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4월이 되자 조프리는 마리온이 아기를 낳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드 부르그 가의 첫 번째 후손이었다. 산모와 아기가 모두 건강하다는 것은 반갑지만 던스탄의 행운에 질투가 났다. 자신의 심정을 깨닫자 놀랍기도 하고 화도 났다. 이제까지 형제들의 인생에 질투를 느껴 본 적은 없었는데......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그가 질투하고 있는 것은 던스탄의 성이나 그의 부유함이 아니었다. 행복한 결혼 생활과 새로 생긴 가족에 대한 질투였다.
홀 건너쪽에 있는 아내를 바라보던 그는 그녀에게서 자식을 얻기란 영영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자 설명할 수 없는 상실감이 밀려들었다. 그는 자신의 핏줄을 잇는데 집착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하지만 분명 그는 느꼈다. 미래를 상상해 보는 자신의 마음속에 깃들인 절망감은 혼란스럽기도 하고 초조하기도 했다. 그는 엘렌을 뚫어져라 살펴보았다. 보기 싫은 옷 아래 날씬한 몸매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녀를 침대로 데리고 갈 수도 있다.
불쑥 떠오른 생각에 짜릿한 유혹을 느꼈다. 그녀는 젊고 탄력 있으며 여자다운 몸매를 갖고 있었다. 찌푸리고 있지 않을 때의 얼굴은 사랑스럽고, 입술은 짜릿하고 자극적이었다.
조프리는 고개를 저으며 요란하게 고동치는 심장을 가라앉히려고 애썼다. 결혼 서약을 나누었으면서도 두 사람은 아직도 밤이면 옷을 입고 서로를 경계하며 침상을 지켰다. 설령 그녀와 잠자리를 함께 하고 나서 무사히 살아난다 해도 무슨 즐거움이 있겠는가?
조프리는 그녀와의 잠자리를 상상한 자신이 역겨워서 한숨을 쉬었다. 후계자를 얻고 싶어 안달이 나도 그렇지 저 악녀와 잠자리할 생각을 한단 말인가? 그녀는 자신의 장원이면서도 장원을 위한 일은 해본 적이 없고 백성들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말썽 일으키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여자였다. 마음에 드는 점이 하나도 없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서 그녀를 노려보았다. “형이 아들을 낳았소. 웨섹스로 여행갈 준비를 하시오. 형의 후계자에게 존경을 표해야지.”
엘렌은 눈을 깜빡거리다가 머리칼 너머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그 머리칼을 잡아뽑고 싶은 것인지 두 손에 쥐고 어루만지고 싶은지 알 수가 없었다. “가고 싶으면 당신이나 가요! 난 여기서 꼼짝도 하지 않을 테니까!”
조금 전부터 아이 생각에 우울해 있던 참이라 그랬는지 아니면 번번이 자신에게 반대하는 그녀에 대한 분노가 폭발한 것인지 그로서도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만은 그녀의 변덕에 굴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자신이 없는 동안에 그녀가 못된 짓을 꾸밀까 봐 염려되기도 했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형을 방문해야 했다. “안 되오, 당신도 가야 하오, 엘렌. 이번 일을 갖고 날 시험하지 말아요, 아무리 그래도 내 뜻은 변하지 않으니까.”
엘렌은 신랄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조프리 성자가 이제야 사람다운 말씀을 하시는군! 발이 덜덜 떨리네!”
“경고하는데 엘렌......” 그는 입을 열면서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협박할 생각 말아요! 날 협박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버릴 거예요!”
조프리는 한숨을 쉬며 돌아섰다. “어쨌든 준비해요.” 그는 어깨 너머로 대꾸하면서 그나마 한적한 장소인 안뜰로 향했다.
“안 간다니까!” 그녀가 소리쳤다. 순간 조프리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실낱같은 공포를 들은 듯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면서 걸어갔다. 설마....... 그녀가 두려워하는 게 있을 리가 없지. 내가 잘못 들은 거야.
