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조프리는 계단을 올라갔다. 무거운 걸음걸이에 혼란스러운 심정이 담겨 있었다. 웨섹스에 괜히 왔다는 후회가 들었다. 아니면 엘렌이라는 악녀를 두고 혼자 오는 건데..... 몇 달 동안 그녀의 상스러운 행동에 면역이 된 모양이었다. 하지만 비로소 그녀의 모습이 제대로 보였다. 성질 사납고 입버릇 거칠고 고마워할 줄 모르는 괴물.......
한 마디로 그녀는 자신이 혐오하는 모든 것이었다. 그런데도 여자에 굶주린 사춘기 소년처럼 그녀의 맨다리를 바라보고 있었다니...... 그는 혐오감에 몸을 움츠렸다. 그는 눈을 문지르면서 좁은 복도를 걸어서 전에 쓰던 방으로 향했다. 드 부르그 가 형제들이 던스탄의 성을 탈환한 뒤 이곳에 머물던 때의 기억이 잠깐 떠올랐다. 전투를 하던 중이었지만 그래도 그 며칠은 즐겁고 태평했다. 그 뒤에 펼쳐진 자신의 생활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온갖 짐을 떠맡고 있는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그 가운데 아내로 인한 짐이 가장 무거웠다!
화가 나서 방문을 밀어젖히는데 엘렌이 갈색 스커트를 휘날리며 옆으로 스쳐 들어갔다. 이번에는 또 뭐야. 그는 서둘러 방문을 닫아걸었다. 그녀가 고래고래 소리지르기 전에 닫아야 한다. 홀에서 보인 추태도 기막힌데 그 욕지거리를 더 들어 줄 수는 없었다. 단둘이 있게 되어 안심한 그는 눈을 들었다가 몸이 굳었다.
그녀가 칼을 들고 있었다. 자신의 칼을.
그녀는 전통적인 무사의 자세로 두 다리를 벌리고 무거운 칼을 놀랄 만큼 유연하게 휘두르면서 그의 가슴에 겨누었다.
“내 칼을 내놔요, 드 부르그.”
조프리는 심장이 고동쳤다. 공포 때문이 아니었다. 아무리 부정하려고 애써도 소용없었다. 그녀의 대담함과 힘, 재빠름, 그리고 꺾일 줄 모르는 기백..... 그 모두가 그에게는 짜릿하게 자극적이었다. 내가 또 제정신이 아니군! 그는 헛기침을 했다. “여기는 우리 형 집인데 이런 곳에서 날 어째 보겠다는 거요? 제정신이오, 엘렌?”
“무기를 빼앗기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조프리의 심금을 울린 것은 그 말이 아니라 그녀의 갈색 눈동자에 언뜻 보인 나약함이었다. 맙소사..... 그녀의 소중한 칼까지 빼앗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형의 말이라 거역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여긴 던스탄의 집이니까. 그리고 사람들이 가득한 홀에서 망신 준 그녀에게 화도 났다. 미리 예상하지 못한 내가 어리석었지...... 엘렌은 절대 변하지 않을 여자인데...... 그녀는 아무리 부드럽게 대해도 길들일 수 없는 야생 동물이었다.
그녀에 대한 분노가 마지막 한 조각까지 쓸려 내려가면서 싸늘한 실망감만이 남았다. 형제들도 인정했지만 그는 어떤 사람에게 오랫동안 화를 내는 성격이 아니었다. 아내라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엘렌이 시끄럽고 상스럽기는 해도 자신에게 직접적인 해를 끼친 적은 없었다. 지금도 평소처럼 으르렁거릴 뿐이지 그 이상의 짓을 저지르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는 긴장으로 굳은 그녀의 팔과 얼굴을 살폈다. 싸워서 칼을 빼앗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면 엘렌이 다칠 수도 있다. 그리고 뭔지는 모르지만 그녀를 힘으로 제압하는 것을 망설이게 만드는 것이 있었다.
“좋소.” 그가 나직하게 말하자 안심한 듯 그녀의 어깨가 살짝 내려앉았다. 무거운 칼을 들고 있던 것이 이제야 힘에 부친 모양이었다. 그는 허리에 찬 주머니에서 단도들을 꺼내 손잡이 쪽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녀가 들고 있던 그의 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여기 있는 동안은 단도를 허리에서 떼어놓도록 해요.” 조프리가 주의를 주면서 자신의 칼을 집었다. “당신이 그 칼을 갖고 있는 것을 던스탄이 알면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할 테니까.”
