고 매끄러웠고 입술은 탄력 있고 유혹적이었다. 맙소사. 그는 한숨을 쉬면서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몸을 달구는 열기를 애써 무시하면서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아 올렸다. 그녀를 안고 침실에 갈 때까지 그녀는 잠깐 몸을 뒤척일 뿐 깨지 않았다.

그는 이불을 젖히고 침대 위에 그녀를 뉘였다. 묘하게 부드러운 감정이 흘러나왔다. 지금 그녀는 칼을 휘두르지도 않고 상스러운 욕설을 하면서 입술을 일그러뜨리지도 않았다. 티없는 살갗이 너무나 생생해 보였다. 그리고 여태껏 본 어떤 여자보다도 아름다웠다. 그는 그녀의 머리를 뒤로 빗어 올렸다. 그러자 심장 고동이 점점 빨라졌다. 위험한 짓이야, 이건. 당장이라도 깰지 모르는데......

그는 얼른 허리를 펴고 자신이 잘 곳을 찾았다. 하지만 간밤에 자신의 입으로 말했듯이 따로 자리를 펼 곳이 없었다. 그는 다시 침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나의 아내야. 그는 잠깐 망설였다. 하지만 곧 평소답지 않은 거친 손길로 옷을 벗고 침대에 누웠다. 이제야 남자가 누려야 할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옷을 벗고 편안하게. 아내 옆에서.

엘렌은 몸을 돌려 옆에 누운 사람에게 다가갔다. 옆에 누운 사람이 주는 감촉이 좋아 더욱더 파고들었다. 따스하고 안전하고 평화로운 느낌이었다. 오랫동안 맛보지 못했던 느낌.... 꿈속에 어머니가 나오는 바람에 이성이 스며들 여가가 없었다. 이것이 정말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으면.....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날 사랑하는 누군가의 곁에 누워 있는 것이라면. 안락하고 안전하고 그리고.....짜릿함 같은 것이 뼈마디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녀는 누군가의 단단한 몸에 자신의 몸을 편안하게 기댔다. 손가락이 뜨거운 살갗에 닿았다. 남자의 근육투성이 맨살이었다.

그녀는 깜짝 놀라 번쩍 눈을 떴다. 이른 아침의 어둑한 빛이 눈에 들어왔다. 혼란스러운 심정으로 익숙지 않은 침대 커튼을 바라보던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가 경악스러워 눈을 깜빡거렸다. 꿈이 아니었다. 그리고 옆에 누운 사람도 어머니가 아니었다.

조프리......

공포가 온몸을 헤집으면서 몸이 꼿꼿해졌다. 내가 어떻게 여기 왔지? 왜 그가 곁에 있지? 그리고 또 왜 알몸이지? 떨리는 손을 목에 갖다댄 그녀는 자신이 고스란히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몸을 살짝 움직여 보았지만 자는 사이에 누군가 몸을 유린한 징조는 보이지 않았다. 안심해서 맥이 빠지자 고개가 베개에 떨구어졌다.

처음 떠오른 생각은 침대에서 뛰쳐나가자는 것이었다. 이 방에서 나가자고, 성을 떠나자고 생각했다. 그리고 푹 잠들어있는 조프리를 살펴보았다. 평소에는 자세히 볼 기회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좁은 침대 속에 누워 있는 그를 보자 말 할 수 없이 아름다운 남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잠들어 있는 그의 얼굴은 평소보다 더 젊고 소년 같았다. 짙은 눈썹은 햇살에 그은 뺨 위에 그늘을 드리워 묘하게 매력적이었다.

손가락으로 그의 쪽 곧은 코를 쓸어내려 입술 윤곽을 어루만지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녀는 거칠게 숨을 들이쉬었다. 얼른 그의 입술에서 눈을 떼고 단단한 턱과 목덜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그의 근육질 어깨를 보고 마른침을 삼켰다.

뱃속으로 묘한 열기가 고이는 것에 놀란 그녀는 다시 그의 머리를 바라보았다. 숱 많고 매끄러운 검은 머리칼이 뾰족뾰족 솟은 모양이었지만 다듬어야 할 머리 모양조차 매력으로 보였다. 조프리 성자도 인간이라는 증거 같았다.

그녀는 자신이 지어 준 별명을 생각하고는 이마를 찡그렸다. 어제 자신에게 고함치던 남자의 이미지와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별명이었다. 고함치던 그와 싸우고 나서..... 그 다음에 이 침대에서 벌어진 일을 생각하자 쑥스러웠다. 그녀는 거북한 생각이 떠오르자 눈을 깜빡거렸다.

조프리도 그의 형처럼 키스할 수 있어.

그의 뜨겁고 다급한 입술이 떠오르자 기운이 쭉 빠지고 아찔해졌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여기 있는 걸까? 분명 어제 생각을 정리하려고 마구간으로 갔는데....

조프리.

그가 찾아내서 데려온 것이 분명했다. 그가 잠든 자신을 안고 걸어가는 모습을 상상하자 끔찍하기도 하고 짜릿하기도 했다. 자는 동안 무슨 창피한 꼴을 겪었는지 누가 알겠어? 그런 의심을 하면서도 그녀는 그 의심을 잠재웠다. 일단 잠을 자고 나서 아침에 덮칠 생각이었는지 누가 알아?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경계하는 눈으로 그를 건너다보았다. 하지만 화낼 기력이 없었다. 어제 그가 화가 나서 분노를 폭발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강제로 자신을 덮치는 것은 상상이 가지 않았다.

굳이 덮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덮치지 않는지도 모르지. 그녀는 너무 쉽게 그의 밑에 눌려 있던 것을 생각하고 몸을 떨었다. 너무 갑작스럽고 예기치 못한 사태였다. 그래서 저항할 때를 놓쳐 버린 거야. 그녀는 핑계를 대면서 얼굴을 붉혔다. 마리온 때문에 언성을 높이다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마리온. 그녀는 흠칫했다. 조프리가 어제 나를 덮친 것은 마리온에게 품은 욕심을 억제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형수에게 손을 댈 수 없어서 대신 날 건드린 게 아닐까? 그 생각을 하자 찌르르 가슴이 아팠다. 그런 감정은 이미 오래 전에 사라진 줄 알았는데.....

입안에 피 맛이 배어들었다. 엘렌은 이마를 찡그렸다. 그제야 저도 모르게 입안을 깨물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쓰디쓴 감정을 삼키면서 눈을 가늘게 뜨고 조프리를 노려보았다. 갑자기 그가 아까처럼 핸섬해 보이지도 매력적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악당 같은 남자. 짐승 같은 남자. 그녀는 침대에서 빠져나와 어제 숨겨 놓은 단도들을 확인해 보았다. 그러고는 곤히 잠든 조프리를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이 노려보는 것도 모른 채 잠들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고소했다.

“나도 미리 경고해 두지, 드 부르그.” 그녀는 속삭이면서 방을 나갔다. 마리온 대역을 해줄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다시 한 번만 마리온 대역으로 삼는 날에는 가만두지 않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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