엘렌은 두려웠다. 태어났을 때부터 유일한 집으로 알고 살아 온 장원이 멀어져 가는 것을 보며 저도 모르게 고삐를 꽉 잡았다. 가기 싫다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입을 꽉 닫았다. 아까 이미 남편의 머리통에 대고 온갖 욕설을 퍼부어서 말을 놀라게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의 등을 노려보다가 뒤에 멀어져 가는 장원의 담 벽을 속절없이 돌아보았다. 함정에 빠진 기분이었다.
생전 처음 장원 문을 나서 보았다. 정말 떠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만은 조프리도 절대 그녀의 뜻을 존중해 주지 않았다. 조프리 역시 한계가 있는 남자였다. 그 한계를 넘으면 어떻게 되는지 전에도 한 번 경험했는데 또다시 그런 상황에 놓이고 싶지 않았다. 촛불을 꺼버린 날 밤이 생각났다. 꼼짝못하게 누르던 그의 몸무게도 기억났다.
그녀는 욕설을 중얼거리면서 거북한 영상을 머리 속에서 지워 버렸다. 끌고라도 가겠다고 협박은 했지만 조프리가 정말 그 말대로 웨섹스까지 질질 끌고 갈 것 같지는 않았다. 출발하는 날 아침에 감쪽같이 사라져 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그가 길 떠난 사이에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몽고메리가 협박하던 말이 떠올랐다. 몽고메리는 조프리가 자신을 그렇게 대접한 것에 분노하고 있었다. 갈 곳을 잃고 난폭해진 몽고메리가 어딘가 숨어 있다가 기습해 올 수도 있다. 비겁한 자들이 흔히 쓰는 수법이다. 엘렌은 남편의 빼어난 전투 능력을 많이 보았기 때문에 공정하게만 싸운다면 그다지 쉽게 지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몽고메리는 속임수에 능한 야비한 자다. 그리고 조프리는 지금 등뒤를 지켜 줄 사람이 없다.
나말고는.
조프리가 혼자서 몽고메리를 상대하는 위험한 장면을 본 날부터 그녀는 그의 등을 지키는 일을 떠맡았다. 그전까지는 남편을 피하는 것만 능사로 삼았는데 지금은 오히려 하루 종일 그를 시야 속에 두었다. 그가 책이나 회계 장부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도 계속 지켜보았다. 조프리는 물론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좋은 일이었다. 여자가 자신의 신변을 보호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 그러지 말라고 명령할지 모르니까.
그런저런 생각으로 이번 여행에 동행하긴 했지만 여전히 못마땅했다. 익숙했던 들판이 사라지고 처음 보는 들판과 숲이 보이자 공포가 밀려들었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낯선 땅과 조프리와 몸종, 그리고 경비병 몇 명뿐이었다. 발가벗은 것처럼 무력한 느낌이 들었다. 그 동안은 피츠휴 장원이 갑옷처럼 감싸주었는데...... 물론 장원에 있다고 절대적으로 보호받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안정감이 있었다. 스산한 변화의 연속이었던 그녀의 인생에서 장원은 그래도 유일하게 변치 않는 곳이었다.
나를 어딘지 모를 들판으로 끌고 갔다가 팽개쳐 버리면 어떻게 하지? 아니면 죽여 버린다면? 지금 이곳에는 그를 저지할 사람이 없다. 아버지의 병사들은 지금은 조프리에게 충성을 맹세한 입장이니까. 그 사실이 새삼 그녀를 괴롭혔다. 어차피 나에 대한 애정도 없는 병사들이긴 하지만. 그녀는 더욱 외로웠다.
밤이 오자 그녀는 피곤하고 불안했다. 천막 속이 아늑하긴 했지만 딱딱한 땅 위에서 자야 한다고 생각하자 더욱 사기가 꺾였다. 게다가 이렇게 오래 말을 타기는 생전 처음이라서 안 쑤시는 데가 없었다. 그녀는 천막 속으로 들어가서 털 이불과 담요로 잠자리를 만들었다.