그녀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고 칼을 가슴에 갖다댔다. 조프리는 문득 그녀에게 다가가고 싶었다. 그녀는 너무나 외롭고 무력해 보였다. 무서워서 차가운 칼에서나마 위안을 찾는 가련한 얼굴이었다. 그는 그녀를 아버지가 죽은 현장에 데려온 것을 후회했다. 더구나 집주인은 공공연히 그녀를 무시하고 있잖은가. 그는 별다른 생각 없이 그녀에게 다가가서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뒤로 물러서면서 그를 노려보았다.
“칼은 숨겨 놓겠지만 나더러 이 집을 좋아하라고는 하지 말아요. 오지 않겠다고 미리 말했잖아요! 경고했잖아요, 드 부르그!”
조프리는 갑자기 머리가 아파서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칼을 칼집에 꽂아 놓고 눈앞에서 소리지르고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뭐가 어째, 이 여자가 가련하다구?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가 잠깐 정신이 나간 게야. 그는 중얼거리면서 그녀를 혼자 놔두고 방에서 나왔다.
엘렌은 저녁 식사를 할 때까지 좁은 방에서 서성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머리 속에서 의혹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방심하고 있던 조프리의 허를 찔렀다는 처음의 승리감도 그의 가슴에 칼을 겨누면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의 칼을 빼내는 것은 너무 쉬웠다. 그의 등을 보살펴 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새삼 확인했다. 어리석은 남자...... 하지만 그를 향해 무거운 칼을 휘두르고 있자 다시금 묘한 통증이 덮쳤다.
칼 든 손이 멈칫거렸다. 자신의 두려움을 물리치려고 한 짓이지만 그래도 그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조프리는 금세 항복했다. 칼을 빼앗으려고 하거나 협상을 하려고 하거나 임시 변통으로 위기를 넘기려 하지 않았다. 칼을 돌려주면서 다른 데 감추라고 퉁명스럽게 경고했을 뿐이었다.
그녀는 그의 반응에 놀란 나머지 주저앉을 뻔했다. 그는 자신을 지하 감방에 던져 넣을 생각이 없는 것이 분명했다. 늑대를 시켜 자신을 해치우게 할 생각도 없는 것이 분명했다. 긴장했던 근육이 너무 빨리 풀려서 몸이 휘청거렸다.
어쨌든 너무 쉬웠다. 조프리가 칼을 돌려 준 데는 뭔가 꿍꿍이속이 있을 거야.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조프리에게 다른 뜻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작지만 아늑한 방을 둘러보니 지하 감방에 던져지지 않을까 하고 걱정한 것이 어리석게 느껴졌다. 벽은 평범했지만 말끔했고, 옷걸이 못이 박혀 있었다. 그녀는 벽난로 옆에 있는 못에 외투를 걸어 놓았다. 그리고 자신의 저택에서 가져온 무거운 옷궤는 의자로 쓰기 위해 자그마한 창문 밑에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 침대가 있었다.
엘렌은 방 안 대부분을 차지한 침대에서 눈을 돌렸다. 조금 낡고 해어진 침대 커튼 사이로 유혹하는 듯한 이불이 보였다.
침대는 그다지 큰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작은 방 안을 꽉 채우고 있었다. 이러면 조프리가 어떻게 바닥에서 잔담? 다시 한 번 의혹이 피어올랐다. 그의 속셈이 바로 이것인지도 모르지. 두꺼운 벽 때문에 비명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에서 덮칠 속셈인지도. 하지만 그녀는 곧 그런 의심을 떨쳐 버렸다. 그가 자신에게 관심이 없다고 몇 번이나 말한 기억이 났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거친 숨을 토하면서 침대에 털썩 걸터앉았다. 머리 속이 혼란스럽게 소용돌이치다가 결국은 유혹적인 결론에 도달했다. 떨쳐 보려 해도 떨칠 수 없는 결론..... 애초부터 음모는 없었는지도 모른다.
조프리는 그저 형의 아이를 보러 왔는지도 몰라. 그리고 나를 데리고 온 것은...... 혼자 집에 놔두었다간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서 그랬는지도...... 그녀는 피곤해서 두 손에 고개를 묻었다.
조금 뒤에 노크 소리가 나서 일어나 보니 조프리가 언제나처럼 힘찬 모습으로 나타났다. 짙은 녹색 튜닉 아래 넓은 어깨가 팽팽했다. 녹색 튜닉을 입은 그는 너무나 매혹적이었다. 긴 머리칼은 끝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은 것이 분명했다.
올려다보니 조프리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커다란 갈색 눈이 너무나 따스하고 유혹적이어서 그녀는 한순간 그 눈동자의 자력에 끌려들 뻔했다. 하지만 곧 어깨를 펴고 심호흡을 하고 그의 옆을 지나쳤다. 그는 남자인데다가 드 부르그 가 사람이니까 믿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해.
그녀는 뻣뻣한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 넓은 홀에 이르렀다. 홀 안에는 사람들이 북적대고 있었다. 자신은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조프리가 상석 테이블로 안내하는데 맛있는 냄새가 났다. 하인들이 뜨거운 음식을 가져다 놓자 그녀는 더욱 거북해졌다. 부부가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정작 조프리와 식사를 해본 적이 없었다. 조프리가 옆에 자리를 잡자 엘렌은 그의 커다란 체구에 압도된 기분이 들어 긴 의자에서 조금 옆으로 물러나 앉았다.
그런데도 그의 허벅지가 너무 가까이 있다는 느낌이었다. 넓은 어깨가 그녀의 어깨 옆에 다가왔다. 엘렌은 머리로 얼굴을 가리고 빼꼼히 내다보면서 달리 관심 가질 만한 사람을 찾아보았다. 말없이 바라보고 있자니 모두들 어딘가 이상했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마침내 이상한 것의 정체를 깨닫고 눈을 깜빡거렸다.
모두들 행복해 보였다.
끝에 앉은 사람들은 이야기를 하며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고, 하인들도 민첩하게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자신의 장원에서 일하는 하인들에게서 익숙하게 보던 볼멘 표정은 누구한테도 없었다. 모두들 자신들의 영주와 영주의 부인에게 만족한 얼굴이었다.
그 점이 가장 놀라웠다. 전에 아버지가 명령을 내릴 때면 하인들은 모두 움츠리면서 자신이 지목당할까봐 겁내곤 했다. 아버지는 가차없는 영주였다. 하지만 던스탄은 아버지보다 훨씬 크고 성질이 격한데도 하인들은 그를 두려워하는 대신 충성하고 있었다.
“엘렌?” 조프리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서 그녀는 흠칫 놀라 홱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는 앞에 놓인 음식을 가리켰다. 그는 반으로 자른 음식을 그녀 앞으로 밀어놓았다. 군침이 넘어가도록 맛있어 보이는 고기였다. 그녀는 칼을 옷에 매달지 않았다는 사실을 깜빡하고 칼이 있던 곳에 손을 뻗었다.
그녀가 불평을 늘어놓으려는데 조프리가 먼저 손을 뻗어 그녀 대신 커다란 고기 조각을 썰어주었다. 엘렌은 그의 커다란 손이 고기를 써는 우아한 움직임을 지켜보다가 억지로 눈을 떼었다. 그 눈길이 금방 늑대와 그 아내에게로 향했다.
두 사람은 고기 한 접시를 놓고 그 위에 고개를 수그리고 있었다. 엘렌이 놀라서 지켜보자 늑대가 작은 비둘기 고기를 썰어 아내에게 먹여 주었다. 그것도 손으로. 더구나 마리온은 움찔하지도 않고 얌전히 받아먹은 뒤에 미소를 지으면서 그의 손목을 잡고 손가락을 빨기까지 했다.
엘렌은 숨이 막혔다. 난생 처음 보는 장면이었다. 역겨워. 하지만...... 그녀는 조프리의 손을 몰래 훔쳐보았다. 크지만 부드럽고, 손가락은 길고 단단했다. 그의 손을 빨면 어떤 맛일까. 그의 땀도 그의 손도 짜릿한 맛일 테지. 그녀는 목이 막혀 숨을 들이켜며 고개를 숙였다. 접시에 머리칼을 빠뜨릴 정도로 고개를 묻고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을 지워 버렸다. 그리고 머리칼 너머로 경계하듯이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마리온은 몇 번이나 엘렌을 대화 속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하지만 엘렌은 퉁명스러운 소리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곳이 싫었다. 모두들 이상할 정도로 명랑한 이 집이 싫었다. 난 이 자리에 앉아 뭔지 모를 불안감에 짓눌리고 있는데..... 그녀는 공연히 음식 투정을 해서 불편한 기분을 알렸다.