조프리는 그녀에게 여자 몸종을 데려오라고 했지만 그녀는 코웃음을 치며 거절했다. 자신의 일을 스스로 하는 데 익숙했기 때문이다. 물론 나의 시중을 들겠다고 나설 시녀도 없을 거야.
자리에 들어간 그녀는 온몸을 짓누를 듯한 어둠 속에 몸을 뉘었다. 털 이불 덕분에 싸늘한 봄밤의 추위는 막을 수 있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그녀는 좁은 공간에 갇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자고 있는 동안 모두 자신을 버리고 가는 것을 상상해 보았다. 아니면 천막에 들어와 나의 목을 벨 수도 있지. 그러자 저절로 단도 손잡이에 손이 갔다.
갑자기 천막 자락이 올라가더니 키가 크고 어깨가 벌어진 남자가 불쑥 들어왔다. 잠깐 방심한 순간 그녀는 남편을 보고 가슴이 뛰었다. 하지만 그가 와서 반가운 심정을 곧 지워 버렸다.
“뭘 하려는 거예요?” 그녀가 쏘아붙였다.
“자려는 거지 뭐겠소, 엘렌.”
그녀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러고는 옷을 입고 있으면서도 털 이불로 가슴을 가리면서 손가락에 힘을 주어 단도를 잡았다. 이제야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그는 사람 없는 들판에서 결혼을 구체화하려고 장원에서 나를 데리고 나온 거야. 비명을 지른다해도 들을 사람은 모닥불 주위에 있는 몇 사람뿐이잖아. 그리고 설령 그들이 나의 비명 소리를 듣는다 해도 누가 도우러 오겠는가.....
“썩 꺼져요, 드 부르그! 다른 천막으로 가요!”
그는 무겁게 한숨을 쉬었다. “천막은 이것뿐이오, 엘렌. 그리고 난 피곤하오. 여기서 쉴 작정이오. 나와 함께 있는 게 싫다면 당신이 다른 곳을 찾아보시오!”
엘렌은 그의 목소리에 피곤함이 잔뜩 담긴 것을 알았다. 화를 내는 것을 보니 역시 성자가 아니라 보통 남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는 조금 긴장이 풀렸지만 이부자리를 천막 끝으로 잡아당겼다. “멀찌감치 떨어져요, 드 부르그! 자지 않고 딴 짓 했다간 죽을 각오를 하는게 좋을 거예요.”
조프리는 코웃음을 쳤다. “암, 그렇지, 엘렌, 내가 아늑한 침대를 버리고 이 멀리까지 달려온 건 차갑고 딱딱한 땅 위에서 당신을 차지하려고 온 거지. 암, 그렇구말구.” 그는 빈정거리면서 다시 코웃음쳤다. 곧 이불을 덮느라고 부스럭대는 소리가 났다.
그의 비웃는 말에 그녀는 가슴이 찔끔했다. 그럼 그렇지, 저 남자는 날 원하지 않아! 괜한 바보짓을 했어. 그녀는 가까이에 누운 그의 커다란 체구를 생각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와 그녀 사이에는 아무런 장애물도 없었다. 그의 힘차고 따스한 몸매를 상상하자 갑자기 입안이 바싹 말라붙었다. “농담 아니에요, 드 부르그.” 그녀가 낮게 말했다. “움직이기만 하면 목을 베어 버리겠어요.”
“입 다물지 않으면 난 당신 입을 막아 버리겠소!” 그가 협박했다.
“어떻게?” 경멸감이 그녀의 분노에 불을 붙였다.
“키스로.”
엘렌은 숨이 막혔다. 하지만 충격이나 공포가 밀려드는 대신 은밀한 열기가 천천히 몸 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기대일까? 갈망일까? 그녀는 욕을 퍼부어 주려고 입술을 벌렸다. 하지만 곧 생각을 고쳤다. 스스로도 다스릴 수 없는 이 감각을 시험대에 올리고 싶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이 진짜인지 시험해 보고 싶지도 않았다.