하지만 마리온은 불쾌해하지 않고 이해한다는 듯 부드럽게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엘렌은 더욱 혼란스러웠다. 겉보기에는 상냥하기 그지없는 저 여자가 어떻게 해서 늑대에게 붙잡히게 되었을까? 웨섹스에 오기 전만 해도 엘렌은 늑대의 아내가 늑대와 똑같이 야만적이고 끔찍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마리온은 작고 아담하고 부드러웠다.
그리고 마리온은 무척 행복해 보였다. 엘렌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엘렌은 지금까지 행복해하는 여자를 본 적이 없었다. 여자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힘겨운 인생을 살게 마련이다. 그런데도 마리온은 명랑하게 수다를 떨면서 밝은 목소리로 아기 이야기를 했다. 암사슴 같은 커다란 눈동자가 기쁨과 경이 속에서 빛났다. 아기를 축복으로 생각하는 듯 했다. 그 아기를 세상에 내보내느라고 거의 죽을 뻔했다고 하면서도 짐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때 뭔가 팔꿈치에 닿았다. 엘렌은 흠칫하면서 칼을 더듬어 찾다가 투덜거렸다. 고개를 들고 머리칼을 젖히고 보니 자그마한 소년이 서 있었다. 소년은 겁먹고 당황한 눈으로 노려보는 그녀의 눈길을 마주 보았다.
“다 드신 접시를 가져가려고요, 마님.” 소년이 말했다.
조프리는 초조한 한숨을 쉬면서 소년에게 접시를 건넸다.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마리온이 부드럽게 말했다. “성문밖에 있는 배고픈 사람들에게 남은 음식을 줘야 하거든요.”
“전쟁을 치르느라고 백성들 생활이 엉망이 되어 버렸소.” 늑대가 의미심장한 눈길로 엘렌을 보며 말했다.
“하지만 사정이 좋아지고 있어요.” 마리온이 얼른 말했다. “늑대가 영원히 정착했으니까. 여행하는 일도 없을 거예요.” 그녀가 올려다보며 미소짓자 그의 딱딱한 얼굴이 누그러졌다.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지? 엘렌은 경이로운 눈으로 마리온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무사히 아들을 낳아 주었으니 급한 일이 생기면 여행할 수도 있지.” 늑대가 말했다.
마리온은 이마를 찡그렸다. 엘렌은 마리온의 입가에 굳은 결심이 맺힌 것을 보았다. “앞으로 또 아이를 낳을 텐데요.”
“안 되오!” 늑대의 고함 소리에 엘렌은 놀라서 움츠러들었다. “이번만 해도 그렇게 힘겨웠는데.....” 그는 퉁명스럽게 덧붙였다. 힘겨웠다고? 늑대가 정말 아내의 건강을 염려하고 있단 말인가?
“말도 안 돼요!” 마리온이 단호하게 말했다. “순산이었다구요....”
“순산이라고?” 늑대가 의자를 밀어젖혔다. “하루 반을 진통에 시달리고도 순산이었단 말이오?”
“첫아기는 원래 좀 어려운 법이에요. 하지만 다음에는.......”
늑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기는 더 이상 안 된다고 말했잖소!”
엘렌은 몸을 앞으로 수그리고 손가락으로 부츠 속의 단도를 더듬었다. 늑대가 아내를 죽이려는 것일까, 자신의 집 홀에서? 엘렌은 마리온에게 애정은 없지만 그렇다고 그 여자가 죽는 것을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는 없었다. 그녀가 손을 더욱 내려서 손잡이를 잡으려는데 마리온이 벌떡 일어섰다.
“더 낳을 거예요!” 그녀는 소리치면서 늑대에게 다가가 작은 손가락으로 그의 널찍한 가슴을 찔렀다. “내가 당신 마음을 바꾸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면 당장 우리 방으로 올라가서 알아보기로 하죠!”
그녀의 도전적인 고함 소리가 홀 안에 무겁게 드리워졌다. 남편에게 그런 협박을 했으니 그녀는 분명 죽은 목숨일 것이다. 하지만 식탁에 앉은 사람은 누구 하나 그들의 말에 크게 관심쏟지 않았다. 엘렌은 놀랐다. 통통한 어떤 남자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여전히 음식을 먹고 있었다. 엘렌은 그것을 보고 눈을 깜빡이다가 늑대를 바라보았다. 늑대가 뭔가 투덜거리더니 아내를 번쩍 쳐들었다.
이제야말로 죽일 모양이군! 그런데 어떻게 아무도 신경쓰질 않을까? 엘렌이 겁에 질려서 바라보자니 늑대는 아내에게 키스를 하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더더욱 기절할 노릇은 마리온이 늑대를 물리치지 않고 그의 넓은 어깨에 팔을 둘렀다는 사실이었다. 엘렌은 늑대가 자신의 아내를 삼킬 듯한 모습을 홀린 듯이 지켜보았다. 그의 입술이 난폭할 만큼 마리온의 입술을 덮치고 있었다.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겨우 두 사람이 몸을 떼고 바보처럼 서로를 향해 웃고 있었다.
“나머지 이야기는 단둘이 끝내는 게 좋을 것 같군.” 늑대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마리온이 고개를 끄덕이자 두 사람은 이만 물러가겠다는 인사를 중얼거렸다. 마리온은 앞으로 벌어질 일이 두렵기는커녕 얼굴을 붉히며 열렬히 기대하는 표정이었다. 열렬히 기대하다니.....!
엘렌은 고개를 저었다. 저 두 사람은 제정신이 아니야. 하지만..... 그녀는 언젠가 조프리가 키스한 때가 생각났다. 조프리도 저렇게 키스할 수 있을까? 그녀는 초조하게 몸을 뒤틀면서 지금 몸 속의 피가 끓는 것은 방금 본 아슬아슬한 장면 때문이라고 자신을 타일렀다. 조프리하고도 상관없는 일이며 에드레드 신부가 입버릇처럼 경고하던 음탕한 생각과도 상관없는 일이라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머리 속이 혼란스러운데 옆에서 조프리의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자, 늦기도 했고 여행으로 피곤하기도 해서 나도 이만 자야겠소, 엘렌?” 그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깔보듯 한참 그 손을 내려다보았다. 설마 내가 저 미친 여자 마리온을 흉내내리라 기대한 건 아니겠지......
“난 피곤하지 않은데요.”
조프리가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난 피곤하오. 그리고 당신이 같이 가면 좋겠소. 하인들을 무섭게 만들면서 앉아 있지 말고.”
엘렌은 이마를 찡그렸다. 소년을 무섭게 할 생각은 아니었다.
“엘렌....” 조프리가 재촉했다. 그의 표정은 오랫동안 연마된 인내의 표정이었다. 필요하면 밤새껏이라도 서서 기다릴 수 있다는 표정.
“아, 좋아요.” 그녀가 쏘아붙였다. 그러고는 그가 내민 팔을 무시하고 계단으로 걸어갔다. 화가 나서 씩씩거리며 방에 도착했다. 새삼스레 방이 너무 작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벽에 등을 대고 조프리를 노려보았다. “여분의 이불이 필요하겠군요. 바닥에 자리를 깔려면.”
“엘렌.” 그는 등뒤로 문을 닫으면서 말했다. “이 바닥에는 충분한 자리가 없소. 난 침대에서 자겠소.”
그녀의 등줄기로 공포가 스멀스멀 기어올라왔다. 하지만 엘렌은 공포를 눌러 버렸다. 그녀는 천천히 허리를 굽혀서 부츠에서 단도를 꺼내고 의기 양양한 얼굴로 그에게 돌아섰다. “내 생각은 다른데요.”
조프리는 단도를 보고 몸이 굳었다. “침대에서 자겠소.” 그가 거듭 말했다. “당신이 어디서 자든 그건 당신 마음이오. 한 발을 난롯불 속에 넣고 자든 아니면 옷궤를 열고 그 안에 쭈그리고 자든. 하지만 난 너무 커서 그럴 수가 없소.” 그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대꾸했다. 그러고는 그녀의 위협을 무시하고 방 한구석으로 걸어가 부츠와 칼을 벗어놓았다. 그러고는 옷을 입은 채 침대 위에 누웠다. 오만하게 머리 뒤에 두 팔을 고이고.
“자, 어서 목을 치시오.” 그가 말했다. “난 너무 피곤해서 당신이 목을 베도 눈치 못 챌 거요.” 그는 눈을 감아 버렸다.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한참 동안 그를 노려보던 그녀는 팔을 내렸다. 자고 있는 남자에게 단도를 겨누고 있는 꼴이 스스로 생각해도 우스웠다. 조프리는 곧 고른 숨소리를 냈다. 자신의 존재조차 잊고 잠이 든 것 같았다.