웨섹스 성에 도착했을 때는 익숙지 않은 여행 탓에 말할 수 없이 피곤하고 살갗이 쓰렸다. 그리고 기분이 엉망진창이었다. 그녀는 병이 나기 전에 으레 밀려드는 불안을 감지했다. 병이 나면 몸이 약해지고 힘을 못 쓰게 된다. 그래서 적의 손쉬운 먹이 감이 된다. 너무나 잘 아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어머니가 아버지의 변덕에 제물이 되어 나약해지는 것을 쭉 지켜보았다. 어머니는 당신의 권리도 다른 사람의 권리도 보호해 주지 못했고, 결국 당신 자신의 몸마저 보살피지 못했다. 엘렌은 고삐를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자신의 힘을 확인하면 어머니를 돕지 못한 쓰디쓴 기억이 사라지기라도 한다는 듯이,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나약한 기질 때문에 자신 역시 결국은 쓰러질지 모른다는 생각을 지워 버리려는 듯이.
그녀는 깊은숨을 쉬며 강철같은 의지를 모아서 건강하자고 다짐했다.
“귀신 나오게 생겼군!” 그녀가 소리쳤다. “늑대의 머리 위로 무너져 내리지 않은 게 놀라울 뿐이군!” 그녀는 요란하게 웃었다. 아버지가 이 성 때문에 그렇게 애썼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웨섹스는 형편없었다. 물론 피츠휴 장원보다는 크고 견고해 보였지만.
“점잖게 굴어요, 엘렌.” 그는 나직하게 말했다.
엘렌은 조프리가 평소처럼 성자의 모습으로 돌아갔다는 것을 알았다. 이마가 찌푸려졌다. 내심 그녀는 간밤의 조프리가 더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바싹 마른 입술을 축이며 그를 노려보았다. 그의 매력을 부정하기 위해.
지붕을 이고 부드러운 침대에서 잘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놓였지만 그래도 웨섹스 성에는 묵고 싶지 않았다. 다시는 이곳에 끌려오고 싶지 않았다. 그런 일이 없도록 해야겠지. 달갑지 않은 손님에게 주인이 얼른 떠나 달라고 부탁하는 수도 있으니까.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마중 나오고 있는 늑대를 보고 싱긋 웃었다.
늑대가 능숙하게 표정을 숨겼지만 자신을 보고 놀란 것은 분명했다. 자신이 불만스러운 이상으로 늑대도 불만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턱을 들이밀고 악의를 담아 그를 노려보았다. 마침내 늑대가 불편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조프리에게 퉁명스럽게 환영 인사를 한 뒤 성을 향해서 앞장섰다.
일행은 곧 말에서 내렸다. 엘렌은 늑대가 노려보는 기척을 여러 번 느꼈다. 좋아, 뭐, 경계하고 싶으면 하라지.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암, 경계해야 하구말구. 그때 조프리가 정중하게 팔을 내밀어 관심을 돌렸다. 그녀는 그의 팔에 손을 맡기고 높고 육중한 문을 지나갔다.
홀은 그녀가 살던 곳에 비해 아주 컸다. 엘렌은 숨이 막혔다. 사람들이 바쁘게 오가다가 손님이 도착한 것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엘렌은 그들의 호기심을 감지했다. 이럴 때면 으레 그러는 것처럼 기분이 거북해졌다. 하지만 곧 그런 기분을 떨쳐 버렸다. 저 사람들이 내가 누군지 알까? 모른다면 알게 해주지!
그때 한 여자가 앞으로 나섰다. 엘렌은 흥미롭게 그녀를 살펴보았다. 작은 체구에 검은 곱슬머리가 머리망 아래로 살짝 비어져 나와 있었다. 머리망과 어울리는 드레스는 생전 처음 보는 것이었다. 밝은 푸른색 드레스로 황금색 실이 녹아든 것처럼 반질거리는 모습이 아버지가 입던 멋진 옷들을 연상시켰다. 엘렌은 질투가 가슴을 찌르는 것을 느꼈다. 좋은 옷감과 멋진 옷들이 내게 왜 필요해?
늑대가 여자를 끌어안았다. 맹렬한 소유욕이 드러나 있는 표정이었다. 엘렌은 놀라 눈을 깜빡거리면서 여자를 보았다. 늑대가 끌어안는데도 움찔하지 않다니..... 움찔하기는커녕 애정이 가득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가엾은 여자 같으니라구. 늑대의 정부인 모양이군. 엘렌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때 그녀의 마음을 읽은 듯 여자가 입을 열었다. “우리 집에 온 걸 환영해요, 레이디 드 부르그. 난 레이디 웨섹스랍니다. 하지만 우린 동서니까 마리온이라고 불러 줘요.” 그러고는 싱긋 웃었다. 흰 이가 예쁘게 빛나고 볼에 보조개가 팼다.
엘렌은 뭔가에 홀린 느낌이었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정부가 아니라 아내였어! 마리온이라는 여자는 조프리 같은 상냥한 매력이 있었다. 하지만 엘렌은 조프리가 친절한 척하는 것을 간파하는데 이력이 나 있었기 때문에 마리온이 아무리 친절하게 굴어도 자신이 이 집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을 잘 알았다. 그녀는 마리온의 발치에 침을 뱉었다.
홀 안에 침묵이 내려앉으면서 모든 사람이 놀라 말을 잃었다. 늑대가 한 대 칠 기세로 뛰쳐나왔다. 엘렌은 단도에 손을 뻗었다. 하지만 웬일인지 늑대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놀라 올려다보니 마리온이 작은 손을 그의 팔에 얹어 말리고 있었다. 맙소사, 정말 간이 부은 여자로군! 건방지게 굴었다고 나중에 늑대한테 두들겨 맞겠지. 가엾기도 해라....
늑대는 결국 엘렌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지만 투덜거리며 불만을 토했다. “우리 집에서는 행동을 조심해 주시오, 피츠휴, 안 그러면 이 집 문턱을 넘은 걸 후회할 거요.”
“피츠휴가 아니라 드 부르그지, 형.” 조프리가 나직이 말했다. “레이디 드 부르그.” 조프리는 평소대로 잽싸게 그녀와 형 사이를 가로막고 나섰다. 나의 날카로운 혀와 그보다 더욱 날카로운 칼날 앞에 형제들을 보호하시겠다 이거지. 그녀는 속으로 심술맞게 중얼거렸다.
“엘렌도 점잖게 행동하려고 마음먹고 있을 거야.” 조프리는 그렇게 말하면서 경고하듯 성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엘렌은 잠깐 그를 바라보다가 그의 질책 어린 말투에 어느 구석에선가 통증이 밀려오는 것을 느끼고 흠칫 놀랐다. 오래 전에 잘려 없어진 다리가 갑자기 쑤셔 온다고나 할까? 아니면 오래 전에 멈추었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한 기분이라고나 할까..... 그녀는 코웃음을 치면서 그를 노려보았다. 손은 여전히 단도를 움켜잡은 채.
마리온만이 냉정을 되찾은 얼굴이었다.
“자, 이리 와요.” 그녀는 분위기를 살리려는 듯 명랑하게 말했다. “새 가족을 만나 봐야죠. 아기를 보겠어요?” 그녀는 커다란 암사슴 같은 눈으로 뚫어져라 엘렌을 바라보았다. 제발 평화롭게 넘어가자고 애원하는 듯했다. 그 애원을 무시하기가 힘들었다. 자신을 이렇게 부드럽게 대해 준 사람은 조프리 말고는 없었다.
“난 반대......” 늑대가 입을 열었다. 적에게 아들을 보여 주기가 싫은 것이 분명했다.
엘렌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당신의 아들 따윈 관심 없다고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순간 조프리가 가로챘다. “봐야죠. 하지만 먼저 여장을 풀고 싶군요, 우린 오랜 여행으로 몹시 힘들거든요.”