엘렌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침대 주위의 타일 바닥에서 자는 것은 정말 고역일 것 같았다. 그녀는 옷궤가 놓인 창 아래로 갔다.
그녀는 뚜껑을 열고 그의 좋은 옷들을 마구 구기면서 짓궂은 즐거움을 맛보았다. 그리고 침대에서 담요를 끌어내려서 옷궤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옷궤는 너무 좁고 갑갑했다. 뚜껑이 닫혀서 갇힐 것만 같았다. 엘렌은 몸을 떨었다. 조프리의 속셈이 그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잠이 들자마자 옷궤에 가두어 가지고 나가 늑대가 미리 준비해 둔 구덩이 속에 파묻을지도 몰라. 그녀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옷궤 속이 갑자기 관처럼 보였다.
그녀는 침대에서 베개를 내려서 뒤에 받치고 등을 기댔다. 하지만 잠이 오지 않아 벽난로 불빛 속에 잠든 조프리를 노려보았다. 가슴이 천천히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으로 보아 태평하게 잠이 든 것이 분명했다. 그를 바라보고 있자 두 사람 사이에 뭔가 바뀌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힘의 균형이랄까...... 다시는 힘의 균형을 회복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 남자는 저렇게 편히 자는데 나는 이렇게 불편하게 있단 말인가? 앞으로 어떻게 한담?
엘렌은 불편하게 뒤척거리다가 머리를 뭔가에 부딪히고 말았다. 소스라치게 놀라 일어나 보니 다리가 몸 밑에 깔려 있고, 한 팔은 딱딱한 옷궤 가장자리 너머에서 대롱거렸다. 맙소사, 여기가 어디야? 옷궤 속? 그녀는 정신을 차리려고 머리를 흔들었다가 곧 후회했다. 목이 삐거덕거렸기 때문이다. 담요를 깔아 대충 잠자리를 만들고 잤는데 그 때문에 목이 결린 듯했다. 이런 거북한 통증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신음 소리를 내면서 옷궤에서 몸을 일으키려다가 다리가 풀려 뒤로 나동그라졌다. 심호흡을 하고 두 손을 옷궤 가장자리에 대고 몸을 일으켰다. 온몸의 근육이 쑤셨다. 그녀는 숨이 막힌 신음 소리를 내면서 침대에 고꾸라졌다. 부드러운 매트가 자신의 저릿한 팔다리를 놀려대는 듯했다. 그녀는 잠깐 그대로 누워 있었다. 하지만 곧 뜨거운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내 기필코 이 남자의 목을 베고 말 거야.
자신은 쭈그리고 밤을 새는데 쿨쿨 잠을 자던 그의 모습이 떠오르자 분노가 더욱 거세어졌다. 그녀는 기운을 내고 몸을 바로 뉘었다. 하지만 창 너머로 햇살이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해가 중천에 뜬것이 분명했다. 맙소사, 이렇게 늦게까지 잔 적은 한 번도 없는데! 새벽이 오기 전에 불편한 자세를 깜빡 잊고 설핏 잠든 모양이었다. 하지만 개운하기는커녕 지친 몸이 더욱 노곤해졌다.
목욕을 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헝클어진 머리칼을 어깨 뒤로 넘겼다. 머리를 빗을 생각도 구겨진 옷을 갈아입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성을 떠날 생각을 굳힌 지금 새삼스럽게 매무새를 가다듬거나 점잖은 행동을 하면 목적을 이룰 수가 없다. 그녀는 납작해진 조프리의 옷 더미를 보고 코웃음치면서 옷궤의 뚜껑을 열고 문으로 걸어갔다.
엘렌은 홧김에 호기심 어린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뚫고 홀로 내려갔다. 하지만 걸을 때마다 안 쑤시는 데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아침 식사를 놓쳤다는 것을 알고 더욱 이마를 찡그렸다. 이대로 점심때까지 굶어야 한단 말인가? 욕설을 퍼부으려고 입을 열던 그녀는 문득 귀에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너무나 익숙한 낮고 음악적인 억양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평소와는 달리 명랑한 그 목소리에 홀리지 않으려고 기를 썼다.
조프리의 목소리.