“무기가 없는지도 봐야겠지.” 늑대가 의미 심장한 눈으로 그녀의 단도를 바라보았다.
엘렌은 실망스러운 마음으로 조프리를 바라보았다. 이곳 사람들이 자신을 거부하리란 것은 충분히 짐작했다. 아니, 오히려 자신이 그런 사태를 자초했다고 하는 편이 옳았다. 하지만 설마 무기까지 내놓아야 할 줄은 몰랐다. 조프리의 검은 눈동자와 그녀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한순간 그녀는 그의 눈 속에서 유감스러운 빛을 읽었다. 아니, 미안하다는 표정이었을까? 그녀는 금세 의심이 들었다. 형이자 상급 귀족인 던스탄에게 거역하면서까지 나의 편을 들다니..... 혹시 연극 아냐? 쳇! 그녀는 그의 찌푸린 눈썹을 조금도 믿지 않았다.
불편한 침묵이 길어지자 늑대가 다시 입을 열어 재촉했다. “저 여자의 아버지가 바로 여기서 날 죽일 뻔했어. 그 딸이 여기 사람에게 해를 끼치게 하고 싶지 않아.”
엘렌은 던스탄이 경계하는 꼴이 고소해서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두려운가 보죠?” 그녀의 도전적인 말에 숨을 죽인 정적이 흘렀다. 그녀는 늑대가 머리끝까지 성이 나길 바랐다. 그래서 자신을 쫓아내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다시 작은 손이 그를 저지했다. 엘렌은 눈을 깜빡거렸다. 마리온이라는 여자는 어떻게 자신보다 두 배는 더 큰 무서운 기사를 어길 수 있을까? 엘렌은 그녀가 참견하는 것에 오히려 화가 나서 늑대를 더 조롱해 주려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조프리가 험악한 표정을 짓자 혀가 굳었다.
엘렌은 움찔했다. 모처럼 조프리의 얼굴이 형을 닮아 보였다. 그녀는 조프리도 드 부르그 가문이라는 사실을 깜빡 잊은 자신을 질책했다. 조프리는 성자가 아니라 남자일 뿐이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기사였다. 그 생각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는 평소와는 달리 협박조로 입을 열었다. “칼을 줘요, 엘렌.”
그녀는 머리채로 얼굴을 가렸다. 자신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자신을 보호할 유일한 무기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이곳은 온통 낯선 사람과 적들 뿐이었다. 그녀는 한 걸음 물러서면서 모두를 상대로 한 번 싸워 볼까 생각했다. 짐승 같은 저 늑대와 그의 아내, 시종들, 그리고 마침내 본성을 드러낸 조프리를 상대로 해서. 오랫동안 예상한 일이지만 막상 조프리의 배신을 눈앞에서 보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을 바라보자 아까처럼 묵직한 통증이 밀려왔다. 세차고 끈질긴 통증이었다.
그녀는 통증을 무시하고 몸을 펴며 속으로 외쳤다. 난 피츠휴야. 절대 굴복하지 않아! 아무한테나 마구 덤벼들고 싶었다. 특히 조프리에게. 무엇 때문에 자신과 결혼했느냐고, 무엇 때문에 키스했느냐고 따지고 싶었다. 왜 자신이 그를 남자로 보게 만들었느냐고 다그치고 싶었다.
분노로 제정신이 아닌 가운데도 그녀는 자신이 수적으로 열세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이곳은 자신의 집도 아니었다. 마리온의 얼굴에는 두려움도 미움도 보이지 않고 부드러운 연민의 표정만 떠올라 있었다. 엘렌은 얼굴이 찡그려졌다. 맙소사, 동정 따위는 싫어! 그녀는 마리온의 표정을 보고 마음을 굳혔다. 그리고 부글부글 끓는 속을 안고 코웃음치면서 조프리의 발치에 칼을 던졌다. 그런 것쯤 없어도 상관없다는 것을 모두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 칼이 없어도 내 몸 하나쯤은 보호할 수 있어, 나는 피츠휴니까.
칼이 타일 바닥에 떨어지면서 요란한 소리를 냈다. 늑대가 투덜거렸지만 조프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프리는 큰 키를 굽혀서 우아하게 단도를 집어들었다. 이윽고 몸을 펴는 그의 태도는 조금 전보다 부드러웠다. “다른 것도.....” 그가 조용하게 말했다.
엘렌은 눈을 깜빡였다. 이 남자가 어떻게 부츠 안에 넣어둔 단도를 알았지? 그녀는 험한 욕설을 중얼거리면서 허리를 굽혀서 칼을 꺼내 타일 위로 던져 버렸다. 그는 다시 무릎을 굽혔다. 넓은 어깨가 더욱 벌어져 보였다. 검은 머리칼이 마치 비단결처럼 그의 이마에 흘러내렸다. 엘렌은 그런 것을 눈여겨보고 있는 자신을 속으로 욕했다. 그는 일어서더니 또 손을 내밀었다. “다리에 매어 놓은 것도.”
제기랄! 엘렌은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두 손을 불끈 쥐고 욕설을 퍼부었다. 요란한 고함 소리와 발악에 하인들은 모두 뒤로 물러났지만 조프리는 물러나지 않았다. 그녀는 스커트를 홱 걷어올리고 작은 단도에 손을 뻗었다. 그의 머리통에 대고 날릴 작정이었지만 그의 표정에 멈칫하고 말았다.
조프리는 그녀의 다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너무 놀라 멍하니 그를 보았다. 이제까지 아무도 그런 눈길로 바라본 적이 없었다. 조프리의 눈빛이 어둡고 몽롱했다. 제 아무리 머리 좋은 학자라도 어리둥절한 모양이었다. 엘렌은 몸이 굳었다. 뼈마디 속으로 열기가 번져 나가고 뼈가 녹아드는 것 같았다. 그녀는 한참 동안 단도 손잡이에 손을 얹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육체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조프리의 눈앞에 보이는 살갗 구석구석까지 예민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스커트를 높이 치켜올리고 허벅지를 씰룩거려서 그가 바라보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자신을 구경시키고 조프리의 찬탄을 받고 싶었다. 그 이상의 것도.....
목안이 바짝 말라붙었다. 그녀는 마른침을 삼키면서 바보 같은 생각을 떨쳐버리고 얼른 다른 데로 관심을 돌렸다. 갑자기 추워지면서 몸이 떨렸다. 그녀는 칼을 빼서 바닥에 팽개쳤다. 조프리는 숨을 고르려는 듯 잠깐 뜸을 들이다가 칼을 주워 들었다.
“자, 갑시다, 방으로 안내하겠소.” 거칠고 허스키한 조프리의 목소리를 듣자 온몸에 따스한 파도가 밀려드는 것 같았다. 그러자 그가 안내하려는 방이 침실이라는 것이 비로소 기억났다. 거북한 느낌과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등을 타고 흘렀다. 조프리에게 살갗을 보이고 싶다는 묘한 충동과 비슷한 종류의 감정이었다.
“우리는 이만 실례할게요.” 조프리가 말하자 늑대는 코웃음을 쳤지만 마리온은 상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묵었던 그 방이에요, 조프리.” 두 사람이 걸어가는데 마리온이 소리쳤다. 엘렌은 그녀를 노려보았다. 마리온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남편의 이름이 못마땅했다. 아니, 너무 쉽게 비어져 나오는 상냥한 미소가 못마땅했다.
조프리와 함께 가파른 계단을 오르던 그녀는 그의 칼집을 바라보면서 눈을 빛냈다. 그의 긴 다리의 움직임에 따라 칼집도 흔들렸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머리칼로 얼굴을 가린 채 그의 뒤에서 올라갔다. 그리고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면서 그의 단단한 근육의 움직임을 보던 눈길을,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는 칼 손잡이에 주었다. 조프리는 영리하고 재빠르지만 그녀 역시 재빠른 데는 선수였다.
기습 공격이란 실로 강력한 무기가 아니던가.