그의 깊고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청량제처럼 그녀를 감쌌다. 따스한 액체처럼..... 그 액체가 그녀 몸 속을 휘돌아 분노를 누그러뜨리고 가슴속을 가볍게 만들어 주었다. 그에게서 그런 웃음소리를 들은 적이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녀의 얼굴에서 조소가 사라졌다. 그녀는 잠깐 자신의 목적도 잊어버린 채 홀 안에서 그의 모습을 찾았다. 그는 식탁 위로 몸을 구부리고 등을 이쪽으로 돌리고 있었다. 조프리 옆에 마리온이 앉아 보조개 팬 미소를 던지고 있었다. 늑대는 아무 데도 보이지 않았다.
마리온이 조프리와 화기 애애한 모습으로 그를 웃게 만드는 것을 보자 다시 통증이 밀려왔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 두 사람은 귀엣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가 뒤로 몸을 기울이는 것이 보였다. 핸섬한 얼굴이 느긋한 표정으로 풀어졌다. 그런 얼굴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목이 잠겨 와서 숨쉬기가 힘들었다. 그런데도 난 저 여자의 목숨을 구하려고 생각했단 말이지! 늑대의 아내에 대한 의문이 저절로 풀렸다. 엘렌은 눈을 가늘게 떴다. 마리온은 매춘부였어.
엘렌도 그런 여자들을 알고 있었다. 에드레드 신부가 걸핏하면 그런 여자들을 욕했기 때문이다. 그런 여자들은 남자에게 정조를 팔기도 하고 권력이나 남자의 관심을 얻기 위해, 혹은 그들 육체의 그릇된 이끌림에 따라 자신을 내준다. 마리온이 늑대를 낚은 것도 그와 비슷한 수법이었을 것이다. 남자들은 관심을 기울여 주며 좋아하는 척하는 여자들에게 약하니까. 하지만 마리온이 왜 하필이면 조프리와 저러고 있는 것일까? 형제 사이를 이간질시키려고? 아니면 자신의 그릇된 욕망을 채울 생각으로?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야. 엘렌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입 속에 쓰디쓴 침이 고였다. 이유는 스스로도 설명할 수 없었다. 조프리가 한 결혼 서약은 아무 것도 아니야. 하긴 의미가 있었던 적도 없지. 그리고 그에게 그 서약을 지키라고 강요할 처지도 아니잖아. 그런 생각이 머리 속을 스쳐 가는데 마리온이 조그마한 손을 조프리의 팔에 놓는 것이 보였다.
그 순간 엘렌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피츠휴 가의 본성이 으르렁거리며 튀어나왔다. “매춘부! 내 남편한테서 손 떼!” 그녀는 소리치며 앞으로 뛰어나가 욕설을 퍼부었다. 마리온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물러나 앉았다. 하지만 그녀가 마리온에게 손을 대기도 전에 조프리가 벌떡 일어나 앞에 버티고 섰다. 그리고 순식간에 엘렌을 들어 올려서 어깨에 둘러멨다. 그녀는 숨이 막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는 그녀를 밀어 올려 자신의 어깨 위로 길게 늘어뜨렸다.
“이만 실례할게요, 형수님. 아내와 이야기 좀 해야겠어요. 단둘이.” 평소에는 노랫가락 같던 그의 목소리가 화가 나서 거칠었다. 그렇게 화가 난 목소리는 처음이었다.
엘렌은 타일 바닥이 빙그르르 돌자 숨이 막혀 눈을 깜빡거렸다. 마리온을 죽이겠다는 생각은 사라지고 대신 밉살스러운 남편을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몸을 끌어올리려고 기를 썼다. 하지만 조프리는 그녀의 칼이 숨겨진 부츠와 스커트 위를 단단한 근육질 팔로 누르고 있었다. 그녀가 몸부림치자 그는 그녀의 엉덩이를 짓눌렀다. 엘렌의 얼굴이 그의 등으로 떨어졌다. 갑자기 목이 바싹 말랐다.
그는 걸음도 흐트러뜨리지 않고 계단을 올라 침실로 향했다. 그의 힘이 대단하다는 것을 깨닫자 공포가 그녀의 등을 타고 흘렀다. 어제도 그랬다. 그녀가 잘 알던 평소의 조프리 성자는 사라지고 대신 드 부르그 가의 난폭한 기사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너무 몰아붙여서 조프리의 분노가 폭발해 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